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해방을 앞둔
1945년 2월 일본의 후쿠오카 감옥에서 안타깝게 순절한 저항 시인이다.
그가 옥사하고 3년뒤에 나온 유고시집(遺稿時集)은
그가 연희전문 졸업을 기년하기 위하여 뜻깊게 남긴
자필시고(自筆時稿) 3부 중에서 1부를 유일하게 보관하던
친구 정병욱과 아우 윤일주에 의하여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로 출간 되었다.
동주는 대부준의 작품마다 작품의 연대를 적어놓고 있는데
'자화상'이 1939년 9월로,
' 별헤는 밤'이 1941년 11월 20일로 되어 있다.
이로 보아 자필 시고 3부를 만들무폅에는
'별헤는 밤'이 가장 마지막 쓴 작품으로 추정된다.
동주는 그의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의 제목에서
시사하듯이 하늘과 별과 바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 같다.
그에게 있어서 하늘과 별은 주로 그리움과 꿈의 대상으로 나타나 있다.
이 그리움과 꿈은 자신의 삶에 대한 외로움이며 슬픔이기도 하다.
그의 시세계는 그리움과 슬품으로 점철된세계였고
그러한 세계에 대한 지향은 하늘과 바람과 별로 투영되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은 동주에게 있어서는
현실의 고로움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표상이었다.
윤동주는 해방은 눈앞에 두고
일제의 어두운 옥중에서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저항 시인이다..
그의 괴운 삶과 시편들은 오히려
어두운 밤하늘의 별처럼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살다 간 윤동주,
그는 암흑기에 산 우리 민족을 가장 투철하고
아름답게 빛낸 별의 시인이었다.
-作品解說 시인 권달웅
윤동주 시인의 시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읍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읍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 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읍니다.
서시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돌아와 보는 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든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간판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폼에
나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문자(文字)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瓦斯燈)에
불을 혀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사람들
다들 어진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골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아래로 햐안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어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도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어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든 자리에 누워 본다.
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에
가즈런히 잠을 재우시요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요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 올 게외다.
무서운 시간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 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 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십자가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읍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읍니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 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우에 섰다.
슬픈 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길
잃어버렸읍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읍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흰 그림자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로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소리
발자취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든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든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든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로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골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 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간(肝)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우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사쓰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든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위로
거미란 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 뒤뜰 난간과 꽃 밭 사이
사람 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옥외 요양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치어다보기 바르게---
나비가 한 마리 꽃밭에 날아들다 그물에 걸리었다.
노-란 날개를 퍼득거려도 파득거려도
나비는 자꼬 감기우기만 한다.
거미가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는 끝없는 실을 뽑아
나비의 온몸을 감아 버린다. 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이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 -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라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팔복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골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에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든 손을 놓고
아우의 얼골을 다시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골은 슬픈 그림이다.
유언
후어-ㄴ한 방에
유언은 소리 없는 입놀림.
바다에 진주 캐러 갔다는 아들
해녀와 사랑을 속삭인다는 맏아들
이밤에사 돌아오나 내다봐라---
평생 외롭든 아버지의 운명(殞命)
감기우는 눈에 슬픔이 어린다.
외딴집에 개가 짖고
휘양찬 달이 문살에 흐르는 밤.
창
쉬는 시간마다
나는 창녘으로 갑니다.
---창은 산 가르침.
이글이글 불을 피워 주오
이 방에 찬 것이 서립니다.
단풍잎 하나
맴도나 보니
아마도 자그마한 선풍(旋風)이 인 게외다.
그래도 싸느란 유리창에
햇살이 쨍쨍한 무렵
상학종(上學鐘)이 울어만 싶습니다.
한란계
싸늘한 대리석 기둥에 목아지를 비틀어맨 한란계
문득 들여다볼 수 있는 운명(運命)한 5척(尺) 6촌(寸)의 허리 가는 수은주
마음은 유리관보다 맑소이다.
혈관이 단조로워 신경질인 여론동물(輿論動物)
가끔 분수 같은 냉(冷) 침을 억지로 삼키기에
정력을 낭비합니다.
영하로 손구락질할 수돌네 방처럼 치운 겨울보다
해바라기 만발한 8월 교정이 이상곺소이다.
피끓는 그날이---
어제는 막 소낙비가 퍼붓더니 오늘은 좋은 날씨올시다.
동저고리 바람에 언덕으로, 숲으로 하시구료--
이렇게 가만가만 혼자서 귓속이야기를 하였읍니다.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는 아마도 진실한 세기의 계절을 따라---
하늘만 보이는 울타리 안을 뛰쳐
역사 같은 포지션을 지켜야 합니다.
양지쪽
저쪽으로 황토 실은 이 땅 봄바람이
호인(胡人)의 물레바퀴처럼 돌아 지나고
아롱진 4월 태양의 손길이
벽을 등진 섫은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
지도째기 놀음에 뉘 땅인 줄 모르는 애둘이
한 뼘 손가락이 짧음을 한함이여.
아서라!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깨어질까 근심스럽다.
이런 날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금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로의 건조한 학과(學課)로
해말간 권태(倦怠)가 깃들고
'모순(矛盾)' 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눈 감고 간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었든 눈을 와짝 떠라.
가슴1
소리 없는 북
답답하면 주먹으로
뚜다려 보오.
그래 봐도
후----
가아는 한숨보다 못하오.
가슴2
불꺼진 화덕을
안고 도는 겨울밤은 깊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삶과 죽음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하늘 복판에 알 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들!
종달새
종달새는 이른 봄날
질디진 거리의 뒷골목이
싫더라.
명랑한 봄 하늘
가벼운 두 나래를 펴서
요염한 봄노래가
좋더라
그러나
오날도 구멍 뚫린 구두를 끌고
훌렁훌렁 뒷거리길로
고기 새끼 같은 나는 헤매나니
나래와 노래가 없음인가
가슴이 답답하구나
비 애
호젓한 세기(세기)의 달을 따라
알 듯 모를 듯한 데로 거닐고저!
아닌밤중에 튀기듯이
잠자리를 뛰쳐
끝없는 광야를 홀로 거니는
사람의 심사는 외로우려니
아-- 이 젊은이는
피라밋처럼 슬프구나
트루게네프의 언덕
나는 고개길을 넘고 있었다......그때 세 소년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니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면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니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를 넘어갔다.
언덕 우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장미 병들어
장미 병들어
옮겨 놓을 이웃이 없도다.
달랑달랑 외로이
황마차(幌馬車) 태워 산에 보낼거나
뚜--- 구슬피
화륜선(火輪船) 태워 대양(大洋)에 보낼거나
프로팰러 소리 요란히
비행기 태워 성층권(成層圈)에 보낼거나
이것 저것
다 그만두고
자라가는 아들이 꿈을 깨기 전
이내 가슴에 묻어다오.
오후의 구장
늦은 봄 기다리던 토요일날
오후 세시 반의 경성행 열차는
석탄 연기를 자욱이 품기고
한몸을 끄을기에 강하던
공이 자력을 잃고
한모금의 물이
불붙는 목을 축이기에
넉넉하다.
젊은 가슴의 피 순환이 잦고
두 철각이 늘어진다.
검은 기차 연기와 함께
푸른 산이
아지랭이 저쪽으로
가라앉는다.
모란봉에서
앙당한 소나무 가지에
훈훈한 바람의 날개가 스치고
얼음 섞인 대동강물에
한나절 햇발이 미끌어지다.
허물어진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
저도 모를 이국말로
재잘대며 뜀을 뛰고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
꿈은 깨어지고
잠은 눈을 떴다.
그윽한 유무(幽霧)에서.
노래하는 종달이
도망쳐 날아나고
지난날 봄타령하든
금잔디밭은 아니다.
탑은 무너졌다
붉은 마음의 탑이----
손톱으로 새긴 대리석탑이----
하로저녁 폭풍에 여지없이도
오오 황폐의 쑥밭
눈물과 목메임이여!
꿈은 깨어졌다.
탑은 무너졌다.
이 별
눈이 오다 물이 되는 날
잿빛 하늘에 또 뿌연내 그리고
크다란 기관차는 빼--액--울며
조고만 가슴은 울렁거린다.
이별이 너무 재빠르다, 안타깝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일터에서 만나자 하고---
더운 손의 맛과 구슬 눈물이 마르기 전
기차는 꼬리를 산굽으로 돌렸다.
별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차 있읍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하나에 추억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동경과
별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짬,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읍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우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섭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손으로 따뜻한 볼을 씃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골 --- 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골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어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골 --- 아름다운 순이의
얼골은 어린다.
눈 오는 지도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우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히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든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꼬 나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어 나서면 년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도 눈이 나리리라.
태초의 아침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
또 태초의 아침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 온다.
무슨 계시(啓示)일까.
빨리
봄이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가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사랑스런 추억
봄이 오든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차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東京)교외 어는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차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 아아 젊은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흐르는 거리
으스럼히 안개가 흐른다. 거리가 흘러 간다. 저
전차, 자동차, 모든 바퀴가 어디로 흘리워 가는 것
일까? 정박할 아무 항구도 없이, 가련한 많은 사
람들을 실고서, 안개 속에 잠긴 거리는
거리 모퉁이 붉은 포스트상자를 붙잡고 섰을라
면 모든 것이 흐르는 속에 어렴풋이 빛나는 가로
등, 꺼지지 않는 것은 무슨 상징일까? 사랑하는
동무 박(朴)이여! 그리고 김(金)이여! 자네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끝없이 안개가 흐르는데
'새로운 날 아침 우리 다시 정답게 손목을 잡아
보세' 몇자 적어 포스트 속에 떨어뜨리고, 밤을
세워 기다리면 금휘장(金徽章)에 금단추를 삐었고
거인처럼 찬란히 나타나는 배달부, 아침과 함께
즐거운 내임, 이 밤을 하염없이 안개가 흐른다.
산협의 오후
내 노래는 오히려
섦은 산울림.
골짜기 길에
떨어진 그림자는
너무나 슬프구나
오후의 명상은
아- 졸려.
봄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어 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사랑의 전당
순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든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에 들어갔든 것이냐?
우리들의 전당은
고풍(古風)한 풍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
순아 암사슴처럼 수정눈을 나려감어라.
난 사자처럼 엉크린 머리를 고루련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성스런 촛대에 열(熱)한 불이 꺼지기 전
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에 부닥치기 전
나는 영원한 사랑을 안은 채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련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험준한 산맥이 있다.
이적
발에 터부한 것을 다 빼어버리고
황혼이 호수 우로 걸어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
내사 이 호수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워온 것은
참말 이적이외다.
오늘 따라
연정(戀情), 자홀(自惚), 시기(猜忌), 이것들이
자꼬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료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없이
물결에 씻어보내려니
당신은 호면(湖面)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비오는 밤
솨! 철썩! 파도소리 문살에 부서져
잠 살포시 꿈이 흩어진다.
잠은 한낱 검은 고래 떼처럼 설레어
달랠 아무런 재주도 없다.
불을 밝혀 잠옷을 정성스레 여미는
삼경.
念願.
동경의 땅 강남에 또 홍수질것만 싶어
바다의 향수보다 더 호젓해진다.
달 같 이
연륜이 자라듯이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
가슴 하나 뻐근히
연륜처럼 피어 나간다.
바다
실어다 뿌리는
바람조차 시원타.
솔나무 가지마다 샛춤히
고개를 돌리어 뻐들어지고
밀치고
밀치운다.
이랑을 넘는 물결은
폭포처럼 피어오른다.
해변에 아이들이 모인다
찰찰 손을 씻고 구보로.
바다는 자꼬 섧어진다.
갈매기의 노래에......
돌아다보고 돌아다보고
돌아가는 오늘의 바다여!
소낙비
번개, 뇌성, 왁자지끈 뚜다려
머--ㄴ 도회지에 낙뢰(落雷)가 있어만 싶다.
벼루짱 엎어논 하늘로
살 같은 비가 살처럼 쏟아진다.
손바닥만한 나의 정원이
마음같이 흐린 호수되기 일쑤다.
바람이 팽이처럼 돈다.
나무가 머리를 이루잡지 못한다.
내 경건한 마음을 모셔드려
노아 때 하늘을 한모금 마시다.
장
이른 아침 아낙네들은 시들은 생활을
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
업고 지고...... 안고 들고......
모여드오, 자꾸 장에 모여드오.
가난한 생활을 골골이 벌여 놓고
밀려 가고 밀려 오고......
저마다 생활을 외치오..... 싸우오.
왼하로 올망졸망한 생활을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쓴 생활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
산골물
괴로운 사람아 괴로운 사람아
옷자락 물결 속에서도
가슴속 깊이 돌돌 샘물이 흘러
이 밤을 더불어 말할 이 없도다.
거리의 소음과 노래 부를 수 없도다.
그신 듯이 냇가에 앉았으니
사랑과 일을 거리에 맽기고
가만히 가만히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명상
가츨가츨한 머리칼은 오막살이 처마끝
쉬파람에 콧마루가 서운한 양 간질키오.
들창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
이밤에 연정은 어둠처럼 골골히 스며드오.
풍경
봄바람을 등진 초록빛 바다
쏟아질 듯 쏟아질 듯 위태롭다.
잔주름 치마폭의 두둥실거리는 물결은
오스라질 듯 한끝 경쾌롭다.
마스트 끝에 붉은 깃발이
여인의 머리칼처럼 나부낀다.
이 생생한 풍경을 앞세우며 뒤세우며
외--ㄴ하로 거닐고 싶다.
---우중충한 5월 하늘 아래로
---바닷빛 포기포기에 수놓은 언덕으로.
황혼이 바다가 되어
하로도 검푸른 물결에
흐느적 잠기고......잠기고......
저--왼 검은 고기 떼가
물든 바다를 날아 횡단할고.
낙엽이 된 해초
해초마다 슬프기도 하오.
서창에 걸린 해말간 풍경화.
옷고름 너어는 고아(孤兒)의 서름.
이제 첫 항해하는 마음을 먹고
방바닥에 나뒹구오......뒹구오......
황혼이 바다가 되어
오늘도 수많은 배가
나와 함께 이 물결에 잠겼을 게오.
아침
휙,휙,휙
소꼬리가 부드러운 채찍질로
어둠을 쫓아
캄,캄, 어둠이 깊다깊다 밝으오.
이제 이 동리의 아침이
풀살 오른 소엉덩이처럼 푸르오.
이 동리 콩죽 먹은 사람들이
땀물을 뿌려 이 여름을 길렀소.
잎,잎,풀잎마다 땀방울이 맺혔소.
구김살 없는 이 아침을
심호흡하오, 또 하오.
빨래
빨래줄에 두 다리를 드리우고
흰 빨래들이 귓속이야기하는 오후
쨍쨍한 7월 햇발은 고요히도
아담한 빨래에만 달린다.
산림
시계(時計)가 자근자근 가슴을 따려
불안한 마음을 산림이 부른다.
천년 오래인 연륜에 짜들은 유암(幽暗)한 산림이
고달픈 한몸을 포옹할 인연을 가졌나 보다.
산림의 검은 파동 우으로부터
어둠은 어린 가슴을 짓밟고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바람이
솨--- 공포에 떨게 한다.
멀리 첫여름의 개고리 재질댐에
흘러간 마을의 과거는 아질타.
나무틈으로 반짝이는 별만이
새날의 희망으로 나를 이끈다.
닭
한간 계사(鷄舍) 그 너머 창공이 깃들어
자유의 향토를 잊은 닭들이
시들은 생활을 주잘대고
생산의 고로를 부르짖었다.
음산한 계사에서 쏠려 나온
외래종 레구홍,
학원에서 새무리가 밀려 나오는
3월의 맑은 오후도 있다.
닭들은 녹아드는 두엄을 파기에
아담한 두 다리가 분주하고
굶주렸든 주두리가 바즈런하다.
두 눈이 붉게 여므도록-----
비둘기
안아보고 싶게 귀여운
산비둘기 일곱 마리
하늘 끝까지 보일 듯이 맑은 공일날 아침에
벼를 거두어 빤빤한 논에
앞을 다투어 모이를 주으며
어려운 이야기를 주고 받으오
날씬한 두 나래로 조용한 공기를 흔들어
두 마리가 나오
집에 새끼 생각이 나는 모양이오.
산상
거리가 바둑판처럼 보이고
강물이 배암의 새끼처럼 기는
산 우에까지 왔다.
아직쯤은 사람들이
바둑돌처럼 버려 있으리라.
한나절의 태양이
함석지붕에만 비치고
굼벙이 걸음을 하든 기차가
정차장에 섰다가 검은 내를 토하고
또 걸음발을 탄다.
텐트 같은 하늘이 무너져
이 거리를 덮을까 궁금하면서
좀더 높은 데로 올라가고 싶다.
황혼
햇살은 미닫이 틈으로
길죽한 일(一)자를 쓰고......지우고......
까마귀 떼 지붕 우으로
둘, 둘, 셋, 넷, 자꼬 날아 지난다.
쑥쑥, 꿈틀꿈틀 북쪽 하늘로
내사......
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 싶다.
남쪽하늘
제비는 두 나래를 가지었다.
시산한 가을날------
어머니의 젖가슴이 그리운
서리 나리는 저녁------
어린 영(靈)은 쪽나래의 향수를 타고
남쪽 하늘에 떠돌 뿐---
창공
그 여름날
열정의 보푸라는
오려는 창공의 푸른 젖가슴을
어루만지려
팔을 펼쳐 흔들거렸다.
끓는 태양 그늘 좁다란 지점에서
천막같은 하늘 밑에서
떠들던 소나기
그리고 번개를
춤추든 구름은 이끌고
남방으로 도망하고
높다랗게 창공은 한폭으로
가지 우에 퍼지고
둥근 달과 기러기를 불러 왔다.
푸르른 어린 마음이 이상에 타고
그의 동경의 날 가을에
조락(凋落)의 눈물을 비웃다.
거리에서
달밤의 거리
광풍이 휘날리는
북국의 거리
도시의 진주(眞珠)
전등 밑을 헤엄치는
조그만 인어, 나
달과 전등에 피쳐
한몸에 두셋의 그림자
커졌다 작아졌다.
괴롬의 거리
재색빛 밤거리를
걷고 있는 이 마음
선풍(旋風)이 일고 있네
외로우면서도
한 갈피 두 갈피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
푸른 공상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초한대
초 한 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면인 심지(心志)
백옥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오줌싸개지도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호주머니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해바라기 얼굴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귀뜨라미와 나와
귀뜨라미와 나와
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아무에게도 아르켜주지 말고
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귀뜨라미와 나와
달밝은 밤에 이야기했다.
사과
붉은 사과 한 개를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셋이서
껍질 채로 송치까지
다아 나눠 먹었소.
반딧불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 주으려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으려
숲으로 가자.
애기의 새벽
우리 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
햇빛.바람
손가락에 침 발러
쏘옥 쏙 쏙
장에 가는 엄마 내다보려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아침에 햇빛이 반짝
손가락에 침발러
쏘옥 쏙 쏙
장에 가신 엄마 돌아오나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저녁에 바람이 솔솔.
닭
---닭은 나래가 커도
왜 날잖나요
---아마 두엄 파기에
홀 잊었나봐.
둘 다
바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끝없고
하늘도 끝없고
바다에 돌 던지고
하늘에 침 뱉고
바다는 벙글
하늘은 잠잠.
밤
오양간 당나귀
아-ㅇ 외마디 울음울고
당나귀 소리에
으-아 아 애기 소스라쳐 깨고
등잔에 불을 다오.
아버지는 당나귀에게
짚을 한키 담아 주고
어머니는 애기에게
젖을 한모금 먹이고
밤은 다시 고요히 잠드오.
참새
가을 지난 마당은 하이얀 종이
참새드링 글씨를 공부하지요.
째액째액 입으로 받아읽으며
두 발로는 글씨를 연습하지요.
하로 종일 글씨를 공부하여도
짹자 한 자밖에는 더 못 쓰는걸.
나무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산울림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 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 혼자 들었다.
산울림
무얼 먹고 사나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어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어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햇비
아씨처럼 나린다
보슬보슬 햇비
맞아 주자 다 같이
옥수숫대처럼 크게
닷자 엿자 자라게
햇님이 웃는다
나 보고 웃는다.
하늘다리 놓였다
알롱알롱 무지개
노래하자 즐겁게
동무들아 이리 오나
다 같이 춤을 추자
햇님이 웃는다
즐거워 웃는다
버선본
어머니
누나 쓰다 버린 습자지는
두었다가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드니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오려
버선본 만드는걸.
어머니
내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은
두었다가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드니
천 우에다 버선본 놓고
침 발러 점을 찍곤
내 버선 만드는걸.
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봄
우리 애기는
아래발치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부뚜막에서 가릉가릉
애기 바람이
나뭇가지에서 소올소올
아저씨 햇님이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째앵.
굴뚝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만돌이
만돌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전보대 있는 데서
돌짜기 다섯 개를 주웠읍니다.
전보대를 겨누고
돌 첫개를 뿌렸읍니다.
---딱---
두개째 뿌렸읍니다.
---아뿔사---
세 개째 뿌렸읍니다.
---딱---
네 개째 뿌렸읍니다.
---아뿔사---
다섯 개째 뿌렸읍니다.
---딱---
다섯 개에 세 개......
그만하면 되었다.
내일 시험
다섯 문제에 세 문제만 하면--
손꼽아 구구를 하여봐도
허양 육십 점이다.
볼 거 있나 공차러 가자.
그 이튿날ㄹ 만돌이는
꼼짝 못하고 선생님한테
흰 종이를 바쳤을까요
그렇잖으면 정말
육십 점을 받았을까요
기왓장 내외
비오는 날 저녁에 기왓장 내외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선지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 웁니다.
대궐 지붕 위에서 기왓장 내외
아름답든 옛날이 그리워선지
주름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봅니다.
병아리
뾰뾰뾰
엄마 젖 좀 주
병아리 소리.
꺽꺽꺽
오냐 좀 기다려
엄마닭 소리.
좀 있다가
병아리들은.
엄마 품속으로
다 들어 갔지요.
조개껍질
아롱다롱 조개껍데기
울 언니 바닷가에서
주어 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다 물소리.
고추밭
할머니는 바구니를 들고
밭머리에서 어정거리고
손가락 너어는 아이는
할머니 뒤만 따른다.
시들은 잎새 속에서
고 빠알간 살을 드러내 놓고
고추는 방년(방년)된 아가씬 양
땍볕에 자꼬 익어 간다.
고향집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비행기
머리에 프로펠러가
연자간 풍체보다
더---- 빨리 돈다.
따에서 오를 때보다
하늘에 높이 떠서는
빠르지 못하다
숨결이 찬 모앙이야.
비행기는--
새처럼 나래를
펄럭거리지 못한다.
그리고 늘--
소리를 지른다.
숨이 찬가봐.
내일은 없다.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동무여!
내일은 없나니
......
눈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워요.
길바닥에
말똥 동그램이
달랑달랑
얼어요.
개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거짓부리
똑 똑 똑
문 좀 열어주세요
하루밤 자고 갑시다.
밤은 깊고 날은 추운데
거 누굴까?
문 열어주고 보니
검둥이의 꼬리가
거짓부리한걸.
꼬기요 꼬기요
달걀 낳았다.
간난아 어서 집어 가거라
간난이 뛰어가 보니
달걀은 무슨 달걀
고놈의 암탉이
대낮에 새빨간
거짓부리한걸.
눈2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비로봉
만상을
굽어보기란---
무릎이
오들오들 떨린다.
백화
어려서 늙었다.
새가
나비가 된다.
정말 구름이
비가 된다.
옷자락이
칩다.
빗자루
요오리 조리 베면 저고리 되고
이이렇게 베면 큰 총 되지.
누나하고 나하고
가위로 종이 쏠았더니
어머니가 빗자루 들고
누나 하나 나 하나
엉덩이를 때렸소
방바닥이 어지럽다고-----
아아니 아니
고놈의 빗자루가
방바닥 쓸기 싫으니
그랬지 그랬어
괘씸하여 벽장 속에 감췄드니
이튿날 아침 빗자루가 없다고
어머니가 야단이지요.
윤동주 - 작가연보
1917년 (1세)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이 파평인 부친 윤영석과, 독립운동가,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 선생의 누이 김용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다.
윤동주가 태어난 명동촌은 외삼촌 김약연 선생이 일찍이
이 지방에 이주해 들어와 개척한 지역으로 교육과 종교,
독립운동이 다른 어느곳보다 활발했던 곳이다.
1910년에는 조부 윤하현이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
윤동주가 태어날 무렵에는 장로직을 맡게 되는데,
윤동주는 태어나자 유아 세례를 받는다.
윤동주는 본명이며 어릴 때 불리던 이름은 해환이다.
뒤에 [카톨릭 소년]지에 동요를 발표할 때 '윤동주(동주)'
또는 '윤동주(동주)'라는 필명을 쓴 젓이 있다.
윤동주의 형제로는 누이 윤혜원, 동생 윤일주(성균관대 교수),
윤광주가 있다.
1925년 (9세) :4월 4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에 있는
명동 소학교에 입학. 명동 소학교는 외삼촌 김약연이 설립한
규암서숙을 명동 소학교와 명동 중학교를 발전시킨 것으로,
윤동주가 재학할 당시는 중학교는 폐교된 상태였다.
당시의 급우로는 함께 옥사한 고종 사촌 송몽규, 문익환,
외사촌 길정우 등이 있다.
1927년 (11세) : 12월, 동생 一柱 태어남.
1929년 (13세) :송몽규 등의 급우와 함께 벽보 비슷한
'세명동'이라는 등사판 문예지를 간행.
이 무렵 썼던 동요, 동시 등의 작품을 발표.
1931년 (15세) :3월 25일, 명동 소학교를 졸업.
송몽규, 김정우와 명동에서 30리 남쪽에 있는 중국인 도시
대랍자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
1932년 (16세) :4월,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미션계
은진중학교에 입학. 재학중 급우들과 함께 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 선수로도 활약.
1934년 (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 한 대', '내일은 없다'
세편의 시 작품을 쓰다.
이날 이후 모든 자작품에 시를 쓴 날자 명기.
1935년 (19세) ;은진중학교에서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
숭실중학 시절 '남쪽 하늘', '창공', '거리에서',
'조개껍질' 등의 시를 씀.
1936년 (20세) :숭실중학교 폐교,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
간도 연길지방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지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 발표.
1935년 (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연희전문 문과에 송몽규와 함께 입학.
1941년 (25세) :연희전문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지에 '자화상',
'새로운 길'을 발표. 12월 27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
19편으로 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미간.
이 무렵 윤동주의 집에서는 일제의 탄압에 못이기고,
또한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함.
1942년 (26세)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
가을(10월 1일)에는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편입.
1943년 (27세) :7월, 첫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교토대학에 재학중인 송몽규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교토 키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됨(7월 14일).
1944년 (28세) :2월 22일 기소되고, 3월 31일,
일제 당국의 재판 결과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형(3년 구형)
언도받아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1945년 (29세) :"2월 16일, 윤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라는
전보가 윤동주의 옥사 사실을 알려옴.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일춘이 일본으로 건너감.
송몽규도 윤동주가 죽은 뒤 23일 만인 3월 10일 옥사.
3월 초, 용정 동산에 안장.
1947년 2월 16정지용, 안병욱, 이양하, 김삼불, 정병욱 등
30여명이 모여 소공동 플로워 회관에서 윤동주 2주기 추도 모임을 갖다.
1948년 1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으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
1955년 2월 10주기 기념으로 유고를 보완,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어 다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음사에서 간행.
1968년 11월 2일 연세대학교 학생회 및 문단, 친지 등이
모금한 돈으로 연희전문 시절에 지내던 기숙사 앞에 시비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