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일차 ( 운봉 ~ 주천구간 ) 걷기
서울을 출발하여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일행들과 도킹후 지리산 둘레길 1구간인 주천 ~ 운봉구간을 거꾸로 걷기 진행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외평마을과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를 잇는 14.7km의 지리산둘레길. 본 구간은 지리산 서북 능선을 조망하면서, 해발 500m의 운봉고원의 너른 들과 6개의 마을을 잇는 옛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이 구간은 옛 운봉현과 남원부를 잇던 옛길이 지금도 잘 남아있는 구간이다. 회덕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은 남원장으로, 노치에서 운봉으로 가는 길은 운봉장을 보러 다녔던 길이다. 특히 10km의 옛길 중 구룡치와 솔정지를 잇는 회덕~내송까지의 옛길(6km)은 길 폭도 넉넉하고 노면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경사도가 완만하여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솔숲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다.
걷기를 시작하면서
이 지역에서 많이 볼수 있는 석장승
서어나무 군락지
회덕마을 회덕초가
개미정지
제 2 일차 ( 운봉 ~ 인월구간 ) 걷기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와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9.9km의 지리산길. 운봉-인월 구간은 오른쪽으로 바래봉, 고리봉을 잇는 지리산 서북 능선을 조망하고 왼쪽으로는 고남산,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며 운봉고원을 걷는 길로 옛 통영별로 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9.9km 전 구간이 제방길과 임도로 되어 있어 길 폭이 충분히 넓어 여럿이 함께 걷기에 좋은 평지길이고, 황산대첩비, 국악의성지, 송흥록 생가 등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을 골고루 즐기면서 걷기에 좋은 곳이다.
강변 둑방를 걷기시작하여
황산대첩비 / 荒山大捷碑
1577년(선조 10)작. 높이 4.25m. 이 비는 일제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어 파편만 남아 있는 정도였으나 1957년에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그대로 이용하여 중건하였다.
중건된 비는 쌍귀(雙龜)를 떠서 새겨진 듯하며, 본래 모양의 높이·너비·두께 등은 정확히 고찰할 수 없다. 비문은 김귀영(金貴榮)이 짓고 송인(宋寅)이 썼으며, 전액은 남응운(南應雲)이 하였고, 박광옥(朴光玉)이 세웠다. 1380년(우왕 6)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의 전승을 되새기기 위하여 세웠다.
비문에는 당시의 전라도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이 옛날 태조가 승전한 황산이 시대가 흐르고 지명이 바뀌어 잊혀져가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청에 따라 왕명으로 건립하였음을 비롯하여, 이성계가 10배의 적을 대파함으로써 만세에 평안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성계의 업적을 기려 이 비를 세운다는 명문 등이 실려 있다.
글씨는 오로지 조맹부(趙孟頫)의 글씨체를 닮은 것으로 결구에 허한 곳이 많고 필력도 주경하지 못하다.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에 그의 글씨를 비(肥)와 속(俗)으로 평하였는데 이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동편제 / 東便制
판소리를 전승지역의 특징에 따라 구분하는 것으로 전라도 동부지역에 전승되는 소리를 동편제라고 한다. ≪조선창극사 朝鮮唱劇史≫ 대가닥조에서 처음으로 동편제·서편제·중고제 등으로 구분하였다.
전승지는 전라도 동부지역으로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편지역, 즉, 운봉·순창·구례·흥덕 지방 등이며, 웅건(雄健)하고 청담(淸淡)하며 호령조가 많은 우조(羽調) 분위기의 판소리가 특징이다.
시작이 썩 진중하고 구절의 끝마침을 되게하여 쇠망치로 내려치는 듯이 노래한다. 일반적으로 굵직한 시김새를 사용하며, 마디마디 엄성이라 하여 무거운 발성을 쓴다. 부침새(노래말을 선율에 붙이는 것)는 비교적 굵게 구사되며, 소리의 끝은 구절마다 음을 짧게 끊는 경우가 많다.
소리의 들거나 뉘는 것도 제에 따라 다른데, 동편제에서는 꼬리를 드는 경우가 많다. 동편제는 서편제보다 음을 높게 들어내는 발성이 많아서 흔히 ‘들고 나가는 소리’라고 한다. 또한 동편제는 서편제에 비해 우조나 평조(平調)를 많이 쓰며, 비교적 빠른 장단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동편제 소리는 송흥록(宋興綠)의 법제를 표준으로 하여 전승되어 온 것이다. 송흥록의 소리제는 그의 아우 송광록(宋光綠)과 송흥록의 수제자인 박만순(朴萬順)에게 전승되었다. 다시 송광록의 소리제는 그의 아들 송우룡(宋雨龍)에게 이어졌고, 송우룡의 소리제는 송만갑(宋萬甲)·전도성(全道成)·유성준(劉聖俊)·이선유(李善裕)·송업봉(宋業奉)에게 전승되었다.
송만갑은 송씨 가문의 소리제를 이어 받았으나 정창업(丁昌業)의 소리제를 듣고 자신의 소리를 바꾸어 불렀기 때문에 송우룡에 의해 가문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송만갑의 소리제는 그의 제자 장판개(張判介)·박중근(朴重根)·박봉래(朴奉來)·김정문(金正文) 등 수많은 제자에게 전승되었다.
박록주(朴綠珠)·김초향(金楚香)·김연수(金演洙)·박초월(朴初月)·김소희(金素姬)도 한때 송만갑에게 소리를 배운 적이 있다.
제 2 일차 ( 인월 ~ 매동마을 ) 걷기 / 3 코스중 8km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를 잇는 20.5km의 지리산둘레길. 인월-금계구간은 지리산둘레길 시범구간 개통지인 지리산북부지역 남원시 산내면 상황마을과 함양군 마천면 창원마을을 있는 옛 고갯길 등구재를 중심으로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하고, 넓게 펼쳐진 다랑논과 6개의 산촌 마을을 지나 엄천강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제방길, 농로, 차도, 임도, 숲길등이 전 구간에 골고루 섞여있고, 또한 제방, 마을, 산과 계곡을 고루 느낄 수 있다.
선화사
수성대
배넘이재
장항마을 소나무 당산
제 3 일차 ( 매동마을 ~ 금계구간 ) 걷기
삼봉산
지리산 하봉/중봉/천왕봉 조망지
실상사 / 實相寺
828년(흥덕왕 3)에 홍척(洪陟)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산(開山)하면서 창건하였다. 홍척은 도의(道義, 道儀)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禪法)을 깨우친 뒤 귀국하였다. 그 후 도의는 장흥 가지산에 들어가서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 절을 세운 뒤 선종(禪宗)을 전파하였는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볼 때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하여 이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 뒤 2대조 수철(秀澈)을 거쳐 3대조 편운(片雲)에 이르러서 절을 크게 중창하고 선풍을 더욱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1468년(세조 14)에 화재로 모두 불타버린 후 2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승려들은 백장암(百丈庵)에 기거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 뒤 1679년(숙종 5)에 벽암(碧巖)이 삼창(三創)하였고, 1684년 계오(戒悟)가 현재의 극락전(極樂殿)인 부도전(浮屠殿)을 지었다. 1690년에 침허(枕虛)를 중심으로 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또한 1821년에는 의암(義巖)이 다시 중건하였으나 1882년(고종 19) 함양 출신 양재묵(楊載默)과 산청 출신 민동혁(閔東赫)에 의해 사찰건물들이 불타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으며, 1884년에 월송(月松) 등이 중건하였다. 1903년(광무 7) 익준(益俊)이 승당을 지었으며, 1932년 칠성각을 세웠다.
특히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 하여 일찍이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었다. 그 불상의 복장(腹藏)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문(願文)과 사경(寫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들어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高麗板華嚴經疏) 등 보기 드문 서적도 몇 가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도난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타 버렸다고 한다. 1986년 요사로 사용 중인 선리수도원(禪理修道院)을 건립하였고, 1989년 천왕문을 세웠다. 1991년 범종각을 짓고, 1996년 화엄학림(華嚴學林) 강당과 학사를 건립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원 실상사 석등 / 南原 實相寺 石燈
보물 제35호. 높이 5m. 보광전과 남원 실상사 동서삼층석탑(보물 제37호) 사이에 있다.
신라 석등의 전형적인 양식인 단면 8각을 따르고 있지만, 가운데받침돌이 여느 석등과 같이 8각의 간주(竿柱) 모양이 아닌 북을 옆으로 엎어 놓은 고복형(鼓腹形)이어서 차이가 있다.
석등은 단면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져 있다. 아래받침돌은 8각의 윗단과 아랫단으로 조성되었는데, 아랫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얕게 오목새김되었다. 윗단에는 2장의 넓은 꽃잎이 아래로 향해 있는 복련(覆蓮)의 연꽃 무늬가 겹쳐진 채로 얕게 돋을새김되었는데, 각 꽃잎의 끝부분에는 높게 솟아오른 귀꽃이 3개의 구름무늬를 이루며 장식되어 있다. 윗단의 윗부분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지리산 뱀사골 신선길 걷기
계곡과 녹음 계곡을 따라 걷기 좋은 뱀사골 신선길, 가을이면 멋진 단풍이 계곡따라 이어져 맑게 흐르는 물과 멋진 조화를 이루는 곳이며,
와운 마을 뒷산에 위치한 할미송과 할아비송으로 불리우는 지리산의 천년송을 볼수 있는 코스로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는 멋진 코스이다.
할미송
할아비송
산채정식으로 맛나게 저녁식사를
숙소에서 바라본 바래봉
제 4 일 ( 금계 ~ 동강구간 ) 걷기 / 오전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를 잇는 11km/12.7km의 지리산둘레길. 금계- 동강구간은 지리산 자락 깊숙이 들어온 6개의 산중마을과 사찰을 지나 엄천강을 만나는 길이다. 사찰로 가는 고즈넉한 숲길과 등구재와 법화산 자락을 조망하며 엄천강을 따라 걷는 옛길과 임도 등으로 구성된다.
용유담
지역 주민이 고맙게도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 노천 카페
제 4 일차 ( 동강 ~ 수철구간 ) 걷기 / 오후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와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를 잇는 12.1km의 지리산둘레길.
이 구간은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걸으며 산행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걷는 산길로, 4개의 마을을 지나 산청에 이르는 길이다.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며,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추모공원이 조성되어 되어 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가 전하며 지리산자락 장꾼들이 함양, 산청, 덕산을 오가며 생을 이었던 길이기도하다.
상사폭포
필봉과 산청읍
고동재
제 5 일차 ( 구형왕릉 ~ 함양 상림, 서울로 귀경 )
산청 전 구형왕릉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으로,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 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함양 상림 / 咸陽 上林
천연기념물 제154호. 면적 205,842㎡. 함양읍의 서쪽을 흐르고 있는 위천(渭川)가를 따라서 조림한 호안림이다.
소나무·측백나무·노간주나무 등의 나자식물(裸子植物: 겉씨식물)을 비롯하여 임관(林冠: 숲이 나뭇잎의 종류나 나이에 따라 층을 이루고 있는 모양)의 상층을 만들고 있는 수종은 개서어나무·까치박달·밤나무·굴참나무·신갈나무·갈참나무·상수리나무·졸참나무·갈졸참나무·떡갈나무·참느릅나무·느티나무·잔털벚나무·벚나무·야광나무·아카시아·다름나무·회화나무·쉬나무·고로쇠나무·좁은단풍나무·신나무·은백양·감나무·고나무·말채나무·물푸레나무·이팝나무·참오동·물갬나무 등이 있다.
밑층은 개암나무·백동백나무·좀깨잎나무·꾸지뽕나무·산뽕나무·고랑나무·국수나무·살딸나무·복사나무·윤노리나무·콩배나무·지귀나무·조록싸리·풀싸리·참싸리·싸리·산초·사람주나무·붉나무·개옻나무·고추나무·화살나무·회잎나무·보리수나무·키버들·능수버들·갯버들·진달래·산수유나무·노린재나무·쪽동백나무·쥐똥나무·작살나무·누리장나무·병꽃나무·백당나무 및 덜꿩나무 등이 차지한다.
이들 숲에 멍석딸기·복분자딸기·찔레꽃·칡·노박덩굴·새머루·왕머루·개머루·가마귀머루·담쟁이덩굴·인동덩굴·계요등·청가시덩굴 및 청미래덩굴이 엉켜 있고, 때로는 박태기나무·배롱나무·탱자나무 및 오죽 등의 관상수도 보인다.
이 숲은 신라 진성여왕 때 최치원(崔致遠)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조림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위천은 함양읍의 중앙을 흐르며 매년 홍수의 피해가 심했으므로, 최치원은 농민을 동원하여 둑을 쌓고 강물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지금의 숲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 숲을 대관림(大館林)이라고 이름지어 잘 보호하여서 홍수의 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에 대홍수에 의해서 둑의 중간이 파괴되고 지금의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다. 상림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의 하나인데, 현재는 풍치림의 구실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