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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강좌 56강
이번주 디카시 강좌에는 이상옥 교수의 제12차 서울문학인대회 심포지엄 발제문(2017.12.1, 문학의집서울), <극서정시·디카시 운동과 시의 즐거움>을 소개한다.
1. 살찐 돼지와 마른 소크라테스
다음 아고라에서 흥미 있는 글을 읽었다. 아이디 haeorm이라는 분이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살찐 돼지가 되기보다는 마른 소크라테스가 돼라`를 인용하며 “경제적 궁핍을 해소하기 위해 정신적 풍요를 희생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는 `살찐 돼지들`이 많은 사회가 좋은가, 아니면 경제적 궁핍을 감수하고라도 정신적 풍요를 추구하는 `마른 소크라테스`가 많은 그런 사회가 더 좋을까 하는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하는 문제만큼 쉽게 풀리지 않는 모순적 명제일 수도 있다.”고 제시한 것이 그것이다.
좀 엉뚱하지만 이 명제는 오늘의 한국 시단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 시단은 그들만의 리그가 된지 오래다. 이건 시인들이 ‘마른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굳은 신념의 표방의 결과인지 모르겠다. 이경철은 『월간문학』2017년 7월호 「타성과 실험, 소통과 불통 사이」에서 “요즘 소위 ‘문단권력’이라는 ‘유력문예지’에 실린 시들을 보면 소통이 되지 않아서 문제다. 너무 길고 장황한 요설이 난무하고 시인 자신에 갇힌, 아니 시인 자신과도 소통이 안 되는 시들이 너무 많아 진작부터 문제가 돼왔다.”고 지적하고, 반면에 “『월간문학』에 실린 시편들은 비교적 소통이 잘 된다. 아니 너무 소통이 잘 되는 시편들이 눈에 띄어 탈이다. 소통 불능의 실험시들이 판쳐도 항변 못 할 정도로 시적 타성에 젖은 시들도 분명 문제인 것이다.”라고 곁들여 지적했다.
이런 지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시단의 양극화 현상을 일컫는 것이다. 최동호는 『유심』2010 11/12월호 「트위터 시대와 극서정시(極抒情詩)의 길」에서 21세기 초두 미래파의 시대가 화려하게 개막되었지만 십 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진 유행과 같은 것이 됐다며 “미래파가 지나간 자리에 장황한 서정시와 난삽한 서정시 그리고 소통 부재의 서정시가 시단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젊은 세대의 시인들의 경우 그러한 현상은 두드러져 보인다.”고 우려를 표했다. 그러면서 최동호는 새로운 시의 길을 모색한다며 극서정시(極抒情詩)를 제시했는바, 그가 말하는 극서정시는 ‘단형의 소통 가능한 서정시’를 지칭한다.
2. 극서정시 운동
최동호는 극서정시를 제시하며 나름대로 극서정시론을 가다듬는 가운데 실천의 일환으로 서정시학 서정시 시리즈로 조정권 시집 『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서정시학, 2011. 2), 이하석 시집『상응』(서정시학, 2011. 3), 최동호 시집 『얼음 얼굴』(서정시학, 2011. 3) 등을 출간하며 극서정시 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시집 『얼음 얼굴』 자작시집 해설 격인 「극서정시와 유성검의 시학-시집『얼음 얼굴』에 대하여」(『현대시학』2011년 6월호)에서도 “해체시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미래파의 시들이 유행하면서 우리 시단에는 기괴한 환상이나 정체불명의 산문적 장시들이 널리 유포되고 있다. 시대정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천착 없이 속류의 저널리즘에 편승한 결과가 이런 현상을 초래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는 우리 서정시의 길이 극서정시에 있다”라고 밝힘으로써 미래파 이후 장황한 소통 부재의 서정시에 대한 새로운 서정시의 길로, 극서정시를 제시한 정황을 거듭 천명했다.
앞서 살핀 대로 미래파 이후 한국시단은 전 시대와 또 다른 양극화의 길을 걷고 있다. 소통 불능의 난삽한 시와 타성에 젖은 서정시가 그것이다. 이 둘 다 문제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이미, 타성에 젖은 서정시는 본격 시단에서는 거의 시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더욱 과도한 소통 불능의 난해시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더욱 문제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손 안의 컴퓨터로 일컬어지는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소통 방식이 SNS로 급격한 전환이 이루어져 김종회 교수의 지적과 같이 “세상이 변하고 시대정신도 바뀌어가는 마당에, 이제는 문자문화 활자매체의 시대에서 영상문화 전자매체의 시대로 문화와 문학의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다.”
전자매체의 등장에 따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단에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문단권 밖에서는 애니팡시 같은 이른바 SNS시가 대중들의 큰 호응을 받는다. 대표적인 경우가 하상욱이다. 하상욱이 SNS에 “서로가 소홀했는데/너 때문에 소식을 듣게 돼'( SNS시「애니팡」) 같은 짧은 시를 재미 삼아 올린 것이 SNS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리며 2012년 전자시집으로 펴낸『서울 시 1』, 『서울 시 2』도 덩달아 큰 반향을 불러 SNS시 라는 신조어를 낳게 했다. 이런 시대 변화를 반영하여 지난해는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도서관 전시실에서 SNS 상 재미와 공감을 주는 대표적인 ‘SNS 시’를 소재로 하는 ‘SNS 시인시대전’을 열며 기존 시와 또 다른 대중 장르로 출현한 SNS 시의 흐름과 의미를 조망하기도 했다.
디지털 SNS로 표상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소통 방식으로 대 전환이 이루어지는 가운데서도 기존의 시단에서 여전히 난삽한 소통 불능의 시와 구태의연한 관습적 서정시로 양극화되어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가운데 독자들은 시 읽기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이다. 독자들이 기성 시단에서 시 읽기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생활 현장에서 포착한 위트와 유머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짧은 SNS시에 열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종이책으로 나오는 본격 시들은 너무 난삽하여 읽어도 이해할 수 없고, 그렇다고 타성에 젖은 관습화된 시는 읽혀지기는 하지만 뻔한 내용이니 차라리 SNS 상에서 생활 현장에서 느낀 순간의 정서를 자극하는 SNS시를 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시대정신의 변화와 더불어 소통 방식 또한 SNS로 시공간이 압축되어 실시간 순간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독자들은 기존 종이책보다는 전자매체를 통해서 쌍방향 의사를 소통을 지향한다. 손 안의 컴퓨터인 모바일 스마트폰 하나면 지구 반대편과도 언제든 소통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시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극서정시 운동의 실천적 첫 시집이라 할 수 있는 중진 시인들의 위의 세 권의 서정시집은 앞에서 지적한 최근 시단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소통불능의 장황하고 난삽한 서정시의 유행에 대한 반성과 시문학의 새로운 방향 모색이다. 극서정시 운동은 시를 읽는 본래의 즐거움을 독자들에게 되찾아주는데 큰 의의가 있다.
발은 객지客地
죽어라 하고 뛰어내린 곳이
삶
-조정권, 「머나 먼∙∙∙∙∙∙」전문
이 시는 조정권 시집 『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에 수록된 작품이다. 홍용희는 이 시집 해설에서 “청빈과 고요가 시상의 농담과 준법을 이룬 수묵화첩이다. 그의 시편들은 한기가 느껴질 만큼 가감하게 절삭한 자발적 가난의 언어로 개진된다. 그에게 말은 말하지 않기 위한 말이다, 그래서 그의 시의 주인은 말이 아니라 침묵이고 수사가 아니라 여백이다.”라고 지적한다. 이 지적은 바로 극서정시가 추구하는 시의 길을 지적한 것이라 해도 좋다.
극서정시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 방만한 자의식의 과잉으로 스스로 자폐적 언어가 되어버린 불통의 시에 대응하여 자발적 가난의 언어를 취하며 침묵과 여백으로 압축하여 다시 독자에게 나아가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극서정시 운동은 서정시학의 시집 시리즈 ‘서정시학 서정시’ 라는 이름을 단 앞 세 시인의 시집에 이어 김종길, 오세영, 유안진, 강은교, 이기철, 이선영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3. 디카시 운동
극서정시가 시가 언어예술이라는 전통을 견지하며 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시형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디카시는 언어예술을 넘어 시의 언어를 영상으로까지 확장하면서 말티언어예술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독자와 만나는 방식이다. 최근에 첫 시집 『오늘의 냄새』(문학수첩, 2017)을 낸 신예 이병철 시인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21세기가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시인들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글쎄….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SNS를 활용한다든가 팟캐스트, 디카시, 시 콘서트 등 시대 경향에 맞는 나름의 방식으로 독자와 소통하고 있는 자체가 노력이라고 본다.”라고 답했다.
그렇다. 디카시는 새로운 시대 경향에 새로운 방식으로 독자와 소통하는 방식이다. 카톡, 트위터, 페이스북 등에는 영상과 문자의 멀티언어 글 쓰기가 하나의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문자 글쓰기만으로는 SNS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발표자도 근자에 매일 페이스북을 하는데 역시 문자와 영상의 멀티언어로 올린다. 페북의 글 쓰기도 90% 이상이 멀티언어로 되어 있다. 디카시는 이런 일상화된 멀티언어 글 쓰기를 예술적 글 쓰기로 끌어올린 것이다.
디카시는 극서정시의 경우보다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소통 방식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또한 반영하는 새로운 시운동이다. 디카시는 디지털 시대의 소통 방식을, 고전문학에서 현대문학으로 변모하는 이행기였던 개화기 시대에 버금 가는 대 변환기로 본다. 그만큼 디지털 혁명은 삶을 반영하는 예술 ∙ 시도 기존의 방식을 뛰어넘는 새로움을 요구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개화기 시대 가창되던 시가에서 읽는 시로 발전하는 과정의 산물로 창가, 신체시 등을 거쳐 오늘의 시로 발전하였듯이, 지금 디지털 미디어 시대는 시가 영상과 함께 보고 읽는 시로 진화할 수밖에 없다는 보다 급진적인 입장도 요구된다.
디카시는 극서정시 운동보다 훨씬 앞서 전개되었다. 디카시는 발표자가, 2004년 4월 인터넷 한국문학도서관 연재코너에 ‘디카시’라는 신조어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감흥(시적 형상)을 디지털카메라로 찍고 그것을 문자로 표현하여 영상과 문자의 멀티언어로 2개월간 연재하고 동년 9월에 디카시집 『고성 가도(固城 街道)』를 출간하면서 공론화되었다. 처음에는 발표자 개인의 실험으로 시작된 것이 시론화 작업을 거치면서 에꼴을 형성하고 경남 고성을 발원지로 하는 디카시 운동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스마트폰 및 SNS와 만나 전국적인 문예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미 디카시는 최호석의 『청소년을 위한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인터넷 시대 새로운 시의 한 장르로 다루고 있으며, 2018학년도 검정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디카시 작품이 소개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또한 지난해 한국문학번역원의 계간 『리스트』 2016년 봄호에 디카시가 소개되었고,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도 문학 용어로 등재되면서 포털 네이버나 다음 국어사전에도 역시 디카시가 등재되었다.
2006년에 창간된 디카시 전문 무크지 『디카시 마니아』, 2007년 반년간 『디카시』를 거쳐 2015년 계간 『디카시』로 전환되어 지난 2017년 『디카시』 가을호가 통권 23호로 발간되었다. 여타의 문예지에도 디카시 지면을 만들기 시작하고 있다. 경남 고성에서는 2008년부터 경남 고성 디카시페스티벌을 매년 열고 있으며, 지난해부터는 국제디카시페스티벌로 격상시켜서 진행하며, 디카시작품상도 제정하여 올해 제3회로 송찬호 시인의 「비상」이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이병주하동국제문학제 디카시공모전이 올해로 제3회째 열렸으며, 양평소나기마을 황문원문학제 황순원 디카시공모전이 올해 제1회로 열렸다. 그리고 진주 형평문학제, 진주 개천예술제, 토지문학제 등에도 디카시백일장이 열린다. 또한 2014년부터는 고성문화원 부설 디카시연구소가 개소되어 그간 디카시문화콘텐츠연구회에서 주관하던 디카시프로젝트를 보다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 미국 등과도 소통하며 디카시의 세계화를 위해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소통 방식의 디지털화와 더불은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디카시는 멀티언어 글 쓰기라는 광범위한 저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거듭 말하거니와 디카시는 영상과 문자로 표현하는 멀티언어 예술이다. 영상과 문자, 즉 멀티언어를 매재로 하되, 영상 따로 문자 따로가 아니다. 영상 따로 사진예술, 문자 따로 시예술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영상과 문자가 하나의 텍스트가 되어 시(디카시)가 되는 것이다. 디카시의 영상과 문자에서 영상을 따로 사진예술로, 문자를 따로 시예술로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시에 영상을 덧붙이는 포토포엠과는 다른 양식임을 일컫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차가운 돌 속에 박히기로 했다
사람들은 지나갔다, 멈추었다, 그리고 그를 읽었다
그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시가 되었다
-최금진의 디카시 「시인」
이 디카시는 문자만로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그가 차가운 돌 속에 박힌다는 의미를 영상을 보면서 읽는 것과 보지 않고 읽는 것은 다른 뉘앙스를 준다. 영상에는 차가운 돌 속에 박힌다는 시인의 몸을 환기하는, 돌 속에 섬이 된 것(돌 못 이미지) 같은 이미지는 돌 속에 박혀도 여전히 섬처럼 이질적인 존재를 환기하다. 돌을 둘러싼 물도 예사롭지가 않다. 영상과 같이 읽는 ‘차가운 돌 속에 박힌 것’이 영상 없이 이런 뉘앙스를 보이려면 많은 새로운 문자언어가 동원돼야 하고, 그렇더라도 영상과 함께 읽는 지금의 의미를 똑같이 드러내기는 힘들 것이다. 이 디카시의 다른 문자 부분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디카시는 이런 점만으로도 문자시나 포토포엠과는 다른 독립적인 미학을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4. 디지털 시대 시적 대응
구텐베르크 혁명에 버금 가는 디지털 혁명이 이뤄지며 이를 기반으로 4차 산업혁명, 즉 “물리적공간, 디지털적 공간 및 생물학적 공간의 경계가 희석되는 기술융합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미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스마트폰 하나로 걸어다니는 1인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살아간다는 말이 낯설지 않다.
이런 대 변환기에도 시단에서는 여전히 난삽한 소통 불능의 시와 타성에 젖는 관습화된 시로 양극화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자는 소통 불능으로, 후자는 뻔한 소통으로 다 같이 독자들과 유리되고 있으며, 독자들은 소위 SNS 시로 몰리거나 페북 같은 곳에서 멀티 글 쓰기로 정서적 교감을 나눈다.
극서정시나 디카시는 다 같이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서 시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며 시 읽기 본래의 즐거움을 추구해 나간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 방식에 있어서는 둘은 다르다. 극서정시는 양극화된 시단의 현실에서 시가 언어예술이라는 전통을 지키면서 새로운 환경에서 시의 양식을 모색하는 것이라면 디카시는 SNS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멀티언어 글 쓰기를 시로 끌어들여 와 시의 언어 범주를 확장하며 독자들과 보다 적극적인 시적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상옥(한국디카시연구소 대표, 경남정보대학교 특임교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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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는 디지털 세상에서 유목민을 치유하는 디지털 멀티언어다. 디카시를 신뢰할수록 세상을 디카시 소재로 바라보게 된다. 그만큼 디카시는 흡입력을 가진 상상력의 산물이다.
디카시는 대한민국이 그 중심지이다. K-디카시 열풍은 무한의 가능성을 던져준다. 디카시를 한글로 정확히 표현하는 외국 대학생의 모습을 통해 디카시의 파급력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디카시는 가장 짧은 한편의 영화다. 디카시는 디지털 세상을 수놓는 별이다. 또한 디카시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1초 , 또는 3초 짜리 기획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디카시는 디지털 세상을 물들이는 또 다른 한 편의 감동 무비다.
[금주의 디카시]에는 조윤혜 시인의 <최악의 하루>를 소개한다.
#금주의디카시
최악의 하루 / 조윤혜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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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삶은 참으로 슬픈 여정이다. 그 슬픔은 인간으로 하여금 극한의 고독감을 밀려오게 만든다. 그러나 그 슬픔을 뒤로 한 채, 하루를 또 하루를 극복하며 살아가는 시지프의 초월적 단상은 아프기도 하고, 장중한 삶의 깊이가 전해진다.
치열한 삶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아프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를 다독이며 긍정의 마인드로 살아가고 있는 조윤혜 시인은 <최악의 하루>는 잠재된 희망의 메세지를 구현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제목으로 부각시킨 <최악의 하루>는 여전히 소시민이 걸어가고 있는 현장의 들꽃 내음이 가득하다. 이미 최악인 상황에서는 더 이상 최악이 될 수 없다. 하루라는 감사의 선물을 다 쓰고 난 이에게 '고생 많았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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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는 SNS의 날개를 타고 빛보다 빠른 속도로 전달되는 별이다. 스마트폰이 켜져있을 때 디카시 박동소리 즉, 디카, 디카, 디카 소리가 들리면 디카시를 신앙처럼 여기는 우리 시대 진정한 디카시 심장을 가진 디카시인이다."
정유지(부산디카시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