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이름
우명식
shinewms@hanmail.net
‘우리 어매 딸 셋 낳아 분하다고 지은 내 이름 분한이 내가 정말 분한 건 글을 못 배운 것이지요 … 구십에 글자를 배우니까 분한 마음이 몽땅 사라졌어요’ 이 글은 전국 성인 문해 교육 시화전에서 대상을 받은 아흔한 살 제자 권분한 학생의 시이다.
분한 학생을 처음 만난 건 4년 전 봄이었다. 한글 교실로 향하는 길은 나뭇가지마다 봄물이 올라 줄기 끝에 꽃망울을 터트리던 환한 봄날이었다.
한글 교실 문 앞에는 색색의 고무 슬리퍼가 빼곡히 나를 반겼다. 고단한 삶의 무게 슬리퍼에 벗어 두고 왁자하게 목청 돋우어 당신만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인자 와서 글을 배와 머 하겠노. 곧 저승 갈긴데.”
“저세상 가서 이름 한 자 못 쓰면 구천을 떠돌아 댕길지도 모르재요.”
“입때껏 이름 없이 살았는데 꼬부랑 할매가 이름 찾아 머 할라꼬.‘
스물세 명의 어르신들이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말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 깊은 내면에는 제발 글 좀 가르쳐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오랜 세월 박혀 있는 마음속 가시를 빼주고 그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이름자라도 시원하게 쓰고 아들딸네 집을 다른 사람 도움 없이 찾아갈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충동이 내 안에 뜨겁게 타올랐다.
먼저 잊어버린 이름을 찾아주기로 했다. 여태껏 한 집안의 며느리, 아내, 어머니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 나로 살기로 했다. 어르신, 할머니가 아닌, ○○○ 학생으로 부른다고 하니 모두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스물세 명의 이름을 써서 출석부와 이름표를 만들었다. 이름표를 목에 걸고 마디 굵은 손으로 쓰다듬는데 싸한 것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가장 어린 학생이 일흔을 훌쩍 넘겼고 아흔 넘은 학생도 다섯이나 되지만 우린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일학년이다. 모든 시름 내려놓고 어린 학생으로 돌아가 이름표 달고 책가방 둘러멘 푸르디푸른 일학년이다.
약봉지 하나씩 곁에 두고 연필 쥔 손에 힘을 준다. 꾹꾹 눌러 잡은 연필만큼 배움에 목말랐던 한을 하얀 종이 위에 새긴다. 마음먹은 대로 글자는 쓰이지 않고 애꿎은 공책만 찢어진다. 삐뚤빼뚤 글인지 그림인지 구별이 어렵다.
놀이처럼 쉽고 재미있는 공부 방법을 찾아야 했다. 늦게까지 교재를 연구하면서 오직 학생들만 떠올렸다. 길을 가다가도 밥을 짓다가도 생각을 정리했다. 어르신의 눈높이에 맞춰 몸짓과 표정까지 그들의 언어로 다가섰다.
어느 순간 이름을 반듯하게 쓰기 시작했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좋아서 품에 꼭 안아드렸다. 작아서 보이지도 않던 글씨가 조금씩 커지고 자신감도 덩달아 커지게 되었다. 어른도 칭찬 속에 자란다는 걸 알았다.
“에고 선상님요. 보고 쓰는데도 요래 틀려서 우애야 될동 몰시더.”
공책에 늘어나는 빨간 꽃이 보면서 아흔 살 분한 학생이 애달아서 안절부절못한다.
“우리 생에 꽃 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꼬.”
아흔한 살 차남 학생이 무심하게 한마디 던진다.
창밖에는 봄꽃으로 환하다. 하얗게 산천을 수놓은 조팝꽃을 보면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한을 쏟아낸다. 배고팠던 시절에도 더 절실했던 건 배움이 고팠다고. 뼈마디에 귀뚜라미 소리 들리고 공벌레처럼 둥근 등으로 이제야 돌아와 책상 앞에 선 어르신들, 공부가 제일 재미있다는 말이 명치 끝에 걸려 무시로 나를 찌른다.
계절이 세 번 바뀌고 학생들은 잃었던 이름을 찾게 되었다. 병원이나 은행에서 내 이름을 당당하게 쓸 수 있어 꿈만 같다고 했다. 오랫동안 꿈을 그린 사람은 그 꿈을 닮아간다. 학생들과 함께한 시간도 그랬다. 우린 꿈을 꾸었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무모하다고 생각하던 일도 감히 도전해 보았다. 조금씩 용기가 생기고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졸업을 앞두고 시화를 준비하면서 우린 더 가까워졌다. 농사일보다 시 짓는 일이 더 어렵다며 꾀를 부리는 아흔세 살 왕언니를 아흔 살 아우가 살갑게 다독인다. 늦은 시간까지 글을 쓰면서 우린 울고 웃었다. 시고 맵고 짠 세월을 글로 풀어내고 옹이 진 마음마저 함께 치유했다. 완성된 시화에 화룡점정 당신 이름을 적으며 ‘나도 시인이다’라고 외쳤다.
어둠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집에 가는 길을 걱정해주던 어르신이 갑자기 내 앞에 밥그릇을 내밀었다.
“선상님, 이거 자시면 속이 따뜻해져요.”
아, 그릇 속에는 커피가 찰랑거리고 나의 눈에는 눈물이 찰랑거렸다. 구순을 넘긴 학생이 밥그릇 넘치게 타주던 커피를 마시며 뜨거운 사랑도 함께 삼켰다.
“우리 어매 딸 셋 낳아 분하다고 지은 내 이름 분한이
내가 정말 분한 건 글을 못 배운 것이지요 … 구십에 글자를 배우니까 분한 마음이 몽땅 사라졌어요.”
분한 학생의 시 읽는 소리가 낭창하게 울린다. 나의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한다. 분한, 분해, 차남 …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이름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