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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망매(祭亡妹)
고 종 석
“혹시…… 들으셨죠, 김혜원 씨 소식?”
매제가 목소리를 낮추어 조심스레 물었다. 웃음기가 가신 그의 얼굴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매제의 입에서 그 아이 얘기가 나오지 않기를 나는 얼마나 빌고 또 빌었던가. 그런데 마침내. 아냐, 내가 지레 잘못 짚고 있는지도 모르지. 나는 내 사위스러운* 짐작을 마음 한켠의 악착같은 도리질로 책망하며 그에게 되물었다.
“아니…… 무슨?”
“지난달 말에·…‥”
유리잔의 한기가 손가락 끝에서 핏줄을 타고 내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나는 술잔을 손톱으로 불안스레 긁다가, 반쯤 남아 있는 칼스버그*를 신경질적으로 단숨에 들이켰다. 액체의 일부가 기도로 쓸려 들어가 불쾌한 재채기를 유발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꼭 재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는 오실지 말지를 형님이 직접 결정하도록 일단 알리기는 하자고 했었는데, 장모님 이 한사코 반대하셨어요. 막 도착해서 정착하느라 마음 쓸 곳이 많을 텐데 먼 거리를 오게 하는 게 안 내키신다고요. 집 사람도 같은 의견이었고.”
순간, 어머니와 누이의 이기주의에 짜증이 났다. 자신과 가족이라는 테두리 밖으로는 좀체로 정을 나눌 줄 모르는 그 단호한 이기주의에.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그 이기주의가 사실은 나를 정말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깊은 사려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내가 연락을 받고도 혜원이로부터 9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곳에 마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혼자서가 아니라 분명히 아내와 딸아이들 둘을 모두 데리고 서울로 날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곳에 도착한 지 한 달도 채 안 돼 다소 어정쩡한 상태에 있던 우리 네 식구에게 심리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부담을 지웠을 것이 틀림없다. 더구나 연락을 받은 즉시 내가 날아갔다고 해도, 혜원이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혜원이가 죽었다는 것이. 담당 의사들은―그 아이도 의사였지만ㅡ물론 희망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렇지만, 내가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그 아이를 본 날, 아, 그날은 그 아이가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날이기도 했다, 그 아이의 표정 에 죽음의 그림자 같은 것은 조금도 드리워져 있지 않았었다.
“장례는?”
골루아즈*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며 내가 물었다.
“한강성심병원에서 그냥 치렀어요. 장지는 벽제공원묘지 였구요.”
“이모님과 박 서방이 보통 상심한 게 아니겠군. 영주 은주도 그랬겠구.”
보랏빛 연기를 실어 뿜어내는 내 날숨에서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밍밍하게 확인하고 있었다.
“박정훈 씨는 그래도 담담했는데, 이모님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셨어요. 영주 은주는 아직 너무 어려서 상황을 잘 몰랐던 거 같구요.”
“무슨…… 일이에요?”
잠자코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정경희 씨가 머뭇머뭇 물었다.
매제가 대답했다.
“진우 형님 이종사촌누인데, 보름쯤 전에 세상을 버렸어요. 저랑 잠시 같은 병원에 있기도 했고 인의협* 일도 같이했었는데…… 골수암이었어요. 환자들한테나 동료들한테나 참 따뜻하고 유쾌한 의사였어요. 젊은 사람은 거의 안 걸리는 병인데 어쩌다 그런 일이 생겼는지…… 30대가 그 병에 걸린 케이스는 한국에서 처음이에요.”
“아.”
정경희 씨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나는 잠시 전까지만 해도 아주 흐뭇하게 진행되던 우리 셋의 대화가 금세 너무 거북살스러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가서 좀 걷지, 뭐. 두 사람 다 반쯤은 관광객이니까. 사실은 나두 그런 셈이구.”
반쯤 타다 남은 골루아즈를 재떨이에 짓이기며 내가 짐짓 가뿐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우리들은 카페 솔레이유도르를 나왔다. 햇살은 여전히 관능적이었고, 소르본 광장은 학생들의 싱그러움으로 그득 차 있었다. 하늘거리는 마로니에 이파리 사이로 드문드문 붉은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5월이었다. 우리는 풋기운이 그윽한 생미셸 거리를 따라 센 강 쪽을 향해 느릿느릿 걸었다.
혜원이가 죽었다. 그리고 나는 살아 있다.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랬듯. 혜원이가 죽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태어난 1962년 이전처럼, 그 아이가 죽은 1994년 이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오롯할 것이고 감쪽같을 것이다. 그 아이가 죽었는데도. 혜원이는 이 세상에 없다, 고 매제는 말했다. 혹시 그는 장난삼아 날 놀리려고 짓궂은 거짓말을 한 게 아닐까? 그럴 리는 없다. 매제는 진지한 사람이다. 그러니, 혜원이가 이 세상에 없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 혜원이는 이 세상에 없다. 그래…… 그런데·…‥ 그 아이는 이 세상에 있었던 것일까? 그 아이는 분명히 나를 스쳐 지나간 것일까? 나는 분명히 그 아이를 스쳐 지나온 것일까? 혹시 그것은 모두 꿈이 아니었을까? 아니, 지금 이 순간 내가 겪고 있는 모든 것이 혹시 꿈이 아닐까? 꿈이 아니라면, 어떤, 그러니까, 일종의, 가상현실…… 아니면 내가 모르모트가 돼 있는 어떤 음흉한 실험. 어떤 악의로 가득 찬 무제약자*가 즐기고 있는 실험. 혜원이가 죽다니…… 그런데…… 나는 지금 살아 있는 것일까? 살아 있다는 게 뭘까? 심장의 뜀, 느낌, 인식…… 그래, 반응, 반응. 그런데…… 지금 나와 함께 불미슈를 걷고 있는 이 남자, 나의 매제, 그리고 이 여자, 나의 옛 동료, 이들은 나와 같은 부류일까? 이들도 살아 있는 것일까? 내게 젊음을 시기하게 만드는 이 거리의 학생들, 저 키오스크*의 신문 판매원, 이 베네통 매장의 아가씨, 저 공중전화 박스 속의 중년 남자, 이들도 모두 나처럼 제 의사에 반해 이 낯선 행성에 내던져진 것일까? 혹시 이들은 모두 내 감시자가 아닐까? 내가 누구지? 내가 누굴까, 하는 생각은 혹시 나만 하는 것은 아닐까? 내 왼쪽의 이 여자, 내 오른쪽의 이 남자, 아니 이 거리의 모든 사람들은 지금 날 보며 킬킬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반응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며. 그들이 어디론가 써보내야 할 보고서에 대해 생각하며.
“정경희 씬 누구죠?”
내 질문이 너무 장난스럽게 들렸는지도 모른다.
“이진우 씨의 영원한 애인이죠,”라고 그녀가 장난스럽게 받았기 때문이다. 아니야, 어쩌면 지금 이 여자는 속으로 당황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드디어 이들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걸, 날 대상으로 한 이 음산한 실험의 낌새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는 걸 감지하고 말이다. 교활하구나, 정경희…… 하기야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식 역할을 맡았던 치들은 수십 배 더한 것들이지…… 그런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그래, 혜원이 탓이구나. 죽은 혜원이…… 혜원이라는 이름이 이 차갑고 딱딱한 동사의 과거형 과 어우러지다니.
혜원이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나는 서울에서 나서자랐고, 그 아이는 전주에서 나서 자랐으므로, 우리들이 아주 어렸을 때 서로 얼굴을 마주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국민학교 시절, 대개는 겨울방학 기간에 돌아오곤 했던 외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하러 어머니를 따라 몇 차례 전주엘 내려갔을 때, 그 아이와 정답게 놀거나 짜증스럽게 다투었던 것 같은 기억이 어렴풋이는 남아 있지만, 그 기억은 어쩌면 내가 어른이 되어서 내 멋대로 재구성한 기억 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와 함께 정답게 놀거나 짜증스럽게 다투었던 아이는 혜원이가 아니라 전주의 다른 친척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혜원이에 대한 내 또렷한 기억의 출발점은 내가 열일곱 살이고 그 아이가 열네 살이었던 1975년의 어느 봄날에 박혀 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진급한지 얼마 안 되던 그해 5월에 나는 내가 속한 사회로부터 처음으로 내침을 당했다. 퇴학이라는 걸 당한 것인데, 그 전말은 이랬다. 중학교 시절 언제부터인가 나는 교실에서 교사가 열심히 판서를 하고, 학생들이 노트에다 그것을 열심히 베끼는 교육 방식의 비효율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교과서나 참고서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을 그렇게도 열심히 노트하는 것이 미련스러운 시간 낭비로 생각됐던 것이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어떤 텍스트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그 텍스트를 친천히 베끼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 말에 공감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 당시엔 그랬다. 그래서 나는 교사가 판서를 하고 친구들이 그걸 열심히 베끼는 동안 몰래 소설책을 꺼내 읽거나 교과서 여백에 낙서를 하거나 했었다. 그리고 나의 그런 행태가 운 좋게도 고등학교 2학년 5월 어느 날까지는 교사들에 의해 묵인이 되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묵인이 되었다기보다는, 발각되지 않았었다. 1975년 5월 초의 어느 날 드디어 일이 터졌다. 기술시간이었다. 교사가 칠판에 열심히 판서를 하고, 친구들이 노트에 열심히 그것을 베끼는 동안, 나는 며칠 전에 읽기 시작한 헤밍웨이의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아마 삼중당문고였던 것 같다)를 책상 위에 꺼내놓고 열심히 읽고 있었다. 배경이 불란서에서 서반아로 옮아갈 때 쯤, 명민한 기술 교사는 자기 학생 가운데 하나가 교실의 율법을 어기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는 학기가 시작된 이래 내가 기술과목의 노트 필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냈고, 더 나아가, 내 가방을 뒤져 다른 과목의 노트 검사까지를 한 결과, 거의 모든 과목의 내 노트가 백지이거나 하찮은 낙서로 채워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만일 공부라도 좀 하는 우등생이었다면, 기술 교사가 그렇게까지 사납게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니, 기술교사가 그렇게까지 사납게만 굴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렇게까지 사납게 반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평균 성적이 반에서 중간에도 못 미치는 열등생이었고, 그런 열등생의 의무 태만에 기술교사는 아주 분노했고, 그 분노를 실어 나르는 폭력의 적나라함에 내 자위본능이 발동했다. 기술교사는 수업 종료 종이 울리기 전까지의 나머지 시간을 한 비뚤어진 학생의 교육에다 할애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는 자기 팔목에서 시계를 풀어 교탁 위에 올려놓았고, 야비한 웃음으로 날 바라다보았다. 주먹질과 발길질이 한 10분가량 계속되었을 때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마침 그 순간 교탁 바로 앞자리 친구의 책상 옆에 곤봉이 놓인 것을 발견했다. 체육시간에 곤봉체조를 할 때 사용하는 길둥근* 몽둥이였다. 나는 잽싸게 그 곤봉을 집어 들어 기술 교사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교사는 교실 바닥에 길게 누웠고, 양호실로, 이어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로부터 사흘 뒤에 어머니는 교장실에 불려가 내 퇴학 사실을 통고받았다.
신촌시장 한 귀퉁이의 해장국집 주인이었던 아버지는 퇴학을 당한 아들에게 부자 관계의 종료를 선언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하기 야그가 술에 취해 있지 않은 것을 본 기억도 별로 없다. 나는 그 해장국집의 유일한 노동자였던 어머니의 주머니에서 그때 돈으로 거금 3만 원을 홈쳐 집을 나왔다. 물론 교복을 입은 채로. 그리고 전주행 열차를 탔다. 내 가방에는 『펜트하우스』 두 권과 영어판 『에마뉘엘 부인』 그리고 트랜지스터라디오가 들어 있었다. 내가 혜원이를 생각하며 전주행 열차를 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전혀 낯선 도시로 떠나기에는 내가 너무 겁이 많았던 것 같다. 퇴학생을 반길 사람은 전주에도 있을 리 없지만, 혹시라도 만약의 경우에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외가 쪽 친척들에게 몸을 의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교활한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전주역 앞의 여인숙에서 나는 다섯 밤을 잤다. 그 가운데 한 밤은 여자와 함께였다. 그것은 내 첫 성경험 이었는데, 여자는 거의 마흔이 다 돼 보이는 늙은 창녀였다. 그 밤에 나는 그 여자에게서 성만이 아니라 담배도 배웠다. 그러고는 정말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낮에는 전주 시내를 어슬렁거리고 밤에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여인숙 방에서 트랜지스터를 들으며 닷새를 보냈을 때, 내게는 남은 돈이 거의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청해야 했다. 내게는 전주에 살고 있는 친척들의 전화번호가 하나도 없었으므로, 나는 혜원이가 다니던 여학교 앞에서 그 아이를 기다렸다. 두 시간쯤 기다린 후에야 나는 교문을 나서는 그 아이를 겨우 알아보었는데, 그것은 정말 다행이었다―사실 나는 몇 년 동안 그 아이를 보지 못한 상태였던 터라, 그 아이를 알아볼 수나 있을까 싶기도 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 아이를 긴가민가한 상태에서나마 알아봤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아이 역시 나를 알아봤다. 더욱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 아이가 나를 아주 반겼다는 점이다. 심지어 시내의 제과점에서(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다) 내 처지를 듣고도, 그 아이는 뜻밖에도 빙글빙글 웃으며 “오빤 이제 자유인이 됐네”라고 대수롭지 짧게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 아이에게 내 처지를 말하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불량기가 그득한 걸로 판명된 이종오빠에게 그 아이가 혹시라도 경계심을 갖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우리들이 지금 내릴 수 있는 결론은.”
30분가량 이 얘기 저 얘기 한 뒤에 그 아이가 말했다.
“오빠가 나랑 우리 집에 가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그 아이와 함께 교동의 이모 집으로 갔다. 이모는 사정 얘기를 듣고 날 크게 책망하셨지만, 곧 서울에 전화를 해 어머니를 안심시킨 뒤 어머니에게 자신이 날 얼마간 데리고 있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내게도 선언했다. “썩어 뒈질 놈. 그래도 딴사람 안 찾고 이 이몰 찾아 다행이다. 네놈 거두어줄 사람이 누군지는 알았구나. 여기서 얼마 있으면서 앞으로 어쩔지 궁리 해봐.”
그렇게 해서 3개월간의 내 전주 생활이, 혜윤이와의 석 달이 시작됐다.
내 전주 체류가 더 길어질 수도 있었다. 고등학교의 체육 교사이셨던 이모부를 통해서 어떻게 날 그 학교로 편입학시켜볼 방법이 없을까를 이모가 궁리하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모부도 난색을 표하신 데다가, 나 자신이 더 이상 학교 같은 건 다니기 싫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완강히 반대했다. 그리고 석 달 뒤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사회 전체가 군대나 다름없었던 그 시절(박정희는 그해에 학도호국단과 민방위제도를 부활시켜서 어린 학생부터 50대의 장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다스리던 신민 전체의 군대식 편제화를 완수했다), 그 군대질서에서 잠시 비켜서 있었던 그 석 달의 기억은 달콤하다. 그 달콤함의 상당 부분은 혜원이 덕이다. 이모 내외는 그 세대 사람들로서는 드물게 슬하에 자식을 둘만 두고 있었다. 늦결혼을 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언니인 이모가 어머니보다도 결혼이 늦었던 것이다. 그것 역시 그 시대 풍속으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혜원이 밑으로는 그 아이와 세 살 터울의 아들 주원이가 있었는데, 내가 전주의 이모 집에 머물 때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주원이는 제 누이처럼 의사가 돼 얼마 전 군대를 마치고 부산의 한 병원에 취직했다. 혜원이가 내과 의사였던 데 비해 주원이는 정형외과 의사지만. 혜원이가 죽기 전에 받은 수술을 위해 자신의 골수를 나눠준 것이 주원이었다.
사실, 혜원이가 아니었더라도 그 시절의 기억이 아주 쓰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생애가 그때만큼 자유를 만끽한 시절도 달리 없으니까. 물론 그것은 불안한 자유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내 삶 이외에 책임져야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실상 내 삶에 대해서조차 책임을 안 지겠다고 마음먹는 것도 내 자유였다. 최소한 그때의 내 생각으로는 그랬다. 그런데 더더욱 운 좋게도 그때 내 곁엔 혜원이가 있었다. 혜원이가 중학교 2학년이던 바로 그 해에 전주에서도 고등학교 입시가 없어졌으므로, 말하자면 학교별 모집 방식이 연합고사 방식으로 대체되었으므로, 혜원이는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서 머리를 싸매고 밤을 새우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 아이가 아무리 내게 포근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공부를 제쳐놓고 밤낮으로 나와 히히덕거리는 짓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선 이모님이 그걸 허락하지 않으셨을테고. 어쨌든, 혜원이는 공부에 대한 부담이 없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행운아였다. 학교에서 쫓겨난 것이야말로 내겐 행운이었다.
중학교 때의 혜원이가 공부를 잘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당시 그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뒷날 그 아이가 재수를 하지 않고 곧바로 의과대학엘 들어간 걸 보면, 중학교 때에도 최소한 공부에 아주 젬병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는 무슨 우등생 티 같은 것이 없었다. 그것이 날 더 편안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덕진공원이나 다가공원에서 그 아이와 함께 부랑하던 기억이 새롭다. 덕진공원의 그 큰 호수, 그 호수의 연꽃들. 그 연꽃들을 바라보며 함께 빨던 콘아이스크림 (브라보콘이었던 것 같다)의 맛을 지금도 내 혀는 잊지 않고 있다. 그 아이스콘의 맛에 대한 기억은 마치 처음 라면과 마주쳤을 때 내 혀가 경험한 그 흥분된 감각처럼 장렬하다. 그때 콘아이스크림을 처음 먹어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먹어본 콘아이스크림에 대한 기억은, 그 맛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콘아이스크림의 맛은 어쩌면 단순히 미각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맛은 콘아이스크림의 맛만이 아니라 어쩌면 혜원이의 맛이었을 것 이고, 그러니까 어쩌면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내 혀만이 아니라 내 몸 전체인지도 모른다. 마음의 거푸집 *으로서의 몸뚱어리 말이다.
그리고 다가공원에서의 자전거 타기. 그 아이는 그때까지 자전거를 탈 줄 몰랐었다. 그 덕분에 나는 내 생애 최초로 가르친다는 것의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때로는 자전거를 한 대만 빌려 함께 탄 채 전주 시내를 누비기도 했는데, 뒷자리의 그 아이가 내뻗은 손이 내 복부를 압박할 때면 나는 묘한 홍분을 느끼곤 했다. 그 아이에 대한 내 흥분은 늘상 수치심으로 이어지곤 했지만, 그래도 그 수치심이 흥분을 억누르지는 못했다. 그 흥분은 햇살이 삼라만상을 드러내놓고 있을 때보다는 어둠이 사위를 고요하게 만들고 있을 때 더 자주 일어났다. 예컨대 일요일 새벽에 둘이서만 오목대나 팔각정으로 산책을 간다거나, 옥상에서 밤하늘의 별자리를 노려본다거나, 책을 찾으러 그 아이의 방에 들어갔다가 그 아이의 자는 모습을 보게 된다거나 밤의 전주천변에서 시답지 않은 얘기들을 나누었을 때. 그래, 우리들이 나누었던 얘기들은 대체로 시답지 않은 얘기들이었다. 비틀스나 폴 앵커 같은 대중가수들 얘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사랑』 같은 통속소설 얘기, 전주비빔 밥과 콩나물해장국에 대한 비평, 서울에 막 생긴 지하철이나 한참 전에 사라져버린 전차에 대한 얘기들…… 조금 더 진지할 때는 예컨대 패망한 월남이나 사임한 닉슨, 죽은 육영수에 대한 얘기를 하기도 했지만, 한쪽에서 그런 얘기를 꺼냈더라도 상대방이 그런 얘기를 곧 지겨워했으므로 그것이 무슨 진지한 토론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 당시 그 아이가 즐겨 듣고 부르던 노래는 묘하게도 서울에서보다 전주에서 먼저 유행하기 시작한 강태웅의 「줄리아」였고, 내가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는, 제목은 잊었다, 그 추웠던 겨울은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내 님도 나를 찾겠지 운운하는 장미화의 노래였다. 그 노래들은 아마도 둘 다 한국 사람이 만든 노래였겠지만, 또 어쨌든 둘 다 다소간 국적 불명의 노래였다. 그래, 이국주의야말로 10대의 특권이다! 내가 장미화의 그 노래를 흥얼거렸던 걸 보면, 비록 내가 지금 그 시절을 탐탁한 자유의 시절로 회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막상 그 시절에는 한 움큼의 불행의식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일탈자였고, 그 일탈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길 만큼 내가 모질거나 무신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이 샐그러지고* 있다는 느낌이 어떻게 전혀 없었을 것인가. 그런데 혜원이는 내게 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아이는 내 앞날을 걱정하는 투로 내게 얘기한 적이 한 차례도 없었다. 그 아이는 어쩌면 나의 일탈을 조금은 부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그 아이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그러니까 조숙하게, 사려 깊었던지.
망설이다가 이 얘기를 꺼낸다. 나는 그해 초여름의 어느 밤 그 아이와 처음으로 입을 맞췄다. 내가 ‘처음으로’라고 말한 것은 게다가 그것이 우리들의 마지막 입맞춤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던 그 이모님 댁 옥상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밤이었다.
그 아이가 무슨 얘기 끝에 이런 말을 했다.
“오빠도 그런 경 험 이 있나 모르겠네?”
“무슨?”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그래, 국민학교 2학년 때였어. 오빠도 그때 그랬겠지만 나도 2학년 때 처음 사람 몸속을 들여다보게 됐어. 물론 실제 육체가 아니라 인체 해부도에서 봤다는 얘기야. 큰골, 작은골, 숨골, 허파, 염통, 위, 큰창자, 작은창자 같은 거. 그때 선생님의 말씀 가운데 제일 인상에 남았던 건 우리 생각과 행동이 모두 뇌에서 이뤄진다는 거였어. 뇌는 생각한다, 그리고 손과 다리와 눈까풀과 혀에 명령을 내린다, 그런 말 말이야. 뇌는 인체의 대통령이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어. 그러니까 이 뇌가 박 대통령이란 말씀이지. 그
날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 경대 속의 내 모습을 빤히 쳐다봤어. 저 머리통 속에 있는 뇌가 손이랑 발이랑 눈까풀 같은 것에 명령을 내린단 말이지 하고 생각하다보니까, 갑자기 지금 저 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내 뇌에 대해서, 그 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내 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내 뇌에 대해서, 그 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내 뇌에 대해생각하고 있는 내 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내 뇌에 대해서 ―그 아이는 자기 말투가 우스웠는지 피식 웃었다―, 이어서 바로 그 뇌에 대해서, 이어서 또 바로 그 뇌에 대해서, 계속 생각이 뻗어나가는 거야. 오빠도 그런 경험이 있느냐고.”
왜 그랬을까. 그 아이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더 어렸던 시절 창경원의 어린이 놀이터에서 타본 허니문카 속에서 공중의 정점으로부터 땅으로 추락하며 가슴이 울렁거렸듯, 내 가슴이 마구 울렁거리는 것이었다. 나는 짐짓 권위 있게 그 아이에게 대답했다.
“응,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하는 거야. 그렇게 자기에 대한 생각이 덩굴처럼 한없이 감기는 거, 그걸 유식하게 말하면 자아라는 걸 의식적으로 의식한다고 하는 거야.”
“그렇군. 별다른 경험도 아니었군. 난 나만 그런 경험을 한 줄 알았지. 사실 엄마한테 그런 얘길 했다가 핀잔만 얻어 들었거든.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나가 늘거나 공부하라고.”
“이모 말씀도 맞긴 해. 그건 정말 쓸데없는 잡념이니까.”
“오빤 어떨 때 보면 말하는 게 꼭 늙은이 같아. 지금도 자기가 꼭 엄마보다도 더 어른인 것같이 얘기하잖아.'’
“그래서 내가 싫으니?”
“아니, 정 반대야. 오빤?”
“나두.”
그 아이에 대한 호감을 단지 말로만 표현하는 것은 너무 무정해 보였으므로, 나는 그 아이의 이마에 내 입술을 슬며시 갖다 댔다가 뗐다. 그 아이의 눈이 감기며 입가에 미소가 살짝 번졌다. 나는 용기를 얻어 이번에는 그 아이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갖다 댔다. 다행스럽게도 그 아이의 입술은 내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옥상을 내려오며 그 아이가 낮게 속삭였다.
“오빠 입술이 아이스콘 같았어.”
나는 그 아이의 뒷머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한 대 쥐어박았다.
“예쁜 도시예요. 7년 전에 여기 잠깐 들렀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 저 하늘과 건물이 만들어내는 스카이라인이 꼭 동화 속 도시 같아요.”
생미셸 다리 위에서 잠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정경희 씨가 말했다.
“동화 같기는 제네바가 더해요. 몽블랑 다리에서 레만 호를 바라보면 정말 현실감이 사라진다니까요.”
제네바를 거쳐서 파리에 온 매제가 가볍게 항의했다. 그러나 그가 젠체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건 그의 이완된 말투가 보증해주고 있었다.
“그래요? 거길 언젠가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번에도 칸에서 너무 시간을 소비 했어요.”
정경희 씨가 다소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정색을 하고 얼른 덧붙였다.
“아 참, 지난달 초에 김남주 선배 사십구일재에 다녀왔었어요. 쓸쓸한 자리였어요. 묘한 건 칸에서도 자꾸 그 선배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 극도로 국제적인 분위기에서 그 극도로 민족적인 시인 생각이 말이에요.”
정경희 씨는 『한민일보』의 기자다. 영화를 담당하고 있는 그녀는 칸 영화제 취재차 불란서에 왔고, 영화제의 폐막과 그녀의 귀국 사이의 1박 2일을 파리에서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석 달 전까지만 해도 그 신문사의 문화부에서 그녀와 책상을 맞대고 일한 동료였다. 그러나 그녀와 내가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말을 나눈 것은 넉 달도 넘은 상태였다. 우연히도 내가 신문사를 그만두고 불란서로 갈 결심을 신문사 동료들에게 공표한 뒤부터 그녀와 나 사이의 관계가 서먹서먹 해져버렸다. 그녀는 내게 말도 걸지 않았고, 심지어 나와 한자리에 있는 것도 피했다. 내가 신문사의 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그녀가 취재를 나갔고, 그러니 나도 그녀가 신문사의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일을 만들어서라도 바깥으로 나와야 했다. 내가 짐작은 하고 있지만 확실히는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그녀는 내게 몹시 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을 얘기하자면 그녀는 꽤 기다란 메모를 통해 내게 아주 진지하게 절교를 선언했다. 그것은 내게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 신문사에서 일한 6년의 기간 동안 그녀는 아마도 나의 가장 가깝고 서로 무람없는* 동료였기 때문이다. 내가 불란서로 날아오면서 가장 찜찜해했던 것은 물론 혜원이의 예정된 죽음이었지만, 정경희 씨의 절교 선언도 내 마음 한구석을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었다. 그러니, 석 달 뒤 그녀가 불란서로 날아와서 내게 연락을 함으로써 자신의 절교 선언을 사실상 철회한 것은 내게 거의 감격이었다. 그 감격은 곧이어 혜원이의 죽음을 알고 난 뒤 무감각으로 변해버렸지만.
내가 서울을 떠나기 전에 그녀와 내가 할 수 없이 얼굴을 마주 보아야 했던 곳은 우리가 둘 다 알고 지내던 시인의 빈소였다. 내가 시인 김남주의 죽음을 안 것은 그가 죽은 지 하루가 지나서였다. 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때 비록 문학을 담당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문화부 기자였고, 또 죽은 시인과는 일을 떠나서 비교적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것이 구정 연휴의 마지막 날이었고, 그의 장례를 준비하던 친지들 생각으로 내가 그의 죽음을 금세 알아야 할 만큼 시인과 가깝지는 않았던 탓이었겠지만, 나는 어쨌든 그 이튿날 조간을 보고, 더구나 아침에 다른 일로 게으름을 피우다가, 오전 열 시가 넘어서야 조간을 들추다 그의 죽음을 알게 됐다. 얼이 빠질 지경 이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저 조금 쓸쓸한 기분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역시 거짓말일 것이다. 시기까지가 얼추 예약되었던 죽음이었으므로 감당하기 힘든 충격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충격은 충격이었다. 나는 그 뒤 사흘 동안 그의 빈소가 마련돼 있던 고려병원 근처를 얼씬거렸다. 물론 빈소를 꼬박 지키거나, 그의 장지인 광주의 망월동까지 따라 내려가지는 않았다. 장례를 뒷바라지할 그의 친지, 후배 들이 넘 쳐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의 죽음에 나 자신을 너무 깊이 연루시키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그의 죽음 이전에 조국을 버릴, 이라는 말이 보기 흉한 위악*이라면 어쨌든 조국을 떠날 결심을 했고, ‘조국은 하나다’라고 외치는 시인의 완전한 귀향에 내가 동반하는 것은 뭔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고려병원 영안실을 둘러싼 담벼락 한쪽에 붙어 있던 그의 시 「조국은 하나다」에서, 나는 그 시를 그의 시집에서 읽었을 때와는 강도가 썩 다르게, 폭발적인 선동의 외침을, 한 깨끗한 영혼의 처절한 울음소리를, 한 강인한 정신의 힘찬 혁명가요를 들었다. 요컨대 나는 감동했다. 그러나 그 감동이 나를 조국에 붙잡아 두지는 못할 거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죽기 석 달 전쯤 조국을 떠날 결심을 했다. 구라파에서, 구체적으로는, 그리고 당분간은, 불란서에서 살고 싶었다.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은 아내 쪽이었다. ‘답답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아내의 제안에 동조했다. 나도 답답했으므로. 그리고 불란서쯤으로 날아가고 싶었으므로. 다만 아내의 제안이 있기 전엔 나만의 답답함이 내가 구라파로 갈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 것처럼 생각됐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답답함이라면 얼추 정당한 이유가 될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우리 부부에게 불란서가 전혀 낯선 곳은 아니었다. 룩셈부르크에 본부를 둔 ‘진보를 위한 저널리즘’ 이 라는 언론재란과 내가 일하던 『한민일보』의 호의로 나는 92∼96년의 가을 겨울 봄 세 철을 파리에서 보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아내도 이 도시에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딸자식 둘은 부산의 외가에 남겨놓고 말이다. 비자 발급 문제나 학교 문제 같은 것이 좀 복잡하기는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부모답지 않은 짓이었다.
파리에서 연수를 받는 동안 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나는 남쪽의 그라나다에서부터 북쪽의 스톡홀름에 이르기까지 비록 주마간산 격으로나마 구라파를 두루 살필 기회가 있었고, 때때로 그 취재 여행에 아내를 동반하기도 했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태평양의 서단만큼은 아닐지라도 대서양의 동단이 어떤지를 조금은 알고 있었다. 더구나 아내는 대학에서 불문학을 공부했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외국 문학이라는 것이 뭐 별스레 대단한 건 아니겠지만, 대학 시절의 아내는 그 애옥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꿈 많은 여자였다. 결혼을 생각 없이 하는 바람에 그 모든 꿈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그러니, 결혼한 지 10년이 다 돼서, 난생 처음으로 파리 나들이를 하게 됐을 때, 그녀의 가슴 설렘이 작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우리의 파리 체류가 뒤늦은, 그리고 꽤 기다란 신혼여행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꽤 자극적인 신혼여행이었다. 아내는 파리에서 친구들을 꽤 사귀었다. 파리3대학이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연 불어강좌를 그녀가 들으면서 사귄 친구들인데, 이태리에서 일본까지 국적도 다
양하고, 그 가운데 몇몇을 내가 만나보기도 했지만, 같이 지내기 유쾌한 친구들이었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얼마간 마음을 다잡고 지내는 듯하더니, 이내 서울 생활이 답답해진 모양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직장이 없었다. 우리는 너무 일찍 결혼했으므로, 그녀는 결혼 전에 직장을 구할 기회가 없었고, 결혼 뒤에는 더더구나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그러니까 직장도 없이, 아무런 성취감도 없이, 어느새 60대의 반 고비에 이르러버린 것이었다. 그런 삶을 아내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던 듯도 했다. 불란서에 다시 간다고 해서 그녀에게 직장이 생길 리는 없고, 그러니 별다른 성취감이 생길 리는 없지만, 어쨌든 어떤 종류의 자극은 있을 것이었다. 아내는 그런 자극을 원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점에선 나도 아내와 마찬가지였다. 만 10년이 돼가는 월급쟁이 생활의 그 지루한 일상성에 조금 넌더리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구라파 체류의 영향을 안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꼭 구라파였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너무 친숙한 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져 있다는 느낌은 적어도 큰 불쾌감은 아니었다. 그리고 구라파가 너무 친숙해질 무렵엔 나의 삶도 황혼일 것이므로 그 이후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 둘 사이에는 너무나 쉽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문제는 생활이었다. 다소 낯선 곳의 대기에 좀 더 많은 양의 자유가 흩뿌려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유의 공기가 배를 불리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돈벌이에 관한 한 나는 거의 무력 했고, 아내는 완전히 무력했다. 더구나 우리에게 무슨 저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는, 적어도 나는, 무작정 떠나기로 했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그리고 사표를 던졌고, 아내와 딸아이 둘을 데리고 파리로 날아왔다. 다소 낭만적인 생각도 없지 않았다. 파리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내가 앞으로 오로지 생존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글을 쓰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운명에 대한 생각은, 역시 자신의 글쓰기를 오로지 생존을 위한 돈벌이로 삼았던 지난 세기의 어떤 불우한 문필가들의 운명에 대한 생각과 포개지며, 내게 낯선 달콤함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날 나는 한강성심병원으로 혜원이를 찾았다. 나는 내가 혜원이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그 얼마 전 끔찍한 골수이식 수술을 받은 뒤에 무균실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단지 혜원이에게 전해달라고 이모님께 짧은 메모 한 쪽만을 남기는 것으로 만족했다.
혜원에게
너를 사랑한다.
진우
너를 사랑한다…… 나는 지금부터 13년 전 어느 날 밤에도 혜원이에게 이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 아이는 의예과 2학년이었고 우리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혜원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게 됐을 때, 이모님과 어머니가 그 아이의 자취생활을 반대하고 우리 집에 머물도록 결정해버린 것이다. 그 아이는 예과 2년 동안만 우리 집에 있었고, 본과에 진입해서는 더 이상 우리 집에 있는 것이 불편했던지 친구와 함께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그 아이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나는 대학 졸업반이었고, 그 아이가 우리 집을 나갔을 때, 나는 부산의 육군병기학교에서 군 복무 중이었다. 그 아이가 입학식 며칠 전에 우리 집에 와서 짐을 풀었을 때, 나는 그 몇 달 전 박정희가 죽었을 때보다도 사실 더 기뻤다. 나를 더욱 고무했던 건 그 아이도 나와 함께 있게 된 것을 기뻐했다는 사실이다. 그보다 5년 전 학교를 퇴학 맞고 몇 달간 전주의 그 아이 집에 머물던 때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내게 그해 봄은 정녕 서울의 봄이었다.
그래, 혜원이의 대학 시절은 그 뜨거웠던 서울의 봄에 시작됐다. 그해 5월의 며칠 동안 어머니의 만류를 무릅쓰고 학교에서의 밤샘 농성과 가두시위에 몰두하던,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 내게 무용담을 전하던 그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생각난다. 학교 문이 닫히고 광주에서 일이 터진 뒤의 그 추웠던 여름 동안 혜원이는 전주의 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내 책꽂이에 꽂혀 있던 빛바랜 『창비』를 꺼내 읽는 것으로 소일했다. 그동안 그 아이의 말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나는 그것을 그 아이가 크고 있는 징표라고 내 멋대로 해석했다.
예과 2년 동안 혜원이는 야학 활동을 했었다. 그 아이가 무슨 운동권에 속해 있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 시기에 운동권에 속한 학생이었다면, 야학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아이는 제 나름대로 이런저런 ‘불온서적들’을 열심히 읽기는 했으나, 무슨 진보적 서클에 가입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80년대 초의 그 야만적인 정치분위기를 그 아이가 힘들어하기는 했지만, 그 아이에게 어떤 혁명적 열정 같은 것은 없었다. 그 점이 그 아이와 내가 닮은 점이었다. 어떤 거룩한 것, 위대한 것에 마주서게 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뭔가 불편한 감정 말이다. 힘차고 씩씩한 구호와 선동에 때때로 반하면서도 종국에는 그 앞에서 움츠러들고 마는, 그러니까 집단성에 대한 어떤 애증의 양가감정*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나와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훨씬 더 많았다. 무엇보다도 그 아이는 나와 전혀 달리 이타성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 아이에게 무슨 종교가의 구세적 제스처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아이가 주위 사람들의 사소한 슬픔과 기쁨에 세심히 반응했다는 뜻이다. 요컨대 그 아이에게는 잔정이라는 게 넘쳐흘렀다. 게다가 그 아이는 기본적으로 세상과 삶에 대한 낙관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그 점이 그 아이의 때 이른 죽음을 더 비극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지만.
그 아이가 열심히 한 그 야학 활동은 그 아이가 가입해 있던 불교학생 서클이 주관한 것이었다. 혜원이는 제 딴에는 독실한 불자였다. 나 자신이 무슨 운동과는 전혀 무관하게 학창 시절을 보냈으면서도, 한 번은 짓궂게 혜원이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빈둥거리다가 입대하기 일주일쯤 전, 꽤 늦은 시각의 동네 포장마차에서였다.
“네가 그렇게 열심히 하는 그런 야학 활동이라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니? 네가 가르친 사람들이 어찌어찌해 검정고시라도 봐서 대학엘 가게 되고, 어렵사리 어떤 신분 상승을 이룬다고 해도 그게 이 사회를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데 무슨 도움이 될까? 그건 그 사람들 개인의 조그만 행복과 또, 어쩌면, 김혜원이라는 여자의 자기만족에만 기여하는 게 아닐까? 잘못된 사회제도는 여전히 그대로일 테고.”
이런 악의적 질문에 대한 혜원이의 답변은 그러나 단호한 선의로 충만해 있었다.
“내겐 그런 게 그리 사소하게 보이지 않아, 오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내가 우연히 인연이 닿아 만나게 된 사람들의 조그만 행복이 내겐 중요해. 그게 또 사실 오빠 말대로 내 자기만족의 근거가 되기도 하고. 그런 조그만 행복들, 그런 조그만 자기만족들이 사회 전체의 메커니즘과 관련해서 선이냐 악이냐가 내겐 그렇게 중요하게 보이지 않아,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내 머리가 조직적이질 못해. 사실 의과대학엘 들어오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내가 생각했던 것도 그런 소박한 선의에 대한 것이었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말이야. 내가 지금 젠체하고 있는 건 아니야, 오빠. 생각을 좀 더 거창하게 전 인류적 수준에서 했다면, 내게 다른 야심이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 일시적으로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건 정책 입안자들, 그러니까 정치가들이나 행정가들일 테지. 그렇지만, 어린 생각에도 그런 것들이 내겐 과분하다는 느낌이었어. 어떤 정책이 정말 옳고 그걸 시행해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좋은 일이겠지. 그렇지만 그 정책이 정말 옳았는지가 판별되기 위해서도 사실 많은 세월이 필요하잖아. 세월이 지나 그 정책이 틀린 것이었다고 판명났을 때, 그걸 누가 책임지지? 그렇지만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건 달라. 물론 그것도 아주 거시적 인 안목에서 본다거나, 특수한 상황에서는 악이 될 수 있겠지. 예컨대 좀 장난스럽기는 하지만, 인구학적 관점에서 그걸 본다거나, 또는 예컨대 히틀러나 전두환 같은 쓰레기들이 아플 때, 그치들을 치료해야 할 것이냐 하는 도덕적으로 좀 미묘한 상황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그런 별난 상상을 하지 않는다면, 일단 남을 치료하는 행위는 선한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사실 내 경우엔 히틀러나 전두환이 내 환자라고 하더라도, 그치들에게 치료를 거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그 인이 병상에서 일어나면 또 다른 학살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난 일단 그 인간들이 아파하는 걸 모른 체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게 나라는 아이가 생겨먹은 모양새야. 오빠, 내가 우둔한 애라서 그럴까?”
나는 이 명민한 아이에게 아주 정직하게 대답했다.
“아니, 네가 따뜻한 애라서 그래. 남들에 대한 사랑으로 포화가 돼 있는 애라서.”
나는 그때 이 아이에게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우리 둘 다가 너무 어른이 됐다는 걸 상기하고는 그 충동을 참아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내 판결에 대해, 곧, 수줍게, 항의하지 않았다면 그 충동을 끝까지 참아냈을 것이다.
“아냐, 그렇지 않아, 오빠. 자기혐오와 또 남에 대한 혐오가 내게도 상당히 있다구요”라며 그 아이가 꺼낸 얘기는 좀 뜻밖에도 전라도 얘기였다. 자신이 전라도 출신이라는 사실이 그 아이를 그때 심각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광주사건 이후에, 너무나 불공평하게도,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딴 지역 사람들의 편견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관찰일 것이다. 그게 세상이다. 누군가가 당한 불행은, 누군가가 당한 참화는, 그 불행과 참화를 당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연대와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대체로 어떤 운명의 징표로서, 어떤 낙인으로서 작용하기 쉽다. 인간의 진화는, 아직, 고작, 그 정도에 머물러 있다. 혜원이는 자신이 전라도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그러니까 일종의 원죄의식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야, 그러니까 광주사건 이후에야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긴장을 푼 상태에서 얘기할 때 나오는 내 전라도 말투가 사람들에게 경멸과 적의를 불러일으킨다는 걸 발견할 때가 있어. 이건 오빠한테만 하는 말인데, 학교에서 경상도 말씨를 쓰는 아이들이 싫으면서도, 그 아이들의 말씨가 부럽기도 해. 경상도 말씨가 듣기 좋아 보이니까. 그 아이들이 자기 지방 말씨를 쓰는 데는 무슨 자부심까지 있는 것 같거든. 나는 이따금씩 내 전라도 말씨가 싫어지기까지 하고. 그래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야학을 하면서도 신경질적으로 서울말을 쓰게 돼. 오빠, 좀 우스운 얘긴데, 난 그래서, 전라도 사람이 천대를 받기 때문에 전라도 말이 천하게 들리는 건지, 그렇지 않으면, 전라도 말이 천하게 들려서 전라도 사람들이 천대를 받는 건지 거기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보기까지 했어. 물론 곧 앞쪽이 옳다는 걸 알았지만. 언어라는 건 권력인 것 같아. 아니 억압인 것 같아. 무지막지한 억압. 예컨대 타자기로 글씰 쓰다가 ‘사랑’ 이란 말을 ‘사렁’이라고 오타를 냈대 봐. 종이 위에 적힌 그 ‘사렁’ 이라는 말을 그리도 촌스럽고 낯설게 만드는 게 결국 말이 가진 억압의 힘 아냐. 말의 그 전제주의, 표준어의 그 전제주의 말이야. 자기와 다른 걸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릇된 것으로 판정해 매정하게 배제해버리는 그 완고한 전제주의 말이야. ‘사랑’이란 말의 어감이 ‘사렁’이란 말의 어감보다 꼭 그 자체로서 더 사랑다운 건 아니잖아. 그런데도 ‘사렁’이라는 말은 전혀 ‘사랑’의 감정을 환기시키지 못하잖아. 정말 끔찍한 독재자야, 말은. 물론 그 독재력의 원천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힘이나 귀함 때문이겠지만. ‘그려’ 라는 말이 ‘그래’ 라는 말보다 천하게 들리는 덴 다른 이유가 없거든. 오직 ‘그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귀한 사람들이라는 한 가지 이유뿐이지. 그런 한 가지 이유가 어떻게 그렇게 어감을 천양지차로 만들어놓을 수 있는 건지, 참. 그리고 마침내 그 말 자체가 어떻게 그렇게 큰 힘을, 그 배타적인 독재력을 행사할 수가 있는지.”
그때였다. 내가 그 아이의 이마에 두 번째로 입을 맞춘 것은. 나는 내 코끝이 시큰해지고 있다는 걸 그 아이에게 들키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는 내 입술을 그 아이의 입술로 옮기지 않았다. 우리 둘 다가 너무 어른이 됐다는 걸 여전히 상기하고 있었으므로. 그러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살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혜원아, 내가 정말 널 사랑하는 것 같아.”
고백건대,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그 사랑은, 그러니까, 내가 그 아이에게 느꼈던, 그리고 지금까지도 느끼고 있는 사랑은, 다분히 연애감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인류의 유장한 금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만큼 내게 용기가 있었더라면 나는 그날 밤 그 아이를 범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가 그걸 허락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니다. 어쩌면 그 아이는 그걸 허락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그때 내 말을 이렇게 받았으니까.
“그렇더라도 오빠가 나랑 오래도록 함께 살 수는 없을걸.”
그 아이가 옳았다. 나는 일주일 후에 입대를 했고, 그 아이는 그해 말에 우리 집을 나와 자취를 시작했다. 내가 제대 직후에 이모의 중매로 결혼을 했을 때, 그 아이는 뒷날 자기 남편이 될 남자와 사귀고 있었다. 남자는 그 당시 군의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그 아이의 학교 선배로, 방학 때 농촌에서 함께 의료 봉사활동을 하다가 마음이 맞은 모양이었다. 남자가 제대한 뒤 그 두 사람은 결혼했고, 그래서, 그 아이의 말대로, 그 아이와 나는 함께 살 수가 없었다. 그 아이가 그 말을 한 뒤 우리가 함께 산 것은 고작 일주일뿐이었다. 오래도록은 고사하고 말이다.
“빌레트란 곳에 과학박물관이 있다면서요?”
매제가 내게 물었다. 우리는 노트르담 성당을 둘러보고 나와 벤치에 잠시 앉아 쉬고 있었다.
“응, 왜?”
내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에서 주최하는 심포지엄이 거기서 세 시부터 열려요. 그것 때문에 파리에 온 건 아니지만, 한번 들러보고 싶어서요.”
매제는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한국지부에도 관련하고 있었다. 인의협의 맹렬 활동가인 그는 제네바에서 열린 무슨 의학세미나에 참가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날 보러 ―아마도 파리를 보러였겠지만― 파리에 잠깐 들렀는데, 마침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이 주최하는 인권심포지엄이 파리에서 열린다는 걸 제네바에서 듣고 온 모양이었다.
정경희 씨도 기자의 호기심으로 거기에 동조했으므로, 우리들 셋은 빌레트의 과학박물관으로 가기로 했다. 심포지엄장은 과학박물관 1층의 동쪽 구석에 마련돼 있었다. 세계 각국의 인권 탄압을 고발하는 포스터들이 심포지엄장 바깥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인권단체 관련자들이 각국의 정치범 석방을 위한 호소문의 서명을 받고 있었다. 나는 혹시라도 한국 관련 문건이 있나를 꼼꼼히 살폈으나, 다행스럽게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심포지엄은 진지하게 진행되었으나, 그 진지함이란 곧 따분함이었으므로, 나는 거기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한국 문제가 다뤄지지 않아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보스니아와 르완다 얘기가 발제자와 토론자 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냉전이 끝났고 좌우의 전체주의 정권들이 세계적 규모로는 와해되고 있음에도 인간에 의한 인간의 살육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 보스니아의 내전에서 보듯 딱히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이라고 보기가 어려운 상황에서의 의사(疑似)* 교전단체에 의한 민간인 대량 학살은 전쟁 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약으로도 어떻게 대처할 수가 없다는 얘기, 그러니까 국제법규가 시대를 못 따라가고 있다는 얘기, 그런데도 실제로는 매스미디어의 발달 덕분에 그런 학살에 관한 정보들이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도 빠르게 지구 곳곳에 전파되고 있다는 얘기, 요컨대 사실상 인권의 유린이 대규모로 일어나고 있고 또 다수의 사람들이 그 소식을 접하고는 있지만 거기에 대처할 법적 장치가 충분치 않고 정치인들에게 거기에 대처할 의지가 별로 없다는 얘기들·……
매제와 정경희 씨를 심포지엄장 안에 남겨둔 채 나는 바깥 로비로 나왔다. 토론자와 발제자의 반수 이상은 불어를 사용했는데도 매제와 정경희 씨는 이것저것 메모까지 해가며 모범적인 방청객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삶의 순간순간에 헌정하는 성실함, 그것이 그들을 나와 분리시키고 있는 점이었다. 이 빌레트 과학박물관은 사회당 내각 때의 문화부장관 자크 랑그가 주도한 이른바 그랑 트라보(Grand T'avaux)* 가운데 하나다. 불멸에 대한 ‘미테랑 황제’의 탐욕을 드러낸다고도 비판받았던 80년대의 많은 그랑 트라보와 마찬가지로 이 건물도 전혀 불란서적이 아니다. 지하철 포르트 들라 빌레트 역을 내려 이 건물에 마주치는 순간 사람들은 파리가 아니라 미국의 현대 도시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이건물은 불란서가 다음 세대들의 과학정신을 북돋워주기 위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전시장이다. 1층 로비는 부모의 손을 잡고 따라온 아이들로 다소 붐볐다.
“조금 비 켜주시겠어요?”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그렇지만 그 부드러움에서 뭔가 이물감이 느껴지는 여자 목소리가 뒤편에서 날아와 내 귀에 꽂혔다. 돌아보니 로봇이었다. 목소리만큼 부드럽게 생긴 로봇은 아니었다. 인간의 형태를 대강만 갖춘 로봇. 사실 외모만 보고서는 이 친구가 ‘남자 로봇’ 인지 ‘여자 로봇’ 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 미안. 방심을 하고 있었어.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 아첨은 그 기계에게 기쁨을 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런 말씀을 해주시니 참 기뻐요. 선생님은 친절하신 분이군요.”
“네 이름이 뭐니?”
“펠리시엔이에요.”
“펠리시엔. 이름도 예쁘군. 펠릭스에서 온 이름이겠지, 아마. 다복하다는 뜻의.”
“네, 그래요. 선생님은 라틴어를 아시는군요.”
“아니, 사실은 전혀 못 해. 성은 없니?”
“우리 로봇은 성이 없어요.”
“어디서 태어났니?”
“프랑스 공업부죠. 제 아버지는 베르트랑 이지도르 박사구요.”
“아, 그렇군. 너 영어도 할 줄 아니?”
펠리시엔이라는 이름의 이 ‘여자 로봇’은 이 물음에 기꺼이 영어로 대답했다.
“그럼요. 선생님은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남한.”
“아, 정말 먼 나라에서 오셨군요. 88년에 올림픽이 열렸던 나라, 몇 년 뒤에 테제베가 달리게 될 나라, 그렇죠?”
“그래, 어쩜 넌 그런 걸 다 아니?”
“제 뇌 속엔 온갖 정보가 다 들어가 있어요. 또 한 달에 한 번씩 새로운 정보가 입력되죠.”
“그렇구나. 너 한국어는 할 줄 아니?”
“아, 유감럽게도 아직은 할 줄 몰라요. 그렇지만 광동어는 할 줄 알아요.”
“니하오마.”
“선생님, 그건 광동어가 아니라 맨더린*이에요,”
“그랬군. 생일이 언제야?”
“91년 4월 7일. 이제 세 살이 조금 지났어요.”
“정말 어린아이구나. 너희들은 보통 얼마나 사니?”
“기종에 따라, 그리고 재질에 따라 천착만별이에요. 저는 한 20년 정도 돼요.”
“죽음이 무섭지 않니?”
“선생님, 로봇은 감정이 없어요.”
“그렇지만 넌 아까 기쁘다고 했잖아?”
“그건 누군가가 저를 칭찬하면 그렇게 말하도록 프로그램이 돼 있기 때문이에요.”
“그럼 넌 너 자신이 하고 있는 말도 믿을 수 없겠구나.”
“글쎄요.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전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
“그러면 너 한테도 자의식이라는 게 있단 말이니? 너 자신에 대한 반성 말이야.”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지 잘은 모르겠어요. 아마 선생님 이 뜻하는 자의식은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
“너한테 그럼 의지 같은 게 있니?”
“사람의 의지와 비슷한 게 프로그램돼 있지요. 뭘 해서는 안 된다, 뭘 해야 한다는 식의 규범이 프로그램돼 있거든요. 그 프로그램에 따라 제가 갖가지 자극에 반응을 하는 거지요.”
“그렇구나. 그러니 네겐 죄의식이라는 게 없겠군.”
“로봇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요. 오직 프로그램된 규율에 따라 움직이는데 죄를 지을 수가 없죠.”
“그래, 넌, 그러니까, 기계구나.”
“물론이죠. 선생님은 목소리로 봐서 30대 후반 정도 돼 보이시네요. 외모도 그렇고.”
“그래, 내가 보이니?”
“물론이죠. 그렇지만 선생님이 제 모습을 감지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에요. 그건 설명드리기가 조금 복잡해요.”
“그래, 난 기계에 대해서 정말 아는 게 없어.”
“선생님을 무시한 건 아니었어요. 전문적인 과학기술자들이나 사실 알아들을 수 있는 거거든요. 그렇지만, 태어나서 이런 대화를 나눈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기뻐요.”
“지금 네가 기쁘다고 한 것도 공업부의 이지도르 박사가 프로그램 해놓은 거겠지?”
“그래요. 선생님. 화나셨나요? 슬프신가요?”
“아니야. 그렇지만 넌 화났다거나 슬프다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 말을 쓰고 있구나.”
“그 말이 뭘 뜻하는지는 알고 있어요. 다만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 뿐이지.”
“그래, 내가 네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것 같다. 또 보자.”
“예,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 명민하고 예절 바르며 친절한 폘리시엔 양은 매표구 쪽을 향해 스르르 걸어갔다, 기보다는 기어갔다.
내가 혜원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서울을 떠나기 보름쯤 전이었다. 그 아이가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날이었다. 정말 한심한 계집 아이였다. 그다음 날이면 머리를 박박 밀고 수술실로 들어갈 아이가, 그 끔찍한 방사선 치료를 받고 골수이식 수술을 받아야 할 아이가, 그러고 나서 무균실에서 얼마를 머물러야 할지 모르는 상태의 아이가, 더구나 더구나, 자신이 의사로서, 스스로가 무균실에서 살아 나올 가능성이 아주 엷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아이가, 얼굴에 전혀 그늘이 없이 깔깔대는 것이었다. 하기야 그날만은 아니었다. 골수암이
라는 진단을 받고, 그러니까 사실상의 사형신구를 받고 병원에 입원한 뒤로 줄곧 그 아이는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려고 애썼고, 그럼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렇게만 말하는 것은 혜원이의 투병 ―투병? 그 아이가 병과 싸우기나 했을까? ―생활을 너무 온건하게 표현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 아이는 정상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그래, 병상에서의 그 아이의 행실은 비정상이라는 말로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요컨대, 그 아이는 운명이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고 있는 그 순간에도 너무나, 그러니까 비정상적으로, 정상적이었던 것이다. 그 아이의 그런 태도를 보고 아내는 그 아이를 기인이라고 불렀다. 그 기인이라는 말로써 물론 아내는 자신이 그 아이에 대해 품고 있는 최대의 경의를 표현했던 것이지만, 내겐 그 기인이라는 표현이 뭔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기보다는, 차라리, 그 아이는, 도대체 영웅주의적이지 않았던 그 아이는, 죽음의 순간에, 영웅적 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위 사람들에게 잔잔하게, 찬란하게, 보여주었다. 그 아이는 자신이 헤로인이라는 걸 알지 못했던 헤로인이었다. 그 조그만 체구 어디에 그런 힘이 있었을까?
그 아이가 누워 있던 병실을 생각하면 지금도 주책없이 자꾸만 눈시울이 젖어온다. 내가 만일 그 아이의 처지였다면, 어땠을까? 나는 거의 미쳐버렸을 것이다. 나는 신경질과 울음으로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었을 것이다. 친지들의 문병을 모조리 거절했을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도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살아갈 그들의 행복을 가장 천한 욕설들로 저주했을 것이다. 삶이 괴롭고 무의미하다고 노상 투덜대면서도, 죽음 이후의 불확실에 대한 두려움은 나를 결국 삶의 편에 붙들어 매어놓곤 했으니 말이다. 똑같은 이유에서는 아니었겠지만, 혜원이도 삶의 편이었다. 그렇지만 혜원이에게는 삶이 자신을 거부하는 그 순간에 광기도 눈물도 신경질도 없었다. 바보 같은 계집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본성을 억압하다니. 아니, 그 아이는 자신의 본성을 억압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게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왜냐하면, 아까 참에도 얘기했듯, 그 아이의 삶을 되돌아보면, 이타성 이야말로 그 아이의 본성 이라는 생각이 들곤 하니까 말이다. 그것이 죽음의 순간에 한 장엄한 절정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가 바보 같았다는 내 판결
에는 변함이 없다. 바보 같은 계집 애.
내가 마지막으로 그 아이를 본 그날, 한강성심병원의 그 병상에서 그 아이가 내뱉은 말의 그 바보스러움이란……
“오빠, 이 과일들 좀 먹어. 난 별로 입맛이 없는데 이렇게 과일은 쌓이니, 이걸 다 어떻게 처치한담. 오빠라도 날 좀 도와줘야 하지 않수?”
그 아이 앞에서 웃는 것은 내 의무였다.
“사실 나두 못 먹을 처지야. 나두 환자거든. 저녁부터 아무것도 안 먹고 있어.”
“왜, 배탈 났구나. 또 술병이군!”
“응, 아마 술병일 거야. 내일 아침에 위 내시경 검살 하기로 돼 있어.”
“또? 오빤, 내가 알기로도 여태껏 위 내시경 검살 두 번이나 했잖아. 속이 어떤데?”
“아무것두 아냐. 그냥 조금 불편해서 그래.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아.”
“참 오빤 장해. 그 끔찍한 내시경 검살 연례행사처럼 치러내니까 말이야. 난 내가 환자들 목구멍으로 그 파이버스코프*를 집어넣으면서도 때때로 끔찍스런 느낌이 드는데.”
분만의 진통보다도 몇 배 더 고통스러울 것이 틀림없는 수술을 앞둔 이 내과 의사는 이종오빠의 내시경 검사를 걱정해주고 있었다. 더구나, 그 아이가 치러야 할 고통은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한 고통이 아니라, 거의 확실히 죽음으로 이어질 고통이었다.
“증세가 정확히 어때? 말 좀 해봐. 내가 오빠의 주치의보다 실력이 없어 보여?”
“기집애두. 응, 그저 소화가 좀 안 돼. 양치질할 때 속이 미식거리곤 해서. 네 말대루 그게 내 연례행사니까 한번 검사나 받아보려는 거지, 뭐.”
“결국은 술이군. 아니, 그리구 오빠 같은 경운, 그 스트레스. 남들이라면 안 받을 스트레스를 오빠는 괜히 받는 성격이잖수? 노력해서 완전히 해결될 일이 아닌 건 확실해. 오빠가 내 환자라면 노력해서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하겠지만, 사실 기질이라는 건 노력으로 완전히 바꾸기가 어려워. 그렇지만, 노력이 전혀 효과가 없지는 않아. 마음을 편히 가지도록 노력하라구. 요컨대 좀 게을러지도록 노력해. 오빠의 완벽주의가 오빠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구 있는 거라구요. 오빠를 그리도 괴롭히는 오빠의 완벽주의가 오빠를 대단하게 만든 것두 아니잖아. 고작 삼류 신문의 삼류 기자일 뿐이지. 사실은 술 마셔서 위가 그렇게까지 상하기는 어려워. 내 생각엔 오빠의 마음이 문제야. 남 생각 좀 그만 하세요. 내 생각까지 포함해서. 이거 괜히 내가 이렇게 환자 노릇 하고 있어서 오빠 위를 더 갉아먹은 것 같군. 내 생각도 그만하세요. 난 곧 나을 테니까. 그리고 오빠의 증세라면 별 거 아니라는 걸 유능한 내과 의사인 내가 보증할 테니까 조금도 걱정 마세요. 고작 위염 정돌 거예요. 그리고 요즘 직장인들 가운데 위염은 사실 아주 흔한 거예요.”
“혜원아.”
“응?”
“……”
“얘기해봐.”
“……”
“아이, 참 오빠가 가시내 같은 건 어려서나 지금이나 똑같아. 얘기해봐요. 날 사랑한다거나. 이마에 뽀뽈 하고 싶다거나.”
“응, 사실, 나 내달 초쯤에 불란서 가.”
혜원이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내 착각이었다. 그 아이는 여전히 생글거리며 내 말을 이었다.
“그래? 잘됐네. 오빤 복두 많군. 난 한 번도 못 나가본 외국엘 그리도 자주 들락거리니. 무슨 취재가는 거야?”
“아니, 그저 가는 거야. 나 회사에 사표 냈다.”
선생님께 칭찬받기를 기대하는 어린아이의 말투로 내가 말했다.
“왜?”
혜원이의 그 장난기 어린, 짐짓 놀라워하는 표정·……
“그저. 응, 네 말대로 삼류 신문의 삼류 기자 노릇 하기가 싫어져서.”
나의 이 짓궂은 대답…… 그러나 그 아이는 당차게 맞받아쳤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어휴, 이 소심무쌍하고 치사한 인간. 오빠가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내 말을 취소할 줄 알아? 오빠가 삼류 신문의 삼류 기자라는 사실은 명명백백한 거잖아. 정말 왜 가? 아주 가는 거야?”
“글쎄, 아주야 아니겠지. 조금 오래 있을려구.”
“얼마나?”
“한…… 3년쯤?”
“응, 공부하러 가는구나. 그 나이에. 대견두 하우.”
“아냐, 네 말대루 이 나이에 공분 무슨 공부니? 학교라면 끔찍하다. 기억 안 나니, 내가 학교 다니기 싫어서 전주에 내려갔던 거?”
나는 전주에서의 그 아이와의 석 달을 감미롭고 슬프게 되씹으며 말했다. 그 아이가 내 말을 곧 정정했다.
“그건 오빠가 학굘 싫어한 게 아니라, 학교가 오빨 싫어했던 거 아냐?”
“그렇긴 하지. 그렇지만 뭐, 그게 그거지. 그냥 갈려구 해.”
“날 서울에 두구?”
그 아이가 짓궂게 웃으며 공격적으로 물었다. 내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그래, 특히 너 보기가 지겨워서라도 갈려구 그래.”
“어…… 어…… 어…… 어…… 그거 정말이야? 아낙네의 저주가 두렵지도 않아? 오빠 지금 그 말 나중에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그 아이가 여전히 웃으며 물었다. 나는 아차, 했지만, 여전히 정색을 하고 밀고 나갔다.
“그래, 그래, 그래, 그래. 네 저주는 달콤할 것 같아.”
“정말 구제불능의 남정네군. 언니랑 아이들도 다 데리구 가는 거야?”
“응, 그렇게 될 것 같아.”
“말하자면 이민 가는 거군.”
“네 편할 대루 생각해.”
“사푤 냈으면, 어떻게 살 생각이유?”
“몰라.”
“그 삼류 신문사에서 특파원으로 안 써준대?”
“문제는 네 말대루 내가 삼류 기자라는 데에 있어.”
“그건 사실이야. 여하튼 용기가 참 가상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불안한 구석이 없지 않아. 돈 떨어졌다구 내게 전화하지 마세요. 나두 박봉의 월급쟁이에 불과하다구요.”
“노력해볼게.”
“그러니까, 내가 수술실을 나와두 오빠는 서울에 없겠군.”
그 아이가 이번에는 정말로 쓸쓸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켰다.
“오빠, 잠깐 나가요.”
“왜?”
“담배를 피우고 싶어요. 오빠 담배 있죠?”
“아니, 얘가 왜 이래? 그냥 누워 있어!”
“정말 담배를 피우고 싶어. 이 링거병 좀 받쳐줘.”
나는 흘끗 이모님을 쳐다보았다. 이모님은 여전히 침대에 기대 주무시고 계셨고, 이모님과 교대할 이 아이의 남편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복도로 나왔다. 그러고는 복도 끝 비상계단의 층계참에 나란히 서 담배를 피웠다.
“너 담배 피우는 거 처음 보는데.”
“사실 인턴 때부터 조금씩 피우긴 했어. 하긴 하루에 한 개비도 피우지 않는 날이 많았으니까, 피운다고 할 수도 없었지만. 지난해 이후론 처음 피우는 거야.”
“기분이 어때?”
아, 이건 얼마나 경솔하고 잔인한 질문인가? 내 주둥이의 규율 없음……
“지금, 아주 좋아. 오빠가 거만해질까 봐 좀 걱정되긴 하지만, 사실 이렇게 마지막 밤을 같이 보내는 게 아주 기분 좋아.”
“그게 무슨 소리니? 마지막 밤은 무슨 마지막 밤이야?”
나는 나 자신도 확신시키지 못할 말로 그 아이에게 대꾸했다.
“아니, 오빠. 내가 뭐 수술대 위나 무균실에서 죽는다는 게 아니라 오빠가 불란서에 간다니 하는 말이야. 당분간은 못 보게 될 거 아니우?”
우리는 무대 위에서 대사를 주고받는 배우 같았다. 현실의 저주를 푸닥거리하기 위해, 운명을 배반하기 위해, 악착같이 언어의 치유력을 믿고 거기에 기대는.
“오빠.”
“응.”
“부탁이 있어.”
“……”
“뽀뽀 한 번 해줘요.”
나는 그 아이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링거병을 든 채.
“아니, 입술에.”
그래서 나는 그 아이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링거병을 든 채.
이제 이 아이는 내일이면, 치료라는 걸 받기 시작할 것이다. 골수이식 치료법이라고 했던가? 대량의 방사선이 이 아이의 몸 전체에 쬐어져, 몸속의 백혈병 세포를 모조리 없애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아이의 정상적 골수 기능도 완전히 파괴되어 적혈구든, 정상 백혈구른, 혈소판이든, 생명 유지에 필요한 피톨*을 이 아이는 더 이상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걸 막기 위해 주원이의 골수가 이 아이에게 이식될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의 몸은 과연 주원이의 골수를 받아들일 것인가? 담당 의사들은 별다른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이 좋다고 대놓고 말했다. 의사로서 자기 몸의 상태를 모를 리 없던 이 아이는 그날 밤 자신의 미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오빠 입술이 아이스콘 같았어.”
나는 이번에는 그 아이의 뒷머리를 쥐어박지 않았다.
하늘은 계속 말갛게 개 있었다. 짙은 햇살과 옅은 바람기가 교대하거나 협동하며 살갗을 애무하고 있었고, 그 애무가 깨우는 관능이 죽은 자와 산 자를 확연히 갈라놓고 있었다. 정경희 씨와 나는 프레데릭 쇼팽과 오귀스트 콩트와 콜레트와 짐 모리슨과 폴 엘뤼아르의 묘를 거쳐서 코뮌 전사들의 벽에 이르렀다. 1871년 5월 파리 코뮌 당시 정부군에 의한 대학살의 현장이었던 그 비극의 벽에 말이다. 우리는 빌레트 과학박물관의 인권 심포지엄장에 매제를 남겨놓고 함께 페르―라셰즈 묘지를 찾은 것이었다. 아마도 5월인 탓이 분명했다. 평소보다 더 많은 장미가 그 벽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 말이다. 북경시 대표단이라고 헌정자를 밝히고 있는 한 무더기의 장미가 눈에 띄었다. 그 벽 앞에서 산화한 한 세기의 전의 노동자들을 정부 차원에서 추도해줄 나라가 이제 세상에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 쓸쓸히 상기됐다.
“어떻게 묘지에 전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없네요. 우리가 유골과 시신에 둘러싸여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나요.”
“날씨 덕일 거예요.”
내가 조금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얼른 덧붙였다.
“지구상에 묘지 아닌 곳이 있나요? 우리가 발걸음 디디는 곳마다 다 제 나름대로 죽음의 역사가 간직돼 있을 텐데요, 뭐.”
“하긴 그래요.”
정경희 씨가 내 투정에 너그럽게 동의했다. 그러고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그 사촌누이완 가깝게 지냈나요? 아니, 제가 쓸데없는 걸 물었군요……”
“……아주 먼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제 말 좀 들어볼래요, 이진우 씨? 이건 좀 다른 얘긴데요, 이제 삶의 반 고비를 겨우 넘기다보니, 하긴 이 반 고비란 말두 건방진 얘기지만요, 미립* 하나가 생겨난 것 같아요. 뭐 별건 아니구, 세상에 뜻대루 되는 일이 별루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예요. 그런 깨달음이 한편으론 슬프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기쁘기도 해요. 야심이 없어지는 건 슬픈 일이지만, 회한이 없어지는 건 기쁜 일이거든요. 아등바등해봐야 안 될 일이 된다거나 될 일이 안 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런 체념의 가장 큰 이점은 세상만사를, 그러니까 자신의 삶까지를 포함해서 세상만사를, 관조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인 것 같아요. 관찰자의 거리를 가지고 말이죠. 사람의 생사든 역사의 부침이든 세상만사를 말이에요. 이런 태도에 대해서 자기 삶이나 역사와 사회에 대해 아주 무책임한 생각이라고 비난할 수가 있겠죠. 그렇지만, 아주 이기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가 스스로 원하지 않았던 우리 삶에 대해서, 우리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내던져진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과연 책임을 져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사실 제가 하구 싶었던 얘기는, 자기 자신이나 사회에 대한 어떤 투철한 책임감 같은 게, 흔히, 정말 무책임한 결과를, 그러니까 커다란 악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는 얘기였어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는 그 체념이라는 게 자잘한 선의 같은 걸 배제하는 건 아니구…… 아유, 왜 이리 말이 꼬이나, 내가 무슨 말을 하구 있는지두 모르겠네. 그러니까 사람은 평소 말버릇을 단박에 바꿔보려구 해서는 안 되는 건데, 그렇죠 이진우 씨?”
“아녜요, 무슨 말인지 알 듯도 한데요, 뭐.”
“그러니까 모를 듯도 하다는 말이군요.”
정경희 씨가 싱글거리며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아니, 알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원하지 않은 채 내던져진 이 세상이란 말이 조금 슬프네요. 사실은 우연히도 아까 생미셸에서부터 줄곧 바로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우린 정말 절교 같은 걸 하기엔 서로 너무 짧았네요. 정경희 씨 말이 근본적으로 옳다는 생각을 저두 해요, 되는 일두 없구 안 되는 일두 없다는 그 말. 그런데 그렇게 제 뜻대로 안 되는 운명의 틀 속에서도 장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을 하며 무슨 위인전의 주인공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혜원이를 추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뒤, 역시 위인전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혜원이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장엄한 삶을 살아낸 인물의 묘비명 앞에 설 수 있었다.
발레리 브로비에프스키 (1836 ∼1908): 1863년 폴란드 봉기의 투사. 1871년 3월 18일 ∼5월 28일 파리 코뮌의 지도자. 그의 지휘로 조직된 노동자군 제101 대대는 수적으로 우세했던 베르사이유군을 열 차례나 격파했다. 폴란드의 영웅적인 아들을 위해 파리 인민이 이 묘비를 세우다.
그러나 이 사람은 파리 코뮌이 무너지고도 40년 가까이를 더 살았다. 그것은 그의 장엄함을 위해서는 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나이든 죽음에는 비극성 이 없다. 그런데 비극성은 장엄함의 한 부분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 브로비에프스키란 사람의 묘비명에 촉발돼 나는 머릿속에서 새로운 묘비명 하나를 짜냈다.
김혜원(전주 1962∼서울 1994):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의사. 자신이 투사인 줄 몰랐던 박애의 투사. 우리 별에 머물렀던 서른두 해 동안 소리 소문 없이 사랑을 실천하다. 우리 별의 귀화 시민으로서의 그 여자의 짧은 삶은 그 어짊과 슬기로움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 앞의 의연함으로 타인의 모범이 되다. 이름을 수 없는 별의 영웅적인 딸을 위해.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 별의 한 시민이 이 묘비를 세우다.
멀리. 누군가의 야틈한 석관 위로. 혜윈이의 얼굴이 아물아물 피어오르고 있었다.
『문학과사회』 28호(1994년 겨울); 『제망매』 (문학동네 1997)
고종석(高宗錫)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과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언어학 석사·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장편소설 『기자들』 을 출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소설뿐만 아니라 언어와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에세이와 칼럼 등을 써왔다.
『코리아타임스』 『한겨레신문』 『시사저널』 기자로 일했고,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소설집 『제망매(祭亡妹)』 『엘리아의 제야』, 산문집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국어의 풍경들』 『모국어의 속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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