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교회는 오늘 12세기 이탈리아의 성녀 클라라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녀는 빼어난 외모로 12살 때 이미 혼인을 서두르려는 부모의 강권을 물리치고 1212년 사순절 프란치스코 성인의 설교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아 가난의 삶을 실천하고자 수도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가난한 성자 프란치스코와 함께 수도생활의 모범을 보이며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사랑의 삶을 산 성녀 클라라를 기억하는 오늘, 우리가 듣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의 마음가짐과 자세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라오기 위해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자세에 관하여 다소 거친 방식과 언어로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드러나는 주님을 따르는 이의 자세는 두 가지입니다. 곧 첫째, 자기를 버리는 것과 둘째,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들 마음 안에 질문이 생겨납니다. 내가 나를 버리면 내가 없게 되는 것인데, 내가 없이 무엇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내가 없이 그 무엇을 이룬다한들 그것은 누가 하는 것이며 이루어진 그 일은 누구의 영광이 되는 것인가? ‘나’ 중심적인 생각에 길들여진 우리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우리 마음 안에 바로 이 같은 질문들이 생겨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뒤이어지는 말씀은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6,25)
나를 버리라고 하는 말에 뒤이어 이제는 목숨마저도 내어놓으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온 세상을 다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정작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라고 이야기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과연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 말씀의 참뜻은 오늘 독서의 신명기의 말씀을 통해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이르기 전 시나이에서 맺은 계약, 곧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의 계약이 갖는 의미를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설명해 줍니다. 곧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그들이 자유와 해방을 얻고 홍해 바다를 건너 40년이라는 광야에서의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겪는 그 모든 순간 속에 온갖 시험과 표징 그리고 기적들을 통해 그들과 언제나 함께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워줍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사랑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모세의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너무나 쉽게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다시 말해 자기 입장에 따라 너무나 쉽게 하느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사랑을 잊고 모세에게 불평하고 불만을 토로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모세는 이를 잊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음의 말로 당부합니다.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신명 4,40)
오늘 독서에서 드러나는 이 같은 이스라엘인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의 참뜻을 이해하는 데에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하느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나를 믿고 내가 원하고 바라는 바를 하느님께 청하는 신앙의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듯하지만 정작 실상 그 내면의 본모습은 하느님이 아닌 나를 믿고 있는 신앙의 모습, 내가 원하고 내가 바라는 것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청하여 얻고 누리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하느님이 필요 없는 믿음, 곧 내가 바라는 것만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원하고 청하는 껍데기 신앙의 모습으로 그러함이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이 같은 신앙의 모습에서 당신의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이러한 잘못된 신앙, 거짓과 가식과 위선의 신앙의 모습을 버리는 것, 곧 자신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의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예수님은 촉구하시고자 오늘 복음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런데 이 같은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요청은 그저 나의 생각과 잠깐 동안의 결심으로 가능한 것이 아닌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결정적 요청이라는 사실, 바로 이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의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신앙의 모습으로 요구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신앙은 단순한 취미활동이나 동아리 모임이 아닙니다. 시간이 될 때, 내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그리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을 때, 그 여유를 누리기 위한 시간의 방책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존재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놓였다할지라도 하느님이 바라시면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 신앙의 모습을 바로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의 말씀으로 건네고 계신 것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예수님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클라라 성녀가 보여준 신앙의 모습을 본받아 여러분 역시 성녀가 그러했듯이 예수님을 통해 전해지는 이 같은 하느님의 신앙의 요청을 여러분의 삶 안에서 실천함으로서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오는 날, 사람의 아들과 함께 하늘나라의 영광을 차지하는 참 하느님의 자녀가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