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큰 성- 프라하 성 스토리투어(마지막회)
오늘은 프라하성을 둘러보는 마지막 시간이다. 화약탑으로 불리는 미훌까와 성 이르지 바실리카, 현재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 성 이르지 수녀원, 너무도 유명한 황금 골목 등이 오늘 둘러보게 될 장소들이다.
화약탑 (미훌까)
구 왕궁을 둘러본 후 성 비뜨 대성당의 뒷부분을 볼 수 있는 성 이르지 광장으로 나와 성 비뜨대 성당과 북쪽 성벽 사이의 그늘진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미훌까를 만나게 된다.
이르지 광장에서 바라본 비뜨대 성당
미훌까는 15세기 말, 건축가 베네딕트 레이트가 프라하성의 북쪽 성벽을 새로이 건축할 당시 함께 제작된 방어용 탑이다. 프라하 성 중에서도 조금 외진 곳에 있고 또 큰 코스 입장권을 사야 하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그리 많지 않지만 ‘프라하 군사역사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중세 무기와 모형 등의 볼거리들을 제공하고 있는 곳이다.
장난감처럼 예쁘게 생긴 대포와 투척기, 투구, 총기류 등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그 설명들은 무기와 전쟁 등에 관한 상식을 넓혀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미훌까 내부의 다양한 전시물
미훌까라는 이름은 칠성장어를 뜻하는 체코어 'mihule'에서 왔는데 이 탑의 모양이 칠성장어의 몸통처럼 둥글기 때문이었다. 중세시대에는 이런 둥근 모양의 탑을 종종 미훌까라고 불르기도 하는데 이 탑은 성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매우 견고하게 제작되었으나 실제로 전쟁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될 기회는 없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 탑은 종을 만드는 장인들의 작업공간으로 사용되었는데 왕실정원에 있는 ‘노래하는 분수대’와 성비뜨 대성당의 ‘지그문트 종’이 바로 이곳에서 제작되었다. 또한 이 탑은 루돌프2세 때 연금술사들의 작업실로도 사용되었다. 화약탑이라는 이름은 30년 전쟁 때 이곳에 화약을 저장해 놓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 이르지 바실리카
미훌까를 보고 다시 이르지 광장 쪽으로 나와 성 이르지 바실리카를 둘러보도록 하자. 먼저 이르지(Jiri)라는 이름이 생소하게 들릴 텐데 이것은 영어이름 조지(George)의 체코식 이름이다. 그러니까 영어로는 ‘성 조지 바실리카’ 인 것이다.
광장에서 보면 겉모습이 깨끗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 건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성 이르지 바실리카는 프라하 성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에 속한다.
건물 상당 중앙에는 용과 싸우는 성 이르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당의 정면에 보면 가장 위쪽에 용과 싸우는 성 이르지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아래쪽 양 옆에 어떤 여자와 남자의 모습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왼편에 있는 여자는 성 이르지 수녀원의 건립자이자 초대 원장이었던 믈라다(Mlada)이고 오른편에 있는 남자는 이 성당을 세운 대공 브라띠슬라브 1세이다.
사진 (좌측) 이르지 수녀, (우측) 믈라다
그가 이 성당을 처음 짓기 시작한 것이 921년이니 성당의 기원이 무려 천 년이 넘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지만 애석하게도 그때 세워진 부분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고 지금의 건물은 1142년 개축된 것으로 이 역시 여러 차례의 개축을 거친 결과물이다.
성 이르지 바실리카는 성 바?라프의 할머니이자 체코의 수호성인 중 한 사람인 성 루드밀라의 묘가 있는 곳이다. 실내로 들어가 보면 그다지 화려한 장식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별다른 감흥 없이 둘러보고 나올 수도 있겠지만 내부에 있는 유물들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그 느낌은 물론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르지 바실리카의 내부
성당의 동쪽부분에는 체코 왕족들의 묘가 있는데 회중석과 성가대석 사이에 있는 세 개의 묘 중 오른편에 있는 오두막 모양의 묘가 이 성당을 세운 브라띠슬라브1세의 것이다. 그 뒤편으로 멋스럽게 생긴 계단들이 있고 그 위에 성가대석이 있다. 성가대석 위의 색 바랜 프레스코는 ‘천상의 예루살렘’이라는 작품으로 부분적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아 그 원형을 볼 수는 없으나 다 떨어져 나간 얼룩덜룩한 무늬에서 오랜 세월을 지낸 이 성당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프레스코
성가대석 아래의 오른쪽, 그러니까 남쪽 부분에 성가대석과 맞닿아 있는 작은 채플이 있는데 이곳이 성 루드밀라의 채플이며 그 안에 성 루드밀라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대공 보르지보이의 아내였던 루드밀라는 922년 며느리인 드라호미라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 후 3년 뒤인 925년 그녀의 시신이 현재 위치에 안치되었다.
성당의 남쪽 벽을 따라 출구 쪽으로 다시 나가는 길엔 20세기 초에 이루어 진 프라하 성 유물 발굴작업에 대한 기록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성 이르지 광장과 그 주변부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작업을 통해 옛 왕족들의 유해와 유물들을 찾아낼 수 있었는데 그 중 일부가 상설전시 ‘프라하 성 이야기’와 프라하성의 건물 곳곳에 전시되고 있다.
프라하 성 유물 발굴 작업에 대한 기록 사진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성 이르지 바실리카는 현재 미사를 드리는 성당으로서의 기능은 하지 않는다. 대신 매일 저녁 콘서트가 열리는데 큰 규모의 콘서트는 아니지만 저녁 무렵 고즈넉한 시간에 조용한 프라하성에서 클래식 음악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여행자들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성 이르지 바실리카와 붙어있는 성 이르 지 수녀원은 현재 체코 민족갤러리로 쓰이고 있다. 이 수녀원은 체코에서 최초로 세워진 수녀원으로서 대공 볼레슬라브2세의 누이였던 믈라다가 외교적인 목적으로 로마를 방문한 후 교황청으로부터 프라하에 주교청과 수녀원을 세울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아가지고 와서 973년에 건립한 것이다.
수녀원 안에는 건물들로 둘러싸인 사각의 궁정이 있는데 ‘낙원의 궁정’ 이라는 이름의 이 궁정 아래서는 지금도 중세 유적들을 발굴하고 있다. 민족갤러리로 쓰이고 있는 수녀원의 내부는 여느 미술관처럼 매우 조용하다. 주로 바로크시대의 회화와 조각이 주를 이루고 있는 이곳의 작품들은 예술을 사랑했던 황제 루돌프2세 때 수집된 것들이며 17, 18세기 체코 미술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진귀한 미술작품들이다.
황금골목
황금골목은 프라하성의 북쪽 성벽의 안쪽에 형성된 작은 거리다. 동화 속에 나올듯한 색색의 작은 집들이 성벽의 통로 사이사이에 어깨를 맞대고 있는 곳. 더욱이 프란츠 카프카가 올라와 글을 쓰곤 했던 22번지 집이 남아있어 신비한 느낌을 더해주는 곳이 황금골목이다.
황금골목의 입구
황금골목을 형성하고 있는 현재의 북쪽 방어벽은 야겔론가의 블라디슬라브왕 때인 1484년에 건립되기 시작했다. 바?라프 4세 이후 후스전쟁이 일어나면서 왕들은 그때까지의 자신들의 거주지였던 프라하 성을 버리고 구도시의 왕궁에서 거처했는데 야겔론가의 블라디슬라브 때에 이르러서야 다시 성으로 복귀할 수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대대적인 성 개축공사가 필요했다.
성의 바깥쪽, 브루스니쩨 강이 흐르는 사슴해자의 위쪽 언덕일 뿐이었던 이곳에 성의 방어체계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한 성벽건설 사업으로 건축가 베네딕트 레이트에 의해 세 개의 탑 (화약탑: 미훌까, 백탑과 달리보르까)과 함께 현재의 성벽이 건립되었다. 당시 최고수준의 성벽건축기술로 만들어진 이 방어벽은 두께가 3미터가 넘었다. 두 층으로 되어있는 성벽 안쪽 통로는 지붕으로 덮여있었고 통로의 아래층은 2.8미터에서 3.4미터 두께의 기둥을 가진 아치가 이어져 있어 그 사이로 6-6.6미터의 넓이와 1.2미터 깊이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1541년 대 화재가 일어나기 전부터도 분명 이곳은 사람들의 거처로 이용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1560년대에 이르러서야 발견되는데 그때 이곳이 '금세공업자들의 작은 거리 (Zlatnicka ulicka)'라고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에 살던 금세공업자들은 영세한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큰 도시였던 구도시, 소도시 그리고 신도시의 길드에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이 작은 지역에 모여 살며 그들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황금 골목의 전경
루돌프 2세의 치세인 1591-94년에 성벽은 다시 개축된다. 그때 한층 더 쌓이게 된 성벽의 높이가 지금의 높이인데 현재 우리가 둘러볼 수 있는 통로가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금세공업자들이 살던 남루한 집들은 이때 모두 철거되었다. 성벽이 개축된 이후 백탑과 달리보르까 사이에는 21개의 아치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 아치들은 4미터 넓이 2.2미터 깊이의 공간을 가지고 있었고 이 공간은 다시 한번 사람들의 거처로 쓰이게 된다. 이곳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번에는 성을 지키던 병사들이었다.
1597년, 프라하성의 성문을 지키던 수비병들은 루돌프 2세에게 이곳에 자신들의 거처를 만들 수 있도록 요청하였고 1597년 9월 16일 루돌프2세는 그들의 요청을 허락하는 법령을 선포했다. 이 법령에서 루돌프2세는 성을 지키는 병사로서 복무하는 기간 동안 병사들은 각각 하나의 아치를 소유할 수 있고 그들 소유의 집을 아치 안에 세울 수 있다'라고 명시했다. 그리하여 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병사들은 집을 짓는 경비까지 왕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재산으로 집을 짓기 시작했고 크고 작은 아담한 집들이 이때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집들도 남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작은 입구를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가면 화덕이 있고 작은 창문이 있는 방으로 바로 이어지며 가구라고 해야 조악한 탁자와 의자, 침대가 고작이었을 것이다.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우물도 없었기 때문에 물을 쓰기 위해서는 제3궁정의 성 이르지 수녀원 앞의 우물까지 가야 했다.
옛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황금골목 가옥의 창문
이토록 열악한 환경을 가진 이 집들은 병사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우리가 재미 삼아 둘러보고 또 예쁘고 낭만적인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 집들이 당시의 병사들에겐 힘겨운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1784년 황제 요세프 2세에 의해 '붉은 성 수비대'로 불리던 이 군 조직이 해체되면서 병사들은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병사들이 떠난 뒤에도 이곳은 계속 사람들의 거처로 이용되었다. 오히려 기존의 집들 반대편에도 집들이 생겨나면서 황금골목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는 빈민가가 되었다. 1864년에야 성벽 집들의 반대편에 있던 판자집들이 철거되었고 성벽의 원래 집들은 약간의 보수를 거쳐 점차 살만한 장소로 바뀌어 갔다.
황금 골목 집들은 현재 기념품 상점으로 이용되고 있다.
황금골목의 집들은 현재 기념품 상점으로 이용되고 있다. 시계를 파는 가게, 악기점, 유리제품을 파는 가게 등 저마다 특정 종목의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고 가장 유명한 집인 22번지 카프카의 집은 카프카의 작품들을 판매하는 서점으로 쓰이고 있다.
22번지 카프카의 집은 그의 작품을 판매하는 서점으로 골목의 기념품 상점 중 가장 유명하다.
황금골목을 효과적으로 둘러보기 위해서는 먼저 2층으로 올라가 옛 성벽의 통로를 먼저 살펴보는 게 좋다. 중세 성벽의 방어 시스템들을 부분적으로 볼 수 있는 이 통로에는 중세 기사들의 갑옷이 복도를 따라 전시되어 있고 가장 안쪽 막다른 부분에는 석궁을 쏴볼 수 있는 사격장이 있어 중세군인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황금 골목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백탑의 외부 모습과 무기 전시실
2층 통로는 백탑과 연결되어 있어 탑의 내부를 살펴볼 수 있는데 백탑 안에는 상점들 외에도 고문실과 무기 전시실 등이 있다. 2층의 통로와 백탑까지 둘러본 후 다시 내려와 황금골목의 작은 집들을 구경하면서 이동하다 보면 12번지 아래의 작은 통로 쪽으로 가게 된다. 황금골목은 이곳에서 끝나고 통로를 나오면 왼편으로 달리보르까라는 이름의 지하 감옥을 보게 된다. 중세시대에 귀족출신의 죄수들을 가두었던 곳 달리보르까를 둘러보자.
백탑 내부의 화장실과 고문실은 아직도 당시의 스산함을 느껴진다.
달리보르까
달리보르까라는 탑의 이름은 이곳에 수감되었었던 죄수 달리보르의 이름에서 나왔다. 1496년에 세워진 이 탑은 원래 감옥이라기 보다는 성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인데 처음 제작될 당시의 달리보르까는 지금보다 약 두 층 정도 더 높았으며 서쪽의 백탑과 연결되어 있었다. 달리보르까는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었으나 몇 년 전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달리보르까라는 몇 년 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달리보르는 체코의 한 귀족이었다. 그는 이웃 마을에서 악랄한 영주의 폭정에 못이긴 농노들이 봉기를 일으켰을 때 그들을 돕고 자신의 성으로 도피시켰다는 죄목으로 이곳에 갇히게 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바이올린을 배워 연주를 했고 그 음악소리를 들은 농민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감옥안으로 음식을 넣어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물론 꾸며진 이야기다.
그가 감옥에 갇혔던 15세기에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가 없었을 뿐 더러 죄수가 감옥 속에서 악기를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죄수에게 관대하지도 않았다. 이런 이야기가 생겨난 이유는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고문을 받았는데 그 고문기구 중 스크르지뻬쯔 (몸을 뒤트는 기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보르까의 지하 감옥과 고문실
그를 고문하던 간수들이 ‘달리보르가 이제 스크르지뻬쯔를 다룰 줄 알게 되었다’ 라는 말을 했기 때문인데 그것은 그가 그 고문을 받는데 조금 익숙해졌다는 의미였다. 체코어로 바이올린은 호우슬레'housle'라고 하는데 또 다른 말로는 스크르지쁘끼라고도 한다. 아마도 스크르지뻬쯔를 다룰 줄 알게 되었다는 말이 스크르지쁘끼를 다룰 줄 알게 되었다는 말로 와전되어 이러한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달리보르까 안에는 보기에도 살벌한 고문기구들이 여기저기 전시되어 있다. 보기에 별로 유쾌하진 않지만 이것들 보다 달리보르까의 성격을 더 잘 보여주는 전시물은 없을 것이다.
많은 고문기구는 달리보르까의 성격을 말해준다.
달리보르까 앞 작은 마당에서 서쪽 돌문을 통과해서 나오면 탁 트인 궁정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총리 궁정이다. 궁정 한가운데는 벌거벗은 소년의 동상이 있고 그 주변으로 카페와 기념품가게, 화장실과 장난감박물관 그리고 흑탑이 배치되어 있다.
궁정 한가운데의 소년 동상과 흑탑의 전경
또 프라하 성을 둘러보느라 지친 다리를 쉬어가라는 의미인지 돌 문 옆에는 낮은 계단이 있는 무대 같은 곳이 있는데 실제로 여름철에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공연하는 야외 무대로 쓰이는 곳이다.
궁정 주변의 계단과 야외 무대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쉼터로 쓰인다.
궁정 한쪽에 있는 흑탑은 육중한 사각뿔 모양을 하고 있는데 로마네스크 시대부터 있었던 건물이다. 13세기 까지는 이 흑탑 아래의 문이 곧 성문으로 이용되었는데 르네상스 시대에 새로운 성벽이 건축됨에 따라 성의 안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흑탑은 한때 채무자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쓰였었는데 이 감옥의 수감자들은 매우 좋은 조건 속에서 생활을 했다고 한다.
흑탑의 1층은 현재 카페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 갇혔던 죄수들은 ‘신분이 높은’ 죄수들로서 자신들의 이불이나 그 밖의 생필품들을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고 면회가 허용되었으며 편지를 쓰거나 책을 읽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흑탑은 아직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지만 그 1층이 카페로 사용되고 있으니 분위기를 대충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총리 궁정을 나와 왼쪽 아래로 내려가면 프라하 성의 동쪽 문이 나온다. 이 문을 빠져 나가면 프라하 성을 벗어나게 되는데 문 앞 옛 성벽의 잔해가 있는 곳에 전망대가 있어 시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프라하 성의 동문을 나서면 성벽의 잔해가 있는 전망대로 갈 수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체코 시내의 풍경
이렇게 대략 프라하 성을 둘러보았다. 설명을 못 한 부분이 많지만 실제로 성을 둘러보면서 더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될 것이다. 많은 부분이 개방되어 있는 곳이지만 좀 더 많은 장소들이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다음 시간에는 프라하의 유적이 아닌 다른 것을 소개하려고 한다. 프라하 성 이야기를 들어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이야기가 있는 명랑여행 노매드21
노매드 체코특파원 라? |
출처: 명랑여행총본산- 노매드21(www.nomad21.com 원문보기 글쓴이: 노매드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