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만큼은 뤼니크도 내 얘기에 토달지 않았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있는 힘을 다해 그 아가씨를 밀쳐냈는데...
휙! 하고 날아가서 바닥에 철푸덕! 떨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마을 처녀는, 의외로
완벽한 자세로 무릎을 굽혀 착지했다. 그리고 입을 딱 벌린 채 그녀를 쳐다보는 뤼니크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먹이를 노려보는 맹수의 눈빛을 하고...
"기사니임..."
그러나 이미 최고 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한 뤼니크.
"기사니이이임! 기다려요오오오!"
아가씨는 땋은 머리채를 휘날리며 뤼니크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저도 별 수 없는
인간, 드래크로니안의 피가 섞인 뤼니크를 따라잡을 수 있을 리 없... 엥?
헉. 어떻게 된 인간 여자가 1/4 드래크로니안인 뤼니크를 따라잡을 만큼 잘 뛰는 거야? 게
다가 마을 사람들의 저 대화는...
"어머, 니루피티가 또 기사를 쫓아가네."
"또? 하하, 어쩐지 며칠동안 너무 조용하다 싶었지."
"기사님, 열심히 뛰어요!"
"난 기사님한테 50걸겠어."
"그럼 난 니루피티한테..."
왠지... 이 마을, 기사들은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될 금단의 구역 같은데...
"무슨 일입니까, 아가씨?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헉, 저건 누구야! 웬 멍청이가 한가한 소릴 하면서 전력 질주하는 뤼니크의 앞길을 턱 가로
막아 버렸다!
"비켜!!"
라고 내가 소리치는 순간. 이미 그 멍청이는 뤼니크에게 치어(?) 하늘 높이 날아가고 있었
다. 뤼니크는 물론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전력질주 중. 얼핏 보니 꽤나 미남 같더니만... 뤼
니크, 미남도 눈에 안 들어오는 걸 보니 정말 급한가 보군.
"으으... 도대체 누가 쫓아오길래..."
신음하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멍청이. 그러나 맹렬히 뤼니크를 뒤쫓아오는 아가씨를 본
순간, 그도 돌처럼 굳어져 버렸다.
"니... 니루피티 양...?"
"어머, 전에 만났던 기사님까지 계시네! 보고 싶었어요오오오!"
다음 순간, 멍청이는 언제 끙끙거렸냐는 듯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뤼니크
의 뒤를 따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가씨에게 쫓겨서. 그나저나 셋 다 정말 기운차게 달
리는군. 뭐, 그래 봤자 빠르기로 이름난 우리 드래크로니안에 비하면 거북이 걸음이지만, 그
래도 인간 치고는 참 잘 뛴다. 지치지도 않고.
"기사니이임! 아니, 기사님드으을! 기다려 주세요! 도망치지 마세요! 저랑 결혼해 주세요, 두
분 다!"
"저리 가!!"
"따, 따라오지 마세요, 니루피티 양! 절 잊어 주세요!"
기운차게 쫓아오던 그 무서운 아가씨는 마을을 벗어나 숲 속 깊이 깊이 들어온 다음에야 기
적적으로 따돌릴 수 있었다. 이미 날은 저물고 있었고, 뤼니크는 새파랗게 질려서 패닉 상태
에 돌입해 있었다.
"가, 강하다... 이렇게 무서운 적은 만나 본 적이 없어..."
동감이다. 저런 무서운 아가씨는 만나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저런 귀여운 아가씨를 버리고 올 수밖에 없다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사인 저의 운
명. 용서하십시오."
"......."
"......."
뭐야, 저 멍청이는? 뤼니크도 나도 할 말을 잃게 만드는군. 저것은 멍청이가 아니라 정신병
자 레벨이 아니던가... 봐, 뤼니크도 얼마나 놀랐으면 이렇게 멍하니 쳐다보고 있겠어?
"미남이다..."
쿠당.
나는 뤼니크의 어깨 위에서 떨어져 그대로 망토를 타고 미끄러져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무
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 녀석은!
...잠깐. 아, 정말 미남이긴 하군. 뭐, 우리 드래크로니안은 변신만 하면 무조건 미남이니까,
인간이 잘생겨 봤자이긴 해도... 키도 꽤 크고, 체격도 괜찮고, 얼굴도 정말 잘 나가는 기사
님의 전형 같고, 인간치고는 꽤 괜찮은 외모다. 그렇기는 한데 - 뭐냐, 저 삐까뻔쩍한 옷차
림은. 방랑 기사라면서 어째 질질 끌리는 망토에다, 머리는 뤼니크보다 더 길군 그래. 허리
길이를 넘는 빨강머리가 미친 엘프 케이네스 못지 않게 찰랑찰랑한 걸 보면, 분명히 시간깨
나 들여서 손질하는 모양이다. 뭔가, 꽤나 바람기 있는 녀석 아냐? 그리고 저 빨간 눈은 -
뭐, 빨간 눈? 드래크로니안? 아니, 분명히 드래크로니안은 아닌데... 설마, 하프...?
"뤼니크, 저 사람...!"
그렇지만 뤼니크 그 녀석이 내 말을 듣고 있을 리가 없지! 이미 그 빨강머리 멍청이에게 쪼
르르 달려가 꼬리를 치고 있었다.
내가 못 살아.
"안녕하세요! 저는 뤼니크, 북풍의 기사 뤼니크 윈드필드라고 합니다. 당신은?"
어이, 빨강머리 기사 양반, 그렇게 웃지 말어. 쟤 댁 좋아서 그러는 거 아니라고. 일단 미남
이라면 무조건 대쉬하고 보는 녀석이니까...
"하리드. 하리드 리온이라고 합니다."
...엥?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간다 하는 순간.
"너 때문이야아아아아!"
뤼니크의 고함과 함께, '미남' 하리드 리온은 또 한 번 하늘로 내던져졌다.
"...그러니까, 니루피티 양한테 당신이 쫓기게 된 게 모두 제 탓이라, 이겁니까?"
멍든 눈자위를 어디서 났는지 달걀로 슥슥 문지르며 힘없이 질문을 던지는 하리드. 그나저
나 우린 지금 숲 한가운데서 모닥불 피워 놓고 노숙 중인데, 저 달걀은 어디서 났을까? 설
마 상비하고 다니는 걸까? 그렇다면 저 남자는 여자에게 내던져져서 눈가에 멍이 드는 것이
보통 있는 일이란 말인가...?
...으윽, 이상한 생각하지 말자. 어쩐지 추리력이 점점 이상한 쪽으로 발전을 하는 거 같아.
설마, 나, 뤼니크 닮아 가는 건 아니겠지?
"당연하지! 내가 당신 만나려고 어제 이 숲에 있는 산적들을 다 잡아다 놓고 기다렸는데, 결
국 안 나왔잖아! 그래서 그 이상한 여자한테 다시 가서 따질 생각이었어. 산적 모아 놓으면
당신 나온다고 설명서 써 준 게 그 여자니까! 그래서 결국 이 모양이 된 거니까... 결론적으
로, 모두 당신 책임이야!"
미남이고 뭐고 상관없이 마구마구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치는 것 보니, 뤼니크 녀석,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군. 저만하면 웬만한 인간들은 움츠러들 만 한데, 하리드란 사람, 의외로 강
심장인지 떳떳이 고개를 들고 말한다.
"위기에 처한 여성은 구해도 위기에 처한 산적은 구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매뉴얼대로 했으니, 당신은 나올 의무가 있다고!"
어이, 뤼니크, 그건 억지야.
"죄송합니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제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데 그 자리에 없었다니... 그것은
정말 말로 사죄할 도리가 없습니다."
...어라?
"당연하지! 그러니까 당신은, 무보수로 날 따라 길리어드까지 와 줘야겠어!"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 레이디를 지키는 것은 기사의 의무니까요."
한순간, 말문이 막힌 뤼니크. 나 역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저것이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
는 소리? 저 하리드란 사람, 아무래도 문맥 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거 아니야? 혹시
아까 날아갈 때, 머리부터 땅에 떨어졌다거나...
"누가 보디가드 필요하대? 당신은 그냥 길리어드까지 아무 문제없이 날 졸졸 따라오면 된다
고!"
"기꺼이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당신도 거칠게 자라나지 않았다면 꽤나 아름다웠을..."
"난 칼 들고 싸워도 충분히 예뻐! 워낙 본판이 좋아서! 그리고 보호 따윈 싫다고! 게다가 운
동을 하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쌓여서 폭발해 버리는 체질이란 말야!"
"걱정 마십시오. 오래 함께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동안만이라도 당신의 기사가 되어 드리겠
습니다."
아주아주 기사다운 미소를 지으며 늠름하게 말하는 하리드. (이 사람, 혹시 귀가 나쁜 건 아
닐까?) 뤼니크는 드디어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비틀비틀 어둠 속으로 걸어나갔다. 정신적인
충격을 많이 받았나...
쫓아나가 보니, 녀석은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내려다보며 힘없이 앉아 있었다. 또 위로를 해
줘야겠군. 하여간, 인간은 귀찮은 존재라니까. 어쨌든 난 뤼니크의 어깨에 살며시 내려앉았
다.
"...뤼니크?"
"가... 강적이다..."
"뤼니크..."
"어... 어... 어째서... 리스는 나더러 저따위 녀석을 데려달라고 한 거야! 내, 내가 리스한테
잘못한 게 있던가? 이런 식으로 갚을 원수 진 기억은 없는데... 으으음..."
그러나.
정말 강적은 바로 뤼니크였다.
다음 날 아침.
"안녕, 하리드, 텔! 좋은 아침! 오늘부터 길리어드로 출발이야!"
난 한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어제 그렇게 창백하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어 놓고는... 같이 가
겠다고? 농담이겠지?
그렇지만, 하리드 녀석과 함께 사이좋게 마차를 얻어 타고 여행한 지 한나절이 지나자, 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기어이 이 황당한 녀석과 함께 여행을 할 숙명이었
다는 사실을...
"저기, 뤼니크..."
"뭐야, 텔?"
"정말 저 하프 녀석, 데리고 갈 참이야?"
"하리드 말야? 당연하잖아! 리스의 부탁인데!"
주먹을 불끈 쥐는 뤼니크. 하지만 과연 친구인 레일리스 공주의 부탁 때문일까? 아무래도...
저 사람이 미남이기 때문에 함께 여행하고 싶어할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뤼니
크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겠지?
인간들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아버지께서는 항상 말씀하셨다. 그래서 네아 에이나스(인간족
의 전쟁)도 일어났고, 에스테이아의 통일 전쟁도 일어났다고... 어렸을 적엔 그 말을 그냥 흘
려들었지만, 이제 이 뤼니크라는 인간 여자애(그나마 완전히 인간도 아니다. 드래크로니안의
피도 섞였으니까)와 함께 다니다 보니 새삼 그 말이 가슴을 저미고 뼈를 깎는다.
이셀이라는 미소년 마검도 얻었겠다, (물론 안 보이니 미소년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지만,
뤼니크가 뭣하러 미소년 아닌 녀석을 저렇게 힘들게 데리고 다니겠는가. 노상 골탕만 먹는
모양인데. 분명 안 잘생긴 놈이었다면 헐값에 팔아치우고 말았을 것이다) 좀 사고뭉치이긴
해도 아르카스 황제 같은 정혼자도 있겠다, (물론 정혼자라는 게 뤼니크같은 바람둥이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각각 미치광이에다 상습적 기억상실증
환자이긴 하지만 어쨌든 외모는 반반한 케이네스와 시아덴도 자꾸 이유 없이 나타나겠다...
그 외에도 미남들이 넘쳐 나는 게 뤼니크의 삶이다. (이런 걸 보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
다고 했던가, 찾으면 얻는다고 했던가...) 그런데 뭐가 모자라서, 저 멍청하고 정신도 한 물
간 녀석을 데리고 가려고 하느냔 말이다!
"하지만, 뤼니크, 저 녀석 분명히 떠도는 하프 드래크로니안인데 - 저런 녀석은 믿을 수 없
어."
"너무하다, 텔! 우리 아빠도 하프인데..."
"대공님은 로데인으로 돌아왔잖아! 하프들이란 원래, 하프 드래크로니안이나 하프 엘프나,
발붙일 데가 없는 존재들이야. 그래서 로데인이 생긴 이래로 돌아올 놈들은 다들 돌아왔다
고. 그런데 저 녀석은..."
힐끔 보니, 녀석은 마차 난간에 몸을 기대고 앉아 온갖 폼을 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편안해
보이지는 않고, 멋있어 보이려고 기를 쓴다는 게 눈에 다 보이는 모습이었는데... 그다지 멋
있어 보이지는... 하지만 뤼니크같이 얼굴 반반하면 만사 OK인 녀석한테야 충분하겠지.
"안 돌아오고 아직도 방랑 기사로 남아 있다는 건, 분명히 뭔가 꺼림칙한 데가 있는 녀석이
라는 얘기라고. 예를 들어 추방당했다거나, 아니면 들어오면 추방당할 만한 일을 저질렀다든
가..."
그러나.
어느 새 뤼니크 녀석은 하리드의 옆에 찰싹 붙어 방싯방싯 웃으며 수작을 걸고 있었다.
"하리드도, 나처럼 방랑 기사인 거죠? 나처럼 여행을 좋아해요?"
"뤼니크 양같이 아름다우신 분이, 무슨 사정이 있어서 이렇게 검을 들고 여행하시는 겁니
까?"
"여행하는 건 정말 좋아요. 그렇죠? 세계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다 보면 인생은 너무 짧
고..."
"그리고 보니 당신과 같이 검을 들고 여행하는 여검사를 한 명 본 적이 있었죠."
"최근에는 미도시르에 다녀왔는데, 거기 너무너무 멋진 곳이에요. 하리드도 가 봤어요?"
"그녀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라고 하던데... 뤼니크, 당신은?"
"거기 황제 폐하도 아주아주 멋진 분이고..."
...저게 대화냐? 정말 듣기가 괴롭군. 아아, 정말이지 이럴 바에야, 차라리 미친 엘프 케이네
스와 여행하는 게 낫겠다.
"그런데, 하리드, 아트웰의 레일리스 공주가 왜 당신을 찾는 거죠?"
지치지도 않고 또다시 질문하는 뤼니크. 내가 '제발 그만 둬!' 라고 말하려는 순간, 놀랍게
도 하리드의 입에서 정상적인 대답이 나왔다!
"아... 그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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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루피티 양과 하리드님 캐스팅입니다^^ 니루피티 양은 많이 안 나옵니다... 죄송합니다. 그
렇지만 '여자를 좋아하는' 소녀는... 아니, 여자라는 성별 자체가 네크에 많이 안 나오기 때
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리드는... 약속대로 엉뚱하고 엉뚱한 인물입니다. 하프 드래
크로니안이고요^^ (드래크로니안이 지금 이런데 돌아다닌다면 설정상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하리드라는 인물은 keyman2님의 전용 닉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사용 금지! 라고 단단히 부
탁을 하셨어요^^ 다른 분들이 닉이나 아이디로 쓰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