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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황혼의 양지. 장편소설 (완결)
작가: 백화 문상희
낭독: 김인희 소설가(댕댕이와 책을..)유투브 운영자
*카페에 쓴 소설은 여건상 10부로 집필 하였습니다.
*동영상은 5부까지 함축해서 녹화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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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kD7t1k7d_cQ?si=QFfPT2h-bZS4r5Y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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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역전의 용사들
오늘은 60대 중반, 홀아비 김정호의 생일이다.
아내는 이미 10년 전, 정호 곁을 떠났다.
생일날 아내가 끓어준 미역국이 생각났다.
육십 대 중반까지 살아왔지만 마누라 죽고부터
아내가 끓여준 그 미역국이 너무도 그리웠다.
그 후로 정호는 생일날에 미역국을 먹어본 일이 없다.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어제 시장에서 사 온 김치, 멸치볶음, 마늘쫑이 전부였다.
어젯밤 끓여둔 콩나물 국에 대충 밥을 말아먹었다.
축하 문자도 전화도 오지 않아 섭섭한 마음 이전에
외로움이 밀려왔다.
혹시라도 명수의 전화라도 올까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빈 가방 둘러메고 무작정 집을 나와 사가정역에서
전철에 올랐다.
7호선을 타고 군자역에 내려 5호선으로 갈아타고
종로3가역에 내려 탑골공원으로 갔다.
오늘도 장기판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온
탑골공원 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또한 수많은 세월 동안 다녔어도,
내성적인 성격 탓에 정호는 친구하나 만들지 못했다.
새벽에 비가 온 탓인지 오늘은 사람도 별로 없었고
공원 한 바퀴를 휘익 둘러봐도 재미가 없어
구석지 빈자리에 앉아 하늘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에 번지는 먼저 간 아내의 얼굴,
생일인 오늘따라 더욱 그리움에 사무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순간이었다,
"아저씨 ~! 뭐 하세요?"
하는 소리에 정호는 화들짝 놀랐다.
머뭇머뭇 고개를 돌려 옷깃으로 눈물을 훔쳤다.
"아~ 그냥이요!"
아저씨 참 멋있게 늙어가시네요!
"아저씨 박카스 한병 드실래요?"
제가 말친구 해드릴까요?"
하며 다가오는 여인네가 있었다.
허락할 이유도, 권리도 없지만
여인네가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는 서대문에 사는 주은혜라고 해요!''
"무슨 슬픈 일이 있나 봐요?"
하며 아주머니는 접근을 시도했다.
"아니요!"
그냥 하늘을 보니 살아온 날들이
허망한 세월에 회한의 눈물이 났답니다!"
"아이구요 아저씨 무지하게 감성적이네요!"
ㆍㆍㆍㆍㆍ
정호는 이에 묵묵부답 먼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먼 산만 바라보았다.
"아이구 호호호
난 감성적인 사람이 좋더라!
제가 말동무해 드릴 테니 박카스 한병 팔아주세요
삼천 원이면 돼요!"
그제서야 운을 떼는 정호였다.
"아주머니는 곱게도 생겼는데
왜 이런 일을 하십니까?"
"아이구요 아저씨 저도 사연이 있답니다!"
허송세월 보내다가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이 나이에 여자가 뭘 해서 먹고 산답니까?"
"먼저 시작한 친구가 파고다 공원에 가면
친구도 만나고 또 돈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 전부터 쑥스럽지만 이렇게 박카스를
팔고 있답니다."
정호는 마지못해 주머니를 부스럭부스럭 뒤져
오천 원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 들었다.
"잔돈은 그냥 놔두시구려!"
"아이고 호호호..."
멋쟁이 아저씨는 역시나 뭔가가 틀려요!"
하며 뚜껑을 따서 입가에 들이밀었다.
박카스 한 병을 마시는 동안에도
주절주절 아주머니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저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이 짓을 하고 있지만 저도 사람이고 양심도 있답니다!
이다음에 만나면 제 이야기도 해 드릴게요!
그나저나 아저씨는 날마다 여기에 오시나요?"
"네에~!
가끔씩 무료해서 나온답니다!"
"아~! 그러시군요,
저도 평일에는 집에서 액세서리 구슬 꿰는
부업을 하구요 공휴일엔 여기에 온답니다!
"아~, 그래서 화려하고 예쁜 목걸이를 하셨군요!
"네, 그렇습니다.!
다음에 이 근처에서 또 뵙도록 할게요!"
하며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들었다.
"아저씨,
오늘 제가 오천 원 값어치는 했지요?"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그나저나 제가 성함은 알아야 이 근처에 와서
아저씨 이름을 불러 찾을 수가 있지요~!"
"네, 저는 정호, 김정호라고 합니다"
"이왕 이름도 알았으니 전화번호도 알려주세요!
해꽂이는 안 하는 사람이니 걱정 마세요!"
"오래전에 만든 것이라 꼬질꼬질하지만
제 명함 여기 있습니다!"
정호가 그렇게 말하자 명함을 유심히 쳐다보며
악수를 청한다.
박카스 아주머니는 정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두 손을 꼭 쥐고 흔들며
"정호 아저씨!
이다음에 또 만나기로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정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여인네가
손을 놓고 촘촘히 시야에서 사라진다.
몇 년 만에 잡아본 여인네 손길!
체온이 사라질까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정호는 또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임자 미안하구려!
임자 떠나고 처음으로 잡은 여인네 손이
꼬옥, 당신 손을 잡은 듯이 따뜻했소!"
정호는 허망한 마음으로 빈하늘에 넋을 놓았다.
집으로 돌아온 정호는 아직도 여인네의 체온이 남아있는 듯
눈을 감아도 떠도 여인네와 죽은 마누라의
얼굴이 교차해서 떠올랐다.
물론 상업적으로 접근한 여인네이지만
예전의 박카스 아줌마와는 여러 가지로 달랐다.
우선 젖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한 따뜻한 말투에
나와 같이 말 못 할 무슨 사연이 있는 듯이
수다 속에서도 눈동자에 비애가 담긴 모습이었다.
박카스 한 병과 오천 원을 맞바꾼 대화지만
마누라 떠난 후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일주일 내내 여인네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따르릉, 따르릉...
정호는 후다닥 전화를 받았다.
혹시나 박카스 파는 그 여인네일까 하고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어이, 정호 요즘 뭐 하며 지내나 궁금해서
전화를 했네!"
"어, 그래 명수 오랜만일세!"
그냥 집에 있는 게 무료해서 요즘은 종로에 간다네
자네도 심심하면 같이 가 보세나
자네는 집이 천호동이니까 군자에서 만나면 된다네"
"그래?
난 말로만 들었지 탑골공원에 가본 지가
수십 년이 넘었다네!"
"그래?
그렇다면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같이 가볼까?
"그러세 친구, 언제 어디서 만나면 되겠는가?"
그러면 점심 일찍 먹고 1시쯤에 군자역 안쪽
가판대에서 만나세!"
내성적인 성격에 일에 파묻혀 살다 보니
유일하게 전화를 주고받는 고향 친구인 최명수이다.
군자역 의자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는 정호였다.
그때, 등뒤에서 명수가 등짝을 툭툭 쳤다.
"정호, 오랜만일세!"
"아이고 반갑네 명수!"
"그래 자네 덕에 탑골공원 구경이나 해봄세!"
전철을 자주 이용한 덕분에
정호는 자리가 헐렁한 곳으로 안내를 했다.
자리에 앉으며 명수가 하는 말,
"자네는 예나 지금이나 길잡이 전문이구먼 그래!"
"허허 나야뭐 하릴없이 돌아다니니까 그렇지!"
"그렇구먼 그래!
나는 맨날 집 앞 공원이나 나가서 길을 모른다네!"
"맞아, 자네는 옛날에도 길치였었지 허허허"
"오랜만에 만났으니 막걸리 한잔 대접하겠네!"
종로 3가에 내려 골목으로 들어가니 낮시간이지만
포장마차 노점엔 웅성웅성 벌써 만원이었다.
"저기 구석지에 자리가 하나 비었구먼,
저리로 가세나 명수!"
"그래, 정호 자네 덕분에 막걸리 한잔 해보세!"
"아주머니 여기요!
이 집에서 잘하는 골뱅이무침 2인분 하고
우선 막걸리부터 한 병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캬~!
자네하고 술잔 부딪는 게 언제인가 모르겠구먼"
말수가 적은 정호도 명수를 만나게 되면 말문이 트였다.
술잔을 몇 배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명수가 게걸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친구야~!
야외 포장마차에 먹어보는 낮술도 맛이 기가 막히구먼
이 골뱅이 무침도 참 오랜만에 먹어보는데 맛있네 그려!
자네 덕분에 오늘 내 입이 호강을 하네 고마우이!"
"음식이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일세!"
사람들이 계속 밀려와서 민망한 마음에
일인 일병씩 마시고 안주도 설거지하듯
깨끗이 비우고 뒷사람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머니 잘 먹고 갑니다!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
"네, 고맙습니다 이다음에도 꼭 오세요 ~!"
"여기가 탑골공원 후문일세 한 바퀴 휙 돌아보세나!"
눈이 휘둥그레진 명수,
"야~! 사람이 이렇게 많아?
나도 이제 노인축에 들지만 대단하구먼 그래!"
"그렇다네, 여기에 있는 분들이 춥고 배고픈 시절
중동에서 월남에서 총을 들고 또 삽자루 들고
피땀 흘리며 배곯아가면서 한 푼 두 푼 저축해서
이나라 부강국가를 만든 역전의 용사들이 아닌가!"
"그래, 그렇지!
자네와 나도 그중에 한 명이 아닌가!"
정호는 자주 와서 정이 든 그 자리로 안내를 했다.
"명수, 자네는 바둑이나 장기를 잘 두는가?"
"아닐세, 그저 심심할 때 배워둔 초보 실력이지"
"저기 저쪽에 돈내기 바둑과 장기 두는 사람이
전문 타짜라네!
행여, 저기서 절대로 바둑이나 장기를 두지 말게나!
져주는 척하며, 질질 끌다가 판이 끝날 때쯤 이겨서
저 노인네들 주머니 돈 끓어서 먹고산다네~!"
"저기 구석지에 앉아 얘기나 하세!"
이것저것 안부와 고향예기 등
한참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오늘은 안 오시나 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며 다시 돌아와 봤답니다!"
"아, 네~!
그러시군요 여기로 앉으세요!"
"어이 명수, 인사하게나
여기 말동무해 주는 박카스 아주머니라네"
"네~안녕하세요!
"정호와 같은 고향 친구인 최명수입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주은혜입니다!"
하고 서로의 첫인사가 오가고 정호가 운을 떼었다.
"오늘은 둘이니 박카스 두병 주세요!"
하고 정호는 주머니에서 만원권 지폐를 건넸다.
"아저씨 오늘은 두병에 오천원 만 받을게요,
저번에 오천원 주셨으니 저도 양심은 있답니다!
"네~! 그러시군요
그나저나 오늘은 박카스 많이 파셨나요?"
"아니요!
경제가 안 좋아서 그런지 몰라도
아저씨 둘 포함해서 이제 다섯 개 팔았답니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지나고
불쑥 명수가 나서서 한마디를 건넸다.
"아주머니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 아닙니까?"
내일이 일요일인데 춘천 여행이나 가볼까요?
춘천에 친구가 닭갈비 가게를 한답니다."
정호야 자네도 알지!
옛날 윗동네 살던 골통 이주성이 말일세!"
"그래, 주성이가 닭갈비집 한다고 그랬었지!"
"아주머니 어때요?
하루 박카스 파는 돈은 드릴게요!
오늘은 술과 박카스 까지 정호 이 친구에게
얻어먹었으니 다음엔 제가 한턱 쏠게요!"
하며 군인 연금 많이 받는 자랑에다 너스레를 떨었다.
"그 대신 우리가 둘이니 아주머니도 친구를 한 명
데리고 오셔야 합니다!"
"한참을 뜸을 들이다 아주머니가 대답을 했다.
"네~! 그래보지요!
친구에게 전화 좀 해볼게요!"
하며, 조금 떨어져서 한참 전화를 한 후 되돌아왔다.
"친구가 나오겠다고 대답을 했어요!
솔직히 생계가 달린 문제라 장사를 접고 가야 하니
그냥 따라갈 수도 없고
어차피 저는 하루에 박카스 열댓 병 팔아요!
그 친구도 경마장에서 박카스 팔아서 먹고 산답니다!
그러니 염치없지만 용돈 좀 푸짐하게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OK 대답에 신명이 난 명수의 이어진 말이다.
"그럼, 내일 어디서 만나면 될까요?"
이번에는 길을 잘 아는 정호가 나섰다.
"어차피 춘천을 갈려면 청량리역으로 가야 합니다!
너무 이른 시간도 그러니 열 시쯤 만날까요?"
"네~! 좋습니다!"
하고 은혜가 대답을 했다.
그렇게 합의를 보고 일어나서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명수와 정호는 전철로 향했다.
ㅡㅡㅡㅡㅡㅡㅡ
(2부) 청춘열차
그렇게 만난 네 사람,
경춘선 청춘열차에 올랐다.
컴퓨터 잘하는 명수가 이미 기차표 예약을 했으니
열차에 올라 지정 좌석에 앉아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육군 준위 출신 최명수라고 합니다!
군대생활만 35년을 해서리
제가 사회물정에 좀 어둡습니다
그러니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정호도 오랜만에 나온 나들이에 기분이 들떠서
명수가 한 말에 피드백으로 보충 설명을 했다.
"에~, 여자분이라 군대를 안 가보셨을 테니
제가 보충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육군 원사라면 자랑을 할 만도 합니다!
부사관으로서는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계급이고
장교로 치면 하늘에 별따기라는 장군급입니다!"
이어서 박카스 아주머니 은혜가 받아쳤다.
"네 그러시군요,
저는 어제 말씀드렸듯이 주은혜입니다!"
"은혜씨는 어제 탑골공원에서 만났지만
이름도 곱고 마음씨도 참 고울 것 같아요!"
하면서 명수는 화색으로 반긴다.
"아이고 그렇게 이쁘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라며 옆에 있는 친구인 춘희를 소개했다
춘희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친구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성춘희라고 합니다!
저도 사실은 탑골공원은 은혜에게 물려주고
지금은 과천 경마장에서 박카스를 팔고 있답니다"
사십대 같이 보이는 춘희가 인사를 하자
입담 좋은 최명수의 달변이 이어졌다.
"어쩐지 예쁜 얼굴에, 옷차림에, 이름까지도
소설책에 나오는 성춘향 아씨마님을 꼭 빼어 닮았습니다 그려!"
"아이구요,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낙하산도 없는데 떨어지면 죽습니다!"
하고. 기분이 업된 춘희가 느스레를 늘어놓았다.
"은혜씨는 어제 봤다지만 정호 자네도 인사를 해야지!"
"네, 저는 김정호입니다!
오늘 연금 빵빵한 명수가 한턱 쏜다고 해서
이렇게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지켜보던 춘희가 나서서 한마디를 거들었다
"호호호 고맙습니다!"
이렇게 좋은 봄 날씨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또다시 바통을 받은 명수,
"정호와 저는 오팔년 멍멍이 띠입니다!
여자분께 나이를 물으면 실례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대충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아이구요 도진개진입니다!
저들보다 몇 살 위니 그냥 오빠라고 부를게요!"
하며 춘희가 말을 되받아쳤다.
청춘열차는 전철과 달리 정차역도 적고
또 속도도 빨라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있을 때
벌써 남춘천 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남춘천역을 빠져나오자 커다란 아치형 육교에서
여인네 둘이서 즐거운 합창을 했다.
"와~ 멋지네요!
어릴 때 수학여행 와보고 처음이네요 호호호!"
춘희는 기분이 들떠서 간드러지게 웃었다.
길치인 명수가 고항 춘천 길은 자신이 있다는 듯이
저만치 앞서가며 손짓을 했다.
"저기 보이는 저 집이 친구네 가게입니다!"
하고 앞서가며 안내를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게는 조용했다.
"주인장 있소이까?"
명수의 장난스러운 일갈에 놀란 듯,
주방에서 일하다가 얼굴을 돌리는 고주성 사장!
"어!
너 명수 아니냐?"
어쩐 일로 전화도 없이 찾아왔냐?
여하튼 반갑다 반가워 친구야!"
"그래 주성아, 여기 정호도 왔는데 국민학교만
같이 다니고 서울로 전학을 가서 잘 모르겠지만
잘 기억하면 알 거다!"
"그래그래 기억이 난다!
저기 아랫마을 외딴집에 살던 김정호 맞지?
그래 반갑다 반가워!"
그렇게 춘천 출신 친구들의 인사가 오가고
주인장 고주성이 인심을 쓰듯이
"닭갈비는 내가 만드는 거니까 네 명 4인분은
무상으로 줄 테니 음식을 추가한 것이나
나머지 술값은 내고 가거라~!"
"OK, 좋지 좋아!
역시 고향에 오니 춘천 친구 인심이 최고네 최고!"
그렇게 테이블에 음식이 차려졌고
주인장 주성이는 맛있게 드십시오!
하고 언제나처럼 서비스맨쉽의 인사를 했다
'아참, 주사장 서로 인사나 나누세!
여기는 주은혜 씨고 이쪽은 성추희씨라네!"
"네, 반갑습니다 다음에도 자주 놀러 오세요~!"
은혜와 춘희도 반갑다는 인사가 오가고 난 후
닭갈비를 안주로 막걸리 술잔에 건배를 외쳤다.
내숭을 떨던 춘희와 은혜도 차츰 술기운이 올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장단을 맞췄다.
자리의 리더는 역시 군바리 출신에 입담 걸걸한
명수가 도맡아 했다.
계산을 끝내자 주인장 주성이가 하는 말이었다.
"어이 명수 친구,
우리 가게와 춘천시가 연동해서 운영하는
관광버스로 춘천 명성지를 드라이브하는 행사가 있다네!
그러니 내가 표 넉장을 줄 테니
이왕 온 거 고향구경도 하고 가게나!"
"땡큐지 땡큐!"
아까 닭갈비는 꽁으로 먹었으니 2인분 씩 네 개
포장해서 주게나 이따가 가져갈게~!"
명수가 카드를 내밀며 또 거드름을 피웠다.
얼큰한 기분으로 나선 춘천호반 관광코스!
버스에서 둘, 둘 짝을 맞춰 앉아서 호들갑이었다.
명수는 주머니에서 돈봉투 두 개를 꺼내어
옆자리 춘희에게 건네고 찡끗하고 윙크까지 하며
팔짱을 끼었다.
"다음에 시간 내서 또 오도록 합시다!"
라며, 청춘 작업을 시작했다
"네, 고맙습니다 오빠~!"
춘희의 대답 뒤로 정호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명수야 너 오늘 오버하는 거 아니냐?"
"걱정 마라 친구야!
돈은 써라고 있는 것이고 담달이면 또 연금이
나오는데 무슨 걱정이냐?"
이에 아주머니들은 장단을 맞추느라
호호호, 웃으며 애교를 떨었다.
특히나 춘희는 명수의 팔짱을 끼었고 착 달라붙어
호구를 만났다 싶은지 웃음꽃을 피웠다.
관광버스는 약 한시간 춘천호반을 돌아서 투어를 마쳤다.
네명은 다시 주성이 가게에 들렸고
명수가 주문해 두었던 닭갈비 포장 박스를 한개씩 들었다.
"사장님 잘먹고 갑니다!"
은혜와 춘희는 그렇게 인사를 하였다.
뒤이어 주성이의 대답도 이어졌다.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들려주세요!"
주성이 가게는 서로의 작별 인사로 잠시 분잡했다
네명은 기차시간에 맞추어 남춘천 역으로 향했다.
기차에 오른 네명은 좌석에 앉자마자 술기운에 또 피곤함에
모두가 잠이들었다.
종착역 도착을 알리는 방송 소리에 그때서야
모두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청량리 역에 도착해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후
닭갈비 박스 한 개씩을 들고 아쉬운 이별과 함께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ㅡㅡㅡㅡㅡㅡㅡ
(3부) 뜻밖의 사고
그렇게 헤어진 뒷날 아침이었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정호네 집 전화벨이 올렸다.
휴대폰은 어제 바닥에 떨어트려 액정이 깨져서
전원이 꺼졌는지 오랜만에 집전화벨이
울린것이다.
전화가 올데도 없는데 혹시나 반가운 은혜의
전화가 아닐까 생각하며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여보세요!"
그러나 엉뚱한 전화에 기대가 일순간 무너졌다.
"여기는 하늘대학교 병원입니다!
김정호 씨 맞으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주 은혜라는 분이 되퇴부 골절로 입원을 했는데
김정호 님을 보호자로 올려 전화번호를
기재해서 연락드렸습니다
빨리 오셔서 입원 수속을 좀 밟아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
전화를 끊고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그래?
어제 잘 먹었다고 인사도 하고 갔는데 말이다!"
혼자서 중얼중얼하며 대충 옷을 갈아입고
시내 하늘대학 병원으로 길을 재촉했다.
헐레벌떡 병원에 도착해서 은혜에게
자초지종을 들어야 하겠기에 병원에서 전해
들은데로 먼저 본관 505호 입원실로 들어섰다.
2인실 침상이라 은혜의 얼굴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은혜 씨!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제 잘 들어가신 거로 아는데요?"
은혜는 민망한 얼굴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네, 제가 어제 잘 못 먹는 술을 먹은 데다가
저희 집이 산비탈이라 계단이 많아서
닭갈비 박스를 들고 뒤뚱거리며 올라가다가
계단에서 그만 굴렀답니다
정신도 없고 너무 아파서 울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119에 전화를 해주셔서
이 병원으로 오게 되었구요
의사 선생님 말씀이 다리뼈가 골절되었다고 하네요!"
"아이구요 큰일 날뻔했군요!
그래 다른 데는 괜찮겠으세요?"
"네, 다행히 다른 데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저는 자식도 없고 혼자서 살다 보니
딱히 연락할 곳도 또 아는 사람도 없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입원 서류에 정호씨를 보호자로
기재하고 기푸스와 치료를 받았답니다
어쨌거나 무례를 범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셨군요 어쩔 수 없지요...
그나저나 저보다 돈 많은 명수에게 연락을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아니에요 정호씨 별말씀을요!
저는 명수씨보다 정호씨가 친근하고 소박하셔서
더 정감이 간답니다!"
"아이구요 저같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과대평가
하셨습니다."
"조금 전에 춘희에게 전화가 왔었는데요
춘희는 명수 아저씨 하고 애인 하기로 했다고 하네요!
춘희는 이쁘고 여우 같은 짓을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명수 아저씨가 사귀자고 했답니다 둘이는 궁합이
잘 맞는다면서 저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답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하고 대화가 끝나자
"일단 내려가서 입원 서류에 싸인하고 올게요!"
하고 아까 전화를 받은 내용이 생각나서
얼른 원무과로 내려가 입원수속을 마저 밟았다.
담당 주치의 말로는
되퇴부 중간 부분에 골절이 되어 움직이면
뼈가 빨리 붙을 수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다리 전체에 기푸스를 했다고 전해주며
앞으로 3주간은 절대로 움직이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나갔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정호는 앞이 캄캄했다.
부부도 아닌 내가 어찌 대소변을 받아낸단 말인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은혜 씨, 제가 남자라서 여러 가지로 불편할 텐데
주변에서 간호를 해줄 여자분이 없을까요?"
"네~! 없답니다,
옛날에 알던 사람들은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하고
살다 보니 지금은 연락처도 모른답니다!
안 그래도 또 다른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으나
그들도 가정이 있고 해서 그런지 소식이 없답니다"
은혜나 정호도 참 난감한 일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정호 씨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간호사님 말로는 소변줄은 그대로 두고
소변주머니가 차면 주머니만 바꾸라 하셨구요
기저귀는 간호조무사가 갈아주신다고 했답니다!
그 대신 간호조무사 비용은 입원기간에 하루
삼만 원씩 추가된다고 그러셨어요!"
정호는 난감해서 고개를 숙인 채 듣고만 있다.
그렇게 식사는 환자식을 함께 먹으며
잠은 병상 간이침대에서 자고 기저귀를 갈 때는
민망해서 밖으로 나와 기다리다 간호조무사가
나오면 그때 들어가곤 했다.
"정호씨 민망한 꼴 보여드려 정말 미안해요!"
"아닙니다 은혜씨!
춘천에 같이 가자고 한 우리도 책임이 있으니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그렇게 병간을 하다 보니 조금씩 정이 들어
대화체도 가족처럼 격의가 없어졌고 그러다 보니
간호사나 주변 사람들도 부부로 알고 있었다.
3주 후 퇴원 날짜가 가까워질 때
병원 원무과에서 구내전화로 호출이 왔다.
"병원비 내일 계산하시고 퇴원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통원 예약날짜 받아서 2주 후
기푸스 풀어야 하니 꼭 보호자와 함께 오세요!"
전화를 끊고 얼마나 나왔을까 하는 궁금증을 품은 채
원무과 직원의 계산서를 받아 들고 보니
입원비와 치료가 약 삼백 오십만원이 나왔다.
참으로 황망한 일이었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보호자가 되었으나
치료비를 대신 내줄 수 있는 처지도 못되고
정말로 난감한 일에 처했다.
이 걱정 저 걱정을 하면서 입원실로 올라와
은혜에게 계산서를 건넸다.
"은혜 씨 병원비가 꽤나 많이 나왔는데
한번 보실래요?"
정호는 죄지은 사람처럼 맥 풀린 모습으로
의자에 앉았다."
"아이구요 제 생각보다 병원비가 많이 나왔네요!
제가 지금 가진돈이 오십만 원 정도밖에 없는데
어쩌면 좋을까요?
제가 예전에 카드 값을 못 갚아 연체가 되어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혀 지금은 카드를
쓸 수도 없으니 정말 큰일이네요!"
묵묵히 지켜보던 정호도 참 난감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시군요 어쩌면 좋을까요?"
"그래도 제가 실비보험은 들어놨답니다!
일단 병원비 해결을 하고 나서 그 영수증을
제출해야 보험금을 받을 텐데 말입니다!"
"아이구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정호도 일말의 희망이 보이자 반색을 했다.
"춘희는 저번달에 막내딸 대학교 입학등록금
내야 하는데 돈이 모자란다고 제게 이백만 원만
빌려달라고 전화가 왔었는데 제가 못 빌려줬으니
춘희도 돈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요!"
정호 역시 맥 풀리는 말로 대답을 이어갔다.
"네~! 그러시군요"
"저... 정호씨,
죄송하지만 명수 씨에게 부탁 좀 하면 안 될까요?"
"글쎄요,
아마 씨알도 안 먹히는 이야기 일 겁니다!
그래도 제가 전화는 해보겠습니다 만,
명수가 매달 연금을 받으니 가끔 술은 산답니다!
특히 여자들에겐 더 잘 사주지요!
"네, 그건 그런 것 같아요"
하고 은혜도 맞장구를 쳤다.
"예전에 제가 사는 월세방 재계약을 할 때
집주인이 보증금 오백을 올려주든지 아니면
방을 빼달라고 해서 명수에게 부탁한 적이 있답니다!
그런데 명수가 하는 말이 연금 받아서 겨우겨우
먹고는 사는데
저축을 해놓은 돈은 없다고 그랬답니다!"
"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리고 오래된 명수네 집을 수리한다고 할 때
목돈이 들어갔는데 그 돈도 은행에 대출받아서
했다고 하니 분명히 어려울 것입니다!"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할 말을 잃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은혜 씨가 하는 말,
"어떡하든 병원비를 계산하고 실비보험을
타면 해결이 되는데 참 난감하네요!"
곰곰이 생각하던 정호가 작심을 한 듯 말을 이어갔다.
"할 수 없이 제 집주인에게 전화를 드려서
월세 보증금을 담보로 돈을 빌려달라고 해볼게요!
"은혜 씨 전화 좀 빌려주세요!
어제 휴대폰 액정이 깨져서 집에 두고 왔답니다"
"네~! 휴대폰 여기 있어요"
밖으로 나온 정호는 병원구내 한적한 공원 벤치로
가서 집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
지하방에 사는 김정호입니다!"
"네, 무슨 일인가요?"
"제가 부탁드릴 말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혼자 사는 여동생이 다리 골정상을 입어서
3주간 기푸스를 하고 입원을 했답니다!
딱한 여동생 처지를 생각해서 제가 병원비라도
내줘야 할 형편입니다!
그런데 제가 병간을 하다 보니 막노동 일도 못 나가
돈이 없어서 전화로 이렇게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사장님은 슈퍼를 하시니까 여윳돈이 있을 것 같아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자는 매달 월세와 함께 드리구요
원금은 벌어서 꼭 갚을 테니 부탁드립니다!"
"아~ 그래요 김 씨,
얼마가 필요하다고 했나요?"
"네~! 삼백만 원입니다!"
"네, 알았어요,
그 대신 보증금만 믿지 말고 약속은 꼭 지키세요!
"네, 사장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를 믿어주세요!"
"알았으니 계좌번호를 불러주세요!
그리고 이자는 5부로 매달 십오만 원씩 월세와 함께
꼭 넣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계좌번호를 불러주고 전화를 끊었지만
기분은 기쁨 반 서글픔 반이었다.
슈퍼를 하는 오십대 집주인은 돈 좀 있다고
언제나 고자세로 거들먹거렸다.
그런들 어찌하겠는가 이것이 세상 이치 아닌가!
뒷날 은혜 씨에게 있는 오십만원과
은행으로 가서 집주인이 보내온 돈을 찾아
그렇게 병원비를 원무과에 수납했다.
다시 입원실로 돌아와 그간의 자초지종 사연을
은혜에게 전했다.
은혜는 고마움에 흐느끼며 눈물을 줄줄 흘렀다.
"흑흑흑, 정호씨!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해요!"
"아니 무슨 말씀을요
우리 때문에 일어난 사고이니 우리도 책임이 있지요!"
한참을 울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하는 말,
"그리고 춘희와 명수씨도 왔다 갔답니다!
조금 전 정호씨 은행에 갔을 때 꽃과 음료수를
사들고 왔다가 바쁜 일이 있다고 먼저 갔답니다!
세분이 이렇게 신경을 써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라며 연신 감사 인사를 연발했다.
ㅡㅡㅡㅡㅡㅡㅡ
(4부) 기구한 삶의 현장
정호는 3주째 일도 못 나가고
또 병원 침상아래 간이침대에서 큰 키에다
꼬부린 채 잠을 자다 보니 컨디션이 좋지 않았으나
그래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입원 마지막 날 주치의가 오셨다.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약 처방전 내용과
복용 방법, 주의사항 등을 알려주고 나갔다.
오후 점심시간이 지나서 처방전이 나왔다는
통보를 받고 은혜와 정호는 로비로 내려왔다.
은혜는 이제 살짝 부축만 해주면 목발에 의지해서
어느 정도 걸을 수는 있었다.
택시 정류장으로 가던 길에 잠시 멈추어 선 은혜는
오랜만에 걸어서 그런지 힘들어했다.
"정호씨 저기 벤치에 좀 앉았다 가도록 해요!"
"그래요 은혜씨!"
둘이는 나란히 벤치에 앉아 그간 병원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주고받았다.
"정호씨, 저 목이 말라서 물을 좀 마셨으면 해요!"
"아, 그렇군요! 여기 잠깐만 앉아 계세요
구내 편의점에 가서 사 올게요!"
이제는 둘 다 가족 같은 정으로 그렇게 발전했다.
이것저것 사들고 돌아온 정호는 은혜에게
물과 음료수를 건네주고 정호도 음료수 한 병을
따 가지고 마시면서 한동안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은혜씨,
세상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네요!"
"네~?
무슨 말씀 이신가요?
한참을 하늘에 시선을 고정하던 정호의 눈에
눈물이 고였고 목소리마저 약간 울먹였다.
"사실은 오래전에 이 병원에서 마누라가
위암 수술을 하고 퇴원 후 저세상으로 떠났답니다
그때는 위암 환자라 음료수 한병도 못 사줬지요
여기에 앉아 있다 보니 옛날 그 생각이 납니다."
한참 동안 서로가 침묵의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은혜도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동병상련의 눈물을 훔쳤다.
"은혜씨 괜한 말을 했네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정호씨,
그런 아픈 사연이 있었군요!
저는 정호씨가 전혀 내색을 안 해서 몰랐답니다
지금이라도 위로의 말씀드릴게요!"
라며 정호의 손을 꼬옥 잡는다.
한참이 지났을까 은혜가 꼭 잡은 손을 흔들며
"정호씨 늦었는데 이제 집으로 가요!
"아, 그렇군요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천천히 일어서 볼까요!"
하고 은혜를 부축해서 택시 정류장으로 갔다.
아직은 퇴근시간이 아니라 그런지,
아니면 불경기라 그런지
정류장에 택시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정호는 택시 트렁크에 노크를 하고
장기간 입원을 한터라 이것저것 두 사람 몫의
보따리가 많아 짐을 드링크에 넣은 후 문을 닫았다.
"기사 아저씨, 이분이 다리가 좀 불편해요!
그러니 천천히 탈 테니까 양해 부탁드립니다!"
"네~! 그러세요!"
친절한 기사님의 말을 들으며 택시에 다가갔다.
"은혜씨 목발은 내게 주시고 내가 부축을 할 테니
먼저 앉아보세요!"
그리고 반대편으로 가서 팔을 부축해 당겨서
겨우 제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정호는 이어서 앞 좌석에 앉았다.
"기사 아저씨 감사합니다, 이 주소대로 좀 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하고 택시기사는 내비게이션을 조작을 한 후
그렇게 택시는 은혜가 얘기한 주소대로
독립문 근처 행촌동으로 향했다.
큰 도로에서 골목길로 접어들어서도 한참을 올라갔다.
꼬불꼬불 언덕길에서 택시기사가 하는 말,
"가르쳐주신 주소대로는 계단이 있어서
더 이상 못 가겠네요!
"네, 그렇군요,
그러면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하고 카드를 내밀어 계산을 마치자 친절한 기사님이
트렁크에 짐을 내려놓고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세요!
"네~, 고맙습니다 기사님!
정호는 그렇게 택시를 돌려보낸 후 계단을 보니
너무 경사가 커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은혜 씨 계단이 있는데 올라갈 수 있겠어요?"
"네, 맨날 다니던 길이라 익숙하고 또
목발이 있어서 갈 수는 있을 거예요!"
그렇게 몇 발짝 내딛고 계단 때문에 바로 휘청거렸다.
정호는 얼른 부축을 하며
*아이구요 안 되겠어요 그 자리 앉아 계셔요!
내가 짐과 목발부터 저 꼭대기에 가져다 놓고
다시 내려와서 제가 업고 갈게요
그래도 제가 촌놈이라 힘은 좋답니다!"
은혜는 계면쩍어하면서
"네, 죄송합니다!"를 연발이다.
정호는 짐과 목발을 언덕에 두고 다시 내려왔다.
"자, 내가 한 계단 내려가서 업어볼 테니
천천히 기대면서 업혀보세요!"
"아이구요 힘들지 않겠어요?"
하면서 멋쩍은 모습으로 그렇게 업혔다.
가벼운 여자 몸무게라 힘들지는 않았지만
다친 다리를 잡을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은혜의
엉덩이를 잡았다.
물컹하는 느낌에 정호도 움찔했다.
여자 엉덩이를 잡은 데다 젖가슴이 등짝에
찰싹 달라붙어 야릇한 느낌으로 전해왔다.
한 계단 한 계단 겨우 끝까지 올라와서
"휴~!
아니, 여기서 굴렀으니 안 죽은 게 천만다행입니다!
어쨌거나 여기 앉아서 잠시 쉬었다 갑시다!"
"네, 정호씨 힘드셨지요?
고생시켜 드려서 미안해요!"
"아이구요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계단 끝에서 둘이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때, 은혜의 가방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같다 드릴게요"
하고 정호는 재빨리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은혜에게 들이밀었다.
"여보세요!
그래, 너 오늘 퇴원했다면서!"
"그래 춘희야!
여러 가지로 신경 써줘서 고마워~!
이제 정호씨와 집에 거의 다 왔단다."
그래 너는 지금 어디에 있냐?"
"응 병원에 가니까 간호사가 퇴원했다고 그래서
지금은 명수씨랑 경복궁 밤 나들이 나왔어!
여하튼 퇴원 후에도 몸관리 잘해라~!"
"그래 고마워 춘희야 명수 씨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해줘!"
그렇게 전화를 끊고 정호에게 말을 건넸다.
"춘희에게 전화가 왔는데요 명수 씨랑 경복궁
데이트 나왔다고 그러네요!"
"참 팔자 좋은 사람들이네요!"
하고 시큰둥하며 시내 풍경을 둘러보았다.
또 그렇게 나란히 앉아 도심을 내려다보았다.
산꼭대기의 장점이라면 아래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게 아닐까 싶어 정호가 말을 건넸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시내를 훤히 내려다 보여
도심 야경 구경하기는 좋겠습니다"
"네, 맞아요 정호씨,
퇴근길이나 시장 다녀오면서 여기에 앉아서
쉬었다 갔답니다."
"그렇군요!,
사실 저도 예전에 관악구 봉천동 달동네에서
살았답니다!
그래서 그런지 꼭 옛날 살던 동네에 온 것 같습니다.
"아~!
정호씨도 이런 동네에 살아보셨군요,
"네, 맞아요 신혼 때부터 거기서 살았었구요
아들놈 군대 가서 사고로 죽은 후 그 흔적이
아른거려 답십리로 이사를 했구요
또 그 집에서 마누라가 병들어 저세상 가는 바람에
십여 년 전 면목동으로 이사를 왔지요
지금은 신내동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답니다."
"정호씨도 참 사연이 많은 인생이군요"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날이 어두워져서 둘이는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산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이층집
단독주택 반지하에 창고와 화장실이 딸린 단칸방이다.
"정호씨, 집이 누추하니 욕하지 마세요~!"
"아이구요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저도 예전에 이런 집에 살았었답니다."
키 큰 정호는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방이라
어찌어찌해서 부축을 해서 싱글침대에 눕히고 보니
벽 쪽에 시계는 벌써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은혜씨, 저녁 시간이라 밥을 해 먹어야 하니
냉장고를 좀 열어볼게요~!"
"네~! 집을 오래 비워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그러게요 반찬에 곰팡이가 다 슬었네요!
은혜씨, 3주씩이나 집을 비워서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제가 영천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좀 사 올게요!"
"네~! 고맙습니다, 제가 면목이 없네요!
그런데 이쪽 지리를 잘 알고 계시네요?
영천시장도 아시게요!"
"네, 지금은 연락처도 잊어버린 친구가
예전에 여기 천연동에 살아서 자주 왔었답니다!
"너무 늦기 전에 다녀올게요!"
"네~! 정호씨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알겠습니다~!"
정호는 대답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산길을 따라 터덜터덜 내려가는 정호,
"아무리 끼리끼리 만나는 게 인연이라지만
기구한 운명까지 어떻게 이리도 닮았을까!"
중얼중얼하며 풀 죽은 모습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나마 정호에겐 급여통장과 연계된
직불카드와 은행 잔고가 몇십만 원 남아있어
급한 대로 우선은 쓰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
(5부)황혼의 로맨스
시장에서 이것저것 과일과 야채를 사고
마트에 들러 반조리 찌갯거리와 막걸리 몇 병을
사들고 돌아온 정호가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급하게 저녁을 차릴려니 어쩔 수 없이
반조리 찌개와 햇반과 반찬을 좀 사 왔답니다!"
"아이구요 죄송해서 어쩌나요!"
반조리 음식이라 끓이기만 하니 요리가 되었고
다행히 전자렌지가 있어 햇반으로 밥상을 차렸다.
"은혜 씨, 그런 걱정 마시고 얼른 드세요
그래도 제가 홀아비라 음식은 곧잘 한답니다!"
"정호 씨, 고맙습니다! 솜씨가 좋으시네요!
오랜만에 집에서 음식을 먹으니 살 것 같아요!
그나저나 저도 자식도 형제도 없는 사람이니
이제부터 정호씨를 그냥 오빠라고 부를게요!"
은혜는 고마움을 표하며 그렇게 조금씩 다가왔다.
정호도 3주간 병간을 하면서 어느 정도 정이 들었고
사실 마음엔 있었지만 먹여 살릴 수도 없는
가난한 탓에 선뜻 좋다고 말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오빠, 사실은 내가 먹고살기 위해 비록 박카스를
팔았지만 탑골공원에서 만난 사람들과 일체
외부에서 만나는 일도 사귄 적도 없답니다!
이번일도 그렇지만 돈 많은 명수 아저씨 보다
저는 마음씨 너그러운 오빠가 훨씬 더 좋아요,
정말입니다!"
이렇게 정성으로 보살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지 모르겠네요!"
말수가 적은 정호는 고개만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은혜는 침대 머리맡에
비스듬히 기대고 정호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은혜는 과거지사 얘기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망설인 끝에 내가 왜 이 꼬락서니로 사는지를
대변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사실 오빠의 도움을 받고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저는 누구에도 말할 수 없는 사연이 있답니다!"
"네~! 그러시군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만,
우리 아버지는 해방 전 평양고보를 나와서 평양에
어엿한 신문사 편집 일을 하던 엘리트였답니다!
그러다 육이오 동란이 일어나고 징집이 되어
북한군으로 참전해서 전쟁 중에 국군 포로가 되었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다 북한 실정에
환멸을 느끼고 포로 귀순자로 한국에 남았답니다!
나중에 자유의 몸이 되었고 모진 고생 끝에
남쪽 땅의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했답니다!
육이오 동란이 끝나고 신문팔이 행상을 하다가
신문사 모집공고를 보고 옛날 이력을 써서 올려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한 신문사에 취직을 해서
저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 살아가던 중에
어느 날 어떻게 알았는지 북한에서 넘어온
간첩들이 꼭두새벽에 집으로 들이닥쳤답니다.
아버지를 구석지로 몰아넣고 윽박질렀답니다.
"당신은 평양에서 신문사 편집을 보던 사람이고
또 서울에서도 신문사 편집일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든 서울의 항공사진을 입수해서
한 달 내로 찾아올 테니 우리에게 넘겨주시오!
마무말 못 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그들이 던진 말,
"동무, 우리는 귀신도 못 잡는 지옥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야!
만약, 항공사진을 구해 넘기지 못한다면
당신과 마누라에 저 귀여운 새끼까지 죽여버리갔어,
"알간? 내 말 알아들었으면 똑바로 하라우!
하며 권총을 꺼내어 위협까지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 말로는 항공사진을 그들에게 전해주고
한 달이 지나서 국군 방첩대가 또 들이닥쳐
아버지를 끌고 갔고, 몇 달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시신을 가져가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하셨답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시장통에서 리어카와 사람을 사서
독립문 뒷산 꼭대기에 묻어드리고
아버지가 묻힌 동네에서 살고자 해서
그때부터 이동네로 이사 와서 사셨다고 합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그 이후 어머니도 방첩대에 끌려가서 간첩 방조죄로
모진 고문을 당하셨고
그 몸으로 저를 먹여 살리려고 행상을 하시다가
제가 열 살 되던 해 길거리에서 쓰러져 돌아가셨고
제가 너무 어려서 장례를 치를 수 없어
동사무소에서 나와 무연고자로 처리해 주셔서
홍제동 화장터로 모시고 가서 화장을 해서
산꼭대기 아버지 옆에 유골을 뿌려드리고
고아가 되어 거렁뱅이처럼 나라에서 주는
밀가루와 보급품을 타서 근근이 입에 풀칠해 가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동네에 살고 있답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이어가며 한동안 또 침묵이 흘렀다.
정호는 벽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은혜의 애절한 사연을 말없이 듣고 있었다.
은혜도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어갔다.
"사실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이왕 말이 나왔으니
못 들은 걸로 꼭 비밀을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네~! 은혜씨가 비밀이라고 하니 약속할게요!"
"네, 그럼 그 말 믿고 말씀드릴게요!
그 후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의류공장에
취직을 해서 살아가다가 스무 살 되던 해에
춘희의 꼬드김에 넘어가 부끄럽지만
다방레지로 취직을 했답니다!
다방생활을 하면서 돈을 좀 모아두면
춘희가 그것을 알고 윽박지르듯이 빌려가서
이자는커녕 원금도 겨우 받고는 했지요!"
은혜의 참담한 이야기에 정호는 고개를 끄덕여
애처롭다는 듯 네~! 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돈을 좀 모았으나 제가 거절을 못하는
성격을 알아챈 춘희의 솔깃한 이야기에 넘어갔지요!
춘희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광산에 투자를 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고 하여 적금까지 깨서 전재산을
투자했는데 그 뒤로 광산이 무너져 부도가 나서
홀딱 망하는 바람에 한순간에 저도 거지꼴이 됐답니다.
"네~! 그런 일도 있었군요 정말 안타깝네요!"
하고 정호는 자기가 당한 것처럼 안타까워했다.
이제 와서 얘기지만 춘희는 그 다방 마담으로
있었고 저는 춘희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또 하나의 비밀은 탑골공원에서 박카스 파는 것도
춘희가 꼬드겨서 시작을 했구요
춘희는 더 돈벌이가 잘된다는 경마장으로 가고
탑골공원을 제게 물려주면서 하는 말이
예전에 네게 빛 진 것 이걸로 퉁 치자고 그랬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당시 광산 사업도 거짓말
이었나 봐요 그래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친구이고
가식적이지만 오갈 곳 없는 저를 도와준 것도
사실이기에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고 있답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요 은혜씨,
친구사이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답니까?
제가 듣고만 있어도 울화통이 터집니다!
춘희 그 사람 다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속시원히 다 말할게요!
그러다가 그 다방에서 만난 훤칠한 사람이
부모님 재산 자랑을 하면서 앞으로 다방생활도,
고생도 안 해도 된다는 남자의 꼬드김에 또 넘어가서
비록 결혼식은 못했어도 혼인신고를 하고
이곳에서 신혼집을 꾸려서 오순도순 살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 부모님이 찾아왔답니다.
시부모 된다는 분이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서
"네 이년,
어디 다방레지 주제에 우리 아들을 꼬드겨서
출세길까지 막고 있어 이런 나쁜 년!
이렇게 해서 신혼은 거들이 나고 그 이후로는
남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여태껏 혼자서
이것저것 해가면서 살아왔지요!
휴~! 별스런 이야기를 다 했네요!
도움 주신 분에게 은혜를 갑지도 못하면서 말이에요
저도 이렇게 다치고 보니 한숨만 절로 나온답니다."
아무 말 없이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정호,
"네, 그렇군요 저도 사실 은혜씨 만큼이나
외로운 사람입니다! 라며 정호도 말을 건넸다
"나도 어엿한 직장 생활하면서 여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오순도순 신혼살림 살아가며
아들하나 낳고 잘 키웠으나 병원에서 잠깐
말씀드렸듯이,
하나뿐인 아들놈이 군입대해서 최전방에
배치되어 훈련 중에 옆의 전우가 밟은
지뢰가 터져서 같이 전사하고 말았지요!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아 살아가고 있을 때
이번에는 마누라가 급성위암에 걸려 병원에서
수술은 했으나 시름시름 앓다가 저세상 떠났구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저도 환갑이 지났답니다.
주거니 받거니 이렇게 눈물 젖은 이야기가 오가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이해해 가며 침대 밑에서
새우잠을 잘 지언정 서로가 따뜻한 마음이 통하여
부부처럼 그렇게 정이 들어갔다.
하루 이틀 병간호와 시장을 오가며
밥상을 차리느라 2주가 또 흘러갔다
"오빠, 그나저나 집에는 안 가봐도 되나요?
저 보살피느라 돈도 없을 텐데 어떡하면 좋아요!"
"걱정 마세요 돈은 또 나가서 벌면 되지요!
어차피 혼자 사는 방이라 문은 잠겄으니
주인집에 전화해서 집세와 이자만 부쳐주면 된답니다."
그렇게 병원에서 3주, 퇴원해서 2주, 도합
달포가 지나자
이제는 목발을 짚고 동네 골목길 나들이라도
할 수가 있었다
반은 부축으로 반은 목발로 그렇게 말이다.
오늘은 은혜가 나들이를 가자고 조른다.
"오빠 집에만 있으니 너무 답답해요!
또 다리도 저리고 근질거리고 말이에요!"
"그래요 은혜씨,
그러면 근처 공원이라도 갈까요?"
"네, 같이 가 주세요 오빠!
공원 가는 길은 좀 돌아가더라도 저쪽으로 가면
계단 없는 길이 있답니다!"
"그래요 은혜씨, 그럼 그리로 갑시다!"
오늘은 은혜의 옷차림이 산뜻한 꽃무늬 원피스로
차려입었고 병원에 있느라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드라이기로 머리도 예쁘게 장식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따라 더 화사하고 예쁘게 보였다
그렇게 도착한 서대문형무소 역사박물관 공원,
아버지가 옥살이하다 돌아가신 서대문형무소를
두 달 만에 와본다는 은주는 벤치에 앉아서
또 서러움에 형무소 쪽을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기를 한참을 지나서 들썩이던 어깨가
잠잠해졌다
정호도 울고 있는 은혜의 등만 토닥거리며
아무런 위로의 말도 할 수가 없어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고
햇빛 한 자락 내려와 은혜의 머리카락을 비출 때
햇살에 반짝이는 머리핀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핀으로 장식하기를 좋아했던 예전의 아내,
저 하늘 떠난 아내 얼굴이 은주와 겹쳐졌다.
정호는 넋을 잃고 그 시절 환상에 빠져있을 때,
"오빠, 너무너무 고마워요, "
정호는 화들짝 놀라며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와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으니 내일 병원에 가서
기푸스 풀고 오면서 보험사에 들려
실비보험금 찾아서 빌린 돈 갚아드릴게요!"
하면서 어느 정도 생기를 찾았다.
"은혜 씨, 생활비도 없을 텐데 안 주셔도 됩니다!
나는 이제 일하러 가면 돈을 벌 수가 있답니다"
"오빠, 이 은혜를 어떡하면 좋아요..."
정호는 또 어깨를 들썩이는 은혜를 감싸않고
토닥거리며 무언의 위로를 하고 있었다
"오빠, 이제는 한 식구같이 정이 들었네요!
어떡해요 오빠 없이는 이제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오빠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어요
이제는 제발 저를 떠나지 마세요!"
"그래요, 은혜 씨,
이제 다 나아서 다행입니다!"
독립문 공원 벤치에서 오붓하게 오가는 담소,
누가 봐도 참 다정한 부부로 보였다.
이튿날 예약한 시간에 맞춰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X레이 촬영 결과 뼈가 잘 아물었다며
주치의가 그동안 고생하셨다고 위로를 해주셨고
기푸스 해체와 치료도 무사히 끝났다.
둘은 원무과로 내려와 이번에는 병워비가 많지 않아
정호의 카드로 병원비 결재를 했다.
오던 길에 보험사 콜센터에 들려 병원비
계산서를 제출하고 보험금지급 신청도 했다.
내일 심사해서 통장으로 입금시켜 주겠다는
말을 뒤로하고 행촌동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
기푸스를 제거한 은혜는 뛸 듯이 기뻐했고
처음엔 어색했지만 달포 간 서서히 정이 들어
오늘 처음으로 좁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이튿날 아침을 먹고 정호가 정색을 했다.
"은혜씨, 오늘 복덕방에 이방을 내놓고
면목동 집으로 이사해서 살림을 합치도록 합시다
여기는 산 꼭대기라서 너무 위험하고
또 여자혼자서 살기에는 너무 음침해요!
그리고 면목동 집은 방이 두 개라서 여기 있는
짐을 작은방에 들여놔도 충분할 겁니다!"
"네, 그래요, 오빠 말대로 할게요!"
"이제 은혜씨가 걸을 수 있으니 나도 일터에
전화해서 그간 사연을 전하고 일할 준비를 할게요!"
"오빠,! 씨자 빼고 그냥 은혜라고 하세요!"
"응. ᆢ그래요! 습관이 돼서...!
그렇게 둘이는 애정의 눈빛을 교환하며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다정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때 은혜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ᆢ
그래 춘희니?"
"응, 은혜야 나 지금 독립문역에 내렸어 금방 갈게!"
"그래, 계단 있으니 조심해서 와라~!"
춘희는 예전에도 자주 들락거려 집을 알고 있었고
언덕길이라 한참 후에 춘희가 들어왔다.
"안녕, 은혜야 퇴원기념 꽃다발과 음료수 사 왔다!
정호 아저씨,
은주 병간 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지요!"
정호는 춘희의 못된 과거사를 모두 들었기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냥 목례만 했다.
"앉아라 춘희야 커피 타줄게~!"
"저번에 명수씨랑 경복궁 나들이 재미있었니?"
"아니다 은혜야 재미는 무슨 재미냐
우리 만남이 파토가 났는데...!"
"아니 춘희야, 그게 무슨 말이냐?"
"말도 마라 은혜야!
지가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는지 몰라도
내가 지 재산 보고 달라붙은 꽃뱀 취급을 하고
나와 며칠밤 같이 잤다고 기고만장해서
나를 하인 다루듯이 우습게 보더라 야!"
"어머!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춘희야?"
"그래서 내가 그렇게 천박하고 만만하게 보였냐고
큰소리로 따졌지!
그랬더니 허 참,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너 같은 여자는 길가에 수도 없이 널렸고
지는 휘파람만 불어도 여자가 줄줄 따라온단다!"
"그랬구나 춘희야!
그래도 마음에 상처는 너무 담아두지 마라 어쩌겠니!"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 걸 잘 아는 정호,
한참을 듣고 있다가 잠잠해지자 한마디를 했다.
"그 친구가 군바리 출신에다 단독주택도 한채 있고
연금도 나오고 하다 보니 돈 아쉬운 줄 모르고
안하무인데가 좀 있었어요!
그나저나 명수가 부자인 줄 알고 따라다닌
춘희씨도 문제가 있었네요!
그 친구 연금 자랑은 입에 달고 다니지만
사실 연금의 절반은 이혼한 부인에게 간답니다."
"아니, 정호씨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내가 명수씨 돈보고 따라다녔다구요?"
그때, 정호가 혹시라도 화가 나서 실수로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 튀어나올까 해서
또 싸움이 될까 무서워 은혜가 끼어들었다.
"정호씨는 네가 헤어졌다니까 나름대로
속이 상해서 한 말이니 신경 쓰지 마라 춘희야!"
"야! 은혜야, 너도 정들었다고 정호씨 편드니?"
"춘희야 그게 아니고..."
은혜도 난감해서 말꼬리를 흐렸다.
그렇게 재물로 이루어진 사랑과
가난하지만 마음으로 정으로 또 애틋한 보살핌으로
이루어진 사랑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장면이었다.
다음날 은혜와 정호는 비좁은 주방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찌개와 밥을지어 오랜만에
작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했다.
"오빠!
커피 타는데 오빠 취향은 어때요?"
"응, 나는 그냥 노천카페 스타일이라
믹서커피가 제일 좋아!"
"음... 그렇구나!
나는 당뇨끼가 좀 있어서 거의 블랙으로 마셨는데
봉지커피는 없으니 설탕 프림 넣어서 타줄게요!"
"응, 고마워!"
은혜는 커피를 타서 쟁반에 담아 티브이를 보고 있는
정호 앞으로 가지고 왔다.
"오빠 내가 정성을 담아 탔으니 드셔보세요!"
"오~! 맛있는데?
어떻게 내 취향에 맞춰서 잘도 탔네!"
"오빠!
나 좀 쳐다봐요!
그리고 지금부터 저를 따라 해보세요~!"
"응, 뭘 따라 해야 되지?"
"자기야~!
이렇게 따라 해보세요!"
"아이, 그 쑥스럽게 내가 그 말을 어떻게 해!"
"오빠 그러면 언제까지 은혜씨라고 부를 거예요?
자, 다시 한번 따라 해 보세요!"
"알았어요 알았어!"
하며 정호는 쑥스러움에 머뭇머뭇하다가 마지못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자기야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됐어요 됐어 오빠!
앞으로 계속 그렇게 불러주세요 알았지요?"
하면서 은혜는 신혼부부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은혜와 정호는 커피를 마시고
이층에 사는 주인집 초인종을 눌렀다.
"띵똥, 띵똥!"
"누구세요?"
"네~! 지하방에 세입자입니다!"
"그래요? 문 열었으니 올라오세요!"
현관문을 반쯤 열고 고개만 내민 팔십대로
보이는 주인 할머니였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제가 이사를 가야 하는 일이 생겨서요 복덕방에
방을 내놓을까 해서 집주인께 말씀드리는 겁니다"
"나는 나이가 들어서 잘 몰라요!
그러니까 저기 아래 목욕탕 건물에 있는
부자복덕방으로 가보세요!
그 집이 우리 친척 사람이라 다 맡겨놨으니
알아서 해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로 가보겠습니다!"
은혜와 정호 둘이는 부부처럼 팔짱을 끼고
복덕방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저기 산 꼭대기 120-15번지에서 왔는데요
집주인 할머니가 방 내어놓는다고 했더니
여기로 가면 된다고 해서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분은 저의 당숙모 되는 분입니다
계약서는 가지고 오셨나요?"
"네, 여기 준비해서 왔답니다!"
"네~, 아주머니 여기 이사 오신 지가 벌써 이십 년이
넘었지요?"
"네, 맞아요!"
"마지막 계약서 쓴 지가 삼 년이 넘었네요!
2년 계약이 지나서 자동으로 재계약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보증금 천만원은 그대로 살아있구요
또 자동갱신이라서 따로 복비는 안 내셔도 됩니다
혹시 체납된 전기세나 월세가 있으면 보증금에서
차감될 수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방 보러 오는 사람이 더러 있나요?"
"네, 가끔씩 있습니다마는 산 꼭대기 집이라서
빨리 나갈지는 저도 장담할 수가 없답니다.
"그럼 혹시 모르니 열쇠 한 개는 여기에 맡기고
갈게요 여하튼 잘 부탁드립니다!"
"오빠, 이제 방은 내놨으니 오늘은 어디로 갈까요?"
"응, 나도 한 달 이상 집을 비웠으니 집으로 가서
대충 청소라도 하고 이제 일 나갈 준비를 해야겠지!"
"오빠 잘됐네요 이제 다리도 어느 정도 낳았으니
제가 가서 청소하는 거 도와드릴게요!"
그렇게 은혜와 정호는 전철을 타고 면목동으로
향했다.
사가정역에서 내려 사가정 골목시장을 끼고
오백 미터쯤 되는 거리에 정호의 집이 있었다.
"오빠집은 전철역도 가깝고 또 가는 길에
시장이 있어서 너무 좋겠다 호호호..."
"이제 다 왔네 여기가 내가 사는 집입니다!"
3층 건물 아래층에는 집주인이 운영한다는
조그만 동네슈퍼가 있었고 가게를 끼고 돌아서
지하로 내려가는 철문과 계단이 따로 있었다.
"오빠, 대문도 따로 있고 입구에 창고도 있네요!
반지하지만 생각보다 무지하게 넓어요!"
"응, 내가 알기로는 건평이 삼십 평이고 이층은
전세 세입자가 살고 있고 삼층이 주인집입니다!"
"그럼 월세는 얼마씩 내고 있나요?"
"응, 보증금 천오백에 월세 삼십만 원이에요!"
"아니 오빠 월세는 나하고 똑같이 내고 있는데
여기는 방이 두 개나 되잖아요?"
"자기가 사는 집은 그래도 시내 한복판이고
여기는 변두리라 그럴 거예요!"
"어! 오빠 지금 자기라고 불렀다 ㅎㅎㅎ
앞으로 계속 그렇게 불러야 돼요 자기야!"
집에 들어오자마자 재빨리 은혜가 모르게 아내의
사진을 장롱속 깊숙이 감추고 은혜를 불렀다.
그렇게 은혜와 정호는 신혼부부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청소를 마치고 시장을 보러 나왔다.
그렇게 은혜와 정호는 반조리 식품이 아닌
신선한 야채와 생선등 한 보따리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은혜는 자기 집처럼 능수능란하게 늦은 점심 겸
저녁상을 차렸다.
"자기야! 해물 매운탕 끓였는데 맛 좀 보세요!"
"응, 아까부터 해물탕 향기가 진동을 했는데
우리 은혜씨 음식솜씨가 어떤지 볼까?
"오~, 국물이 일품이네!"
캬, 막걸리를 안 사 온 게 후회가 되는구먼!"
"자기야, 아까 냉장고 청소하다 보니 아래쪽
구석지에 와인병이 있던데 그건 뭐예요?"
"아~! 그거 무지하게 오락된 술일 텐데요!"
"그러면 그걸로 오빠집 대청소 한 기념으로
마시면 되겠어요!"
"그럼 그러지 뭐!"
그러나 그때 정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냉장고에 그 와인은 십오 년 전 아내의 생일 때
케이크와 함께 사 왔으나 아내는 병중이라 술을
마실 수 없어 혼자서 마시기도 뭐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냉장고에 있었고 이사 올때도 그대로
따라서 왔고 정호는 달달한 술은 좋아하지 않아
지금까지 냉장고 구석지에 있었던 것이다.
"자기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세요?"
"아니, 그냥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서 그랬어요!"
그렇게 은혜와 정호는 와인으로 신흔 기분을
냈고 은혜는 정호보다 더 기분이 들떠있었다.
잠자리에 들어서 은혜가 정호에게 묻는다.
"자기야! 행촌동 방이 언제 나갈지는 모르지만
실비보험금 신청한 게 오늘 나왔다고 문자가
왔어요
그러니 우선은 그 돈으로 집세하고 이자를 내고
나 이사 들어오면 그때부터 일 나기는 걸로 해요!"
안 그래도 정호는 십수 년 만에 여자와 한집에서
호젓한 생활을 하다 보니 일터에 나가는 게
그리 달갑지 않았는데 은혜가 그런 말을 먼저 해주니
속으로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렇게 행복한 날들이 며칠쯤 지속되던 어느 날
은혜가 샤워를 하는 도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폰 액정에는 복덕방이라고 찍혀있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기 부자복덕방입니다
행촌동 120-15번지 방 내놓으신 분 맞지요?"
"네, 그렇습니다!"
"아~, 저는 남자분이 전화를 받아서 잘못 걸었나
했답니다!
그나저나 연세대학교 학생 둘이 방을 보러 왔는데
지금 집에 계시나요?"
"아니요 지금 다른데 나왔는데 사장님께 맡겨놓은
열쇠로 문을 여시고 보시면 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실례지만 전화받으신 분은 누구신가요?"
"네, 저는 은혜 오빠되는 사람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방은 아무 때나 뺄 수가
있다고 하셨지요?"
"네, 그렇습니다 사장님!"
"그럼 열쇠 가지고 방으로 가보겠습니다!"
잠시 후 은혜가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나왔다.
"오빠, 무는 전화가 왔나요?"
"응, 행촌동 부자복덕방에서 전화가 왔었는데
방 보러 온 사람이 있다고 해서 맡긴 열쇠로
가서 보라 고했으니 곧 전화가 올 테지요!"
"엥!
벌써 방을 보러 왔다고요?
저는 산꼭대기 반지하 방이라서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내가 서럽게 살다가 오빠를 만나서
이제서야 운이 트이나 봅니다 호호호..."
"그나저나 은혜씨 화장도 다 끝났으니
사가정 공원에 산책이나 갑시다!"
"네 좋아요!"
그렇게 은혜와 정호는 공원으로 산책을 나와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며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정호는 휴대폰을 고쳤다지만 벨소리를 울린 적도
없고 또다시 은혜의 휴대폰에 벌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여기 행촌동 부자 복덕방입니다
방 보러 온 학생들이 오히려 산꼭대기라서
운동도 되고 경치가 좋아 이사를 온답니다
그런데 이번주 토요일에 이사를 왔으면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언제든지 방을 빼 드릴게요!?
"그러면 계약서를 써야 하니 바로 좀 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면목동에
있어서 1시간쯤 걸릴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잠시 후 수화기 너머로 작은 소리의 대화가 들려왔다
네, 학생들이 햄버거 가게에서 뭘 좀 먹고
기다리겠다 하니 빨리 좀 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은혜와 정호는 방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칠까
해서 잰걸음으로 사가정 전철역으로 향했다.
그렇게 부랴부랴 도착해서 무난하게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자기야 오늘이 화요일이니까 이번주 토요일이면
삼일밖에 여유가 없는데 어떻게 하지요?"
"걱정도 팔자네요!
우리 집에 살림살이가 다 있으니 오래된 가구들은
버리고 내 집에 있는 것 쓰다가 나중에 바꿉시다!
그리고 용달차 한대 부르면 충분할 것 같아요!"
"네, 저는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렇게 은혜 집으로 돌아와서 이것저것 이삿짐을
짐을 싸기 시작했다.
어제는 면목동 정호 집에서 자고 오늘은 또
은혜 집에서 자고 변화무쌍한 날들이었다.
"오빠 그나저나 춘희에게 이사 가는 거 알려줄까요?"
"아니, 알릴필요 없어요!
춘희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또 뭐 하러 알려줍니까!
정호는 단호하게 잘라서 말을 하자
은혜는 그 말도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토요일 아침 8시쯤 용달차에 인부 한 명을 포함해서
기사님과 둘이 계단 앞까지 왔다.
수시로 울리는 은혜의 휴대폰에 또 벌소리가 울렸다.
"네, 지금 내려갈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안녕하세요 기사님!
저희가 이삿짐을 계단까지 거의 내놓았는데요
아직 짐이 조금 남아있으니 우선 차에 올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서 이사를 들어올 학생들의
이삿짐 용달차도 도착했다.
"오빠, 이제 조금 남았으니 마저 짐을 옮겨 주세요!
저는 복덕방에 가서 보증금 받아서 올게요!"
은혜는 예전에 팔다남은 박카스를 낑낑거리며
통째로 들고와서 기사님과 인부, 그리고 대학생과
그쪽 이삿짐 인부들에게도 한 박스 씩 나눠주고
남은 한 박스는 복덕방 사장님께 주었다.
은혜는 박카스에 얽힌 지난 과거사를 흔적도 없이
그렇게 모두 지워버렸다.
은혜가 복덕방에서 보증금을 돌려받고 돌아오니
이삿짐은 용달차에 옮겨져 마무리가 되어있었다
"기사님! 면목동 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네~! 도심을 통과해야 하니 아마도 한 시간 이상
걸릴 겁니다!,
"그래요? 그러면 우리는 전철로 가면 한 시간
이내로 도착할 수 있으니 주소대로 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우리는 영업용이라 시간이
곧 돈벌이입니다 그러니 늦지 않게 빨리 와주세요!"
그렇게 은혜와 정호는 전철을 타고 먼저 도착해
집 앞에서 기다리다 이삿짐을 맞이했다.
정호네 집에 살림살이가 다 있으니
꼭 필요한 은혜의 옷가지와 화장품 등은
큰방으로 옮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작은방에
처박다시피 해서 이사를 끝냈다.
"은혜씨, 참! 자기야 바쁘게 이사를 하다 보니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힘들다!
그러니 저기 호프집에서 저녁 겸 치맥이나 합시다!"
"오빠, 내 생각하고 어쩌면 그렇게 똑같아요!
이제는 다 치웠으니 치맥으로 자축합시다 호호호..."
치맥으로 축배를 든 은혜와 정호는 기분 좋은
비틀거림으로 어깨동무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빠, 이제는 이사도 했고 살림도 합쳤으니
우리가 법적인 것을 떠나서 이제는 부부네요!
오늘은 자기 품에 꼭 안겨서 잘 거예요 알았지요?"
일단 그렇게 혼인신고는 뒤로 미루고 동거의
첫날 밤을 맞았다.
샤워를 끊낸 은혜가 강아지처럼 이불속으로
파고들어와 안기며 속삭였다.
"자기야 우리 혼인신고는 언제쯤 할까요?"
"음~... 그거야 내마음이 아니고 자기 마음이지!"
"알았어 자기야!
그럼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는거예요!
내일 날 밝으면 우리둘이 구청가서 하는거다!
자~, 약속!"
은혜와 정호는 만사 걱정을 다 내려놓고
비록 혼인신고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부부가 되었다.
인연으로 이어졌다 또 악연으로 헤어지고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의 아름답고 고결한
사랑 이야기도 있었다.
그 이후로 은혜와 춘희의 끈끈한 친구사이도
점점 더 소원해졌고 명수의 전화도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렇게 탑골공원 황혼의 로맨스가 이루어졌다.
그날 이후로 탑골공원에서 그 박카스 파는
아주머니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6부) 뜻밖의 반전
면목동으로 살림을 합치고 동거에 들어간
은혜와 정호는 비록 반지하 월세방이지만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서로의 마음을 보듬었다.
은혜는 은혜대로 정호는 정호대로 환갑이 지나
살림을 합치고 인생길 느지막이 신혼의 첫날밤을 보냈다.
"오빠, 잘 주무셨어요?"
"응, 그래 잘 잤지 좋았어!
은혜가 이사하느라 피곤했는지 옆에서 쌔근쌔근
잠드는 걸 보고 나도 잠이 들었지!"
"응, 오빠 정말이야?"
"그래, 면목동 집에서 맞이한 첫날밤은 어땠어?"
"오빠, 그런데 나 꿈꿨다!"
"그래? 무슨 꿈?"
"응, 태몽을 꾸었나 봐요!
커다란 용이 나타나서 우리 집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대문 앞에서 입을 쩍 벌리더니 새빨간 불을 품었어!
그래서 잠에서 깼다가 자기도 이사하느라 피곤했는지
코를 골면서 자드라구요 그래서 자기 가슴에
팔을 올려놓고 잠들었다?"
"하하하 태몽이라고?
우리 나이에 태몽이라면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다!"
"오빠, 그렇게 나를 놀리면 죄받는다?"
은혜와 정호는 꿈 해몽을 얘기하며 새로운 날의 아침을 맞이했다.
은혜는 부엌으로 가서 분주하게 아침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 오~!
이 구수한 냄새는 뭐야?"
"응 우리가 어제 술을 마셔서 속풀이 북엇국을
끓였지!
"그래?
냄새가 기가 막혀 벌써 군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네!"
"그래요?
그러면 다행입니다 호호호!
무는 어제 사 온 거고 북어는 냉동실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끓였지요!"
그렇게 은혜와 정호는 수십 년간 나 홀로 밥 먹는걸
벗어나서 호젓하게 마주 앉아 아침을 먹었다.
"오빠?"
"응, 왜?
"어젯밤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한 거 알지요?"
"아니!
난 술을 마셔서 그런지 기억이 전혀 안 나는데?"
하면서 정호는 은혜를 놀려줄 심산으로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딴짓을 했다
"아이, 자기야 왜 그래 잉~!
오늘 구청 가서 혼인신고 하기로 했잖아!"
"글세, 나는 모르겠는데!"
그러자 은혜는 진짜로 화가 난 듯이 토라져서
돌아앉았다.
"아니야!
그냥 놀려주려고 한번 해본 소리야!
"아이, 깜짝 놀랐잖아!
이제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응, 그래그래 이제는 안 할 거야 미안해!"
그제서야 은혜의 얼굴이 화색으로 돌아왔으며
서로의 마음속에는 어렵게 이룬 행복이 행여나
작은 다툼으로 인해 깨질까 해서 조심하는
모습을 서로가 역력히 읽을 수가 있었다.
아침 상을 물리고 정호는 청소기를 돌렸고
은혜는 설거지를 하면서 스스로의 역할분담을
하면서 그렇게 가정을 꾸려갔다.
"오빠!
이제 집안 청소 다 했으니 구청으로 가볼까요?"
"응, 은혜가 혼인신고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가봐야지!"
은혜와 정호는 남들이 보든 말든 젊은 연인들처럼
팔짱을 끼고 집을 나섰다.
"오빠, 구청은 어떻게 가야 돼요?"
"응, 여기서 2320 버스 타면 한 번에 가!"
"차암 은혜는 복 터졌다!
이렇게 다방면으로 척척박사를 옆에 끼고 있으니
정말 좋겠다!"
은혜는 정호 들어라는듯이 그렇게 칭찬을 해주었다.
"자기야, 그런데 솔직히 자기라는 말이
남들이 들으면 욕할까 무섭다!
그냥 여보라고 부르면 어떨까?"
"아니요! 여보도 좋지만 너무 올드해 보여서
싫어요 습관 되면 괜찮을 거예요!"
"그래도 나는 이질적인 단어라서 못쓸 것 같아
그냥 은혜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음~, 그러면 그렇게 하세요!"
"오케이 알았어요!"
혼자서 수십 년을 지냈던 정호는 은혜를 만난 이후
내성적인 성격도 조금씩 바뀌고 닫혀있던 말문도
트였다.
은혜는 정호는 연인들처럼 신혼부부처럼 대화를 하며
중랑구청 민원실에 들어갔다.
"아니, 무슨 서류가 이렇게 복잡해!
이름도 한자로 써야 되고 이건 또 뭐야
김해김 씨 본관도 써야 되고 복잡하다 복잡해!
"아니, 그래도 자기는 한 번이라도 해봤잖아!
나는 처음이라서 정말 몰라요!"
"그런데 은혜 성씨 본관은 어디야?
그것도 여기 필수 기재라고 쓰여있는데!"
"아~! 옛날에 엄마가 신안 주 씨라고 했어요!
본관도 신안이고 은혜 은자에 지혜 혜자 예요!"
은혜와 정호는 둘이서 씨름을 해가며 혼인신고를 마쳤다.
밖으로 나온 은혜와 정호는 혼인신고를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하늘도 공기도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예전과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은혜씨 나 오늘 분명히 약속 지켰다!"
하면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자기야 저기 편의점이 보이네!
나 잠깐 저기 들려서 뭐 좀 사 올게
잠깐만 정류장에 앉아 있어요!"
잠시 후 편의점에서 나온 은혜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방실방실 웃으며 입 꼬리가 늘어졌다.
"뭘 샀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은 거야?"
"아니야 오빠는 몰라도 돼요!
이번 토요일 되면 알려줄게요 호호호...!"
"허허, 은혜는 무슨 비밀이 그렇게도 많아?"
하면서 함께 걸어가는데 버스 정류장 근처에
조그만 공원이 눈에 보이자 은혜가 말했다.
"오빠, 우리 저기 의자에 좀 앉았다 가요!
"응, 바쁜 일도 없는데 좀 쉬었다 가지 뭐!
둘이는 공원 벤치에 앉아 바쁜 일상을 잠시 멈추고
쉼표를 찍었다.
저기 아파트 공사하는 데가 내가 일하던
곳이야 저기 보이지?
이제 이사도 했고 혼인신고도 마쳤으니 현장
오야지에게 전화를 해서 일을 해야지!"
"응, 그래도 나 때문에 고생했으니 조금 더
쉬었다가 일을 하도록 해요!
저도 예전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 두었는데
성격상 못할 것 같아서 처박아두었는데
막상 내가 아파보니까 이제는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오~! 요양보호사 자격증이 있었네요!"
"네, 저도 앞으로 취직해서 열심히 돈 벌게요!
그렇게 해서 우리도 언젠가는 작은 빌라라도
하나 마련하도록해요!
그나저나 저렇게 집을 많이 짓는데도
아직도 우리같이 집 없는 사람이 더 많아요!
그래도 나는 행촌동 산 꼭대기 그 집에 살 때보단
면목동 우리 집이 열 배, 백배 더 좋아요!"
하면서 편의점에서 사 온 초콜릿을 꺼내어
종이를 벗기고 반으로 잘라서 정호에게 들이밀었다.
"오빠, 오늘 우리 혼인신고 한 기념으로 초콜릿 먹자!
달달한 초콜릿 먹으면 사랑이 더 오래간데요 호호호"
"별스런 미신이 다 있네요 허허 참!"
"오빠, 쵸코배합시다 쵸코배!"
"아니 또 쵸코배는 뭐야?
꼭 요즘 젊은 세대 같아!"
"아니, 쵸코배도 몰라?
건배가 있으니 쵸코배도 있지 호호호"
둘이는 호들갑을 떨다가 아까 타고 온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와 그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로 은혜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주방에서도 방에서도 웃음을 달고 살았다.
정호 역시도 십수 년 홀아비 생활에서 벗어났으니
몸에도 정신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던 토요일에 티브이를 보면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뉴스 다음으로 복권추첨 방송이
이어졌다.
"오빠, 나 저번날 복권샀다?"
"음~! 그래서 그렇게 웃음을 달고 살았구먼!
그런데 나도 가끔 복권을 샀지만 맨날 꽝이었어!
그냥 지 팔자대로 살아가란 그런 뜻이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맞춰는 봐야지요!"
하면서 가방을 뒤적여 복권을 찾아왔다.
그런데 은혜가 다 살펴보기도 전에 추첨 방송이
끝나버렸다.
"아니, 무슨 추첨이 이렇게 빨리 끝나요?
아까 얼핏 보니까 서너 개는 맞은 것 같았는데요!"
"뭘 되어봤자 네 개 맞으면 최고 오만 원이겠지!"
정호는 예전에 꽝을 많이 맞아봐서 그냥
시큰둥하게 대답을 했다,
"아니야 오빠 그래도 찾아봐야지요!
잠깐만, 네이버에 치면 나올 거예요!"
은혜는 휴대폰을 조작하며 열심히 찾고 있었다.
"오빠, 요즘은 큐알 코드로도 알려주네요!"
하며 휴대폰을 복권에 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했다.
"그때, 갑자기 휴대폰에서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요즘은 오천 원짜리 당첨도 팡파르를 울려주나 봐!"
정호는 그러면서 티브이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렸다.
그런데 은혜가 그대로 주저앉아 넋을 놓고
울고 있었다.
"아니, 왜 그러고 있어?"
그래도 은혜는 대답을 하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오빠, 일등이래요 일등!
뭐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오빠가 한번 봐줘요!"
은혜는 사실 믿기지가 않은 데다 눈물이 앞을 가려
글씨가 번지게 보여 다시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응, 그래!
휴대폰 이리 줘봐요!"
은혜가 휴대폰을 오래도록 쥐고 있는 바람에
화면이 꺼져있었다.
"은혜씨, 이거 지문설정을 해놔서 안 되네!
다시 켜서 이리 줘봐요!"
은혜는 손이 떨려서 몇 번이나 지문을 같다 댄 후
겨우 휴대폰 설정이 풀렸다.
"어디 네이버에서 로또복권 치면 나오나요?"
은혜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정호도 은혜가 한 것처럼 큐알 코드에 휴대폰
초점을 맞추었다,
그때 또 한 번의 팡파르가 울렸고 정호는 휴대폰을
보다가 놀래서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자기야~!
정말 일등이었네!
그럼 우리 이제는 어떻게 되는 거야?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이제 벗어나는 거야?"
은혜와 정호는 한참 동안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지나서 흥분이 가라앉자 어깨를 맞대고
다시 한번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맞네 맞아, 일등이네!
차례대로 6개가 다 맞았네!
잠깐만, 당첨금이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 이니까 22억 5천4백만 원이네!"
담담한 성격의 정호가 그렇게 말을 이어갔다.
은혜는 아직도 심장이 뛰어 말을 못 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지만 말고 여기 뒷면에
당첨자 이름 적는 데 있으니 이름부터 쓰자!"
"그래요 오빠, 나는 아직도 실감이 안 나네요!
나는 손이 떨려서 못쓰겠으니 오빠가 쓰세요!
우리 이름 둘 다 써야 되는 것 아니에요?"
"은혜가 샀으니 은혜이름을 써야지!"
"아니에요 오빠, 우리는 이제 혼인신고도 했으니
부부잖아요 그러니 공동으로 둘 다 쓰세요!"
"아닌데, 칸이 너무 작아서 둘 다 쓸 수가 없는데?"
"그럼 오빠 이름 하나만 쓰세요!"
그래, 그러면 월요일에 당첨금 찾으러 같이 갑시다!"
" 그런데 오빠, 저번날 구청 앞에서 내가 토요일이면
알려주겠다고 한 말 기억나세요?"
"응, 그랬었지!"
"사실은 초콜릿 사러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로또복권도 팔더라고 그래서 내가
태몽을 꾼 것이 생각나서 복권을 한 장 샀어요!"
"음, 그랬구나!
그 꿈이 진짜 믿을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네!"
"예, 맞아요 오빠!"
은혜와 정호는 이틀 밤낮을 잠도 설쳐가며
그 돈을 어디다 어떻게 쓸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기와집을 지었다.
이틀 밤낮을 그렇게 보낸 후 월요일 아침에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택시를 타고 서대문
농협 본점에 도착했다.
한참을 기다려 차례가 되었고 은행직원이
신원조회를 마치고 당첨금 수령 절차에 싸인을
마치고 직원이 다시 물었다.
"지금까지 복권에 당첨된 분들을 보면 당첨금
때문에 집안 불화가 많은 게 사실입니다
세금을 공제하고 당첨금 수령 통장을 두 분
공동으로 해드릴까요?
아니면 반반씩 나누어서 입금을 시켜드릴까요!
분명히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은혜와 정호는 서로를 바라보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러면 부부 공동명의로 통장과 카드도 만들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복권 판매금액의 일부는 적십자와
불우이웃 돕기 등 사회사업에도 쓰입니다!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것은 손님 자유지만
특별히 의무가 부여되는 것은 없답니다!
세금 공제하고 총 수령 당첨금은 십칠억 사천 육백
오십 이만 원입니다!"
은혜와 정호는 그렇게 수십 년 동안의 가난에서
벗어나 단번에 팔자가 뒤바뀌는 운명을 맞이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실감이 나질 않아 꿈을 꾸는 듯
이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했다
일단은 월세방에서 벗어나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튿날 은혜와 정호는 아침을 먹고 일지감치
근처 동네를 돌아다녔다.
한 골목에 하나정도는 신축빌라 분양이라는
플래카드가 붙어있었다.
복덕방을 거치면 수수료 나갈까 해서 발품을 팔았다.
신축 건물이라서 깨끗하고 좋았지만 오늘 하루는
눈으로 보기만 하고 계약은 생각을 한 후에 하기로 했다.
은혜는 꼼꼼하게 마음에 드는 집은 일일이 사진을 찍고
메모도 해두었다.
은혜와 정호는 일일이 평형대와 가격대비
가성비가 높은 것을 찾아냈다.
25평형대는 평균치가 3억원대고 28평형은 3억 5천만원대
30평형대는 4억원대이고 화장실 겸 욕실이 두 개 딸린 것은
32평형대로 5억 초반이었다.
은혜와 정호는 처음엔 방 두 개 화장실 한 개 딸린
작은 집에 마음을 두었으나 마지막에 본 집이 너무 좋아서
평생 좋은 집에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던
두 사람의 마음을 꽁꽁 묶어놓았다.
거기에다 집주인이 등기 비용 약 5백만 원을
지원해 주겠다고 했으며 복비 안 나가고 등록비
안 나가니 천만 원은 싸게 산다는 것도 메리트가 있었다.
결국은 복권 당첨금이 있으니 평생소원을 풀어보자는
의견으로 좁혀져 마지막에 본 32평 고급형
신축빌라로 계약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호와 은혜는 이튿날 그 집으로 가서 다시 한번 둘러보고
부부 공동 명의로 법무사가 보는 앞에서 계약을 했다.
완공이 되어있는 신축빌라는 언제든지 입주가
가능해서 바로 이사를 하기로 작정을 했다.
집주인에게는 직장을 지방으로 옮겨서 이사를
가야 한다고 거짓말로 둘러댔다.
그러자 집주인은 또박또박 월세와 이자까지
잘 나오는 정호가 이사 가는 게 아쉬웠다.
"김 씨, 그 이자가 부담스러우면 십만 원만 주세요!"
"아닙니다 사장님!
이자 때문이 아니구요 집사람이 포천에 있는
요양병원에서 일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 동두천 아파트 공사일을 하게됐구요!
포천에 있는 친척집이 비어있어서 겸사겸사 그 집으로
이사 가서 살기로 했답니다!"
방은 몇 군데 복덕방에 내놓겠습니다.
그리고 열쇠는 사장님과 복덕방에 한 개씩
드리고 가겠습니다.
방이 나가게 되면 그때 보증금에서 빌린 돈 빼고
주시면 됩니다
그때까지 월세와 이자는 통장으로 계좌이체
해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김 씨!
이사를 가신다니 좀 섭섭합니다!"
정호는 할 수 없이 그렇게 선의의 거짓말로
둘러대야 하는 자책감과 자신도 점점 변해가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오빠, 이제 우리 정말 이사를 가는 거예요?"
"새집도 계약이 끝났고 집주인하고도
얘기가 끝났으니 이제 이사만 가면 되지요!"
"정말 꿈만 같아요 오빠!
세상에 우리가 이런 넓은 집에 이사를 가다니요!
나는 몇십 년 된 회색 벽지에서 품어 나오는
냉기를 참아가며 살았는데요
오빠집으로 이사 온 것만 해도 행복에 겨웠는데
또다시 신축빌라로 이사를 간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그것도 우리 명의로 된 집에서 말이에요!
내가 오빠 만나서 행운이 들어왔나 봐요!"
"아니야, 그것은 은혜 당신이 복을 들고
나에게 왔기 때문이야!
그리고 당신이 예전에 어렵게 고생고생 해가며
없는 돈으로 산 박카스를 인부들과 이사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걸 봤지요!
그때 이미 나는 그렇게 착한 일을 하는 은혜가
언젠가는 큰 복을 되돌려 받겠구나 생각을 했지요!
은혜가 착하게 살아왔으니 우리가 복을 받은 거요!"
은혜와 정호는 그렇게 서로에게 공을 떠넘기는
진실된 마음으로 일심동체가 되었다.
"오빠, 이 사실을 춘희에게 알려도 될까요?
사실은 새집 자랑도 좀 하고 싶답니다.
턱을 괴고 앉아 한참을 생각하던 정호가 말을 했다.
"음~!
그러면 내가 춘천 시골에 있는 종중땅이 매매가
되어 내 지분을 받아서 집을 샀다고 합시다!
복권에 당첨되어 집을 샀다고 하면 꽁으로 받은
돈이라고 쓸데없는 오해도 살 수가 있으니
그렇게 합시다!
그리고 명수도 내가 시골에 종중땅 있는 거 예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으니 그렇게 한 줄로 알 거요!"
"그래요 오빠!
나는 무조건 오빠 말만 믿고 따라갈게요!"
은혜와 정호는 이삿날을 잡아 이사를 했다
이사 가는 날 혹시나 기사님이 집주인에게
이사 가는 곳을 말할까 걱정이되어서
용달차 기사님께 얘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예전에 쓰던 헌 가구는 새집으로 가져와서 구청
청소과에 신고를 하고 표를 붙여서 내놓았다.
이사를 한 첫날 은혜와 정호는 너무나
감격에 겨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오빠 침대랑 가구랑 전부다 새것이라 그런지
나무 냄새도 나고요 적응이 안 돼서 그런지
잠이 안 와요!"
"응, 그래 은혜도 그렇구나!
그럼 창문을 좀 열어서 환기도 좀 시키고
확 트인 베란다에서 맥주라도 한잔 해볼까?"
"네, 좋아요 오빠!
"냉장고에 오빠가 좋아하는 막걸리와 맥주도
사다가 넣어놨어요!
오늘은 이사를 왔으니 특별히 맥주를 마시고 싶어요!
베란다 테이블에 앉아계세요!
과일과 술상 차려서 가져올게요!
은혜와 정호는 동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베란다 발코니 테이블에 앉아 축배를 들었고
새로 산 침대라서 둘 다 적응이 잘 않됐지만
은혜는 정호가 내어준 팔 베개를 자장가 삼아
그렇게 포근하게 잠이 들었다.
며칠 후 정호는 이것저것 가구정리에 몰두했고
은혜는 시장을 보러 나왔다.
같은 면목동이라도 조금 떨어진 동네라서
시장도 다른 곳이었다.
시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조그만 공원과
노인정 건물이 있었고 기다란 의자에
할머니 둘이서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미자야 네가 마셔라!"
"아니야 혜숙이 네가 더 힘들어 보이니 네가 마셔라!
"혜숙아, 그러면 우리 공평하게 반반씩 마시자!
은혜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은혜가 가만히 듣고 있으니 할머니 둘이서
박카스 한 병을 가지고 서로 마시라고 양보를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박카스가
한병 밖에 없나 봅니다!"
"그래요 젊은 색시!
나는 노인정에 먼저 와서 박카스를 받았는데
혜숙이는 늦게 와서 박카스를 못 받았지요!
그래서 어떻게 나누어 마시고 있네요!"
"네~,그러시군요!
그러면 할머니 저기 노인정에는 몇 분이나 계셔요?"
"여기 이 동네는 할머니가 많아요!
평시에는 열댓 명이고 공휴일엔 손자 손녀 볼일이
없으니 더 많이 오지요!"
"할머니 그러면 제가 박카스를 좀 사 올 테니
여기에 좀 앉아계세요~!"
하고 옛날 박카스를 팔던 생각이 났다
그래서 근처 약국에서 120개들이 박카스를 샀다
그런데 건장한 약사님이 궁금증에 물어왔다.
"아주머니 자전거 타고 오셨나요?
"아닙니다 그냥 시장 보러 오는데 저기 저
노인정에 할머니가 박카스 한 병을 둘이서
나눠마시는 걸 보니 안쓰러워 한 박스 사다가
드리려고 했답니다."
"아~, 그러셨군요!
이거 무거워서 아주머니는 들 수가 없답니다
여기는 동네장사라서 저는 손님들을 다 알고 있습니다!
노인정이 가까우니 제가 들어다 드릴게요!"
하면서 박카스 박스를 번쩍 들고 나오셨다.
"아주머니 참 좋은 일 하시는군요!"
"별말씀을요, 저도 늙으면 저 할머니들처럼
될 텐데요 뭘요!
박카스 친절하게 들어다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노인정에 박카스를 전해주고
은혜는 인사 듣기가 민망해서 도망치듯이
시장으로 향했다.
가구 정리 짐 정리를 하다 보니 새집으로 이사 온 지도
한 달이 넘었다
"오빠, 우리 이사도 왔는데 집들이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올사람이 있어야 집들이를 하지!
은혜는 누구 부를 사람이나 있나?
나는 부를 사람이 전혀 없는데!"
"그래도 그렇지 오빠
춘희와 명수 씨라도 불러서 하면 안 될까?"
이사 와서 어지간히 짐 정리가 되고 마음도
안정이 되니 은혜는 은근히 자랑이 하고 싶어 졌다.
은혜와 정호는 몰래 숨어서 사는 것도 문제가
있을 것 같아 그렇게 해서 생각도 안 했던
집들이를 하게 되었다.
집들이라고 해봐야 사실은 올 사람도 없었고
명수와 춘희만 부르기로 했다.
집들이를 하기로 한 토요일 5시가 되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춘희와 명수가 같이 도착을 했다.
띵똥 띵똥!
홈 비디오폰에 춘희와 명수가 둘둘마리 휴지와
집들이 선물을 한 꾸러미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 명수야 어서 와라!
문 열어놨으니 엘리베이터 타고 503호로 올라와라!"
"아니, 명수야 어쩐 일로 둘이서 같이 왔네!"
"어~! 저기 사가정역에서 우연히 만나서 왔지!"
"둘이 화해한 것은 아니고?"
"에이, 좋은 날 그런 것은 묻지 마라 정호야!"
"어서 오세요 명수 씨!
춘희야 너도 왔구나 어서 들어와라!"
"야~! 부럽다 은혜야!
정호 씨 만나더니 팔자가 활짝 피었다 야!"
"응, 그래 춘희야!
정호 씨 시골에 있는 종중땅이 시대적 변화로
쓸모가 없어져 종중에서 처분하여 정호 씨
지분을 받아서 집을 샀단다!"
"아~!
정호야 옛날에 얘기하던 그 종중땅 팔았구나!"
"그래, 명수야 그렇단다!"
방 세 개에 화장실 겸 욕실이 두 개나 딸린 집이라서
명수와 춘희는 이리저리 둘러보며 분위기에
앞도 되어 입이 쩍 벌어졌다.
"아니 정호야!
내가 예전에 오래된 이층 양옥집수리 했을 때
자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는데 지금 보니까
쑥스럽구먼 그래!"
"이 사람아 자네 집은 개비를 했지만 이 집은
신축건물이잖아!"
"그래도 그렇지 이 친구야!
건축자재도 좋은 것을 써가지고 너무 좋다 야~!"
명수와 춘희는 집구경을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때 부러움에 할 말을 잃었던 춘희도 끼어들었다.
"은혜야 좋아도 너무 좋다 야!
대리석 식탁에다 주방에 매직레인지까지,
거실에 이 샹데리아는 또 뭐야?
꼭 보석이 춤을 추는 것 같다야!
은혜 너는 귀부인 마님같이 보이고 어쩜 나는
이 집에 하인같이 느껴지는 건 또 뭐니?"
"에이, 춘희야 너무 치켜세우지 마라!
이게 다 진실로 세상을 살아온 우리 서방님 덕분이란다!"
명수와 춘희는 저번 덕수궁에서 싸우고
헤어진 것도 잊은 채 찰싹 달라붙어 이방 저 방
두 개의 화장실에 전등도 켜가며 구경 삼매경에 빠졌다.
사실 은혜와 정호가 구입한 이 빌라는
스위트 룸으로 꾸며졌고
최신 스타일로 지어진 주택이라 32평에 5억이었다.
빌라치고는 꽤나 비싼 가격이고 분양이 안 돼서
남아있었는데 마침 정호부부를 만나 계약이 이뤄졌으며
건물주가 서비스로 등록비 전체를 부담해 주겠다는
서약을 받고 계약을 한 것이다.
그때, 띵똥 띵똥, 또 벨이 울렸다.
은혜가 홈 비디오폰을 보면서 말했다.
"네, 배달 오셨군요!
문 열었으니 들어오세요!"
은혜가 집들이를 위해서 중국 음식점에 요리를
미리 예약한 것이다.
음식을 식탁에 올려놓고 은혜가 주방에서
큰소리로 모두를 불렀다.
"자, 이제 그만하고 전부다 식탁으로 오세요!"
식탁에는 팔보채에 라조기 탕수육까지 있었고
그 비싼 바닷가재가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붉은색 루비를 닮은 듯 쟁반에 앉아있었다
과일도 푸짐하게 깎아 쌓아 놓고 프랑스산 와인도
얼음에 채워져 놓여있었다.
"와~!
세상에나 이게 어디 칠성급 호텔 뷔페에 온
기분이네요!"
명수가 느스레를 떨었고 춘희는 기가 죽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은혜 옆으로 바짝 다가가서 귓속말을 했다.
"은혜야, 미안하다 야!
옛날에 다방에서 너를 구박했던 것도 그렇고
또 탑골공원에서 그 자리 너에게 넘겨주면서
옛날에 돈 빌린 것 퉁 치자고 했던 말까지
모두 취소하고 은혜 너에게 늦었지만 사과를 할게!
은혜 네가 부자가 됐다고 하는 말이 아니고
예전에 내가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죄를 받았는지
나는 이렇게 살고 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해 본들
무슨 소용이겠니 은혜야!
그 당시 내 처지를 은혜 네가 이해를 좀 해줘라!"
"그래그래 알았다 춘희야!
음식 다 식겠다! 얼른 앉아서 먹자!"
와인잔에 와인이 채워지고 명수가 나서서 건배사를 외쳤다.
"자 오늘은 내 친구 정호와 은혜 씨의 행복한
신혼집 입주를 축하하며 위하여 건배합시다!
위하여 ~!"
은혜와 정호 그리고 명수와 춘희 네 사람이 모여서
소소한 집들이를 마쳤다.
은혜와 정호는 그래도 예전에 친했던 사람들이라
현관까지 함께 내려가서 배웅을 했다.
"오빠, 춘희와 명수 씨는 화해를 했나 봐요?"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집에 오니까 마지못해서 친한 척을 했겠지!
저기를 봐요!
저 골목에서 따로 가잖아!"
"아~, 그러네요!
자기 말이 맞는 것 같네요!"
명수와 춘희는 결국 서로 다른 길로 떠났다.
은혜는 그래도 춘희와의 옛정을 생각해서
수시로 전화 통화를 하였다.
"은혜야!
집도 사고 혼인신고도 했는데 신혼여행은 안 가니?"
"에이~!
우리 나이에 무슨 신혼여행을 가겠니!"
"아니다 은혜야!
너는 신혼여행도 외국여행도 안 해봤잖아!
내가 잘 아는 여행사 친구가 있단다!
가까운 일본에 온천여행이라도 해라!"
"춘희야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걱정 마라 은혜야!
내가 다 알아보고 다시 전화할게~!"
"그래 알았어 춘희야!"
은혜는 사실 예전 같으면 신혼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고 고생만 하고 살다 보니 사실 외국에는
나가 본일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예전 집주인을 만나러 간
정호가 돌아오면 의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 과일 쟁반을 거실로
들고 온 은혜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오빠, 이제 새집에 이사도 했고 혼인신고도
했는데 신혼여행 가보는 것은 어때요?"
"사실 우리가 복권 때문에 부자가 됐다지만
그 신혼여행은 사치가 아닐까?"
"오빠,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해봤는데요
나는 바쁘게 사느라 여행다운 여행을 못해봤어요!
춘희가 그러는데 지금 여행사에서 일본여행 상품
세일 기간이라 50프로 할인해서 삼박 사일에
육십만 원이면 갈 수가 있다네요!"
"그래?
나도 외국에 나가보질 않아서 잘 몰라!
또 생각을 해봐도 해외여행은 너무 사치인 것 같아!"
"오빠, 내 생각도 자기와 같아요!
그런데 저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신혼여행을
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에요!"
"음~! 나도 솔직히 가고는 싶지만 우리가 갑자기
부자가 되어 흥청망청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랬지!"
"에이!
자기도 가고 싶은 마음은 있었네 뭐!
"그러면 춘희와 상의해서 여행사를 알아볼게요!"
"여하튼 남들 눈도 있으니 비싸지 않게
또 낭비를 하지 않도록 그렇게 알아봐요!"
"오케이, 알았어요 자기야!"
은혜와 정호는 신혼여행을 가고는 싶었지만
갑자기 졸부가 되어 여행을 떠나는 것에
자책감을 느껴서 포기를 했으나
춘희가 부추기는 바람에 저렴한 곳을 택해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튿날 춘희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은혜야 오늘 시간이 있니?"
"응, 그냥 집에 있단다!"
"그럼. 이따가 두시쯤에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역에서
만나자!
내 친구가 그기 여행사 지점장으로 있단다
나머지는 만나서 얘기해 줄게!"
"그래 알았다 춘희야!"
오후 두 시쯤에 은혜와 춘희는 전철역에서 만나
춘희가 안내하는 여행사로 갔다!"
우리 또래의 지점장이 상냥하고 맞이하며
차를 내왔다.
"먼저 재혼을 축하드려요 춘희에게 들었답니다!
요즘에는 엔화가 싸서 일본여행을 많이 간답니다
또한 일본여행사와 제휴가 되어있어 저렴한 패키지
상품도 있답니다!"
"아~! 그런가요?
저는 그런 방면에는 잘 몰라서요!"
"춘희가 얘기한 삼박 사일 온천여행으로 권할게요!"
"그 육십만 원짜리 말인가요?"
"네, 맞아요!
그럼 그 상품으로 빼 드릴게요!
그런데 이 상품은 저렴한 패키지 상품이라서
항공권과 숙소만 제공되는 상품으로 숙박은
모텔급으로 보시면 됩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때 춘희가 끼어들었다.
"은혜야 나도 가고 싶다 야!
내가 일본어도 떠듬떠듬하는데!"
"아~, 춘희야!
옛날에 너도 나하고 남대문시장에 같이 일했었지!
맞아, 그때 일본 관광객들 상대하느라 우리가
일본어를 떠듬떠듬 배웠었지!"
그렇게 춘희의 친구인 지점장이 말을 거들었고
이번에는 춘희가 말을 이어갔다.
"혜숙아, 그럼 한 사람 추가하면 얼마나 되니?"
"그래, 잠깐만!
컴퓨터 들어가서 알아볼게!
음~, 1인 추가는 사십만 원으로 나오네!
그럼 2인 패키지 육십만 원에 1인 추가하면
총 백만원인데요 어떻게 할까요?"
"은혜야~!
옛정을 생각해서 나도 좀 데리고 가줘라!
내가 너희들 신혼여행 방해 안 하고 더듬거리기는
하지만 통역도 해주고 사진도 많이 찍어줄게!"
은혜는 난감해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고
그때 지점장이 나섰다.
"원래가 이 상품이 2인에 백 이십만 원입니다
통역도 해주고 사진도 찍어준다고 하니
같이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지점장이 그렇게 말을 하자 은혜도 마음이 흔들렸다.
"저~, 이것은 내가 혼자 결정을 할 수 없고
남편과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남편과 통화를 해볼게요"
그렇게 말을 하고 은혜는 정호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오자 춘희도 따라 나왔다.
은혜는 자초지종을 정호에게 모두 전해주고 있었다.
그때, 전화를 하고 있는 은혜의 휴대폰으로 다가와
"정호 씨, 저 일본어도 조금씩 하구요 사진도
잘 찍는답니다!
폐는 끼치지 않을 테니 저도 좀 데리고 가주세요!"
그렇게 통화하는 사이에 춘희가 끼어들었다.
"뭐, 춘희 씨 덕분에 싸게 했다고 하니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정호도 좀 난감했지만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을 했다.
"정호 씨가 허락을 해줬네 고맙다 은혜야 ~!
너 신혼여행 가는데 끼워줘서 정말 고마워!
내가 그래도 탑골공원에서 사람들 사진을 많이
찍어줘서 사진은 잘 찍잖아!
그러니까 나는 통역과 사진사 역할만 톡톡히 할게!"
하면서 춘희 특유의 느스레를 늘어놓았다.
은혜와 정호는 생각지도 않았던 여행을 가게 되었고
어느 날 김포공항 국제선 로비에 멋들어진
선글라스를 낀 은혜와 정호의 모습 뒤로
두 사람의 케리어 가방까지 끌고 따라오는
춘희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렸다.ㅁ
(7부) 삿포로 신혼여행
은혜와 정호는 계획에도 없었던 신혼여행에
통역사 겸 사진사를 자처하는 춘희를 대동하고
오전 11쯤 일본 온천 여행길에 올랐다.
세 사람 모두 처음 타보는 비행기였으니 막연한
설렘과 첫 해외여행의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삿포로행 비행기는 메이저 급 항공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백석 규모의 중 저가 항공기였다.
은혜와 정호 그리고 춘희는 출국 수속을 마치고
드디어 빨간색 카핏을 밟으며 트랩에 올랐다.
기내 아나운서의 안내방송과 안전수칙 등
멘트가 끝나자 비행기가 괭음을 내며 활주로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때 심장이 약해서 자주 놀라기도 했던 은혜의
얼굴이 백지장이 되었다.
"은혜 씨 괜찮으세요?"
"네~, 오빠!
이륙할 때 이렇게 어지러울 것을 미리 알았다면
멀미약이라도 좀 사 먹을 걸 그랬네요!"
"춘희야, 너는 괜찮니?"
"응, 나는 괜찮아 꼭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이야!"
지켜보는 정호도 이륙의 중압감에 사실 멀미를
좀 했으나 남자 체면에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비행기가 정상 고도에 올라 수평 비행을 하자
은혜의 멀미도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춘희가 친구인 지점장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티켓팅을 잘해놓아 세명은 창가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그제서야 안정을 되찾은 은혜가 입을 떼었다.
"와~, 오빠 우리가 지금 구름 위를 날고 있어요!
처음 보는 광경이라서 너무 신기해요!"
그러자 옆자리에 앉은 춘희가 창피했던지
입에다 검지 손가락을 갖다 대고 쉿, 하는
손짓을 했다.
세 사람은 아닌척 했지만 시골 촌닭이 서울 구경을
온 것처럼 구름 위를 날아가는 광경에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비행이었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기내식이 나왔다.
그때 춘희가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 기내식은 상품에는 없는 것인데 여행사
친구가 신혼여행 축하 선물로 주문을 했단다!"
"그래 춘희야!
덕분에 잘 먹을게!"
은혜가 대답을 하자 춘희가 또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륙 후 약 한 시간이 조금 넘어서 바다를 지나
북해도 육지가 눈에 들어왔다.
먼저 오밀조밀 한 섬들이 그림처럼 시야에
들어오자 은혜와 정호는 촌닭처럼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오빠, 오기를 정말 잘했다 그치?"
그래, 나도 처음 온 해외여행이라 미지의 세상에
온 것 같아서 기분이 좋으네!"
"그 봐요 온천여행 오기를 정말 잘했지요?"
"네, 그래요 춘희 씨 소개해줘서 고마워요!"
그때 또 기내방송 아나운서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잠시 후 신치토세 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여기는 동해와 태평양이 만나는 해변가
공항이라서 착륙 시 횡풍이 불 수도 있어 기내에
진동이 있을 수도 있으니 안전벨트를 착용하시고
앉은 채로 대기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나운서 방송 중에도 세 사람은 창밖구경에
정신이 없었다,
사월 중순인데도 삿포로 근처 산에는 하얀
눈으로 덮여있어서 내려다보는 모습은 정말로
절경이었다.
드디어 일본땅 홋카이도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장으로 들어섰지만 생전 처음으로 온 외국이라
입국 절차를 모르는 은혜와 정호는 당황스러웠다.
또한 저렴한 패키지여행 상품이라 가이드는 따로
없었으며 항공권과 숙소만 제공되었다.
이번 여행에 같은 여행사를 통해 여행을 온
단체는 약 삼십 명이었으며 같은 호텔로 예약이
되어 있었고 이동은 개별적으로 해야 했다.
그때 춘희가 자랑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걱정 마라 은혜야!
내가 그래도 일본어를 조금 하거든!
그리고 여행사 영자에게 간단한 입국절차를
다 배워서 왔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단다!"
"그래, 고맙다 춘희야!"
"내가 없었으면 정말 어떻할뻔 했니?
날 데리고 오기를 잘했지 은혜야!"
하면서 본인의 위상을 부각시켜 나갔다.
"그래그래 네가 안내를 잘 좀 해줘라 춘희야!"
"오케이 걱정 마라 은혜야!"
춘희는 입국심사장에서 여권을 들이밀고
떠듬떠듬 일본말로 관광객이라 설명을 하면서
능청스럽게도 바디랭귀지를 섞어가며 예약한
호텔 영수증 용지를 보여주자 생각보다 간단하게
입국심사가 끝났다.
이후 가방이 내려오는 컨베어벨트 앞에서
기다렸다가 제각기 가방을 찾아서 나왔다.
전철도 있었지만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해서
여행사 이영자 지점장이 메모해 준 대로
삿포로 역으로 가는 리무진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눈치가 빠르고 눈썰미가 있는 춘희는 그래도
잘 찾아다녔다.
"아, 저기 있네 삿포로역으로 가는 버스다!"
매표소 앞에는 일본 표기로 1300엔이라고
쓰여있었고 춘희가 환전한 돈으로 표를 끊고 있었다.
"우리도 엔화로 환전해 왔단다!
엔화 여기 있어 춘희야!"
"아니야, 은혜야 버스비는 싸니까 내가 낼께!
그 대신 비싼 것은 은혜 네 가 내거라 호호호..."
"그래 알았어 춘희야!"
삿포로 역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30분도
안되어 도착했다.
여행 안내서에는 오후 5시에 삿포로 역에서
호텔로 가는 셔틀버스를 탄다고 쓰여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땡땡 여행사 깃발을 들고 소리쳤다.
"땡땡 여행사에서 오신 코리안은 여기로 오세요!"
산또 호텔로 가는 셔틀버스가 여기 있어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버스에는 영문과 일본어로 산또 호텔이라고
쓰여있었다.
기사님도 산또 호텔 깃발을 들고서
이치, 니, 산, 시, 고, 록구... 를 외치며 인원을
확인하고 영어로 오케이를 외치고 관광객
전부가 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에 올라탔다.
버스는 35인승 미니 관광버스로 깨끗한 편이었다.
"야~! 중저가 여행상품인데 셔틀버스도 제공하고
괜찮다 춘희야!"
"응, 여기 여행안내 가이드북에 나와있단다 은혜야!
"춘희 씨 일본에 오니까 첫째 거리가 깨끗하고
조용해서 좋네요!"
하고 그제서야 정호도 말문을 열었다.
삿포로 시내를 조금 벗어나 한적한 산 아래에 있는
7층 규모로 객실 120실의 호텔로 서울로 치자면
별 두 개 이성급 호텔이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열쇠를 받느라 웅성거렸고
50대로 보이는 여자분이 한국식 발음으로 한분씩
이름을 불러 열쇠를 나누어주었다.
먼저 성춘희는 303호였고 은혜와 정호는 505호였으며
혼자서 온사람은 춘희와 40대로 보이는
여자 한분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쌍쌍이 온
사람이었다.
은혜와 정호가 묵을 방은 5층에 더블베드와
욕실이 딸린 방이었고 춘희의 방은 그보다 작은
싱글침대와 욕실이 딸린 방이었다.
춘희는 3층에서 내리면서 얼른 씻고
여섯 시쯤 로비에서 보자 하며 먼저 내렸다.
은혜와 정호는 일단은 방으로 올라가 짐을 풀었다.
"이 정도면 생각보다 방이 좋아요 오빠!"
"그러네 정말!
나는 중 저가 여행상품이라 싸구려 모텔이 아닐까
걱정을 했는데 괜찮네 그래!"
삼박 사일 묵을 짐이라서 풀고말고 할 것도 없었다.
"오빠 나부터 얼른 씻고 나올게요!"
"그래, 나는 안 씻고 그냥 나갔다가 돌아와서
씻을 거야!"
"아~, 그러네 오빠!
굳이 지금 씻을 필요가 없네요!
서울보단 여기가 좀 더 추운 것 같으니 위에
점퍼나 걸치고 나가면 될 것 같아요 오빠!"
"그래 그러지 뭐!"
은혜와 정호는 편한 운동화로 갈아 신고
로비로 내려왔다.
로비에는 커피자판기와 커다란 컵라면 자판기가
있었다.
그때 춘희도 로비로 내려왔다.
"춘희야 여기 라면 자판기에 라면이 무지하게
많은데 뭐라고 쓰여있는지 좀 봐줘라!"
"응,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이것은 삿포로 우동,
이것은 생라멘이라고 쓰여있다 은혜야!"
"야~, 춘희야, 그 정도만 알려줘도 좋다야~!
"오빠, 이따가 출출할 때 맛 좀 봐야겠네요, 호호호...!
"은혜야 여기 한국어로 된 가이드북 있으니
나가보자!
정호 씨 배고프세요?"
"아니요, 아까 기내식을 먹어서 그런지 허기는 없고
은혜 씨 말대로 조금 출출하네요!"
"정호 씨, 저기 개천길 따라서 십분 정도 걸으면
삿포로 시내가 나온다고 쓰여있으니 운동 삼아서
가보지요 뭐!"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렇게 룰루랄라 신바람이 난 세 사람은 나란히
삿포로 시내로 향했다.
"오빠, 저 개천에서 계속 수증기가 올라오네요?"
"응, 내가 알기로는 온천수가 흘러나와서
계속 수증기가 일어나는 것 같은데!"
"예, 맞아요 정호 씨!
여섯 시가 조금 넘어 어둑어둑했으나 커브길을
돌아가자 휘황찬란한 삿포로 시내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춘희야 너는 뭐 먹고 싶으니?"
"음~, 나는 그 유명한 삿포로 우동에다 어묵꼬치에
일본 사케를 맛보고 싶어"!
"우리는 잘 모르니까 오늘 저녁은 통일해서
그렇게 먹도록 하지 뭐!
자기는 어때요?"
"응, 나도 그렇게 같이 먹을게!"
세명은 시내를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걸었다
"야~, 저기 있다!
유리에 삿포로 우동, 오뎅탕, 오뎅꼬치, 닭꼬치,
생선구이와 사케도 있다고 쓰여있네!"
"야~, 그 정도만 읽어도 너 가이드해도 되겠다!"
"응, 알아주면 고맙지 호호호..."
메뉴가 다양해서 일단 삿포로 우동 세 개와
오뎅꼬치 한 개, 닭꼬치 두 개, 그리고 사케 한 병을
시켰다.
300엔짜리 닭꼬치와 오뎅꼬치도 푸짐했으며
700엔 하는 삿포로 우동도 삿갓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그릇에 고명까지 먹음직했다.
꼬치는 큰 접시를 달라고 해서 한 군데로
모아놓으니 영락없는 뷔페음식을 방불케 했다.
세 사람은 사케 잔을 들고 남들이 보든 말든
건배를 외치면 분위기에 들떠서 저녁을 먹었다.
일본식 사케는 마실 때는 부드럽지만 독주에
가까워 취기가 오래가는 술이다.
"오빠, 음식도 맛있고 술도 맛있네요!"
"그 봐라, 은혜야 여행 오기를 잘했지?"
하며 춘희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취기가 오른
정호도 중간에 끼어들어 입담을 늘어놓았다.
"아~, 일본땅 삿포로에서 술을 마셔보다니 정말로
뜻깊은 여행입니다 춘희 씨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이번에는 얘기한 대로 은혜가 계산을 마쳤다.
저녁 겸 술자리를 마치고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세 사람은 기분이 한껏 업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아까는 보지 못했던
로비 유리에 한국어로 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아침 열 시에 노보리베츠 온천 지옥계곡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하며 돌아오는 시간은 오후
4시입니다.
"춘희야 온천까지 셔틀버스를 운행도 해주고
좋다야!
그러면 푹 자고 내일 아침에 보자 안녕~!"
"그래, 오늘 잘 먹었다 너도 잘 자라~!
정호 씨도 안녕히 주무세요~!"
"네~,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푹 쉬세요~!"
그렇게 3층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를 했다.
"오빠 기분이 좋다 그치!"
"그래 맞아,
은혜가 좋아하는 걸 보니 나도 너무 좋아!"
"오빠, 나 먼저 씻을 거야!"
"응, 그래 먼저 씻고 와!"
은혜와 정호는 그렇게 외국 땅에서 또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며 삿포로에서 첫날밤을 맞이했다.
은혜는 침대에 누워 정호의 팔베개를 하고
가슴에 한쪽 손을 올려놓은 채 말했다.
"내일 온천에 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레네요"
"나도 그래, 평생을 일에만 쫓겨 살았는데
내 팔자에 이런 여행을 해보다니 꿈만 같아!
이게 다 은혜가 용꿈을 꾸어서 그런 거야!"
"히히 오빠도 참,
내가 자기 집에 들어왔으니 그런 꿈을 꾼 거지
안 그래요?"
"그러니까 은혜가 우리 집에 용이된 거야!"
은혜와 정호는 그렇게 신혼여행의 행복을
누려가며 포근하게 잠이 들었다.
은혜와 정호는 아침 7시쯤 일어나 로비로 내려와서
어제 춘희에게 설명을 들은 생라멘을 선택해서
어제 남은 동전으로 뽑았다.
150엔짜리 치고는 맛도 좋았고 우리와는 좀 다른
우동식 라면인데 특히 멸치 향이 나는 국물맛이 시원했다.
"안녕하세요 정호 씨!
일찍도 일어났네 은혜야!
"응, 춘희야 너도 일어났구나!
속풀이 생라멘 먹었단다 너도 하나 빼줄까?"
"아니야 은혜야!
나도 동전을 챙겨서 내려왔단다!"
그때 하나둘씩 다른 사람들도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식사제공을 안 하는 대신 컵라면
자판기로 서비스를 대체하고 있었다
은혜와 정호 춘희 셋은 제각기 방으로 올라가서
온천에 갈 준비를 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셔틀버스에는 어제 그
삼십 명 인원이 가득 차서 시끌벅적했다.
곧이어 친절한 기사님이 녹음해 둔 한국어 방송이
차내에 흘러나왔다.
노보리베츠 온천은 활화산에서 흘러나오는
자연 온천수로 일본 10대 온천 중 하나라는 것과
일 년 내내 온천 수증기로 인해 지옥계곡을 닮았다는
내용의 안내 멘트였다.
온천 입구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음식점이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요금은 1인 1500엔으로 타월과 온천탕에서
입을 옷이 제공되었다.
약간 푸르스럼한 유황 야외 온천수에 몸을 맡긴
은혜와 정호는 감격에 겨워 눈을 감았다.
"오빠~, 온천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까
평생 고생을 한 피로가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래요 은혜 씨!
나도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평생 노동일을 해가며 피폐해진 육신의 피로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아!"
조금 떨어져서 하늘을 쳐다보던 춘희도 거들었다.
"저도 두 분 덕택에 이런 호사를 누려보네요!
은혜야 정호 씨 고맙습니다!"
온천욕을 마친 세 사람은 시장끼가 돌았고
음식점으로 내려와 이번엔 초밥과 우동을
시켰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 번호표를 받고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관광지라서 그런지 초밥도 1인분에 삼천 엔이었고
우동도 천이백 엔이었다.
세 사람 합쳐서 만이천 육백 엔이면 점식 식사 한 끼에
십 이만 원이 들었으니 꽤나 비싼 가격이었다
"오늘 점심은 내가 사겠습니다!"
식사비는 부담이 되었지만 정호가 계산을 했다.
"에이 정호 씨!
정호씨 돈이나 은혜 돈이나 그게 그거지요!
주머니 돈이 쌈짓돈 아닌가요?"
하며 조금 민망했던지 은혜에게 말꼬리를 돌렸다.
"사람들이 엄청 많다 은혜야!"
"유명한 온천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단 사람이
많구나 춘희야!"
그렇게 30분을 기다려 받아 든 음식을 들고 자리를 잡았다.
"한국에서 먹어보던 초밥과는 좀 색다르네요!
은혜야 정호 씨 그렇지요?
겨자에 찍어서 드셔보세요 육즙이 풍성하네요!
우동도 쫄깃쫄깃한 것이 국물도 시원합니다!"
"네, 춘희 씨도 많이 드세요!"
"네, 초밥이 너무 맛있어요!
그런데 양이 너무 적어서 간에 기별도 안 가네요!
한 개씩 더 시켜서 먹으면 안 될까요?
정말로 초밥이랑 우동이 꿀맛 같아요!
아직 국물이 많이 남았는데 아깝다 그치 은혜야!"
듣고 있던 정호는 마지못해서 일어났다.
"은혜 씨는 어때요 하나 더 시켜줄까?"
"맛은 좋은데 너무 비싸요!"
은혜가 그렇게 말을 하면서 춘희를 살짝 흘겨보았다.
"그럼 두 개 주문해서 한 개는 춘희 씨 주고
한 개는 우리 둘이 나눠먹으면 되겠네!"
그렇게 말을 하고 정호는 주문을 하러 나갔고
그때 은혜가 언짢은 기분으로 춘희에게 쏘아붙혔다.
"춘희야 정호 씨가 사람이 좋으니까 말없이
주문하러 갔지 나 같으면 그렇게 못해준다!
그리고 여기에 와서보니 물가가 엄청 비싸다 야!
백만원을 낸 여행사 돈에 비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켜겠다 야!"
"은혜야 내가 하나 더 시키자고 한 것은 초밥양이
너무 적어서 그랬다 뭐!"
하고 대답을 했지만 분위기가 잠시 냉랭해졌다.
그때 정호가 초밥 두 접시를 들고 자리로 왔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이번에는 줄이
길지 않아서 바로 초밥이 나왔네요!"
하며 자리에 앉았으나 정호도 냉랭한 분위기임을
금방 눈치를 챘다.
"자~, 초밥 추가분이 나왔으니 맛있게 드세요!"
하고 한 접시는 춘희 앞에다 내려놓고 한 개는
은혜와 나누어 먹었다.
염치도 없는 춘희는 은혜의 핀잔에도 개의치 않고
잘도 먹었으며 그렇게 점심을 먹은 후 둘레길
산책을 나섰다.
은혜와 정호 그리고 춘희는 거대한 활화산에서
품어 나오는 수증기에 옷깃을 적셔가며 지옥계곡
둘레길을 걸었다.
일행은 오후 3시가 조금 넘어서 주차장으로 돌아와
잠시 기다렸다가 모두 다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이번에도 셔틀버스 기사님은 빠짐없이 인원을
체크한 후 출발을 했다.
잠시 후 셔틀버스 서비스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
일이 있었다
일행 중에 젊은 사람 하나가 유창한 일본어로
기사님께 다른 호텔도 이렇게 셔틀버스 서비스를
해주느냐고 물어보고 돌아서서 한국어로 말했다.
"기사님 말로는 단체 관광객을 곤광지에 데리고 오면
버스 기름값으로 얼마씩 받는답니다!
그리고 내일 오타루에 있는 키타카르 제과점과
오르골당 제과점에 갈 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운행 서비스를 한답니다,
은혜와 정호 그리고 춘희는 개운한 마음으로
호텔방으로 제각기 올라갔다.
은혜는 춘희를 데리고 와서 정호가 혹시라도
불편해하지 않을까 하는 자격지심으로
정호에게 미안해서 말을 꺼냈다.
"춘희는 덤벙대면서 눈치도 없는 편이니까
오빠가 그 점은 이해를 좀 해주세요!
그래도 몇십 년을 친구로 살아왔지만 춘희도
쪼달리게 살아와서 그랬지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건 자기 얘기가 맞는 것 같아!
그런데 혹시 춘희 씨가 온천여행을 알선해 준
대가나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궁금해!"
"에이, 오빠도 참!
우리가 여행경비도 내줬잖아 그러면 됐지 뭐!"
"그래도 춘희 씨를 안 데리고 왔으면 우리가
일본을 몰라서 고생을 많이 했을 거야!"
"맞아요 오빠!
춘희가 미운구석은 있어도 속내는 착해요!"
"오빠 점심을 비싼 걸로 배불리 먹었으니
이따가 저녁은 자판기에서 다른 컵라면 빼서
먹도록 해요!"
"응, 그래 맞아! 컵라면 우동이 맛있더라고!"
그리고 세명 다 휴대폰 요금 폭탄을 맞을까봐
로밍을 안 해와서 조금은 불편했으나 참을만했다.
춘희를 부르려면 구내전화를 해야 했으나
은혜와 정호는 그냥 로비로 내려왔다.
이번에는 다른 라면을 뽑아서 뜨거운 물을 채워
별미처럼 그렇게 저녁을 때웠다.
이튿날은 어제 버스에서 얘기를 들은데로
약 삼사십 분 거리의 오타루에 있는 제과점 방문
여행이었다.
이번에는 은혜와 춘희가 같은자리에 앉아서
어제 있었던 약간의 오해를 풀었다.
"은혜야 내가 밉지?
"아니야 춘희야 생각보다 음식값이 비싸서
내가 그랬으니 너무 마음두지 마라 야!"
오타루에 가는 길은 정말로 환상적이었다.
길게 드리워진 해변가 철책을 따라 바라본
바다는 정말로 절경이었다.
버스 기사님은 떠듬떠듬 한국말로 여기가
포토샾이니 잠시 정차를 하겠습니다 하면서
해변가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모두들 사진 찍기 삼매경에 빠졌다.
은혜와 정호도 포즈를 잡으며 오늘은 모델이 되었다.
"자, 더 가까이 붙어요 그래야 사진이 잘 나오지!
이번에는 정호 씨가 은혜 얼굴에 뽀뽀하는 거
찍을게요!"
하며 춘희는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다.
어쨌거나 세 사람은 아름다운 해변가를 배경으로
여행온 보람을 만끽했다.
운행시간을 조금 초과해서 도착한 버스는
오타루 오르골당 제과점 주차장에 도착을 했다.
말이 제과점이지 이곳은 제과제빵 백화점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커다란 건물에 인형가게와
기념품 가게도 있었다.
"야~, 이렇게 큰 제과점은 생전에 처음이다 "
은혜가 그렇게 감탄을 하자 춘희도 거들었다.
여행 가이드북에서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큰 줄은 몰랐어!"
호들갑을 떨면서 안으로 들어가자 모두들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 모습이었다.
정말로 없는 게 없는 제과 백화점이었다.
정호는 대충 돌아보고 가격대가 저렴한 것으로
골라서 몇 개 사기로 마음을 먹었다.
진열대에 있는 찹쌀모찌와 앙꼬빵을 한국어로
적어놓았기에 알아보고 두개씩 들고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고 돌아와 봉투하나는 춘희에게 주었다.
"아이구요 정호 씨 미안해서 어떻게 해요!
빈대도 낯짝이 있으니 커피와 빵은 제가 살게요!"
은혜야~, 아까 같이 보았던 소보루 빵과 찹쌀전병
하고 아침을 때우자!
커피는 뭘로 드실래요?"
하고 춘희는 계산대에서 약 이천엔 정도의
주문을 하고 계산을 했다.
세명은 오르골당 광장에 파라솔이 있어
그 기로 가서 앉아 도란도란 아침을 때웠다.
셔틀버스 기사님이 부여한 두 시간을 보내고
다음 목적지인 키타카로 제과점으로 향했다.
그곳도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제과점이었다.
이번에는 주로 초콜릿 종류가 많았다.
은혜는 저번 구청 앞에서 초콜릿을 사서
정호와 반씩 나누어 먹은 것을 상기하며 이번에는
통 아몬드가 들어간 300엔짜리 초콜릿 세 개를
사가지고 한 개는 춘희에게 주고 정호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밖으로 나왔다.
저만큼 떨어진 파라솔로 가서 주머니에 있는
초콜릿을 꺼내고는 혼자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호호호 오빠!
저번에 구청 앞에서 우리가 쵸코배 한 것 생각나요?"
"알지, 알고 있지 허허허..."
"그럼 여기서도 쵸코배 해요!"
하면서 계속 웃음을 참지 못했다.
"거참, 싱겁기는..."
하며 못 이기는 체하고 쵸코배를 하고 먹었다.
"오빠 이건 통 아몬드가 들어가서 그런지 몰라도
진짜 맛있네요!
우리도 남은 여생을 이렇게 달달하게 살아요!"
하면서 또다시 쵸코배를 외쳤다.
오후 4시가 되어가자 주차장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은혜야 층층이 색다른 과자들로 채워져서
꼭 백화점에 쇼핑을 온 기분이다 야!"
하면서 춘희도 셔틀버스로 왔다.
오는 길에도 기사님은 휴게소에 십분 정도
정차를 하고 사진 찍기와 쇼핑할 시간을 주었다.
은혜와 정호 그리고 춘희는 화장실에 들렀다가
매점으로 나오다가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 파는
일본식 규카츠를 저녁거리로 준비했다.
가격대는 700엔으로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는
저렴해서 은혜가 세 개를 구입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춘희는 고맙다는 인사를
두 번이나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은혜와 정호는 말끔하게 샤워를 하고 7시쯤
규카츠를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었는데
돈카츠와 또 다른 맛에 놀랐다.
"오빠, 우리가 먹던 돈카츠와는 완전히 달라요
부드럽고 또 일본식 된장국도 구수하네요!"
"응, 그러네 여기 봉지에 비프라고 영문으로
되어있으니 소고기로 만들었나 봐!"
은혜와 정호는 저녁을 먹고 양치를 한 후 303호
춘희에게 구내전화를 했다.
"춘희야 규카츠 저녁은 먹었니?"
"그래, 은혜야 덕분에 맛있게 먹었다 야!"
오늘이 마지막 저녁인데 삿포로 시내 구경이나
갈까?"
"그래 내일 돌아가야 하니까 한 바퀴 돌아보자!"
여기 가이드북을 보니까 스스키노역 근처에
한국인 상점도 많이 있고 번화가라고 쓰여있네!
삿포로 역에서 한 정거장인데 여기서 삼각형
꼴로 나와있으니 걸어서 15분 거리라고 되어있네!"
"그래 저녁도 먹었으니 산보 삼아서 가지 뭐!"
"오빠, 스스키노역 근처에 구경하러 가요!"
"내일 가야 하니까 추억거리 만들로 가야지요
그래 갑시다!"
춘희 말대로 스스키노역 근처도 삿포로역
못지않게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했다.
은혜와 정호는 아주 저렴한 일본 부채와 머리핀
브로치 등 몇 가지만 샀다.
이번에는 춘희도 여성에게 필요한 기념품을
자기돈으로 구매했다.
한국인 상점도 더러더러 보였고 김치찌개
부대찌개 해장국집도 있었고 일본식 발음인
기무치 가게도 있었다.
"춘희야, 다리 아프다 이제 돌아가자!"
"오케이, 살 것도 다 샀고 눈요기도 많이 했으니
슬슬 돌아갑시다!"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춘희가 100엔짜리
아이스크림 세 개를 사 와서 셋이서 나눠먹으며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도 역시 일본에서 마지막 아침으로
자판기에서 삿포로 뽑아서 우동을 먹었다.
로비 유리에는 한국어로 12시 비행기 시간에
맞춰서 가야 하고 출국심사에 1시간쯤 소요되어
9시 30분에 셔틀버스가 출발합니다.
라고 쓰여있었다.
은혜와 정호도 빠트린 것 없는지 살펴가면서
가방을 꾸렸다.
9시가 넘어서자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차장으로 나온 주인인 미찌꼬 아주머니는
호텔 팸플릿과 삿포로 컵 우동 두개씩과 삿포로
기념품을 넣은 작은 쇼핑백을 하나씩 나눠주고
꾸벅 읍소를 하며 서투른 한국말로 다음에 또
만나게스무니다 감사하무니다, 를 연발했다.
셔틀버스가 출발할 때도 미찌꼬 아주머니는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열 시가 조금 넘어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을 하였고 기사님은 가방을 일일이 찾아주며
감사하무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를 연발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올 때는 삿포로 역까지 셔틀버스가 왔으나
떠날 때는 신치토세 공항까지 데려다준 것은
고마운 일이나 홍보성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은혜와 정호가 느낀 일본은 음식값이 좀 비싸서
그렇지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친절한 일본
여행의 보람을 가지고 입국장으로 향했다.
출국 심사는 입국 때보다 엄격하게 이루어졌고
일부 관광객은 가방에 넣어둔 작은 화산석을
압수당했으며 이유는 반출 불가 품목이었다.
은혜와 정호 그리고 춘희는 많은 것을 사지도
않았기에 쉽게 여권에 출국 도장을 받아서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비행기 트랩에 올랐다.
은혜와 정호 그리고 춘희는 삿포로에서 많은
대화를 했기에 조용히 비행기 이륙을 기다렸다.
은혜는 올 때 느꼈던 이륙 공포증에 살짝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은혜 씨 괜찮겠어요?"
정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후 기내 아나운서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우리 비행기는 잠시 후 이륙을 하겠습니다
안전벨트를 착용하시고 이륙을 완료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마시고 음료수나 물은
이륙 후에 드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이
점심을 드셔야 할 시간이라서 햄버거와 음료수를
저희 항공사에서 준비를 했으니 맛있게 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필요한 물품은 저희 스튜어디스가
지나갈 때 말씀해 주세요 편안하고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저희 항공사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나운서 멘트가 끝나자 비행기는 서서히 움직였고
바람이 없어 이륙은 순조로워 금방 수평비행에
들어갔다.
세 사람은 올 때와 같은 좌석으로 이번에는
서울로 가는 오른쪽이라 은빛 눈부신 햇살이
비행기 날개에 반사되는 신비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오빠 지금까지 살아오며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본 온천여행을 다 해봤네요!"
"그래요 나도 마찬가지로 감격스럽네!"
"은혜야 정호 씨 신혼여행 오기를 잘했지요?
이제 더 나이 들면 이런데 오고 싶어도 못 온답니다!"
"그래요 춘희 씨 안내를 잘해주셔서 덕분에
온천여행 잘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정호 씨!
덕분에 저도 여행 잘했답니다 감사합니다!"
이륙 후 한 시간쯤 지나자 한반도 육지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 위를 지나다가 김포공항 근처에서
고도를 낮추자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렸다.
김포공항 활주로에 랜딩기어가 마찰하는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오빠 춘희야 이제 서울로 돌아온 실감이 난다 야!"
"그래 그렇지?
사일동안 떠났는데 벌써 매콤한 김치가 생각나네
집에 가면 가기 전에 담아둔 시원한 물김치부터
먹어야겠다 호호호..."
입국절차는 일본어서 출국할 때와 마찬가지로
엑스레이 통과도 까다로웠다.
앞쪽에서 시끄로운 소리가 들려 쳐다보았더니
누군가 입국 심사대에서 마일드 땡땡 담배를
가방에 너무 많이 담아서 초과한 담배를 세관에
압수당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오빠, 춘희야 우리는 간단하게 왔으니
아무 일도 없겠지?"
"그럼 아무런 걱정하지 마라 은혜야!"
김포공항 국제선 로비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그때, 눈치 빠른 춘희가 마지막으로 생색을
내려는 듯 급하게도 말을 했다.
"은혜야 정호 씨 잠깐만 기다리세요
얼른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 올게요"
하면서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오빠, 춘희가 미운구석은 있어도 이럴 때는
꼭 필요하니 친구가 맞지요?"
"그래 맞아!
우리도 사실 그일 없었으면 여행은 꿈도 못 꾸고
지금쯤 일터에 나가 일을 했겠지!"
"맞아요 오빠!
참, 인생이라는 게 내일을 알 수가 없네요!"
그때 춘희가 비닐우산 세 개를 사가지고 왔다
"가만있어봐요!
우리는 5호선 타고 군자역에서 내려 7호선으로
갈아타면 되는데 춘희 씨는 어떻게 가지요?"
"네, 저는 공덕역에서 6호선 갈아타고 증산역에
내리면 근처가 집이에요!"
"아~, 그러시군요!
그러면 같이 가시면 되겠네요!"
출발역이 근처라서 자리는 넉넉했고 정호는
가방을 선반에 올려놓고 셋이 나란히 앉았다.
"은혜야 어차피 카메라는 여행사 영자에게
빌려온 것이니까 영자에게 가서 컴퓨터에
연결해 폰에 다운받아서 카톡으로 보내줄게!
은혜야 그래도 여행에서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단다 그치?"
"맞아 고맙다 춘희야~!"
그렇게 얘기를 하다 보니 공덕역까지 왔다.
은혜와 정호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춘희를
먼저 보냈다.
은혜와 정호는 면목역에서 내려 간단한 저녁거리
반찬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사 온 지가 한 달이 지났지만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온지라 집에 들어가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오빠 온천여행 너무 좋았어 사랑해요"!
"은혜 덕분에 나도 행복한 여행이었어
고마워 사랑해!"
집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서
새로운 느낌으로 오래도록 진한 포옹을 했다.
(8부) 순간의 몰락
일본 여행을 다녀온 은혜와 정호는 춘희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았다.
춘희 덕분에 저렴한 가격으로 호사를 누렸다고
생각을 하였다.
덤벙대고 염치는 없었지만 매 순간 기지를 발휘하는
춘희의 재주에 감탄을 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예전의 춘희를 잊었고 또 다른
춘희로 각인되어 신뢰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 티브이를 보고 있던 정호가 은혜에게 말했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자꾸 근력이 빠져나가는
그런 느낌이 드네!
우리도 저 광고에 나오는 운동기구를 삽시다!"
"아이참 매일아침 중랑천 산책을 하잖아요?"
"아니야 그것 가지고는 부족한 것 같아!
어차피 저기 빈방이 있잖아 저기다 두면 되지 뭐!"
"그래요 그건 오빠가 알아서 하세요!
오빠, 그런데 책상 서랍에있는 이 노트는 뭐예요?"
하면서 은혜는 노트를 꺼내서 정호에게 물었다.
아!, 그 노트?
내가 혼자 살면서 마음이 울적할때마다 노트에
그냥 시를 끄적여 본거야!
내가 사실은 고등학교 때는 문학도 지망생 이었는데
집안이 가난해서 대학교 진학은 포기했지!"
"오빠 이거 너무 잘 썼다 정말로!
내가 한번 읽어볼게요!"
하면서 은혜는 시를 읽어 내려갔다.
(늙은 호박)
잡초에 기댄 채
등짐 지고 앉은 세월의 무게
햇살 친구 삼은 누런 호박
깊게 패인 주름
연륜이 쌓여 가는 듯
묵상에 접어들어 아무런 말이 없다
비 오면 젖은 채로
더우면 더운 데로
그저 무덤덤
노을에 비친 모습
초로에 든 황혼길
나를 보는 듯
왠지 모를 숙연한 마음
때 되면
서릿발 내린 들녘
등 굽은 할미 찾아와
아이고,
참 잘도 읶었구나
늙어도 참 곱게 늙었어
작년하고 똑같은 말씀 하실 테지..
"오빠 너무 감성적이다!
그럼 우리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시도 한번 써보세요
숙제입니다 숙제, 꼭 써서 제게 보여주세요 아셨지요?"
"응, 알았어요!"
말대답을 하면서 운동기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정호는 소일거리가 부족한 부분을 운동기구에
매달려서 메꿨다.
은혜가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는 정호에게 말했다.
"오빠, 춘희에게 전화가 왔는데요
지금 을지로 여행사 친구에게 가고 있다네요?"
"응, 춘희 씨에게 전화가 왔다고?"
정호는 운동 중에 가쁜 숨을 쉬면서 그렇게 말했다.
"네, 사진도 받아야 하고 겸사겸사 차 한잔 하자고 하니
저녁시간 전에 다녀올게요!"
"그래요, 차 조심하고 갔다 와!"
은혜는 대답을 하고 집을 나섰다.
이제는 혼자서도 곧잘 나다녀서 을지로 있는
여행사도 쉽게 찾아갔다.
이층에 있는 여행사 문을 열자 춘희가 먼저 와있었다.
"어, 은혜야 어서 와!"
"어서 오세요 은혜 씨!"
"네, 안녕하세요 지점장님!
덕분에 일본 온천여행 잘 다녀왔답니다!"
"아이고 좋았다니 다행입니다!
아참, 인사하세요 여기는 제 남편입니다"
"반갑습니다 김성태입니다
제가 백수라서 아내덕에 먹고 산답니다!
"아이구요 그래도 신수가 훤하십니다!
저는 춘희 친구 주은혜입니다!
은혜가 그렇게 말을 하자 지점장 남편인 김성태가
웃으며 대답을 했다.
"저는 젊어서 경마 기주였었고 나중엔 조교를 하다가
나이 들어서 은퇴를 하고 지금은 영자 씨를 만나서
이렇게 얺혀서 산답니다!"
김성태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차 한잔 드릴게요 뭘로 드실래요?"
지점장 영자가 은혜에게 물었다.
"네, 그냥 커피로 할게요!"
"네, 그래요 앉으세요!
여보, 당신은 카메라 사진 컴퓨터에 다운 받아서
춘희 휴대폰 톡으로 좀 보내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마님!"
"사실 컴퓨터는 저보다 남편이 더 잘해요!"
하고 은혜와 춘희를 쳐다보며 말했다.
한쪽 테이블에서 드러럭 드러럭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춘희도 오고 은혜 씨와 우리 남편도 오랜만에
사무실에 나왔으니 특별히 원두커피를 내릴게요!"
하면서 영자는 능숙한 솜씨로 원두커피를 내렸다.
"오~, 커피 향기가 좋은데?"
하고 지점장 남편 김성태가 말했다.
"자~, 한잔씩 드셔보셔요!
특별한 날에만 내리는 에티오피아산 아라비아 커피입니다!"
"어쩐지 향기가 좋더라 영자야!
은혜야 커피맛 어때?"
"응, 춘희야!
난 원두커피는 잘 모르지만 좋네!"
"춘희 씨 카메라 사진 업로드해시 톡으로
보냈습니다"
지점장 남편 김성태가 자랑을 늘어놓았다.
"네, 고맙습니다 성태 씨!
은혜야 너에게도 바로 보내줄게!
갤러리에 저장하면 된단다"
"응, 고마워 춘희야!
"은혜 씨는 꼭 귀부인 마님같이 멋있습니다!
주말에는 뭐 하시나요?"
컴퓨터에서 사진 업로드를 마친 김성태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네~, 저는 주부일 하면서 시간 날 때마다
중랑천이나 용마산 둘레길 산책을 한답니다!"
"그러면 주말에 경마장으로 오세요!
저도 심심풀이로 경마장에 구경을 간답니다!
사실은 춘희 씨가 경마장에서 집사람을 소개해줘서
인연이 됐답니다!"
"아, 그러시군요!
원래가 춘희는 그런 쪽에 재주가 많답니다!"
"그래 은혜야!
경마장에서 말이 뛰는 걸 보면 생동감이 넘치고
우산과 캔커피도 팔고 일석이조야!
나도 거기서 남자친구를 만들었단다 호호호!"
춘희도 김성태의 말에 피드백을 연발했다.
"아이고 저는 그런 쪽에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춘희에게 말만 들었지 전혀 모른답니다!"
전화로 여행 상담을 마친 지점장 영자도
자리에 앉았다.
"미안해요, 전화상담이 있어서 바빴답니다!
은혜 씨 삿포로 온천여행 괜찮았지요!
저렴한 가격대라서 그 상품이 요즘 인기가 좋답니다.
"네, 덕분에 잘 다녀왔답니다!"
"앞으로 소개 좀 많이 해주세요!"
"혹시 주위에 갈 사람 있으면 소개할게요!"
"어머 벌써 다섯 시가 넘었네!
오랜만에 은혜 씨와 춘희도 왔는데
여보, 춘희랑 같이 아귀찜에 소주 한잔 할까요?"
"나야 좋지요!
우리 마나님이 쏜다면 대환영이지요!"
"저는 정호 씨 저녁 차려줘야 된답니다!
찌개도 떨어져서 들어갈 때 시장도 봐야 되고요!"
"네~, 아쉽네요 그럼 다음에 식사 한번 같이해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춘희와 지점장 부부는 근처 식당으로 가고
은혜는 정호가 쓴 시를 표구로 만들어 정호에게
선물로 줄려고 맡겨두었던 표구를 찾아서
전철역으로 향했다.
"오빠, 다녀왔답니다!"
"그런데 그건 뭐야?"
"응, 오빠가 쓴 시에 내가 서투른 솜씨로
그림을 그려 넣어서 표구로 만들었지!
어때요?"
"와~, 내가 쓴 시 보다도 은혜가 그린 그림이 더 멋있다!
어떻게 늙은 호박 그림을 그렇게 잘 그렸어?"
'응, 별 재주는 아닌데 오빠,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교내 미술대회에서
최우수상도 받고 그랬거든 호호호"
"어쩐지 병원에서 뜨개질하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을 했지!"
"내가 오빠에게 표구 선물했으니 오빠는
저번에 시 쓰는 것 숙제 보여주세요!"
"응, 그 시는 당신에게 드리는 선물이에요!
그 책상 서랍에 넣어놨으니 한번 봐줘요!"
"네, 알았어요 오빠!
여기 있네요!
이번에도 내가 한번 읽어볼게요
(황혼에 피는 꽃)
벌 나비
떠나고서
이대로 고목이 되나 했소
하여,
그대를 만나서
나는 꽃이 되고자 했지요
이제,
새봄이 돌아온 듯
생가지 끝자락에 꽃망울 터지고 있답니다
나는 당신을 꽃이라 부릅니다
황혼에 피는 꽃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은혜, 당신을 사랑합니다. 김정호)
"와~, 오빠 너무 감동적이에요!
오빠 진짜 시인을 해도 되겠다 그치?"
"에이, 이 나이에 시인은 무슨 시인이야!
이미 지나간 시절에 꿈이었는데 허허허"
은혜와 정호는 화가와 시인이 된 듯이 그렇게 기뻐했다.
오늘도 은혜와 정호는 중랑천 장미공원 둘레길을
둘이서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다.
오월이 되자 장미꽃 싱그러운 모습에
어디선가 날아오는 라일락 향기가 너무 좋았다.
언제나 춘희의 전화는 분위기를 깨트리는
타이밍에 벨소리를 울렸다.
"은혜야 오늘은 뭐 하니?"
"응, 정호 씨 하고 중랑천 장미공원에 나왔지!"
"야~, 신혼재미에 깨가 쏟아지는구나 호호호...!"
다음 주 토요일에 별일 없으면 경마장으로 와라!"
"나는 길도 모르고 그쪽에 취미도 없잖아!"
"사실은 다음 주 토요일이 내가 사귀고 있는
우리 애인 생일이야!
영배 씨가 한턱 쏜다고 친구도 데리고 오란다 야!
그 사람 잘 나가니까 정호 씨와 같이와도 된단다"!
"요즘은 정호 씨도 바쁘단다!
옛날에 하던 일 팀장을 맡아서 하거든!
다음 주 월요일부터 새로운 공사에 들어가서 바쁘단다!"
"그래 무슨 일을 하는데?"
"응, 원래 정호 씨가 목수였잖아!
요즘은 조그만 공사를 떠맡아서 한단다!"
"아~, 그렇구나!
그것도 사업인데 이제는 너도 사모님이다 야!"
"몰라~, 그래서 그런지 술자리도 많아졌고
새벽에 들어올 때도 있고 그렇단다!"
"그래, 잘 되도록 내가 기원해 줄게!
그럼 다음 주에 또 전화하자!"
춘희는 그렇게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춘희 씨에게 온 전화구먼!"
"맞아요 오빠!
춘희가 캔커피 파는 경마장에 놀러 오라고요!"
은혜와 정호는 해거름 한 저녁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정호는 월요일 새벽에 일어나서 은혜가 끓여준
북엇국에 코다리 조림으로 아침을 먹고 6시쯤
공사 현장으로 나갔다.
은혜는 정호가 일 나가는 날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난다.
아침상을 차려먹고 정호를 보낸 다음 설거지를
해놓고 그때부터 모자란 잠을 한숨 자는 습관이 생겼다.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또 휴대폰 벨이 울렸다.
"은혜야 뭐 하니?"
"응, 정호 씨는 아침상 차려드려서 밥 먹고 일 나갔지!
나는 졸려서 한숨 잤다 춘희야!"
"요즘엔 부업거리도 안 들어와서 심심하단다!
그래서 전화를 했지!"
"그렇구나!"
"그나저나 이번주 토요일 날 저번에 말했던
경마장으로 놀러 와라!
영자 남편도 오고 우리 애인도 온단다!
자기 생일이라고 지가 한턱 쏜단다 호호호...!"
"야~, 나는 길도 모르고 안 가고 싶다 춘희야!"
"집에만 처박혀 있으면 우울증 걸린다 은혜야!
그러지 말고 내가 길 알려 줄 테니 와라!
경마장에 오면 스트레스도 확 날아간단다!
카톡으로 시간과 전철노선 보낼게 꼭 와라!"
"그래, 생각은 해볼게!"
춘희에게 바로 카톡이 왔다.
"토요일 아침 아홉 시쯤 사가정역에서 7호선 타고
총신대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탄 다음 전화해라!
경마공원역 4번 출구로 나오면 내가 기다릴게"
춘희는 과천경마공원 가는 길을 상세하게 보내왔다.
은혜는 정호가 내일도 빌라 신축공사 마무리를
위해 현장에 나가야 하기에 9시 뉴스를 보다가 잠들었다.
은혜는 오랜만에 일찍 잠들어서 그런지 묘하게
또 꿈을 꾸었다.
"이상하네! 왜 산불이 나는 꿈을 꾸었을까?
오늘은 콩나물이나 끓여야 할까 보다!"
은혜는 속으로 되뇌며 주방으로 향했다.
정호는 오늘도 새벽밥을 먹고 공사현장으로 나갔다.
은혜는 설거지를 끝내놓고도 어제 일찍 자는 바람에
잠이 오질 않았다.
한참 동안 티브이를 보며 소파에 누워있는데
또 벨소리가 울렸고 역시나 춘희의 전화였다.
"어, 그래 춘희야 아침은 먹었니"
"그래 대충 챙겨 먹고 과천 가는 중이야!
너는 뭐 하고 있니?"
설거지 끝내고 티브이 보고 있단다!"
"야 은혜야 집에 있으면 뭐 하냐?
심심한데 카톡에 보낸 것 따라서 과천으로 와라!
그냥 운동화에 점퍼나 걸치고 오면 된단다!"
"그래 알았어!
별일 없으면 가볼게!"
하고 시계를 보니 아직도 여덟 시였다.
"집에 있기도 무료한데 그럼 한번 가볼까?"
춘희가 몇 번이나 독촉을 해서 자신도 모르게
화장대에 앉아서 화장을 하고 있었다.
춘희 말대로 운동화에 점퍼를 걸치고 사가정역으로
향했다.
은혜는 전철에서 시선을 둘 곳이 없어 언제나
소설책을 한 권 들고 나와서 읽는 시늉이라도 한다.
30분 정도 지나자 총신대입구역이었다.
4호선 방향으로 가면서 춘희에게 전화를 했다.
"응, 은혜야 어디쯤 왔니?"
"여기 총신대입구역인데 4호선 방향으로 가고
있단다!"
"그렇구나 그기서는 10분밖에 안 걸려!
내가 십분 후 과천경마공원역 4번 출구로 갈게!"
"그래 알았어!"
잠시 후 은혜와 춘희는 전철역에서 만나
과천경마공원으로 향해서 가고 있었다.
"춘희야 그건 박카스 손수레니?"
"아니야 은혜야!
여기서 박카스 파는 것은 불법이고 또 여기서는
그게 먹히지도 않아!
그래서 지금은 캔커피와 우산을 팔고 있단다!
그것도 아는 사람을 통해서 마사회 사무실에
어렵게 등록을 했지!"
"그래도 여기는 돈이 흔해서 수입은 짭짤하겠다!"
"그래 은혜야 호호호...
그나저나 탑골공원 요지를 너에게 넘겨주고
나는 여기와서 다시 개척하는라 애를 먹었단다!
그것은 은혜 네가 알아줘야 한다 알았니?"
"그래 춘희야 알고 있단다!"
"알아주면 고맙지 호호호"
춘희는 지나는 길에 경비원에게 인사를 꾸벅하였다
"오~, 캔커피 아주머니 오셨군요!"
하자 춘희는 얼른 캔커피 한 개을 꺼내어 드렸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네!"
춘희는 은혜에게 대답을 하면서 귓속말을 했다.
"많이는 팔지만 경비들에게 잘 보여야 한단다!"
"너는 재주도 좋구나!
나는 하라고 해도 무서워서 못하겠다 야!
춘희 너는 유명 인물이 다되었구나 호호호..."
은혜는 그렇게 말로만 듣던 과천경마공원으로 들어갔다.
경마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시끌벅적했다.
그라운드에 경주마는 달리고 관중들은 자기가 산
번호를 외치며 난리가 아니었다.
"춘희야 경마장이 엄청 크다 야!
꼭 축구경기장에 온 것 같아서 깜짝 놀랐잖아!"
"저기로 올라가면 구석지에 내 아지트가 있단다!"
자리에 들어서자 지점장 영자 씨와 남편 김성태,
그리고 또 한 남자가 춘희를 보고 인사를 해왔다.
"춘희 씨 어서 오세요!"
"영자야, 성태 씨도 오셨군요!
자기도 왔네 언제 왔어?"
"어~, 조금 전에 와서 첫 경주 샀는데 꽝 났어!"
춘희는 뒤따라 오는 은혜를 가리키며 인사를 시켰다.
"영자와 성태 씨는 봐서 알 테고
자기야 내가 얘기하던 내 친구 은혜야 인사해!"
"어서 오세요 은혜 씨 반갑습니다!
저는 춘희 남자 친구 조영배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주은혜입니다!
"우리 영배 씨는 실내 골프장을 운영하고 있단다"
하며 춘희는 먼저 캔커피를 한 개씩 나누어주었다
"오늘도 화끈하게 한판 따세요 파이팅!"
춘희는 은혜에게도 캔커피 한 개를 주었다.
1,2 경주가 끝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바닥에는 하얀 종이 투성이었다.
"춘희야, 바닥에 저게 다 뭐야?
"응, 경주 끝나고 자기가 산 번호가 등수에
들지 못하면 저렇게 다 찢어서 버리는 거야!"
"세상에 그러면 저게 다 돈이네?"
"그래 그렇다고 봐야지!
그런데 말이 뛸 때는 사람들이 정신없단다!
은혜야 여기는 소매치기도 많으니 조심해라!"
"응, 알았어 춘희야!"
그때 트랙이 잘 보이는 곳에 서있던 남자들이
돌아왔다.
"자기야 영자랑 성태 씨는 어떻게 됐어?"
"응, 영자 부부는 꽝이고 나는 복수로 맞았는데
배당은 가봐야 돼!
이번 경주는 별로였지만 다음 경주는 특별상금
이벤트가 걸려있으니 잘 사야 돼!"
하며 춘희 애인 조영배가 말했다.
"은혜야 너도 같이 들어가 보자!
매장 안쪽에도 구경을 해봐야지!"
하며 춘희는 은혜를 데리고 들어갔다.
"은혜 씨 이번 경주는 특별상금이 붙은 경주입니다!
조금만 사보세요!
제가 옛날에 기수 출신이고 조교 출신입니다!
제가 찍어주는 것을 이만 원만 투자해 보세요!
저기 2번마와 17번마는 비실비실하다가
꼭 큰 경기에서는 잘 뛴답니다!"
"저는 경마에 대해서 전혀 모른답니다!"
라고 말하자 김성태가 또다시 부추겼다.
"저를 믿어보세요 최소한 본전은 찾을 겁니다!"
은혜는 호기심 반, 궁금증 반으로 못 이기는 체
따라서 이만 원 만 사봤다.
성태와 은혜는 같은 번호를 또 춘희와 조영배는
또 다른 번호를 똑같이 샀다.
"춘희야 많이 팔았니?"
"응, 열개 팔았다 호호호..."
잠시 후 경기 시작을 알리는 아나운서 멘트가 나왔다.
드디어 총소리와 함께 출발대에서 말들이 총알처럼
튀어나오자 관중들은 저마다 자기가 산 번호를
외치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은혜는 관심도 없고 해서 캔커피 박스 자리를 지키며
멀리서 지켜보았다.
영자와 남편 그리고 춘희와 조영배도
똑같이 소리를 질렀다.
마지막 결승점 근처에서 일등으로 가던 말이
넘어지고 뒤쪽에서는 추월을 하고 난리가 났다.
관중석에서는 여기저기 욕설이 난무했다.
경기가 끝나자 극과 극의 현상이 벌어졌다.
돌아서 나오는 춘희의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김성태는 만세를 불렀고 춘희와 조영배는
풀이 죽어서 나왔다.
"은혜 씨!
들어왔어요 일등으로 들어왔답니다!"
김성태는 만세를 부르는듯한 포즈를 취했다.
은혜는 뭐가 뭔지 몰라서 멍하게 바라보았다.
"은혜 씨 배당이 얼마나 나왔는지 빨리 가봅시다!"
"네, 알겠습니다!"
은혜는 이끌리듯 뒤따라갔다.
이미 마권 매장 환급 매대에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전광판을 쳐다보던 김성태가 또 한 번 만세를 불렀다.
뒤돌아서 김성태는 춘희와 은혜에게 귓속말로 전해왔다.
"특별상금 포함해서 배당이 2400%입니다!
대박 터졌습니다 대박!
이만 곱하기 이천사백 하면 사천팔백입니다!
세금을 떼고도 사천은 됩니다!
에이 좀 많이 살걸 그랬네요"
휴대폰 계산기를 누르고 김성태가 소리쳤다.
은혜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김성태는 환급받은 돈을 영자에게 주었고
은혜는 오만 원권 다발을 가방에 넣었더니
가방에 현금으로 가득 찼다.
옆에서 춘희와 조영배도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오늘 영배 씨 생일인데 제가 한턱 쏘겠습니다!
저기 과수원옆에 삼계탕과 염소탕 잘하는 데가
있는데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김성태가 그렇게 말하자 조영배가 말했다.
"내가 살려고 했는데 잘됐네 땡큐지 땡큐요!"
그렇게 은혜는 어벙벙한 상태로 함께 택시에
올라탔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밑반찬으로 소주잔이 오갔다.
술을 잘 못 마시는 은혜는 맥주를 한병 시켜서
조금 마셨다.
그때 김성태가 은혜를 쳐다보며 말했다.
"은혜 씨 오늘 처음 오셨는데 대박이 터진 겁니다!
그 돈 은행에 넣어두시고 올 때마다 십만 원만
찾아서 오세요 밑져도 본전이라 생각하시구요!"
"네, 알겠습니다!
오늘 와서 보니 여기서는 선글라스가 필요하군요!
성태 씨 덕분에 딴 돈이니까 나중에 영자 씨를 통해서
선글라스 하나 선물하도록 하겠습니다!"
은혜는 경마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마력에
빠져버렸다.
정호는 그동안 빌라 신축공사 목수일이 끝나자
새로운 일거리가 없어 집에만 있었다.
정호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좌불안석을 못했다.
"오빠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응, 내가 처음 맡은 목수일인데 공사는 끝났지만
돈이 안 나와서 큰일이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응, 건축주는 시공사 사장에게 돈을 줬다는데
나는 그 돈을 못 받았어!
오늘도 전화를 했지만 통화가 안 돼서 그 사무실로
가봐야겠어!"
"오빠, 우리 사무실에 소속된 사람들은 오빠가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렇지, 일단은 업자인 내가 먼저 주고 시공사에서
받아내야지!
"그럼 그 돈이 얼마나 돼요?"
"응, 그렇게 많지는 않아!
목수 여덟 명에 한 달 치 임금이니까
사천만 원 정도 되나 그래!
"네~, 그렇구나!
"저번에 오억 원을 이율 높은 정기적금에
들어놨잖아!"
"네~, 맞아요 오빠!"
"그것을 해지해서 우선 써야 할 것 같아!"
"우선 당장 필요한 돈이 얼마라고 했어요?"
"응, 사천만 원 정도 있으면 우선은 해결이
될 것 같네!"
"오빠, 그 적금은 이율이 높으니 깨지 마세요!
내게 좋은 수가 있어요!"
"엉?
그게 무슨 말이야?"
은혜는 경마장에서 딴 돈 얘기를 안 하려고 했는데
정호가 급전이 필요하다고 해서 할 수 없이 하기로 했다.
"오빠, 저번날 춘희가 캔커피 파는 경마장에
갔다가 왔잖아!"
"그래 그랬었지!"
"사실 그 말하면 오빠에게 혼날까 해서 안 했거든?
그런데 오빠가 급전이 필요하다니까 할게요!
그 전날 또 꿈을 꾸었어요!"
"엥?
또 무슨 꿈을 꾸었길래 그래!
"오빠하고 나하고 등산을 갔는데 산불이 나서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어요!"
"응,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됐어?"
"여행사 영자 씨 신랑이 경마기수 출신이잖아!
날 보고 번호를 찍어주며 이만 원만 사보라고 해서
호기심에 사봤는데 그 말들이 우승을 했어요!"
"그런데 빠지면 절대로 안 돼요!
"네, 오빠 알고 있어요!
그때 우승한 배당금이 사천만 원 있었어요!
나는 불 꿈만 꾸면 이렇게 대박이 나네요 호호호!
그러니까 그 돈으로 우선 오빠 필요한데 쓰세요!"
"그래!
고마운 일이지만 앞으로는 그런 거 하지 말아요!
옛날에 동료 목수 하나가 경마에 빠져서 매주
주말에 들락날락하더니 결국 집도 날아가더라고!
그러니까 절대로 그런데 빠지면 안 돼요!
알았지?"
"아이구요 오빠 걱정 마세요!
"여하튼 그 돈은 요긴하게 쓸게!
그리고 저번에 포천 이모님 돌아가시고 우리가
그 집을 미국에 사는 사촌에게 매입을 했잖아!"
"네, 그랬지요!
그런데 그기가 몇 평이지요?"
"텃밭 포함해서 대지가 95평에 건평이 30평이지!
그런데 이번에 전세 사는 사람이 기간만료로
이사를 간다네?
인부들 데리고 가서 집수리를 해서 다시
월세로 내놓는 게 좋겠어!"
"네~,그건 오빠 요량대로 하세요!"
정호의 말로는 임금을 체불하면 신용을 잃어
정호를 따르지 않는다고 은혜에게 말했다.
정호는 일단 은혜가 준 사천만 원으로 인부들
체불임금을 해결했다.
뒷날 정호는 인부들 몇 명을 데리고 포천에
구입해 두었던 주택 리모델링을 하려고 떠났다.
포천까지 매일 출퇴근하기가 번거로워 인부 세명과
정호는 포천 집에서 머물며 일을 하기로 했다.
은혜는 정호가 집을 비우자 왠지 허전했고 무료했다
그러던 중 춘희의 전화가 왔다.
"은혜야 요즘은 뭐 해?"
"응, 정호 씨 어제 포천으로 일하러 갔어!
십일 정도 지나면 끝내고 돌아올 것 같아!"
"야, 은혜야!
집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경마장에 놀러 나와라!
이번주 토요일에도 마사회 회장기 대회가 있단다!
그러니 늦지 않게 열 시까지 경마장으로 와라!"
"그래 생각해 보고 갈게!"
은혜는 전화를 끊고 달력을 보니 오늘은 금요일이다.
정호도 없는 밤 은혜는 티브이를 보며
일찍 잘까 해서 캔맥주 하나를 마시고 잠들었다.
이튿날 정호는 없어도 습관처럼 일찍 일어나
아침을 챙겨 먹고 중랑천 산책을 다녀와서
시계를 보니 그래도 시간은 여덟 시였다.
은혜는 소파에 앉아있다 보니 머릿속에서 또 경마장
일이 떠올랐다.
"심심한데 춘희에게나 가볼까?"
은혜는 화장을 고치고 9시쯤 사가정역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중간에서 전화를 하지 않고 바로
과천 경마장으로 들어가서 춘희에게 전화를 했다.
"춘희야 어디쯤에 있니?"
"그래 은혜 왔구나!
저번 그 자리로 올라오면 된단다!"
은혜는 저번에 캔커피 박스를 두었던 자리로 올라갔다.
"은혜 씨 안녕하세요"
하며 춘희 애인 조영배가 인사를 했다.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춘희는 캔커피 팔러 갔나요?"
"네, 금방 한 바퀴 돌아서 올 겁니다!"
"네~, 그렇군요!"
하면서 은혜는 자리에 앉았다.
"그때 은혜 왔구나!"
반색을 하며 춘희가 돌아왔다.
"오늘은 영배 씨 하고 둘이니?"
"응, 영자네 부부는 어디 모임에 갔다고 그러네!
그나저나 다음 경주가 회장기 대회 경주야!"
이번에도 저번처럼 몇만 원만 투자해 봐라!
혹시나 모르잖니?"
"응, 알았어 춘희야!"
"이번에는 기수 출신 성태 씨가 없으니 여기
홍보물에 있는 말을 선택해서 한번 찍어보세요!"
은혜는 못 이기는 체하고 조영배를 따라갔다.
은혜는 말과 기수를 모르기에 그냥 본인이 좋아하는
숫자로 번호 5번과 11번 말을 선택해서 이번에는
오만 원어치를 샀다.
밖으로 나오자 유월초 날씨인데도 엄청 후덥지근
했고 맑던 하늘이 먹구름으로 채워졌다.
"자기야 소나기가 올려나 봐!"
춘희가 조영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네 정말!
"이번 경주는 타이틀이 걸려있어 소나기가와도
경주를 진행할 텐데 아마도 변수가 많을 거야!"
갑자기 후드득 하고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다.
그때 탕, 하고 출발 총소리가 들려왔다.
은혜는 이번에도 캔커피 박스에 앉아 자리를
지키며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은혜는 양산을 펴고 웅크리고 앉아서 쳐다보고 있었다.
퍼붓는 소나기를 뚫고 말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렸고 관객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흥분을 멈추지 않았다.
경주마가 결승점에 들어서자 이번에도 난리가 났다.
욕설과 함께 환호성이 터졌다.
"춘희야 이번에는 어떻게 됐니?"
"응, 소나기가 오는 바람에 우승 예상마들이 모조리
떨어졌단다!"
"아까 은혜 씨는 몇 번 말을 사셨나요?"
조영배가 궁금증에 물어왔다.
네, 저는 5번 11번 말 샀는데요?"
그러자 조영배가 뒤돌아서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은혜 씨가 우승말을 맞췄네요!
우와~, 복 터졌네요!
어떻게 그렇게 잘 맞추세요?
나도 이제부터 은혜 씨 따라서 사야겠네요!"
"은혜야 오늘은 네가 점심을 사야겠다 야!
영배 씨, 캔커피 접고 밥 먹으러 갑시다!"
춘희가 그렇게 느스레를 늘어놓았다.
"그래요 은혜 씨!
빨리 환급 매대로 가봅시다!"
"네, 저는 얼떨떨하네요 영배 씨!"
"우와~, 소나기 때문에 배당률이 엄청 높게 나왔어요!
역대급으로 삼천 사백프로가 나왔네요!
이번에는 얼마를 사셨나요?"
"네, 오만 원어치 샀답니다!"
"세상에 대박 났네요 대박 났어!"
조영배는 본인이 우승마를 산 것처럼 기뻐했다.
은혜는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가 마사회
직원과 마주했다.
"축하드립니다 고객님!
우승 환급금이 일억이 넘으면 계좌이체도 된답니다!
계좌이체 해드릴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여기 환급금에 사인해 주시구요 계좌번호도 함께
기재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은혜의 휴대폰에 문자가 왔다.
"한국마사회 입금 일억 사천백이십 오만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라는 문자가 들어오자 은혜는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웠다.
"은혜야 이번에는 네가 멋지게 한번 쏴야겠다 야!"
"그래 그러지 뭐!
그나저나 나는 얼떨떨해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
춘희야!"
"은혜 씨 제가 잘 아는 꽃등심 잘하는 집이 근처에
있으니 그리로 갑시다!
오늘은 허리띠 풀어놓고 먹어도 되겠습니다!"
세명은 이번에도 택시를 잡아타고
조영배가 가리키는 데로 갔다.
한운전문점이라고 쓰인 이층 건물 주차장에는
고급 승용차로 가득 찼다.
은혜는 이때까지 살아도 이렇게 큰 음식점은
처음이었다.
조영배는 이곳을 잘 아는 듯 꽃등심 오인분을
시켰다.
"은혜 씨는 술을 잘못 드시니까 오늘은 부드러운
청하로 시킬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은혜야 너는 어쩜 복이 그렇게도 많으냐?
저번에도 사천만 원 땄는데 이번에는 도대체
얼마나 받았니?"
"응, 모르겠어!
영수증 여기 있네 네가 한번 봐라!"
"세상에나 삼천 사백프로 일억 사천 역대급이다 야!
은혜 네가 신의 손이다 신의 손!
영자와 성태 씨가 알면 또 한턱쏘라고 난리가
날 텐데 호호호..."
"자~, 은혜 씨 축하드립니다!
건배합시다 건배, 브라보, 브라보!"
조영배가 자기가 된 것처럼 축배를 들었다.
은혜는 자리를 끝내고 음식값으로는 세상 살면서
처음으로 삼십팔만 원을 카드로 결제했다.
밖으로 나오자 언제 불렀는지 콜택시가 와있었다.
"은혜야 네가 대박 터지는 바람에 나도 호강 좀
해보려고 모바일로 택시를 불렀단다!"
"응, 그러니!
그래 맞다 춘희야!
이럴 때 인심 써야지 뭐!"
은혜는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 두장을
꺼내서 조영배와 춘희에게 한 장씩 주었다.
"은혜 씨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조영배가 택시를 타면서 인사를 했다.
은혜는 영배 씨와 춘희가 떠나는 걸 보고
생전 처음으로 장거리 택시를 탔다.
생각 같아서는 택시비가 아까워 전철역에 내렸으면 했으나
이미 목적지를 사가정역으로 찍어놨기에
어쩔 수 없이 그냥 타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손님, 목적지가 사가정역으로 되어있는데
그리로 가면 되겠습니까?"
"네, 사가정역 힐스테이트 아파트 입구로 가면 됩니다
네비에 그렇게 쳐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손님!"
은혜는 택시를 타고 오면서도 머릿속에는 경마장
모습으로 가득했다.
"아~, 이래서 일확천금을 노리고 경마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는 말이구나!"
은혜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택시는 고속도로를 지나서 올림픽 대로를 달리더니
출발 후 사십 분 정도 지나서 면목동에 도착했다.
은혜는 택시비 삼만 원을 카드로 지불하고
사가정 힐스테이트 옆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이튿날 지점장
영자 씨로부터 바로 전화가 왔다.
"은혜 씨 축하드립니다!
아이구요, 어떻게 번호를 그리도 잘 찍었데요?
여하튼 재주도 좋으시네요!
한 턱 내셔야겠어요!"
"네~, 어쩌다 운이 좋아서 그런 거지요 호호호"
어차피 아셨으니 제가 한 턱 쏘겠습니다!"
"네, 그래요!
춘희와 의논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은혜의 우승마권 소식이 그렇게 다 알려져 버렸다.
역시나 이튿날 바로 춘희에게 전화가 왔다.
"영자에게 전화가 왔단다!
정호 씨는 집에 오셨니?"
"아니, 이번 주말까지 공사를 마치고 온댔어!"
"그래?
정호 씨도 같이 오면 인사도 나누고 좋을 텐데,
그러면 내일이 수요일이니까 나도 일이 없단다!
내일 한시쯤 영자 사무실에서 만날까?"
"그래, 알았어!
내일 그 시간에 나갈게 그럼 내일 보자!"
이튿날 여행사 사무실 문을 열자 일행 모두가
모여있었다.
한꺼번에 축하인사를 받으니 은혜는 순간적으로
쑥스럽고 당황스러웠다.
그들은 아예 은혜를 빼껴먹으려고 작정을 했나 보다.
그들이 미리 예약한 일식집으로 들어갔다.
청하 잔을 들고 브라보를 외친 후
먼저 이영자가 말을 꺼냈다.
"은혜 씨, 여행사 사무실이 땡땡여행사 본사와
제휴로 운영되기 때문에 실속이 없답니다!
그래서 남편과 영배 씨, 그리고 춘희와 넷이
오천만 원씩 투자를 해서 독립적인 여행사를
차리기로 했답니다!
개인 법인체는 세금이 많이 나와서 안 되구요!
주식회사 형태로 하면 세금도 적게 나오고
합법적으로 이익 배당이 된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은혜 씨도 같이 합류를 했으면 해요!
"아이구요 저는 그런데 투자하는 것은 관심도 없고
욕심도 없답니다!"
"아이고 은혜야!
나같이 캔커피 밖에 모르는 사람도 하는데
너는 더군다나 너는 경마장에서 단번에 이억을 땄잖아!
그중에 오천만 원이야 없어도 그만이지 야!"
춘희는 은혜를 부추겼고 영자는 근거를 들이댔다.
"여기 통장에 각각 오천만 원 네 사람 보이지요?
이영자, 김성태, 조영배, 성춘희 이름으로
입금된 것 보셨지요?"
이영자가 통장을 자세히 보여주며 말했다.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조영배도 말을 거들었다.
"경마장에서 딴 돈 이억 원을 조금 적게 땄다고
생각하세요!
저희와 함께하시면 나중에 보너스처럼 수익금이
들어올 것입니다!"
"춘희야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니!"
"은혜야 생돈 만들어서 투자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공돈으로 투자하고 수익금도 받잖아!"
"그래, 네 말대로 공돈이니까 그럼 투자를
해 보도록 할게!"
"은혜 씨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래도 제가 여행사 계통에서는 직원으로
입사해서 지점점까지 이십 년을 이어온 베테랑
여행 상담원입니다!
돈은 내일 천천히 입금하셔도 됩니다!"
하며 영자의 얼굴은 안도하는 듯 화색이 돌았다.
"자 그러면 안주도 다 먹었고 술병도 비었으니
마지막 술잔 마시고 사무실로 다시 올라갑시다."
이 모임도 역시 주도권은 지점장 이영자가 쥐고 있었다.
약간의 취기를 가진 다섯 사람은 사무실로 올라갔다.
이미 작성된 주식회사 설립 서류에는 네 사람의
이름과 도장이 찍혀있었다.
대학 물 먹은 이영자가 한자를 많이 적어놔서
은혜는 다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은혜가 그렇게 더듬거리며 읽어 내려가자
춘희가 한마디를 했다.
"그게 여행사 주식회사 설립 서류란다!
그냥 나처럼 도장을 찍으면 영자가 다 알아서 할 거야!
걱정 말고 도장 찍어서 영자에게 주면 된단다.
"그래, 그런데 나는 지금 도장이 없고 집에 있단다!"
"영자야 여기 지장 찍어도 되는 거냐?"
춘희가 그렇게 묻자 영자가 대답을 했다.
"도장이나 지장이나 똑같으니 지장을 찍어도 됩니다!"
라고 말하자 은혜는 다른 사람이 도장을 찍은 곳을
따라서 여러 군데 지장을 찍었고 마지막장은 도장이 없었다.
그래서 영자에게 물었더니 그것은 동의서라고 해서
그곳에도 지장을 찍어버렸다.
"자, 이제 여행사 법인설립 서류가 작성이
다 되었으니 내일부터 제가 진행을 하겠습니다!
다 같이 손을 잡고 파이팅을 한번 해봅시다!"
그렇게 다섯 사람은 손을 마주 잡고 파이팅을
외쳤다.
영자는 저번과 같이 원두커피를 내렸다.
일행은 자리에서 희망적인 대화를 하였고
커피를 마신 후 내려와서 제각기 집으로 향했다.
서로의 인사는 모두 주 이사님, 조 이사님,
성 이사님, 김 이사님, 이 이사님으로 불렀다.
그 이후에 전화가 올 때나 만났을 때도 서로의
호칭은 언제나 이사님이라고 한 것도 이미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은혜는 그렇게 이영자가 주도하는 주식회사 형태의
여행사 설립에 합류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부잣집 마님 대접을 해주며 은혜를
치켜세웠으니
은혜 역시 어울려 빨려 들어가듯이 합류를 했으니
사깃꾼들에게 빠져나갈 수 없는 나락의 길에서
발목을 잡힌 것이다.
영자가 보여준 서약서는 분명히 주식회사
설립을 위한 서약서였다.
하지만 마지막 한 장은 한자어로 쓰인 사채 보증인
서약서였다.
그들이 치켜세우는 말에 현혹되어 서약서가
바뀐 줄도 모르고 은혜는 그냥 날인을 한 것이다.
이미 그들은 은혜가 못 배우고 세상물정에
어리숙하다는 것을 알고 사기를 담합한 것이다.
나중에 사건이 터지고야 안 사실은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그 증빙서류로 대출을 받은 것이었다.
이미 사채업자도 보증인에 대해 정보 수집을 했고
보증인이 두 채의 집을 가진 것을 확인했기에
십억이라는 돈을 빌려준 것이었다.
그때는 이미 사채업자의 보증인 서약서에
날인을 했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대출을 받은 뒤 그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한 달 후 이자 납입이 없자 보증인은 은혜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년 20 퍼센터의 고금리인 월 천칠백만 원의
이자 납입 독촉을 받은 것이다.
만약 이자를 갚지 못하면 연체이자는 복리로
계산을 해서 받는다는 엄포를 놓았다.
복리 이자로 계산하면 일 년이면 은혜의 집 한 채가
날아가는 것이다.
은혜는 지금의 사태를 도저히 혼자서 수습할 수가 없어
정호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정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기어이 춘희가 당신을 옭아매었구먼!
당신 일이 곧 내일이나 마찬가지니 어떻게 해결책을
찾아봅시다!"
"오빠, 저도 일이 이지경이 될 줄은 몰랐어요!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죄송해요!"
은혜와 정호는 어쩔 수 없이 정기 적금을 해지했다.
그렇게 하여 이영자가 빌린 십억 중에 오억은
변재를 했지만 나머지 오억은 당장 갚을 길이 없었다.
집을 급매로 내놓았지만 주택 불경기와 또
나라 정책이 바뀌어 대출길도 막혔으니
당연히 매매가 쉽게 될 리가 만무했다.
경찰서에 이영자를 비롯하여 세 사람 모두에게
사기죄로 고소장을 넣었지만 딱히 좋은 소식은 없었다.
수시로 경찰서에 전화를 했지만 역시 수사 진행은
더 이상 없었다.
영자 부부는 베트남으로 도피성 출국을 한 후 동선이
오리무중이 되었다고 담당 형사가 전해왔다.
또 얼마 후 성춘희는 공범으로 구속되어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고 문자가 왔다.
경찰서 형사 문자에 의하면 돈은 영자 부부가
모두 가지고 베트남으로 도망갔다고 했다.
어찌 보면 춘희는 배당도 없는 사기에 가담한 꼴이 되었고
강화도에 있는 친척집에서 맨 먼저 잡혔다고 했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춘희에게 따져볼까 하여
은혜와 정호는 서울구치소로 가서 면회를 신청을 했다.
그러나 춘희의 면회 거부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우리나라 민 형사법은 채무자가 변재를
못하면 보증인이 대신 변제를 하는 게 불변의 법이다.
또다시 월말이 되었으나 가진돈이 떨어져서
이자를 내지 못했다.
정호는 인부들과 주변에 이리저리 돈 부탁을 해봤으나
어디에서도 돈을 구할 수가 없었다.
사채업자는 이미 이것을 간파하고 채무자를 윽박질러
이자를 내지 못하면 복리이자를 요구하였고
이를 빌미로 집을 통째로 먹으려는 작전이었다.
조폭 사채업자는 날마다 전화를 하고 또 집으로 찾아와
폭언으로 이자 독촉을 해왔다.
은혜와 정호는 조폭 사채업자들이 무서워서
결국은 포천 집수리 해놓은 집으로 피신을 했다.
"오빠, 세입자가 빨리 안 들어온 것이 다행이네요"
"그러게나 말이야!
여기라도 우선 그놈들을 피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은혜와 정호는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며칠 후 사채업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포천에 있는 집에까지 찾아왔다.
이달 말까지 원금 오억과 이자를 변재 하지 못하면
은혜와 정호 공동명의로 된 주택 두 채에 대해
법원 압류 신청을 하겠다고 또 엄포를 놓았다.
"원금과 이자를 갚을 능력이 없으면 장기라도 팔아서
갚으란 말이야 알겠어?"
팔뚝에서 목까지 문신으로 가득한 사채업자 수금원이
협박성 발언을 늘어놓았다.
은혜와 정호는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듣고만 있었다.
결국 포천에 있는 집도 사채업자에게 발각이 되었으니
은혜와 정호는 불안해서 포천에도 머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옷 보따리를 싸들고
다시 서울로 나오는 전철에 올라탔다.
은혜와 정호는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오빠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해요?"
"그러게 말이야!
이제는 마땅히 갈 곳도 없어!
주머니에 비상금도 이제 몇십만 원밖에 없는데
모텔에 묵을 수도 없고 또 그 돈은 민약을 위해 아껴 써야 돼!"
"맞아요 오빠!
나 때문에 오빠까지 고생시켜서 제가 할 말이 없네요"
어떡하면 좋아요 오빠!"
"돈을 아끼려면 노숙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것을 은혜가
감당할 수 있을까?"
괜찮아요 오빠!
모두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내가 감당할게요!"
정호는 안쓰러움에 은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은혜와 정호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노숙자들이 많이 있다는
서울역 근처로 가서 모자를 눌러쓴 채 노숙을 시작했다.
조폭 사채업자를 우선 피하는 길은 그것뿐이었다.
"오빠, 우리가 노숙을 하다니 정말 기가 막히네요!"
"그래, 이게 우리의 운명이고 팔자라면 받아들여야지
어떡하겠어!"
은혜와 정호는 서로를 위로하며 노숙을 이어갔다.
다행이라면 이불과 옷가지는 포천에서 공사할 때
그대로 두었던 것을 비상용으로 가지고 왔었다.
은혜와 정호는 그것에 의지하며 그렇게 노숙을 시작했다.
은혜와 정호의 생각은 어쨌거나 그 네 명의 사깃꾼이 잡히든지
은행 대출이 빨리 되던가
또 아니면 집이 매매가 되도록 기도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사채업자가 말미를 준 월말은 훨씬 지났다.
정호는 집이 어떻게 되었는지 여러 가지로 궁금해서
공중전화로 가서 복덕방에 문의를 했다.
결국 예상대로 면목동 집과 포천에 있는 집까지
압류 딱지가 붙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또한 복덕방에서는 집에 붙어있는 압류가 해제되어야
집을 매매를 할 수 있다는 대답도 들었다.
은혜와 정호는 하늘이 캄캄한 나락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었고
이제는 눈물도 말라버려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될 것 같으니 청와대에
민원이라도 넣어봐야 될 것 같아!"
"오빠 청와대에 민원을 넣으면 해결이 될까요?"
"달리 방법이 없으니 마지막 수단으로 해봐야지!"
은혜와 정호는 새벽에 일어나 걸어서 청와대
민원실로 향했다.
혹시라도 사채업자 조폭들에게 들킬까 해서
모자를 눌러쓰고 둘은 거리를 두고 걸었다.
은혜와 정호는 예전 행촌동 꼭대기 집에서
청와대 경복궁을 내려다는 보았다지만
생전 처음으로 가보는 청와대였다.
"오빠, 예전에 행촌동 꼭대기에 살 때 청와대를
보기는 했지만 우리 일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러게 말이야!
세상일은 알 수가 없다더니 그 말이 꼭 맞구먼 그래!"
정호는 편의점 불빛에 의존해서 A4용지에 밤새
써놓은 사연을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 거렸다.
청와대 근처에서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사연을 말한 후 물어물어 민원실을 찾았다.
다시 한번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신원조회가
끝난 후 정호와 은혜는 민원실로 들어갔다.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써놓은 A4용지를
들이밀었다.
한참을 지나서 사연을 다 읽어본 직원이 접수
용지를 은혜와 정호에게 주었다.
"민원 용지에 빠짐없이 두 분 인적 사항을
적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대답을 하고 은혜와 정호는 일말의 희망을
걸었다.
민원 접수 절차가 끝나자 접수 용지에 직인을
찍어주며 문자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라는 대답을 듣고 다시 후암동으로 돌아왔다.
푹푹 찌는 삼복더위에 두 달 이상 노숙생활을
했으니 이미 두 사람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이미 카드는 정지가 되었고 비상금으로 가져온
돈도 이제는 거의 바닥이 났다.
은혜와 정호는 오늘도 서울역 맞은편 골목에서
노숙을 했다.
정호는 편의점에서 두 개의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담아 벤치로 가지고 왔다
정호는 깜빡 잊은 젓가락을 가지러 다시
편의점으로 갔다.
정호는 돌아오면서 바람에 날아다니는
신문지를 주워서 왔다.
가져온 신문지를 깔고 은혜와 나란히 앉아
오늘도 컵라면으로 허기를 때웠다.
그때 은혜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오빠 깔고 앉은 신문에 우리 얘기가 나왔어요!
을지로 여행사 대출사기 사건이래요!
빨리 좀 펼쳐 보라구요!"
"을지로 여행사 설립을 사칭한 조폭 관련
사채업자 사기단 전원구속 일망타진"
이라는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나와 있었다.
"음~,오늘이 며칠이더라?"
하고 정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오빠, 전광판 뉴스에 8월 24일이라고 되어있어요!"
"그럼 일주일이나 지난 신문이야!"
"오빠 그러면 경찰서나 청와대 민원실에서
문자가 왔을지도 모르겠네!
빨리 휴대폰부터 켜봐야 할 것 같아요!"
"이영자 부부는 다른 사건에도 연루되었고
마약 투약과 소지혐의로 사이공에서 검거되어
국내로 송환되었다"
이렇게 나와있는데?"
은혜와 정호는 신문을 펼쳐 보고 난 후
이제는 살았구나 하고 긴 한숨을 품어냈다.
"오빠 우리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도 되는 거야?"
"그것은 아직 몰라!
경찰서에 전화부터 해봐야겠다!"
은혜와 정호는 그제서야 이제는 휴대폰을
켜도 되겠구나 하고 휴대폰 전원을 켰다.
은혜와 정호의 휴대폰에는 수백 통의 협박 문자와
전화가 온 흔적이 남아있었다.
은혜와 정호가 그렇게 한 시간쯤 넋을 놓고 있을 때
청와대 민원실이라고 찍힌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선생님이 민원을 제기하셨던 청와대
민원실 담당 직원입니다!
김정호 씨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좋은 소식 전해드리려고 전화드렸습니다!"
"네~, 선생님 말씀하세요!"
제가 여러 번 전화를 드렸으나 전원이 꺼져있어서
계속 통화를 시도했습니다!
이제라도 통화가 되어서 다행입니다!"
"네~, 사채업자 빛 독촉 때문에 휴대폰을 껐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이 민원을 제기한 사건이 해결되었습니다.
범죄인 모두가 검거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선생님!"
"범인은 잡혔다지만 사기 대출금이라도 그 돈은
범죄 수익금이기에 국고로 환수된다고 합니다.
범죄인들이 소송을 제기한 건에 대해서는
저희 청와대 민원실에서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하여 공소권 없음으로 검찰에 처리를 요구했으니
선생님 집의 압류는 곧 풀어질 겁니다!"
"네, 선생님!
여러 가지로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은혜와 정호는 그 전화를 받은 후 안도의
한숨을 내뿜었다.
은혜와 정호는 노숙을 하던 곳에서 일어나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 가며 남산 쪽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저만치 공터에 의자가 비어있는 것을 보았다.
은혜와 정호는
황혼에 물 들어가는 후암동 남산자락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오빠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이 맞아요!
복권당첨으로 쉽게 들어온 돈이 그렇게 날아갔네요!"
"아니야 어차피 은혜가 용꿈을 꾸어서 들어온 돈이고
그 용이 그 돈을 가지고 다시 승천을 한 거지!
그래서 우리는 처음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온 거야!"
"오빠 마음고생 시켜서 정말 죄송해요!"
"아니야 마음고생은 나보다 은혜가 더 많이 했지!
복권에 당첨된 것도 은혜가 복이 많아서 그랬던 것이고
그 재물이 다시 빠져나간 것도 어찌 보면 우리
팔자가 그려려니 생각하면 돼요!
그나마 돌아갈 집은 남아있으니 다행이잖아!
이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본분을 지켜가며 살아갑시다!"
"오빠!
오빠 말씀이 다 맞아요!
나도 이제 요양보호사 일 해가며 평범하게
살아가도록 할게요!
"그래, 허황된 꿈은 꿈이 아니야!"
오빠, 나를 이해하고 보듬어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래!
나도 이제는 목수일이나 해가면서 예전처럼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어!"
"은혜가 고생 많이 했어!
사랑해!"
"네, 저도 오빠를 진심으로 사랑해요!"
후암동 남산자락 벤치에서 은혜와 정호는 감정이 교차하는
격랑을 가슴에 않고 오래도록 포옹을 했다.
(9편) 인생사 새옹지마
은혜와 정호는 모진 육신의 고통을 격고서야
두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은혜는 집 앞에 털썩 주저앉아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오빠, 인생사 호사다마라더니 그 말이 딱 맞네요!
이제 우리가 제자리로 돌아왔네요!"
"그래!
지옥 문턱까지 갔다 온 느낌이야!"
우리가 이렇게 육신이 피폐해지도록 마음고생을
했는데 죄지은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어!"
"그래요 오빠!
이제는 우리도 분수를 지켜가며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은혜와 정호는 집에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현관 입구에서 오래도록 넋 놓고 앉아있었다.
또한 503호 우체함에는 각종 고지서와 법원에서
날아온 통지서 등 수십 통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있었다.
정호는 우편물을 손에 들고 은혜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
현관 방화문에도 역시 압류 통지서와 각종 광고물
스티커가 여러 장 붙어있었다.
"오빠
현관 비밀번호가 뭐였더라?
오랜만에 집에 와서 그런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나요!"
"응, 내 생일과 당신생일 차례대로 해놨잖아!"
"맞아요 오빠!
그런데 이 딱지가 붙어있는데 들어가도 되나요?"
"응, 그때 청와대 민원실에서 전화가 왔을 때
압류 통지서는 알림과 경고를 뜻하기 때문에
소유주는 들어가도 된다고 했어요!
법원에서 곧 해지를 시켜준다고 했으니 믿어봐야지!"
은혜와 정호는 먼지가 가득한 소파에 앉아서
감개가 무량한 듯 한동안 천장만 바라보았다.
"오빠, 냉장고에 있는 것 다 버려야 할 것 같아요!
오랜만에 된장찌개하고 집밥이 먹고 싶어요!
우선 시장을 좀 봐 올게요!
"그래, 당신 좋아하는 페트병 맥주도 사 와요!
나는 청소기를 좀 돌리고 먼지도 닦아내야
할 것 같으네!"
은혜는 시장으로 가고 정호는 몇 달간 못했던
청소를 시작하였다.
은혜는 은혜대로 정호는 정호대로 부산을 떨고서야
식탁에 마주 앉았다.
"맥주부터 한잔 합시다!
갈증도 나고 피곤도하니까 한잔 해봅시다!"
은혜는 몇 모금 마시고 아이구 맥주가 이렇게
시원한걸 새삼스럽게 느꼈네요!"
"맞아, 맥주가 정말로 시원하구먼 그래!"
"오빠, 맨날 먹던 된장찌개가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줄은
오늘 처음 알았네요 글쎄!"
"그러게 말이야!
그동안 생고생한 것 생각하면 밥 한숫깔도
복에 겨운 거지!"
은혜와 정호는 그야말로 눈물겨운 집밥을
오랜만에 먹어보았다.
식사를 마친 은혜와 정호는 소파로 와서
커피잔을 마주하고 앉았다.
"오빠, 전기세와 수도세 고지서는 어디다 두었어요?
수도와 전기 끊어지기 전에 그것부터 내야겠어요!
아까 문짝에 독촉장도 붙어있었지요 아마?"
"그래, 그런데 무슨 돈으로 그것을 내지?
일단 압류가 해제되어야 포천 집이라도 팔아서
이것저것 정리를 하는데 말이야!"
"오빠, 사실은 혹시 몰라서 저번에 경마장에서
딴 돈 천만 원을 현금으로 찾아서 장롱 속에
넣어두었어요!
그런데 사채업자에게 쫏겨서 포천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깜빡 잊어버리고 그냥 갔지요 글쎄!"
"그랬구먼!
그러나 그것이 어찌 보면 더 잘됐는지도 모르지!
노숙자 생활하면서 돈이 없어서 배는 곯았지만
지금 요긴하게 쓸 수가 있으니 말이야 하하하!"
"그러네요 오빠 호호호!"
은혜와 정호는 그렇게 오랜만에 웃을 수가 있었다.
얼마 후 서부지검에서 은혜와 정호에게 동시에
문자가 들어왔다.
10월 4일 서부지검 211호 검사실로 와서 고소인
조사를 받으라는 문자가 왔다.
은혜와 정호는 전철을 이용해 애오개역에서
내려 생전 처음으로 검찰청사에 들어섰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민원실에 접수를 하고 211호
검사실로 들어가서 수사관과 마주 앉았다.
"김정호 씨와 주은혜 씨 맞으신가요?"
"예, 그렇습니다!"
"사실 이 사건은 경찰서에서 1차 조사를 받고
검찰로 넘어오는 게 순서입니다 만,
그동안 연락이 되지를 않았고 또 피의자들이
모두 검거가 되어서 검찰로 사건이 이송되었습니다!
청와대 민원실에서 고소인 두 분이 사채업자를
피해서 노숙을 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하고 은혜와 정호는 약 두 시간에 걸쳐서 조사를 받았다.
마지막 부분에서 수사관이 물었다.
"고소인 두 분께서는 피의자들에게 선처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법대로 처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수사관이 관여할 문제는 아닙니다 만,
이런 악질들은 엄중한 처벌을 받는 게 마땅합니다!"
은혜와 정호는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면 법대로 처리하는 것으로 조서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서류 법원으로 이송할 때 조금 전 서명하신 부분에
재산 압류 해제 신청서도 첨부가 되어있으니
재판부에서 인용이 되면 압류가 풀릴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없습니다!"
"네, 그러시면 여기 조서를 읽어보시고 의문점이나
조서가 부족하다 생각하시면 말씀하세요!"
은혜와 정호는 장문의 조서를 열람하였다.
"네, 수사관님 틀린 데는 없는 것 같습니다!"
"네, 그러시면 맨 아래에 서명을 하시고 가시면
됩니다!
서류가 법원으로 넘어가서 공판기일이 잡히면
법원에서 문자로 연락이 갈 겁니다!
우리 검찰에서 피의자 신문을 하니까
꼭 출두하셔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만,
피의자들이 범죄사실을 인정하는지 아니면
부인을 하는지 지켜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집사람과 의논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그리고 피해 구상권 청구를 하시려면 다시
민사소송을 하셔야 합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셔도 되니 그것도 두 분이 잘
상의하셔서 결정하시면 됩니다!
두 분 장시간 고소인 조사를 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은혜와 정호는 그렇게 생전 처음으로 검찰청
이라는 데를 가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은혜와 정호는 저녁을 먹은 후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을 했다.
"오빠, 나는 그 사람들 다시는 마주치기도 싫고
사채업자 무서워서도 안 갈래요!"
"나도 그래 안 가고 싶어!"!
법원과 검찰청사에서 법대로 처리해 주겠지 뭐!"
"그런데 오빠!
우리 손해 보고 또 고생한 거 구상권 소송인지 뭔지
그것은 어떻게 해야 돼?'
"응! 가만히 생각을 해봤는데 그동안 우리가
모진 고생을 했다지만 소송은 아닌 것 같아!
어차피 우리가 피땀 흘려서 번 돈도 아니었고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생각하면 되지 뭐!"
"맞아요 오빠!
나도 똑같은 생각이에요!"
"그럽시다!
그동안 우리가 고생도 할 만큼 했으니 압류가
풀릴 때까지 좀 쉬도록 합시다!"
"네, 그렇게 해요 오빠!"
은혜와 정호는 그렇게 겨울을 맞이했다.
티브이에서도 거리에서도 연말연시를 알리는
소식으로 가득했다
"오빠, 우리도 해돋이 가서 액운을 좀 떨쳐달라고
새해 소원을 빌어볼까요?"
"응 그러지 뭐!"
은혜와 정호는 새해 1월 1일 새벽 두툼한 패딩을
챙겨 입고 올해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삶의 이음에
고통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소원을
가슴에 새기면서 아차산 해돋이 행사장으로 향했다.
어느 날 시장에. 다녀오던 은혜는 우체함에서
편지를 발견했다.
발신은 서울구치소였고 발신인은 성춘희였다.
은혜는 계단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서 뭐라고
썼을까 궁금증에 봉투를 뜯었다.
" 속죄하는 마음으로 은혜에게...
은혜야, 나는 지금 속죄하는 마음으로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단다.
내가 무슨 변명을 해도 너와 정호 씨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속죄받을 수 없다는 것 잘 알고 있단다.
네모난 감옥소에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철창을
바라보며 내가 왜 이렇게 살아왔던가 하는
후회막금 한 시간을 보내고 있단다.
영자와 성태 씨 그리고 영배 씨가 그런 사기를
벌릴 줄은 꿈에도 모르고 한배를 탄 것이
크나큰 죄가 되어 감옥살이를 할 줄은 몰랐단다.
미안하다 미안하다를 백번 천 번을 말해도
내가 용서를 받을 수 없겠지!
너는 이 세상 하나뿐인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모진 고초를 격었다고 생각하니 나 또한 가슴이 아프단다.
나도 이제 죗값을 치르고 나면 새사람이 되겠다고
날마다 수없이 되뇌이고 있단다.
어쩌겠니 은혜야!
나는 염치없이 너에게 관용을 바라지도 않겠다.
다만, 내가 왜 이런 짓에 말려들어서 하나뿐인
친구에게 모진 고통을 주었을까 하는 자책감에
빠져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단다.
이렇게 편지라도 보내서 은혜 너와 정호 씨가
조금이라도 미운 마음이 풀어졌으면 한단다.
나 역시 이 편지를 위안으로 삼아서 죗값을
치르고 내 마음이 정화가 되었으면 하는 바렘이다.
은혜 너와 정호 씨 살아가는 길목에 화사한
꽃이 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보낸다.
내가 없더라도 정호 씨와 함께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한다.
이 세상 가장 친했던 은혜에게 춘희가."
은혜는 편지를 읽어 내려가면서 고통과 절망을
안계준 나쁜 친구이지만 그래도 눈물이 앞을 가려
편지를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은혜는 반쯤 넋 나간 사람처럼 집으로 들어갔다.
"아니, 당신 얼굴이 왜 그래요?
어떻게 눈물범벅이 됐구먼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러고 서있지 말고 말을 좀 해봐요 글쎄!"
"아니에요 오빠!
사실은 감옥에 있는 춘희에게 편지가 왔어요!
읽다 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서 그랬어요!
용서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어디 이리 좀 줘봐요!
뭐라고 썼는지 한번 봅시다!
세상에 양심이 없어도 유분수지!
이런 고통을 안기고도 감히 편지를 보내요?
교도소에서 빠져나오려고 마음 약한 당신을
또 구워삶으려는 수작이겠지요!"
하면서 정호는 화가 나서 편지를 낚아챘다.
"몰라요 오빠!
우리에게 그렇게 큰 고통을 줬지만
그래도 감옥소에 있는 춘희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네요!!"
그러니까 우리같이 마음 약한 사람들만 사기에
말려드는 겁니다!
어쨌거나 소파에 앉아서 진정을 좀 해요!"
정호도 편지를 다 읽어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차암, 세상이 말세라더니 우리를 이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일말의 희망을 우리에게 걸어오다니
기가 막히네 정말!"
"오빠, 그래도 나는 춘희가 감옥소에서 외롭게
있을 것을 생각하니 불쌍해서 죽겠어요!
춘희가 뉘우치고 있으니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올려줘야 할 것 같아요!"
"아니, 당신이 그 고생을 하고도 아직도 친구라고
행각 해요?
아~, 참말로 당신은 천사 같은 사람이구먼 그래!"
한동안 은혜와 정호는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오랫동안 소파에 앉아서 천장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쉰 후 정호가 어렵게 말을 했다.
"어쩌겠소!
당신이 천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으니
우리가 이 정도에서 마무리가 되는 것 같아요!
당신이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탄원서를 써줍시다!
춘희가 교도소에 있다고 우리가 덕 될 것도
없으니 당신 뜻대로 써줍시다!
그 대신 다시는 춘희를 볼 생각 하지 말아요
알겠지요?"
정호는 그렇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튿날 은혜와 정호는 서부지방법원으로
가서 탄원서를 제출했다.
법원에 가는 날부터 꽃샘추위가 찾아와서
은혜와 정호는 고생을 했다.
법원에 다녀온 후 은혜는 감기가 들어
한동안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춘삼월 따스한 햇살이 드리운 어느 날이었다.
"오빠, 춥다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갑갑하네요!
오늘은 날씨도 풀렸으니 한낮에 중랑천 나들이라도
갑시다!"
"그럼, 그래봅시다!"
은혜와 정호는 오랜만에 두꺼운 패딩을 벗어놓고
가벼운 바람막이 차림으로 중랑천으로 향했다.
그래도 냉기가 불어오는지라 편의점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사가지고 중랑천 양지쪽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오빠, 우리같이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오빠는
어떤 생각이 나는지 시로 한번 표현해 주세요!
자, 학창 시절 문학도 김정호 시인을 소개합니다!
에이, 오빠 즉흥적으로 한번 읊어보세요 제발!"
"아이참, 이 사람이 또 왜 그러실까 허허 참!
알았어요 내가 한번 머릿속에 구상을 하면서
음~, 한번 읊어보리다!"
은혜는 커피를 벤치에 내려놓고 양손에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세상살이 살아가는 것도 어찌 보면 인생사
천태만상이라 내가 그것을 운으로 넣어서
율격 행시로 한번 읊어보리다!"
정호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시상이 떠오르자 입을 떼었다.
인생사 천태만상
인생길 가다보면 첩첩이 산중이라
생전에 없던복이 운다고 들어올까
사욕에 눈먼다고 부자가 될것인가
천수를 누린다고 명약을 복용한들
태산을 오른듯이 거만을 떠는이도
만수산 드렁칡에 그뜻을 어찌아오
상상을 초월하는 인생사 새옹지마
"와~, 짝짝짝...
너무너무 좋아요!
우리 신랑 가난이 아니었다면 오래전에
시인이 되었을 텐데요 안타깝다 안타까워요!
앞으로 은혜에게는 정호 씨가 시인입니다 시인!
여기 열성독자가 있으니 계속 시를 써주세요 오빠!
이 싯구절도 표구를 만들어야지요"
"아 이 사람아 그러다가 집안 벽체가 남아나지를
않겠구먼 그래, 허허허!"
은혜와 정호는 겨울을 떨쳐내고 오랜만에
즐거운 중랑천 나들이를 하였다.
한편, 서부지방법원에서는 은혜와 정호가
고발한 형사사건 결심공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1차 공판에서 피의자들이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하였기에 결심공판 판결이 내려졌다.
먼저, 주범 이영자와 김성태는 사기대출 범죄를
공모하고 실행에 옮겨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또한 피해자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하여, 검찰이 구형한 데로 추징금 1억에 징역
5년형에 처한다.
그리고 공범 조영배는 적극적으로 범행에
동참하였고 동종의 전과가 있기에 검찰이 구형한 대로
징역 3년에 처한다.
공범 성춘희는 공범 조영배의 애인으로서 이영배가
시키는 대로 피해자를 속이는데 앞장섰으나
초범이고 또한 반성의 기미가 있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한다.
그리고 사채업자 신치동은 불법사금융 업체를
설립하였고 또한 조직폭력배를 고용하여
피해자에게 악행을 저질렀다.
이에 조직폭력배 구성과 불법사금융 설립 또한
특별가중처벌 조항에 의거하여 법정 최고형인
집역 15년에 처하고 압수된 범죄수익금 전체를
국고로 귀속한다.
사채업자 수금원 고봉삼과 이철규는 조직폭력배
구성원으로서 피해자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했다.
이 또한 조직폭력배 구성원 법조항에 의거하여
특별가중처벌 대상이므로 각각 징역 5년에 처한다.
그리고 사채업자 신치동이 피해자 김정호와
주은혜의 주택 두 채에 압류를 진행했던
사건에 대해서는 신치동의 범죄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기에 주택 압류집행 해제를 명령한다.
그렇게 결심공판 선고가 내려지고 얼마 후
은혜와 정호는 법원으로부터 선고 판결문을
받았다.
은혜와 정호는 이 선고 판결문을 받아 들고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을 받았다.
"오빠, 저는 세상에 죄짓고는 못 살 것 같아요!"
"그래, 맞아!
쉽게 들어온 돈은 쉽게 나가고 땀 흘려서 번 돈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우리도 이번에 느꼈잖아!
우리도 이제 그렇게 순리대로 살아갑시다!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조금씩이라도
도와가면서 그렇게 말이요!"
"오빠, 오빠 말이 맞아요!
그것이 소중한 삶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어요!"
은혜와 정호는 서로를 위로하고 다독이면서
황혼에 로맨스를 이어갔다.ㅁ
첫댓글 5부작 이네요 다듬으셔서 신문사 신춘문예 보내도 좋겠습니다 ㅎㅎ
아이구요 임정 김재형 선생님,
그렇게 보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관심 덕분에 유튜브에서
조회수가 십만회를 훌쩍넘어 유투브
베스트셀러에 올랐답니다! 낭독을
해주신 김인희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