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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장 22-26절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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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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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어진 본문은 예수님께서 벳새다라는 곳에서 한 소경을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벳새다 하면 생각하는 사건이 있지 않습니까 ?
벳새다 들판에서 한 어린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담긴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렸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어린아이의 오병이어를 가지고 기적을 일으키사 오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남은 것만도 12광주리를 남겼다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던 장소가 바로 벳새다입니다.
*** 벳새다에서 이런 기적을 일으키고, 다른 지역을 오래 다니시다가, 오랜만에 다시 이 벳새다로 예수님께서 오시게 되었는데, 오늘 본문 22절에 보니, 그때 사람들이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 하나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서 손 대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벳새다 사람들은 지난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예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경에게 예수님께서 손을 대신다면, 아무리 소경이라도 눈을 떠서 밝히 보게 될 것을 믿고, 한 소경을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사랑하는 선한목자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한 소경을 예수님께로 데려온 벳새다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그 소경을 예수님께로 데려온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습니다.
저들로 인하여, 평생 소경으로 앞못보며 고생해야할 인생이 눈을 뜨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으니, 저들이 한 일은 두고 두고 칭찬을 받아야 마땅한 일입니다.
저들은 아무리 앞못보는 소경일지라도 예수님께로 데려가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손만 대시기만 하면, 눈을 뜨고 밝히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소경된 현 상태만 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께만 나아가면 소경의 인생이 바꾸어질 것이라는 긍정적인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 스스로 문제를 풀어 줄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고난과 환란이 다가왔을 때, 문제 해결의 열쇠가 누구에게 있는지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영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들은 어디가 길인지, 어디로 가야 영생 천국을 얻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영적 소경들입니다. 문제를 만나도 진정 해결의 열쇠를 모르고, 이리 방황 저리 방황하는 인생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먼저 눈을 뜬 우리들로서, 오늘 본문에 벳새다 사람들처럼 영적 소경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문제 해결의 진정한 열쇠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증거하며, 아픈 문제 만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그런 전도자의 삶을 사는 우리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 벳새다 사람들이 한 소경을 데려와서 예수님께 손대주기를 구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 23절에 보니,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은 다른 기적 사건들과 비교하면 참 특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첫째는 그 소경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간 것이 특이합니다.
사람들이 그 소경을 데려온 것이니 만큼, 그 사람들 앞에서 그 소경을 낫게 하든 뭐하든 했으면 그 데려온 사람들도 만족했을텐데, 예수님께서는 그 데려온 사람들의 눈에 벗어나, 그 소경을 데리고 마을 밖까지 데리고 나갔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겠습니까 ?
예수님은 사람들이 모여서 소란 떠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맹인이 보다 편안한 상태에서, 예수님께 마음을 집중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예배당에 와서도 엉뚱한 것에 정신 빼앗기면 안됩니다. 뭐 실내 장식이 멋있네, 강당에 꺾꽃이가 아름답네, 오르간 소리가 웅장하네 뭐 이런 것에 신경쓰지 말고 우리는 오직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뭐 역사도 일어나고 축복도 있고, 은혜도 있고 그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중에 더욱 특이한 일은 그 소경의 눈에 침을 뱉은 사실이 특이합니다. 이것은 물론 소경에게 저주를 퍼붓듯 그 얼굴에 침을 뱉은 것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손가락에 침을 뱉어, 그 소경의 눈에 바르셨을 것입니다. 이랬든 저랬든 눈에 침을 바른다는 거, 이거 어떻게 보면 역겨운 일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소경이래도 감각적으로 침뱉는 소리도 들리고, 또 미지근하고 끈적 끈적한 액체가 자기 눈에 발라졌을 때, 직감적으로 이것이 저 사람의 침이구나 라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혹 일이 잘못되어, 그 소경이 팔짝 팔짝 뛰면서 예수님께 대항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당신 나에게 뭐 하는 짓이냐, 내가 앞 못본다고 내 눈에 그 더러운 침을 바른 거냐고, 지금 날 가지고 장난하는 거냐”고 울컥 화를 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일을 하셨겠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그저 말씀 한마디면 죽은자도 살아나고 앉은뱅이도 일어나고 문둥병도 깨끗해지고 그러는데, 소경도 침같은거 안발라도 얼마든지 눈 뜨게 해 줄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오해 소지가 다분한 그 방법, 눈에 침을 바르는 일을 했겠습니까 ?
침이라는 것은 당시의 사회에서는 치유의 수단이기도 하였습니다. 침은 치료제 구실을 하였습니다. 옛날 우리나라도 약이 별로 없을 때, 어머니들이 연고를 대신하여, 고약을 대신하여 상처나 종기부분에 침을 발라 치료하곤 했습니다. 모기 물렸다고 침발라 주었고, 눈따락지 났다고 눈에 침발라 주시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침을 이용해서 치료하는 당시의 관습을 이용해서 그 소경의 믿음을 복돋아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침을 바르신 것입니다. 사실 그 소경은 믿음이 없습니다. 낫고 싶어서 제발로 찾아온 것도 아니고 사람들에 의해서 얼떨결에 예수님께 나오기는 나왔어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고쳐줄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도 거의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상대가 믿음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병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주신다든가 기적을 베풀어주실 때, 거의 상대의 믿음을 확인하시곤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 있어야 영생도 얻고 천국도 얻는 것이므로, 병만 단순하게 고쳐주시기 보다는 그 영혼이 구원받고, 영생 천국 얻을 수 있도록 믿음을 갖었을 때, 병도 고쳐주시고, 기적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적을 안 베푸시기도 하시고, 또 오늘 본문과 같이 믿음을 촉발하여,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깐 눈에 침을 발랐을 때, 이 소경은 이 사람이 뭔가를 행하시겠구나, 자기 침까지 발랐으니 장난하는 건 아니겠구나, 내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겠구나 기대를 갖고 소망을 갖고 점차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선한목자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소경에게 원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믿음 갖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 있어야 영생도 얻고, 천국도 얻겠기에,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음 갖기를 진정으로 원하십니다. 병낫고, 축복받는 것은 2차 문제입니다. 먼저는 믿음이 최우선입니다. 또한 믿음이 있어야 기적도 축복도 일어날 수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 기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번
우리는 교회에 나와 축복만 받으려고 하고, 병만 나으려고 하고, 거기에만 관심을 갖지말고, 무엇보다 먼저 내게 믿음이 있는가 살피고, 또 큰 믿음 갖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 살아 역사하신다는 믿음, 그 하나님 전지전능하셔서 무슨 문제든지 풀어주실 수 있다는 믿음, 그 하나님 인간의 생사화복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절대주권의 하나님이시라는 믿음,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주시고 좋은 선물을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 등 큰 믿음으로 단단히 무장하여, 영생 천국도 얻으시고,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기적과 축복을 날마다 경험하는 우리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 24절에 보니, 예수님께서 그 소경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그 소경에게 묻자, 그 소경이 하는 말이,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였습니다. 아마 예수님 주위로 제자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그래서 그 소경은 사람들이 보인다고 예수님께 대답했을 것입니다. 곧이어 그는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본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맹인이었지만, 나무와 사람 사이에 있는 유사점과 차이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나무와 사람은 똑같이 수직으로 서있습니다. 그러나 나무와는 달리, 사람은 걸어 다닙니다. 그러니까 그가 본 것은 나무가 아니라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튼 이제 그는 어느 정도의 시력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눈의 초점이 정확하게 맞추어지지를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깐 사람인지 나무인지 제대로 구별도 못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한번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드디어 눈이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선한목자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두 번 안수하시는 특이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 병자들을 안수할 필요도 없이 그저 말씀만 하셔도 병이 낫고 죽은 자도 살아나는 판인데, 한 병자를 놓고 한번도 아니고 두 번 안수한 경우는 모든 성경 본문중에서 이번 경우가 유일한 경우입니다.
오늘은 어쩐지... 예수님께서 좀 이상합니다.
안수할 필요도 없는데, 정성껏 안수까지 해주며 무엇이 보이는가 물었더니 제우 그 소경이 한다는 말이 “희미하게 뭔가 보이는데 나무같은 것이 걸어다니는 것을 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어째 좀 예수님 답지 못한 모습이 아닌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이 소경을 단번에 고쳐 주시지를 않고 한번 안수를 하여서 희미하게 보이게 한 후에, 다시 한번 더 안수하셔서 비로소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이 그때 당시 좀 모자라지 않았나 그런 신성모독적인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뭔가 예수님의 특별한 의도가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단번에 고쳐주실 수 있었는데, 단계적으로, 점진적으로 그 소경을 고쳐주셨겠습니까 ? 성경이 분명한 답을 주고 있지 않으니, 우리가 정답을 찾을 순 없지만, 추정컨대, 예수님께서 우리들로 무엇인가 교훈해주고 싶은 것이 있으신대, 그것이 뭔가하면, 하나님께서 기적적 치료를 해 주실 때, 단번에 치료해 주실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단계적으로 점진적으로 치료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니깐 인간은 즉흥적이고, 단번에 치료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계적으로 점진적으로 치료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 옛날 어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 후에, 부흥사님이 안수기도를 해 주는데, 걸을 수 없는 어떤 사람이 휠체어를 타고 안수기도를 받았습니다. 부흥사님은 당장에 일어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며 안수해 주었는데, 안수기도가 끝나자, 휠체어를 탄 사람이 어찌해야 할지 모릅니다. 기도한데로 벌떡 일어나서 뚜벅뚜벅 걸어나가야할지, 아니면 휄체어에 앉은체로 그대로 물러가야할지,.. 부흥사님은 부흥사님대로, 또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단번에 치료를 잔뜩 기대하였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못해서, 다 같이 실망하고 또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단번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 본문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이라도, 하나님의 때에 맞춰 단계적으로 점진적으로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보다 앞질러 나가는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단번에 치료, 단번에 기적을 바라니깐 우리가 쉽게 시험에 듭니다.
이거 기도했는데, 왜 단번에 역사가 안 일어나는가, 왜 축복이 안 쏟아지는가 왜 단번에 고쳐지지 않는가 해서, 하나님 안 계신가 보다, 아니면 안수기도하는 목사가 시원치 않는가 보다, 아니면 내가 믿음이 없나 하면서 고민하고 시험들 필요없습니다.
단계적 치료, 점진적 치료, 과정적 치료, 과정적 역사, 과정적 축복이 있음을 아시고, 시험들지 마시고, 조급해 하지 마시고,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하는 우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한번 기도해서 안되면 두 번 기도하시고, 두 번해서 안되면 세 번 네 번 응답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우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안수기도도 한번해서 안되면 두 번 세 번 응답받을 때까지 안수기도도 받으시는 우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 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눈을 뜨게 된 소경을 집으로 돌려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적을 행하신 후, 종종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컨대 마가복음 1장 44절에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후에, 또는 마가복음 5장 43절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후에, 또는 마가복음 7장 36절에서 귀머거리를 고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행하신 일을 마을에 들어가서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지 말라는 그런 뜻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선한목자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체험하고, 보았던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부탁, 경고를 하셨겠습니까 ?
아직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기 이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령 그들이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리더라도,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작 병 고치시는 자, 또는 이적을 행하시는 자 정도로만 여길 것입니다. 그래 수많은 사람들이 병고침을 바라고 기적을 바라고 예수님 주위에 인산인해를 이룰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병고치고 문제를 해결해주는데, 온 시간을 다 빼앗기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고, 또 제자들을 제대로 양육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복음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포함되어야 했습니다. 병고치러 기적을 베풀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음을 부활을 통해 보여주심으로, 그 완전한 복음을 제자들로 온 세상에 전하게 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실 목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과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고 난 후,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다르게 명하셨습니다. 그 때에는 복음의 내용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6장 1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분명히 명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소경에게는 마을에 들어가 소문내지 말라고 명령하셨지만,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그 반대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예수님 소문을 내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이 지역, 이 나라,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마가복음 8장 22절에서 26절 말씀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이 주는 교훈은,
- 첫째로, 벳새다 사람들이 소경을 인도한 것처럼, 우리도 영적인 소경들을 주님앞에 인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자는 교훈입니다.
- 둘째로, 교회에 나와 축복만 받으려고 하고, 병만 나으려고 하고, 거기에만 관심을 갖지말고, 내게 믿음이 있는가 살피고, 또 큰 믿음 갖기를 소원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 셋째로, 예수님 두 번 안수기도한 것을 통하여, 단계적 치료, 점진적 치료, 과정적 치료, 과정적 역사, 과정적 축복이 있음을 깨달아 시험들지 말고, 조급해 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하는 우리가 되자는 교훈입니다.
- 넷째로, 본문에 소경에게는 마을에 들어가 소문내지 말라고 명령하셨지만,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그 반대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예수님 소문을 내고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