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설 분분한 가운데 연분홍빛 소녀의 얼굴로 은은한 향을 풍기던 매화.
어느덧 매실이 되어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매실을 준비하는데, 오래전 초례청에 들어서던 동갑내기 우리 부부를 보는 듯 마음이 설렌다. 배가 볼록한 오지항아리는 매실의 초례청이다.
나는 주례를 맡았다. 신랑·신부 맞절을 시키듯, 청실홍실을 다루듯, 매실 한 켜 설탕 한 켜 비율로 차곡차곡 항아리에 넣었다. 축하 세례로 남은 설탕을 초록매실 위에 하얗게 뿌리고, 마지막 절차는 초야를 치를 합방만 남았다. 혹, 불길한 기운이라도 스밀세라, 한지로 항아리 아가리를 딱 붙였다. 신방인 셈이다. 목화솜처럼 뽀얀 새 이부자리 위에 축사로 매화 송이를 그릴까 하다가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적었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창에 기대니 밤빛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매화 가지에 둥근달이 걸려있네
不復更喚微風至 소슬바람을 새삼 불러 무엇하랴
自有淸香滿院間 맑은 향기 온 집안에 가득하다
-퇴계
첫날밤은 몰래 들여다보는 객이 있어 더욱 긴장감이 돈다. 숨소리를 낮추고 손가락에 침 발라 문창호지를 뚫어야 서둘러 불이 꺼진다. 솜털 보송보송한 새파란 고것들이 무얼 안다고, 나는 시 한 수 바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안심했었는지.
진즉에, 한 이불 속에서 같이 잠들고 같이 일어나는 부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고 자랐더라면 좀 나았을까. 병풍 뒤로 드나들며 뒤집어주고 저어주며 신혼 방의 화촉쯤은 밝혀주었어야 했다.
아버지는 타지에 나가 계시고 어머니와 나는 한방을 썼다. 어머니는 등잔불 밑에서 저고리 섶이나 버선코를 날렵하게 빼내어 인두로 꼭꼭 누르고, 할머니는 화롯불을 쬐며 아귀가 맞느니 안 맞느니 타박을 하셨다. 고모가 친정 나들이를 오면, 대청마루에서 스스럼없이 고모부의 귀를 파내주었다. 서로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손장난을 걸면 고모는 간지럽다며 콧소리를 냈다. 지극히 정상적인 부부의 모습이었건만, 그 당시 나는 기분이 언짢았다. 고부간의 부덕만 보면서 자랐지 부부간의 부덕을 보지 못했으니.
내가 결혼할 때, "사내 녀석들은 마음만 바쁘지, 손이 어줍으니 살짝 뿌리치는 척하면서 도와줘야 하느니라." 누가 넌지시 한마디만 일러 주었더라도, 그렇게 오래도록 남편을 애 터지게는 안 했으리라. 온몸을 감싸 안고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하였으니, 아내가 워낙 수줍음을 타다 보니 그런가 보다, 아이를 낳으면 나아질까. 둘을 낳아도 그 버릇이 고쳐지지 않자, 근본적으로 이성을 싫어하는 여자로 오해를 받았다.
유두가 봉긋해질 소녀 시절, 동구 밖 울타리도 사립문도 없는 외딴집 초가지붕 위로 박 넝쿨이 올라갔다. 밤이면 박꽃이 하얗게 피어 마당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우리들은 숨소리를 죽이며 뒤꼍으로 돌아가 나지막한 굴뚝 위에 호미를 걸어놓고는 냅다 뛰어 개울 건너로 줄달음쳤다. 대낮의 햇볕이 진공상태처럼 답답하다. 동네의 개 짖는 소리도 물 흐르는 소리도 고요하다. 방아깨비가 긴 다리를 어기적댄다. 알록달록 무당벌레가 업은 듯 포개어 지나가고, 물잠자리도 덩달아 서로 꼬리를 맞대고 주위를 맴돈다. 꼬맹이들이 매듭 풀잎을 뜯어 손끝으로 잡아당기니, 오린 듯 ♂♀으로 쪼개진다. 머지않아 댓돌 위에 아기 고무신이 놓이리라.
어떤 이는 매실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항아리에 담아놓고, 밤이면 앞 베란다에 내놓았다가 낮에는 뒤 베란다로 옮겨 검은 천으로 가려준다고 한다. 그래야 수줍음을 감추고 마음 놓고 애무를 즐겨 향기로운 매실즙이 된다나.
"하이고~! 별꼴 다 보겄네. 매실이 무슨 수줍음이 있능겨. 그거 말짱 헛것이여. 아 그 김치 항아리에 넣는 두꺼운 비닐 봉다리 안 있소. 거기다 매실과 설탕을 대충 때려 버무려 서너 겹 단단히 묶어 마루 귀탱이에 처박아 놓았다가, 오며 가며 발길질로 냅다 걷어차 보소. 뒤굴뒤굴 굴러다니며 제절루 삭는 것을. 그게 제일 맛 좋은 매실즙이지. 겉멋이 뭐 필요있능겨."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환한 대낮에 길거리에 나와 그래 나 죽고 너 죽자. 언제 제대로 서방 노릇이나 했느냐면서,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피멍이 들도록 싸우는 부부들을 보았다. 저러면서 왜 살지 싶어도 그들의 악다구니는 절절한 사랑가였다. 밤이면 상처까지 보듬어 안아주고 아침이면 배시시 웃으며 보약 달이는 아낙네들의 삶에서, 짓물러 터지고 곰삭는 진한 부부애가 샘솟는 것을, 내 어찌 알 수가 있었으리.
가끔 항아리 뚜껑을 열어보았었다. 한지에 노르스름한 물이 배여 눅진하게 스며 올라오는 기운이 내 기분까지 무르익게 했다. 아직 날짜가 있으니 기다려야지. 두어 달이 지나 드디어 개봉 박두! 가슴이 쿵쿵거린다. 봉함을 뜯었다. 매실들이 쪼글쪼글 액은 다 빠지고 씨와 껍데기만 남았다. 건더기를 다 건져냈다. 어쩜 내 인생도 요렇게 성공적일 때가 다 있다니 신통하기도 하지. 흥에 겨워 국자를 휘휘 젓는데…, '이 무슨 조화일까' 아직 비녀와 옷고름을 풀지도 못한 채 속곳부터 벗기려 했는가. 설탕이 몽땅 기진맥진하여 항아리 밑바닥에 굳어있는 것이 아닌가. 밤마다 실랑이만 벌이다 날이 밝은 게 틀림없다.
초례청에 들여만 놓으면, 저절로 거문고와 비파가 부부의 금슬琴瑟을 연주하는 줄 알았다. 매실도 제 생긴 대로 제 사랑 방식대로 다루었으니. 공연히 고매한 매화 시를 쳐다보기 민망하다.
주례자의 객기만 홀로 소슬바람을 불러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