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동 워크숍 -詩精神, 이대로 좋은가?
불온성의 詩精神
황정산(문학평론가 ․ 대전대 교수)
1. 시는 새로운 언어
시는 새로운 언어이다. 왜 그런데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말을 사용해야 하는 걸까?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낯설게 하기’ 위해서이다. 말의 일상적 사용, 지시적 사용을 낯설게 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관념과 질서, 상투적 사고에 묻힌 우리의 의식을 깨워서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것을 지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진지한 문학은 저항적이고 현실부정적인 성격을 가진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의 지배적인 가치관이나 사회의 권력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 바로 문학이기도 하다. 과거 정치권력들이 고은이나 김지하 등 많은 문인을 구속한 것이나 마광수나 장정일 같은 작가를 비도덕적이라 비판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강조하자면 문학은 특히 시는 새로운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지향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시는 곧 자유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의 지향을 우리 모두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개미처럼 묵묵히 살면서 이것이 아닌데 여기서 벗어나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모두가 가지며 살고 있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얼마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탈주범 신창원에게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인간성 때문이거나 얼굴이 잘 생겨서가 아니라 사회의 구속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자유를 찾아 탈주하는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이다. 시가 추구하는 것도 바로 이런 자유이다. 기존의 언어를 넘어선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서 기존의 가치관 질서, 통념 이런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을 지향해나가는 것, 바로 불온한 상상력 그것이 바로 시의 언어라 할 수 있다.
2. 무용성의 유용성
그런데 이런 새로운 언어 만들기를 통한 불온성의 감행이 왜 필요한 것일까? 간단히 얘기하자면 ‘무용성의 유용성’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유용하다고 했을 때 그 유용성은 경제적, 현실적 가치를 갖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는 특정 이념이나 종교에 봉사하는 것이 유용한 것이었겠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경제적인 것이 유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용성만으로 보아서는 문학이나 시는 아무런 유용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문학을 하는 자체가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문학을 한다고 권력이나 재력을 획득하여 출세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보아도 문학이 발전한다고 해서 사회가 경제적으로 부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무용성의 유용성’이란 이러한 유용성과는 전혀 다른 유용성이다. 다 유용한 것만 있다면 세상은 완전한 통제 사회가 된다. 유용하고 경제적 가치가 있는 것만이 살아남고 그것으로만 가치가 평가되고 그것만이 사회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는 알게 모르게 그러한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한다. 사람도 경제적인 것으로 가치를 매기고 평가한다. 바로 이러한 현상을 ‘소외’나 ‘물신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적 추구 또는 사회적 권력의 추구, 즉 유용성의 추구는 그 자체가 인간을 억압하기도 하고, 그것에 도달하려는 인간 역시 그것 때문에 억압된다. 돈 못버는 인간, 직업이 없는 인간은 끊임없이 사회에서 밀려나고 사람대접을 못 받는다. 회사 안에서도 남만큼 실적을 내지 못하는 사람은 무용할 뿐 아니라 회사에 해로운 사람으로 취급받고 결국 조직에서 떨궈지고 만다. 최근 전세계적 불황에 따라 직장에서 밀려나거나 사업에서 망한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나 가족에서 쫓겨나 노숙자로 전락한 경우가 바로 이런 것을 잘 말해 준다.
그런데 문학은 이러한 유용성이 없다. 무용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현실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고 그것을 벗어나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해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의 기능을 할 수 있고 돈과 권력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바로 그러한 즐거움이 문학의 즐거움이고 또한 문학의 효용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기존의 가치와 유용성에 저항하면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데서 오는 즐거움과 그것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끊임없이 확대하고 온갖 억압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의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문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런데 문학의 효용에 대한 이러한 개념 규정은 사실 오래 전부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나 미국의 신비평주의자들에 의해 ‘낯설게 하기’라는 용어로 설명된 바 있다. 낯설게 하기란 기존의 것을 변형 변화시켜 새롭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런데 무엇을 변화시키는가? 문학에서는 바로 언어를 변화시킨다. 우리가 일상적 사용하는 언어적 용법이 아니라 언어에 여러 가지 조작을 가하여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이를 ‘일상 언어에 가해진 조직적 폭력’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특별하게 사용하여 기존의 언어에 수반되는 통념적인 의미 통념적인 사고를 벗어나게 하고 이를 통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사고를 하게 하는 것이다.
한 예로 ‘결혼’이라는 말을 가지고 생각해 보자. 일상적인 의미에서 결혼은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생활이라는 관념을 동반한다. 그래서 주위에서 누가 결혼한다고 하면 다들 ‘좋겠다’ 또는 ‘깨 쏟아지겠다’ 등의 말을 버릇처럼 내놓는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 또 당연히 행복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꼭 그렇지는 않다.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이 얼마나 있겠는가? 어떻게 생각하면, 결혼 생활은 당연히 행복해야 한다는 이런 상투적인 생각 때문에 상대에 불만을 가지고 결국 상대를 괴롭히고 그래서 불행해지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떤 시인은 ‘그대는 천사 나라의 비밀 경찰’이라고 결혼식장에 나타난 신부를 표현했다. 행복한 결혼과 아름다운 신부라는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관념을 완전히 낯설게 만들고 있다. 이를 통해 어쩌면 사랑의 감옥일 수 있는 결혼 생활의 억압성과 사랑보다는 서로간의 구속과 소유에만 집착하는 우리 사회 결혼 제도의 실제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이 짧은 시구를 통해서 일상의 상투적 언어에 의해 감춰진 은폐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시 한편을 보도록 하자.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 유하, 「오징어」
오징어잡이 배를 보고 쓴 시이다. <오징어>라는 제목을 보지 않았거나 오징어를 어떻게 잡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시를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집어등을 켜서 그 불빛으로 오징어를 유인해 잡는 것을 알고 이 시를 읽으면 그 참신한 발상이 상당히 재미있다. 이 시는 먼저 광명과 죽음을 연관시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광명은 희망과 삶을 말하는데 이 시는 그 반대이다. 광명은 죽음이고 절망이다. 이 시는 그러한 새로운 관계맺음을 통해서 광명을 추구하는 것, 즉 현실적인 희망이나 세속적인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곧 사실은 죽음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가치관, 이를테면 소비와 향락, 경제적 부와 같은 빛과 광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환경파괴나 물질만능주의 등 죽음과 절망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이렇게 광명에서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시인의 독특한 상상력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 상상력을 통해 우리의 상투적 사고를 새로운 생각으로 충격을 준다.
또한 이 시는 오징어와 사람을 연관시킨다. 불빛을 쫓아 수면으로 올라오다 바늘에 걸려 잡혀 죽어 결국 납작한 오징어포가 되는 오징어의 운명과 인간의 삶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것을 통해 빛을 쫓아, 즉 더 나은 삶을 쫓고 더 편리한 문명의 발전을 이루며 살다 결국 파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현대인의 인간적 조건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도 오징어와 인간을 결합한다는 것은 오직 상상력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상력을 통해 인간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을 통한 새로움이 바로 시적 불온성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3. 현대시와 아이러니
현대시에서는 세상에 대한 불온성은 아이러니라는 미학적 장치를 통해 흔히 드러난다. 근대 이후의 시는 지향해야 할 절대적 가치나 의거해야 보편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속에서의 주체와 객체의 분리와 긴장의 경험이다. 그런데 이 경험은 많은 경우 아이러니라는 미학적 태도로 나타난다. 아이러니는 거리두기이다. 단일한 믿음이나 하나의 가치관으로 자기 자신이나 자기 밖의 세계를 환원하지 않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폐기하여 허무주의에 자신을 내맡기지도 않은 채, 모든 사고와 가치들이 가진 허위와 억압성을 끊임없이 들춰내고 부정하여 그것들 사이에 혹 존재하는 진실을 끝까지 찾아나가는 방식이다. 이러한 아이러니의 방식은 예술이 절대적 가치나 영원불변의 원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것들에게 끊임없이 반기를 드는 근대적인 미적 자율성과도 관계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아이러니는 단순한 가장만은 아니다. 동물의 보호색처럼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적에게 일격을 가하는 수사적인 장치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고 또 표현하는 하나의 태도이다. 아이러니는 균형 잡힌 넓은 시야를 성취하게 하고, 삶의 복잡성과 가치의 상대성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통해 불일치의 공존이 삶의 구조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러한 삶의 자세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아이러니는 근대적 예술이 가지는 전복성과 불온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예술적 방식이고 태도이기도 하다.
우리 시사에서 이러한 아이러니적 방식과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인은 김수영이다.
팽이가 돈다
어린 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 중략 )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레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년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일부
이 시는 김수영의 초기시로 그의 시적 지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에 대해서 유종호는 퓨리턴한 반속정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염무웅은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마음가짐으로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도덕적 각성을 보여준 시로 평가하고 있다. 왕성한 생활인인 뚱뚱한 주인으로 표현된 너절하지만 그러나 강고한 일상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달나라의 장난 같은 순수한 꿈이나 이상의 세계를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정신적 지향을 보여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이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한 정신적 지향을 서서 돌고 있는 팽이로 표현한 이 시의 핵심적 사항에 대한 지적을 놓치고 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며 돌아가는 팽이는 나태와 안주를 거부하는 정신의 표현이다. 어떤 절대적인 가치나 완전한 세계에 몸을 의탁하고 정립된 완전한 신념체계로 세상의 모든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고 믿고 또한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보는 단일한 세계 파악의 태도를 거부하는 움직임이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는 긴장의 세계이다. 팽이처럼 움직이는 삶의 구체성 속에서 세상의 모습을 똑바로 보려는 그런 정신적 자세와 그것의 표현이 바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