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년 경상 북도 예안에서 이식의 아들로 태어난 퇴계 이황은
숙부인 이우에게 논어를 배우면서 학문에 눈을 뜨기 시작한 후
여러 차례 과거에 급제했고 높은 관직에 등용되기도 했다.
관직에 몸담고 있을 때에도 그는 항상 올바른 정치를 통해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경북 안동 지방에 도산 서원 을 세우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도산십이곡 과 같은 가치있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곧은 마음으로 꾸준히 학문을 닦고 유학을 뿌리내린 이황은
우리 나라 학문 발전에 큰 공을 세운 대학자로 길이 남을 것이다.
동방의 주자 이황
토계 이황은 율곡 이이와 더불어 조선 시대의 성리학을 꽃피운 대학자로서
동방의 주자 라 칭송받고 있다.
그만큼 학문젹 체계와 함께 훌륭한 인격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황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자기가 할 일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였으며,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꼭 해내고야 마는 의지와 신념이 강한 소년이었다.
이황은 열두 살 때부터는 숙부 이우에게 글을 배웠다.
그 때의 배움은 이황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우의 쳥렴 결백함을 본받아 실천했으며,부귀는 뜬구름과 같고 명예는
나는 파리와 같다면 학문 연구에 더 열중하였다.
세상의 이치를 깨치고 인생이 가야 할 길을 찾는데 학문의 목적을 둔
이황은 도산 서원을 창설하여 제자들에게 진리돠 나라를 일으키는
큰 도를 가르치기도 했다.
한편 이황은 벼슬에 있는 동안에도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깊어 임금에게 바른말을 잘 했다.
충청도 암행 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필 때에도 탐관 오리와 지방의 어려운
실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바로잡았다.
따뜻하고 온화한 성품을 가진 그로서는 탐관 오리들이 삭탈 관직되는 것이
마음 아팠지만 그래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이런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이황은 자기 밭에 난 지름길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논의 물대기에 있어서도 항상 어려운 이웃에게 양보하는 도량을 발휘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황은 제자들의 인격을 존중하여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겸손과 경의를 가지고 대했다.
더구나 아랫사람들을 부릴 때에도 항상 법도 있게 대하여
그의 높은 인격을 드러내었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이황의 정직성과 청렴 결백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하인이 남의 밭의 콩을 몰래 따다가 밥을 했다고 하여
그 하인을 꾸짖고 끝내 먹지 않은 일이나 옆집의 밤나무 가지가
자신의 집으로 뻗어 밤송이가 떨어지자 아이들이 주워 먹을까 봐
다시 옆집으로 던져 준 행동에서는 정직성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이황이 풍기 군수로 떠날 때 관가에서 심은 삼단을 선물로 주어도
관가의 것은 곧 나라의 것이라며 끝내 거절한 경우를 보더라도
그의 청렴함을 알 수 있다.
이황은 평소에 배움과 실천이 한결같아야 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또 순수 그런 행동으로 일관하는 삶을 살아 그의 학문 못지않게
사람들을 귀감이 되었다.
타고난 성품이 옥같이 깨긋한 이황, 그는 늘 겸허한 태도를 잃지 않았으며
매사에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기본으로 일생 동안 공경하는 행동을 실천에
옮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었다.
느릅나무 수피
수업할때는 껍질을 그대로 때어 내어서 퍼즐 맞추기도 함
노린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