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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자도 두들겨패
증언자 : 최강현(남)
생년월일 : 1952. 1. 24(당시 나이 27세)
직 업 : 정비공(현재 배터리 가게 운영)
조사일시 : 1989. 2
개 요
최강현 씨는 5월 19일 시내에 나갔다가 한일은행 앞 사거리 버스 정류장에서 계엄군에게 붙잡혔다. 그 후 23일까지 통합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24일에 상무대로 이송되어 오후에 풀려났다.
자동차 정비공
나는 광주시 소태동에서 1952년 1월에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막노동한 것으로 많은 식구가 먹고살아야 했기 때문에 생활형편이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서도 1964년에 광주 남국민학교를 졸업하였으나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광주 불로동에 있는 선일공업사에 자동차 정비공으로 취직하였다.
그 후 구역 터미널에 있는 대양자동차 공업사에 취직하여 일하다가 1973년에 군에 입대하였다. 1976년에 제대하여 남광주 시장에 있는 영신공업사에 들어가 1980년 5월에도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일보러 시내에 나갔다가 곤욕치러
직장에 근무한 관계로 그간 시내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황에 대해 전혀 몰랐던 나는 5월 19일 오전에 직업상 시내에 나갔다가 일을 마치고 오전 10시 30분경 한일은행 사거리 버스정류장에서 직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15번 버스를 탔다.
그런데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시민, 학생이 대치하고 있어서 버스는 출발하지 못 했다. 그러자 버스에 타고 있던 젊은 남자 5명이 버스에서 내렸다. 계엄군이 시위대건 아니건 간에 젊은 사람들만 보면 잡아간다는 말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버스 주위에도 많은 시민, 학생들이 있었다. 나도 버스에서 내려 사람들 틈에 끼여들었다. 그때 계엄군이 험악한 표정을 짓고 우리를 향해 뛰어왔다. 나는 재빨리 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어느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에는 미리 들어와 있던 사람들과 나와 함께 들어간 사람들로 만원이 되었다.
우리가 식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지 계엄군이 곧바로 식당까지 쫓아왔다. 누가 언제 식당문을 잠갔는지 계엄군이 문을 열려고 하였으나 열리지 않았다. 그러자 계엄군은 곤봉으로 창문을 두들겨 부수고 식당으로 들어왔다. 나는 얼른 식당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잡혀나갔다. 마지막으로 나도 잡혔다. 식당 바닥에는 깨진 유리조각이 널려 있었다.
우리를 버스 정류장 앞까지 끌고 나간 계엄군은 우리에게 혁띠를 풀라고 하였다. 우리가 혁띠를 푸는 것과 동시에 계엄군 3명이 곤봉으로 머리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나는 계엄군에게 머리를 맞아 한쪽 머리가 깨져버렸다. 이제 죽는가 보다 싶었다. 머리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는데 계엄군은 팬티만 입고 나머지 옷은 다 벗으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벗은 옷을 손에 들라고 하였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 손을 들자마자 또다시 두들겨팼다.
나와 함께 잡힌 7명은 정류장 앞에서 계엄군 12명에게 개머리판, 워커발, 곤봉 등으로 오후 4시 30분까지 꿇어앉은 채 두들겨맞았다. 정신이 없었다.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몇 시간 동안 무자비하게 두들겨맞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온몸은 계엄군에게 맞아 피가 나고 쑤시고 아렸지만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 별로 감각이 없었다.
오후 5시가 되어서야 계엄군은 CBS(현 광주백화점 3층에 있는 중앙극장 자리) 앞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군용트럭 4대가 있었다. 우리는 뒤에서 2번째 트럭에 태워졌다. 다른 5명은 어떻게 트럭에 올라갔으나 나와 다른 한 명은 힘이 없어 트럭에 올라가지 못한다고 또 두들겨팼다. 한참을 두들겨맞은 후에야 겨우 트럭에 탈 수 있었다. 트럭에는 우리보다 먼저 잡혀온 사람들이 15명 정도 타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팔이 부러진 사람, 머리가 깨진 사람 등 모두들 부상당한 사 람이었다. 차 바닥에는 부상자들이 흘린 피가 흥건해 있었다. 계엄군들은 우리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라고 하였다. 나는 등이 아파서 고개를 숙이기가 힘이 들어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랬더니 움직인다고 또 두들겨팼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계엄군들에게 말했다.
"당신들한테 맞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지 2-3일밖에 안 지났습니다. 누런 내 얼굴을 보면 알 것이 아니오."
"그러면 다리도 불편하냐?"
내 말을 들은 계엄군이 물었다. 내가 다리는 괜찮다고 하니 다리를 분질러놓겠다고 윽박질렀다. 겁이 더럭 났다. 얼른 계엄군에게 무릎을 꿇고 제발 살려달라고 두 손을 싹싹 빌며 사정하였다.
10여 분을 빌자 계엄군은 엎드린 채로 발바닥을 트럭 난간에 대라고 하였다. 시키는 대로 하자 그들은 곤봉으로 세차게 양발바닥을 20여 차례 내리쳤다. 발바닥을 맞으니 정신이 아찔했다. 지금까지 몇 시간 동안 맞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었다.
그렇게 얼마를 트럭에 있었더니 트럭에 사람이 가득 찼다. 어느새 오후 5시 30분 정도 되었다. 그때야 트럭이 출발하였다.
마취도 않은 채 수술을....
우리가 도착한 곳은 도청 앞 분수대였다. 트럭에서 내려서 주위를 보니 분수대 앞에는 700-800명 정도의 시민, 학생들이 끌려와 계엄군들에게 두들겨맞고 있었다. 우리들도 차에서 내리자마자 두들겨맞고 기합을 받았다.
30여 분을 분수대 앞에서 구타당한 뒤 분수대 앞에 세워져 있던 전경버스(닭장차) 7-8대에 분승하였다. 전경버스에는 의자 하나에 3명씩 앉고 양쪽 의자와 의자 사이의 통로에 두 명씩이 앉았다. 몸 한번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비좁게 앉은 것이다. 사람들이 다 태워지자 내가 탄 전경버스에 자칭 여수가 고향이라는 김대위가 들어오더니 의자와 의자를 밟고 다니며 두들겨팼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얼마 후 차가 출발하였다. 차가 움직일수록 불안감은 더해 갔다. 차는 노동청을 지나 전남대 병원 앞으로 갔다. 내 생각으로는 화순 유격장으로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차는 내 생각과는 달리 양림동을 지나 광주천변을 따라갔다. 서부경찰서로 간 것이다. 서부경찰서에는 공수부대원이 70-80명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각각 버스에 올라타더니 무조건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계속 전경버스 안에서 지냈다. 밤 7시가 넘으니 개인당 우유 1개와 빵 2개가 지급되었다. 빵을 먹은 후 조금 있다가 버스는 다시 출발하였다. 전경버스는 농성동 공업단지 입구를 지나 서방을 거쳐 순천가는 도로를 따라갔다. 그러나 계속 고속도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선가 꺾어져 오치로 들어서서 31사단에 도착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31사단내 수색중대 연병장이었다. 연병장에는 커다란 천막이 4개가 쳐져 있었고, 각각의 천막 주위에는 철조망이 2중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차에 실려온 사람들이 모두 내려 몇 줄로 쭉 서서 보니 1천 명 가량 되는 것 같았다. 계엄군들은 우리를 쭉 훑어보며 말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은 앞으로 나와."
그 말을 듣고 앞으로 나간 사람은 3-4백 명 정도 되었다. 나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계엄군들은 다시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경상자와 중상자를 구분해서 70여 명만 남겨두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70여 명 중에서도 다시 중상자를 골라내 32명만이 남게 되었다. 32명은 곧바로 군의관들에게 치료를 받았다. 나는 곤봉으로 맞아 깨져버린 머리를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열 바늘이 넘게 꿰맸다. 그러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광주 통합병원에서
한참 후 깨어보니 나는 어느 차 속에 누워 있었다. 그 차는 군에서 앰뷸런스 용으로 만든 43톤 버스였다. 우리 32명을 태운 차가 도착한 곳은 광주통합병원이었다. 통합병원에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응급실로 옮겨져 엑스레이를 찍고 링게르 1대씩을 맞았다. 응급실에서 응급처치를 받은 부상자들은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부상자들은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혼자 일어설 수가 없어 배설기관에 호스를 대고 대소변을 보아야 했다. 이날 12시경이 되자 부상자들이 또 병원에 들어왔다. 다음날부터는 낮에는 그런대로 참을 만하다가도 웬 일인지 밤만 되면 온몸이 아파왔다. 몸이 아프다고 고함을 지르면 간호원들이 진통제나 소화제만을 갖다주며 먹으라고 하였다. 환자들은 계속 몰려드는데 약품이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21일부터는 총상당한 환자들이 병원에 실려왔다. 총상당한 사람들을 보자 계엄군에게 두들겨맞은 나는 그래도 괜찮다 싶었다.
22일이 되자 내가 누워 있는 병실에 6명의 환자가 더 들어왔다. 6명 중에는 30세 정도의 젊은 남자가 팔이 부러져 있었고, 중학교 3학년이라는 학생은 머리가 깨져 있었다. 그 중학생은 통합병원에서 뇌수술을 2번씩이나 받아야 했다.
병실에 누워 있으면서 어떻게든 집안 식구들에게 내가 통합병원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와 간호원 등을 보면 가지고 있던 명함을 주며 연락 좀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22일 저녁 늦게쯤 통합병원에 근무하는 방위병이 무슨 볼 일이 있었는지 내가 누워 있는 병실에 들어왔다. 나는 얼른 방위병을 불러 병원에 출퇴근을 하는지를 알아보고 내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내 집은 지원동인데 집에 전화를 해서 면회올 수 있으면 물파스와 파스 몇 장을 사가지고 오라고 해주시오."
그러자 방위병은 가능한 한 연락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 방위병의 집은 방림동 화약공장 옆이라고 했다. 후에 들으니 그 방위병이 23일 새벽에 집에 연락을 해 내가 통합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전화를 받은 식구들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안심이 되기는 하였지만 병원에 누워 있다고 하여 연락을 받자마자 집을 나섰다 한다. 임신 8개월 된 아내는 밥을 준비하고 어머니, 임신 9개월 된 여동생, 매제가 집 앞산을 넘어 겨우겨우 통합병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병원측에서는 면회를 시켜주지 않았다.
그날 오후에 다시 가족들이 통합병원에 와서 면회신청을 하니 교육을 시킨 뒤 면회를 허용했다. 교육은 2시간 정도 받았는데 시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다.
23일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에 우리 식구 4명이 병실로 면회를 왔다. 어머니와 가족들은 처참하게 일그러진 내 모습을 보고는 통곡하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면회올 때 밥을 해가지고 왔으나 목이 메어 먹을 수가 없었다. 매제가 사온 담배 20갑은 병실에 있는 환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가족들은 병실에서 조금 머무른 뒤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병실에 누워 있을 때 병원에서 가끔씩 방송을 들어보면 김대중 씨는 간첩이며,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도 김대중 씨가 배후에서 조종하여 일어난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병실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전에는 김대중 씨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때는 '그놈 죽일 놈이다'며 욕을 해댔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다.
23일 저녁에 병원에서 근무하는 한 사람이 병실로 와서 '집에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나에게 신청하라'고 하였다. 병실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신청하였다. 그 후 조금 지나서 상무대 방첩대에서 우리를 조사하기 위해 나왔다.
"데모를 했느냐, 부상은 어디에서 어떻게 당하게 되었느냐?" 그들이 묻는 말에 조금만 대답이 늦어도 부상당한 환자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집에 데려다준다더니
24일 10시경에 공수부대 1개 분대 9-10명이 실탄을 장전하고 병실로 와서는 집에 보내줄 테니 짐을 싸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내가 신고왔던 신발이 없어져버려서 병실에서 신고 있던 고무신을 그대로 신은 채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군인 한 명이 꽥 소리를 쳤다.
"지금 네가 신고 있는 신발이 네것이냐?"
"아니오."
"야! 이 새끼야 네것도 아닌데 왜 신고 가?"
또다시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결국 고무신을 벗어놓고 맨발로 병실로 나오게 되었다.
통합병원에서 집에 보내주겠다며 호명한 16명의 부상자들이 나왔다. 응급실 앞에는 군용버스 1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는 맞거나 혹심한 벌을 받아도 집에 가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별로 두렵지 않았다.
16명이 탄 군용버스가 출발하려고 하는데 계엄군이 어디에서 데려왔는지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을 질질 끌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아가씨를 때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브래지어와 팬티를 제외한 나머지 옷은 다 벗겨버렸다. 한참을 때린 계엄군들이 차 밖으로 나가고 차는 서서히 출발하였다. '이제는 집에 가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차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집이 아니라 상무대 헌병대 연병장이었다. '이제 정말 죽게 되는구나' 싶어 더럭 겁이 났다. 아가씨는 계엄군이 다른 곳으로 데려가고 남자들은 일단 소지품 검사를 한 다음에 헌병대 영창에 수용되었다. 헌병대 영창은 7소대까지 6칸이 있었는데 우리들은 1소대에 수용되었다. 1소대에는 우리가 도착 하기 전에 이미 18명 정도가 수용되어 있었다. 영창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하루가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24일 오후 5시경이 되어서야 헌병이 32명의 이름을 불렀다. 나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혹시 집에 보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한 번 속은 경험이 있어 반신반의하였다. 헌병들은 각자의 물건을 건네주면서 우리를 밖으로 끌고 갔다. 영창 밖으로 나와보니 수습대책위원회 대표라고 하는 7-8명의 민간인과 경찰차 2대, 군용버스 1대, 그리고 그 옆에는 칼빈, M1, LMG 등의 총기가 1백여 정 있었다.
알고 보니 수습대책위원회와 계엄군간의 협상이 이루어져 앞에 놓여 있는 총기와 연행된 32명을 교환하려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온 우리들은 곧바로 상무대내 회의실로 갔다. 계엄군들이 개인당 설문지 한 장씩을 나눠주며 쓰라고 하였다. 통합병원에는 환자가 별로 없고 어디에서도 구타가 없었다는 등 그들의 행동을 은폐하려는 말만 쓰라고 강요하였다. 거짓말인지 뻔히 알면서도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시 30분경 군용버스를 타고 상무대를 떠나 광주 통합병원 입구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민간인들이 가져온 군용트럭으로 바꿔타고 화정동 공단 입구까지 왔다. 화정동 공단 입구 옆에는 버스 한 대가 불타고 있었고, 시민군들이 통나무로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있었다.
우리가 탄 차가 바리케이드를 지나려 하자 학생인 듯한 사람들이 못 가게 하였다. 수습대책위원회 대표들이 차에서 내려 사정을 설명하며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자 학생들이 말했다.
"교환해 온 사람들 중에 스파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지나가게 할 수 없다. 광주 시내로 들어오고 싶으면 다른 길로 가라."
그들이 완강하게 저지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화정동 공단 입구에서 서석고등학교로 가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쪽에서도 시민군들이 지키고 있더니 차가 가지 못하게 막았다.
다시 화정동 공단 입구로 갔다. 이번에도 7-8명의 수습대책위원회 대표들이 나가 사정 얘기를 하며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학생들은 이번에는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어딘가로 무전을 쳤다. 20-30분 후에 3명의 시민군이 우리를 인수하곤 바리케이드를 걷어내고 시내로 들어가게 되었다.
진흥원 앞에 오니 시민들이 굉장히 많이 모여 있었다. 시민들은 우리를 보고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시민들은 우리들에게 다가와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였다.
"통합병원에 환자들이 몇 명이나 있소?"
"헌병대 영창에는 몇 명이나 수용되어 있었소?"
중구난방으로 물어오는 시민들의 물음에 우리들은 올바르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상무대 회의실에서 계엄군에게 썼던 각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와 또 한 명이 트럭 맨 앞에서 양쪽으로 태극기를 펼쳐들고 갔다.
유동 삼거리에 도착하니 국내 기자, 외신 기자 할것없이 많은 기자들이 있었다. 기자들은 우리가 도착하자 이곳저곳에서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어댔다. 유동 삼거리를 지나 수창국민학교 쪽으로 갔다. 수창국민학교 앞에서 누가 나를 불러 쳐다보니 친구였다.
"태극기를 들지 말아라. 지금 여기저기에서 비디오를 찍고 있는데 뒷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친구의 말을 들으니 더럭 겁이 났다. 그 후로는 태극기를 들지 않았다.
상무대에서 나올 때는 32명이었는데 도청 앞에 도착해 보니 12명밖에 없었다. 화정동 공단 입구에서 도청까지 오는 동안에 하나 둘 빠져나간 모양이다. 도청에서 내린 우리들은 도청내 회의실로 가게 되었다.
회의실에는 여대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2-3명이 있었고, 남자가 15명 정도 있었다. 회의실 한쪽 구석에는 음료수, 빵 등이 쌓여 있었다. 내가 학생들에게 말했다.
"집에 보내주시오."
"지금은 계엄군이 지키고 있어 갈 수 없소. 새벽에 보내줄 테니 기다리시오."
당장 집에 가고 싶었지만 학생들이 갈 수 없다고 하여 도청 회의실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시민군중 젊은 사람들 7-8명이 1조가 되어 총을 들고 순찰을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든 집에 연락을 하기 위해 한 학생에게 공중전화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니 다른 공중전화는 안 되고 도청 지하실에 있는 전화만 사용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내가 전화를 한다고 하니 부상자 4-5명이 자기들도 전화를 하겠다고 해 캄캄한 밤에 지하실로 내려갔다. 조금 걸어가다가 무엇엔가 걸려 넘어졌다. 성냥을 꺼내 불을 켜보니 발밑에 시체 2구가 있었다. 처음으로 시체를 보니 심장이 멎는 듯했다.
마음을 진정하고 지하실로 갔다. 집에 전화를 하니 매제가 나를 데리러 도청까지 오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11시가 다 된 시간에 매제가 도청까지 온다는 것이 위험하게 느껴져 오지 말라고 하고는 내일 새벽에 가겠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후유증으로 사글세 방을 전전하며 생활고에 시달려
25일 아침 6시경, 시민군들은 학동, 법원 방면, 서방, 전남대 방면, 유동, 돌고개 방면, 지원동 방면 등 4개 지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에 차 한 대씩 준비하여 우리를 집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였다. 우리 집은 지원동에 있어서 나는 지원동 방면의 차를 타고 갔다. 내가 탄 차에는 시민들 6명이 타고 있었다. 도청을 출발하여 지원동 다리에 차가 도착하니 옆 산에서 총소리가 났다. 그 산에는 시민군들이 지키고 있었는지 내가 탄 차에 있던 시민군이 산을 향해 큰소리로 총을 쏘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 와중에서 지원동 다리 근처에 살고 계신 친구 아버지가 총소리에 밖에 나왔다가 차에 타고 있던 나를 본 모양이다. 친구 아버지는 몸이 아파 거동이 불편하셨는데도 나를 보자 얼른 차로 달려와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업고 집에까지 데려다주셨다.
집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몸이 아파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화장실마저도 혼자 갈 수가 없었다. 무서워 병원에는 가지 못하고 집에서 단방약을 먹으며 지냈다. 맞아서 골병든 데는 똥물이 좋다고 해서 똥물인지 뻔히 알면서도 꿀꺽꿀꺽 마시기도 했다.
1980년 9월말이 되어서야 혼자서 화장실를 갈 수 있게 되었다. 약을 사 먹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사 먹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집 전세값을 빼서 사글세로 이사하고 남은 돈으로 치료하였다.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 아파 누워 있으니 집안 사정이 말 아니었다. 사글세방에서 먹고살기도 어렵게 되었다. 무엇인가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빚을 내어 중심각 호텔 뒤쪽에 구멍가게를 차렸다. 3년 정도 구멍가게를 운영했지만 빚 갚고, 또 내가 몸이 아파 약값으로 많이 써버려서 결국은 구멍가게마저 그만두어야 했다. 그 뒤에는 5·18 이전에 일했던 정비공장에 취직하였다. 그러나 조금만 무거운 것을 들어도 힘에 부쳐 정비공장에서 일할 수도 없었다. 자연히 결근이 많게 되고 자동차정비 공장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광주의 각 자동차정비소에 내 소문이 나서 광주에서는 정비공장에 취직할 수도 없게 되었다. 할수없이 지방으로 내려갔다. 처음에는 처가가 있는 전라북도 고창으로 가서 정비공장에 취직하였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몸이 아파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다시 영광으로 가 자동차정비 공장에 취직하였다.
이렇게 전남지방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큰아들 학교 문제로 1988년 4월 다시 광주로 이사왔다.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부상자에게 나오는 보상금 3백만 원으로 지금의 배터리 가게를 운영하게 되었다.
현재도 날씨가 흐리면 허리가 아파오고 머리가 띵하다. 그리고 조금만 피곤해도 손발이 떨려 일을 할 수가 없다. 빨리 5·18의 진상이 규명되고, 특히 발포책임자를 색출하여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사.정리 허혜자)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