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 ‘09.9.13(일) 날씨 맑고, 아침은 선선 낮은 더움
산행지역 : 충남 공주시 탄천면, 부여군 초촌면, 부여읍
진행경로 : 진고개-가자티고개-청마산성-금성산-부소산-구드래나루
도상거리 및 산행시간 : 18km 7시간
산행시간표
지점 통행시간
진고개 출발 09:30
가자티고개 11:00
금성산 14:50
부소산 16:00
구드래나루 16:30
노을 지는 백마강
■금남정맥 피날레
서늘한 바람이 나무 잎새를 흔들고, 산이 우릴 부른다. 높아만 가는 하늘아래 바야흐로
산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오늘은 진고개에서 가자티고개-청마산성-금성산을 지나 부여
시내를 관통하여 부소산에 이른 다음 구드래나루터에서 그 맥을 다하는 금남정맥의 마
무리 구간이다.
이 구간 산줄기의 고도는 100-200여m 내외의 나지막한 산등성이를 넘나드는 것이어서
산행이라기보다는 백제의 옛 터를 산책하는 것과 같은 길이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 젖듯
이 자잘한 봉우리도 여러 개 넘다보니 그리 호락호락하지 만은 않았다. 이 구간은 백제
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부여의 옛 향기를 맡으면서 정맥종주를 마무리 한다는 데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백마강 향한 진고개 출발
「백마강 흘러흘러 700년 역사도 흘러가고
고란사에 종소리는 누가 치기에
꽃 없는 낙화암에 저녁노을 섧기도 하구나
무너진 부여성에 그 전설을 안다면은
길손은 시 한 수를 읊고 가리라...」
주옥같은 옛노래 ‘꿈꾸는 백마강’ 대사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저 세상으로 갔지만 노래
는 남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700년 사직을 외세의 말발굽에 짓밟힌 한 서린 백제
의 고도 부여를 향해 진고개에서 첫발을 내딛었다. 백제를 떠올리면서 왜인지 애잔한 생
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낙화암의 슬픈 전설 때문일까, 장렬한 최후의 계백장군 때문일까...
들머리 진고개
■진고개에서 가자티고개로
645번 지방도 씨멘트 옹벽을 넘어 참나무지대를 통과하니 우측으로 밤나무단지가 나온
다. 밤이 탐스럽게 달려있다. 바닥에도 알밤이 널리고.. 가다말고 알밤 줍기 바쁘다.
지금 주어 담으면 7시간여가 짐이 되니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도 맘같이 않게 허리를 굽
히게 된다. 예부터 밤 하면 공주 밤이 아니던가! 좌측 숲으로 들어 잡목 능선을 헤쳐 나
가면 시멘트포장도로가 지나는 감나무골 안부로 내려선다.
다시 뒤엉킨 넝쿨과 잡목 숲을 헤치며 봉우리를 오르내리면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가자티고개다. 진고개 출발한지 1시간 반 만이다. 절개지 사면의 낙석방지 철구조물을
넘어야 도로로 내려선다. 철망 윗부분을 잡고 뒤로 돌면서 가재처럼 뒷걸음질 치는 요령
을 즉석에서 터득해 잘들 넘는다. 유격훈련의 한 장면 같다. 걱정하던 수냐님도 거뜬히
넘으면서 “별게 아니야”하며 자신감을 드러낸다. 보는 이가 없어 망정이지 숙녀 체면이
말이 아니지만 그러나 정맥하려면 때론 ‘전사의 용맹’도 발휘해야 한다. 도로는 교통량이
거의 없어 한적했다.
가자티를 향하여
가자티고개
가자티고개 철망넘기
■가자티고개-4번국도의 지루한 구간
잡목과 덤불숲을 헤치고 오른 봉우리가 됨봉(160.4m)이다. 가자티고개에서 됨봉-신앙
고개-182.9봉-조석산-청마산성-154.8봉-체마소고개-4번국도(석목고개)로 이어지는 마
루금은 비산비야 지대로 시야도 없어 지루하다. 신앙고개 지나 능선마루 오르면 우측으
로 청색지붕의 축사가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벌목구간으로 시야가 확 트여 파란지
붕이 돋보인다.
청색지붕 축사
이어지는 능선 따라 서진하면 사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둘레 6.5km의 사비성 외곽산성
청마산성 설명판을 만난다. 석축이 무너져 내려 풀숲 속에 딩굴고 있는 돌들이 무질서
하다. 부여 땅으로 접어들면서 마루금이 잘 정비되어 진행에 속도가 붙는다. 그러나 기
온 오르고 걸음이 누적되니 속도가 더뎌진다. 더디면 어떠랴. 사람마다 산을 보고 대하
는 감정이 다르다. 산은 누가 빨리 가는지 경쟁의 대상도 아니고, 한판 승부를 걸어야
하는 목적지도 아니다. 산을 오르거나 바라보며 산과 동화되고 나를 돌아보는 기회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사비성 장대지에는 쭉쭉 곧은 소나무가 서있다. 소나무 그늘에 대리석의자가 있어 간식
들며 잠시 쉬어간다. 더운 날, 대리석은 촉감이 시원해서 좋다. 버섯단지 지나니 부여-논
산간 4번국도상 LPG충전소에 이르렀다. 충전소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콸콸 쏟아졌다. 마
시고 채우고, 프라스틱 대형통에 피어있는 연꽃을 디카에 담고 국도를 횡단했다.
LPG 충전소
충전소 연꽃
■백제의 향기 고도 부여 산책 ♣금성산 統帥臺
도로 건너 금성산 오르는 초입은 통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산 정상에는 단청된 정
자가 우뚝한데 통수대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2층으로 올라가니 부여시내가 사방으로 잘
보이고 바람도 시원하다. 벽에 붙은 건립기에 ‘이 산 정상에 백제전역의 각 산성들을 지
휘 통수하던 통수대가 있었는데 허물어져 안타깝게 여기던 중 뜻있는 향토인들이 이를
복원했다’는 요지였다.
통나무 계단
통수대
통수대를 내려가 큰 길을 따라가면 길 왼쪽에 ‘노인 없는 정자’인지, ‘늙음 없는 정자’인
지가 아리송한 ‘無老亭’이라는 정자를 만난다. 벽에는 시 한 수가 걸려 있다.
『無老亭에 오르니 白馬江이 굽이치고
눈앞에 宮南池는 옛 百濟武王의 정이 그리네
떠가는 저 구름은 百濟의 恨인가
지는 해에 산비둘기 옛 가지에 찾아드네』
무노정 우측 도로를 가로질러 숲길로 들어선다. 채마밭도 지나고 쪽문으로 빠져 나오니
부여새로남교회 앞이다. 이 교회 앞 도로를 따라 직진해서 시내를 관통했다. 부여도서관
좌측 도로 따라 부여여고 교정을 통과해 부소산으로 올랐다.
금성산의 물봉선
♣부소산과 부소산성
부소산(106m)은 부여의 진산이다. 산이라기보다 동산 같다. 부소(扶蘇)란 백제시대의
언어로 소나무(松)의 뜻이 있어 "소나무가 많은 산"이란 뜻이라고 한다. 부소산성은 부여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휘어 감으며 흐르는 백마강에 접해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축조한 산성이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한강 위례성(서울)에 터를 잡았다. 그러나 남하하
는 고구려의 세력에 밀려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538년 다시 사비(부여)
로 천도하여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국도를 수호한 중심산성이었다.
백마정 앞 천년송
♣사자루
사자루는 부소산 정상에 있는 누각이다. 주위 경관과 사위조망이 뛰어나 백제시대에는
부소산성의 망대역할을 했다. 왕궁의 후원으로 임금께서 정사에 지친 피로를 풀기 위해
비빈, 궁녀들과 연악(宴樂)을 베풀며 영월대(迎月臺)의 달맞이와 지는 달을 바라보며 정
사구상과 마음의 여유를 찾던 송월대지(送月臺址)로 전해오는 곳인데, 1919년 임천면의
개산루(皆山樓)를 이곳에 옮겨 지으면서 사자루라 했다고 한다.
사자루
♣군창지
부소산성 동남쪽에 있는 창고터로 곡물을 저장하는 창고지만 유사시에 필요한 피난시
설이기도 했다고 한다. 내 어렸을 적 이곳으로 수학여행 와 불에 탄 쌀을 땅속에서 파내
며 신기해했던 기억이 새롭다.
군창지
♣애절한 사연 깃든 낙화암
낙화암에 이르니 ‘꿈꾸는 박마강’ 노래가 나그네의 귓전을 울린다. 서리서리 서린 백제
멸망의 한은 전설이나 시 등을 통해 우리에게 구구절절이 전해지고 있는데, 백제에 대한
통한과 그리움은 가슴을 찢는 애절함이 있다.
낙화암은 ‘660년 백제가 무너지던 날 3천여 명의 백제 여인들이 충절과 굳은 절개를 지
키기 위해 백마강에 꽃처럼 몸을 날린 곳’, 낙화암 절벽이 붉은 것은 당시 백제여인들이
흘린 피가 물들어 그렇다는 것이다. 기이한 바위 위에는 백화정(百花亭) 현판이 걸린 정
자가 있다. 백화정은 죽은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9년 당시 부여군수(洪漢
杓)가 세운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화정
낙화암의 애절한 사연을 뒤로하고 아래로 내려가면 백마강가에 고란사가 자리하고 있다.
낙화암 절벽에 자라는 고란초에서 유래해 절 이름을 고란사로 했다한다. 삼천궁녀의 원혼
을 달래기 위해 지은 절이다. 사찰의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절 뒤편에는 한 잔 마시면 3년
씩 젊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자비의 고란약수가 나그네의 발길을 잡는다. 약수 앞 바
위벽에는 고란초에 유리관을 씌워 보호하고 있었다.
약수물에 목을 축이고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선착장으로 내려가 서쪽 아래에 있는 구드
래나루까지 통통배로 이동했다. 백마강에서 바라보는 낙화암과 고란사 풍경이 석양의 노
을과 함께 처연한 감회에 젖게 했다.
고란사
낙화암 절벽에서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고란초
백마강 위에 떠 있는 듯한 고란사
♣역사가 흐르는 백마강
금남호남정맥 신무산 자락의 원수분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이곳까지 장장 천 여리
를 흘러와 서해로 합류한다. 갈대꽃이 흩날리는 흰 모래 백마강변은 추파의 장관을 연출
하고 있었다. 국토의 젖줄인 4대강의 하나로 비단결 같은 강물이 흐른다하여 금강이라
하지만, 이곳 부여에 이르러 백마강으로 불린다. 백제시대의 중요한 국사를 결정했다는
규암면 호암리 천정대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16km 구간이다. 백마강은 중국·일본과
교역로 역할을 하였고, 찬란한 문화를 교류했던 역사가 흐르는 강이다.
백마강에 솟은 작은 바위가 조룡대다. 다 아는 애기지만 이곳에 얽힌 전설을 요약해 본
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끄는 군사들이 부소산성을 공격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백마강
을 거슬러 올라오는데 갑자기 강물이 요동치며 풍랑이 심하게 일어서 더 나아갈 수가 없
었다. 이는 백제의 선왕(先王)이 용(龍)으로 환생하여 백마강에서 백제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정방은 용이 백마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애마인 백마의 목을 쳐 조룡대에서
백마의 머리를 낚시 밥으로 하여 용을 낚아 당나라 군사들은 무사히 강을 건넜고 부소산
성이 함락되어 백제는 멸망했다. 그 때 소정방이 낚시로 용을 낚은 곳을 조룡대(釣龍臺)
라하고, 백마를 낚시 밥으로 던졌다고 해서 이 강을 백마강(白馬江)이라고 한다.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
조룡대
이외에도 곳곳에 산재한 많은 유적지와 정맥에서는 벗어나지만 부여 흥망을 한자리에
서 바라본 정림사지 5층석탑, 백제 무왕인 서동의 탄생 설화가 전해오는 궁남지, 백제
왕족의 무덤인 백제왕릉원, 국립부여박물관 등 많은 문화유산을 만나보지 못한 것이 못
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부여는 공주와 함께 백제문화의 흔적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부여는 완성된
백제의 문화모습을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백제 패망의 아픔도 고스란히 전해 준다.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儉而不陋 華而不侈)는 백제문화
의 진수를 맘껏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만들 것을 다짐해 본다.
■정맥의 끝 구드래나루
고란사 선착장에서 육로가 아니라 물길로 구드레나루터에 도착했다. 구드래나루의 ‘구드
래’는 일본어의 大國, 큰 나라, 섬기는 나라라는 뜻이면서 동시에 백제를 뜻하는 말로 쓰
였다고 한다. 굿들개가 변해서 된 말로 굿들개란 천지신명께 제사를 모시던 곳이라 한다.
구드래나루터
■완주 기념식
가을 양광이 내려쬐는 구드래 벌판에서 화기애애한 가운데 치러진 완주기념식, 우수
회원에게 증정하는 기념패를 주고받는 정경들이 아름답다. 박영규님은 패를 받고 소년
처럼 좋아하시던데 무슨 패를 받았을까.. 아무튼 앞으로도 산과 더불어 좋은 일 많이 있
길 바란다.
■산경표 금남정맥 오류 논란
금남정맥의 시종점 백마강변 구드래나루는 금강 남쪽의 완전한 울타리가 아님이 현실
이다. 이런 이유로 운장산을 지나 왕사봉에서 남당산-까치봉-천호봉-미력산을 지나 군
산포구에서 맥을 다하는 금강정맥이라는 산줄기를 금강의 온전한 남쪽 울타리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눈길을 끄는 까닭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산악 애호가 강승기씨의 견해는
우리가 답사한 마루금이 금남정맥이어야 한다는 신념이 확고하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
이 밝히고 있다.
『금남정맥에 대한 산경표 오류 여부에 대한 논란은 현재의 지형을 근거로 하여 판단한
견해일 뿐, 수백 년 전(적어도 산경표가 만들어진 시기)의 지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잘
못된 판단이라고 여겨진다.
백제(百濟)시대 때, 왜(倭, 일본) 등을 왕래하는 배(외항선)가 부여읍의 구드래나루를
이용하였고, 지금도 부여읍 금강 가 들판을 대왕펄, 그 일대를 '왕포리(旺浦里)'라고 부
르고 있는 것은 옛날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고, 이곳이 포구(항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삼국사기 무왕(武王) 37년 조에는 ‘8월에 망해루(望海樓)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
었다’는 기록이 있고, 의자왕(義慈王) 15년 조에는 ‘2월에 태자궁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
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백제의 사비성 바로
가까이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본다.
또한 충남 논산시 강경읍이 수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상항(商港)으로 성시를 이루었었
다는 것은 지금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으며, 금강 가에 위치해 있는 부여
군 임천면 등은 갈수기에 바닷물이 역류하여 이로 인한 염분 때문에 농사를 망치는 경우
가 많았던 것도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다.
산경표(山經表)가 만들어진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토사가 쌓여서 금강하구가
부여에서 강경으로, 강경에서 다시 지금의 전북 군산시 성산면 성덕리 '요동산' 부근으
로 내려온 것일 뿐, 계룡산과 대둔산 등 명산과 백제의 도읍지 부소산 등을 금남정맥에
포함시키기 위해 선조들이 임의로 오류(誤謬)를 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
다. 그러므로 산경표(山經表)의 내용을 불신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산경표(山經表)는 우리 민족 전래의 소중한 지리지(地理誌)다. 옛날 그 열악한 여건하
에서도 우리나라 산줄기를 이 만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선조들이 존경스럽고, 산
경표(山經表)가 너무 자랑스럽다.』
정맥의 야생화
■금남정맥 마치며
금남정맥... 거리는 짧지만 운장산, 대둔산, 계룡산과 같은 걸출한 명산이 도열해 있고,
백제의 얼이 서린 부소산과 고도 부여 일원에 산재한 역사적인 유물을 간직한 정맥으로
서, 산경표적 지리개념을 떠나서도 답사할 값어치가 큰 곳이라 하겠다.
금남정맥 종주는 끝났다. 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봉우리 한두 개 있
는 단독 산, 즉 점의 산행은 정맥꾼들에겐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래서 또 다른 정맥을 찾
아 나서야 한다. 회자정리!! 이제 아쉬움을 안은 채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 할 시간이다.
그간 고락같이 한 금남의 동지들이여! 짧은 만남이었지만 긴 우정으로 이어지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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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금남정맥을 끝으로 올올과 헤어진다는 소식을 들으니 넘 아쉬움이 남는군요. 오랜만에 이웃사촌 산 매니아 선배님을 만나 좋아했는데,,, 암튼 남은 정맥산행 안전산행 하시고 건강하십시요. 글고 올올산악회 멋진산행 있을때 참석해 주시고 올카페에도 좋은소식 들려 주세요.






많은 시간 같이 하진 못했지만 대원군님은 올올의 보배였습니다. 앞날에 산과 더불어 좋은 일 많이 있길 바랍니다.
운해 선배님 이제 낙남 한 맥길 남겨두셨네요..천천히 내년 기회를 보시다가..내년 가을 저와함께 낙동의 끝 몰운대와 김해 낙동마을을 이어보시죠..ㅎㅎ 금남길 무사히 마치심을 축하드립니다..조만간 대림동에서 얼굴 뵙고 인사드리겠읍니다.
배형과 함께 했던 호남정맥이 꿈길이었습니다. 그 추억 늘 감미롭게 반추하고 있습니다. 불원 잔 한 번 부딛칩시다. 하하~
함께한 산행 참 즐거웠습니다,~~산행후에 운해님에 산행후기가 많은 도움이 되고 많이 배웠는데 앞으로는 이런 글을 읽을 수가 없는 건가요? ~~
너무나 짧은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함께했던 산행추억 오래 간직하겠습니다. 건강과 행운을 빕니다.
운해님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