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한국통사』: 다시 찾는 7,000년 우리 역사
서설(序說): 국사(國史)를 보는 눈
1. 현행 국사 인식의 문제점
이 나라 학생들은 국사를 암기과목으로 여긴다. 한마디로 비극이다. 국사가 암기과목이 된 이유는 서론과 본론, 결론이 다르기 때문이다. 서론은 마치 대한민국의 자주적인 서술인 것처럼 표방했지만 본론과 결론에 가면 아직도 중화 사대주의와 친일 식민사학 관점이 수두룩하다. 앞뒤가 다르니 따지지 말고 외워야 점수를 딸 수 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역사학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봐야 한다. 더불어 북한 역사학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봐야 종합적 판단에 이를 수 있다. 1970년대부터 2000년까지 공무원 수험생들의 필독서였던 이기백의《한국사신론新論》은 한국의 역사학을 ①민족주의사학 ②유물사관 ③실증사학의 세 학파로 분류했다. 그런데 전 세계에서 실증사학을 학파로 분류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역사에서 사료적 근거를 중시하는 실증은 역사의 방법론이지 그 자체로 학파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기백은 실증주의 사학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이에 대해서 실증사학은 한국사의 발전을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이에 맞추어서 보는 것에 반대하였다. 오히려 실증적인 태도로 객관적인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함으로써 한국사의 올바른 이해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기백, 《한국사신론新論(2003년 판)》
'실증, 객관, 정확, 올바른 이해' 등의 용어를 사용했지만 앞뒤 모순되는 단어의 나열에 불과하다. 이기백의 스승으로서 국사학계(?)의 태두로 불렸던 이병도는 이렇게 서술했다.
"역사를 새롭게 고찰한다고 객관을 몰각한 주관이거나 어느 한 편벽한 사관에 치우치거나 또는 사실을 고립적 표본으로 고찰한다면 그건은 잘못이다. 항상 객관을 토대로 삼아 시야를 넓히고 다각적으로, 또 종적縱的(시간)ㆍ횡적橫的(공간)ㆍ심적心的ㆍ물적物的인 관련 아래 공정하게 고찰하여야 한다."
이병도,《한국사대관大觀》, 1983
이기백.이병도가 함께 강조하는 것은 '객관'이다. 그것도 '어떤 선입견'에 대한 반대나 '편벽된 사관'에 대한 자신들의 주관적 비판을 객관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왜 그런가? 이병도는 같은 책에서 중국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수도 자리에 세웠다는 낙랑군樂浪郡 조선현에 대해서 "낙랑의 수부首府(지금의 대동강 남안의 토성리 일대)는 마치 한漢의 Alexandria(알렉산드리아)라고 말할 수 있었다"라고 썼다.
이 글에서 이병도는 두 가지 사실을 적시했다. 하나는 낙랑군을 다스리던 치소治所가 지금의 대동강 남안南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낙랑군이 고대 알렉산드리아처럼 번성했다는 것이다. 이기백도 위의 책에서 낙랑군의 위치를 대동강으로 적시하고, 한나라의 한사군漢四郡에 대해 "한漢의 식민정책은 심한 정치적 압박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비교적 관대한 정치적 자유를 고조선인은 누리고 있었다고 생각된다"라고 썼다.
두 학자 모두 낙랑군은 지금의 대동강(평양)에 있었고, 그 식민지는 대단히 번성했다고 썼다. 이 두 가지 사실은 '객관'일 수 있을까? 지극히 주관적인 뿐만 아니라 한나라 식민지인 낙랑군이 마치 지상낙원인 것처럼 써놓은 것은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한국인은 외국의 식민지배를 받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조선총독부의 관점과 다를바 없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조선상고사》에서 낙랑군은 요동遼東에 있었다고 달리 말했고, 역사학자를 겸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도 모두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또는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일대라고 말했다. 신채호는 "근일 일인日人이..." 운운하면서 낙랑군이 대동강 남안에 있었다는 논리를 비판했다. 따라서 이병도.이기백의 논리는 조선총독부의 일방적 주장을 '객관'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실증으로 말하자면 중국의 여러 고대 사료들은 "낙랑군은 요동에 있었다"라고 거듭 말하고 있지 지금의 대동강에 있었다고는 하지 않았다.
이기백이 한국의 역사학을 ①민족주의사학 ②유물사관 ③실증사학의 세 학파로 나눈 것부터가 "어느 한 편벽한 사관"에 치우친 분류이다. 이를 명실이 상부하게 나누려면 ①민족주의사학 ②유물사관 ③식민사학으로 분류해야 했다. 이병도.이기백은 식민사학을 '실증'이란 용어로 대체하고는 마치 그런 역사관이 '객관' '공정'한 것처럼 위장한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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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실증, 객관, 정확, 올바른 이해>란 말로 부족한 논리와 왜곡된 사료, 부정확한 유물 등의 식민사학의 치부를 가르는 거죠.
요약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