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말 무신 독재자 이의민(李義旼)은 경주 이씨가 아니다.
이선(李善), 이의민(李義旼), 이지순, 이지영 이상 이의민의 아버지와 아들 2명 등 4명은
'경주 이씨(慶州李氏)'가 아니라 정선 이씨(旌善李氏) 이다.
이의민이 경주인(慶州人)이라 기술된 것을 보고 경주 이씨로 오인하여
이상의 4명을 경주 이씨 인물란에 기재해 놓았다.
이의민(李義旼)의 아버지가 이선(李善)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경주 이씨 인물란에 나와 있는 이선(李善)이라는 인물은
공민왕(恭愍王)대에 주로 활약한 것으로 나와 있다.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치고 신돈(辛旽)이 권력을 장악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나와 있다.
경주 이씨 인물란에 나오는 이선(李善)이 이의민(李義旼)의 아버지라면
명종(明宗) 이전에 활동한 사람이라야 하는데
이 사람은 160-200년 뒤인 공민왕 때 활동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의민의 아버지가 아니다.
아마도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고 생각된다.
이의민(李義旼. ?∼1196. ?∼명종 26)은 경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소금장수 이선(李善)이며,
어머니는 옥령사의 여종인 천민 출신이었다.
이의민은 신장이 8척이고 태껸에 능해 두 명의 형과 함께
고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달이었는데
그 때문에 안찰사(按察使) 김자양(金子陽)에게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두 형은 죽고 이의민만 살아남았다.
김자양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도 살아남은 이의민을 장하게 여겨
개경(開京)을 수비하는 경군(京軍)으로 추천하였다.
뒤에 이의민은 의종을 죽인 공로로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1174년에 일어난 조위총(趙位寵)의 난 때 난을 진압하는데 큰공을 세웠다.
그 덕택으로 그는 정3품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권력자의 반열에 섰다.
결국 경대승이 죽은 후 왕명을 받고 공부상서(工部尙書)·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를 거쳐,
1191년 병부판사(兵部判事)에 이르렀다.
참위설(讖緯說)을 믿고 역모(逆謀)할 뜻으로 명사들을 포섭하고
적도(賊徒) 김사미(金沙彌)· 효심(孝心) 등과 은밀히 결탁하였으며,
벼슬을 팔고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는 등 관기를 문란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의민 부자는 전주(銓注:관리임명권)를 마음대로 하며
독재 권력을 휘둘렀으며, 그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세도를 믿고 횡포하여 인심을 잃었다.
아들 지영(至榮)이 최충헌(崔忠獻)의 동생 충수(忠粹)의 집비둘기를 빼앗은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1196년 최충헌 형제에게 미타산(彌陀山) 별장에서 살해되었다.
미타산 별장으로 놀러갔다가 마침 아들 이지순에게 모욕을 당한
최충수(최충헌의 아들)가 형을 설득하여 같이 이의민을 죽이고
이지순은 최충수가 직접 죽이고 이지광 등의 이의민의 아들들,
그리고 10족(어머니 계통 3족, 아버지 계통 4족, 형제 2족, 그리고 친구 1족으로 따짐)을
멸해 버렸다
○ 이선(李善)
고려 후기 무관. 본관은 경주(慶州).
1359년(공민왕 8)과 1361년에 홍건적을 물리치고
서경(西京;平壤)을 수복한 공으로 1363년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로
수복경성(收復京城) 2등 공신이 되고,
이어 전공판서(典工判書)로 격주홍적(擊走紅賊) 1등 공신에 녹훈되었다.
1364년 전라도의 조운(漕運)이 왜적에 의하여 막히자
경기좌도병마사가 되어 우도병마사 변광수(邊光秀)와 함께
8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조운을 돕기 위하여 출발하였으나 대도(代島)에서
적의 계략에 빠져 병마판관 이분손(李芬孫), 중랑장 이화상(李和尙) 등
많은 병사와 배를 잃고 돌아왔다.
1366년 신돈(辛旽)에 의하여 금위제조관(禁衛提調官)에 임명되어
신돈의 권력 장악에 조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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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