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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향사 지도법사 성찬 스님
계율은 속박 아닌 대 자유 선사하며 해탈의 길로 인도합니다.
우 자나카 사야도 만나
찬메 명상센터서 3년 정진
한국·인니서 초기불교 전파
무상· 무아· 고 삼법인
알음알이 접근 무의미
수행 통해 체득·증명해야
윤회 끊으려는 불제자, 부처님 생애의미 통찰하며, 끊임없이 자기성찰 해야
성찬 스님은 “수행이란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고,
해탈이란 윤회로부터의 대 자유”라고 했다.
‘후두둑, 탁!’
세차게 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 양곤(Yangon) 거리를
30여명의 스님들이 우산을 펴 든 채
발우 하나 들고 줄지어 유유히 걸어간다.
땅을 차고 튀어 오른 빗방울들이 가사 끝자락을 쉼 없이 적시지만
아랑곳 하지 않는다. 땅을 향한 시선은 흔들림이 없고,
하늘 향한 어깨는 태산이라도 떠받칠 듯 꼿꼿하다.
“2500년 전 부처님께서 행하신 탁발을 그대로 따르는
우리가 비구!”임을 침묵의 행보로 일갈하고 있음이다.
“무릇 승가의 풍류는 걸식을 활계(活計)로 삼는다”고
천명한 일본 에도시대의 탁발승이자 시승(詩僧)이었던
료칸(良寬·1758∼1831)은 탁발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파했다.
“불가의 명맥(命脈)이요, 고불적(古佛迹)이다!”
1996년 한국에서 미얀마로 건너가 위빠사나 수행에 매진한
성찬(性讚) 스님도 이른 아침의 탁발 행렬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성찬 스님은 세납 열 살에
“절에서 명(命)을 이어가라”는 부모의 당부와 함께 산사에 맡겨졌다.
은사는 불교정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월탄(月誕·조계종 원로의원) 스님.
종단의 대소사를 챙기며 동분서주 한 은사 스님 따라다니느라
승적은 군에 입대할 즈음에서야 받을 수 있었다,
범어사 강원과 중앙승가대를 졸업한 후 법주사에서
강주 소임을 보았던 성찬 스님은 판치생모(板齒生毛·이빨에 난 털)
화두를 들며 선교겸수에 나름 애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의문이 일었다.
‘보리수 아래 앉으신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을까?’
1989년 11월, 깨달음의 성지 부다가야로 향했다.
보리수 주변을 몇 날 며칠이고 한없이 서성였다.
‘부처님께서는 저 나무 아래 앉으셔서 삼천배를 하시지 않았다.
나무아미타불 정근을 하셨을 리 없고 무(無)자 화두 또한 들지 않으셨다.
무엇을 하셨단 말인가!’
미얀마 파웅도우 파고다(Phaungdawoo Pagoda) 사원을 참배한
성찬 스님이 ‘금니 공양’을 올리고 있다.
그 때, 붉은 색 감도는 가사를 수한 스님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 그늘에 앉아 경전을 읽던 스님들은 이내 경전을 내려놓고
침묵한 채 앉아 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일제히 일어서더니
차수한 채 걷기 시작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보리수 잎을 스친 소리마저도 경행(經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가슴이 뛰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버마(Burma)에서 왔습니다.”
“방금 전에 하신 수행은 무엇입니까?”
“위빠사나(Vipassana) 입니다.”
‘대승기신론’의 ‘지관(止觀)을 수행하는 법’편에 등장하는
비발사나(毘鉢舍那)를 생전 처음으로 목도했음이다.
미얀마와의 시절인연은 1996년 5월에 닿았다.
미얀마 자국을 포함해 지구촌 곳곳에 500여개의
마하시 명상센터 분원을 세우며
전 세계에 위빠사나를 전파한 사야도(Sayadaw·대덕 고승)가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1904∼1982)다.
입적 10년 전인 1972년까지 세계인 70 만명이 넘는 수행자들이
‘마하시 문하’를 거쳐 갔다고 한다. 본원인 양곤의
마하시 명상센터는 예나 지금이나 위빠사나의 사관학교로 불린다.
마하시 사야도가 입적에 들자
우 자틸라 사야도(U Jathila Sayadaw·2016년 입적)가
마하시 명상센터를 이어 받았다. 1988년 서울 승가사를 방문해
한국에 처음 미얀마 위빠사나 씨앗을 심은 바 있는
우 자틸라 사야도는 한국 수행인들의 발심에 유독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성찬 스님은 우 자틸라 사야도의 집중적인 지도 아래
3개월 동안 정진했고, 소파카(Sopaka)라는 법명을 받았다.
7살에 아라한과를 이뤄 장로에 오른 인물이 소파카다.
마하시 명상센터에서 수행하던 중 평생 자신의 정신적 지주로 남을
우 자나카 사야도(U Janaka Sayadaw)를 만났다.
성찬 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진리를 보여주신 분”이다.
우 자나카 사야도를 따라
찬메 명상센터로 수행처를 옮긴 후 3년 정진했다.
2000년 귀국한 성찬 스님은 경기도 용인에 자리한
여래향사(如來香寺·주지 지현 스님)에서 초기불교를 토대로 한
부처님 법을 전하고 있다. 아울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기원정사에서도 현지 한국인을 중심으로 법을 전하고 있다.
선(禪)을 포함한 북방불교는
부처님이 품었던 근본정신을 발현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남방불교는 팔리어 삼장을
부처님의 원음(原音)으로 철저히 믿으며
자신들의 불교적 실천을 위한 지침으로 삼는다.
인도네시아 보로부드르(Borobudur) 대탑에서 경전을 읽고 있는 성찬 스님.
초기불교의 전형이 가장 잘 남아 있다는
미얀마 승단은 남방불교를 대표한다.
국민의 90%가 불자인 미얀마 불교의 특징을 여쭈어 보았는데
단박에 일언이 떨어졌다.
“일상에서도 계율이 살아 움직이는 나라입니다!”
출가 직후 5년 내에 반드시 외워야만 할 게 율장일 만큼
미얀마 스님들의 지계정신은 정평 나 있다.
그 철저함이란 어느 정도일까?
성찬 스님은 오후불식과 관련한 일화를 전했다. 미얀마 초행 때의 일이다.
비행기에서 제공하는 도시락으로 아침식사를 한지라
출출하여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이드가 식당 앞에서 잠깐 멈추더니
자신의 분침을 뒤로 돌려 11시40분으로 맞춘다.
“음식을 주문하려는데
종업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를 이상하게 쳐다봅니다.
그리고는 이내 식당의 시계를 가리킵니다.”
12시5분. 이 때, 가이드가 자신의 시계를 종업원에 보여주었다.
그의 시침은 11시4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자 종업원은 다른 손님의 시계를 확인하더란다.
“그 종업원이 가이드 앞으로 와서는 ‘저 손님의 시계로도
12시가 이미 넘었다’고 말하고는 제 앞에 놓여 있던
물 잔조차 걷어가 버립니다.
오후 불식을 지켜야 하는 스님들에게는 12시가 넘으면
식당에서조차 음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미얀마 스님들이 입은 가사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을 것이란 걸
직감한 건 그 때였습니다.”
성찬 스님이 하루 일곱 집만을 돌며 탁발하고,
꿀마저도 삼가며 일정기간 동안 정진하겠다고 다짐한 때가 있었다.
두타행을 결행한 것이다. 어느 날 지인이 찾아왔다.
별다른 차를 갖고 있지 않은 터라 꿀 차를 내어주었다.
자신만 꿀 차를 마시는 게 부담스러웠던 지인은
“혹, 두타행을 하십니까?”라고 물어왔다.
이로써 두타행은 깨졌다.
두타행에 임한 사실을 상대가 알아채면
그 수행은 깨진 것으로 보는 게 미얀마 불교의 전통이다.
자신 보다 법납이 높은 비구에게 고하고 참회해야만
두타행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스스로 깬 수행이 아닌 이상 그대로 지속해도
별 문제 없는 것 아닐까?
“비구계를 준수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금하지 않았다 해도 ‘이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을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미얀마 스님들은 홀로 하는 수행 전후로도 참회문을 독송한다고 한다.
여래향사의 법요집이라 할 수 있는 ‘붓다예경‘에도 담겨 있다.
여래향사 ‘붓다예경’. 삼보를 향한 예경법부터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 할 부처님 말씀과 불자로서의
기본예절을 비롯해, 참회, 발원은 물론 성지순례 시
차내에서 올리는 의식도 포함돼 있다.
‘자비하고 거룩하신 부처님, 제가 시작도 끝도 없는 윤회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보다 공덕과 법납이 높으신 큰 스님들과
여러 스승님들과 부모님. 그리고 부처님과 벽지불 성인들게,
신구의 삼업으로 지은 티끌보다 작은 허물 모두 참회하오니,
자비 드리우사 저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정도면 계율에 너무 속박되어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계율은 저를 자유롭게 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삿된 유혹에 넘어갈 리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협하거나 곤경에 빠트리지도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계율을 지킴으로써
일체의 두려움과 증오를 가라앉힐 수 있다.
계율의 뒷받침이 있는 명상은 그 과보와 공덕도 크다.
명상의 뒷받침이 있는 지혜는 그 과보와 공덕도 크다.’”
미얀마 스님들의 수행력과 지혜는 철저한 참회를 바탕으로 한
지계청정에서 샘솟았던 것이다.
바간의 2300여 탑과 사찰이 오늘도 빛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터다.
여래향사에서는 개인을 위한 재 의식이나 기도는
신도들이 직접 하도록 시스템이 짜여있다.
성찬 스님은 법문과 수행만을 지도하고 있다.
“제가 불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건 부처님의 삶입니다.
부처님의 생애가 주는 의미를 통찰한 불자가 어느 정도일지는
저 역시 파악하기 어렵지만 단 한 분이라도 알고 싶은 분이 있다면
그 분을 위해 법을 펴겠습니다.
교리 측면에서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 22근(根), 사성제,
십이연기만은 확연하게 알려드리려 합니다.
초기·대승불교를 관통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요체인 무상, 무아, 고(苦)는 수행을 통해
스스로 체득해 증명해 내야만 합니다.
물론 저는 위빠사나를 권합니다.
몸이나 느낌 등에 대해 알아차림을 행[觀]하다 보면
무상과 괴로움의 근원을 스스로 알게 되고
오취온(五取蘊)의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체험을 반복하다 보면 궁극에는 삼법인에 대한
자신만의 새로운 확신이 섭니다.
이 정도에만 이르러도 세상은 달리 보일 것이라 확신합니다.”
물질현상(色), 느낌(受), 지각(想), 지음(行), 의식(識)에
애착과 분노를 품으며 번뇌를 일으킨다.
그 오취온에 집착해 있는 상태를
또한 자아라고 착각하는 게 중생이다.
이 사실을 직시하고 떨쳐낼 수 있어야 평온을 찾는데
성찬 스님은 위빠사나가 그 길을 열어 보일 것이라 확신하고 있음이다.
초심 수행인들이 힘들어 하는 것 중 하나가 졸음과 망상이다.
대처법이 있을 법하다.
“졸리면 일어나세요. 그래도 졸리면 걷고,
그래도 안 되면 세수를 하세요.
그래도 졸음을 떨쳐낼 수 없다면 자야 합니다. 단, 단잠입니다.
유념해 두어야 할 건 잠에서 깨어 난 순간,
잠에 들기 직전에 ‘내가 수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망상은 원래 내가 포커스를 맞췄던 주제(호흡·화두)에서
벗어 난데서 비롯됩니다. 호흡을 관하고 있던 초심자라면
망상을 피웠다는 걸 인지한 그 즉시 ‘망상!’이라 이름 붙여보세요.
이내 ‘아! 그렇지. 호흡’하며 원래의 주제로 돌아올 것입니다.”
끝으로 아주 원론적인 질문을 드렸다.
수행과 해탈이란 무엇인가?
“수행이란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고
해탈이란 ‘윤회로부터의 대 자유’입니다!”
성찬 스님이 위빠사나 수행법을 전한다고 해서
미얀마 불교를 전파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성찬 스님은 “부처님의 삶을 전하려 한다”고 했다.
‘삶이 곧 말씀’이다.
여래향사에서 피어 오른 법향이 소중한 이유이기도 하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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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 스님은
· 1974년 사미계 수지, 1981년 구족계 수지.
· 범어사 승가대학(1984)· 중앙승가대학(1988) 졸업.
· 1991∼1993 법주승가대학 교수.
· 1996∼2000 미얀마 마하시·찬메수도원서 정진.
· 현재 여래향사 지도법사, 인도네시아 기원정사 주지.
2018년 6월 13일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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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두타행 (頭陀行)
불교 승려들의 수행방법. 두타란 인간의 모든 집착ㆍ번뇌를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불교에서는 12두타행을 수행자의 행위기준으로 삼았다.
① 세속을 등지고 깊은 산속 등에서 산다(在阿蘭苦處).
② 늘 걸식을 한다(常行乞食).
③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차례대로 걸식한다.
④ 하루 한 끼만 먹는다(受一食法).
⑤ 절식을 한다(節量食).
⑥ 오후가 되면 음료ㆍ당분류도 섭취 않는다(中後不得飮漿).
⑦ 헌옷을 기워 입는다(着弊衲衣).
⑧ 중의(重衣)ㆍ상의(上衣)ㆍ내의(內衣) 외에 옷을 갖지 않는다(但三衣).
⑨ 무상관(無常觀)을 닦기 위해 무덤 곁에서 산다(塚間住).
⑩ 쉴 때는 나무 밑을 택한다(樹下止).
⑪ 나무 아래서 자면 습기ㆍ독충 등의 폐해가 있으므로 한데에 앉는다(露地坐).
⑫ 앉기만 하고 드러눕지 않는다(但坐不臥) 등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타행 [頭陀行] (원불교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