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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살 길이 있습니다.
본문 : 이사야 55장 1~13절
『오늘 말씀은 ‘초청의 장’으로 알려진 유명한 말씀입니다. 1절에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목마른 자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합니다. 포로생활을 하는 사람이 무슨 자유가 있겠으며, 먹을 것인들 제대로 먹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늘 배고파 굶주렸을 것이고, 중한 노동과 학대로 고달픈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온통 먹고 사는 것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또한 살기 위해서 믿음과 하나님까지 버리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저들에게 8절로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저들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마음껏 물을 마시고, 포도주와 젖을 사서 마음껏 먹을까?’하는 육적인 생각뿐이었습니다. 또한 저들의 길은 하나님을 버리고 죄악을 향해 달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점점 더 가시나무와 찔레로 가득 차는 죽어가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저들에게 하나님의 생각, 즉 살길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분명 살 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것이 살 길’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말씀이 나오는데, 왜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말의 뜻은 ‘지금쯤이면 나를 찾을 법한데, 왜 찾지 않느냐?’ 안타까워 저들을 흔들어 깨우는 호소의 말씀입니다. 당시 저들의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바벨론에 끌려와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것도 70년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늘 배고파 굶주렸을 것이고, 중한 노동과 학대로 고달픈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찾아야 할 텐데, 여기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저들의 모습이 2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무슨 말에요? 분명 이런 상황이 되면,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저들은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말입니다. 너무 안타까우신 하나님께서 2절 중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여기서 ‘듣고 들을지어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마’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는 뜻입니다. 자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을 수 있나요? 예배와 기도를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2절에서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말씀하셨고, 또 3절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말씀하고 있느냐? 이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하나님’이신 것을 아시죠? 그리고 ‘너희’는 ‘이스라엘 백성과 오늘 우리’를 말합니다. 따라서 저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포로생활 중에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문제는 ‘저들 마음속에는 하나님 만나는 것보다 먹을 양식을 위해, 배부르게 할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포로생활에서 벗어날까?’ 문제 해결 받는 것에 급급했다는 말입니다. 분명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 좋은 것으로 먹을 것이고, 기름진 것으로 즐거워할 텐데, 저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우면 1절에 “오호라” 애통해 하면서 “물로 나오라”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래서 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예배가 어떤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길 사모하고 있는가?’ 또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고 있는가?’ 말입니다. 오늘 강대상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성경 속의 이야기로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을 만나길 사모하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주를 위한 이 곳에’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주를 위한 이곳에 예배 하는 자들 중에 그가 찾는 이 없어 주님께서 슬퍼하시네.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그 예배자. 내가 그 사람 되길 간절히 주께 예배하네. 주 은혜로 이곳에 서 있네. 주 임재에 엎드려 절하네. 그 어느 것도 난 필요 없네. 주님만 경배해.♬” 무슨 말일까요? 예배를 안 드려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예배, 하나님을 만나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자가 없음에 슬퍼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 모두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그 예배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 영혼이 살아나는 축복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죄를 단호히 끊어 버리고 회개하는 길만이 살 길’입니다.
우리 함께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자. 여기서 두 사람이 나오는데, ‘악인’과 ‘불의한 자’입니다. 정말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악한 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였는데, 한 순간의 잘못으로 죄를 지어 악인이 되었고, 잘못된 길을 가는 자’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레위기 5장 17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말씀이 나옵니다. 쉽게 말하면 ‘여러분 중에 누가 실수 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십계명 중 하나를 범죄하였을지라도 그것도 죄이기 때문에 벌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벌이 끔찍해요. 예를 들어 안식일을 범하여 죽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면 역시 죽이라 했습니다. 살인해도 죽어야 하고, 간음을 해도 죽여야 하고, 도둑질을 해도 죽여야 했습니다. 남의 것을 탐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십계명을 철저하게 지키고 계십니까? 대부분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매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레위기 5장 18절입니다. “그는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로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가 부지중에 범죄한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이 말은 ‘우리 중 누구든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림으로 해서 우리의 죄가 사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속건제’가 오늘날 ‘예배’입니다. 문제는 매번 흠 없는 숫양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흠 없는 숫양을 드려야 한다면, 돈도 돈이지만 그 번거로움은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흠이 없으신 예수님께서 숫양 대신 번제물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배 시간에 예수님의 흘리신 피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배만 드린다고 우리의 죄가 없어질까요? 그래서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길과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호하게 죄를 끊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어떻게 하신다고요? ‘그가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는 감추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깨끗한 척, 착한 척, 아무 문제 없는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나의 허물을 용서해 주세요” 고백하는 시간인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우리가 사람인지라 하루에도 수많은 죄를 지으면 살 것입니다. 알고 지은 죄도 있을 것이고, 나도 모르는 중에 부지중에 짓는 죄도 있을 것입니다. 율법대로 하면 우리는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용서 받을 수 있는 길, 살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따라서 예배시간을 통해 우리의 죄가 사함 받는 시간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로 끝나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선 설교시간 전에 ‘참회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때, 모든 사람이 한 주간동안 잘못 살아온 것을 회개를 합니다. 참회의 시간을 통해, 회개를 하여 깨끗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여러분들도 매주 예배시간을 통해 지난 잘못을 회개를 하고, 죄 사함 받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주 씻지 않으면, 때가 생깁니다. 때를 수시로 닦아 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뜨거운 물에 불려야만 간신히 닦아 낼 수가 있습니다. ‘뜨거운 물이 불린다’는 말은 ‘고난과 시험을 통해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누구 손해입니까? 하여 쌩으로 고난 당하지 마시고, 매주 예배 때마다 나오셔서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여 죄를 단호하게 끊어 살길이 열려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는 것만이 살길’입니다.
다같이 8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내 생각과 너희 생각’이란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생각과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이 서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같은 시대의 사건을 기록한 예레미야 29장 11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자. 이것이 누구의 생각이에요?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은 어땠느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결국 우리는 먼 타향에서 죽을 수밖에 없구나.” 절망적인 생각을 하였고, 그래서 재앙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저들이 생각하는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단순한 평안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13절에 나오듯이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잣나무가 나며, 찔레 대신하여 화석류가 날 것이라.”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가시나무와 찔레’는 ‘척박하고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삶’을 말하며, ‘잣나무와 화석류’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대로 타향에서 고생하다가 죽는구나. 하나님도 어쩔 수 없구나” 절망적인 생각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저들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포로된 바벨론 땅에서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되고, 포로된 신분,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던 신분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으로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높고 깊은 하나님 생각을 우리가 알아야 할 줄 믿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만 하다가 실족하여 넘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꾸 하나님의 생각보다 우리의 생각을 하기 때문에 불평을 하고, 죄를 짓고, 결국 시험에 들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통해,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면,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고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기분을 좋게 하려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말씀하실 때에 우리는 내 생각과 다를지라도 ‘아멘’하며 믿음으로 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왜냐? 믿음대로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각을 말씀하셨는데도 여전히 자기 생각을 하는 자가 있다면, 결국 하나님의 생각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를게 될 때에 우리에게도 놀라운 일, 살길이 펼쳐지게 될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은 분명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저들에게 “그리하면” 말씀하시면서 ‘살길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형편도 저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도 별반 달라질 것이 없어 낙심할지도 모를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살 길이 있다’고 말씀하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분명 저들을 벌을 받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기회를 또 주시고 있는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을 찾고 만난다면, 죄를 단호하게 끊고 회개를 한다면,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을 따른다면, 우리에게도 회복의 축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지금의 찔레와 가시나무와 같은 척박한 환경이 잣나무와 화석류와 같은 축복의 환경으로 바꿔지게 될 줄 믿습니다. 하여 오늘 여러분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