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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은 사람 이야기 스크랩 <공자의 주요 제자들>
이선웅 추천 0 조회 1,816 16.08.11 09:2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공자의 주요 제자들>

‘사기’ [중니제자열전]은 공문10철을 비롯해 77제자에 대한 소개가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다.그러나 그 가운데 48명은 겨우 이름만 나열했을 뿐 행적은 찾아볼 수 없다.

최소한 간략하게나마 약력이 소개된 29명 중에도 [논어]에 이름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두 사람이나 된다. 제자들의 나이나 출생지도 문헌에 따라 적잖은 차이가 나고 있어 단정적으로 말하기가 쉽지 않다. 사마천은 [사기][중니제자열전]에서 20여명의 제자 연대를 제시하고 있지만 역시 타당성은 의심스럽다.

이에 여러 문헌에 산견된 정보들을 정리해 대표적인 공자 제자들의 약전을 정리했다.

공자의 위대한 면모는 당시 공문 문도들의 행보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1.중유(仲由)- 정치에 유능한 제자

?자가 자로(子路:또는 계로季路)로 노나라의 변(卞:산동성 사수현)땅 출신이었다.

공자보다 9년 연하로 제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는 공자에게 일종의 반면교사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공자사상의 정립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었다.

공자의 제자가 된 후 공자의 가장 친한 친구인 동시에 엄격한 비판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자신이 확신하는 원칙에 대해 스스로 엄격했을 뿐 아니라 스승인 공자에게도 거리낌 없이 엄하게 추궁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자의 제자중 의(義)의 덕목을 가장 많이 지닌 사람을 들라면 단연 자로를 꼽을 수 있다.

이는 그가 타고난 무골(武骨)이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 3천 명의 제자 중에서도 가장 이채를 띤 제자는 바로 자로였다. 성은 중(仲), 이름은 유(由), 자로는 그의 字다. 그는 성격이 곧고 급하며 괄괄해 대처럼 부러지기는 해도 구리처럼 휘지 않는 위인인 동시에 남에게 지기를 싫어해 곧잘 아는 체하다가 공자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 "너에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위정편) 공자도 그의 성격은 좋아했다. 자로는 원래 협객이었다. 협객은 원래 용감한 행동을 좋아하듯이 자로는 공자의 명성에 질투심을 느끼고 닭과 돼지를 몰고 공자의 학습장에 나타나 공자의 학습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공자는 자로에게 온화한 미소와 함께 "자네는 무엇을 좋아하나?" 하고 묻자, 자로는 의기양양하게 "나는 무기를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이에 공자가 "학문도 좋아하나?"라고 물었다. 자로는 기세를 올리며 "학문이 밥먹여 주는가?" 라고 대답했고, 공자는 이 기세를 꺾어 나갔다.

"어진 임금에게 간신이 없다면 정(正)을 잃고, 선비로서 교우가 없으면 듣지를 못하는 것과 같으며, 나무는 줄을 타고 곧아지고, 말에는 채찍이 필요하며, 활에는 화살이 필요하듯이 사람에게도 방자한 성격을 바로잡는 교학이 필요하다."

교학 정신의 근본인 공자의 말에 우쭐해 있던 자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남산의 대나무는 바로잡지 않아도 스스로 자라고, 이것을 사용하면 코뿔소 가죽도 뚫듯이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 굳이 학문을 닦을 필요가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자로의 이른 유치한 비유는 공자에게 있어서 어린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닌가.

"그대가 말하는 남산의 대나무에 쐐기나 화살촉을 박아 학문을 연마한다면 가죽만을 뚫겠는가?" 공자의 멋진 대답에 자로는 얼굴을 붉히면서 무릎을 꿇고 공자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다. 자로는 여기서 공자와의 논쟁만으로 항복한 것은 아니었다. 공자와의 첫대면 때부터 자기 세계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공자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때 공자의 나이는 40세 전이었고 자로의 나이는 31세였다고 한다.

 

그후 자로는 공자를 끔찍하게 생각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공자의 험담을 하는 자가 있으면 이유 불문하고 입을 뭉개버려 공자에게 여러 번 주의를 받았지만 막무가내였다. 이에 공자는"자로가 나의 문하생이 된 후부터는 나에 대한 험담이 사라졌어."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또 자로는 공자가 전쟁을 싫어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꾸중을 각오하고, "만약 스승님이 원정군의 총사령관이 되신다면 누구를 참모로 쓰시겠습니까?" 하고 엉뚱한 질문을 던져 공자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했으나, 공자는 "글세?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두들겨 잡고, 배도 없이 강을 건너려고 하며, 죽음도 불사하고, 덤벙대는 사람과는 함께 갈 수 없겠지."(술이편) 하며 자로의 사랑 확인을 무참히 꺾어버렸으나, 공자는 그래도 이런 자로를 좋아했다.

"자기 몸에 누더기를 걸치고서도 사치스런 옷을 입은 사람과 나란히 서서 태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자로뿐일 거야." 하며 칭찬한 것이 그 좋은 예다.

따라서 자로도 이런 공자를 거의 신적으로 존경했다. 그래서 자로는 '악은 일시적으로 번성하고 최후에는 벌을 받는다고 배웠다. 그런데 왜 공자님 같은 분이 악에 고통을 받아야만 하나?' 하고 하늘을 원망하였고, '성인 군자가 왜 가정적으로 불우해야만 하고 늙어서까지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하는가?' 하며 슬피 울었다. 그는 천하를 위해서 슬피 운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공자 한 사람만을 위해서 울었던 것이다.

 

그후 자로는 위나라 대부 공리의 가신으로 있을 때, 정변이 일어나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전에 이미 공자는 정변 소식을 듣고 자로는 죽었겠구나 하며 예측을 했다. 그의 급한 성격을 공자는 항상 걱정했었기 때문이다. 자로는 이때 창에 목이 반쯤 끊겨 숨지면서도 갓끈이 끊어지자 "군자는 죽을 때 죽더라도 갓을 벗을 수는 없는 법이다"라고 말하면서 갓끈을 똑바로 매고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 62세였고, 그의 시체는 무참하게 토막이 나 소금에 절여져 공자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의 곧은 성격과 급한 성격만큼이나 적도 많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고 볼 수 있다.

얼마 후 위나라의 사자가 소금으로 절인 자로의 시체를 공자 앞에 내놓자 공자는 이것을 보고 대성통곡하면서 집 안에 있는 소금으로 만든 음식물을 모두 쏟아버렸다고 한다.

 

2.단목사(端沐賜)- 언어에 뛰어난 제자

?자가 자공(子貢)으로 위나라 사람이었다. 공자보다 31년 연하이다.

[춘추자전]과 [논어]를 보면 자공이 얼마나 뛰어난 인물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공자의 제자 중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총명한 인물이었다. 외향적인 성격과 내향적인 성격을 겸비한 그는 난세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유창한 언변으로 열국을 종횡무진으로 뛰어다니며 협상을 이끌어낸 탁월한 외교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가 공자 사후 상례를 주재한 것은 제자들 중 가장 나이도 많고 능력이 뛰어난 점도 있었지만 공자와 매우 가까웠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노나라에서 처음으로 편제된 [논어]인 [노론:魯論]에 뒤이어 제나라에서 이에 대응하는 [제론:齊論]이 편제된 데에는 제나라에 처음으로 공학을 전한 그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름은 단목사이며 자공은 그의 자이다. 논어에 자공의 얘기가 제일 많이 나올 정도로 대단히 영리하고 사교에 능해 돈벌이의 천재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공자도 선진편을 통해 "자공은 천운을 기다리지 않고도 부를 누렸는데 그의 슬기로운 판단은 거의 다 적중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안회처럼 道를 즐기는 것보다는 못하다."고 충고를 했다. 자공의 소개는 이 책에서 많이 했으므로 생략하고, 그후 자공은 공자가 세상을 뜬 이후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각각 대부의 벼슬까지 올랐다가 제나라에서 죽었다.

 

3,복상(卜商)- 문학에 정통한 제자

?자가 자하(子夏)로 진(晉: 일설에는 [위]나라 사람이고 함)나라 온(溫:하남성 온현 서남쪽)땅 사람이었다. 공자보다 44년 연하로 자유와 함께 문학과 예에 명망이 높았다.

성품은 넓지 못했으나 정미한 논어에는 당시 사람들 중 아무도 그를 따르지 못했다.

공자가 죽은 뒤 서하에서 선생 노릇을 했다. 전국시대 초기에 위문후(魏文候)는 자하의 문도들을 대거 등용해 천하를 호령했다. [논어]를 편찬할 무렵 학문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공자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의 하나로 받들어 졌다. 그는 아들이 죽은 뒤 비통한 나머지 너무 울어 실명하였다 하나 이는 후세인이 오기와 이극 등을 제자로 둔 자하를 폄하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일 공산이 크다.

 

?자(字)는 자하(子夏)이며 위(衛)나라 사람이다. 현학적인 사람으로 문학에 뛰어났다. {논어}에는 자하가 문학에 뛰어난 사람으로 칭송되어 있다. 공자는 자장이 지나친 면이 있는 반면 자하는 미치지 못한 면이 있다고 두 사람의 성격을 대비시킨 적이 있는데, 두 사람의 이러한 차이는 언쟁으로까지 발전하였을 정도였다.

한번은 자하의 문인이 자장에게 대인관계의 원칙이 무엇인가를 물은 일이 있었다. 그때 자장은 물었다. [자하는 무어라고 하던가?] 제자가 대답하였다. [올바 르게 행동하는 사람과 사귀고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멀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자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들은 것과는 다르구나. 군자는 현자와 재주있는 사람을 존경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관 대한 법이다.] 자하는 단순한 현학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邑宰의 경력도 있었고, 관심의 폭도 넓었으며 그의 말 중에는 공자의 말을 상기시키는 것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일종의 저속한 성격이 있었는데, 이것은 "도덕적으로 중대한 문제의 한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경미한 도덕문제에는 다소 융통성을 가질 수 있다"는 그의 말에서 잘 나타난다.

여기서 그는 공자처럼 어떤 바람직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긍정적인 강령으로서 도덕을 생각하였다기보다는 전체주의 적인 관점에서 엄격하고 고정된 규칙문제로 도덕을 생각하였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4,안회(顔回)- 덕행으로 이름난 제자

?자가 자연(子淵)으로 노(魯)나라 사람이었다. 공자보다 30년 연하로 부친 안무요와 함께 부자가 모두 공자의 제자가 되었다. 공자는 항상 안연을 칭할 때 ‘안씨의 아들’ 이라고 했다. 안회는 공자가 가장 총애하고 기대했던 제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려(志慮)가 충순하고 신심(信心)이 견고하면서도 스승인 공자의 속 마음을 환히 꿰뚫어 알고 있었다. 이로 인해 공자는 그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 했다.

[공자가어]는 31세, [열자]는 32세에 죽었다고 기록해 놓았으나 공자보다 30세 연하임을 감안할 때 40대 초반에 죽은 것으로 짐작된다. [논어] 전편을 통해 공자로부터 칭찬 일변도의 극찬을 받은 제자는 오직 안회뿐이다.

 

?안회는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연이며 공자의 수제자로서 공자 제자의 으뜸으로 꼽으며 안자라 존칭하며, 후세에는 아성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가난 속에서 불우한 일생을 마쳤으나, 그 학식이나 인격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그는 공자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사부님의 인격은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아지고, 뚫을수록 더욱 굳어진다. 그리고 그 모습은 앞에 계신가 하면 어느 사이에 뒤에 계신다. 사부님께서는 요령 있게 사람을 잘 가르쳐 주셨다. 나의 지식을 학문에까지 넓혀 주셨고 나의 행동이 道에 벗어나지 않도록 禮로 잡아주신 덕분에 나는 학문을 그만 두고 싶어도 그만 둘 수가 없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힘을 다하게 됐다. 어떤 때는 초연히 서 있는 사부님에게 가까워지는 듯 하다가도 어느새 더욱 멀고 높이 떨어져 보여 아무리 따라 가고자 해도 미칠 수가 없었다."(자한편) 공자는 "나는 안회가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았으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모습은 본 일이 없다."(자한편)고 칭찬했고, 또 "안회는 몇 달 동안이라도 仁에 어긋남이 없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쯤 행하다가 그만 둔다"(옹야편) 하며 극구 칭찬했다.

 

그리고 공야장편에서 공자가 자공에게 "너와 안회 중 누가 더 나을 것 같으냐?"하고 묻자, 자공이 대답하길 "제가 어찌 안회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듣고서도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너는 그는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나도 그를 따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안회는 나이 32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에 공자는 "아! 하늘이 나를 망치게 하는구나! 하늘이 나를 망치게 하는구나"(선진편) 하며 탄식을 할 정도로 그를 아꼈던 것이다. 공자의 장탄식은 자한편에서 꽃에 비유하여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싹이 특 때는 아름다우나 꽃 중에는 꽃이 피지 못하는 꽃도 있구나! 그리고 또 꽃은 피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구나.

 

5,증삼(曾參)

자가 자여(子與)로 노(魯)나라의 남무성(南武城:무성(武城) 사람이었다. 공자보다 46년 연하로 부친 증석과 함께 공자의 제자로 있었다.그는 평생을 노나라에 머물며 수 많은 제자를 길러내 공학을 세상에 전파하는데 공헌했다.

그는 공자의 덕행 측면을 부각시켜 ‘제가파’(齊家派)를 형성하면서 뛰어난 효행을 실천했다. 사실 공자는 증자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송유(宋儒)들은 그를 공문의 문도들 중에서 안영 다음으로 뛰어나다고 숭배했다.

이는 ‘안연-증자-자사-맹자-주희’로 이어진다는 이른바 도통설(道統設)이 횡행한 데 따른 것이다. 증자에 대비되는 자하가 폄하되고 맹자에 대비되는 순자가 문묘에서 축출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6,전손사(?孫師)

자가 자장(子張)으로 진(陳)나라 사람이었다. 공자보다 48년 연하로 공문의 문도중 가장 어렸다. 성격이 활달해 매사에 적극이기는 했으나 정연(整然)한 면이 부족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한비자][현학]편의 기록에 따르면 자장학파는 한비자가 활약한 전국시대 말기까지 면면이 이어졌다.

 

7,언언(言偃)- 문학에 정통한 제자

?자가 자유(子遊)로 오나라 사람이었다. 공자보다 45년 연하로 자하와 함께 문학에 뛰어났다. [공자가어] ‘72제자해’편의 기록에 따르면 예법에도 밝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예기] ‘단궁’편은 자유의 문도들이 편찬한 것이라고 한다.

[옹야]편과 [양화]편에 그가 무성(武城)의 읍재로 있을 당시의 일화가 연속해 실려 있는 점에 비춰 노나라의 실권자인 계강자로부터 큰 신임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성은 언(言). 이름은 언이며, 그는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서 문학적인 소양이 가장 풍부해 일찍이 노나라 무성의 성주가 되어 큰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어느 날, 공자가 자유가 다스리고 있는 무성으로 가는 도중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음악을 즐기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흐뭇한 기분으로 무성에 도착해 자유에게 "닭을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있을까?: 라고 말했다.

이에 자유는 공자의 뜻을 알아차리고 "전에 제가 스승님으로부터 군자가 禮와 樂의 道를 배우면 백성도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되고, 백성이 禮와 道를 배우면 다스리기 쉽다고 하시던 말씀대로 따랐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자는 수행했던 제자들에게 "자유의 말이 옳다. 내가 방금 말한 것은 농담이었다." 하며 껄걸 웃었다

 

8,염구(?求)- 정치에 유능한 제자

?자가 자유(子有)로 노나라 사람이었다. 공자보다 29년 연하로 정치에 재능이 있었다.

계강자가 그를 불러들여 가재로 삼은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염구는 어떤길을 택하기 전에 항시 예상되는 이익을 냉정히 저울질한 까닭에 승산없는 싸움에서 기꺼이 순직을 선택한 자로와 자주 대비된다. 그는 공문에서의 파문을 무릅쓰고 출세를 위해 기꺼이 모든 비난을 감수하는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부국강병의 계책에 관한 한 매우 유능한 이었음이 틀림 없다.

?자는 자유이며,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노나라의 계강자 밑에서 벼슬을 하다가 공자의 뜻을 저버리는 바람에 배반자 소리를 듣기도 했다.

 

9,재여(宰予)- 언어에 뛰어난 제자

?자가 자아(子我)로 노나라 사람이었다. 변설에 능했던 그는 스승인 공자를 은근히 시험대상으로 삼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선진]편에서 그를 자공과 더불어 언변에 능해 응대사령에 뛰어난 ‘공문10철’의 일원으로 기록해 놓은 사실로 보아 당대의 명변(明辯)이었다. 그러나 뛰어난 언변에 자만해 논변자체를 즐긴 나머지 공자로부터 커다란 질책을 받기도 했다. 또한 재주가 많은 자들이 흔히 보이는 나태한 모습이 있었다.

공자는 그가 자칫 자신의 재주만을 믿고 학행을 게을리하다가 꾸준히 노력하는 범재(凡才)만도 못한 결과를 초래할까 우려 했던 것이다.

 

?자는 재아 또는 자아이며, 공자의 제자 중에서 가장 언변이 능한 사람이다. 그러나 공자는 이 웅변가의 게으름을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더러운 흙담장은 덧칠을 할 수 없다."고 표현해 재여와 같이 말과 행동이 틀린 인간은 꾸짖을 필요조차도 없다고 지적하였다. "전에 나는 사람을 대할 때 말하는 것을 듣고 행동도 그와 같은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제는 재여의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 사람의 행동을 살핀 다음에야 믿게 됐다."고 말했다. 공야장편에 소개했던 그대로 재여는 팔일편에서도 공자로부터 말에 대한 지적을 받았다. 노나라의 애공이 재여에게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에 심은 나무는 왕조에 따라 다르니 무슨 까닭이오?" 하고 묻자 재여는 잘 모르면서도 그럴듯하게 대답하였다. "옛날 하나라 때는 소나무를 심고, 은나라 때는 잣나무를 심고, 주나라 때는 밤나무를 심었는데, 이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공자는 한숨을 쉬며, "이미 저지른 일이라 말해도 소용없고,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말려도 소용없으며, 지나간 일이라 탓할 수도 없구나!" 하며 아예 포기를 했다. 그 외에도 공자의 지적은 옹야편 등에 나타나 재여의 웅변술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10,염옹(?雍)- 덕행으로 이름난 제자

?자가 중궁(仲弓)으로 노나라 사람이었다. 염옹은 미천한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덕행이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옹야]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과묵하면서도 성실한 성품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자로]편에는 계씨의 가재가 되어 공자에게 정치를 묻는 대목이 나온다. 계씨가 그의 과묵하면서도 성실한 성품을 높이 산 결과로 짐작된다.

 

?중궁은 염옹( 雍)의 자(字)다. 그는 덕행이 높고, 노나라의 실권자 계씨 가문의 일을 다 맡아서 처리할 정도로 관리력도 뛰어났다.그러나 그는 말재주가 없어 사람들에게 약점으로 비춰졌다. 그러나 공자는 공야장편에서 "말재주는 있어서 무엇에 쓰겠느냐." 하며 중궁의 약점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안연편에서 중궁이 공자에게 "스승님 仁이란 무엇인지요?"라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회에 나가 사람과 사귈 때는 귀빈을 만난 듯이 존경하고, 백성을 공과 사로 부릴 때는 제사를 받들 듯이 경건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신중하게 대해야 한다. 仁이란 남을 위한 것이다. 고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켜서는 안 된다. 이렇게만 한다면 제후를 섬기는 위정자라도 남의 나라에 원한을 사는 일이 없고 가정에서 원망을 듣지도 않는다."

 

11,민손(閔損)- 덕행으로 이름난 제자

?자가 자건(子騫)으로 노나라 사람이었다. [사기]는 공자보다 15세 연하로 기록해 놓았으나 [공자가어]는 50세 연하로 기록해 놓았다. 만일 [공자가어]의 기록이 맞다면 그는 제자들 중 최연소에 해당한다. 증자와 더불어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전횡을 일삼는 3환 세력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어지러운 난세에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그의 이런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자건은 그의 자(字)이고 이름은 손(損)으로 공자보다 15세 아래다. 일찍이 노나라 계씨가 자건을 비(費)의 태수로 삼으려고 사신을 보내 오자, 그는 계씨의 무도함을 알고 사신에게 "계씨 대부에게 정중하게 사절한다고 전하시오. 만일 거듭 권유하러 다시 보낸다면 나는 제나라로 가고 말 것입니다."(옹야편)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고결한 사람으로 일뿐만 아니라 효도 또한 남달리 지극했다. 이에 공자도 "민자건이야말로 진정 효자다. 그의 부모 형제를 비난하는 사람이 없으니까."(선진편) 하며 칭찬했다.

 

12,염경(?耕)- 덕행으로 이름난 제자

?자가 백우(伯牛)로 노나라 사람이었다. 그는 덕행이 뛰어난 인물로 알려졌다.

[논어]는 [옹야]편에 그가 이른 나이에 병에 걸려 죽게 된 일화 하나만을 실어 놓고 있다. 안연및 자로와 더불어 공자보다 먼저 죽은 몇 안되는 제자들 중 한사람이었다.

 

?이름은 경(耕), 백우는 자(字)다. 공자는 그를 가리켜 덕행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나 '논어'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옹야편 한 군데밖에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그가 문둥병으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 공자가 병문안을 오자 그는 피했다. 그러자 공자는 창문을 통해 그의 손을 잡고 "이럴 수가…… 이것도 천명인가? 이런 사람이 무서운 병에 걸리다니……." 하며 위로했다.

 

 

13,담대멸명(澹臺滅明)

자가 자우(子羽)로 노나라 무성(武城) 사람이었다. 일설에는 초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사기]는 공자보다 39년 연하로 기록해 놓았으나 [공자가어]는 49세 연하로 기록해 놓았다. 특이하게도 용모가 심히 추해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풍절(風節)이 고고하고 심성이 너그러웠다. [옹야]편에 나오는 일화에 비춰 그는 자유가 무성의 가재로 있을 때 공자에게 천거한 것으로 짐작된다.

 

14,복부제(宓不齊)

자가 자천(子賤)으로 노나라 사람이었다. [사기]는 공자보다 30년 연하로 기록해 놓았으나 [공자가어]는 49세 연하로 기록해 놓았다. 제주가 뛰어나고 어질어 그가 선보(單父:산동성 선현)의 읍재가 되었을 때 백성들이 성심으로 추종했다. 그와 관련해서 [공야장]편에 공자가 그를 칭송한 대목이 유일하게 실려 있다.

 

15,원헌(原憲)

자가 자사(子思)로 노(魯:송나라라는 설도 있음)나라 사람이었다. [공자가어]는 그가 36세 연하라고 기록해 놓았다. 그는 공자가 노나라에서 사구로 있을 때 공자의 가신으로 있다가 공자 사후에 은둔에 들어갔다.

후세인들은 안빈낙도를 행하다가 스승이 죽자 속세와 두절한 채 몸을 숨긴 원헌의 절조(節操)를 높이 평가해 ‘공문10철’중 덕행에 뛰어났던 안연과 민자건에 비유했다.

 

16,공야장(公冶長)

자가 자장(子張)으로 제나라 사람이었다. 그는 공자의 사위였다.

[논어]에는 공자가 그를 사위로 삼게 된 대목이 [공야장]편에 유일하게 하나 나온다.

그는 인내심이 있으면서도 강직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덕행이나 재능 면에서 그다지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를 두고 ‘은군자’(隱君子)로 평하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그가 공자의 사위라는 사실에 지나치게 무게를 둔 억측에 불과하다.

 

17,남궁괄(南宮括)

자가 자용(子容)으로 노나라 사람이었다. [공자가어]는 그의 이름을 남궁도(南宮韜)로 기록해 놓았다. 그는 공자의 조카사위였다. 나이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공자의 조카딸인 점에 비춰 공자의 아들 이(魚+里)와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공자는 언행을 삼가는 군자의 풍도를 읽고 그를 조카사위로 삼았다.

 

18,증점(曾點)

자가 자석(子晳)으로 노나라 사람이었다. [사기]는 그의 이름을 점(?)으로 기록해 놓았다. 나이는 미상이나 증자의 부친인 점으로 보아 대략 자로보다는 약간 아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공자가어]에 따르면 당시 증점은 예교(禮敎)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 것을 미워해 근면히 덕행을 닦자 공자가 이를 매우 착하게 여겼다 한다.

 

19,안무요(顔無繇)

자가 로(路)로 노나라 사람이었다. [공자가어]는 그의 이름을 안유(顔由), 자를 계로(季路)로 기록해 놓았다. 그는 안회의 부친이다. 공자보다 6세 연하로 [공자가어]에 따르면 공자가 처음 시골에서 글을 가르칠 때 공문에 입문 했다.

[선지]편에 자식인 안희가 죽자 공자에게 수레를 팔아 곽을 만들어 줄 것을 청 했다가 거절당한 일화가 있다. 이 일화에 비춰 그는 그다지 현명하지 못했던 듯하다.

 

20,고시(高柴)

자가 자고(子羔)로 위(衛:제나라 사람이라는 설도 있음)나라 사람이었다.

[사기]는 공자보다 30년 연하라고 했으나 [공자가어]는 40년 연하로 기록해 놓았다.

그는 신장이 5척에도 못 미치는 단신에 용색이 매우 추했으나 효성이 뛰어나고 행동에 법도가 있었다. [선진]편에서 공자는 그를 우직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고시는 자로와 함께 위나라 세족 공회를 섬기다가 홀로 노나라로 도주해 후세인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21,칠조개(漆雕啓)

자가 자개(子開)로 노(魯:채나라 사람이라고도 함)나라 사람이었다. 사마천이 한경제의 이름을 기휘(忌諱)해 ‘계’를 ‘개’(開)로 고쳐 놓은 이래 오랫동안 ‘칠조개’로 통용되었다. [공자가어]에 그의 자가 ‘자약’(子若)으로 되어 있다.

그는 공자보다 11세 연하로 [서]를 익히고 벼슬을 즐기지 않았다 한다.

[한비자][현학]편은 그를 추종하는 학파가 한비자가 활약하는 전국시대 말기까지 존속했다고 기록해 놓았으나 신빙성이 약하다.

[한서] [예문지]는 그가 [칠조]12편을 저술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22,공백료(公伯寮)

자가 자주(子周)로 노나라 사람이었다. [사기]는 공백료(公伯?)로 기록해 놓았다.

그가 계강자에게 자로를 참소한 내용이 실려있는 [헌문]편의 기록을 근거로 공자의 제자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23,사마경(司馬耕)

자가 자우(子牛)로 송나라 사람이었다. [공자가어]에는 그의 이름이 사마려경(司馬黎耕)으로 되어 있다. 그는 공자의 천하유세 중 핍박을 가했던 송나라 사마환퇴(桓?)의 동생이다. 환퇴가 송나라의 사마에 임명되자 그 역시 사마를 성씨로 삼게 된 것이다.

그는 말이 많고 성질이 급했다. [공자가어]에 따르면 그는 늘 친형인 사마환퇴의 나쁜 행실을 보고 근심을 떨치지 못했다 한다.

 

24,번수(樊須)

자가 자지(子遲)로 제(齊:일설에는 노나라 사람이라고 함)나라 사람이었다.

[사기]는 공자보다 36세 연하라 했으나 [공자가어]는 46세 연하로 기록해 놓았다.

그는 비롯 총명하지는 못했으나 배우기를 좋아해 스승에게 물은 것은 벗헤게도 반복해 물어보는 열성적인 인물이었다. [공자가어]에 따르면 훗날 계씨 밑에서 일했다 한다.

 

25,유약(有若)

자가 자유(子有)로 노나라 사람이었다.

공자보다 43년 연하로 [공자가어]에 따르면 강직한데다 아는 것이 많고 옛 도를 좋아 했다고 한다.공자가 죽은 뒤 제자들은 유약의 모습이 공자와 비슷해 제자들은 그를 선생으로 세우고 공자를 섬길 때 처럼 했다. 그는 [논어]에 모두 4번 나온다.

[학이]편에 보이는 3개장은 모두 그를 ‘유자’(有子)로 칭해 놓았다.

그의 제자들이 [논어]를 편제하는 데 적극 참여한 결과로 보인다.

 

26,공서적(公西赤)

자가 자화(子華)로 노나라 사람이었다.

공자보다 42년 연하로 용모가 준수하고 응대사령에 능했다. [옹야]편에 살찐 말을 타고 경구(輕?)를 입은 채 제나라로 사자로 간 대목이 나온다.

기상이 고아하고 절조가 있었던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27,무마시(巫馬施)

자가 자기(子旗)로 노나라 사람이었다. 진(陳)나라 사람이라는 이라는 설도 있다.

공자보다 30년 연하로 [논어]에는 그에 관한 일화가 ‘술이’ 편에 단 하나 실려 있다.

[공자가어]에 그가 공자와 나눈 대화가 실려 있으나 무마기의 인품과 행적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28,진항(陳亢)

자가 자항(子亢) 또는 자금(子禽)으로 진(陳)나라 사람이었다. 공자보다 40세나 연하였다. 사마천은 그를 공자의 제자가 아닌 것으로 간주해 [중니제자열전]에서 그 이름을 빼 버렸다. 그러나 공자가어]는 진항을 공자보다 40세 연하의 진(陳)나라 출신 직제자로 간주해 72명의 명단에 삽입시켜 놓았다.

 

* 약력이 소개되어 있는 인물 중 [사기]와 [공자가어]에만 나오고 [논어]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제자들로는 상구(商瞿:자목(子木)와 공석애(公晳哀:계차(季次), 양전(梁?:숙어(叔魚)등이 있다.

 

이 밖에도 공자의 제자로 간주되는 인물중 [논어]에는 나오나 [사기]와 [공자가어]에는 나오지 않는 인물로는 맹의자(孟懿子:중손하기(仲孫何忌)와 남궁경숙:南宮景叔: 중손괄(仲孫适) 또는 중손도(仲孫?), 임방(林妨), 신정(申?: [사기]는 신당(申黨), [공자가어]는 신적:申績), 자상백자(子桑伯子) 등이 있다.

 

[춘추좌전]에 따르면 맹의자와 남궁경숙은 부친 맹희자(孟僖子:중손확(仲孫?)의 유명을 쫓아 공자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맹무백(孟武伯:중손설(仲孫洩) 또는 중손체(仲孫?)에 대해서는 설이 대립하고 있으나 제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방과 신정, 자상백자 등은 공자의 제자였다는 설이 우세하나 자세한 약력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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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08.12 19:16

    첫댓글 공자의 제자들을 조사해 볼려고 벼르면서도 미루고 있던차에
    교수님이 제 바램을 눈치 채신듯 올려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잘 읽고 메모를 하였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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