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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우승의 작품세계
—통영의 딸깍발이 시인
이상옥 시인
1. 예향 통영의 맥
지난해 어느 신문에서 〈동양의 나폴리 경남 통영의 밤〉을 읽은 적이 있다. “윤이상의 음악과 유치환의 시, 박경리의 소설, 전혁림의 그림이 살아 숨 쉬는 곳. 통제영과 올망졸망한 192개의 섬을 거느리고 있는 도시”라고 전제하고 ‘동양의 나폴리’ 경남 통영의 야경은 은은하면서 화려하다. 이 때문에 출렁이는 밤바다를 따라 걷다 보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음악가가 되고 미술가가 된다. 통영의 밤은 뭐니 뭐니 해도 일몰이 아름다운 산양일주도로에서 시작된다”고 기사화하고 있는 것이다.
서우승은 통영 산양이 낳은 시인이다. 청마나 초정, 대여 같은 우리 시단의 별을 낳은 통영이 또 하나의 별을 잉태했다면 그것은 서우승 시인일 것이다.
서우승은 20대 후반인 197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카메라 탐방〉이 당선되어 시조시인으로 등단하였는데, 통영이 낳은 한국 시조단의 큰 산맥인 김상옥 선생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그를 발굴한 것은 더욱 뜻깊은 일이라 할 것이다.
등단 이후 줄곧 같은 제목으로 연작시조를 썼는데, 이는 시조단에 많은 화제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난해 펴낸 《생각도 단풍들면》 시집 해설을 맡은 이지엽 교수도 지적한 바와 같이, 1980년대 시인들이 강도 높은 실험 정신을 가지고 다양한 형식의 시조 실험을 하였는데,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몇 권의 시집 중 하나가 바로 《카메라 탐방》이었다. 연작시조 〈카메라 탐방〉은 주정 일변도의 시조단에 사실적·주지적 사고에 관심을 갖도록 환기한 것이다. 카메라로 우리네 삶의 풍경을 찍어내는 참신한 기법을 선보인 것은 분명히 우리 시조단에 가한 하나의 충격이고 시조 지평의 확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연작시조〈카메라 탐방〉의 성과는 우리 시조사에 재조명되고 평가를 받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시적 성과로 이미 경남도문화상, 이호우문학상, 청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는 예향 통영을 위해서도 많은 수고를 하였다. 통영문인협회 회장, 수향수필문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통영군지와 충무시지의 상임편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그동안 예향 통영에는 청마나 초정, 대여 같은 큰 시인의 그늘에 묻혀서 현존하고 있는 좋은 시인의 존재가 가려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서우승은 예향 통영의 맥을 잇는 시인으로 주목을 요한다.
2. 노래꾼의 풍모
서우승은 한마디로 남다른 개성을 지닌 이 시대의 노래꾼이다. 그의 넓은 이마와 안광은 이 시대를 꿰뚫는 시인의 풍모를 잘 드러낸다. 서우승은 늘 풍진 세상의 가객으로서 민중의 가슴을 꿰뚫는 노래꾼으로서 잘 단련되어 있는 듯한 풍모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노래다운 노래가 없구나.
이 풍진 세상에
올빼미와 박쥐를 위해 폐광을 그냥 두듯
살얼음
딛고 가는 이에게
징검돌 놓는 노래가.
누가 삿대질하랴
단지 호구糊口를 잇기 위해
엉뚱한 데로 발길 돌리는
어깨 처진 소신所信들
그나마 막차도 놓치고
발 동동 구르는구나.
도처에 도화선 깔고
끼리끼리 야합인 것을
잠꼬대로 이어지는 당대當代의 한숨들이
발 뻗고
누울 땅 몇 평도
비워 주지 않는 세상에.
—〈이 풍진 세상에〉 전문
서우승의 시적 인식은 “노래다운 노래가 없구나”라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물론, 여기서 노래는 시조작품이라고 보아도 좋다. 그가 간절하게 염원하는 것은, 이 풍진 세상에서 올빼미와 박쥐를 위해 폐광을 그냥 두듯 살얼음 딛고 가는 이에게 징검돌 놓는 노래다. 폐광은 그야말로 쓸모없는 폐허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곳은 올빼미와 박쥐에게는 존재의 집이 된다. 시조도 그렇다는 인식이다. 실용적 논리로 볼 때, 시조는 폐광처럼 쓸모없는 것으로 보기 쉽지만 그러나 시조야말로, 살얼음 딛고 가는 풍진 세상을 건너는 이들에게는 징검돌과 같은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시조에 대한 강한 자의식이 아닌가. 그는 시조가 풍진 세상의 생명의 노래여야 함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서우승의 시정신을 추출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작품의 어조는 호구를 잇기 위해 엉뚱한 데로 발길 돌리는 어깨 처진 소시민들에게는 연민을 보이면서도, 도처에 도화선 깔고 야합하는 세태에 대해서는 강한 질책을 함의하는 이중성을 띠고 있는데, 이는 서우승 시조가 지닌 정情과 지知의 균형감각의 한 레벨로 보아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서우승은 세태를 매우 균형감각으로 응시하고 있음을 보인 셈이다. 서우승이 강한 개성을 지닌 시인이지만 그의 시선은 매우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전제할 수 있음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 같은 미덕은 앞서 지적한 바대로 정情과 지知의 균형감각 레벨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시조가 이 풍진 세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시조시인 서우승의 강한 자부심은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 노래꾼 특유의 풍모가 아닌가 한다. 시조가 겉으로 보기에는 폐광처럼 그 역할이 소멸된 듯해도 풍진 세상의 존재의 집으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것은 시조단을 위해서 소중한 인식이다.
그러면서도 시조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적 인식을 보인다. 그래서 서우승은 자신이라도 풍진 세상에서 제대로 된 노래꾼이 되어야겠다는 결의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다.
3. 존재의 허무
서우승은 풍진 세상의 노래꾼으로서 먼저 존재의 허무를 깊이 인지하고 노래한다.
하늘 찌른 손끝으로 노을을 어루만지는
저 짓만 되풀이하는 미루나무 아래
반백半白을 바람에 맡긴 초로初老 한 분 섰습니다.
—〈카메라 탐방–필름·8〉 전문
연작시조 〈카메라 탐방〉은 서우승에게 중요한 시적 성과다. 이 연작시조 중 인용작품은 존재의 허무적인 풍경을 찍어내고 있다. 단형의 평시조이지만 이 작품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초장, 중장의 자연현상과 종장의 인간이 병치된 상호텍스트성은 극명하게 허무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하늘 찌른 손끝은 물론 미루나무 잎일 것이다. 그 잎이 노을을 어루만지는 저 짓만 되풀이하는 것은 반백을 바람에 맡긴 초로의 삶을 투영하는 것이다. 반백의 세월 동안 매너리즘에 빠진 반복적인 삶을 살아왔음을, 존재의 허무를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서우승은 〈카메라 탐방〉을 통하여 삶의 다양한 풍경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존재의 허무를 암시하는 풍경은 매우 인상적이다.
의족義足도 남루도 그대로인 나를 받아 섰습니다
허기진 새떼를 쫓다 허기지는 이 하루도
벼이삭 굽실거리는 날의 임금만 한 꿈으로.
쫓아볼 새떼마저도 거두어간 빈 들녘
온 가을을 지킨 품삯, 돌팔매로 갚습니다.
속아온 하늘 아래서 허허허허 허허허.
—〈허수아비의 노래〉 전문
그 허무를 암시하는 풍경은 허수아비를 통해서 더욱 절실하게 제시되고 있다. 의족도 남루도 그대로인 채 허수아비는 허기진 새떼를 쫓다 허기진 하루를 보낸다. 벽이삭 굽실거리는 날의 임금만한 꿈을 꾸지만 쫓아볼 새떼마저도 거두어간 빈 들녘에 남아, 온 가을을 지킨 품삯이라곤 돌팔매질밖에 없다. 그래서 허수아비는 속아온 하늘 아래 허허허허… 탄식을 내뱉고 있다. 허수아비의 노래는 상호텍스트성으로 읽을 때 〈카메라 탐방〉의 반백의 초로의 노래로 읽어도 좋다. 인간존재의 허무를 노래한 〈카메라 탐방-필름·8〉이나 〈허수아비의 노래〉 같은 작품은 서우승 시조의 중요한 포즈로 자리하는 것이다.
4. 존재의 슬픔
서우승은 존재의 슬픔도 노래한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슬픔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견디는 강렬한 삶의 의지, 곧 존재의 허무에 굴복하지 않는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피고 말고 그럼,
밟히는 덴 이력이 난 걸
손쉽게 버려진 자리 뿌리로 버티면서
막다른
이승의 골목,
아득바득 돌아섰는 걸.
죄 털리고 주저앉아도
꿇지 않은 이 남루를
미소로 도배하고는 오냐, 부딪쳐보자 하늘아
눈뜨면
홀로인 새벽
유성流星 한 줌 움켜쥘 뿐.
쉴 새 없이 태어나고
죽어나는 밤마다
볼장 다 본 무감無感의 살 속 간직한 울음으로
바람의
단잠에 깔려
또 한 겹 불면不眠을 피운다.
—〈이 땅의 민들레〉 전문
민초들의 슬픔이 형상화된 작품이다. 민들레의 생태를 통해서 민초들의 삶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밟히는 덴 이력이 난 걸”이라는 언표만 보아도 그것이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손쉽게 버려진 자리에 뿌리로 버티면서 삶을 영위하는 민들레가 처한 현실은 막다른 이승의 골목이다. 이런 역경에 처한 민들레가 환기하는 민초들의 삶은 매우 강렬하게 다가온다. ‘죄 털리고 주저앉아도 꿇지 않은 이 남루를 미소로 도배하고는 오냐, 부딪쳐보자 하늘아’라고 절규하며 생명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다시 말해 존재의 허무에 굴복하지 않는 생의 의지를, 이 땅 민들레의 생태에서 끌어와서 ‘쉴 새 없이 태어나고 죽어나는 밤’, 즉 허무의 밤을 불면의 눈을 뜨고 버티는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아직은 전생만 더듬는
이 적막 가르며
쨍그랑, 동전 몇 닢이 이승 하늘 열어줍니다
나에게 내가 불러 주는
노래값이 팔매질 되어.
테 매어 부지하는
목숨만큼 위태한
생활의 터널 속을 기타줄로 헤쳐가면
목이 쉰 짐승이 되어
슬플 짬도 없습니다.
새도 울 때 울어야
그 울음이 곡진한 법
마른 세상 붙들고 때도 없이 울어 쌓나니
구경 온 조무래기들만
추임새를 넣어줍니다.
뉘 몫의 색안경입니까,
벌 받듯 맡은 천직天職
미안합니다, 이 하루도 쓰레기로 보일밖에는
차라리 참회하듯이
눈총 받고 섰을밖에는
—〈거리의 맹인 악사〉 전문
거리의 맹인 악사를 노래한 이 작품도 슬픔의 무게가 산과 같이 무겁다. “아직은 전생만 더듬는”이라고 시작하는 이 작품은 미적 충격을 줄 만하다. 한번도 이승을 본 적이 없으니까, 아직은 전생만 더듬는 형상이 아닌가. 쨍그랑, 동전 몇 닢이 이승 하늘을 열어준다고 처절하게 노래한다. 맹인 악사가 처절하게 느끼는 적막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우리네 인생길의 선명한 비유로 보아도 좋다. 따라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맹인 악사가 느끼는 적막은 우리 모두가 느끼는 적막의 제유가 된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지만 실상 이 작품 속의 맹인 악사처럼 무엇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리의 맹인 악사는 존재의 슬픔의 등가물로 전경화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맹인 악사는 존재의 슬픔에 빠져 있을 시간도 없다. 테 매어 부지하는 목숨만큼 위태한 생활의 터널 속을 기타줄로 헤쳐나가면 목이 쉰 짐승이 되어 슬플 짬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마른 세상 붙들고 울어 쌓는 맹인 악사에게 구경 온 조무래기들만 추임새를 넣을 뿐 아무도 관심을 갖는 사람조차 없다. 이 같은 존재의 슬픔은, 뉘 몫의 색안경입니까라는 처절한 절규로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 작품 속의 맹인 악사가 자신의 처지를 벌 받는 천직으로 생각하고 참회하듯 생을 영위하는 것으로 귀결됨으로써 존재의 슬픔을 결코 회피하지 않고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존재의 적막을 헤쳐나가는 강한 생의 의지를 함의하는 것이다.
5. 존재의 달관
서우승은 어떤 때 보면 도사 같다. 무엇이든 다 알고 있을 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가면 얽힌 삶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것은 존재의 허무를 인식하고 존재의 슬픔을 견디고 존재의 달관으로 세속을 초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그의 작품 경향 탓일까.
하늘빛에 끌리어
오를 만큼 오른 동네
바람만 시나브로 겨운 풍경 집적이더라
쭉정이 낱낱이 까며
투정 부리는 소리로
비 오는 날 구멍가게마다
모여드는 처진 어깨들
세상에 섞이지 못한 날품팔이의 하루
한숨을 고함과 바꾸더라
막소주의 힘으로.
군데군데 짜깁기한
골몰길 막아선 똥차
그 사이로 용케용케 이삿짐 들고 나고
황급히 달아나더라
길 잘못 든 휘파람 하나.
—〈달동네 인상印象〉 전문
그가 바라보는 삶은 인용작품처럼 고통스러운 현장이다, 하늘빛에 끌리어 오를 만큼 오른 동네, 이름하여 달동네의 비 오는 날 구멍가게마다 모여드는 처진 어깨들이 세상에 섞이지 못한 날품팔이의 고단한 하루를 막소주의 힘으로 견디는 풍경이 제시된다. 그런 가운데 군데군데 짜깁기한 골목길 막아선 똥차 그 사이로 용케용케 이삿짐이 들고 나는데, 길 잘못 든 휘파람 하나가 황급히 달아난다. 이는 휘파람이 상징하는 여유로운 삶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달동네의 풍경을 희화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같이 묘사된 달동네는 서우승이 응시하는 가장 리얼한 삶의 현장인 것이다.
미래사
가는 길에
내생만 한
꽃을 만나
스치는
눈인사에
절이 한 채
생겨나서
심부름
까마득 잊고
소풍 속에
노닌다.
—〈심부름〉 전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용작품처럼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존재의 달관으로 세속을 초탈하는 서우승의 시인 정신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래사 가는 길은 인생길의 비유다. 그렇다면 그 길에서 ‘내생만 한 꽃’을 만난 것은 그에게는 ‘시조’라고 보아도 좋다. 서우승이 만난 시조는 궁극적으로, 존재의 허무와 슬픔을 딛고 달관으로 만난 ‘새로운 삶’이라는 ‘절 한 채’를 안겨준 것이다. 다소 작위적인 작품 읽기로 볼 수 있지만, 인용작품 〈심부름〉을 인생의 알레고리로 본다면 위와 같은 해석도 가능한 것이다.
6. 사유의 사통팔달
근간 시집 《생각도 단풍들면》은 서우승이 그동안 보여준 탄탄한 성과를 바탕으로 더욱 확장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저녁 놀빛 받으며
팝콘 하나 굴러갑니다.
무심코
밟으려던
발이 아찔!
허공에 뜹니다.
일당日當을
목숨껏 끌고 가는
개미님의 귀갓길입니다.
—〈팝콘을 보다가〉 전문
아득한 곳으로
통하는 길을 묻느냐
사방 어디에건
그 길 아닌 게 있느냐
목숨을
앞세우지 않으니
보이지 않을밖에.
—〈길·1〉 중에서
이번 시집은 〈팝콘을 보다가〉에서처럼 작은 미물의 삶에 대한 경이에서부터 목숨을 앞세우고 아득한 길을 간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의 길을 응시하며 벼락같은 깨우침을 노래한 역사적인 삶의 〈길·1〉에 이르기까지 큰 진폭을 지니고 있다. 또한 환경문제에 관심을 보이는가 하면 자연이법 앞에 겸허한 언어로 옷깃을 여미고, 때로는 능청거리는 풍자적 언어로 질펀해지기도 한다. 그의 시의 영역은 사통팔달로 활달하다.
궁극적으로는 현세의 경계마저 지워서 사유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드러낸다.
비 온 뒤
오월 청산은
골골마다
운해雲海를 걸치고
저승도 데려올 듯 무지개도 걸쳐놓고
이 잔치
찰나에 그칠까
나는 네게 전화를 걸고.
—〈저승도 얼비치는 날〉 중에서
이런 대목에 와서는 더 이상의 진술이 누추하기만 하다.
7. 통영의 딸깍발이
시조시인 서우승을 대면하고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남산골 샌님의 별칭인 ‘딸깍발이’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딸깍발이’는 청렴과 지조의 남산골 샌님을 묘사한 이희승 선생의 수필에 그리고 있는 인물이다. 주지하다시피 수필 속의 ‘딸깍발이’는 청렴 결백과 지조, 혹은 ‘앙큼한 자존심’과 ‘꼬장꼬장한 고지식’을 생활 신조로 삼았던 조선시대 선비의 모습으로 표상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서우승이 현 시조단의 마지막 딸깍발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왜 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무엇이라고 확연하게 입증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존재의 허무와 슬픔에 얽매이지 않고 매사 초탈한 듯한 달관의 풍격으로 이 풍진 세상을 위풍당당하게 시조시인으로서 한 점 부끄럼도 없이 거침없이 걸어가고 있는 서우승의 시인다운 풍모에서 아마, 조선조 고지식한 딸깍발이를 연상한 것은 아닐까.
-서우승 추모문집 <해학과 충류속에 노닌 설엽 서우승>
출처: [도서출판 경남의 블로그: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