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우리 집 이야기 (4-1)
◎ 신림동 집 매입
77년 봄, 서울 사람에게 쌀 100 가마니를 받고 시골집을 파셨다는 부모님의 소식을 받자마자,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서둘러 복덕방에 내놓는 한편, 이사 갈 집을 보러 다녔다. 집을 내놓은 복덕방의 안내로 근처 집을 둘러보았으나, 우리 같은 대 가족이 살만한 집은 없었다. 반면 우리가 살던 집은 예상 외로 빨리 팔렸다. 부동산 침체기였지만 6년 동안의 물가 상승률보다는 훨씬 오른 가격으로 팔았다.
남편의 친구가 관악구 신림동에 살고 있고, 부인이 그 일대에서 집을 지어 파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 날을 잡아 신림동으로 가서, 그 부인을 대동하고 집을 보러 다녔다.
단층집은 아예 보지 않고 2층 집만 찾아 들어가 보았다. 2층 집은 많았지만, 1층은 현관으로 들어가도, 2층은 실외 계단으로 올라가는, 두 세대가 살도록 지은 집이 대부분이었다.
세대 분리가 되지 않고 같은 공간에서 살도록 된 집이 쉽사리 찾아지지 않던 중, 겨우 우리가 원하던 집 하나를 부동산으로부터 소개 받았다. 그 집으로 정하기로 마음을 결정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초인종을 누르니, 집을 보여줄 수 없다고 거주자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아버지를 모시고 신림동 집을 다시 보러갔다. 아버지도 괜찮다고 하셔서 집 주인을 불러 계약을 했다. 계약을 할 당시 아버지께서 집 주인에게 해약은 안하겠다는 각서를 받아놓으셨다. 이웃에 있는 다른 집보다 가격이 조금 싸기도 했지만, 우리가 원하는 구조의 집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그 해 부동산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2층 집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한껏 마음이 부풀어 집으로 왔는데, 그 기분은 잠시 뿐이었다.
등기 열람을 해보니 우리가 계약한 집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등기가 되어 있고, 근저당 설정까지 되어 있었다. 집주인에게 연락해서 어떻게 된 거냐고 따졌다. 우리보다 더 놀란 것은 집 주인이었다. 세입자가 집 주인 인감과 동장 직인을 위조하여 자기 앞으로 명의 이전 해 놓은 사실을 주인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안 보여주겠다는 집을 강제로 열게 해서 들어가 봤더니 또 다른 채권자 가족이 집을 점령하고 있었다. 건너 방에는 세입자가 들어있는데, 보증금을 못 받아서 나가지 못하고 있다 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우리는 집 주인이 이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루 이틀 걸릴 문제가 아니어서 모래내 집은 위약금을 물어주고 해약하였다. 신림동 집 주인도 해약하기를 원했지만 각서 때문에 우기지 않았다. 점잖은 사람이었다.
집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오셨다. 장롱들과 기타 집기들은 다 처분하시고, 옷가지와 이부자리, 커다란 장독들만 다 갖고 오셨다. 다행히 생질들이 집을 나간 후였고, 시동생은 군 복무 중이라 남자 들이 쓰던 방 하나가 비어 있었다. 그래도 아홉 명이나 되는 대 식구였다.
우리가 마음 졸이며 기다리는 동안 집 주인은 도망간 세입자를 수소문해서 찾아내고, 원인 무효소송을 하여 승소하였다. 잔금을 치루고 등기 이전을 했을 때, 계절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와 있었다.
깜짝 놀랐던 것은 그 몇 달 사이에 집값이 갑절로 뛰어 올라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위약금을 주고 해약했던 모래내 집도 그만큼은 아니지만 훨씬 더 오른 값으로 다시 팔게 되었다.
그 해 여름, 부동산 시장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궁금해서 이 글을 쓰다가 잠시 멈추고 찾아보았다.
‘74년 이후로 아파트 값이 3년 째 제 자리 걸음, 77년 1가구 2주택 면세 기간을 6개월에서 1년으로 연장, 자금출처 조사 중단’등의 정부 대책이 나와 있었고, ‘중동근로자들의 송금으로 오일달러가 많이 들어와 인플레 발생, 수요에 비해 공급의 부족’ 등의 요인도 있어, 그 해 7월부터 아파트 값과 프리미엄이 상승하여, 아파트 값이 100% 상승하는 ‘아파트 파동’이 일어난 것이었고, 아파트 값이 폭등하면서 단독주택 매매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들끓는 부동산 시장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무지했던 우리 부부가 단지 부모님 거처하실 집을 마련하려 했던 것뿐이었는데, 우리 능력에 맞는 자금으로, 시의적절 하게 큰 집을 장만 하게 된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 당시에 우린 신앙이 없었기에, 하느님이 우리를 도우셨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고, 감사해 하지도 않았다.
이제 이사만 하면 되는데, 골치 아픈 문제가 또 남아 있었다. 신림동 집을 점령하여 살고 있는 가족이, 돈을 받기 전에는 죽어도 못나간다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채무자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니, 제발 나가달라고 사정해도 막무가내였다. 게다가 그 가족 중에는 조현병 환자도 있어서 문짝을 때려 부수기도 하여 집이 여기저기 망가져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집달리를 불러 내보내게 되었고, 애당초 집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순순히 나갔다. 건너 방에 세든 젊은 부부는 전세보증금을 우리가 물어 주거 나가게 했다.
우여곡절의 과정을 다 치르고, 간단한 집수리를 한 후, 드디어 입주를 하여, 추석차례를 새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