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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후반기
a, 더 어수선한 연초
1993년의 첫날이 밝았다.
새해가 오면 무언가 뜻깊은 일이 생기길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라지만, 인야의 마음은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갇힌 듯 멍하기만 했다.
어수선한 연말연시를 보내고 맞이한 1월 1일의 일기장은 단 한 줄의 문장만을 남긴 채 비어 있었다.
'올해는 뜻깊은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훗날 이 시절을 복기하며 인야는 생각했다.
‘이 당시에 나는 이미 인생의 모든 것을 통달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무력함에 몸을 맡긴 것이었을까.’
살다 보면, 인생이 매 순간 드라마틱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저 나무토막 같은 건조한 날들이 이어지기도 하니까.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건강하신 듯하여, 인야는 그제야 가슴 한구석에 안도의 빛이 들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미뤄두었던 번역 작업에 손을 대보았지만, 낯선 언어의 장벽은 여전히 높기만 했다.
몸이 절로 움츠러드는 추위는 바르셀로나에서 흔치 않은 일인데, 그 무렵의 날씨가 바로 그랬다.
무심코 TV를 켜니 지난해의 기억이 되어버린 ‘장애인 올림픽’ 개막식 장면이 흘러나왔고, 인야는 화면 속에서 휠체어를 밀고 들어오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못 알아볼 정도로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저 별 다른 표정이 아니었다.
거리의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 역시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거울을 볼 때와는 딴판으로, 차갑고 냉정하게 굳어 있는 사내.
올림픽 이후 부쩍 늘어난 거리의 한국인 관광객들에게도, 이제는 예전처럼... 반갑게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하게 지나치는 것, 그것이 바르셀로나 4년 차를 맞이한 인야의 바뀐 모습이었다.
연말연시의 긴 휴가가 끝나가고 있었다.
인야는 여행사를 지나며 안내서를 요구했고, 또 부두에도 들러 ‘메노르까(Menorca: 바르셀로나 남쪽에 있는 지중해의 섬들인 ‘발레아레스 제도’ 중의 하나) 행 배 시간과 요금을 체크했다. 마치 며칠 뒤 그 섬으로 여행을 떠날 사람처럼 장을 봐 가지고 돌아왔다.
1월 7일이 되도록 도시는 문을 닫고 정지해 있었다.
집 안에 틀어박혀 서성이다 보면 땅거미가 질 무렵 심한 불안과 갈등이 밀려왔다.
인야는 지난해에 했던 ‘드로잉 93’ 스크랩을 꺼내 보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 곁에서 함께 그렸던 ‘창밖의 바람개비’, ‘구름 놀이’, ‘시소 타기’ 같은 크레파스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화가로서의 평소 화풍과는 조금 다른, 아이들의 시선을 닮은 그 그림들을 보며... 그는 묘한 재미와 위안을 느꼈다.
그 무렵, 시장을 봐오던 인야는 아랫집 아말리아와 마주쳤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앞집 미겔 영감님이 어젯밤 혹은 오늘 아침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분, 참 좋은 분이었는데......”
영감님의 부고에 인야는 놀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아련해졌다.
사실 앞집은 한참 전부터 비어 있었다. 치료가 불가능한 병으로 영감님은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인상이 좋지 않던 그의 부인도 시내 조카 집에 머문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었다. 인야는 내심,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두 번은 다시 뵙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 집을 바라보곤 했었다. 그런데 막상 영영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왠지 모를 섬뜩함이 몰려왔다.
집으로 올라온 인야의 눈에, 굳게 닫힌 미겔 영감님의 집이 그날따라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집 전체가 거대한 ‘침묵’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이제 저 앞집이 진정한 침묵의 집이 되었구나. 아니, 내 집과 나란히 침묵을 나누게 되었구나.’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또 다른 2층 집이 보였다.
인야가 이사 올 때부터 주인이 아파 비어 있다던 그 집은, 크고 번듯한 외관에 멋진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어 인야가 ‘소나무 집’이라 부르던 곳이었다.
‘이러다 이 동네가 아예 침묵의 마을이 되는 건 아닐까.’
두 집 다 가파른 언덕 위, 바르셀로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고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비어 있는 그 공간들이 인야에게는 무엇보다 아깝게만 느껴졌다.
이러한 감정은 자연스레 드로잉으로 이어졌는데,
소식을 들은 날은 ‘미겔 씨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다음 날은 ‘주인 잃은 집’이라는 제목으로 연이틀 작업에 몰두했다.
비록 까딸란 부인의 유별난 성격 탓에 이웃으로서 깊은 교류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곳은 인야가 매일 마주할 수밖에 없는 풍경이자 남몰래 동경하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인야의 집은 그 집에 가려 시야가 제한적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집은 인야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대상이었다. ‘만약 내가 저 집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바르셀로나 풍경을 그릴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인야는 줄곧 해왔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네 사람들은 인야를 볼 때마다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인야, 앞집이 매물로 나왔는데 돈 있으면 사지 그래요?”
그럴 때마다 인야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그러고 싶죠. 하지만 지금 사는 집 월세 내기도 빠듯한데 집을 어떻게 사겠어요.”
매물 소식을 들은 일본인 친구도 곁에서 거들며 안타까워했다.
“인야, 네가 그 집에 살면 참 좋을 텐데. 전망이 좋아서 네 그림도 달라질 거야. 우리에게 돈만 있다면 당장 사고 싶을 정도로 욕심나는 집인데.......”
인야는 이곳으로 이사 온 직후, 미겔 영감님의 초대로 딱 한 번 그 집 거실에 발을 들였던 기억을 떠올렸다.
너른 거실 창을 통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던 바르셀로나의 전경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던......
하루는 아침에 성당 작업실에 가다가, 열쇠를 꺼내면서 거기 ‘떼레시나’ 부인과 그 옆집 노파 ‘테레사’와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두 노파는 아주 반가운 표정으로,
“인야, 그 집 주변이 비어 있어서... 혹시 무섭지 않아?” 하고 물었다.
“그렇지 않은데요!” 하고 인야가 고개를 저어가면서 대답을 하니,
“용감한 젊은이야!” 하며 호의적인 표정으로 둘이 깔깔 웃었다.
그런데 혼자 작업실에 있으면서도 인야는,
‘무서워? 뭐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는 또,
‘안 무서워? 뭐가?’ 하고도 있었다.
인야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 없이 혼자 사는데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점심을 일찍 챙겨먹은 인야는 바닷가로 향했다.
춥지 않은 날씨에 바다도 꽤나 잠잠했다.
늘 그러 듯, 모래밭에 벌러덩 누워... 하늘을 보았다.
이따금 날아다니는 갈매기 소리와 파도 소리가 인야를 나른하게 만들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조용한 바닷가에서 살고 싶다......'
방학이 끝나고 언어 학교와 대학원 수업이 모두 시작되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빠졌다.
그 동안 집에서 여유 있게 쉬었던 나날이 그립다가도, 다시 끼니때만 되면 뭘 먹어야 할지 걱정이 앞서는 나날이 이어지다 보니...
'아, 이제... 그런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렇다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내가 결혼을 하게 될까? 그것도 의문이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G를 만났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는 사실을 그녀를 보내고 돌아오면서 인야는 깨달았다.
뭔가 주섬주섬 말을 만들어 해대고, 쓰잘 데 없이 웃고......
'아, 그런 여자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결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녀는 남의 여자다......'
그날 저녁,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한 아이가 갑자기 인야에게 물었다.
“선생님! 왜 화가는 혼자 살아야 하나요?”
“...... 응?”
인야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당황했다는 말이 옳다. 그러면서,
“ 하 하 하 하....” 하고 한바탕 크게 웃어젖혔다.
그러자 애들 둘이 인야를 빤히 바라 보았는데,
“사람은 혼자 살 수도 있는 거야.” 하고 변명 아닌 답을 해주었다.
“그럼, 결혼은 언제 하나요?” 하고 한 아이가 또 물었다.
“응... 어쩌면 너희들이 열 두어 살 먹을 때?” 하는 근거 없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속으론,
'그렇게 될까?' 하고 있었다.
설날 아침(8 시간 차이로, 바르셀로나는 자정 무렵), 인야는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새해엔 더욱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 같은 날은, 고기라도 사서 먹지... 그랬냐?”
“제가 여기서 가르치는 애 집에서 떡국을 배부르게 얻어먹었으니 된 거지요.”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전화 말미에,
“빨리 오게끔 혀!” 하셨다.
“예? 아, 예......”
대답을 하면서도 인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이제 일흔 일곱이 되신 어머니께선 무척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데... 내가 쉽게 돌아갈 수 있을까?'
논문 번역은 갈수록 태산이었다.
겨우 입을 뗀 스페인어로 학술 논문을 번역한다는 것은 캄캄한 앞날을 예고하는 듯했다.
답답한 마음에 인야는 점심을 일찍 챙겨먹고 다시 바닷가에 갔다.
버스가 해변에 닿자 건물과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낮게 깔린 수평선 아래의 바다가 뭔가 침범할 수 없는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날씨가 따뜻했지만 많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고, 인야 역시 모래밭에 앉거나 누워서 평화를 누렸다.
그러다 인야는, ‘메노르까(Menorca)’에 가기로 했다.
한 달 전, 아이들을 봐주고 받았던 돈을 안 쓰고 아껴두었기에... 거기에 약간의 돈을 더하면 갔다 올 정도는 될 것 같았던 것이다.
‘메노르까(Menorca)’ 행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겨울철이라 뱃삯 보다 싼 비행기 표가 나와) 돌아온 '침묵의 집'.
현관문을 여는 순간 인야는 비명을 질렀다.
“어? 이게 뭐야!”
집안이 온통 뒤집혀 있었다. 그런데도 인야는,
‘누가 이랬다지?’ 했지만, 그 ‘누구’란 자신밖에 없는 집인지라... 이제는, ‘왜 이렇지? 내 집이 이러진 않은데......’ 했을 뿐, 도둑을 맞았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근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인야는 평생 도둑을 맞아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현실감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가운뎃방 문을 열어 보니, 뒷문으로 가는 계단 쪽의 창살이 뜯겨 있었고... 방문도 부서져 있었고, 침대엔 커다란 신발 자국이 보였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인야는 집이 다 털려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반사적으로 바로 밖으로 나와 살펴보니, 뒷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나 있던 조그만 창의 창살이 뜯어져 있었다.
그걸 뜯어내고 도둑이 집안으로 침입했던 것이었다. 순간,
‘스페인에도 도둑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허긴, 도둑 없는 세상이 어디 있을까만......’ 하던 순간,
무엇보다도 인야의 뇌리를 때리던 건... '그림'이었다.
“아, 내 그림!!”
인야는 아무 정신도 없는 상태로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그동안 그렸다가 떼어내기를 반복하며 그려두었던 한 뭉치의(대부분이 종이여서 차곡차곡 쌓아 두었었다.)의 드로잉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하도 급해서였던지, 그 그림 뭉치가 어디에 있는지 바로 찾아낼 수가 없었다.
장롱, 침대 위...... 그러다가 바로, 그 가운데 방의 침대 매트리스 아래를 들춰보았다.
“아!”
자신이 듣기에도 그 소리가 상당히 컸다.
그림들은 고스란히 그 자리에 있었다.(나중에 다시 세어 보니 120장이 넘었다.)
도둑은 그 침대의 이불을 그대로 밟고 지나갔던 모양으로 아직도 신발자국이 선명한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그림들이 안전하게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또, 이제는 거실로 나와 벽면을 바라보니... 벽면에 붙어 있던 드로잉들도 그대로 붙어 있었다.
그 순간,
“도둑아! 고맙다!!” 하는 말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그 도둑은 그림엔 전혀 관심도 없던 '좀 도둑'이었을 뿐이다. 그 어떤 그림에도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렇지만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쑤셔 넣어 두었던 그림 뭉치를 발견했다면, 그 뭉치는 가져갔을 수도 있었기에... 인야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그에게 감사를 표했던 것으로, 만약 그 그림들이 다 없어졌다면? '아마, 나는 ‘화병’으로 죽을지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런 뒤 인야는, 겁도 나고 당황한 나머지... 바로 아랫집에 내려가 그 사실을 알렸다.
아말리아와 호아낀도 소스라치게 놀라, 인야와 함께 올라왔고...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조건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도둑은 창문의 창살을 뜯어내고 망을 칼로 오려 낸 다음 작은 방을 통해 들어왔다가, 인야의 침실이 잠겨 있으니까 밖에 나가 연장을 가지고 들어와(곡괭이 같은 것인데 그 끝도 휘어져 있었다.) 문을 부수고, 방에 들어와 뒤져서 돈 될 만한 건 다 가져 갔던 것이다.
‘카메라’와 엊그제 선물 받은 ‘카세트’가 보이지 않았고, 조금 뒤에 보니... 서울에서 가져왔던 ‘워크맨’ 등, 주로 가전제품을 가져갔던 것으로... 물론 인야가 가지고 있던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은 싹 가져갔던 것이다.
물론 안타깝고 아깝기도 했지만, 의외로 인야는 담담했다.
무엇보다도 그림이 무사했기 때문에,
‘이 정도 쯤이야......’ 하는 생각까지 들어, 느긋해질 수 있었는데,
그런 인야를 보며,
“인야, 너는 왜 그리 태평인 거야?” 하며 아말리아가 오히려 놀라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인야의 심정은 복잡했다.
'아,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밤엔 이 집에 있기가 싫다. 그저 싫은 게 아니고, 끔찍하도록 싫다. 어떡한다지?’ 하고 이리저리 궁리를 하다가,
인야는 태권도 하는 J사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바델’에 있는 B주방장 집에 갈 수도 있겠지만, 거긴 멀기도 하고 또 다음 날 아침에 ‘메노르까’에 가야 하기 때문에(비행기 표를 썩힐 순 없으므로)... 일부러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으니까.
깜짝 놀랐던 J 사범이 일 끝내고 인야를 데리러 오겠다며 기다리라기에,
나름 조그만 짐 가방을 챙긴 뒤... 아말리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인야? 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아말리아, 나 오늘은 이 집에 머물고 싶지 않아. 여기서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아서, 다른 데에 가서 자려고......” 하자,
“어디로 갈 건데? 그럴 거면, 우리 집에서...”하는데,
“아니, 이미 전화해 두었어. 내 한국인 친구가 곧 날 데리러 온다고 했어.”
“그래? 잘 됐네! 그럼, 언제 올 거야. 거기 뒷수습도 해야 할 텐데......” 하는데,
“아무튼, 지금은 이 집에 있고 싶지 않아...... 그러니 이 집 열쇠 좀 맡아줘.” 하자,
“왜? 오래 걸려?” 하기에,
“도둑 맞은 집에 남아 있고 싶지가 않아서 그래......” 하자,
“알았어. 어서, 열쇠 가지고 와!”
그렇게 ‘침묵의 집’을 뒤로하고, 인야는 예정대로 4박 5일간의 메노르까(Menorca)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집은 여전히 낯설고 무거웠다.
인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다, 쓰러지듯 잠이 들었을 뿐이다.
사실 도둑을 맞았던 그날 밤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현장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 아말리아와 집주인에게 상황을 알렸고, 밤늦게 차를 몰고 달려온 J 사범을 따라나섰다. 도둑이 든 집에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기에 선택한 피신이었다.
J 사범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인야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도둑맞은 기억을 뒤로한 채... 메노르까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집은 이미 수리되어 있었다.
상습범의 소행 같다는 얘기도 들렸고, 인야가 도둑을 맞았다는 소식은 온 동네를 뒤흔들었던 모양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성당에 모여 회의까지 했다는 말에 인야는 어리둥절하기까지 했으니까.
하긴 그도 그럴 것이, 그 동네의 유일한 동양인의 집이 털린 것에 대해 동네 사람들은 안타까움과 동시에 일종의 부끄러움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정말 자기 일처럼 나서서 인야를 도우려 애쓰는 모습만을 봐도......
집주인 역시 저녁에 찾아와 인야를 위로하며,
앞으로 당분간 집세 걱정은 너무 하지 말고, 언제든 내되... 그마저 안 되면 떠날 때 그림으로 줘도 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식으로, 우선 살아가기엔 지장이 없게끔 배려를 해 주었다.
물론 인야가 아무리 힘들었어도 집세를 밀린 적은 없었지만, 그런 배려만도... 기분이 가벼워진 건 사실이다.
도둑을 맞은 것은 분명 손해였지만, 역설적으로 온 동네 사람들의 호의를 확인하며... 인야는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 같은 든든함을 얻었다. ‘새옹지마’라는 말이 이토록 절묘할 수 없었다.
일주일 뒤, 경찰이 지문을 채취한다며 방문했다.
사건이 터진 지가 언젠데 이제야 왔나 싶어, 인야는 헛웃음이 났다.
호아낀 역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인야, 경찰 믿지 마. 너만 상처받아. 스페인이 원래 이래."
그 말에 인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행도 다녀왔고 도둑맞은 일에도 무뎌지는 등, 어수선한 생활에서 벗어나... 다시 내 일에 집중해야 할 때구나......'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