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주차
반어, 주어진 상황을 비꼬자
2. 구조적 반어
구조적 반어(=상황적 반어)는 언어적 반어가 일시적인 효과를 가지는데 반하여 반어의 이중적 의미가 보다 지속적으로 작품의 구조에 반영되는 것을 말합니다. 주로 어수룩한 주인공이 등장하여 독자나 관객으로 하여금 우월한 해석자의 입장에 서게 하고 비판적 인식을 얻게 하는 한편 통쾌함을 느끼게 합니다.⁸⁸⁾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얼마 전에 고층 건물 하나가 쓰러졌습니다.
강철과 시멘트로 지은 79층, 그 튼튼한 건물이 그처럼 갑자기 무너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저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어느 재벌의 소유인지는 몰라도 도심에 우뚝 솟은 그 빌딩은 멀리 떨어진 우리집에서 바라보아도 저것이 국력이거니 마음 든든했고, 언젠가는 나도 주머니 사정이 허락한다면 저 꼭대기 스카이라운지에 올라가 오렌지 주스라도 한잔 마셔보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고층건물이 쓰러진 것입니다.
더구나 그 건물이 우리집 쪽을 향해 쓰러진 덕택으로 그 옥상에 설치되었던 용량 3,000t짜리 냉각탑이 멀리 날아와 우리집에 떨어지며 순식간에 저의 가족과 재산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라 저는 슬퍼할 겨를도 없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이 사실 앞에 저는 다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을 따름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선량한 시민이자 모범적 가장으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저의 이력서 및 신원조회 서류를 참조하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여지껏 한 번도 이 사회의 법과 질서를 어긴 적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효도했고, 스승을 존경했고, 국방의 의무를 다했으며, 처자식을 사랑했고, 세금을 언제나 기일 내에 납부했고, 신앙생활을 돈독히 했으며, 여유가 있는 대로 저축을 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석유가 쏟아져 나오기를 남달리 속으로 기원했습니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요즘 와서는 코오피까지 끊었습니다. 물론 거액의 방위성금을 낼 처지는 못 되지만 그래도 육교를 오르내릴 때 계단에 엎드린 거지에게 10원짜리 한 개를 던지지 않고 지나간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졸지에 가족과 재산을 잃은 저는 천벌을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과연 무슨 천벌을 받을 죄를 지었습니까.
하느님, 저에게 이성을 되돌려주시어 저로 하여금 올바르게 생각할 힘을 주옵소서. 잃어버린 저의 가족과 재산을 정당하게 슬퍼할 능력을 저에게 주옵소서. 그리고 계속하여 약속된 미래, 낙원의 땅을 믿게 하여주옵소서.
아 멘.
-김광규, 「소액주주의 기도」 전문
시인은 작품에서 부분적인 언어적 반어 대신 이중의 의미를 지속시켜주는 구조적 반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일반적으로 순진한 주인공이나 서술자, 대변인을 등장시킵니다. 소액주주인 순진한 주인공은 강철과 시멘트로 지은 79층이 갑자기 무너진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습니다. 소액주주는 잃어버린 가족과 재산을 슬퍼할 능력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으면서 순진한 척하고 천벌을 받아 마땅한 어떤 자들에 대한 비판을 모른 척 고백투로 말하고 있습니다.(오규원, 358쪽)
김준오는 구조적 반어를 극적 반어와 동일하게 보고 있습니다. 구조적 반어의 중요한 유형은 플롯의 역전 또는 반전, 주인공의 행위가 그가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 경우, 주인공은 모르고 있으나 독자는 알고 있는 경우 등을 가리킵니다.(김준오, 315쪽 참조)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점심시간이 벌써 끝난 것도
사무실로 돌아갈 일도 모두 잊은 채
희고 아름다운 그녀 다리만 쫓아갔네
도시의 생지옥 같은 번화가를 헤치고
붉고 푸른 불이 날름거리는 횡단보도와
하늘을 오를 듯한 육교를 건너
나 대낮에 여우에 홀린 듯이 따라갔네
어느덧 그녀의 흰 다리는 버스를 타고 강을 건너
공동묘지 같은 변두리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네
나 대낮에 꼬리 감춘 여우가 사는 듯한
그녀의 어둑한 아파트 구멍으로 따라 들어갔네
그 동네는 바로 내가 사는 동네
바로 내가 사는 아파트!
그녀는 나의 호실 맞은 편에 살고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서며 경계하듯 나를 쳐다봤네
나 꿈길인 듯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낯선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
-장정일, 「아파트 묘지」 전문
화자가 점심시간에 사무실로 돌아갈 일도 잊은 채 여자의 다리를 쫓아갔는데, 뜻밖에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독자는 시를 따라가다가 뜻밖의 황당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여기엔 도시적 삶의 맹목성을 화자의 행위를 통하여 반어적으로 보여주려는 시인의 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책상 뒤에서 전쟁을 피하는 겁쟁이라고
한창 교외 시위 때 도서관으로 가던
나를 충고했던 그 친구는
서울의 모기업 중역의 아들이었다
술을 말로 마시고 싸움을 잘하며
돈을 잘 쓰고 여자를 매일 바꾸며
몇 개의 써클과 학과의 장을 맡았던 그는
학점은 꼴찌였으나 시위대는 선봉이었다
시위나 술집에서 행패로
몇 번을 파출소에 끌려갔었지만
금방 풀려나오던 그 친구의 뒷배경엔
굉장한 뭐가 있다는 소문도 돌았었다
시험 때는 강의노트를 빌리러 와서
자취생인 나에게 술과 밥을 샀고
술 취할 땐 은근히 나를 남자답지 못하다고 하며
여자를 소개시켜주거나 기어코 창녀촌에 밀어 넣었다
교수들도 막무가내였던 그는
고학년이 되자 민중 민주를 더욱 외치고
몇 천을 뿌렸다는 소문과 함께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어
교내의 거래처들이 뒷돈을 밀며 조아리게 했었다
졸업 전에 학교 추천으로 그는 대기업에 취직을 했고
졸업 후 몇 달 만에 겨우 얻어걸린 출판사에 내가 취직하러 올라갔을 때
이미 그는 동창회 이사가 되어 있었고
탤런트와 꼭 닮은 미인을 대동하고 나와 나를 위로했다.
-공광규, 「그 친구」 전문
위 시는 대학사회에서부터 시작되는 정치적 인간의 위선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반어적 어조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인물의 모순적 행위를 구체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화자는 ‘그 친구’가 좋다 나쁘다 평가를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시치미를 뚝 떼고 행위 사실만 보여줄 뿐입니다. 화자는 자신이 상대적으로 비겁하고 무능하다는 사실을 가장하여 ‘그 친구’의 모순적 태도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 두 인물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화자는 공부를 하러 도서관에 가고 시위에도 소심하게 참여를 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정반대의 행위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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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문학비평용어사전. 하』, 396쪽 참조. 소설에서는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 「운수좋은 날」, 희곡에서는 송영의 「호신술」, 오영진의 「살아 있는 이중생각하」 둥.
2024. 3. 20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