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동[Daebu-dong, 大阜洞]
면적 41.93㎢, 인구 7101명(2008)이다. 경기만에 있는 섬으로 북부에 황금산이 솟아 있고, 동쪽은 마산수로를 사이에 두고 화성시 송산면과 마주한다. 통일신라 때는 한주(漢州)에 예속되었고, 조선시대에는 방어사가 주재하였다. 한말에 남양군 관할로 되었다가, 1914년 부천군 대부면으로 바뀌었다. 1973년 옹진군으로 편입되었고, 1994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옹진군에서 안산시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동인 이 동은 법정동인 동동·북동·남동·선감동·풍도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큰가리섬·작은가리섬·터미섬·큰햄섬·누에섬·육도·중육도·풍도 등의 부속 섬이 있다. 본래 옹진군에 속하는 섬이었다. 섬이라고는 하지만 어업보다는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이 더 많고 최근에는 개량포도 재배에 주력하고 있다. 시화방조제를 통하여 시흥시나 안산시내까지 빠르고 편리하게 왕래할 수 있다. 시화지구 개발사업에 의한 국토확장 및 임해관광지 개발에 힘입어 전원도시로 급부상하고 있으며 점차 수도권 농수산물 공급기지로 변모하고 있다. 예전에는 화성시 송산면 마산포 사이에 정기여객선이 운항되었으나, 현재는 화성시 서신면 사이에 303번 지방도가 개설되어 교통이 편리해졌다.
대부별초 [大阜別抄]
고려 후기 대부도에서 조직된 별초군.
개설
별초란 반란이나 전쟁 등 비상시 정규군을 대신해 특별히 가려 뽑은 군대를 가리킨다. 별초에 관한 기록으로는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토벌할 때 전봉별초(前鋒別抄)가 결성되었으며, 1202년(신종 5) 경주별초군이 난을 일으켰다는 자료가 남아 있다. 또한 1216년(고종 3) 거란 침입을 막을 때 별초군 100여 명이 파견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제정경위 및 목적
무신의 난 이후 국가의 공병(公兵)이 약화되자 별초군이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몽골과 전쟁을 수행할 때는 각 지방에서 별초군이 조직되었는데, 일반 농민들을 대상으로 조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지역 지리와 사정에 밝았기 때문에 결사대 및 선봉대 구실을 하면서 많은 공을 세웠다.
대부도에서 발견된 육곡 고려 고분군을 통해 당시 안산만 주변에 해상 세력이 있었고, 이들은 중국과 해상을 통해 활발한 교류를 한 상인 집단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안산 지역이 군사적 요충지 기능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지역으로 몽골군의 주요 주둔지이었을 가능성도 추정된다. 대부별초는 조직이나 규모 등에 대해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대부도의 주민들이 몽골군과 맞서기 위하여 조직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1256년(고종 43) 4월 대부별초군이 인주(仁州)[현 인천광역시] 근처의 소래산[299m] 아래에서 몽골군 100여 명을 격파하였다. 또한 개경에서 몽골에 대항하는 봉기 소식이 전해지자 대부도 주민들도 궐기하여 몽골인 6명을 살해하였다.
의의와 평가
소래산은 현재 경기도 시흥시와 인천광역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소래산 아래에서 몽골군 100여 명을 패퇴시켰다는 사실로 보아 그들이 몽골의 주력 부대가 아닐지라도 대부별초가 외적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하였음을 보여 준다. 안산시에 대몽항쟁 유적으로 별망성(別望城) 터가 있고, 삼별초를 이끈 김통정(金通精)의 설화가 전하는 사실을 볼 때 대부별초가 삼별초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장세원, 「대몽항쟁 주체의 성격에 관해서」(『논문집』9, 군산실업전문대학, 1986)
신안식, 「고려중기의 별초군」(『건대사학』7, 1989)
권영국, 「무신집권기 지방군제의 변화」(『국사관논총』31, 1992)
김대중, 「최충헌정권의 군사적 기반」(『군사』47, 2002)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2-12-12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