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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다른 목소리가 물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자식, 시침떼는 거 봐라. 김기문은 적색분자야. 독립운동을 분열시키는 적색분자야. 우리가 모르고 있는 줄 알지만 천만에......우린 속속들이 정체를 다 파악하고 있어." "그런 줄 몰랐습니다." 대치의 말이 떨어지자 여러 사람의 주먹과 발길질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대치는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이 자식, 거짓말하면 죽여 버린다! 바른대로 말해. 김기문한테서 무슨 지령을 받았어?" "그런 거 받지 못했습니다." 대치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이들에게 절대 약하게 보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너 공작원이지?" "아닙니다." "거짓말 마! 무슨 지령을 받았어? 임시정부 요인을 암살하라고 지령을 받았지?" 순간 대치는 비밀이 탄로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들이 정확히 지적해 내지를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넘겨짚고 그러는 것 같았다. "나는 임정을 도와 독립운동을 하려는 순수한 마음에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너희들이 무슨 권리로 나를 이처럼 때리는 거냐? 너희들이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나는 나대로 혼자 활동 하겠다! 사람 하나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놈들이 무슨 독립운동을 한다는 거냐!" 대치는 반말로 퍼부었다. 그의 이러한 강경한 말에 어둠 속의 사나이들은 주춤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웃음이 터지고 다시 고문이 시작되었다. "이 자식이 제법 큰 소리를 치는구나. 자백할 때까지 혼을 내!" 옷이 벗겨지고 대치의 몸에 다시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함부로 피하지마. 머리에 맞으면 골통이 부서질 테니까." 대치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쥐고 바닥에 엎어져 있엇다. 고문에 결코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문에 끝까지 버티어내야만 이들의 의심을 풀게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지하실 속은 둔탁한 소리만이 가득 찼다. "자백하라!" "할 말 없다! 내보내 달라!" "송장이 돼서 나갈 테면 나가라! 지독한 놈인데......" 대치가 자백을 하지 않자 이번에는 그의 팔을 비틀었다.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대치는 비명을 질렀다. "자백할 테냐, 안할 테나?" "이놈의 새끼들, 네놈들을 죽이고야 말 테다! 생사람을 이렇게 고문하다니 이 개놈들!" 고통에 못 이겨 대치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의 왼쪽 팔은 부러져버린 모양이었다. "독립운동을 분열시키는 놈에 대해서는 우린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인다!" "죽여라, 이놈들아!" 대치의 몸이 번쩍 들리는가 하자 이어서 첨벙 하는 소리가 났다. 사내들이 그의 몸을 들어서 물통 속에 거꾸로 처박아버린 것이다. 대치는 숨이 가빠 허우적거렸다. 물 속에서 몸부림치는 소리가 비통하게 들렸다. 숨이 넘어가지 전에 그의 머리는 위로 들어올려졌다. "말 안할 테냐!" "할 말이 없다! 거짓말을 하라는 거냐?" "이 새끼가.....정말 독종인데. 이번이 마지막이다. 바른대로 말하면 살려주겠다. 빨리 자백해!" "할 말 없다!" 침묵이 흘렀다. 무엇인가 기다리는 눈치였다. "처치해!" 조용하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치의 몸은 다시 물통 속으로 처박혔다. 그가 사지를 허둥거리며 몸부림쳤지만 사내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얼마 후 꼬르륵거리는 소리만이 몇번 들렸고 대치의 몸은 물통 속으로 축 늘어져 버렸다. 조금 후에 불이 켜졌다. 지하실은 넓었다. 청년들이 물통을 둘러싸고 서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책상을 앞에 놓고 중년이 사내가 앉아 있었다. 불빛을 받아 안경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윤홍철이었다. "끌어 내." 그가 지시를 내리자 청년들은 나무로 만든 큼직한 물통 속에서 대치의 몸을 들어올렸다. 그의 몸은 바닥에 반듯이 눕혀졌다. "그놈은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아." 하고 윤홍철이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웬만하면 다 불어버릴 텐데." 청년들 중의 하나가 말했다. "인공호흡을 시켜." 청년 두 명이 양쪽에서 대치의 다리를 붙잡고 쳐들어 올리자 다른 한 명이 잔뜩 부풀어오른 그의 배를 주먹으로 쳤다. 대치의 입에서는 물이 콰르르 하고 쏟아져 나왔다. 물이 빠지자 청년들은 대치를 엎어놓고 인공호흡을 시키기 시작했다. 십 분쯤 지나자 대치의 입에서는 가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됐다." 누군가가 안심하듯 중얼거렸다. 숨소리가 차츰 커지더니 대치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몸을 뒤틀었다. 그가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것은 반 시간쯤 지나서였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희미한 전등빛이었다. 이어서 사내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한숨 자고 난 기분이었다. 부러진 팔의 통증이 되살아나자 그는 또 얼굴을 찌푸렸다. "일어날 수 있으면 일어나 봐!" 윤홍철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대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리루 와." 대치는 윤홍철이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운홍철은 차가운 눈으로 대치를 쏘아보았다. "거기 앉아!" 대치는 안경을 끼고 있는 중년의 조선인이 지휘자라고 생각했다. "옷을 입게 해주시오." "좋아. 입어." 대치는 옷을 집어 입으려고 했으나 부러진 팔이 말을 안 들어 잘 입을 수가 없었다. 곁에 서 있던 청년이 도와주어서야 그는 겨우 옷을 입을 수가 있었다. 옷을 입고 난 그는 책상 앞에 다가가 앉았다. 윤홍철이 그에게 담배를 권하며 불을 붙여주었다. "이젠 말할 수 있겠나?" "또 자백하는 겁니까?" "그래. 우리는 꼭 듣고야 만다. 네가 지령을 받았다고 해서 너를 처벌하지는 않아.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동족을 타국에서 죽일 만큼 그렇게 잔인무도하지는 않아. 특히 젊은 사람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지. 젊은이는 얼마든지 많은 가능성이 있지않나. 젊은이들은 얼마든지 실수 할 수가 있어. 그것을 얼마나 빨리 고쳐서 올바른 길로 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지. 아무리 큰 실수를 한 젊은이일지라도 반성을 하고 우리 쪽으로 오면, 우리는 같은 동지로서 따뜻이 맞아주지. 앞이 창창한 젊은이를 함부로 죽이지는 않아. 우리는 얼마든지 기회를 주어서 조선 청년이 조국 독립을 위해서 싸워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 지금도 괜찮으니까 바른대로 말해. 넌 더구나 교육까지 받은 인텔리이기 때문에 내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대치는 여기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달콤한 말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끝까지 부인해야 한다. 그것이 이들로 하여금 나를 믿게 하는 방법이다. "거듭 말하지만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게 간단히 대꾸하지 말고 잘 생각해 봐. 나는 김기문의 지령을 받고 온 청년들을 적지않게 심문해 왔어. 우리는 현재 두 가지 적을 가지고 있어. 하나는 일본놈들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분열을 일으키는 적색분자들이야. 같은 민족이지만 내부 분열을 일으키는 적색분자는 일본놈들보다 더욱 가증스러워. 그래서 철저히 적색분자의 침투를 막고 있어. 김기문의 움직임에 대해 우리는 자세한 정보를 얻고 있기 때문에 그가 보낸 공작원은 모두가 적발되고 있어. 내가 이렇게 심문을 받고 있는 이유를 이제 알겠지? 김기문도 오래 가지는 못할 거야. 국민당 내부에 멋모르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몇 있어서 그의 생명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거야." 대치는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중년사내의 말은 맞는 것 같았다. 이들이 김기문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에게 곧 위험이 닥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김기문은 자신만만하게 활약하고 있겠지. 그러나......김기문이 어찌되든 나는 갈길을 가겠다. 노일영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를 죽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김기문이 체포되기 전에 그 조직에 들어가야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외톨박이가 되고 나의 활약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김씨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대치는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래서 무슨 지령을 받았어?" 중년의 사내가 조금 웃는 것 같았다. "그런 지령은 받지 않았읍니다." "정보가 들어온 바에 의하면......너는 중경에서 김기문과 함께 한 방에서 기거했어. 거의 한 달 가까이나 말이야. 김기문이 왜 너를 그렇게 대접해 주었지? 무슨 이유가 있어서 너를 그렇게 대접해 주었을 거란 말이야. 거기서 너를 세뇌시키고 너에게 무엇인가 중요한 지시를 내렸을 거야." 대치는 내심 크게 놀랐다. 이들이 이 정도까지 알고 있을 줄은 짐작조차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분명히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김기문의 지령내용이었다. "사실 김씨는 저를 세뇌시키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했습니다. 모택동을 찬양하고, 임정을 비난하고, 공산혁명을 주장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그의 주장은 독립운동을 분열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윤홍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꾸눈이라 청년의 얼굴 표정을 잘 읽을 수가 없었다. 이 청년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령 내용을 말해 봐." "별 지령은 없었습니다. 상해에 가서 윤홍철이라는 사람은 만나 그 사람 밑에서 일하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다음에 연락을 취하겠다고......" "어떻게 윤홍철을 만나라고 하던가?" "만나는 방법은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듣기전에 저는 그곳을 도망쳐 나왔습니다." "정말인가?" "정말입니다." 윤홍철은 두 손을 이마에 짚고 얼굴을 숙였다.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모습을 보자 대치는 자신의 거짓말이 먹혀들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한참 후에 윤홍철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정말 김기문이 싫어서 도망쳐 왔다면, 왜 윤홍철을 만나 사실을 말하지 않았지?" "있는 곳을 모르는데 어떻게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네가 거지 노릇을 할 때 며칠 동안 지켜보았어. 그때 너는 무엇인가 기다리는 눈치였어. 누구를 기다렸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헌병한테 체포될까봐 염려했을 뿐입니다." "일본을 증오하나?" "증오합니다." "일본놈을 죽일 수 있나?" "죽일 수 있습니다." "여자도 죽일 수 있어?" "네, 죄가 있다면 죽일 수 있습니다." "하긴.....네가 일본군 오장을 때려죽였다는 말은 들었다. 그렇지만 내 눈으로 직접 한번 보고 싶다." 윤홍철이 눈짓을 했다. 그러자 청년 한 명이 구석 쪽으로 다가갔다. 거기에 조그만 문이 하나 달려 있었다.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청년이 들어갔다. 조금 후 청년은 머리를 산발한 여인 하나를 끌어냈다. 여인의 옷을 갈갈이 찢겨 있었고, 온몸은 피투성이였다. 젊은 여인이었다. 뒤로 손이 묶여 있었다. "이 여자를 증오해도 좋다. 이년은 일본년이다. 그렇지만 평범한 일본 여자가 아니야. 보통 일본인이라면 우리는 손을 대지 않는다. 이년은 일본군 스파이로, 너같은 조선 출신 탈주병들을 일본군 헌병에게 많이 넘겨주어 왔어. 우리 동지도 이년이 고자질하는 바람에 두 명이나 죽었어. 중국말을 잘해서 모두가 중국 여자로 알고 있어. 죽이는 방법은 네 자유다. 단, 소리때문에 총은 안 돼." 대치는 몸을 일으켜 여인을 바라보았다. 피에 젖고 공포에 질린 얼굴이지만 남자를 반하게 할 수 있는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대치를 바라보는 눈이 애처롭게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연약한 여자가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몽둥이를 사용해도 좋고 칼을 써도 좋아. 자. 칼은 여기 있어." 윤홍철이 책상 위에 칼을 내놓았다. 그러나 대치는 그것을 잡지 않았다. "필요 없습니다." 그는 여자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여자는 뒷걸음칠을 쳤다. 그는 다시 한 걸음 다가섰다. 이 여자를 증오해야 한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때 문득 여옥의 얼굴이 떠올랐다. 열일곱 살의 가냘픈 놈으로 일본군들의 위안부가 되어 뼈와 살이 갈갈이 찢기고 짓이겨져 버린 불쌍한 소녀. 지금은 남양군도 어딘가에서 일본군들에게 또 시달리고 있던가, 아니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를 소녀. 그의 가슴 속에 조금이나마 아직도 여옥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가 젊었기 때문일까. 여옥의 얼굴이 떠오르자 일본인에 대한 중오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의 얼굴은 험상ㄱ게 일그러졌다. 이 일본 여인을 죽여야만 내 입장이 유리해진다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좀더 확실하게 살의를 갖게 했다. 아름답던 여인의 얼굴이 증오심을 가지고 보자 추한 마녀처럼 보였다. 뒷걸음치다 더이상 몸을 피할 수 없게 된 여인은 벽에 몸을 기대고 서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모두가 침을 삼키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홍철과 그 동지들은 최대치가 과연 일본 여인을 어떻게 처리할 지 몹시 긴장한 얼굴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대치는 두 손을 들어 올리려다가 왼손을 떨어뜨렸다. 왼손은 사용이 불가능했다. 온몸에 증오감을 팽배시키면서 그는 오른손을 뻗어 여인의 목을 눌렀다. 여인의 희고 가는 목은 그의 손아귀 속에 완전히 잡히고도 남았다. 여인의 얼굴이 충혈되었다. 여인은 신음을 토하면서 몸을 빼려고 몸부림쳤다. 그렇수록 대치의 힘은 가중되었다. 그는 두 다리를 버티면서 혼신의 힘으로 여인의 목을 짓눌렀다. 여인의 눈이 크게 확대되면서 불거져 나왔다. 입이 벌어지고 혀가 내밀어졌다. 땀이 소나기처럼 대치의 얼굴을 뒤덮었다. "죽어라, 이년!"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함이 터져나왔다. 미친 듯이 그는 앞으로 돌진했다. 아니, 이때만은 정말 그는 미쳐있었다. 여인은 쉽사리 숨이 넘어가지 않았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품이 허옇게 턱밑에 달라붙어 있었다. 일본군들이 점령지역에서 무고한 양민들에게 저질러 온 그 무수한 만행에 비할 때 자신의 이러한 행동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러한 생각들이 그로 하여금 조금도 손을 늦추게 하지 않았다. 이미 처참한 체험을 통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잔인한 성격을 갖게 되고 한쪽 눈까지 잃음으로써 일본에 대한 증오감이 뼈에 사무친 그는 실로 일본 여자 하나를 눌러 죽이는데 있어서 일말의 고통이나 회의, 가책 같은 것도 느끼지 않았다. 한참 후 여인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여인은 목이 뽑힌 닭처럼 목이 길게 늘어지면서 몸이 밑으로 처져내렸다. 대치가 손을 놓자 그녀는 무릎을 꺾으면서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졌다. 그녀는 충격에 조금 움직이는 것 같았으나 그것도 이내 그치고 말았다. 대치의 이 잔혹하고 대담한 행동에 모두가 놀랐다. 그들도 극렬한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을 죽이는 일이 많았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여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누구보다 가장 놀란 사람은 윤홍철이었다. 그는 가슴속으로 서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어떤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청년의 맹렬한 폭발성, 일본에 대한 증오감, 그 대담한 행동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청년들을 겪어 보았지만 이런 청년은 처음인 것 같았다. 누군가가 잘만 이끌어주면 크게 될 인물, 그렇지 않으면 가장 위험스러운 인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쳐갔다. 이어서 그는 "무서운 놈이다"하고 생각했다. 청년들은 죽은 여자의 시체를 별실에다 끌어다 놓고 문을 닫았다. 대치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결렬한 행동 끝에 오는 허전한 기분이 그를 엄습하고 있었다. "훌륭하다. 오늘은 이만 가봐." 윤홍철이 일어서서 대치의 어깨를 툭 쳤다. 청년의 안내를 받아 중국집으로 돌아온 대치는 여자를 눌러죽인 오른손을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쓰러져 죽은 듯이 잠에 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