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여름의 끝자락
기로가 아침에 일어나 산장 집으로 가니, '키큰 아저씨의 부고'를 이미 받은 상태였다.
"키큰 양반, 돌아가셨다는디..." 박 만석이 조용한 어조로 말을 했다.
어젯밤 자정을 넘기고 숨을 거두었다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었다.
기로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래, 더 심한 고통을 당하지 않은 채로 가신 게... 본인에게나 남겨진 가족 모두에게, 나을 것이리라. '간암'이 육체적인 고통이 매우 심하다고 하던데... 그런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 받은 상태로 가신 것이, 깨끗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어쩌긌어? 한 번 왔다가 가는 인생..." 하는 박 만석의 말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얘기를 나누며 심란해 하고 있었는데, 박 만석이,
"아침 먹고 가." 하고 잡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아니라고 뿌리치고 돌아왔을 텐데,
기로는, 오늘은 통나무집에 친구의 사돈 조카의 친구들이 댓명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집에 드나드는 게 불편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런 뒤 '夢想?'에 돌아왔는데, 오전 내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아...
'내가 이래선 안 되는데......' 하면서 평상에 나갔다가, 두 은행나무 사이에 쳐 놓은 그물침대(기로가 서울에 갔다 오는 사이 친구 범상이 그물침대를 만들어 놓았다.)에 눕기도 했다.
흔들 흔들......
'아, 이런 여름 날 호숫가 나무 그늘의 그물침대에 누워있다니... 참으로 팔자 좋은 사람이리라. 나는......'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기뻐서라기보다는 어쩐지 세상을 잊고 싶은 심란함에서 나온 발로였다.
그러면서 들으니, 산장 집 쪽에선... 종일 또드락거리는 소리가 끊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저 양반도, 친구를 잃은 허전함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일을 하고 있는 것일 테다. 원두막 아래 하수도를 고친다고 하던데......' 하고 있던 기로는, '근데, 나는... 그물침대에 누워 흔들거리고 있으니......' 하고 한숨까지 지으면서도,
가만히 들어보니, 매미를 비롯한 온갖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거기다 새들의 울음소리까지 가세하다 보니, 문득 기로에겐,
'가을이 오려나?' 하는 생각이 스치는 것이었다.
그 벌레들은 남아있는 막바지 여름의 강한 빛에, 자신들의 생을 조금이라도 더 알차게 보내기 위한 몸짓을 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오후 네 시 경에야,
"문상가자고!" 하는 박 만석의 전화가 와서,
기로는 부랴부랴 세면을 했다.
기로의 행동이 그다지 느리지 않을 텐데도, 외출을 위해 잠깐 밖에서 구두 손질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려, 방에 들어오니... 끊어지는 것이었다.
박 만석일 터였다.
그래서 다시 나가 구두손질을 마무리하고, 방문에 열쇠를 채우고 손을 씻는데... 아닌 게 아니라 차 소리가 들려왔고, 기로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한 박 만석이... '夢想?'까지 들이닥친 것이었다.
'막은댐'까지 가서 차를 세우려는데, 시내버스가 들어왔다.
그래서 둘이 뛰어 가 버스를 타고(박 만석이 전주 지리를 잘 모르기도 하고, 또 시내 교통이 너무 복잡해서... 그냥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던 것이다.) 전주에 갔다.
살아생전 마당발이었던 키큰 아저씨라 문상객이 의외로 많았고, 두 사람의 문상은 채 10분을 넘기지 않은 채... 별 말도 없이 다시 '막은댐'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돌아왔다.
여전히 심란한 상태로 컴퓨터 앞에 앉아 밤 시간을 보내다가, 기로는 마루에 나가 보았다.
그런데 산장엔 아직도 불이 켜 있는 것이었다.
아까 '夢想?'에 돌아오는 길에 박 만석이,
"오늘, 키큰 양반허고 함께 혔던 사람들찌리 헐 얘기가 있어..." 했는데, '마을 곗꾼'들간의 얘기가 밤이 깊도록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언뜻, 호수가 반짝였다.
'달이 떴나?' 하면서 기로가 하늘을 보니,
구름 사이로 달이 고개를 내밀고, 그럴 때마다... 자신이 서 있던 마루에서 보이는 호수가 금가루처럼 빛나는 것이었다.
'저 달이 다시 둥글어지면, 추석이 되리라. 그렇다면 가을도 이제 한 달 안으로 찾아온다는 얘긴데......' 하면서 보니,
이제, 정말... 뭔가 가을의 냄새가 풍기는 기분이기도 했다.
'아,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면......' 기로의 맘속에선 다시 불안감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8 월에 들어서자마자, 스페인 손님들이 와서 돌아다니느라... 작품을 하나도 하지 못한 것에 따른 불만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오늘 같은 밤에(선선하기까지 했으니까)... 작업을 해야만 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로는, 작업 방에 들어가는 것조차... 겁을 내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지 말아야 하는데......'
*
맑은 하늘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컴퓨터를 하고 있는데, 밖이 훤하게 밝아오는데... 멀리 운암대교가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나는 것이었다.
'날씨가 좋으려나?' 하는 생각을 하며,
홈페이지에 업그레이드를 하고 나와 보니, 안개가 산을 덮고는 있었지만... 날씨가 썩 좋았다.
문득,
''국사봉'으로 가서, 호수의 섬 사진을... 맑은 날씨에 한 번 찍어보자!'는 생각이 스쳐,
부랴부랴 카메라를 챙겨 가방에 넣고 산장 집으로 갔다.
"어디 갈라고?" 산장아저씨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죄송하지만, 저하고 국사봉에 좀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왜?"
"이렇게 맑은 아침에, 사진 좀 찍고 싶어서요."
"근디, 왜? 이런 날은, 오늘 말고도 많은디..."
"그래도... 오늘 사진을 찍고 싶어서요."
"그려? 그러믄, 그려..."
그렇게 우리는 트럭을 타고 국사봉 쪽으로 향했다.
호수 주변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니 위쪽엔 아직도 안개가 걷히지 않은 상태였다.
깨끗하게 맑은 상태의 섬을 찍고 싶었는데......
오늘은 키큰아저씨의 장례날이다.
장지는 이 마을로 들어오는 진입로에서 오르는 그 집 '선산'이라고 했다.
그 분은 뭔가 예감이 있었던지, 병원으로 실려 가기 하루 전날 아침... 산장아저씨와 둘이서 선산에 벌초를 하러 가셨었다.
나는 평상에서, 키큰 아저씨가 산장 아저씨께,
"그 집 차로... 내 제초기를 싣고 같이 가줘..." 하고 부탁을 하는 걸 들었었다.
그러니까 그 날이 내가 키큰 아저씨를 본 마지막 날이었다.
그렇게 본인이 죽기 며칠 전, 자신도 묻힐... 선산에 벌초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맑은 날 묻히시는 것도, 복일지 모른다......' 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세요, 키큰 아저씨. 맑은 날, 시원하게... 가십시오......'
근데, 내가 여기 와서 산지 얼마나 된다고... 벌써 이 마을에선 두 사람이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걸 좋은 식으로 받아들일 순 없을 것 같고, 뭔가...
'내가 이 마을에 안 좋은 기운을 가지고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허기야, 두 분 다... 갑자기 횡사한 게 아닌, 연세가 지긋한 상태로의 지병으로 가신 것이니...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는데......' 하면서 짚어 보니,
아무튼 내가 이 마을에 와서 사는 사이에, 이 마을 전체적으로 봐도 중요한 사건이 터진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수도 개통식’도 그랬고, 뒷집 영감님도 그 사이에 돌아가셨고, 반장의 교통사고도 그 중의 하나일 수 있고......
그렇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장씨가 여기 와서 살응 게, 외국 사람들도 이 마을에 오는고만...' 했듯,
'내가, 뭔가... 이 마을의 변화에 시동을 걸기라도 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쨌거나, 그동안 내가 여기 와서 찍었던 사진이... 하필이면 며칠 전에 도착해서, 그 분께도(그 집의 사진과 마을 사진 등도 드렸기에) 몇 장 드렸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 사진들이, 그 양반이 돌아가신 뒤에 왔었더라면 어떻게 할 뻔했겠는가.
'아, 그나마 고인이... 그 사진을 보며, 만족해 하셨으니... 게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8 . 12
오랜만에 기로는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와 이틀 여를 보내고 있었다.
8월에 들어서면서 스페인 손님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두 번의 서울로의 출타가 있었고, 그들을 접대하고 또 어울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돌아갔는데, 그 와중에 둔터니 마을의 키큰 아저씨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일이 발생 했다.
그리고 아직도 서울에서 손님들이 더 올 예정으로, 혼란하고 산만한 일들이 계속 이어질 것이지만......
만남과 헤어짐......
어김없이 기로의 삶에도 찾아오는 '사람 사는 일'이었다.
비록 서울을 떠나, 도시 생활과는 상관없는 듯 살고 있는데도......
# 여름의 끝자락
문득,
여름의 끝자락임을 느낍니다.
후텁지근하고 답답하던 기운은 이제 그 모습을 감추는 듯하면서, 뭔가 까실까실한 기운이 강하게 살갗으로 파고드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의 색깔이 바뀌고 있는 것이 내 눈에도 들어오거든요.
축대 돌 틈에 자라던 달개비도 포기마다 잔잔한 꽃들을 가득 내 뵈고, 옆 집 지붕으로 올라가던 나팔꽃도 아침마다 남색 나팔을 잔뜩 불어대며, 봉숭아 채송화, 게다가 분꽃까지가... 서로 앞 다투듯 많은 꽃을 펴댑니다.
그리고 '夢想?' 마당 끝의 코스모스도, 그 축대 너머의 길이 보이지 않게 무성하게 자라... 머지않아 꽃이 피면, 호수를 배경으로 마음껏 한들거릴 것 같습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나날이 배가 불러오는 격의 자세도 무겁기만 하고, '夢想?' 앞 평상 은행나무 사이에는, 그 사이 내 친구가 그물침대를 만들어 놓아... 나는 그 위에 누워 ‘세상에서 가장 팔자 좋은 사람’의 모습을 취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물침대에서 흔들거리다 보면, 갑자기 온갖 풀벌레 소리가 다 들려오기도 합니다.
여태까진 전혀 귀에 들려오지 않았던 소리들마저도......
아, 그 건... 내가 내 자신으로 돌아와 있다는 표시일 겁니다.
그러다 보니 문득, 마음도 바빠집니다.
그동안 소원했던 배타는 일에서, 상실감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나는, 가까운 산장 집을 가는 것마저 배를 타고 가려고 합니다.
아직은, 심란해서... 일이 손에 잡히진 않지만,
여기서 자연의 냄새와 함께 살아가는 게, 너무 행복하다는 걸... 다시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중성.
내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 내 주변에 널려있는 이중성의 세상......
요즘에도 나에겐 좋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들이 마치 경쟁을 하듯 불쑥불쑥 몰아닥치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마음을 잡아야만 합니다.
어쨌거나 세상은 그런 내 개인적인 일과는 상관 없이라도, 스스로 벌써 여름을 보낼 채비를 하고 있으니까요.
어떡하겠습니까? 그 세상에 또 맞춰서, 세상을 살아나가야 할 테니까요......
이제, ‘9 월의 노래’를 들먹여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9 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하모니카로 그 노래를 불 것입니다.
내가 가을을 맞는 연례행사 중의 하납니다.
'夢想?' 쉼터의 나무토막 의자에서 그 노래를 부르면, 여태까지 참아왔던 코스모스도... 꽃필 준비를 서두르겠지요.
가을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잊은 채 지내다가, 더 늦어지기 전에......
8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