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화암사 상량문
완당이 회갑을 맞던 해인 1846년, 예산에서는 경주 김씨 완당사찰인 화암사의 중건이 벌어졌다. 집안에서는 그 상량문과 현판을 완당에게 맡겼다.
완당은 집안의 불사에 온 정성을 다하며 오석산 화암사 상량문을 써서 서울로 올려 보냈다. 그런데 완당은 이 상량문이 마음에 꼭 들었는지 동생에게 긴 상투적 수식이 없어 오히려 좋은 면도 있다며 자부하였다. 실제로 완당의 화암사 상량문은 완당의 글씨만틈 도도한 가운데 울림이 강하다.
들보 동쪽에 떡을 던져라.
부처님의 밝은 빛이 시방에 고루 비친다.
먼 산이 감돌아서 절집을 둘러싸니
그 가운데 향기로운 샘물이 고요히 흐르누나.
들보 남쪽에 떡을 던져라.
봉우리 위 푸른 안개 흰 이슬이 떨어지네.
포구에 오는 행인 불러불러 건네주니
어디고 나루터마다 부처님 힘 참여하네.
들보 서쪽에 떡을 던져라........
들보 북쪽에 떡을 던져라........
완당은 상량문과 함께 화암사 본당에 걸 무량수각 현판과 요사체 정자에 걸 시경루 현판을 써서 보내주었다. 이 두 현판 글씨는 완당이 제주도 유배시절에 쓴 확실한 작품으로, 추사체의 변천과정 연구에 기준작이 된다. 특히 이때 쓴 무량수가 네 글자는 그가 제주도로 귀양 오면서 해남 대둔사에 들러 초의에게 써준 무량수각과 비교해 보면 귀양 전후 완당 글씨의 변화를 명확히 살필 수 있다.
대둔사의 현판 글씨는 대단히 기름지고 부티와 자신감 넘치는 윤기가 있다. 이에 반하여 귀양 와서 쓴 화암사 무량수각은 기름기가 다 빠지고 메마른 듯 순진무구한 원형질이 드러나며 대단히 명상적이다.
또 어찌 보면 대둔사 글씨에는 중국 글씨의 냄새가 남아 있는데 귀양 와서 쓴 글씨에는 화강암의 골기가 느껴지니, 앞의 것이 국제적 유행감각을 보여준다면 나중 것에는 완당 개성의 체취가 느껴진다.
그렇게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 이에게 대둔사의 무량수각은 중국요리의 난자완쓰 같고, 화암사의 무량수각은 칼국수 국숫발 같다고 하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뜻을 보이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