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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de Toulouse―Lautrec (1864.11.24~1901.9.9) 로트랙
프랑스의 화가. 알비 출생. 본명 Henri Marie Raymondde Toulouse―Lautrec Monfa. 툴루즈에서 오랜 명문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허약했으며, 12세에 당한 추락사고로 두 다리의 골절로 평생 불구자가 되었고, 키가 152cm에 그쳤다. 아마추어 데생작가였던 아버지와 삼촌들을 따라 앙리는 일찍 그림에 눈을 뜬다. 어린 앙리가 선호한 모델은, 男자의 세계인 사냥과 말 그리고 주변 인물인 가족들이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친구인 화가 R.프랭스토에게 배웠고 1882년부터는 파리에서 코르몽(본명 F.A.Piwstre)의 지도를 받으면서 개성 있는 소묘화가(素描畵家)로서 독자적인 자질을 키워나갔다. 그는 드가를 몹시 숭배했으며, 그는 사람들의 내면을 깨뚫어 보는 눈을 가지고있었다. 곱추를 연상시키는 치명적인 신체적 장애를 치료하면서 그림을 배운 뒤 그는 스물 두살이 되던 해 집을 떠난다. 1881년 바칼로레아(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한 앙리는 1882년 아틀리에 보나에 들어가서 짧은 기간 수학한다. 앙리는 이때 사귄 젊은 예술가인 에밀 베르나르, 빈센트 반 고흐 등과 함께 조형적인 관점을 연구한다. 이 시기에 앙리는 아틀리에 동창생들, 가족, 전문 모델 등을 대상으로 수많은 초상화를 그려낸다. 인간의 얼굴에 대한 앙리의 정열은 대단한 것이었다. 작가는 임상의처럼 날카롭게 심리를 분석한 후 인문의 마음속에 숨은 비밀까지 포착하여 데생, 회화, 석판화 등 다양한 기법으로 재현해 내었다. 온전하지 못한 신체와 추한 외모로 좌절감을 떨칠 수 없었지만, 파리의 밤세계는 그에게 새로운 삶을 안겨 주었다. 카바레의 무용수와 가수, 매춘부와 서커스 단원의 천한 웃음 뒤에 가려진 인간의 비애를 그린 그의 그림은 인간의 닫힌 마음을 열어주는 사랑의 메세지를 담고 있다. 로방스 예술운동이나 학교에 메어 있지 않은 로트렉은 인상파 대표자 중에서 이와같은 미술사상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폭풍우에서도 파리 시민의 소문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이 변형된 형태는 로칼의 몽마르트의 밤의 연기에 감춰져 한밤동안 구석의 테이블에 앉아 그는 재빠르게 스켓치를 했다.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을 그 렸다. 변화무쌍한 무대, 엘레강스한 사람, 언제나 오는 사람, 쟝 아브리르, 고류, 빨래하는 사람, 물랭르쥬의 프리마돈나가 된 발레리나, 유명한 발렌타인르 데조세, 차 우 카오 슬픔을 전하는 광대사, 현란스런 의상, 슬픔과 단념,여기에는 여배우의 화장하는 방이고 무대의상을 벗어 풀어놓은 순간이 그려져 있다.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그 후 13년 동안 술집·매음굴·뮤직홀 등의 정경을 소재로 삼아 정력적으로 작품제작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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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르트의 물랭루즈는 로트렉의 전속 작업장이나 다름없었다. 19세기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부정과 거부가 주를 이루었다. 회화에서도 마찬가지로 화가들은 숭고하고 고귀한 이미지보다는 일상의 현실, 더 나아가 그 현실 속의 야릇한 매력을 화폭에 옮기려 했다. 파리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매춘부와 공연 예술가, 광대 등을 그는 우울한 화폭에 담아 냈다. 물론 그의 삶이 그 환락의 뒷골목에 도취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어둡고 그늘진 사회의 일면을 냉철하고 이성적인 눈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로트렉의 눈길은 어디까지나 방관자적인 입장에서의 비판이었다. 신흥 부르주아 세력에서 밀려난 그의 시선은 언제나 서글픈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게 했다. 인기 배우들의 허식과 무지, 술집 손님들의 성격을 그는 예리한 눈으로 꿰뚫어 보았다. 로트렉에게 중요한 것은 ‘이상'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그 진실을 행하기 위해 그는 어둠의 시대를 날카롭게 조명했다. 단순한 풍속화가의 차원을 넘어서 그는 화가로서 시대의 증인이 되고자 했다. 그는 어떤 유파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개성 있고 독창적인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가며 당대의 사회상을 정확하게 묘사해 냈다. 살아 있는 삶, 인간의 모습이 그에겐 작품의 주된 소재였다. 하지만 로트 |
렉의 작품은 날카로운 풍자만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그는 풍자의 비극을 넘어 있는 그대로의 진실까지도 포용한다. 로트렉은 인간을 누구보다도 사랑한 화가였다. 뒷골목의 추악함까지도 사랑할 줄 아는 화가 로트렉은 비극을 초월한 영원의 생명력을 작품에 부여했다. 로트렉은 시대에 부합된 예술사의 주의 주장에 무관심한 작가였다. 또한 예술에 대한 논의나 비평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다 |
. 따라서 그의 작품은 조형적인 예술 형식의 창조를 위해 대상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을 진지하게 표현해 내기 위해 조형적인 형식미를 창출해 냈다. 현실에 대해 냉철한 직관력을 갖고 있었던 로트렉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에 주력했다. 관찰된 대상은 예술이라는 장르를 핑계삼아 어떤 식으로든 미화되거나 이상화되지 않았다. 그의 작품 소재가 일상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그는 구체적인 대상들을 작품화했다. 특히 기법이나 양식적인 면에서 로트렉은 천재적인 소묘가였다. 물론 그의 데생은 기존의 그것과는 개념이 다르다. 대상이 지닌 본래의 선을 그는 과감하게 과장하거나 생략함으로써 독특한 개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움직이는 대상을 신속하게 화면 안에 고정시키는 재능 또한 천부적이었다. 이 같은 재능을 뒷받침 해주는 그의 힘은 정확하고 개성적인 선에 있다. 실루엣으로 표현된 인물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까지도 그는 면이 아니라 윤곽선에 의해 드러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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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색채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는 기존의 어떤 유파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유의 색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채색석판화로 만들어진 로트렉의 포스터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흔히 ‘거리의 예술'로 불리고 있는 현대 포스터의 기원을 바로 로트렉에게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로트렉에 의해 포스터는 새로운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채색석판화에 대한 관심으로 포스터를 제작했으며 결국 그에 의해서 예술 작품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밤의 환락가를 그리는 ‘퇴폐적인 화가'라는 불명예가 늘상 수식어처럼 따라다녔지만, 로트렉은 석판화와 디자인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을 탄생시키며 각광받은 화가였다. 그는 사교계를 싫어했으며 날카로운 관찰안(觀察眼)과 데생의 기법이 뛰어났으며, 유화 외에 파스텔·수채·석판(石版)에도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했다. 특히 착색석판(着色石版)을 사용한 수많은 포스터는 석판과 포스터의 걸작으로 전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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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풍자적인 화풍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유화와 더불어 석판화도 차차 높은 평가를 받았다. 89년부터는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였고 최초의 개인전은 93년에 파리에서 열었다. 그의 소묘는 날카롭고 박력 있는 표현으로 근대 소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런 소묘의 힘에 바탕을 둔 유화는 어두우면서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색조와 독자적인 작풍으로, 인생에 대한 그의 통찰과 깊은 우수를 공감하게 한다. 로트렉은 전통적인 화단에서 부각된 화가가 아니다. 기이한 행동과 스캔들, 환락가의 풍경을 그려냈던 그는 ‘퇴폐화가'라는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
1885년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한 거리 몽마르뜨에 정착해서 회화와 일러스트에 몰두한다. 몽마르뜨거리 공연해오가들을 위한싸구려 잡지 <프랑스 소식>, 조금 나은 잡지<삽화가 있는 파리>브뤼앙이 발간한 잡지 <르 미를리통>등에 앙리의 그림과 데생이 자주 실린다.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은 1888년과 1890년 <브뤼셀 살롱>에 프랑스 작가로 초대받아 전시한다. 1890년에는 <앙데팡당전>에 쇠라, 반 고흐, 루소 등과 함께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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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카바레 스타를 명작의 주인공으로 만든 바로 그 카바레<폴리베르제르>등 많은 카아이 드 툴루즈-로트렉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891년 파리에 게재된 카바레 <물랭루즈>포스터이다. 앙리에게 카바레<물랭루즈>의 장식과 연예인들은 작품의 영감을 불러바레를 드나들었다. 창녀촌에도 대단한 애착을 보인 앙리는 창녀와 그 일상 생활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이제 우리는 로트렉을 초자연적인 존재로 느끼고 있다. 그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정신이다. 그리고 그의 독립적인 정신에는 어떠한 뿌리 깊은 편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기존에 존재하는 사상을 경멸하지 않았다. 단지 모든 종류의 권위를 거부할 뿐이었다. 현대의 광고 전단지와 다양한 디자인의 포스터가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화가가 로트렉이다. 어떤 유파나 예술 사조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그는 인간의 삶을 예술로 녹여 내려는 의지가 확고한 화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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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렉은 공원에서 노는 어린아이처럼 완벽하게 자유로운 삶을 누렸다." -트리스탕 베르나르-알코올 중독과 무절제한 생활의 여파로 앙리는 성격파탄에 이르고 1899년 마침내 알코올중독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99년에는 3개월 동안 병원에 뇌이 입원하였다. 폐쇄된 병동에서 앙리는 "내 데생으로 자유를 산다"고 말하면서 기억을 통해 작업한다. 같은해 5월 퇴원한후, 먼 친척인 폴비오와 함께 르아브르, 르 크로투아, 옹플뢰르등을 여행하고 1900년 겨울에는 보르도에 정착한다. 이듬해 9월 말로메의 별장에서 요양을 하던 중 과도한 음주와 과로로 인해 37세의 앙리드툴루즈-로트렉은 <비오제독>이라 제목을 붙인 미완의 초상화를 남기고 숨을 거둔다. 그의 어머니는 아틀리에에 남겨진 아들의 작품을 전부 챙겨 고향인 알비시(市)에 기증하였다. 로트렉 Toulouse Lautrec(1864∼1901) 1864년 11월 24일, 스페인 국경에 가까운 프랑스 남부 알비에서 출생. 부친은 투르즈 백작의 직계인 알퐁스몽파 백작이고, 모친은 종매인 셀레이랑. 로트렉의 선대는 이 지방의 영주 귀족. 로트렉은 이 집안을 이어 받아야 할 종손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오랫동안 근친 결혼을 해 온 이 가계에는 어느새 건강하지 못한 피가 형성되어 허약 체질이 유전처럼 전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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