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책을 쓴 유홍준 씨는 그 책에서 답사에 임하며, 우리 문화유산을 대하는 마음에 대해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건 전과 같지 않으리라” 라고하는 조선시대 한 문인의 글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작년 춘계정기답사에 이어 나에게 두 번째였던 이번답사는 지난 1년동안 키워온 역사공부에 대한 나의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에 분명, 전과 같지 않았다.
봄 정기답사, 출발
3월27일 화요일 아침.
학교 정문에 모여 들뜬 마음으로 서울을 출발했다. 흐린 날씨가 아쉬웠지만 버스를 타고 교외로 나가는 일은 항상 흥분되는 일이다. 점심때쯤 우리는 전라도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낭주식당이라는 백반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역시 전라도라 그런지 면내(面內)의 허름한 식당이었음에도, 짭짜름하면서도 정갈한 그 맛이 일품이었다.
이번 답사의 첫 코스는 특별한 역사 유적지가 아닌 (명칭상으로는)전라북도기념물 제28호 인 채석강(彩石江)이었다. 채석강은 변산반도 서쪽 끝 격포항에 그 오른쪽 닭이봉(격포항 오른쪽의 봉우리 채석강의 정상)일대 1.5km의 층암절벽과 바다를 아우르는 명칭이다. 3박4일의 일정을 너른 바다를 보며 가슴을 열고 시작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첫째날 일정은 채석강-내소사-유형원유허지-인촌 김성수 생가로 마무리 되었다.
민중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동진강을 바라보며
둘째날의 키워드는 “동학농민혁명”(운동 혹은 전쟁으로 정의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혁명이라고 하겠다)이었다. 들르는 곳곳마다 이 땅에 살아 숨셨던 그 분들의 심장소리, 함성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밟는 일은 백산성(白山城)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백산성은 1894년 3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을 필두로 한 동학 농민군이 전열을 재정비함으로써 본격적인 농민군의 체계가 구성된 곳이다. 백산은(白山)은 해발 47m의 낮은 산이라 쉽게 올라갔는데 그곳에 올라가니 너른 평야가 동진강의 물줄기를 안고 있었다. 이 백산성의 정상에는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백산성 창의비(倡義碑)가 있고 그 뒤에는 정자가 있었다. 백산성 창의비의 비문에 적혀있는 글귀 중에 마음에 와닿았던 부분이 있었다.
[國家를 磐石위에 두고자 義氣를 높이 들었던 것이다]
시대의 시간적 순서를 다르지만 그 다음으로 둘러본 곳은 고부관아터였다. 잘 알려진 대로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학정에 못이긴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킨 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다. 지금은 그 관아터가 없어지고 고부초등학교가 생겼는데, 그 초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하필이면 명예롭지 못한 그 이름을 평생 모교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쓸데없는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다. 조금만 걸어서 이동하니 군자정이란 곳을 볼 수 있었다. 정자를 지어놓고 주위에 연못을 둘러놓았다. 그곳에서 온갖 향락을 즐기며 백성들의 분노를 샀던 것이다. 그곳에서 군수로 지냈던 자들이 모두 비석을 세워놓았는데 후에 백성들에 의해 긁히고 파여진 채로 남아있는 글자가 황망하고도 허망하다.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바로 걸어서 황토현 전적지(黃土峴戰蹟地)로 향했다. 황토현(黃土峴)은 태인과 고부를 연결하는 고개로 동학농민전쟁에서 유명한 황토현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 갑오동학혁명기념탑(甲午東學革命記念塔)이 세워졌다.
이어 전봉준 고택과 말목장터 만석보터까지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 밟기를 무사히 마쳤다. 내가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오늘 하루의 일정이 내게는 한편의 역동적인 드라마처럼 펼쳐졌다. 역사의 현장의 서있는 나는 과거를 보며 현재를 보고 미래를 볼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역사가 살아 숨쉬는 천년전주
전주는 전라도의 행정, 군사, 교통, 산업, 문화의 중심지로 천년을 내려왔고 서기 900년에는 후백제의 왕도로 1392년 조선왕조의 발상지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인 남부지방의 중심지에 위치한다. 전주는 아직까지 예전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수많은 문화유적지를 지닌 전통문화예술의 고장이다. 판소리와 그 풍류에 바람을 일으키는 태극선과 합죽선의 아름다움은 오직 전주만의 멋이다. 매끄럽게 그 자태를 지니고 있는 전주천과 풍남문 그리고 시내 중심지에 약 800여채의 잘 정돈된 한옥마을이 있다.1)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전주의 첫 느낌은 전북에서 가장 큰 도시이면서도 분주하기보다는 차분하고 우아했다. 아침 일찍 도착한 곳은 풍남문(豐南門)앞이었다. 보물 제308호 풍남문은 전주의 동서남북 네 곳의 성문 중 남문으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1388년에 축성하였다. 그리고 후에 화재로 인해 1794년 개축하였다. 풍남문은 서울의 남대문과 같은 형태적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매년 12월31일에는 새해를 맞이하는 제야의 축제가 열린다.2) 풍남문에 올라가 보면 맞은편에 완산7봉이 보인다.
나를 비롯하여 이번 답사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전주”라는 도시가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 데에는 한가지 이유가 있다. 풍남문을 시작으로 전동성당, 경기전(慶基殿), 전주향교까지 모두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번거롭게 차를 타고 이동하지 않아도 되었다.그래서 삼삼오오 짝을지어 걸으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전주의 아름다운 한옥들을 보며, 한껏 분위기를 잡을 수 있었다.
사적 제339호인 경기전은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태종10년(1410)에 창건되었으며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과 시조비 경주김씨의 위패가 봉안된 조경묘와 예종대왕 태실 및 전주사고가 있다. 전주사고는 4대사고중 하나였는데 세종21년에 설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위해 만들었다. 1592년 임진왜란때 춘추관과 충주, 성주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었으나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남았다.
경기전에서 조금 더 걸어서 전주향교에 도착했다. 전주향교는 사적 제 379호로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현재의 건물은 선조때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성균관과 같이 공자의 제자를 비롯한 중국의 유학자7인과 우리나라 18현 등 통 25인을 배향하고 있다. 전주향교의 앞마당은 은행나뭇잎으로 덮여있었는데,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면, 공자는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하여 향교에 가면 으레 은행나무가 있기 마련이라고 한다. 전주향교의 대성전(大成殿)뒤로는 강학(講學)기능을 담당하는 명륜당(明倫堂)이 있었다. 우리가 갔을때는 서예를 배우는 어르신들이 명륜당 안에서 글을 쓰고 계셨는데 그 모습이 참 훈훈하게 느껴졌다.
이루어지지 않은 왕도(王都)의 꿈을 밟다 - 왕궁리오층석탑, 익산 미륵사터
벌써 답사의 마지막 날이다. 3박4일의 일정 가운데 지치기도 하지만 오늘 아침 새로운 힘이 돋는 이유는 가장 기대하고 기다려지는 미륵사터에 가게 되는 까닭이다. 답사 전에 책과 사진으로 무너진 미륵사지 석탑을 보며 그렇게 그리워했건만, 이제야 듣게 된 소식은 내게 약간의 실망을 주었다. 지금은 복원작업에 들어가서 그 미륵사지 석탑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익산 미륵사터에 앞서 먼저 도착한 곳은 지금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왕궁리유적(王宮里遺蹟)이었다.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무왕의 천도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그곳에 도착했을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아직 꽃이 피지 않지 않은 벚꽃나무와 왕궁리 5층석탑뿐이었다. 현재 발굴사무소의 조사원이 특별히 ppt 자료를 통해 왕궁리 유적과 그 발굴 현황에 대해 소개해 주었다.
차를 타고 10분정도 더 이동하여 드디어 미륵사지에 도착했다. 예상은 했지만 무너져버렸으나 아름다웠던 미륵사지 석탑은 복원을 위해 조립식 건물에 싸여 보이지 않았고 그 옆에는 복원으로 세워진 싸늘하고 정(情)없어 보이는 동탑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탑 앞에서는 왠지 사진을 찍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은 그 심초석들 만으로 미륵사지의 가람배치를 상상해야한다. 미륵사지의 앞쪽에는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 있는데 이곳은 우리의 상상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미륵사터에서 나온 유물을 물론이고 백제가 멸망하기 전, 그러니까 폐사지가 되어버리기 전의 미륵사지의 위용과 현대에 이르러 이곳을 발굴하기 시작했을 때의 모습 등이 모형으로 잘 전시되어있었다. 조선시대 때부터 폐사지가 되어버렸던 이 미륵사지의 모습을 잘 나타낸 시를 역시 <나의문화유산답사기3>에서 인용했는데, 나 역시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왕조 시절 인조때 중추부사를 지낸 이 고장 출신의 문인 소동명이 지은 "미륵사를 지나며" 이다.
옛날의 크나큰 절 이제는 황폐했네
외로이 피어난 꽃 가련하게 보이도다
기준왕 남하하여 즐겨놀던 옛터건만
석양에 방초만 무성하구나
옛일이 감회 깊어 가던 걸음 멈추고
서러워 우는 두견 쫓아버렸네
당간지주 망주인 양 헛되이 솟아있고
석양의 구름아래 저물음도 잊었어라
답사를 마치며
‘석탑의 나라’ 한국의 기념비적 유물이라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그곳에 까지 가서 직접 보지 못한 아쉬움은 꽤 길게 이어졌다. 더군다나 앞으로도 영영 선배들이 보았던 그 탑은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음이 어찌나 아쉽고 서럽기까지 하던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기쁜 것은 이런 나를 정보시스템학과나 경영학과 학우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만큼 역사공부를 하고 그 유적과 유물을 찾아다니는 일에 대한 나의 사랑이 깊어지는 것에 대한 반증이라는 확신 때문이리라. 올 가을에는 그 사랑이 더욱 깊어지기를.
주)------------------
1)전주전통문화가이드북 p.9
2)전주전통문화가이드북 p.16
참고문헌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길잡이-전북편>,돌베개,1994
유홍준,<나의문화유산답사기3>,창작과비평사,1997
답사일정과 안내지도

[2007년 3월27일]풍남문-전동성당-경기전-전주향교

[2007년 3월30일]왕궁리오층석탑- 미륵사터
참고사진

[3월28일]백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동진강

[3월28일]고부관아터 인근의 군자정에서 본 허망한 비문

[3월28일]녹두장군 전봉준의 동상

[3월29일]전주향교 명륜당 내에서 서예연습을 하시던 어르신들

[3월29일]오랜전통을 반증하는 전주향교 앞뜰의 나무(나무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3월30일]왕궁리오층석탑

[3월30일] 이 조립식건물안에 미륵사지석탑이 복원되고있다.

[3월30일]해체된 미륵사지 석탑

볕이 좋았던 전주향교 명륜당 마루에 앉아 2007.3.39
답사 잘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