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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내의 정성스러운 그 사랑 앞에 서서히 거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안정을 되찾아 갈 무렵, 아내가 뇌종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수술을 하더라도 아내에겐 청력 상실이나 반신마비 등과 같은 후유증이 생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을 힘으로 살아라' 하는 말이 맞더군요. 온몸에 힘이 너무 빠져서 자살할 엄두조차 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저희 부부는 순리를 따랐습니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원망해봤자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다는 판단이었겠지요. 지금 아내는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고, 저는 1급 시각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수술 후유증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아내는 오늘도 저를 향해 방실방실 웃어줍니다. 저는 시각장애인용 흰 지팡이가 없으면 집 앞 수퍼마켓도 못 갈 정도로 병이 진행됐고 집안에서도 이리 부딪히고 저리 걸려 넘어집니다.
그런 저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다시 방송 MC 일이 주어졌고 얼마 전엔 그간의 일상과 기억을 담은 에세이 책도 펴냈습니다. 그리고 저희 부부에게 토끼 같은 딸도 태어났습니다. 아이를 갖는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사치라고 생각했던 저희 부부에게 어느 날 천사처럼 하늘에서 까맣고 눈 큰 여자 아이가 내려온 것이지요. 그런 갓난 딸을 밟거나 차기도 해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 아이가 어느덧 자라 이제 다섯 살이 되었고, 요즘은 지팡이를 손에 들고 있는 아빠의 모습을 꽤나 예쁘게 그려냅니다.
저에게, 아니 저희 가정이 이렇듯 보석 같은 일상을 다시 얻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돌이켜보면 그 안에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고 절박한 몸부림도 있었습니다. 가족들의 사랑과 친구들의 응원, 그리고 수많은 분들의 격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축복을 받아들일 그릇을 아내가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통과 불행을 겸허하게 자기 것이라고 받아들이던 아내의 모습에서, 살면서 갖지 못했던 빈 그릇을 하나 얻은 셈이라고 할까요. 욕심과 욕망으로 가득 차서 더 이상은 채울 수가 없는, 그래서 허영으로 잔뜩 부풀었던 저 자신을 발견한 것이지요. 그 빈 그릇은 저를 매우 용기 있는 남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동안 겪었던 불행과 고통이 좀 컸다고 해서 그게 제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시련의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아내는 발을 만지면서 감각이 무디다고 합니다. 이게 또 다른 후유증의 예고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하지요.
저는 실명 판정을 받은 후로도 하루가 다르게 시력이 떨어져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사는 한 언제든지 또 다른 고통이 찾아올 수 있음을. 그게 삶이라는 것을. 하지만 저는 또 알고 있는 게 있습니다. 그런 고통 또한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음을….
머지않아 저는 연극무대에 오릅니다. 그것도 주인공 역을 맡아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생각에 저는 18㎏의 체중감량도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눈이 안 보여 연습과정이 불편하고 힘들지만, 요즘처럼 행복한 순간이 있었을까 싶습니다.
막이 오르고 조명이 켜지면 아내는 저의 연기를 보며 울고 웃을 겁니다. 전 보이지 않지만 아내가 잘 봅니다.그 사실이 절 들뜨게 합니다.
제가 들뜨고 꿈틀거리는 한 그토록 바라는 기적도 같이 꿈틀거릴 것입니다. 아내가 저를 향해 박수를 보내는 순간, 그 기적도 눈을 뜰 것입니다. 저는 이제 아내가 준 그 빈 그릇에 그날의 행복도 함께 담으려 합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좋은일들 만 있어지길 바라 면서.........
그럼 좋치요...
감동적인글 감사합니다~
답글 감사 합니다.
참을 느끼는 마음입니다. 감사해요.
눈물겹도록 감동적인 글 잘 읽고갑니다. 이 부부에게 더이상 안좋은 일이 생기지 않았음 좋겠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