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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의 여인 2
"이 아그덜이 선비님들 침상을 준비했그만이라.
잡수신 음식도 다 야들 손이 간 것이고라.
안즉시집도 못 간 불쌍한 것들인디,
해사 여인네는
타지에서도 안 받아주는 것을 어쩌것소이.
시집만갔다 허먼 서방을 잡아묵는다고
소문이 나갖고안그러요.
암 것도 바라는 것 없그만요. 다만 씨나 좀받자는 것이제.
마침 사날 전에 달거리를 마친아그들이라
씨 받기에 좋은 때고…"
주모는 청승맞은 얼굴로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말을 막지 않으면 밤새도록이라도 하소연할 기세였다.
박지화가 낭패한 기색으로 지함을 돌아보았다.
"알았으니 그만 하시오.
예서 잠깐 기다리시오."
지함은 박지화와 함께 마당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있는
사랑채로 달려갔다.
화담이 동네를 한 바퀴 돌고돌아와 있었다.
"선생님. 잠시 뵙겠습니다."
곧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가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놀라운 얘기였을 텐데
화담의 표정에는 전혀 동요가없었다.
"그러니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두 사람 다 그렇게 눈썰미가 없는가?
남정네도없는데 아이들은 어디서 생겼겠는가?"
지함은 더 들어볼 것도 없이 화담의 생각을 알 수있었다.
"내가 한 오년 전에 이곳을 다녀간 적이 있었다네.
그때나 지금이나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자네들은 알게 될 걸세.
사내 대장부 하는 일이
일마다 다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닐세.
물러들 가보게."
지함도 박지화도 다시 한번 놀랐다.
화담은 벌써 이 마을의 풍속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강진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일부러 이쪽 해사마을로 들어선 것은 아닐까?
두 사람은 이런의구심까지 들었다.
게다가 벌써 다녀간 적이 있었다니
지함으로서는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려고이런 곳,
이런 기이한 인연 속으로
제자들을 이끄는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화담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돌아앉아 좌정에들었다.
후원으로 물러나오면서 박지화가 투덜거렸다.
"우리 보고 어쩌라는 말인지 알 수가 없구만.
도대체 다 알고 계시면서
왜 이런 마을로 우릴데려오셨단 말인가?"
"우리 생각대로 하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자네는 선생님 말씀을 그렇게 받아들였나?
난 그와정반대로 생각했네만."
"스승님 뜻이 따로 있겠지요.
이 동네 내력을 이미알고 계셨다면
저희더러 그 뜻을 읽어내란 말씀이시겠지요."
"그럼, 자네는 저 여인들을 받아들이겠단 말인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지함이 단호하게 말했다.
"예. 저는 받아들이겠습니다.
사람의 처지가 범절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람의 처지를 돌보지 않는범절이
어찌 범절이겠습니까?"
"하긴, 듣고 보니 그 말도 맞긴 하네.
해사 여인들처지가 안 되긴 안 됐네. 하지만..."
박지화는 아직도 마음을 굳히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이 많고 따뜻한 사람인지라,
딱한 운명에매여 있는 여인을
매정히 내치지는 않을 것이분명했다.
지함은 고민하는 박지화를 남겨 두고 먼저 성큼걸음을 옮겼다.
지함이 방으로 들어서자 잠시 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지함은 잠시 날짜를 짚어보았다.
"오월 스무하루.
여자를 만나게 되어 있구만."
화담이 일부러 해사 마을로 인도하지 않았어도
이미예정되어 있는 일이었다.
"내 인연, 내가 받을 운명이라면 내 스스로뛰어들리라."
방문이 열리면서 한 처녀가 조심스레 들어섰다.
소매깃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등 뒤에서 주모가문을 닫아 주고는
도둑 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사라졌다.
처녀의 볼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지함은 찬찬히 처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선이굵고 분명했다
콧등이 오똑하게 일어서서
제법고집이 셀 것 같은 인상이었다.
내리뜨고 있는 눈동자가 방 안 분위기를 엿보는 것인지
살짝 들릴때마다 검은 눈동자가 고혹적으로 빛났다.
이것도 업인가?
몇 날 밤 같이 지내지도 못한 부인을 제외하고는
지함이 가까이 겪은 여자마다비슷한 인상이었다.
영원히 지함의 가슴 속에 묻혀있을 민이도,
기생 선화도,
지금 눈 앞에 있는 이여인도 모두 비슷비슷했다.
민이… 세상이란 참으로 가혹하다.
민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그 긴 손가락에입맞추고
광대뼈가 보기 좋을 만치 불거진 뺨에
얼마나 볼을 부비고 싶었던가.
그러나 살내음 한번 제대로 맡아보지 못했는데,
민이는 운명에 밀려 지함의 곁을 떠나가고 말았다.
그런데 꿈도 꾸지 않았던 이 낯선 여인이
자신의처녀를 바치기 위해
지함의 앞에 다소곳이 서 있는것이다.
"후우."
지함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민이의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돌탑을쌓으면서 잊고 또 잊고,
버리고 또 버렸건만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그 진한 그리움을 화담이알아차린 것일까.
"저, 절 받으시옵소서."
떨리는 처녀의 음성에 지함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절…?"
그러는 사이에 처녀는 공손한 자태로 큰절을올렸다.
처녀는 다리를 모으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입술을깨물면서 가만히 서 있었다.
한참 만에야 지함은
처녀가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마을의 오랜 풍습에 따라
제 발로 남자를 찾아온여자이긴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단 한번도 남자를 겪지못한
처녀의 수줍음이 엿보였다.
"앉으시오."
그제사 처녀는 자리에 앉았다.
첫날 밤을 맞은새색시처럼 지함을 등지고.
그게 무슨 뜻인지 지함은 한참 생각했다.
별로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은
자신의 첫날 밤을기억하고서야
비로소 지함은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이 처녀에게는 이 밤이 혼인인 것이다.
그래서신부가 하듯이 몸단장을 하고
절을 올린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지함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다.
처녀의 어깨가 잔잔하게들먹거리더니
숨죽인 흐느낌이 들렸다.
처녀는오래도록 그렇게 흐느끼며 앉아 있었다.
지함은 그녀가 제 풀에 지칠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그런 슬픔은 남의 위로로 가시지 않는다는 것을
지함은 잘 알고 있었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제대로 예도 갖추지 못하고
길 가는 나그네와 첫 밤을 보내야 하는 운명이…
이 눈물이 이 처녀와 이 마을에 내린
서러운 운명을걷어가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처녀의순결한 눈물로도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세상이란그런 것이다.
희망한다고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이미 고통은 더이상 고통이 아니리라.
얼마나 지났을까?
그야말로 장구한 세월이 흐른듯했다.
별빛도 오랜 어둠에 지쳐 졸고 있을 만한 시간,
차츰 처녀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싫으시면 그냥 주무셔도 됩니다.
소녀, 이대로있겠습니다."
자기 운명에 대한 마지막 반항일까?
민이도 그랬다.
자기 운명 앞에서 절대로 무릎 꿇지않았다.
스스로 죽음을 택할지언정.
"뭐라 부르오?"
"이름은 알아 무엇하시겠습니까?
하룻밤 바람처럼스쳐가는 인연인 걸요."
처녀는 의외로 꼿꼿했다.
말을 받아치는 것이
민이의 당돌한 성품 그대로였다.
"그 말은 맞소만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것이라오
난 떠밀려 인연을 맺고 싶진 않소. 말해보시오."
처녀는 잠시 망설였다.
"희수라고 부릅니다.
기쁠 희(喜)에 빼어날수(秀)이옵니다.
"선비님 함자를 여쭈어도되겠습니까?"
"이지함이라 하오. 고향은 홍성현이오.
처자의성씨는 무엇이오?"
"본 성씨는 모르옵니다.
어머니의 성이 강씨라
어머니를 따르옵니다."
본 성씨를 모른다?
그녀의 어머니도 그녀처럼
지나가는 사내에게서 아이를 받았는가?
"희.수. 예쁜 이름이오.
이곳 풍습이 그러하여
부지불식간에 한방에 앉아 있기는 하더라도
이름은알고 싶었소
나이는 몇이오?"
"올해 열일곱이옵니다.
얼마 전 생일을 지났습니다.
단옷날이 제 생일이지요."
지함은 눈을 감고 희수의 사주를 떠올렸다.
열일곱, 오월 오일.
"태어난 시는?"
"사주를 보시옵니까?"
"그저 알고 싶을 뿐이오."
"이른 새벽닭이 울었다 하옵니다."
지함은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희수의 사주와자신의 사주까지 짚어보는 중이었다.
어린 처녀라 금세 슬픔을 잊었는가,
희수는 조금전의 부끄러움과 눈물까지 잊고
신기한 듯 지함을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戊辰 戊午 戊戌 甲寅
선친과는 인연이 박한 사주였다.
가족이 구성조차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남편도 둘 수 없는 데다가
남자의 손을 타지 못하는 고독한 운수를 타고 났다.
거기에 떠돌이 기운이 있어 한 곳에 오래 머물지못하는
방랑기까지 있었다.
화담처럼 처녀의 전생까지 볼 수 있다면 얼마나좋을까.
지함은 무슨 영문으로 이렇게 만나야 하는지
먼사연이 궁금했지만,
아직 전생까지는 꿰뚫어볼 수가없었다.
"그대는 아들을 낳고 싶소, 딸을 낳고 싶소?"
지함의 엉뚱한 질문에 희수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이내 또렷하게 대답했다.
"아들이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아들을 별로좋아하지 않아요.
이 마을에 있으면 어차피 죽을 테고
그렇지 않으면 어미의 품을 떠나야 하니까요.
하지만저는 딸은 싫어요.
저처럼 사는 것보담야 비록 부모그늘을 떠나 살더라도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는 편이낫죠.
거렁뱅이 신세가 되더라도…"
제법 다부진 말이었다.
지함은 희수의 똘망똘망한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더 아팠다.
땅의 음기가 성해 견디지 못하는 남자들이야
땅을떠나면 되지만,
이곳 여인네들은 다른 지방 어디서도
받아주지를 않아 마을을 뜰 수도 없는 신세였다.
그래서 이 불쌍한 해사 마을의 처녀들은
오로지평생에 한번 하룻밤 인연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대를 이으며
불행한 운명을 지고살아가는 것이었다.
단 한번의 교접으로 아이를잉태할 뿐,
남녀간의 애틋한 정도,
음양 화합의기쁨도 모르는 채.
지함은 떨리는 손으로
희수의 옷고름을 잡아당겼다.
솜씨 좋은 아낙이 맨 듯 고름은 수월하게 풀렸다
단 한번도 사내의 눈길이 닿지 않은
순결하고 희디흰가슴이 드러났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가슴은 탐욕의대상이 아니었다.
새로 태어날 아이의 편안한휴식처일 뿐.
인간으로서 운명을 어찌할 수 없다면,
이들에게 잉태란 가장 소중한 삶의 과정이리라.
지함은 부드러운 치맛자락을 따라 허리를감아들었다.
희수가 스스로 허리띠를 풀었다.
대담한것까지 어쩌면 그렇게 민이를 닮았는가.
지함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가
민이가아닌가 하고
몇 번이나 희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지함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끝없이 따라붙는
민이의 상을 떨쳐버렸다.
이 여자는 민이가 아니다.
희수다. 민이가 아니다.
희수는 슬며시 몸을 비틀어 남은 허물을 마저벗었다.
등이 고왔다.
미끈하게 뻗어내린 등이 곱게흘러내려
우아한 엉덩이로 이어졌다.
까만 머리칼사이로 드러난 귓볼은 도톰하고
똑 떨어질 듯매끈했다.
그 아래로 불그스레한 홍조가 입술께까지번져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대하는 여체였다.
그러나 지함에게는
지난 날과 같은 색에 대한 탐이 사라지고 없었다.
단지 잉태를 위하여, 대를 잇기 위하여
두 사람은정성스런 마음으로 서로의 몸으로 다가섰다.
멀리서 첫 닭이 울었다.
토실한 어깨를 이불 밖으로내놓고 잠들어 있던 희수가
닭소리에 몸을 벌떡일으켰다.
지함은 짐짓 잠든 체 하며 미동도 않고 눈을 감고있었다.
사그락거리며 옷 입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옷을 다 입은 희수는 슬픈 눈으로 지함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눈에 맑은 눈물이 차올랐다.
일생 단 한번의 남자, 단 한번의 인연.
그러나 그남자는 잠시 후에 떠나버릴 것이다.
언제 다시 보자는약조도 없이.
지함은 더 이상 그대로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반듯이 앉았다.
뭔가 이별사를 하지않고는 그 자신이 견딜 수 없었다.
"원대로 아들을 낳게 될 것이오.
아들을 낳거든규철(圭澈)이라 부르시오.
'맑은 물가에 홀로 서있다'는 뜻이오."
희수가 맥없이 지함의 품으로 무너졌다.
누가 아이의 성을 묻거든 이 씨라고 하시오."
지함의 다음 말에 희수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가냘픈 어깨가 들먹였다.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는 없으나
당신을 잊지는 않겠소."
지함은 큰손으로 희수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아니,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왜 이렇게 마주앉아 있겠소?"
지함은 자신의 말을 확신할 수 없었다.
단지 희수를 위로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좀체 눈물을 그치지 않던 희수는
얼마 후 눈물을깨끗이 닦아내고 살며시 일어섰다.
그리고 지함에게공손히 큰절을 올렸다.
희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미처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쌀쌀한 새벽 바람이
새들어 왔다.
희수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마당을 빠져 나갔다.
그것이 희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첫댓글 오늘도 즐독했습니다 ~~~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