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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남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불혹을 지난 이들에 마라톤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20여 년을 일에 시달리고 술에 몸이 골아버린 사람들. 몇 년 후면 50대로, 이미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거나 빠져버린 이들이다. 걷는 것도 싫어하던 그들이다. 1㎞만 돼도 차를 타던 그들이다. 1백m만 뛰어도 숨이 차고 뒷날 다리가 뻐근하다고 호소하던 그들이다. 달리기 보다는 아무래도 골프나 등산, 걷기가 제격인 사람들이다.
이들이 4㎞를 뛴다. 10㎞를 달린다. 20㎞를 내달린다. 그리고 42.195㎞를 정복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곰곰 계산해 보면 살날보다 산 날이 더 많은 사람들이다. 흘러가는 세월에 대항하기에는 어찌 보면 나약한 육신들이다.
그들이 요즘 대체 왜 달리는 것일까?
무엇을 바라고 하는 것일까. 뒤늦게 기록에 도전이라도 하자는 것일까.
지난 6월말부터 경남 진주 남강변을 달리고 있는 김재훈씨(진주한의원 원장)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하프 코스를 완주하고 다음달 1일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한다.
"40년을 넘게 살면서 너무 게으르고 나태해졌다. 나 자신을 추스르고 싶어서다. 한번쯤 지나온 삶을 되짚어보고 나아갈 길을 정리하고 싶어서다."
바로 그것이다.
세상이 이들을 달리게 만든 것이다. 세파에 더 이상 찌들고 싶지 않다는 하나의 선언이다. 이제는 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소리 없는 절규일지도 모른다.
마라톤 바람은 IMF 때 불었다. 회사에서 집으로 내몰린, 집에서 거리로 나선 실직자들은 공허했다. 갈 데가 없었다. 어디를 가도 반겨주는 이도 없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심각한 것은 무너지는 자아였다. 자신감마저 상실한 지쳐버린 내심이었다. 우선 나를 살려야 했다. 뭔가 할 수 있다는 기력이 필요했다.
이들은 그래서 도전한 것이다. 범인(凡人)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41.195`를 극복하면 다시 설 수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믿음이었다. 혹독한 IMF의 세월은 갔다. 그러나 그 여운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40대 남자들에 남겨진 잿빛 그늘이다.
직장 하나만을 믿고 혼신을 다해온 그들이다. 열심히 일만 하면 내 자식 대학까지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해 온 그들이다. 밤에 술을 마시는 것도 일이라고 생각한 그들이다. 가정보다 회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온 그들이다.
하지만 요즘 이들의 마음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직장에서 이들을 보는 눈은 달라졌다. 명분만 있으면 떨쳐 내려 안달이다. 임원 되기는 하늘의 별따기요, 임원이 돼도 자리는 여전히 불안하다. `조퇴`니 `명퇴`니 해서 하나둘 자리를 비우는 주변 사람들은 보면서 쓴 소주잔을 기울여야 하는 그들이다. `사오정`은 그들에게 있어서 `45세가 정년`임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통한다.
이래선 안 된다. 다시 벌떡 일어서야 한다. 더 이상 중늙은이 취급은 싫다.
40대 남자들은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우선 필요했다. 뭐든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했다. 뭔가 지금까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온 것을 목표로 잡고 이겨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마라톤은 그래서 선택한 것이다. `내가 마라톤을 완주하면 예전처럼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뛰는 40대들은 이렇게 믿고 있다.
다시 한번 생존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무능한 늙은 40대가 아니라 자신 있는 장년으로 거듭 나고자 하는 것이다.
앞날이야 어찌되든 내 자신의 건강부터 챙겨야겠다는 생각도 이들을 달리게 하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몸 이곳저곳에 붙어버린 술살. 불룩 나온 배. 이부터 떨쳐내고자 하는 것이다.
가족들이 우선 이들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회사의 충성스런 일꾼이 아니라 `내 남자`로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마라톤은 술과 담배도 멀리하게 해준다. 풀코스든 하프코스든 완주하려면 컨디션을 조절해야 하고 그러자면 술자리를 되도록 멀리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