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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산 |
A |
아뇩달지 |
인면상 |
미 라 천 |
정남첨처 |
4안보식 |
龍王住處 |
B |
지구중심 |
4 대하 |
수지영부 |
동,남평지 |
3 층 |
池周8백리 | |
a |
천 지 |
인면상 |
천지폭포 |
정남직암 |
4위보식 |
龍 王 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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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
b |
지구중심 |
4 대하 |
하수원천 |
동,남고원 |
3 층 |
池周8십리 |
"A와 a, B와 b를 비교하시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의 백두산의 특수성이 설산의 성립요건에 부합일치되고, 인도에는 그러한 설산이 없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연역할 수 있다고 본다.
1) 불서의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2) 염부주도 인도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이다.
3) 석가세존이 설산 염부주에서 6년 고행 끝에 그 남녘 기슭 가야산에서 성도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에서 6년 고행 끝에 그 남녘 기슭의 가야산(우리나라의 {신교총화;神敎總話}에도 나오는 산으로서 고유명사가 아니라 승려들이 수도하는 산)에서 성도하였음을 의미한다.
4) 석가세존에게 종지를 넘겨준 진귀조사 역시 인도 사람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이다.
5 석가세존의 탄생지인 가비라성도 우리나라의 백두산 남녘 기슭에 있었다.
6) 석가세존은 근본적으로 우리민족이다.
Ⅳ.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는 제주도 한라산이다.
1.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는 파라날 녹야원이다.
석가세존은 원래 한국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의 백두산에서 고행성도하였다. 그렇다면 석가세존이 먼 인도에까지 가기 전에 먼저 우리나라에서 법을 설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를 중인도 베나레스시(Benares市)의 사르나드(Sarnath)라고 생각해 왔다. 여기에서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가 우리나라인가? 아니면 인도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고 그 판단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중아함경} 라마경을 보면, 석가세존이 성도한 후 파라날(波羅捺) 선인(仙人)이 사는 녹야원 가시도읍(加尸都邑)에서 교진녀(?陳女) 등 다섯 비구들을 제일 먼저 만나고 거기에서 사제(四諦)의 법을 설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즉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이를 흔히 初轉法輪地라 표현함)는 파라날(波羅捺) 녹야원(鹿野園)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녹야원에 대한 자세한 기록으로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娑論} 제183권을 보면 녹야원은 예로부터 선인이 사는 곳이라 하여 선인주처(仙人住處)라 하며, 예로부터 선인이 법을 설하던 곳이라 하여 선인논처(仙人論處)라 하고, 500 선인이 공중을 비행하던 중에 인연을 잃고 그곳에 떨어졌다 하여 선인타처(仙人墮處)라 하며, 뭇 사슴이 서식한다 하여 녹림(鹿林) 또는 녹원(鹿園)이라 하고, 보리수가 많다 하여 보리수처(菩提樹處)라 하였다. 또한 수양대군의 저술인 {석보상절}에 의하면 녹야원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판단기준으로서 녹야원의 성립요건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녹야원은 산악이다.
? 녹야원은 녹림 내지 녹원이다.
? 녹야원은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이다.
? 녹야원은 선인타처이다.
? 녹야원은 보리수처이다.
? 녹야원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있다.
? 녹야원에 가시도읍이 있다.
이상의 일곱 가지 요건이 녹야원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성립요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위의 일곱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면 그곳이 곧 녹야원으로서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라 할 수 있으며, 만약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곳은 녹야원도 아니고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2. 파라날 녹야원은 인도의 사르나드가 아니다.
그러면 인도 당국이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지라고 주장하는 인도 중부의 사르나드가 녹야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부터 먼저 따져 보기로 한다. {불교사전}의 기록을 보면 "바라날은 중인도 마갈타국의 서북쪽에 있는 나라로서 별명을 가시라 하고 지금의 오우드 지방, 베나레스시(Benares市)에 해당하며, 석가세존이 성도한지 三七日후에 이 나라의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법을 설하여 교진녀 등 다섯 비구를 제도하고, 그후 2백년이 지나서 아육왕(아쇼카왕)이 그 영지를 표시하기 위하여 두 개의 석주를 세웠다"고 하였다. 또한 다른 기록을 보면 "최초 설법의 땅은 현재 사르나드라고 불리며 베나레스시 북동쪽 약 7km되는 지점에 있다. 이는 '사랑가 나타(사슴의 왕)'를 생략한 말에서 유래한다. 이 지역은 경전에 '사슴동산이나 선인이 사는 곳'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과 현지답사를 근거로 인도의 사르나드를 녹야원의 성립요건에 대입시켜 보기로 한다.
? 녹야원은 산악인데, 인도의 사르나드는 약 2천평 정도의 평지였고 산악이 아니었다.
? 녹야원은 녹림 내지 녹원인데, 인도의 사르나드는 산악이 아닌 자그마한 들판으로서 사슴이 살만한 곳도 못되었고, 사르나드에 사슴이 살았다는 기록도 본 바 없다.
? 녹야원은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인데, 인도의 사르나드는 평지로서 근본적으로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가 될 수 없는 곳이었다.
? 녹야원은 거기에 500 선인이 떨어졌다는 선인타처인데, 인도의 사르나드에서 5백신선에 대한 어떠한 물증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에 대한 전설도 기록도 본 바 없다. 따라서 인도의 사르나드는 선인타처가 아니었다.
? 녹야원은 보리수처인데, 인도의 사르나드는 보리수처가 아니었다.
보리수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동인도(東印度)에서 자라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키가 30m쯤 되고, 잎은 염통꼴로 끝이 뾰족하며 가죽바탕으로 윤이 나고, 꽃은 은두화로 무화과와 같은 열매가 열린다. 이 나무를 인도에서 보리수라 한다.
또 하나는 보리수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제주방언으로는 '볼레낭'이라 한다. 키는 3m 정도이고, 잎은 타원형이며, 흰 비늘이 덮이고 어긋나게 나는데 빨간 물렁 열매가 가을에 붉게 무르 익는데 그 열매를 먹는다. 이 나무는 줄기를 잘라버려도 좀처럼 죽지 않고 새싹이 돋아난다. 이를 평하면 전자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원래의 이름은 보리수가 아닌 것이다. 단지 인도에서 보리수라 부르므로 보리수가 되고 있는 것이다. 후자는 보리수과에 속하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볼 때 진짜 보리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후자의 보리수과에 속하는 나무 즉 제주 방언으로 볼레낭이라 불리우는 보리수는 인도의 사르나드에는 한 그루도 없었다. 따라서 인도의 사르나드는 보리수처가 아닌 것이다.
? 녹야원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도의 사르나드에 석가세존의 불탑이 없었다.
불탑은 거의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사람이 고의적으로 없애버리지 않는 한 몇 천년이고 그대로 남을 수 있다. 그런데 인도의 사르나드에 석가세존이 입멸하자 조성하였다는 불탑이 없었고, 있었다는 기록도 본 바 없다. 아육왕이 그 영지를 표시하기 위하여 두 개의 석주를 세운 것도 석가세존이 초전법륜한 지 약 2백년 후라 하였다. 그밖에 스투파·불상·승원 등이 사르나드에 있으나 그것은 모두 B.C. 3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들이었다.
? 녹야원에 가시도읍이 있었다. 그런데 인도의 사르나드에 가시도읍이 없었다.
{중아함경}에 의하면 파라날에 녹야원이 있고, 녹야원에 가시도읍이 있다. 그런데 녹야원이라는 사르나드 자체가 약 2천평 정도로서 그 속에 가시라는 도읍지가 존재할 수 없었고, 베나레스시의 별명을 가시라 하여 불서의 기록과 맞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인도의 사르나드는 판단기준인 녹야원의 성립요건에 어느 하나도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도의 사르나드는 녹야원이라 할 수 없고, 석가세존의 초전법륜지라 할 수도 없다. 더욱이 대성자이시며 대각자인 부처님이 초전법륜한 곳을 입멸하여 2백년 후까지 그대로 방치하였다는 것이나, 1794년 베나레스왕의 대신이 사르나드의 유적을 파괴한 것도 이유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사르나드를 녹야원이라 한 것은 석가세존 당시 또는 입멸 후 비유적으로 불리던 것이 후세에 이르러 인도인의 긍지를 높이고 찾아오는 외국의 불자들에게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비유를 사실같이 조성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3. 파라날 녹야원은 제주도 한라산이다.
글자의 뜻으로 볼 때 파라날은 물결치는 나라 곧 섬나라를 의미하는데, 제주도(濟州島)가 바로 물결치는 나라 곧 섬나라이며, 녹야원이란 사슴이 서식하는 산악을 의미하는데 제주도 한라산에 사슴이 살았고, 정상의 연못에서 흰사슴이 물을 먹었으므로 그 연못을 백록담(白鹿潭)이라 한다. 그 동쪽은 녹산장(鹿山場)으로서 사슴이 놀던 들판이다. 또한 제주도 한라산에는 우거진 숲도 많고 공기도 맑으며 생수도 많다. 이러한 것만 보아도 제주도 한라산이 녹야원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과학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제 제주도 한라산이 녹야원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녹야원의 성립요건에 대입시켜 보기로 한다.
첫째, 녹야원은 산악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도 산악이다.
제주도 한라산은 1950m의 한국 제2의 명산이다. 이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로서 설명이 필요없다고 본다.
둘째, 녹야원은 녹림 내지 녹원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도 녹림 내지 녹원이다.
한라산은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로서 선산(仙山)이다. 선산이란 선인이 거처하는 산을 의미하는데, 선인은 동물 중에서 그 품행이 고결하고 장생한다는 사슴과 벗을 한다.
조관빈의 {한라산기}를 보면 "한라산에 본시 사슴이 많았는데 매양 새벽과 저녁이면 사슴들이 백록담에 나와 물을 마신다. 어느 때 한 사냥꾼이 활을 들고 못가의 바위 뒤에 숨어앉아 기다리다가 문득보니 사슴의 떼가 몰려 나오는데 100인지 1000인지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중에 가장 큰 사슴의 몸 빛은 희고 광채가 났다. 어이한 백발 노옹이 그 등 위에 올라탔었다. 사냥꾼은 활을 들러 쏘기는 커녕 그만 놀라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윽고 맨 끝으로 따라가는 작은 사슴 하나를 쏘았더니, 또 사슴을 타고 오는 신선이 있어 손가락으로 사슴을 헤아리는 듯하므로 엽사는 가슴을 두근거리다가 다시 문득 보니 그들은 간 곳이 없었다"하여 한라산에 신선과 함께 사슴이 살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한라산 동쪽 허리에 사슴이 논다는 녹산장(鹿山場)과 아울러 소록봉(小鹿峯)과 대록봉(大鹿峯)이 있다. 한라산 서남쪽 중문동에도 겨울이면 사슴이 내려와 서식한다는 녹하악(鹿下岳)이 있다. 이를 보면 제주도 한라산은 녹림 내지 녹원이었고, 동시에 선인녹원(仙人鹿園)이었다.
셋째, 녹야원은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도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이다. 앞에서 한라산의 백록담에 신선이 나타났었다는 기록을 소개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정의·김녕·함덕에 신선이 많다 하였고, 한라산은 원산(圓山)이니 곧 바다 가운데 있다는 원교산(圓矯山)이고 그 동은 동무소협(東巫小峽)인데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였다. {법주기}에도 박가범(薄伽梵) 부처 당시에 16존자의 한 사람인 발타라존자께서 한라산 영실(靈室)에 있었다고 하였다. 영실에서 수양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영실은 10평 전후의 신령스러운 자연동굴인데 거기에는 자연석으로 된 불상이 있고, 봄·여름·가을·겨울 언제나 온도의 변화가 없으며, 지금도 계절따라 선인들이 영실에 와서 수도한다고 한다. 따라서 제주도 한라산은 예로부터 신선이 살았다는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인 것이다.
넷째, 녹야원은 선인타처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도 선인타처이다.
선인타처란 신화적인 이야기이지만 녹야원에 500선인과 관련된 어떤 물증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라산 서쪽 기슭에 부처님이 왔었다는 불래악(佛來嶽)이 있고, 불래악 맞은 편에 500개의 자연석이 우뚝 서 있다. 이 500개의 자연석이 마치 도(道)를 닦는 수도승 같아서 이를 500나한(羅漢)이라 부르고, 그 일대를 수행동(修行洞)이라 한다. 그러므로 한라산 불래악 수행동에 있는 500개의 자연석이 곧 500신선의 상징이라 할 수 있으니, 제주도 한라산은 선인타처인 것이다. 다섯째, 녹야원은 보리수처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도 보리수처이다.
인도에서는 뽕나무의 일종을 보리수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보리수과에 속하지 않으며 단지 인도인들이 보리수라 부를 따름이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에는 부리수과에 속하는 볼래나무가 많다. 그러므로 제주도 한라산은 보리수처라 할 수 있다.
여섯째, 녹야원에 석가세존의 진신사리탑이 있다. 그런데 한라산 존자암의 터에 상고시대의 부도가 있다.
존자암(尊者庵)은 한라산 정상에서 서쪽 수행동(修行洞, 속칭 靈室) 불래악에 있는데, 김상헌의 {남사록}에 의하면 고량부(高梁夫) 삼성이 처음 일어날 때부터 (정의·대정·목안)삼읍(三邑)이 정립될 때까지 있었다고 하였다. 이는 존자암(尊者庵)이 탐라국 건국초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탐라국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한단고기} 마한세가(상)을 보면, 단군 을아(乙阿) 을유(B.C. 1596년)에 탐몰라인(탐라인)이 마한왕에게 말 30필을 바치었다고 하였다. 이는 탐라국이 B.C. 1596년 전부터 존재하였다는 것으로 존자암은 석가세존의 출생하기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석가세존이 존자암에 올 수도 있었고, 석가세존이 왔었기에 존자암의 산등성이를 불래악(佛來嶽)이라 부르고, 영실에 석가세존의 석상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제주의 민담(民譚)이나 무가(巫歌)에도 부처가 바다에서 제주로 왔다는 설화도 있다. 바다란 수미세계 곧 고조선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존자암의 터에 그 조성년대를 알 수 없고,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부도(불탑)가 있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이 부도는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불탑(眞身舍利佛塔)이라 할 수 있다.
일곱째, 녹야원에 가시도읍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에 가시리(加尸里;加時里)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에 한라산 동쪽은 동무소협(東巫小峽)으로서 신선들이 살았다고 하였는데 그곳에 가시리가 있다. 가시리에 상가시리와 하가시리가 있고, 상가시리에는 노폭(路幅)이 7-8m되는 넓은 길이 있다. 이 길은 너무나 오래되어 그 길이 만들어진 년대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이를 생각하면 가시리는 그 역사가 극히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고, 탐라국 시대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상과 같이 제주도 한라산은 녹야원의 성립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볼 때, 파라날은 제주도를 의미하고, 제주도 한라산은 녹야원이며 석가세존의 초전법륜지라 할 수 있다. 만약 이를 부정하면 인도의 사르나드도 녹야원이 아니니 석가세존의 초전법륜지는 허무맹랑한 전설이 되고 만다. 증거가 부족하면 독자들이 협력해 주기 바란다. 협력도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흠만 잡으려는 사람은 아마도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닌지 자문자답해 보기 바란다. 이것이 또한 남의 일이 아님을 자각해 주기 바란다.
Ⅴ. 석가세존의 고조선 행적과 유적
{삼국유사}를 보면 부처님이 우리나라에 왔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예컨대 어산불영(魚山佛影)편에 따르면 "대정 12년 경자(1180) 즉 명종 11년에 처음으로 만어사(萬魚寺)를 지었는데 동량보림(棟梁寶林)의 장주(狀奏)에 이르기를 이 산 중에 기이한 자취가 세 가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부처영상의 서북쪽에 반석이 있어 항상 물이 괴어 끊어지지 않는데 이곳은 부처가 가사를 빨던 곳이라"하여 부처가 우리나라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만어산(萬魚山)에 이르러 거기에서 가사를 빨았다고 하였다. 또한 동편에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제7권을 인용하여 "부처가 야건가락국 고선산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고선산의 고선(古仙)은 한인·한웅·한검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곧 고선산은 삼신산을 의미한다. 삼신산은 백두산을 지칭하므로 부처가 고선산에 이르렀다 함은 곧 부처가 백두산에 왔었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동서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 편을 보면 황용사의 터는 석가불과 가섭불이 강연하던 곳이라 하였고, 그밖에도 경상남도 남해 금산 쌍홍문(雙紅門)의 안내간판에 석가세존이 그곳에 왔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앞으로는 의미심장하게 숙고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
돌이켜 생각하면 석가세존은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 땅에서 고행하고 성도한 후 만리 길도 멀다 않고 인도로 건너가 혹심한 빈곤과 차별대우에 시달리는 서민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구걸행각을 하면서 일생을 보냈다고 생각할 때, 인도 사람이라면 누구든 석가세존의 조국인 우리나라를 은인의 나라로 받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신앙의 조국으로 생각하고 무척이나 동경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통일교 외국신자들이 우리나라를 신앙의 조국 곧 아버지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가 바다 건너 우리나라에 와서 가락국의 김수로왕의 비(妃)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금관성 파사석탑기를 보면 금관성 호계사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김수로왕의 비 아유타국의 공주가 서역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만여리가 넘는 인도에서 공주의 몸으로 우리나라에 왔었다는 것은 굳건한 신앙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고, 석탑을 싣고 온 것은 신앙의 조국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금불상 53구가 서역으로부터 바다 건너 한(漢)나라 평제 원시 4년(서기4년) 갑자에 금강산에 보내졌고, 이로 인하여 절(유점사)을 세웠다"고 하였다. 그때는 중국에도 석가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이므로 인도인들이 우리나라를 숭모하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보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밖에도 {삼국유사} 황룡사장육 편을 보면 신라 진흥왕이 황룡사를 지으려 할 때, 서천축의 아육왕이 황철과 황금 및 일불이보살상(一佛二菩薩像)의 모형까지 보내와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주조하였다고 하였는데, 황룡사의 터는 석가불과 가섭불(迦葉佛)이 강연하던 곳으로 거룩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상과 같이 교통수단도 발달하지 아니한 그 때에 만여리가 넘는 인도에서 바다 건너 우리나라로 공주가 오고 불상과 불탑까지 보내왔다는 것은 예사일이 아닌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를 신앙의 성지, 신앙의 조국, 부처님이 나신 나라로 믿는 굳건한 신앙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조선을 가리켜 아득한 옛날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는 등불이었다고 하였던 것이 아닌가? 이제야 그 시(詩)의 의미를 알게 된다.
Ⅵ. 대승경은 우리나라에서 기원되었다.
본항에서는 대승경이 우리나라 고조선에서 인도로 전승되었다는 문제를 논증하려한다. 본 문제의 논증방법은 3단논법이다. 즉 A=B, B=C, 그러므로 A=C라는 논법이다. 이에 대하여 유의하기 바란다. 불교사상의 자료에는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의 3장이 있다. 이 중에서 경장과 율장은 불타께서 직접 설하신 법을 의미하고, 논장은 논사들의 저술을 의미한다. 또한 불교경전은 소승경(북방불교에는 장아함·중아함·잡아함·증일아함 등 四部阿含經이 있고, 남방불교의 파리어 대장경에는 장아함·중아함·승육다아함·앙굴다아함·굴타가아함의 五阿含經이 있다)과 대승경(소승경을 제외한 팔만대장경)으로 크게 둘로 나뉘어지는데, 대소승 경전에 경율론(經律論) 3장이 따로 있고, 특히 소승경만이 석가세존이 35세에 성도해서 80세에 입멸할 때까지 45년 동안 직접 설하신 경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대승경에도 논사들의 저술인 논장이 따로 있고, 불타께서 직접 설하신 경장과 율장이 따로 있으니, 이는 누구의 설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래서 김동화는 "서기 565년 전에 탄강해서 그후 35년후에 성도하고 45년간의 설법이 원시경전(소승경)이고, 80세에 입멸하신 것으로 되어있으니, 도대체 이 대승의 경율 2장은 어느 때에 설하였단 말인가? 만약 시대적으로 본다면 소승논부(小乘論部) 이후의 설이라 하여야 정당한데, 사실상 모든 대승경전은 불설로 되어있으니, 이 모순을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장탄식을 한다.
일반상식으로 생각해도 석가세존이 대성자이시고 부처님이라 해도 8만 대장경을 혼자서 모두 설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고, 또한 아난(阿難)의 기억력이 신통하였다 하더라도 8만 대장경을 모두 암송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무조건 대승불교 측에서는 갖가지 이유를 대면서 대승경도 석가세존이 직접 설하신 경전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소승불교 측에서는 대승경을 마구니의 조작이니 조달(調達)의 조작이니 하면서 석가불설이 아니라고 공박한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어느 개인이 탁불(托佛)하여 대승경을 위작한 것 처럼 주장하는 고승도 있다. 이와 같이 대승경의 출처는 지금까지 오리무중에 빠져 그 동안 유명한 보살과 조사, 대덕(大德)과 대지(大智)에 의해서도 해결하지 못하고 내려오는 난해한 문제이다.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지금부터 하나 하나 풀어나가기로 한다.
1. 대승경의 출처는 바다이다.
그러면 대승경의 출처는 어디인가? {용수보살전}에 의하면, 용수(龍樹)는 출가후 입산하여 불탑(佛塔)에 이르렀던 바, 출가계(出家戒)를 받아 90일에 3장을 모두 암송하고 깊은 뜻을 통하여 다시 다른 경을 구하였으나 도무지 얻지 못하다가 설산(雪山) 중의 한 늙은 비구니로부터 마하연경(摩訶衍經)을 얻고 통리하지 못하여 여러 나라를 주류하면서 다른 경을 구하던 차에 수정방(水精房) 중의 대룡보살(大龍菩薩)을 만나 바다 속의 궁전에 들어가 칠보장(七寶藏)을 열어 위없는 묘법인 방등심오의 경전을 주니 그것을 받고 90일에 통해한 후 염부제(염부주) 중의 무량한 경전 가운데 한 상자를 얻고 남천축(南天竺 곧 인도)에 돌아가 불교를 크게 유포시킨 것으로 기록은 밝혀주고 있다.
용수는 대승불교를 일으킨 제1인자인데, 그에 의하여 대승경을 설산과 염부주 바다궁전에서 인도로 전하여 대승불교를 크게 유포시켰다는 것이다. 용수가 대승불교를 일으켰다는 것은 모든 학자들이 공인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설산과 염부주와 바다의 문제가 풀리지 않음으로써 대승경의 출처가 모호해지고 오리무중에 빠졌던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 보면 옛날의 인도인들이 우리나라를 부처님이 탄생한 나라라 하여 우리나라로 시집을 오고, 불상과 불탑을 보내오듯, 지금 우리나라의 불자들이 인도만을 우러러 보고, 인도의 역사·철학·종교·사상을 연구하고 잘 알면서도, 제 나라의 역사·철학·종교·사상을 모르는 데서 천축 또는 염부주라면 무조건 인도로 착각하고, 설산이라면 무조건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산맥 중의 어느 산으로 추정하며, 부처라면 무조건 석가세존으로 오인한 데서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우리나라의 국조인 한인·한웅·한검이 고불(古佛)임을 밝혔고,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며, 염부주도 좁게는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이고, 넓게는 고조선 강역 전체임을 밝혔다. 이것만 보아도 대승경의 출처가 상고시대의 우리나라 고조선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다'가 어디를 가리키느냐의 문제가 남아있다. 이 문제가 지금까지 풀리지 않음으로써 '바다'라면 무조건 태평양이나 대서양 같은 짠물바다로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용(龍)이라면 무조건 비를 내리는 바다의 용으로, 용궁이라면 바다속의 궁전으로, 용왕이라면 바다 속의 용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용에 대한 개념이 없는 인도에서는 용같은 코브라로 용을 대신하는가 하면, 용과 같은 종류의 물고기로 변형되고 있다. 이래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불교가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허무맹랑한 미신같이 곡해되어 서구인들에게 불신당하고 있는가 하면, 대승경의 출처도 수천년 동안 안개 속에 가리워졌던 것이다.
2. 바다는 수미세계이다.
그러면 불교에서 바다는 어디를 가리키는가? 사해동포(四海同胞)라 할 때의 해(海)와 고해중생(苦海衆生)이라 할 때의 해(海)도 태평양·대서양·인도양 같은 짠물바다(소금물바다)를 가리키는가? 불교철학이 심오하다는 것을 누구나 다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의 바다를 무조건 짠물바다·소금물바다로만 수천년 동안 이해하여 왔으니 참으로 이상하다 아니할 수 없다.
먼저 바다의 의미부터 알아보자. 바다는 깊고 무한하여 전 대륙을 포용하고 있는가 하면, 생명의 원천이며, 지혜와 재화의 보고이고 무차별의 세계이다. 무섭기는 폭군 같기도 하고 인자하기는 어머니 같기도 하다. 곧 바다는 원융무애하고 대승적 성격을 지니어 크고 작은 것, 좋고 나쁜 것, 희고 검은 것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불교에서 바다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첫째, 불교에서 바다는 원융무애의 정신세계를 의미한다.
예컨대, 대원해(大願海) 여래공덕해(如來功德海)·무량삼매해(無量三昧海)·법문해(法門海)·생사해(生死海)·지혜해(智慧海)니 하는 경우 등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의 바다는 태평양·인도양·대서양 같은 짠물바다·소금물바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원융무애의 정신세계를 의미한다. 둘째, 불교에서의 바다는 수미세계(須彌世界)를 의미한다.
불교의 세계설에 의하면 이 세상 중앙에 수미산이 높이 솟아 있고, 수미산 정상에는 제석천(帝釋天)이 살며 중턱에는 사천왕(四天王)이 산다. 금·은·유리·파리의 4보(四寶)로 이루어져 북쪽은 황금, 동쪽은 백은, 남쪽은 유리, 서쪽은 파리인데, 해와 달이 그 주위를 회전하면 보광을 발산하여 4방의 허공을 물들인다. 수미산 둘레에는 일곱 겹의 금산(金山)으로 둘러있고, 수미산과 금산, 금산과 금산 사이에는 7개의 바다(七海)가 있다. 마지막 금산 밖에는 짠물바다(鹹海)로 둘러있고, 짠물바다 건너에 철위산이 둘러있어 수미세계의 외곽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태평양·대서양·인도양 같은 진짜바다는 이를 짠물바다(鹹海)라 이르고, 바다는 수미산과 금산, 금산과 금산 사이의 수미세계를 의미하고 있다. 또한 "바다는 문명의 중심지, 종교적 메카라는 뜻의 비유로 쓰인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말하는 바다는 수미세계를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수미세계는 어떠한 세계를 의미하는가? 수미세계는 최상의 위치에 제석천과 같은 종교지도자가 있고, 중간에 사천왕과 같은 법왕이 있어 해와 달이 자연적으로 돌아가듯, 사회질서도 법이 있으나 없으나 순리대로 돌아가며, 사방에서 금·은·유리·파리의 4보가 보광을 발하듯, 사민(四民)의 기풍도 홍익인간 광명이세하여 태평가를 부르는 평화세계로서 종교의 메카, 종교의 발상지, 종교의 요람, 최고의 종교사회 곧 불국토 내지 신선지국을 의미한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경상남도에 김해(金海)·남해(南海) 등의 지역이 있으나 이들 지역이 바다가 아니라 과거에 종교의 요람이었던 것과 같은 격이다.
그러면 용수보살이 대승경을 가져갔다는 바다는 어디를 가리키는가? 태평양·인도양·대서양 같은 짠물바다인가? 대원해니 무량삼매해니 하는 원융무애한 정신세계인가? 아니면 종교의 요람인 수미세계인가? 바다에 궁전과 칠보장과 경전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서 이 경우의 바다는 원융무애의 정신세계도 아니고, 태평양·인도양·대서양 같은 짠물바다라고도 할 수 없으며, 종교의 요람인 수미세계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신세계나 짠물바다 속에 실제의 궁전도, 칠보장도, 경전도 있을 수 없고, 수미세계에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수보살이 대승경을 남천축으로 가져갔다는 바다는 수미세계인 것이다. 즉 대승경의 출처는 수미세계라는 것이다.
3. 수미세계는 환국과 고조선을 의미한다.
수미세계는 종교의 메카, 종교의 발상지, 종교의 요람, 불국토, 신선의 나라를 의미한다면 과거에 그러한 나라가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첫째, 수미세계는 중앙아시아의 환국을 의미한다. 제1편에서 밝혔듯이 고불교인 신선도는 태고시대 중앙 아시아의 환국 즉 알타이 사회에서 비롯됐으니 고불인 한인이 천산에 살면서 득도하여 삼신하나님에게 제사하고 7세나 계승하면서 무위자연적 신교국가를 이룬다. 따라서 태고시대 중앙 아시아의 환국 즉 알타이 사회는 수미세계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수미세계는 우리나라 고조선(古朝鮮)을 의미한다.
환국에 이어 한웅천황이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에서 천도를 크게 깨치고 지금으로부터 5894년 전 10월 3일 신선도를 설파하였으며, 그후 1565년이 지나 다시 단군성조에 의하여 고등종교로 발전되었다. 따라서 배달국과 고조선은 부처님이 세운 나라로서 수미세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상고시대의 우리나라를 가리켜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 군자지국(君子之國)이라 또는 신선지국(神仙之國)이라 하였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도 고조선을 가리켜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는 등불이라 하였다.
불교에 관한 기록에서 천독(天毒) 또는 천축(天竺)이라 함은 수미세계를 의미하는데, {산해경} 해내경에 조선을 천독이라 하였다. 이는 고조선이 수미세계임을 확인하여 주는 것이다. 또한 인도를 남천축(南天竺)이라 하고, "월지국(月支國)을 북천축(北天竺)이라" 하는데, 월지국은 고조선의 진왕이 직접 다스리던 수도를 지칭한다. 이래서 고조선은 수미세계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4. 대승경의 출처인 수미세계는 고조선이다.
그러면 대승경의 출처는 중앙 아시아의 환국인가? 아니면 우리나라 고조선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용수보살이 설산 염부주 바다궁전에서 대승경을 남천축 인도로 가져갔다고 했다. 그런데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을 가리키고, 염부주는 백두산 천지 또는 고조선 강역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용수보살이 대승경을 인도로 가져갔다는 바다 곧 수미세계는 중앙 아시아의 환국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대승경의 출처는 고조선인 것이다.
다음은 우리나라를 바다로 표현한 실례를 직접 들어보기로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보이는 "해중유삼신산(海中有三神山)"이나, "동지우해등환산(東至于海登丸山)"의 삼신산과 환산은 백두산을 의미하는데, 백두산은 우리나라에 있다. 그러므로 바다(海中)는 우리나라를 의미한다. 또한 학자들 역시 이 경우의 해(海)를 발해(渤海)로 해석한다. 발해는 흔히 대조영이 세운 국명으로 알고 있으나, 그 나라의 처음 이름은 대진국(大震國)이며, 발해는 대진국 건국 이전 춘추전국 시대의 저술인 {열자(列子)}에도 보이는 상고시대 우리나라의 이칭이다.
{화엄경} 제보살주처품에도 "해중에 금강산이 있는데 예로부터 법기(法起)보살이 1200권속과 더불어 법을 설하였다"는 구절이 있는데, 금강산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산으로서 해중은 곧 우리나라를 의미한다. 그런데 중국의 청량국사의 소(疏)에도 해중을 우리나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화엄경} 입법계품에 "마니산 기세계 해중 유불 출현(摩尼山 其世界 海中 有佛 出現)"이라 하였는데, 마니산은 인도나 중국에는 없고 우리나라 경기도 강화에 있는 산이다. 더욱이 부처님이 출현했다고 했으므로 해중 곧 바다는 우리나라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바다와 용궁"은 우리나라 고조선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와 같이 바다는 짠물바다 외에 상고시대의 우리나라 고조선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이상의 소론을 요약하면, 대승경의 출처는 설산 염부주 바다궁전인데,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을 의미하고, 염부주는 백두산의 천지주변 또는 고조선의 강역전체를 의미하며, 바다는 우리나라 고조선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승경의 출처는 우리나라 고조선으로서 대승경은 원래 우리민족의 경전이라는 사실이 이론적으로 성립된다. 즉 방대한 불교의 대승경이 인도소산이 아니고 원래 우리민족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원래부터 우리민족의 사상인데 지금까지 인도사상이라 오해하여 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잃어버린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을 거의 찾은 기분이 든다.
또한 원시 대승경이 용수보살에 의해서만 인도로 전승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석가세존이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우리나라에서 수도고행하였고, 백두산(설산) 총림방 중의 진귀조사로부터 종지를 받았다고 하였으므로 석가세존에 의하여 가장 기본적인 경전이 인도에 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대승경은 범어로 쓰여 있는데, 후술하는 바와 같이 범자는 지금부터 약 5200여년 전에 배달국 시대의 복희에 의하여 창제되었고, 지금부터 약 3500년 전에 성립되었다고 보여지는 인도의 리그베다(Rigveda)도 범자로 쓰여 있으므로 대승경은 리그베다 성립이전, 적어도 지금부터 3500년 전, 범어의 인도이입과 더불어 인도로 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래서 대승경은 용수보살 이전에 이미 인도로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5. 지나에 대승경을 전한 월지국은 고조선의 수도이다.
대승경이 고조선에서 먼 인도에까지 전승되었다면 인접한 지나에는 그보다 먼저 직접 전수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대승경의 중국전승에 대한 기록을 보면, 주(周)나라 목왕(穆王) 때(B.C. 1001∼B.C. 947)에 문수와 목련이 서역에서 건너와 목왕을 교화하였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진시황 4년(B.C. 243)에 불경을 중국에 전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에 대하여 일반적인 통설은 부정한다. 왜냐하면 주나라 목왕 때는 석가세존마저 세상에 태어나기 전이며, 진시황 때는 대승불교가 성립되기 전이다. 따라서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였다고 할 경우, 그때에 문수와 목련이 서역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목왕을 교화하였다거나 불경이 중국에 전래되었다 함은 있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월지국(月支國) 아니면 안식국(安息國)에서 대승경이 중국으로 전승되었다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고, 이들 국가를 인도 가까이에 있는 대월씨국(大月氏國)에 결부시키려 한다.
여기에서 안식국은 논외로 하고 월지국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보면, 한(韓)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을 옛 진국(辰國)이라 하고, 진왕(辰王)이 월지국을 통치하였다고 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월지국은 진주(辰主)의 치소(治所)라 했다. 곧 월지국은 진국의 도읍지라는 것이다. 그외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와 최동(崔棟)의 {조선상고민족사}를 보아도 한결같이 월지국이 고대의 우리나라 고조선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국어대사전}을 보아도 월지국을 목지국(目支國)이라 하고 목지국은 옛 진국의 한 부족국가라 하였다. 옛 진국이란 고조선을 지칭한다.
그러나 {불교사전}에 "월지(月支)는 월씨(月氏)라고도 하며, 서역에 있던 큰 왕국"이라 하여 월지국(月支國)을 서역에 있던 대월씨(大月氏)에 결부시키고 있다. 만약 불경이 터키계통의 대월씨국에서 중국에 전승되었다면, 대월씨국은 중국보다도 먼저 불교가 보급되었다는 것으로 지금쯤은 서구사회에 불교가 일반화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구사회에는 이제야 겨우 불교가 발을 붙일까 말까 할 정도인 것을 보아도 중국에 불경을 전한 월지국은 대월씨국이 아닌 것이다.
근세에도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불경이 전승되었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경북대학교 허흥식(許興植) 교수는 "고려에 남긴 철산경(鐵山瓊)의 행적"에서 {고려국대장이안기(高麗國大藏移安記)}는 아직까지 국내 학계에 소개된 바 없는데, 거기에 중국 남송(南宋) 임제종(臨濟宗) 양지파(楊枝派)의 고승 철산경이 1304년 고려에 와서 3년 동안 머물다가 6천권의 대장경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한다.
Ⅶ. 대승경의 범서는 우리민족의 범서이다.
원시 대승경의 출처가 우리나라 고조선이었다. 그렇다면 원시 대승경에 쓰여 있는 범서는 당연히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언어와 문자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적인 귀결이고 실재적 증명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증명해야 할 것인가?
첫째, 범어는 어떠한 언어인가를 밝혀야 한다.
둘째, 범서가 인도 문자도 아니고 언어도 아님을 밝혀야 한다.
셋째, 상대의 우리나라에 범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넷째, 우리민족의 범서가 대승경의 범서임을 증명해야 한다.
이상을 순서에 따라 밝혀 나가기로 한다.
1. 범어는 어떤 언어인가?
운허용하의 {불교사전}을 보면 범어는 B.C. 800년 경에 인도로 전래된 셈계통의 외래어라 하여 간략히 소개되고 있으나, 컬러판 {교육세계백과대사전}을 보면 {대영백과사전}의 기록을 인용하여 자세히 밝혀주고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범어》 범어는 산스크리트어(語)라고도 하는데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인도에 쓰이는 고급 문장어이다. 산스크리트는 <완성된 언어>라는 뜻으로 속어에 대한 아어(雅語)를 의미한다. 범어라고 한 까닭은 이 언어를 범천소설(梵天所說)의 언어라고 믿는 데에 있다.
《특질》 범어는 명사·대명사 및 형용사의 성·수·격(性·數·格)의 어미변화로 주어·목적어 등을 나타내며, 또한 인칭·수·시상·법·태(人稱·數·時相·法·態)를 주로 동사의 어미변화로 나타낸다.
《문자》 범어의 서사 인쇄에 쓰이는 문자를 데바나가리(Devan?gar?)라 부른다. 이 문자는 47자의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지며, 자음은 33자로서 언제나 모음(a)를 동반한다. 이 문자의 기원은 멀리 북셈계(Sham系) 문자로서 가장 오래된 페니키아 문자에 있다.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쓰는 셈문자의 특징을 보존하고 있다. 둘 이상의 연속자음을 나타내려면 그 자음문자를 연합하여 하나의 결합문자를 만드는 따위가 이 문자의 특징이다.
《문법》 문의 구조에 있어서 주어가 선두에 오고 동사가 끝에 오며, 수식어는 피수식어에 선행한다.
2. 범어는 인도어도 북셈계어도 아니다.
이상의 설명을 보면 산스크리트나 범어라는 어의에 인도나 그 민족을 나타내는 의미가 전혀 없다. 고급 문장어라 함은 고급문장에만 쓰이는 언어로서 생활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수억이 되는 인도인 가운데 오늘날 범어를 쓰는 인구수는 겨우 1,000여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범어는 인도의 고유어가 아니라 외래어라는 사전의 기록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범어를 데바나가리라 하는데, '데바'는 천신(天神)이란 뜻이며, '나가'는 용(龍)이란 뜻으로서 데바나가리에도 인도를 상징하는 뜻이 전혀 없다. 더욱이 인도에는 천신이란 개념과 용이란 개념이 없으므로 천신 대신 제사를 뜻하는 브라흐만(Brahman), 또는 진아(眞我)를 뜻하는 아트만(Atman)을 종교적 최고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용 대신 뱀의 일종인 코브라 또는 물고기를 등장시킨다. 이를 보아도 범어는 원래 인도어가 아니라 외래어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범자는 북셈계의 페니키아 문자인가? 그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페니키아 문자의 자음이 22자인데" 범자는 자모가 47자, 자음이 33자로서 오히려 선대문자(先代文字)라고 하는 페니키아 문자보다 그 자모가 더 많다. 문자는 후대에 제작된 것일 수록 간소화되어 자모가 적은데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는 것도 북셈계 페니키아 문자만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고대 필순(筆順)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기 때문이다. {사전}에 대승경의 범자를 북셈계 페니키아 문자에서 기원되었다고 함은 서구인에 의한 서구중심적 발상을 그대로 기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범서가 있었다.
다음은 우리민족에게도 범서가 있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현재에도 원시사회가 있고 문명사회가 있듯이 상고시대에도 원시사회가 있는 반면, 문명사회가 있을 수 있다. 더욱이 그러한 사회에 합리적 성립종교가 있었고 경전이 있었다면, 당연히 문자가 있어야 한다. {태백일사}를 보면 "신시에 녹서(鹿書)가 있었고, 자부에 우서(雨書)가 있었으며, 치우에 화서(花書)가 있었다. 투전문속(鬪佃文束)은 그 남은 흔적이다. 복희에도 용서(龍書)가 있었고, 단군에 신전(神篆)이 있었다. 이런 종류의 글자와 글이 백산·흑수·청구 등 구려(九黎)에 널리 쓰여졌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문자와 글이 있었으며, 여기에 보이는 복희의 용서가 곧 범서인 것이다. 왜냐하면 범서는 이를 데바나가리라 하는데, 데바나가리는 용서(龍書)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복희의 용서는 곧 범서라 추정할 수 있고, 범서는 곧 복희의 용서라 추정할 수 있다.
{삼국유사} 요동성육왕탑기에도 고구려 동명성왕이 요동을 순례하던 중에 삼중토탑(三重土塔)을 발견하였는데, 그 밑에 묻혀 있던 명(銘)에도 범서가 쓰여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명에 쓰인 범서를 일연 승은 그 해설에서 서역문자라 함으로써 그 범서가 상고시대의 우리나라 문자인가, 아니면 인도에서 전래된 문자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시켰다. 삼중토탑을 발견한 때는 고구려 동명성왕 때로서 B.C.1세기 후반이다. 그때는 인도와 가까운 중국에도 석가불교가 전래되기 전이며, 우리나라에도 전래되기 전이다. 더욱이 그때는 대승불교마저 성립되기 전이다. 그러므로 삼중토탑을 석가불교의 불탑이라 할 수 없고, 명에 쓰인 범서도 인도에서 전래된 문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단기고사} 제12세 단제 편에 "지금 황해도 구월산의 마한촌에 고대의 국문비 (國文碑) 한 개가 존재하니 범문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이는 범어를 모르는 사람이 범서를 보고 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범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원시 대승경이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서 인도로 전승되었다고 할 경우, 원시 대승경에 쓰여진 범서는 당연히 우리민족의 범서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범어는 인도의 고유어가 아니라 외래어이고, 북셈계 문자도 아님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4. 범어는 우리민족의 언어와 동일하다.
그러나 실제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어의(語義)·어법(語法)·문자의 동일성 등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첫째, 범어의 어의가 우리말의 어의와 동일한 경우가 많다.
대승불교가 성립된 이래 대승경이 수차에 걸쳐 결집되면서 대승경에 쓰여진 범어의 용어가 인도어로 바뀌어 질 수도 있고, 우리민족의 어의도 2천여년 전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한문를 일상어에 병용하면서 변질에 변질을 거듭하였다. 그러므로 대승경 범서의 어의와 우리말의 동일성을 증명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단어의 동일성을 몇 개 지적하면
? 석가세존의 열반지인 구시국(拘尸國)을 구시나라(拘尸那羅)라 하는데, '나라(那羅)'는 곧 국가를 의미한다. 우리말에서도 국가를 '나라'라고 한다.
? '차마(叉摩)'는 '참다(忍)'는 뜻인데 우리말의 '참다'와 같다.
? 파라사화(波羅奢華)는 '파란 잎'을, 파라니밀(波羅尼蜜)은 '파란 하늘'을 의미한다. 이를 보면 '파라'는 우리말의 '파랗다(靑)'와 같은 의미이다.
이와 같이 범어의 어의와 우리말의 어의가 동일하다. 이것 하나만을 보아도 대승경의 범어는 우리민족의 범어임을 추정할 수 있다.
둘째, 범어의 어법이 우리말의 어법과 동일하다.
? 범서는 그 문장구조에 있어서 감탄문을 제외하면 어떤 경우에도 주어가 선두에 오고 동사가 끝에 오며 수식어는 피수식어에 선행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우리말의 어법과 그대로 일치된다.
? 범서는 명사·대명사·형용사의 성·수·격이 그 어미 변화로 주어·목적어 등을 나타내며, 또한 인칭·수·시상·법·태를 주로 동사의 어미변화로 나타낸다. 우리의 언어도 범어와 같이 명사·대명사·형용사의 어미변화 즉 조사의 변화에 의해 주어·목적어 등을 나타내며(예컨대, 명사 또는 대명사에 "는·은·가·이"를 붙이면 주어가 되고, "을·를"를 붙이면 목적어가 된다), 또한 동사의 어미변화로 인칭·수·시상·법·태를 나타낸다(예컨대, 하였다·하다·할 것이다·하겠다·하라·하겠습니다·하자·합시다·하시오·되었다·되다·될 것이다·되겠다·되라·되겠습니다·되자·됩시다·되시오 등으로 변해서 인칭·수·시상·법·태를 나타낸다). 이 문제는 하나의 상식으로서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 범서는 자음마다 언제나 모음과 주로 (a)를 동반하는데, 우리의 언어를 표기하는 한글도 자음마다 언제나 모음을 동반한다. 그러나 모음 (葡)를 특별히 동반하지는 않는다. 이는 역사의 변천에 따른 음운의 변화 때문이라 할 수 있다.
? 고대의 범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는데, 우리민족의 고대 필순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다. 이상과 같이 범서의 어법도 우리민족의 어법과 그대로 일치한다. 여기에서 더욱 대승경의 범서는 우리민족의 범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셋째, 대승경 범자의 자형이 우리민족의 범자와 유사하다고 추정된다.
일연 승은 우리민족의 범자를 서역문자라 하였다. 이는 우리민족의 범자의 자형이 대승경의 범자와 동일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민족의 범자를 용서라 하여 그 글자 모형이 용 같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대승경의 범자가 일률적으로 용의 형상을 띠고 있다. 또한 "범자와 한글이 그 자형이나 자음에 있어서 서로 유사한 점이 많아 한글이 범자에서 기원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지금까지의 소론을 간략히 정리하면
? 대승경의 범어(범서)는 인도의 고유어가 아니라 외래어였다.
? 대승경 범자의 기원이 북셈계 페니키아 문자와 무관하였다.
?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범서가 있었다.
? 대승경 범어의 어의가 우리말의 어의와 같은 경우가 많았다.
? 대승경 범어의 어법이 우리말의 어법과 그대로 일치되었다.
? 대승경 범자의 자형이 우리민족의 범자와 동일하다고 추정되었다.
이상과 같으므로 원시 대승경의 범서는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범서라고 결론을 내려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더욱이 범어는 이를 천축어(天竺語)라고도 한다. 그런데 석가세존 이전의 천축은 우리나라 고조선인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범어는 당연히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언어라 할 수 있다.
Ⅷ. 인도에 우리민족의 문자와 언어가 있다.
1.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한글이 있었다.
종교란 위대한 성인이나 부처님이 불변적 진리에 입각해서 일반대중을 위하여 설하신 교육의 기본지침이요 인생이 나아갈 바를 제시한 것이다. 그것이 곧 경장과 율장으로써 난해한 문자와 용어로 쓰여 있게 마련이고, 이를 서민대중을 위하여 간이한 문자와 평상어로 누구나 알기 쉽게 해설한 것이 논장이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위대한 성인이 설하신 종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함축적 의미의 종교문자와 간이한 상용문자가 있게 마련이다. 즉 한자나 범자와 같은 종교문자가 있는가 하면, 한글과 같은 상용문자가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상고시대에도 한글과 같이 간이한 문자가 있어야 한다. 신채호에 의하면 단군조선 시대에 국문(한글)이 있었다 하고, {단기고사}에도 제3세 단군 가륵 2년 봄에 박사 을보륵에게 명하여 국문정음(國文正音)을 정선하였다고 하였다.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태백일사}에도 단군신전(檀君神篆)이 있었다 하고, {단군세기} 제3세 단군 가륵 2년조를 보면 고대 한글을 원형 그대로 밝혀주고 있다. 그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자 2년(B.C.2181) 시속(時俗)이 같지 아니하고 방언이 달랐다. 상형표의(象形表意)의 진서(眞書;漢字)가 있었으나 10가(十家)의 고을에서도 말이 통하지 못하는 일이 많고 100리의 국가에서는 글자를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을 내려 정음 38자를 만들게 하니 이를 가림토라 한다(그 글에는 현대 한글에 없는 문자가 있고, 또한 콤퓨터에 없기 때문에 실치못했음. {한단고기} 단군세기 제3세 단군 가륵제조와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원문에 실려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람).
이와 같이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한글과 같은 가림토가 있었다. 또한 가림토의 모어로 보이는 최고형의 문자가 최근 만주와 경상남도 산청군 단속사터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현재의 한글은 어떻게 된 것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2. 한글은 세종대왕의 창제가 아니다.
세종어제훈민정음서문(世宗御製訓民正音序文)에 의하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28자를 신제(新製)하였다고 하였다. 신제란 구제(舊製)의 반대말로서 구제에 근거하여 새로 제작하였다는 뜻이다. 당시 집현전 학자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에도 고전(古篆)을 모방하여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하였고, 최만리의 상소에도 언문은 본래 옛 문자로서 새로운 문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세종 23년 갑자에 반포한 {세종실록} 103권에도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 언문은 전 조선시대에 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하였으며, 또 계해 25년 12월조에도 "10월 초 친히 말글 28자를 만드시니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세종실록}에도 한글은 고조선(전조선)시대의 문자를 모방했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신선도는 三神五帝의 원리 곧 天地人 三才와 木火土金水의 五行을 발생원리로 한다. 그런데 훈민정음도 天地人 三才와 木火土金水의 五行을 발생원리로 하여 제작되었다. 이와 같이 훈민정음도 신선도와 같은 원리에서 제작되었으므로 고조선의 가림토문자(단군신전)를 더욱 발전시킨 문자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세종대왕이 한글을 새로이 만들기 이전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한글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승경이 우리나라에서 인도로 전승되었다면 인도에도 고대 한글이 있을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3. 인도에 우리민족의 한글이 있다.
그런데 남인도 구자라트주(州)의 간판에서 한글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신왕오천축국전(新往五天竺國傳)}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구자라트주의 간판에서 기이하게도 한글과 비슷한 글자를 발견하고 놀랐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글과 너무나 비슷하여 한글식대로 읽어나갈 수가 있었다.
독일의 어느 학자가 옛날에 한글이 인도의 드라비디안어와 닮은 데가 있다는 논문을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드라비디안어(語)가 아니라 구자라트어(語)를 잘못 알고 쓴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구자라트어에 한글의 모양과 많이 닮은 것은 자음 가운데 ? 遁 ? ? ? 걁 둁 등이고, 모음은 葡 蒡 ? ? ? ? ? ? ? ?의 열자가 꼭 같았다. 종자음(終子音) 즉 받침까지도 비슷하게 쓰고 있다. 우리들은 구자라트에 있는 동안 소리를 내어 간판을 한글식으로 읽으며 다녔다.
이상과 같이 고조선 시대에 이미 한글이 있었고, 남인도 구자라트주에 한글과 비슷한 문자를 쓰고 있다니, 그 문자는 고조선 시대의 한글이라 할 수 밖에 없으며, 신선도의 경전이 남인도에 전해짐으로써 고대 한글도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도 외에 일본에도 가림토문자가 전해져 신대문자(神代文字)인 아히루(阿比留) 문자가 되었는데, 이는 지금 일본 대마도(對馬島) 이즈하라(嚴原)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伊勢神宮) 등에 아직도 보관되어있다. 그 밖에도 2300년 전에 지은 스리랑카의 캔디시(市) 부근 패엽경사(貝葉經寺) 바위에도 사찰건립 당시에 쓴 것으로 보이는 가림토문자 같은 것이 새겨져 있으며, 남미의 볼리비아 글자도 가림토와 비슷하다고 한다.
4. 남인도에 우리민족의 언어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전이 남인도에 전하여졌다면, 경전은 곧 문자화된 언어로서 우리민족의 언어도 남인도에 전해질 수 있다. 프랑스의 선교사 달레(1874년, 조선교회사:朝鮮敎會史)와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1906년, 한국어와 드라비다 제어의 비교문법)는 한국어와 드라비다어가 동계임을 주장하면서 지금도 드라비다어 가운데 우리말과 같은 말이 1300여개나 된다고 하였다. 예컨대, 우리말의 아버지는 드라비다어로 아바지(appacchi), 엄마는 암마(amma), 도령은 도렌(toren), 얼(정신)은 얼(ul), 꽁지는 꼰티(konti), 눈은 눈이(nuni), 목은 막(mak), 남(他人)은 남(nam), 님은 님(nim), 골(谷)은 골리(kolli), 도랑은 두라이(turai), 나라는 날(nar), 바람은 발리(vali), 그물은 굼(kum), 풀은 풀(pul) 등이다. 미국의 언어학자 클리핀저(Clippinger)도 인도 고대어인 드라비다어종(語種) 속에서 한국어의 수 많은 단어들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예컨대, 우리말의 쌀(米)은 드라비다어의 '살', 벼(禾)는 '비야', 풀(草)은 '풀', 알(粒)은 '아리' 등이다. 이런 유사한 단어들을 이 미국학자는 100개나 찾아내었다. 이는 조선일보의 보도내용이다.
Ⅸ. 불교는 신선도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석가세존이 우리민족으로서 우리나라의 백두산에서 6년간 고행하고 성도한 후, 종지(宗旨)까지 받고 인도로 건너 갔다면, 그리고 불교의 대승경이 우리민족의 경전이라면, 석가불교의 원류는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신선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선도와 석가불교에 있어서 그 기본사상이 서로 불가분적 동일성을 지녀야 하고, 그밖에 고유명사·전문용어·종교의식 등이 서로 같거나 유사하게 마련이다.
1. 기본사상이 동일하다.
우선 기본사상의 동일성을 지적한다.
첫째, 신선도와 불교는 다 같이 우주의 진여이법(眞如理法)을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즉, 신선도는 천일(한늘님)·지일(한울님)·인일(한얼님) 삼신일체(三神一體)의 하나님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고, 불교에서는 법신불·보신불·응신불의 삼불일체(三佛一體)를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이는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일체에 해당하는 대우주의 진여이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 응신불에 석가불을 대응시키고 있으나, 응신불 역시 원래는 진여이법의 한 쓰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선도와 불교는 다 같이 인간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지 않고, 우주운행의 근본원인 즉 진여이법을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둘째, 신선도와 불교는 다 같이 3원론적 1원론이다.
신선도의 기본사상은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일체사상이며, 불교의 기본사상은 법신(法身)·보신(輔身)·응신(應身)의 삼불일체(三佛一體)사상이다. 곧 3원론적 1원론인 것이다.
셋째, 신선도와 불교는 다 같이 조화사상이다.
삼원론적 일원론은 일방의 중재에 의해 자타일여(自他一如)·물심불이(物心不二)·선악일체(善惡一體)·성속일체(聖俗一體)·개전일체(個全一體) 등 조화사상이 된다.
넷째, 신선도와 불교는 다 같이 순환론(윤회사상)이다.
윤회사상 역시 불교의 기본사상으로서 사계의 모든 학자들이 공인한다. 신선도의 삼신일체 사상도 공간과 시간에 있어서 시작도 끝도 없다는 순환론인데, {천부경}의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과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및 만왕만래(萬往萬來)가 순환론으로써 신선도 역시 윤회사상인 것이다.
다섯째, 신선도는 곧 신선사상인데 불교 역시 신선사상이다.
신선이란 늙지 않고 오래 살며 자유자재로 몸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특이한 사람을 지칭한다. 그런데 불교의 비바시불은 8만4천세, 시기불은 7만세, 비사부불은 6만세를 살았다 하여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신선이라 하고, 아미타불은 무량수(無量壽)라는 뜻으로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신선이라 하며, 불(佛)은 신선 가운데 최고라는 뜻으로 대선(大仙)을 지칭한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을 교화함에 있어 신변자재하는데 33신(三十三身)이 있다고 한다. 지장보살은 천상에서 지옥까지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몸을 6도(六道)에 나타낸다고 한다. 이래서 불경에 신선이니 선인이니 하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고, 불교를 대선도(大仙道)라 칭한다.
이상과 같이 신선도와 불교는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서로 일치한다. 더욱이 고대 인도의 정통사상과 불교사상을 비교하여 보면, 고대 인도의 정통사상은 다신론적 일신론(多神論的 一神論)으로서 창조론(創造論)인데, 불교는 범신론적 무신론이며 윤회사상이다. 불교와 인도 사람들의 사유를 비교하여 보아도 불교는 생명평등 내지 인간평등 사상인데, 인도 사람들은 바라문·찰제리·바이샤·수드라의 불평등한 4성계급(四姓階級)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불교는 원래 대승적이어서 관대하면서도 강경하고 온유하면서도 엄격하다. 그래서 정의에는 순응하고 불의에는 항거하는데, 인도 사람들은 대체로 만사에 순응하고 무저항적이다.
또한 불교가 인도 사람들의 사유나 성격적 욕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어떤 위기에 부닥쳐 일시 쇠퇴하였다 하더라도 기회가 호전되면 다시 소생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슬람교의 침입에 의하여 불교와 힌두교가 다 같이 박해를 받고 멸망하게 되었지만 힌두교는 다시 부활되어 현재 인도 전체 인구의 태반(83%)을 신자로 하고 있는데, 불교는 인도 전역에서 거의 그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다. 외국 사람들이 근래에 이르러 세운 사찰만이 몇 곳에 있을 뿐이다.
이를 보아도 불교는 원래 인도사상이 아니며, 석가세존의 독창도 아니라, 우리민족의 신선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예수의 기독교가 유태교에 바탕을 두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이 고대 그리스의 밀교인 orpheus교를 배경으로 하는 것과 같은 격이라는 것이다.
2. 고유명사와 전문용어가 동일하다.
대승경이 인도에 전승된 이래 몇 번에 걸쳐 결집되면서 경전의 용어가 인도화되었다 하더라도 어쩌면 산명(山名)과 지명(地名) 등 고유명사는 발음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다. 이러한 착안에 따라 불경에서 우리의 고유명사와 전문용어를 찾아보기로 한다. 그러나 필자의 고어지식(古語知識)의 부족으로 한계가 있고, 참고문헌은 {화엄경} 일부와 우리말 사전임을 밝혀둔다.
첫째, {화엄경}에서 발견된 우리의 고유명사를 예시하면, 단군조선 시대부터 천신제를 지내던 강화도의 마니산(摩尼山), 신라의 네 신선이 유오(遊娛)하던 강원도의 금강산, 인삼의 고장을 지칭하는 진단(震旦), 신라의 옛 이름인 시라(尸羅), 유리이사금 때에 지었다고 하는 도솔가의 도솔(兜率), 그밖에 오대산(五臺山)·우두산(牛頭山)·가야(伽倻) 등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본서의 소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시할 경우, 우리나라의 지명이나 산명이 불교가 전래된 이후 그 영향에 의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니냐 하고 반문할 수 있다. 불교가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전래되기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서기 372년인데, 위의 산명과 지명들은 그 이전부터 있었거나, 아니면 자연적인 지형이나 지리적 조건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예컨대, 금강산은 개울에 사금(沙金)이 흐르고 멀리서 보면 금빛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써 그 시원을 알 수 없고, 시라(尸羅)는 B.C. 57년 신라 건국초의 옛 이름이며, 가야는 {신교총화(神敎總話)}에도 나오는 것을 보면 승려들의 수도생활에서 유래된 이름으로써 김수로왕의 금관 가락국 건국 이전 즉 서기 42년 이전부터 있던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이름이다. 마니산은 경기도 강화에 있는 산으로서 '마니'는 산의 돌이 탄탄하여 그 빛을 멀리서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할마니·어마니·심마니·어인마니"의 마니로서 수호신 같은 의미를 지닌 우리민족의 고어이다. 진단은 한자로 震旦·震檀·震丹·振旦·眞丹 등 여러가지로 표기되는데, 인삼의 고장을 상징하는 우리나라의 이칭이다.
이렇게 볼 때, 상기의 산명과 지명이 불교의 영향에 의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볼 수 없다. 또한 산명이나 지명 등 고유명사는 어느 책이나 경전을 보아도 원래의 이름을 그대로 기재하고 임의로 번역하여 기재하지 아니한다. 더욱이 가야를 제외하면 그러한 산명이나 지명이 인도에 없으니 절대 불교의 영향이라 볼 수 없다.
둘째, 신선도에 한웅천황 이전 칠세(七世) 한인이 있었는데, 불교에도 석가불 이전 칠불(七佛)이 있었으며, 칠세 한인 가운데 한분의 명호가 석제임한인(釋提壬桓因)인데, 불교에서 33천의 주신을 석제한인(釋提桓因)이라 한다. {삼국유사} 황룡사장육편을 보면 우리나라에 가섭불(迦葉佛)이 있었는데, 불교에도 가섭불이 있다.
셋째, 신선도의 본당 명칭이 대웅전인데, 불교의 본당 명칭도 대웅전이다. 이에 대해서는 제1편에서 상설하였다.
넷째, 신선도는 단군조선에 와서 특히 발전되었으므로 단(檀)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 신도를 단도(檀徒)라, 신도의 집을 단가(檀家)라, 시주(施主)를 단월(檀越) 또는 단나(檀那)라, 가장 큰 목향을 전단(?檀)이라 한다. 전단과 백단(白檀)으로 만든 불상을 단상(檀像)이라, 석가세존이 입산수도한 산을 단특산(檀特山)이라 한다. 이와 같이 불교용어에 단(檀)자를 많이 쓰고 있다.
다섯째, 신선도에 '三'수가 가장 기본수여서 '三'으로 된 전문용어가 많다. 예컨대, 삼신일체(三神一體)·삼극일체(三極一體)·회삼귀일(會三歸一)·집일함삼(執一含三)·삼일신고(三一神誥)·삼륜(三倫)·삼강(三綱)·삼진(三眞)·삼문(三門)·삼관(三關)·삼방(三房) 등이 있다. 불교에도 삼불일체(三佛一體)·삼승즉일승(三乘卽一乘)·회삼귀일(會三歸一)·집일함삼(執一含三)·삼계일체(三界一體)·삼각(三覺)·삼관(三觀)·삼론(三論)·삼보(三寶)·삼장(三藏)·삼혼(三魂) 등 많다. 이외에도 유사한 전문용어가 많으나 번잡하므로 생략한다.
여섯째, 불교에서 출가교도를 승(僧)이라 하는데, 신선도에서도 출가교도를 화랑(花郞) 또는 조의(?衣)라 하는 외에 승(僧)이라 한다.
일곱째, 대체로 고유명사와 전문용어의 발음을 보면, 우리의 발음이 지나족의 발음보다 원어(범어)에 더 가깝다. 예컨대, 석가모니(釋迦牟尼)를 예로 들면, 범어로 "샥까무니(Sakga-Muni)", 지나어로 "씨지아모우니(Shigia-Mouni)", 우리말로는 "석가모니"이다. 불타(佛陀)는 범어로 "붇다(Budda)", 지나어로 "호뚜오(Fotuo)", 우리말로는 "불타"이다. 이와 같이 우리민족의 발음이 원어(범어)에 더 가깝고, 지나족의 발음은 원어(범어)와 거리가 멀다. 그 이유를 지나족의 발음이 시대에 따라 변화한 때문이라 할지 모르나, 한자의 발음기호(반절음;反切音)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며, 고유명사와 전문용어의 발음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아니한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발음이 지나족의 발음보다 원어에 더 가깝다는 것은 대승경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 아니라, 인도에서 우리나라로 직접 전래됐거나, 아니면 우리나라에서 인도로 직접 전승됐음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이 대승경의 고유명사와 전문용어가 우리민족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것 역시 불교의 원류가 신선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신선도의 천산과 불교의 수미산이 동일하다.
신선도가 우리나라 백두산에서 한웅천황과 단군왕검에 의하여 설해지고 발전되었다 하더라도 그 시원을 찾아 올라가면 그 최초의 발상지는 중앙 아시아의 천산(天山)이다. 또한 석가불교는 이 세상 중앙에 높이 솟아있다고 하는 수미산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그런데 천산에 대한 중앙 아시아 칼마크인(Kalmuck人)의 전설과 수미산에 대한 불교의 전설을 비교해 보면 두 개의 산이 그 특수성에 있어서 서로 동일하다.
? 중앙 아시아 칼마크인의 전설에 천산이 물(淡水) 밑으로 8만 리그(league) 뻗어있고, 물 위로 8만 리그 솟아있다고 했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물(바다) 밑으로 8만 유순 뻗어있고, 물 위로 8만 유순 솟아있다고 했다. 곧 천산과 수미산의 높이가 물의 밑과 위로 8만 유순(리그)이라 함이 동일하다.
? 칼마크인의 전설에 천산의 남면은 청(靑), 서면은 적(赤), 북면은 금(金), 동면은 은(銀)의 광채를 발산한다고 했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사보(四寶)로 이루어져 남면은 유리, 서면은 파리, 북면은 황금, 동면은 백은으로 이루어져 해와 달이 그 주위를 회전하면 보광을 발산한다고 했다. 곧 천산과 수미산이 모두 그 동서남북에서 금은주옥의 보광을 발산한다는 점이 동일하다.
? 천산의 주위를 7개의 산이 둘러싸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그 주위를 7개의 금산(金山)이 둘러싸고 있다고 했다. 즉 7개의 산이라는 점이 동일하다.
? 천산의 주위를 둘러싼 7개의 산 사이에 7개의 물(淡水)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그 주위를 둘러싼 7개의 금산 사이에 7개의 물(바다)이 있다고 했다. 곧 천산과 수미산이 모두 7개의 물로 둘러 싸여있다는 점이 동일하다.
? 천산을 둘러싼 마지막 산맥 밖을 소금물 바다(大洋)이 둘러싸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마지막 금산 밖을 짠물바다(鹹海)가 둘러싸고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천산과 수미산의 외곽이 모두 소금물바다 곧 짠물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 동일하다.
? 천산을 둘러싼 소금물 바다 주위를 철위산(鐵圍山)이 둘러싸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 역시 짠물바다 밖을 철위산이 둘러싸고 있다고 했다. 곧 천산과 수미산의 짠물바다(대양) 밖을 모두 철위산이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 동일하다.
? 천산의 4방에는 소금물 바다 위에 하나씩의 땅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불교의 수미산을 둘러싼 짠물바다 위에도 4대주가 있다고 했다. 곧 천산과 수미산의 주위에 4대주(四大州)가 있다는 점이 동일하다.
이상과 같이 천산과 수미산은 서로 동일하다. 이는 곧 천산이 수미산이고 수미산이 천산임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신선도와 불교의 발상지가 동일함을 의미한다. 이를 보아도 불교는 신선도의 한 유파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상해에서 간행된 {산해경} 해내경 원본을 보아도 여러 전거를 들면서 조선을 천독(天毒) 즉 천축(天竺)이라 하고, 불도(佛道)가 그 나라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Ⅹ. 결 론
이상 논한 본편의 소론을 요약 정리하면
1) 석가세존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우리나라에서 고행성도한 단군족으로서 근본적으로 한국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석가세존은 인도 사람이 아니다.
2) 석가세존이 고행성도한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으로서 인도의 부다가야는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가 아니다.
3) 석가세존이 초전법륜지인 녹야원은 인도 중부의 사르나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제주도 한라산이다.
4) 대승경의 출처는 바다로서 우리나라 고조선이다.
5) 대승경의 범서는 인도의 문자도 언어도 아니라, 상고시대 우리나라의 글자와 언어이다.
6) 남인도에 우리나라의 고대 한글과 언어가 있다.
7) 신선도와 불교의 기본사상이 전적으로 일치되고, 의식도 유사하다. 그밖에 대승경에 있는 산명과 지명이 인도에 없고, 우리나라에는 있다.
8) 불교의 수미산과 신선도의 천산이 동일하다.
이상을 근거로 결론을 내리면 석가불교의 원류는 전적으로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배달사상인 신선도라 할 수 있다. 이를 대소승불교로 나누어 말하면, 소승불교는 신선도를 바탕으로 성립된 신선도의 지류라 할 수 있고, 대승불교는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신선도와 동일한 종교라 할 수 있다. 이를 생각하면 우리나라에 있는 대승불교는 비록 외래종교라 하더라도 역수입된 고유종교라 할 수 있고, 불교인들은 실재에 있어서 외래종교 신자가 아니라 고유종교 신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이란 백지에 글을 쓴 격이니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신심(信心)이 두터우면 두터울 수록 제 신앙만을 고집하고, 조국도 민족도 부모형제도 신앙 다음으로 친다. 냉정히 자신의 신심을 반성하여 보자. 석가모니는 따지고 보면 원래 우리나라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다른 나라 사람 곧 인도 사람이라 믿어왔다. 그런데 다른 나라 사람인 석가모니를 절의 가장 중앙 대웅전에 안치하여 조석으로 공양하면서도, 제 민족의 국조이시고 대성인이신 한인·한웅·한검을 모시고 있는 절도 얼마 없거니와 모시고 있다 하더라도 대웅전 밖 어느 한쪽 모퉁이에 방치하고 있다.
이는 주인을 내쫓고 손님을 안방에 안치한 격이며, 선배를 무시하고 후배를 높이는 격이 아닌가? 제 조상을 옆에 두고 남의 조상에게 의지하는 격이며, 제 부모를 박절하고 남의 부모에게 매달리는 격이 아닌가? 그것이 과연 윤리도덕에 부합되는 일인가? 애국적인 행동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인가? 한국 사람이 한국 땅에서 한국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살면서 외국을 동경하고 외국종교를 믿고 외국 사람을 신봉하는 것이 과연 이치에 합당한 일인가? 그것이 주객전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요는 석가세존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석가세존이 단군족의 후예라는 사실과 불교가 원래부터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 제 민족의 국조이시고 성인이신 한인·한웅·한검을 대웅전에 석가세존과 함께 모시고 섬기라는 것이다.
깊이 자성하고 신심이 원시반본(原始返本)될 때, 비로소 외래종교 신자라는 허탈감에서 해방되어 참다운 신앙을 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참다운 신앙을 할 때, 자신과 가정에 기쁨과 행복이 오고, 견성성불할 수 있으며, 국가적으로는 1천 2백만 애국동포를 얻는 것이 된다. 또한 그리 될 때, 불교계도 자연적으로 의식개혁을 하게 되어 부처님의 자비가 내리고 7천만이 하나가 될 수 있고, 아울러 국토통일만이 아니라 사상통일까지 이루게 되어 민족의 전도가 밝게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불교계의 각성과 공식적인 수용을 촉구한다.
제3편 유교의 발상지는 우리나라이다.
홍익인간 광명이세
Ⅰ. 서 론
본편에서는 지나족에게 뺏겼던 유학을 찾는 문제를 다루려한다. 그러므로 특히 주자학자들은 정신을 한층 가다듬고 본편을 읽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한국 사람인가? 아니면 지나족인가를 분명히 확인한 다음 본편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유교의 사서삼경(四書三經) 외에 제 민족의 역사서와 사상서를 몇권이나 읽었는지를 반성하고 본편을 읽어주기 바란다.
인간은 원래 객관적이 못된다. 곧 파란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면 사물이 파랗게 보이고, 빨간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면 사물이 빨갛게 보이며, 무색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면 사물이 사실대로 보인다. 그와 같은 이치를 이해한다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반성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곧 주자학 제일주의와 지나중심주의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러한 입장에서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고, 지나족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여 양자를 비교하여 보라. 그러면 지나의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우리민족의 지손(支孫)이요, 유교의 사서삼경(四書三經)도 신선도의 한 가닥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이다.
갑골문(甲骨文)이 우리민족에 의해서 비롯되었고, 한자(漢字)도 우리민족에 의해서 창제되기 시작하였다. {주역(周易)}이 우리민족에 의해서 비롯되었고,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을 비롯하여 홍범구주(洪範九疇)가 우리민족에서 지나로 전승되었다. 인(仁)사상은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이요, 오상오륜(五常五倫)은 원래 우리민족의 고유덕목이었다. 곧 유교의 원류가 우리나라의 신선도로서 유교 자체가 곧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이었다.
지나족의 이상세계이며 중국문화의 발상지라는 신비의 곤륜산(崑崙山), 산의 조종이라는 곤륜산도 우리나라의 백두산이었다.
이러한 학설은 근세조선 때라면 사문난적(斯門亂賊)이라 하여 타도의 대상이 될 것이며, 현재에도 제 나라의 역사와 사상에는 관심이 없고 지나를 우러러 받드는 일부 골수 주자학자들에게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 하여 무시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제 나라의 역사와 사상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대다수 유학자들에게는 새로운 연구자료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초보적인 연구로서 완성된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객관적인 비판을 기다린다.
Ⅱ. 유교는 우리나라에서 기원되었다.
1. 지나문화의 발상지인 곤륜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1) 곤륜산은 어떤 산인가?
지나인들은 곤륜산(崑崙山)을 지나문화의 발상지, 지나인의 정신적 고향, 지상선경, 산의 조종으로 믿는다. 그러면서도 곤륜산맥이 지나대륙 서쪽에 있음으로써 곤륜산도 곤륜산맥의 어디에 있을 것이라 막연히 추정할뿐 그 위치가 신비속에 가려져 있다. 마치 불교에서 설산과 바다가 지금까지 신비속에 가려 있었듯이 곤륜산도 지금까지 신비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선 곤륜산은 어떤 산인가? 곤륜산의 성립요건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참고문헌은 학원출판공사의 {학원세계대백과사전}, 동아출판사의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 이희승의 {국어대사전}, 불교의 {석가방지} 등이다. 이들 서적에 의하면 곤륜산의 성립요건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곤륜산은 그 정상에 아름다운 못이 있다. 그 못을 당(唐)나라에서는 아나타답다라 하고, 불교 명칭으로는 아뇩달지라 한다.
2) 못의 3면이 비등한데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人面像)이다.
3) 곤륜산은 하수의 원천으로서 못의 북쪽에 큰 폭포가 있고, 4방으로 4대하가 흐른다.
4) 곤륜산은 3층으로 되어있다.
5) 곤륜산은 신선이 사는 곳이다.
6) 곤륜산은 불사약이 나는 곳이다.
7) 곤륜산은 아름다운 옥(玉)이 나는 곳이다.
8) 곤륜산에 서왕모(西王母)에 대한 전설이 있다.
9) 곤륜산은 지구의 중심에 있다.
곤륜산의 성립요건이 이상 외에도 많으나 대체로 생략하고 위에 제시한 요건에 한정해서 곤륜산이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인가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2) 곤륜산은 지나대륙에 없다.
지나대륙의 서쪽에 곤륜산맥이 있는데 거기에 곤륜산이 있느냐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위에 제시한 요건을 갖춘 그러한 곤륜산이 곤륜산맥에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 지구상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산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산을 모두 같은 산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곤륜산맥 가운데 어느 산의 정상에도 강하의 원천인 아름다운 못(호수)이 있다는 기록을 본바 없고,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해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산상호수는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에 있는 티티카호(湖)와 소련의 레닌그라드 근처에 있는 라도카호(湖)라 하여 곤륜산맥 가운데 어느 산의 정상에도 큰 못(호수)이 없음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이는 곧 지나 서쪽 곤륜산맥에 곤륜산이 없음을 확인하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함경도에 함경산맥이 있으나 거기에 함경산이 없는 것과 같은 격이며, 인도 부부에 히말라야 산맥이 있으나 거기에 히말라야산이 없는 것과 같은 격이다. 동아출판사의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에도 곤륜산은 중국의 곤륜산맥과는 아무런 상관이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3) 곤륜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그러면 곤륜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석가방지}에 곤륜산을 곧 설산이라 했고, 설산이 백두산이라는 사실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백두산의 특수성을 곤륜산의 성립요건에 대입시켜 보기로 한다.
1) 곤륜산의 정상에 아름다운 못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백두산의 정상에도 형형색색의 병풍석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못인 천지가 있다.
2) 곤륜산 정상의 못이 그 모형에 있어서 3면이 비등하나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이다. 그런데 백두산 천지의 모형도 3면이 비등하고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이다.
3) 곤륜산은 하수의 원천으로서 못의 북쪽으로 큰 폭포가 흐르고 4방으로 4대하가 흐른다. 그런데 백두산도 하수의 원천으로서 천지의 북쪽으로 큰 폭포인 천지폭포가 흐르고 4방으로 4대하가 흐른다.
4) 곤륜산이 3층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두산도 3층으로 되어있고, 실제 답사하여 보거나 사진을 보아도 3층이다.
5) 곤륜산에 신선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백두산에도 한웅·한검·자부선인 등 신선이 살았으므로 백두산 일대를 신시(神市) 또는 신주(神州)라 한다.
6) 곤륜산에서 불사약이 난다고 하였다. 그런데 {부도지}에 의하면 백두산에서도 삼근영초(三根靈草)인 산삼(山蔘)이 나고 이를 불사약이라 하였다.
7) 곤륜산에서 아름다운 옥이 난다고 하였다. 그런데 {부도지}에 의하면 백두산에서도 7색보옥(七色寶玉))이 생산되었다고 하였다.
8) 곤륜산에 서왕모에 대한 전설이 있다. 그런데 백두산에도 서왕모에 대한 전설이 있다.
9) 곤륜산은 지구의 중심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백두산을 중심으로 세계지도를 보면 일본열도는 좌청룡, 지나대륙은 우백호에 해당되며, 남북아메리카 대륙은 외청룡, 아프리카 대륙과 유럽대륙은 외백호에 해당되고, 시베리아 대륙은 현무, 오세아니아주는 주작에 해당되어 백두산이 비교적 지구에서 가장 중심인데, 세계지리학회에서 위성사진을 근거로 백두산을 지구의 중심이라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우리민족사 연구에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중심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백두산이 곤륜산의 성립요건과 부합일치된다. 이는 백두산이 곧 곤륜산이고, 곤륜산이 곧 백두산임을 의미한다. 백두산 토착민들도 백두산을 곤륜산이라 하였다. 청(淸)나라의 제4대 강희제(康熙帝)도 지나의 태산(泰山)은 물론 한국·지나·만주의 모든 산이 백두산에서 뻗어나간 지맥임을 주장했다. 즉 곤륜산이 모든 산의 조종인데, 백두산이 모든 산의 조종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문화와 유교가 곤륜산에서 기원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의 백두산에서 기원되었다는 이론이 성립되고, 공맹의 유교가 우리나라 신선도에서 기원되었다는 사실이 제1차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유교의 창시자는 우리민족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국문화의 개조(開祖)는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이다. 이들 삼황은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
주지하다시피 복희는 배달국 태우의한웅(太虞儀桓雄)의 막내아들로서 동이족이다. 복희가 동이족이라는 사실은 부사년(傅斯年) 등 중국학자들도 인정한다. 신농(神農)씨는 소전(少典)의 아들이다. 소전은 고시(高矢)씨의 방계(傍系) 후손이다. 고시씨는 농경을 맡은 단군왕검의 직속 신하이다. 그러므로 신농씨 역시 동이족인 것이다. 오늘날 강(姜)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황제 헌원 역시 소전(少典)의 별파로서 동이족이다. 그래서 {초사:楚詞}에 "황제는 백민태생(白民胎生)이고 원래 동이족이라"고 하였다.
삼황 다음 유학은 누구에 의해서 전승되었는가?
{중용}을 보면 "중니(仲尼:孔子의 字)는 요순(堯舜)의 도를 조술하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법도를 헌장으로 하였다"고 했다. 또한 유학의 계통을 당(唐)나라 시대의 한자(韓子)는 {맹자집주} 서설에서 "요(堯)임금은 인의(仁義)의 도(道)를 순(舜)임금에게 전하고, 순임금은 이것을 하(夏)나라의 우(禹)임금에게 전하고, 우임금은 이것을 은(殷)나라의 탕(湯)임금에게 전하고, 탕임금은 이것을 주(周)나라의 문(文)·무(武)·주공(周公)에게 전하고, 문·무·주공은 공자에게 전하고, 공자는 맹가(맹자)에게 전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보면 복희·신농·황제 다음, 중국문화와 유학은 요임금과 순임금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다. 이들은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 {사기}에 의하면 요임금은 황제 헌원의 5세손으로 동이족이다. 요임금이 동이족이란 것은 안호상과 최동 등 여러 학자들이 여러 전거를 들면서 주장한다. 또한, {맹자}를 보면 순임금의 출생지·거주지·사망지가 모두 동이지방임을 밝히면서 순임금도 동이족임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사계의 모든 학자들이 공인한다.
유학을 집대성한 공자는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 공자는 은(殷) 왕실과 송(宋) 왕실의 후손이다. 은왕실과 송왕실은 동이계이다. 그러므로 공자 역시 동이계이다.
이상과 같이 중국문화와 유학을 개창한 개조가 모두 동이족이다. 여기에서 우리민족은 동아문화의 개창자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고, 공맹의 유교는 우리민족의 신선도에서 갈려나간 신선도의 지류라는 사실이 제2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3. 한자의 창제는 우리민족에서 비롯되었다
한자의 전래와 더불어 유학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이는 한자가 지나족에 의하여 창제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이루어진 추정이다. 그러면 한자를 어느 민족이 먼저 창제하기 시작했는가? 다시 말하면 한문의 사용문제가 아니라 한자의 기원문제이다. 이는 마치 영어는 영국어이지만 영어를 표기하는 알파벳(Alphabet)의 기원은 영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페니키아문자 또는 그리스문자에 있다고 하듯, 한문은 지나어이지만 한문을 표기하는 문자 곧 한자의 기원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한자는 중국을 위시로 하여 한국·일본·동남아 등 아시아권 일원에서 거의 쓰여지고 있다. 그 제작도 동양 각국에서 이루어져 한자는 동방문자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자의 기원에 대한 기록을 보면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신시에 녹서(鹿書)가 있었고, 자부에 우서(雨書)가 있었으며, 치우에 화서(花書)가 있었다. 투전문속(鬪佃文束)은 그 남은 흔적이다. 복희에 용서(龍書)가 있었다. 단군에 신전(神篆)이 있었다. 이러한 글자와 글이 백산·흑수·청구 등 구려(九黎)의 지역에서 널리 쓰여졌다"고 하였다. 또 이어서 "부여인(扶餘人) 왕문(王文)은 처음에 전(篆)을 번거롭게 만들었으나 점점 그 획을 생략하여 새로이 부예(符隸;예서의 서체)를 만들어 그것을 썼다. 진(秦) 때에 정막(程邈)이 숙신(肅愼)에 봉사하여 한수(漢水)에서 왕문의 예법(隸法)을 얻었다. 또 그 획을 가지고 약간 바꾼 것이 지금의 팔분체(八分體)이다.
진(晉) 때에 왕차중(王次仲)이 또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차중은 왕문의 원예(遠裔)이다. 지금 문자의 기원을 궁구하여 보면 다 신시의 유법이며 지금의 한자 역시 그 지류를 이은 것이 분명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단군세기} 제3세 단군 가륵(嘉勒) 2년조를 보아도 상형표의(象形表意)의 진서(眞書) 곧 한자(漢字)가 있었다 하고, 단군왕검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울 때도 국호를 한자로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이는 단군왕검 시대에도 한자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학이 한자와 더불어 전래됐을 것이라는 추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 사학계에서는 위의 기록을 믿으려 아니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통설에 따라 한자의 유래를 따져보기로 한다. 그러면 한자의 창제설에 어떤 것이 있는가? 크게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하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3천 5백년 전 은(殷)나라의 한 때 도읍지였던 안양(安陽)에서 발견된 갑골문자가 한자로 발전되었을 것이라는 갑골문자 발달설이 있고, 다른 하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5천년 전 창힐(蒼?) 등 어느 개인이 한자를 창제하였다는 학설이 있다.
1) 갑골문과 한자의 기원
갑골문이란 점을 치는데 사용됐던 문자로서 거북의 등딱지인 귀갑(龜甲)이나 소와 말의 어깨뼈에 새겨진 문자를 말한다. 이 문자는 1899년 왕의영(王懿榮)과 유악(劉?) 등에 의하여 발견된 후 많은 연구에 의하여 은(殷)나라의 것임이 밝혀졌고, 은나라는 B.C. 17세기 경에서 B.C. 11세기 중반까지 지나 황하유역에 존재하였던 나라이다.
그러면 은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 은나라는 상(尙)나라라고도 한다. 상나라의 시조는 설(契)이다. 설의 아버지는 제곡고신(帝嘗高辛)이다. 제곡고신의 할아버지는 소호금천(少昊金天)이다. 소호금천은 황제 헌원의 맏아들이다. 황제 헌원은 동이족이다. 이래서 은민족은 우리민족과 같이 백의를 입었고, 천신제를 지냈으며, 수골에 의하여 점을 치고, 순장제도(殉葬制度)였으며, 시조의 탄생설이 난생설(卵生說)로서 은왕실과 은민족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이다. 즉 은민족은 우리민족과 동일계의 민족이라는 것이다. 또한 단군조선 시대에도 이미 한자가 있었다. 그렇다면 갑골문 역시 동이족의 본거지인 동부지방에서 서쪽으로 전승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지나에서 우리민족 사회로 전래됐을 것이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2) 한자의 창제와 우리민족
한자의 창제설에 어느 개인을 두고 말할 때는 ?복희설 ?창힐설 ?주양설(朱襄說) ?저송(沮誦)·창힐설(蒼?說) ?범(梵)·거려(?廬)·창힐설(蒼?說) 등이 있다. 이 다섯 가지 설을 비교하여 보면 가장 공통적인 학설이 창힐설이다. 그래서 창힐을 한자의 최초 창제자로 꼽는다.
그러면 창힐(蒼?;倉?)은 어느 시대 사람이며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 창힐은 상고시대의 황제(黃帝)이다.
? 창힐은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이다.
이들 두 가지 설 가운데 어느 설이 정확한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창힐이 황제라 할 경우 황제는 동이족이므로 창힐은 동이족이다. 또한 황제의 사관이라 할 경우, 황제는 동이족이므로 창힐 역시 동이족일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창힐과 고신(高辛) 역시 다 치우의 묘예(苗裔)다" 하였는데 치우는 동이족이다. 그러므로 창힐은 어떻게 보든 동이족이다. 여기에서 한자의 지나족 창제설은 두번째로 부정된다.
3) 한자의 상형과 우리민족
이상과 같이 한자의 기원이 동이족 곧 우리민족에 있었다면 한자의 제작원리인 한자의 상형(象形) 역시 자연적인 현상 외에 우리민족의 생활과 그 습속을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명지대학교의 진태하(陳泰夏)교수는 한자의 형성과정에 우리민족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자료를 제시하여 국내 언어학계에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진태하 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근거를 몇가지 소개한다.
첫째, '집가(家)'자는 집면(?)자 안에 '사람인(人)'자가 들어가 있어야 당연한데 '돼지시(豕)'자가 들어가 있다. 따라서 집가(家)자는 집 안에 돼지를 키웠던 민족, 즉 한민족만이 만들 수 있는 글자라는 것이다.
둘째, '날일(日)'자는 해 모양을 상징한 문자이다. 그렇다면 해와 같이 둥글게 그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해 안에 까마귀 그림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이 문자를 만든 민족은 금까마귀 신화를 가진 민족이다. '날일(日)'자가 만들어지기 이전 수만년 전부터 그러한 신화를 전하여 오는 민족은 한민족 밖에 없다. 그러므로 '날일(日)'자 역시 우리민족만이 만들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이다.
셋째, 지나에서는 종자를 나타낼 때 '씨(氏)'라고 쓰지 않는다. '씨(氏)'는 그런 의미도 아니다. 오직 성씨만을 '씨(氏)'라고 한다. 그런데도 성씨를 나타낼 때 쓰는 '씨(氏)'자는 씨앗에서 뿌리가 내리고 싹이 트는 모습에서 나왔다. 지나족이 이 문자를 만들었다면 종자를 '씨(氏)'라고 표현하는 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없다는 것이다. 우리말의 '씨(氏)'는 종자와 성씨 모두에 사용된다. 따라서 '씨(氏)'자 역시 한민족만이 만들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이다.
진태하 교수는 이상과 같이 근거를 제시하면서 한자(漢字)라는 명칭은 옳지 않으며, 고대 한민족의 글이라는 "옛한글 혹은 동방문자(東方文字)"라고 불러야 옳다고 하였다. 진교수는 "젊은 세대들은 특히 한민족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여야 할 시점이다.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표의문자도 만들었고, 가장 과학적인 표음문자도 만들었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이 일은 한민족의 큰 자랑이다"라고 강조한다.
4) 한자의 반절음은 우리민족 중심이다.
한자는 자형(字形)·자음(字音)·자의(字義)의 3요소로 구성되어있다. 자음을 표기하는 발음부호를 반절음(反切音)이라 한다. 반절음은 한자(漢字)로써 한자의 자음(字音)을 표기한 일자일음(一字一音)의 발음부호로써 한자를 창제한 민족의 발음을 기준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반절음과 일치되거나 가깝게 발음하는 민족이 한자의 창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지나족의 발음과 우리민족의 발음 가운데 어느 민족의 발음이 반절음과 일치되거나 가까운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백두산(白頭山)을 예로 들면, 백(白)의 반절음은 박맥절(薄陌切)로서 원음이 '백'이다. 지나족의 발음은 '바이(bai)'인데, 우리민족의 발음은 '백'이다. 두(頭)의 반절음은 도후절(徒侯切)로서 원음이 '두'이다. 지나족의 발음은 '또우(tou)'인데, 우리민족의 발음은 '두'이다. 산(山)의 반절음은 사한절(師閒切)로서 원음이 '산'이다. 지나족의 발음도 '산(shan)'인데, 우리민족의 발음도 '산'이다. 이와 같이 우리민족의 발음은 반절음과 일치하고, 지나족의 발음은 반절음과 틀리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한자의 발음은 원래 일자일음(一字一音)인데 지나족의 발음은 일자이음(一字二音)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임승국은 한자 53,525자의 발음부호인 반음절이 모두 우리말 기준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동이계가 황하문명의 주인공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고 하였다. 이를 보아도 한자의 기원이 우리민족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한자의 발생기원을 탐색하여 보면 그것은 우리민족에서 먼저 발원되었다. 그러나 {단군세기}를 보면 "상형표의(象形表意)의 한자(眞書)가 있었으나 서로 뜻이 통하지 못하고, 국가 사이에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움으로써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우리민족은 한자를 먼저 창제하였으나 그 난해성으로 인하여 고대에 이미 그 사용을 포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지나는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에 걸쳐 한자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글자 수가 늘어나면서 한자(漢字)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한자가 마치 지나족에 의하여 창제된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자와 더불어 유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Ⅲ. 유교사상과 우리민족의 신선도
1. 주역은 신선도의 경전이다.
{주역}은 유교의 기본경전으로서 8괘(八卦)와 64괘(六十四卦) 그리고 이를 설명한 괘사(卦辭)와 효사(爻辭) 및 십익(十翼)으로 구성되어 있다. 8괘는 천지만물이 회통하는 이치 곧 천지인삼재지리(天地人三才之理)와 봄·여름·가을·겨울이 돌아가는 이치 곧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을 기본원리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64괘는 8괘를 더욱 발전시켜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돌아가는 이치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괘사는 괘의 총체적 뜻을 설명한 것이고, 효사는 육효(六爻)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1) 역(易)은 동이족에서 비롯되었다.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역(易)에는 환역(桓易)과 희역(羲易) 그리고 금역(今易)이 있다. 희역은 복희의 역을 의미한다. {태백일사} 신시본기를 보면, 복희가 어느날 꿈에 "삼신(三神)이 몸에 강령하여 만리를 통철하게 되고 인하여 삼신산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天河;지금의 송화강)에서 괘도를 얻었는데 삼절(三絶;┏陰爻) 삼연(三連;?陽爻)하여 위치를 바꾸면서 그 이치를 궁구하면 묘하게도 삼극(三極)을 품고 있어 변화가 무궁하였다"고 하였다. 즉 괘도를 복희가 천하에서 얻었다고 하였다.
이는 복희가 괘도를 처음으로 제작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전승되고 있던 것을 복희가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성기전} 상편을 보면, "환국을 이어서 한웅씨가 일어나 괘(卦)를 그리어 미래를 알고 괘상을 잡아 신통력을 부렸다"고 하여 한웅천황에게서 역(易)이 비롯되고 있다. 신시본기에도 황제중경(黃帝中經)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의 근본은 신시(神市) 구정균전(邱井均田)의 유법이라 하여 {주역}의 근본원리인 음양오행사상이 신시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상 {한단고기}의 기록에 의하면 역은 한웅천황에 의하여 기원되고 복희에 와서 좀더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의 저작에 대하여 학설이 각각이다. 일반적인 학설을 소개하면 제1설로는 8괘와 64괘를 모두 복희씨가 저작하였다는 위(魏)의 왕필설(王弼說)이 있고, 제2설로는 8괘는 복희씨가 저작하고, 64괘와 괘효사(卦爻辭)는 문왕이 저작하였다는 사마천설(司馬遷說)이 있다. 여기에서 제2설이 통설로 되고 있다. 그 이유를 보면 복희씨는 전설적인 인물이고, 8괘 창안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밝혔듯이 복희씨는 동이족이며 좁게는 우리민족이다. 우리민족은 3국시대 이후만하여도 931회의 외침을 당하였다고 한다. 외침을 당할 때마다 사료가 소실되었고 멸실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민족에게는 사료가 없을 수 밖에 없고, 사료가 없으니 상고시대의 인물이 전설적인 인물로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료가 없다거나 전설적인 인물이라 하여 복희씨의 64괘 창제설을 부정함은 모순인 것이다. 더욱이 위에서 밝혔듯이 복희씨에 의하여 괘도가 제작되었다는 기록 외에 한웅천황에 의하여 그려졌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므로 역은 한웅천황에 의하여 비롯되고 복희와 문왕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2) 주역과 신선도의 동일성
역(易)은 날일(日)자와 달월(月)자의 회의문자인 바꿀역(易)자이다. 곧 역이란 해와 달이 바뀌고 돌아감을 의미한다. 그런데 {주역} 계사상전 제11장을 보면 "역은 천지(天地)에 준거하여 만들어진 것이라"하였고, 계사상전 제2장에는 "육효(六爻)의 움직임은 천지인(天地人) 세 가지의 지극한 이치를 표현한 것이라"하였다. 또한 "그런 까닭에 역의 이치에는 태극이 있고, 태극이 하늘과 땅 두 현상을 낳고, 하늘과 땅은 태양·태음·소양·소음의 4상을 낳고, 그런 까닭에 법의 현상은 하늘과 땅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변하고 통하는 것은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절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주역과 신선도의 동일성을 지적하면,
첫째, 신선도의 일기(一氣)와 {주역}의 태극은 같은 뜻을 지닌다.
둘째, 신선도와 주역은 모두 천지인 삼재(天地人 三才)와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을 발생원리로 한다.
셋째, 신선도의 숭배대상은 하나님인데, {주역}에서도 숭배의 대상이 하나님이다.
넷째, 신선도는 순환론인데, {주역} 역시 순환론이다.
이와 같이 {주역}과 신선도의 기본사상이 동일하다. 여기에 괘(卦)가 한웅천황과 복희에 의하여 기원되었다는 것을 아울러 생각하면 {주역}은 원래 동이족의 사상이며 신선도의 경전이라 할 수 있다.
2. 홍범구주는 우리민족의 사상이다.
홍범구주(洪範九疇)란 첫째, 오행(五行). 둘째, 경용오사(敬用五事). 셋째, 농용팔정(農用八政). 넷째, 협용오기(協用五紀). 다섯째, 건용황극(建用皇極). 여섯째, 예용삼덕(乂用三德). 일곱째, 명용계의(明用稽疑). 여덟째, 염용서징(念用庶徵). 아홉째, 향용오복 위용육극(嚮用五福 威用六極)이다. 이를 부연한 것이 유교라 할 수도 있다. 그러면 홍범구주는 어디에서 유래되고 있는가?
{태백일사} 신시본기에는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인 황제중경지서(黃帝中經之書)가 태자 부루(扶婁)에게서 나와서 우(虞)의 사공(우임금)에게 전하여지고 후에 다시 주왕(紂王)에게 기자(箕子)가 진술한 것이 홍범(洪範)이 되었으니 바로 그것이 황제중경(黃帝中經) 오행치수(五行治水)의 설(說)인 즉 대개 그 학문의 근원은 신시(神市) 구정균전(邱井均田)의 유법(遺法)인 것이다 라고 하였다. 즉 지나에 전승된 홍범구주(洪範九疇)는 신시(神市)에서 연원되었다는 것이다.
신채호 역시 여러 전거를 들면서 말하기를, {상서:尙書}에 "홍범(洪範)은 하우씨(夏禹氏)가 전하는 바라" 하였고, {오월춘추;吳越春秋}에 "하우씨가 치수(治水)할 때에 현토사자(玄?使者)로부터 중경(中經)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고기(古記)에 "단군 태자 부루(扶婁)가 하우(夏禹)씨를 도산(塗山)에서 보았다"고 하였으므로 이 세 가지 사실을 고찰하여 볼 때, 기자(箕子)의 홍범(洪範)은 곧 부루의 중경(中經)을 강술한 것이라 하였다. 아울러 {한서(漢書)}에 거북이가 문자를 지고 낙수(洛水)에서 나오므로 우(禹)가 홍범을 연(演)하였다 하나, 그것은 망증(妄證)이라 하였다.
3. 인사상은 우리민족의 사상이다.
인(仁)자는 사람인(人)변에 두이(二)자로서 천·지·인(天地人)의 회의문자(會意文字)이다. 그래서 인사상은 신선사상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고, 유학의 핵심사상을 이루어 사서(四書)의 하나인 {논어}에만도 인(仁)에 대한 말씀이 무려 50여회나 나타난다. 그러면 인사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어디의 무엇에서 유래되고 있는가?
첫째, 고대에 있어서 인(仁)과 인(人)과 이(夷)는 같은 의미로 쓰였다. 즉 인(仁)은 동이족을 의미하였다. 중국의 학자 노간(勞幹)도 말하기를 "우리들이 동방 사람들을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이(夷)자와 인(仁)자는 통용된다. 인(仁)자와 인(人)자는 또한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있어서 인(人)자를 일컫는 것은 그 근원이 동방에서 나왔으며, 만약 동이족이 문화적으로 선진이고, 먼저 '인(人)'을 사용하였다고 하면 후대에 와서 서방에서 기원한 부족들이 이를 빌어 전인류의 명사로 쓴 것이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사람인(人)자와 어질인(仁)자는 동이족에서 나온 동이족을 의미하였다는 것이다.
{설문}에도 어질인(仁)자는 오랑캐이(夷)자의 고자(古字)라 하였다.
둘째, 인(仁)은 동이족의 성격을 의미한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동방을 이(夷)라 한다. 말을 어질게 하고 인생을 즐기며, 만물이 땅에 근본하여 태어난다. 그러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이치로써 다스리니 군자들이 사는 불사지국에 이르렀다 하고, {신이경;神異經} 동황경(東荒經)에도 동방 사람들은 항상 공손히 앉아 서로 거스르지 않으며 서로 칭찬은 하되 서로 헐뜯지 않고 남의 환란을 보면 몸을 던져 죽어도 구제하니 이를 일컬어 착함이라 하였다. 또한 중국 고서 {이아;爾雅}에 "구이는 동방에 사는데 동방은 해돋이 땅으로 태평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질다. 땅의 정기가 그러한 때문이다고 하여 땅의 정기로 인하여 동이족은 원래 어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인(仁)은 동이족의 성격을 의미한다.
셋째, 인(仁)은 도·불·유 삼교의 근원사상이다. {최문창후전집} "지증화상비명병서"에 의하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을 방위에 따라 나누니 동방에 짝한 바가 仁이다. 인은 道·佛·儒 三敎를 일으켰으니 정역에 드러낸 이름이 불(佛)이다. 인심(仁心)이 곧 불(佛)이며, 불목(佛目)은 능인(能仁)의 법칙이라"하였다. 즉 인(仁)은 동방사상인데 인사상에서 도·불·유 삼교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사상은 신선사상이며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제1편에서 상설하였다.
4. 제례의 기원은 우리민족에 있다.
지나의 유교에 상제(上帝)와 조상신을 모시는 제례풍속이 있다. 이것은 언제 어디에서 유래되고 있는가? 이것 역시 지금까지 서술한 바에 의히면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지나로 전승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제 그 유래를 간략히 알아보기로 하자.
{서경} 우서를 보면 순(舜)임금이 제위(帝位)에 오르자 상제(上帝)와 육종(六宗)과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두루 제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규원사화}에 의하면 "음력 10월에 제천하던 것이 만세의 풍속이 되니, 그것이 동방 특유의 성대한 제전이요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순이 제위에 올랐을 때 상제께 제사를 올리고 육종(六宗)에 제사를 지내며 차례로 산천제신(山川諸神)에게 두루 제사하니 이는 일찍이 순(舜) 이전에는 없던 일로 이 역시 동방에서 제천보본하는 의식과 산악하천(山嶽河川)이나 해양소택(海洋沼澤)에 봉명하는 사상에 근원한 것이다"라고 하여 10월의 소도제천의식에서 제사풍속이 연원되었고, 지나의 제례풍속도 이에서 유래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도 "천지인(天地人) 삼극(三極)이 모든 것을 하나로 규합하는 서물(庶物)의 원의(原義)인 즉, 천하구환(天下九桓)의 예락(禮樂)이 곧 삼신고제(三神古祭)의 풍속이 아니고 무엇이리요"하여 모든 예의법속이 삼신사상에서 유래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지나족의 제례풍속 역시 우리나라에서 지나족 사회로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Ⅳ. 오륜은 원래 신선도의 덕목이다.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사상(五倫思想)도 지나의 유교에 뺏겨 지나족에 의하여 창안된 외래사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제 그러한 인식을 떨쳐버리고 오륜사상이 원래부터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이며 신선도의 덕목임을 논증하려 한다. 그러한 논증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첫째, 오륜사상이 지나족에 의하여 창제되었다는 종래의 관념이 부정되어야 하며.
둘째, 오륜사상이 동이족에서, 좁게는 단군조선 또는 배달국 시대에 발원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야 하고.
셋째, 오륜사상이 신선도의 덕목이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사실이 밝혀진다면 오륜사상이 오늘날 공맹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심덕목이라 하더라도 원래부터 우리민족의 사상이며 신선도의 덕목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하에서 위의 세 가지 문제를 순서대로 하나씩 밝혀나가기로 한다.
1. 오륜은 지나족의 창작이 아니다.
{동몽선습}에 의하면 "하늘과 땅 사이의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니, 사람이 귀한 것은 오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맹자}에 이르기를(孟子曰) 부자유친(父子有親)하며 군신유의(君臣有義)하며 부부유별(夫婦有別)하며 장유유서(長幼有序)하며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 하시니 사람으로서 오상(五常)을 알지 못하면 금수에 가까워짐이 먼데 있지 않으니라" 하였다. 이 원문을 잘못 이해하면 마치 오륜사상이 맹자에 의해서 창작되고 가르쳐진 것처럼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맹자} 등문공장구(상)에 기록되기를 "사람의 도리에 있어서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으며, 안일하게 지내면서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에 가까워지기 쉽나니 성인(聖人)이 이를 근심하여 설(契)로 하여금 사도(司徒)를 삼아 인륜(人倫)을 가르치게 하였으니, 부자유친·군신유의·부부유별·장유유서·붕우유신이 그것이다"하였다. 이를 보면 {동문선습}에서 말하는 {맹자}는 사람이 아니라 책자이며, 오륜사상은 맹자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라 고대의 성인(聖人)과 설(契)로 올라간다.
그러면 그 성인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중국에서 성인이라면 공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공자는 설(契)과 동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설 보다 약 1천 8백여년 뒤의 인물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유학을 집대성(集大成)한 성인이라 하더라도 {맹자}에서 말하는 성인이 될 수 없다.
그러면 "맹자}에서 말하는 성인은 누구인가? 공자께서 문왕과 무왕의 법도를 밝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문왕과 무왕이 {맹자}에서 말하는 성인인가? 문왕과 무왕도 설(契)과 동시대의 인물이 아닌 천여년이나 후대의 인물이라는 것은 사계의 학자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도 {맹자}에서 말하는 성인이라 할 수 없다. 또한 공자께서 요임금과 순임금의 사상을 조술하였다 했다. 그러면 이들이 설(契)과 동시대의 인물인가? 그렇다 그들이 바로 설(契)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러면 {맹자}에서 말하는 성인은 요임금 아니면 순임금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서경} 요전(堯典)이나 {논어} 요왈편(堯曰篇) 등 기타 요임금에 대한 기록을 보면 어디에도 요임금이 설(契)과 더불어 오륜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맹자}에서 말하는 성인은 요임금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서경} 우서 순전을 보면 거기에 {맹자}의 기록과 일치되는 대목이 있다. 즉 "임금(舜임금)이 말하기를 설(契)이여! 백성들이 화친하지 않으며 오품(五品)을 따르지 않고 있소. 그대를 사도(司徒)에 임명하니 오교(五敎)의 가르침을 삼가 펴서 너그럽게 하기 바라오" 하였고, 그 주(註)에 오품(五品)이란 부자(父子)·군신(君臣)·부부(夫婦)·장유(長幼)·붕우(朋友)의 다섯을 가리키는 위계적 등급이라 하였다. 오교(五敎)는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의 다섯임이 당연한 이치라 하였다. 그렇다면 {맹자}에서 말하는 성인은 순임금이 틀림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표(7)과 같이 {맹자}의 기록을 {서경}의 기록에 대입시킬 경우 서로 일치되기 때문이다.
도표(7) {맹자}와 {서경}의 기록 비교
맹자의 기록 |
聖 人 |
설(契) |
司徒 |
五倫 |
서경의 기록 |
舜임금 |
설(契) |
司徒 |
五敎 |
즉 {맹자}에 성인이 설(契)로 하여금 사도(司徒)를 삼아 오륜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하고, {서경}에는 순임금이 설을 사도에 임명하여 오교(五敎)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하였으므로 {맹자}의 성인은 곧 순임금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순임금과 설은 지나족이 아니다. 따라서 오륜(五倫)사상은 지나족에 의하여 창제된 것이 아니라고 거의 확정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 오륜의 발상지는 배달국이다.
순임금과 설(契)이 지나족이 아니라면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부터 규명하여 보자. {맹자} 이루장구 하(離婁章句 下)에 순임금은 제풍(諸馮)에서 낳고, 부하(負夏)로 옮겼다가 명조(鳴條)에서 운명하였으니 동이인(東夷人)이라 하고, 그 주(註)에 제풍·부하·명조는 모두 지명일 뿐더러 동이족이 다스리던 곳이라 하였다. 즉 {맹자}에는 순임금의 출생지·거주지·사망지가 모두 동이지방이라는 증거를 들면서 순임금을 동이인이라 하였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기}에도 순임금을 동이인이라 하였다. 또한 {단기고사}에 의해도 순임금은 단군왕검의 중신인 고시(高矢)의 형 고수(高未)의 아들이다. 그리고 안호상을 비롯하여 여러 학자들이 중국의 고서를 전거로 들면서 설(契) 역시 동이족임을 밝히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전거나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지나족에게 처음으로 오륜사상을 보급한 순임금과 설(契)이 동이족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오륜사상의 성립연원이 동이족 사회라는 것을 말한다.
국내고서인 {단기고사}에 의해도 오륜사상이 단군조선 또는 그 이전 배달국에 이미 있었다. 즉 {단기고사} 제1세 단제 왕검편에 단군왕검께서 수두교를 창설하시고, 중신(重臣)인 신우(神佑)에게 명하여 백성에게 오륜을 가르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오륜의 성립이 단군조선 시대에 있었고 신선도(수두교)와 함께 함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신선도는 단군왕검에 의해 성립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한웅천황에 의하여 성립되었으므로 오륜의 성립은 한웅조인 배달국 시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태백일사} 마한세가(상)에 유중유일(惟中惟一)의 도(道)는 아비가 되어서는 마땅히 효도하고, 임금이 되어서는 마땅히 충성하고, 부부가 되어서는 마땅히 서로 존경하고, 형제가 되어서는 마땅히 서로 사랑하고, 노소(老少)는 마땅히 차례가 있고, 벗은 마땅히 믿음이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의 고서에도 오륜사상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를 보아도 오륜사상의 성립연원이 우리민족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3. 오륜은 신선도와 불가분의 연관성을 지닌다.
오륜사상이 단군조선 또는 배달국에서 성립된 우리 민족의 고유덕목이라면 신선도와 불가분의 연관성을 지녀야 한다. 즉 三倫이 三神사상에서, 五戒가 五帝사상에서 발원되었다면 오륜은 五行사상에서 발원되어야 한다.
우선 오륜과 오행의 공통점을 지적하면,
첫째, 오행이란 만유의 존재현상이 木·火·土·金·水의 다섯 가지로 동정변화하면서 돌아가는 자연법칙을 의미한다. 그런데 五倫의 倫은 사람인(人)자와 둥글륜(侖)자의 회의문자로서 오륜은 인간관계가 부자·부부·붕우·군신·장유로 돌아가는 예법을 의미한다. 즉 오행이 자연법칙이라면, 오륜은 인간관계의 법칙이다.
둘째, 오행은 지전(地轉)에서 생기고, 지전은 태양과 지구의 인력에서 생긴다. 즉, 오행은 태양과 지구의 쌍무관계에서 생긴다. 그런데 오륜의 부자유친은 부자자효(父慈子孝)로, 군신유의는 군인신충(君仁臣忠)으로, 부부유별은 부화부순(夫和婦順)으로, 장유유서는 장혜유순(長惠幼順)으로, 붕우유신은 상교이신(相交以信)으로 풀이 된다. 즉 오륜 역시 상부상조하는 쌍무관계이다. 이와 같은 공통점으로만 보아도 오륜사상이 신선도의 오행사상에서 나온 신선도의 고유덕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하에서 오행을 하나씩 설명하면서 오행과 오륜과의 연관성을 밝힌다. 이해의 편의상 일반적인 순서를 바꿔 설명한다.
① 土 : 토는 흙이다. 흙은 농토로 쓰면 농토가 되고, 집을 지으면 집터가 되며, 겨울이 되면 습토가 되고 여름이 되면 초토가 되어 때와 장소에 순응할 뿐이다. 그뿐인가? 모든 생물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흙은 생명의 보금자리이며 생활의 근본이다. 흙의 그러한 성격으로 토(土)는 방위로 말하면 동·서·남·북의 중앙으로서 사방(四方)에 모두 관련을 지니는가 하면, 계절로 말해도 장하(長夏)로서 사계(四季)의 중앙이다. 그 덕목으로 말하면 부자·부부·붕우·군신·장유는 물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인간관계에 필요로 하는 덕목이 토에 해당한다. 그러한 덕목이 무엇인가? 그것은 오상(五常) 중 신(信)이며, 오륜 중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신(信)이다. 신은 진실(眞實)·불기(不欺)·무망(無妄)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은 토를 상징한다.
② 木 : 목은 물질로 볼 때 나무를 뜻한다. 나무는 습도와 온도 등 적절한 조건에 해당되는 시기가 되면 뿌리에서 줄기가 나오고 뻗어나간다. 이는 하나의 출발이다. 이를 계절에 비유하면 그것은 봄(春)이며, 방위에 비유하면 해가 처음으로 떠오르는 동방이다. 사업에 비유하면 시작이다. 인생에 비유하면 그것은 유년기에 해당되는데, 어린 자녀를 교육시키고 양육하는데 가장 필요한 기본덕목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仁)과 친절(親)이다. 사랑과 친절은 오상(仁·義·禮·智·信) 중 인(仁)이며, 오륜 중 부자유친의 친(親)이다. 그래서 인(仁)과 친(親)은 오행(五行) 중 木에 해당된다.
③ 火 : 화는 木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불이다. 불은 빛과 열을 발산한다. 이는 계절로 말하면 여름(夏)에 해당되며, 방위로 말하면 남방에 해당된다. 사업으로 말하면 번성기이며 성장위주의 시기이다. 인생으로 말하면 한창 뻗어나가는 청년기로서 그 감정으로 볼 때는 가장 정열적이고 격정적인 시기이며, 태도로 볼 때는 의기양양하고 투쟁적이다. 이러한 시기의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기본적인 덕목이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 남의 인격을 존중하는 예절이며, 남녀 간에는 분별이다. 이는 오상(五常) 중 예(禮)이며, 五倫 중 부부유별 또는 남녀유별의 별(別)이다. 이래서 예(禮)와 별(別)은 火에 해당된다.
④ 金 : 금은 쇠붙이로서 단단하면서도 빛난다. 그래서 금은 완성으로 접어든 단계를 상징한다. 火가 양적 성장기라면 금은 질적 성숙기이다. 이를 계절에 비유하면, 그것은 오곡이 무르익는 가을(秋)에 해당되며, 방위로 말하면 황혼이 깃든 서방에 해당된다. 사업으로 말하면 성장위주에서 공익사업으로 전환하는 시기이다. 인생으로 말하면 40∼50대의 장년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정치적 사회적 활동을 많이 하여야 하는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의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기본적인 덕목이 무엇인가? 어떠한 상량적 계산이나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의지와 투철한 가치관 그리고 인도주의 정신이 요청된다. 그러한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것은 의로움(義)이다. 의로움은 五常 중 의(義)이며 오륜중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의(義)이다. 이래서 의(義)는 오행 중 금에 해당된다.
⑤ 水 : 수는 물이다. 물은 생물의 생장과 발육에 필수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북방에서 찬바람과 함께 몰아닥치는 찬이슬과 눈보라는 생물을 말라 죽게 한다. 그런 때가 되면 웬만한 동물은 땅속에서 잠을 자게 되고, 씨앗이나 뿌리도 땅속에서 잠을 자며, 내년을 기다린다. 이는 계절로 볼 때 겨울(冬)이며 방위로는 북방에 해당된다. 즉 외형적으로는 소멸하였지만 내적으로는 다음 단계를 위하여 응고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는 인생으로 볼 때, 유년기·청년기·장년기를 거친 노년기에 해당된다. 노년기는 지나온 사회적 경험과 축적된 지혜를 정리하여 후예를 양성하고 사회에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 가장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덕목이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를 정리(序)하면서 지혜(智)를 구하는 것이다. 이는 五常 중 지(智)이며, 五倫 중 장유유서의 서(序)이다. 이래서 지(智)와 서(序)는 수(水)에 해당된다.
이상과 같이 오륜의 기본사상이 모두 신선도의 오행사상과 일치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오륜이 지나족에 의하여 체계화되었다거나 창제되었다는 기록도 없었고, 오히려 지나족에게 오륜사상을 전한 순임금과 설(契)이 모두 동이족이었고, 단군조선 사회에도 오륜사상이 있었다. 따라서 오륜이 오늘날 공맹유교의 중심덕목이라 하더라도 그 성립연원이 단군왕검 시대 또는 그 이전 한웅천황 시대로 볼 수 있고, 오륜사상은 원래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이며 신선도의 고유덕목이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Ⅴ. 결 론
이상에서 논한 바를 요약 정리하면,
1) 지나인의 정신적 고향이며 지나문화의 발상지라는 신비의 곤륜산이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2) 유교가 공자에 의하여 집대성(集大成)되었다 하더라도 그 유래를 찾아 올라가면 복희·신농·황제·요임금·순임금으로 소급된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동이족이다.
3) 한자의 전래와 더불어 유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그런데 한자의 창제기원 역시 동이족에 있었다.
4) 지나의 고대문화는 음양오행사상을 비롯해서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음양오행사상과 홍범구주는 단군조선에서 지나로 전승되었다.
5) 유교의 기본경전은 {주역}이다. {주역}은 여러 사람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그러나 {주역}은 동이족에 의해서 비로소 창제되기 시작하였다.
6) 유교의 기본사상은 인(仁)사상이다. 그런데 인은 원래 동이족과 그 성격 및 그 사상을 의미한다.
7) 유교의 기본덕목이 오륜인데, 오륜은 원래 신선도의 덕목이었다.
8) 기타 사상에 있어서 숭배의 대상·우주관·발생원리·제례의식·종교적 목적이 신선도와 동일하였다.
9) 유교사상을 지나족이 최초로 설파하였다는 기록도 없다.
이상을 종합적으로 생각하여 볼 때, 지나의 유교는 비록 공자에 의하여 집대성되고 체계화되었다 하더라도 그 원류는 우리나라의 신선도로서 그 유파라 아니할 수 없고, 이제 유교는 발상지인 조국으로 되돌아온 격이라 할 수 있다. 곧 유교는 원래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는 송(宋)나라와 명(明)나라에 걸쳐 정이천(程伊川)·정명도(程明道)·주희(朱熹)에 의하여 지나족 중심의 주자학으로 변질되었다. 그러한 사상을 고려말엽에 수입한 이래, 근세조선은 5백년 동안 국시로 하여 정치·종교·교육의 기반으로 삼았다. 지금의 대학에 해당되는 성균관이나, 지금의 중등교육에 해당되는 향교에 나가면 한국 사람으로서 지나족인 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 등 5성과 공자의 제자 10철 및 72제자 그리고 송나라의 6현에게 절을 하여야 했고, 지나의 역사인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 등 삼사(三史)와 지나의 종교서적이며 사상서인 논어·맹자·대학·중용·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 등 사서오경(四書五經)과 그밖에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배워야 하였다. 사회적으로 관혼상제도 지나의 풍속을 따라야 하였다. 그러면서도 제 민족의 조상인 한인·한웅·한검의 삼성(三聖)을 모신 사당은 평양 구월산의 한쪽 구석에 방치하여 한 왕조에 한번 돌아볼까 말까 할 정도였고,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은 일체 가르치지 않았으며, 국가고시인 과거시험 과목에도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에 대한 과목이 없었다.
그럼으로써 근세조선 시대의 우리민족은 지나의 삼대(夏·殷·周) 역사는 이를 잘 알면서도 제 민족의 삼한(고조선의 마한·진한·변한) 역사는 전혀 몰랐다. 지나의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잘 알면서도 제 민족의 삼신오제(三神五帝)는 전혀 몰랐다. 또한 지나의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줄줄 외우면서도 제 민족의 배달성전(삼화경)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이를 부끄럽게 생각치도 않았다. 그러한 것이 근세조선의 사회적 풍토였다. 좀 가혹한 표현을 쓰면 근세조선 500년은 지나의 사상적 식민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곧 외래종교 신자인 주자학자들만이 이 나라의 주인이었고, 고유의 토속신앙을 지키는 서민들은 노예였고 하인이었다. 그래서 서민을 노예처럼 하인처럼 혹사하고 착취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수차에 걸쳐 민란이 일어났고, 드디어는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외세가 개입하면서 나라마저 송두리채 멸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근세조선 때의 지나풍 대신 오늘날은 미국 중심의 서구풍으로 바뀌었고, 주자학 대신 서양종교로 바뀌었을 뿐 근세조선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참으로 통탄할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에서 유교도와 더불어 반성하여야 할 문제점을 몇가지 꼬집고자 한다.
첫째, {주역}을 해설한 계사상전의 천존지비(天尊地卑) 이론과 이를 계승한 정주학의 이존기비(理尊氣卑) 이론이 과연 타당하고 합리적이냐의 문제, 그러한 이론을 국가에 적용시켜 다른 나라인 지나를 대국(大國)·부국(父國)·중국(中國)·중화(中華)라 받들고, 제 나라를 스스로 소국(小國)·자국(子國)·이적(夷狄)·소중화(小中華)라 천시하여 서민들에게 열등의식을 심어주었던 행위, 또한 이존기비이론을 자기민족에 적용시켜 관존민비(官尊民卑)·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을 만들어내어 서민을 천민으로, 나약한 여성을 비열한 인간으로 취급하여 혹사하고 착취를 예사로 하였던 행위가 과연 옳았던 일인가?
둘째, 우리민족은 지나족이 아니다. 지나족과 다른 역사와 사상을 가진 민족이다. 그러므로 지나족의 역사와 사상을 배우기 전에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먼저 배우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그런데 근세조선 시대에는 지나의 주자학을 국시로 함으로써 지나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가르쳤고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지 않았다.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은 하찮은 것으로 묵살되었고, 오히려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고 배우면 이를 사문난적이라 하여 매도하였다. 그러한 교육환경에서 어떻게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이 생기겠는가? 지금은 어떠한가? 성균관이나 향교에서 제 민족의 사상서인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을 가르치고 있는가? 정주학이 이 나라에 전래된 것이 누구를 위해서인가? 이 민족을 위해서 전래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유교의 사서오경과 더불어 제 민족의 성전도 함께 가르쳐야 옳은 일이 아닌가?
셋째, 주자학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향교는 누구의 땅에 누구를 위하여 누가 세웠는가? 한국땅에 한민족을 위해서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의 노력과 재력으로 세운 것이 아닌가? 그런데 거기에 지금도 누구를 모시고 누가 누구에게 절을 하고 있는가? 지나족인 공자·맹자 등 五聖과 十哲과 七十二弟子 그리고 宋나라의 六賢을 모시고 거기에 한국 사람이 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들 지나인들은 한인·한웅·한검에 비유하면 까마득한 후배이며 손님이다. 그런데 주인과 선배를 물리치고 후배인 손님이 선배처럼 또 주인처럼 대우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 할아버지와 제 할머니를 무시하고, 남의 할아버지와 남의 할머니에게 절을 하도록 시키면서 부모조상에게 효도하라는 격이 아닌가? 또 성균관이나 향교의 집례관인 주자학자들은 지나의 하수인격이 아닌가? 그것이 과연 공자와 맹자가 바라고 윤리도덕에 부합되는 일인가? 이는 주객전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참으로 상식 밖의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한 종교의식 아래서 어떻게 민족적 주체의식이 나오겠는가? 민족적 주체의식이 없는데 어떻게 애국애족심은 나오겠는가?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탓하기에 앞서 기성 종교인들의 가치관이 전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 물이 맑아진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전체 민족이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제4편 도교의 발상지는 우리나라이다.
홍익인간 광명이세
Ⅰ. 서 론
지나의 도교는 신선사상이며, 지나는 우리나라와 인접하여 있다. 지나문화의 시조인 삼황오제가 모두 동이족이었고, 이들은 우리민족의 시조인 한인과 한웅보다 후대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지나에서 언제 누가 신선사상을 최초로 설파하였다는 기록도 없다. 우리나라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6천년 전 한웅천황이 삼신산(三神山)인 백두산에서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원리에 의하여 신선도를 설파했다는 전거가 있고 근거가 있다. 이를 생각하면 지나 도교의 원류는 당연히 우리민족의 신선도라 추정할 수 있고, 지나에서 도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함은 역수입된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도교가 지나에서 발원되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본 문제는 도교가 우리나라에 역수입된 이래 처음 제기되는 문제이며, 전체 민족의 대다수가 외래종교 신자이다. 외래종교 신자는 민족적 주체의식이 없거나 박약하다. 곧 도교신자는 지나를 정신적 고향, 신앙의 성지, 아버지 나라라고 믿는다. 자기를 낳고 키워준 제 나라는 그 다음으로 친다. 그럼으로써 좀더 구체적이고 명백한 증거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지나의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漢武帝)가 지상선경이라 동경하던 삼신산(三神山)이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인가의 문제, 언제 누구에 의하여 신선도의 경전이 우리나라에서 지나로 전승되었는가의 문제를 하나씩 밝혀 나가기로 한다. 끝으로 도교와 신선도의 동일성을 밝힌다.
Ⅱ. 도교인의 이상향인 삼신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1. 도교인의 이상향은 삼신산이다.
지나의 도교인들이 지상선경이라 동경하였던 삼신산은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인가? 그 어의로 말하면 삼신산이란 삼신과 연관성을 지니고, 삼신을 상징하는 산을 의미하며, 또한 세개의 神山 곧 仙山을 의미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삼신산이란 어떤 산인가? 사마천의 {사기}를 근거로 삼신산의 성립요건을 인출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삼신산은 삼신과 연관성을 지닌다.
둘째, 삼신산은 봉래·방장·영주의 총칭이다.
셋째, 삼신산은 발해 내지 바다에 있다.
넷째, 삼신산은 신선이 사는 곳이다. 다섯째, 삼신산은 불사약이 나는 곳이다.
여섯째, 삼신산의 초목과 금수는 모두 희다.
일곱째, 삼신산에는 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
이상의 성립요건을 충족시키면 그 산이 곧 삼신산이라 할 수 있고, 신선사상의 발원지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러한 산이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이다.
2. 삼신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삼신산은 발해에 있다고 하였다. 발해는 고대 우리나라이다. 그러므로 삼신산은 우선 우리나라에 있다고 추정할 수 있고, 백두산에서 한웅천황이 신선도를 베풀었으므로 백두산이 우선 삼신산이 아닌가 하고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삼신산의 성립요건에 백두산의 특수성을 대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삼신산은 삼신과 연관성을 지닌다. 그런데 백두산도 삼신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삼신이란 천일·지일·인일 또는 한인·한웅·한검을 의미하는데, 본서 제1편에서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일체의 원리에 의하여 신선도가 백두산에서 베풀어졌음을 밝혔다. 또한 {삼국유사}에 의하면 한웅천황이 아버지 한인의 뜻에 따라 풍백·우사·운사 등 신관과 3천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백두산정의 신단수 밑에 내려와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신시를 베풀었고, 한웅의 아들 한검(단군왕검)이 조선국을 세운 곳이다. 이래서 백두산은 삼신과 불가분의 연관성을 지닌다. 이 한 가지 사실만을 보더라도 백두산이 삼신산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삼신산은 봉래·방장·영주의 총칭이다. 그런데 백두산에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이 있다. {부도지}에 '불함삼역(不咸三域)'이라는 말이 나온다. 불함은 백두산을 의미하며, '그 주(註)에 삼역'은 봉래·방장·영주를 지칭한다고 하였다. 즉 백두산 내에 삼신산이 있다는 것이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도 백두산을 논하는 대목에서 봉래는 쑥이 무성하게 자라는 묵정밭 곧 천왕이 내려온 곳이며, 방장은 사방이 일장(一丈)인 각(閣) 즉 소도(蘇塗)가 있는 곳이며, 영주는 못이 섬을 둘러싼 모양 즉 천지(天池)가 나오는 곳이며, 이것들을 말하여 삼신산이라 한다고 하였다. 즉 백두산에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삼신산이란 봉래·방장·영주를 의미하고, 봉래는 금강산, 방장은 지리산, 영주는 한라산을 의미하는데, 이에 대하여 어떻게 해명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인간의 신체에 상단전(上丹田)·중단전(中丹田)·하단전(下丹田)이 있다. 그와 같이 땅에도 상단전·중단전·하단전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백두산은 상단전, 한반도는 중단전, 각 지방은 하단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금강산·지리산·한라산은 중단전에 있는 삼신산이라 할 수 있고, 각 지방에도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금강산·지리산·한라산도 이들 하나 하나는 선산(仙山)이지만 이를 총칭해서 말하면 삼신산인 것이다.
셋째, 삼신산은 바다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바다는 우리나라 고조선을 의미한다.
바다는 태평양이나 대서양 같은 실제의 짠물바다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종교적으로는 종교의 발상지, 종교의 요람, 선인주처(仙人住處), 수미세계(須彌世界)를 의미하고, 그곳은 과거의 우리나라 고조선을 지칭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제2부 제1편 Ⅵ에서 상설하였다.
넷째, 삼신산에 신선이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백두산에 신선이 살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태백산(백두산)은 한웅천황이 풍백·우사·운사 등 선인(仙人)을 거느리고 내려온 곳이며, 단군왕검 선인이 조선국을 세운 곳이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도 "백두거악(白頭巨嶽)은 대황중(大荒中)에 튼튼히 자리잡았으니 배달천국의 진산(鎭山)이요, 신인의 오르내림은 실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백두산은 신선이 살았던 곳이다.
다섯째, 삼신산은 불사약이 나는 곳이다. 그런데 백두산도 불사약이 나는 곳이다.
{부도지}에 의하면 불함산(백두산)의 영주 대여산 자삭방에서 인삼이 나는데, 이는 4삭(2080년)을 경과해야 꽃을 피는 삼근영초로서 이를 세상에서 불사약이라 한다고 하였다. 실제에 있어서도 백두산에는 산삼씨만 따먹고 사는 인삼조(人蔘鳥)가 있을 정도로 백두산은 산삼의 고장으로서 산삼을 백두산 삼보(三寶) 중의 하나로 친다.
여섯째, 삼신산의 초목과 금수가 희다고 했다. 그런데 백두산의 초목과 금수도 희다.
{역대소사}에 의하면 백두산(태백산)의 초목과 금수가 모두 희다고 하였다. 그런데 백두산 북쪽 기슭에는 백양목이 많고, 흰사슴·흰돼지·흰매들이 지금에도 서식하고 있다.실재 백두산을 등반하여 보아도 백두산 북쪽의 나무들은 거의 백양목이고 소나무 중에 백송(白松)도 있다. 가을이 되어 산상에서 북쪽의 산밑을 내려다보면 하얗게 보일 정도이다. 그래서 그곳을 흐르는 강물 이름을 이도백하(二道白河)·두도백하(頭道白河) 등 백하(白河)라 부른다.
일곱째, 삼신산에 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너무나 과장된 나머지 비합리적이고 실제 있을 수 없는 문제이므로 논외로 한다.
이상 외에 백두산이 삼신산임을 반영하는 특수성을 지적하면 본서 제1편 Ⅳ의 4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백두산이 3층으로 되어있다는 점, 삼강일지(三江一池)라는 점, 천지의 좌우에 금선(金線)·옥장(玉漿)·은류(隱流) 등 세 개의 온천과 천지의 동북쪽에 인만(麟巒)·봉만(鳳巒)·벽라(碧螺) 등 세 개의 특수한 산이 있다는 점 등 거의가 3수로 된 점 등이다.
이상과 같이 백두산은 삼신산의 성립요건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밖에도 삼신사상을 반영하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고, 백두산에서 천일·지일·인일 삼신일체의 천도에 의하여 신선도가 설해졌다. 그러므로 백두산을 삼신산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태백일사} 신신본기에도 "옛날의 삼신산은 곧 태백산이다. 또한 지금의 백두산이다"라고 하였다. 그밖에도 백두산에 대한 기록이라면 거의 백두산이 곧 삼신산임을 밝히고 있다. 이래서 삼신산이 백두산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나 도교의 원류는 우리나라의 신선도라는 증거가 제1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Ⅲ. 우리민족의 신선도서가 지나로 전승되었다
우리나라의 신선도서(神仙道書)가 지나로 전승되었다는 문제이다. {도서전집;道書全集}·{음부경;陰符經}·{삼황옥결;三皇玉訣} 서문에 의하면 황제가 신선도서(神仙道書)인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대산(大山)의 천단(天壇)에서 받아갔다고 했다. 삼황내문은 모두 천상의 전서(篆書)로 쓰여졌고 삼백여자가 세권으로 나뉘어졌는데, 상권은 천황(天皇), 중권은 지황(地皇), 하권은 인황(人皇)이었다(이래서 이를 삼황내문이라 한다). 상권에는 신선과 우주론에 대한 것이 담겨 있고, 중권에는 부국안민(富國安民)의 법이 담겨 있으며, 하권에는 강병전승(强兵戰勝)의 술과 천지(天地)·음양(陰陽)·만물의 조화원리가 담겨 있으니, 치국(治國)·제가(齊家)·지신(持身)·불사(不死)의 도(道)는 모두 이 경에서 나온 것이다고 했다.
그런데 삼황내문을 황제가 대산의 천단에서 지나로 가져갔다고 했다. 그러면 대산은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인가? 대산은 큰산·일산(一山)·환산(桓山)·백산(白山)·백두산과 그 뜻이 통한다. 또 이 산이 있는 곳이 청주(靑州)라 하였는데 청주는 청구(靑邱)이다. 이렇게 본다면 황제가 신선도서인 삼황내문을 가져간 대산이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라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신선도서인 삼황내문의 출처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라 추정된다는 것이다.
서기 4세기 경 중국의 갈홍(葛洪)이 지은 {포박자;抱朴子} 내편에 "옛적에 황제(黃帝)가 있었는데 동으로 청구(靑邱)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자부선생(紫府先生)을 뵈옵고, 삼황내문을 받아 갔다"하고, {태백일사}에도 이르기를 "삼황내문을 자부선생(紫府先生)이 황제 헌원(黃帝 軒轅)에게 주어서 마음을 밝히고 의(義)로 돌아가게 하였다. 선생은 항상 삼청궁(三淸宮)에 계시니 그 궁은 청구국(靑邱國) 대풍산(大風山)의 양지(陽地)에 있다. 헌후(헌원)가 친히 치우(蚩尤)를 조현(朝見)하려고 가는 길에 명화(名華)가 있어 승문(承聞)한 것이다. 경전은 신시(神市)의 녹도(鹿圖)로서 그것을 기록하였다. 나누어 삼편(三篇)이 되었다. 후인(後人)이 추연(推演)하고 가주(加註)하여 별도로 신선음부지설(神仙陰符之說)이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지나인의 기록인 {포박자}의 기록과 우리민족의 기록인 {태백일사}의 기록이 서로 일치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하등의 이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청구(靑邱)는 어디를 가리키고, 풍산은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이며, 자부선생은 누구냐 하는 문제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청구는 지금의 만주 요령지방으로서 고대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지역이었다. 풍산(風山)은 백두산의 이칭이라고 안호상은 말한다. 자부선생은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의하면 발귀리(發貴理)의 후예이며, 발귀리는 백두산 신시시대(神市時代)의 선인이다. 이렇게 볼 때, 황제가 삼황내문을 가져갔다는 대산과 풍산은 백두산이라 단정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황제에 의하여 신선도서인 삼황내문이 우리나라에서 지나로 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교를 황로교(黃老敎)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밖에 신선도서로서 {주역(周易)} 등이 우리나라에서 지나로 전승되었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본서 제3편에서 밝혔다. 여기에서 지나 도교의 원류는 우리나라의 신선도라는 증거가 제2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Ⅳ. 도교의 시조는 동이족이다.
1. 광성자와 동이족
황제가 공동산(空同山)에서 도를 물었다는 광성자(廣成子)는 누구인가의 문제이다. 흔히 광성자를 가공인물 또는 신화적인 인물로 취급한다. 그러나 광성자가 실존인물이라 할 경우, 그는 지나 도교의 창시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시조라 할 수 있고, 지나의 도교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광성자는 실재인물이라 할 경우, 지나족인가 아니면 동이족인가의 문제이다. 위의 기록에는 광성자가 어느 민족인지에 대하여 일체의 언급이 없다. 그러나 광성자가 수도하였다는 공동산이 큰 근거가 된다. 즉 공동산이 지나지역에 있는가, 아니면 동이지역에 있는가에 따라 광성자의 민족적 소속을 추정할 수 있다.
이능화는 이수광(李?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과 진자앙(陳子昻)의 시(詩)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공동산(空同山)이 계구(?丘)에 있다 하였는데, 계구가 역시 청구에 있고 요동에 가깝다. 요동은 예로부터 선적(仙跡)이 많은 곳이다" 라고 하였다. 즉 광성자가 수도하던 공동산이 요동에 가까운 곳, 청구에 있다는 것이다. 청구는 우리민족의 고토이다. 그러면 공동산은 고대 우리민족의 지역 내에 있는 산으로서 광성자는 당연히 우리와 같은 동이족이라 추정할 수 있다. 지나의 신화에 나오는 반고를 비롯해서 지나문화를 개척한 삼황오제가 모두 동이족인데 광성자만이 지나족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광성자는 지나족이라 절대 볼 수 없고, 동이족이라 강력히 추정된다. 광성자가 동이족이라 할 경우 지나 도교의 시원은 당연히 동이족에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근세조선 시대에 쓴 조여적의 {청학집}에 의하면 "한인진인(桓因眞人)은 명유(明由)에게서 수업하였고, 명유는 광성자에게서 수업하였는데 광성자는 상고의 선인(仙人)이다"하여 광성자는 한인보다 지위도 높고 선대의 인물로 취급되고 있다. 앞의 기록에 의하면 황제가 광성자에게 도를 물었다 하였고, 황제는 치우에게 조현하였다 하였으므로 광성자는 황제나 치우보다 선배라 하더라도 이들 세 사람은 동시대의 인물이다. 치우는 배달국의 제14세 자오지천황으로서 한웅보다 1000여년 이후의 인물이며, 한인보다 4300여년 이후의 인물이다. 따라서 광성자가 한인보다 선배라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문제이다. 이를 생각하면 {청학집}의 기록은 지나를 상국으로 받드는 근세조선 시대의 기록으로서 그 시대의 영향에 의하여 쓰여진 곡필이라 할 수 밖에 없고, 진실성이 결여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2. 노자와 동이족
도교에 있어서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황제는 신선도서인 삼황내문을 직접 지나로 수입한 인물이고, 노자(老子)는 {도덕경}을 저술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들은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 황제는 동이족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밝혔다. 문제는 노자가 어느 민족에 속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노자는 주(周)왕실 주사직(柱史職)을 지냈다. 그리고 노자의 후손은 지나에 있어도, 노자의 선조는 지나에 없다. 또한 노자(老子)를 노담(老聃) 또는 이이(李耳)라 하는데 성씨가 노(老)인지 이(李)인지, 아니면 그밖에 다른 성씨인지 하는 것도 확실치 않다.
그런데 {태백일사}에 의하면 노자 이이(李耳)는 그의 성(姓)이 한(韓)씨요, 동이족이다. 즉 "계미(B.C.518)에 노인(魯人) 공구(孔丘)가 주(周)에 가서 노자(老子) 이이(李耳)에게 예(禮)를 물었다. 이이의 아버지는 그 성(姓)이 한(韓)이고 이름은 건(乾)이며, 그 선조는 풍인(風人)인데 서쪽으로 관문(關門)을 나가 내몽고를 경유하여 아유타에 이르러 그 백성을 교화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노자의 성은 원래 한(韓)씨로서 동이족이며, '이이(李耳)'의 '이(李)'는 '목(木)의 자(子)' 즉 동방의 아들이란 뜻이고, 노자(老子)는 늙은 학자라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에서 지나 도교의 원류는 우리나라의 신선도라고 거의 확정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본다.
Ⅴ. 도교와 신선도의 동일성
지나 도교의 원류가 우리나라의 신선도라면 그 기본사상이나 숭배의 대상 및 전문용어 등에 있어서 서로 동일하거나 유사하여야 한다. 이하에서 그 유사성을 몇 가지 지적코자 한다.
1. 기본사상의 동일성
첫째, 신선도와 도교는 모두 하나님(옥황상제)을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신선도는 천일(한늘님)·지일(한울님)·인일(한얼님)의 삼신일체인 하나님을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도교 역시 천황씨(天皇氏)·지황씨(地皇氏)·인황씨(人皇氏) 즉 천보군(天寶君)·신보군(神寶君)·영보군(靈寶君)의 삼존신일체(三尊神一體)인 옥황상제(원시천존)를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옥황상제(玉皇上帝)는 곧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는 신선도의 삼신하나님과 그대로 일치한다. 부전자승격(父傳子承格)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신선도와 도교는 모두 '하나'를 만유의 본원으로 본다.
신선도에서는 {천부경}에 "하나에서 비롯하나 하나의 비롯은 없으니, 하나를 나누면 셋이 되어도 근본은 다함이 없느니라"하여 '하나(一)'를 만유의 본원으로 본다.
도교에서도 {도덕경} 제42장에 "도(道)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하여 만물이 생성소멸하는 근본원인을 도(道)와 하나(一)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제39장에는 "한늘은 하나(一)를 얻어서 맑아지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여지며, 신(神)은 하나를 얻어서 영묘하여지며,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서 가득차게 되며, 만물은 하나를 얻어서 태어나게 되며, 임금은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올바르게 다스린다. 그것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하나인 것이다" 하여 도교는 도(道)와 마찬가지로 하나(一)를 만유의 본원으로 본다. 이와 같이 신선도와 도교는 '하나'를 만유의 본원으로 본다.
셋째, 신선도와 도교는 모두 만물동근 내지 만물일체사상이다.
신선도에서는 만유의 근본을 '하나'로 보는가 하면, '하나'는 한알→하날의 전음으로서 그 원의는 숫자적 의미의 '하나' 외에 한늘의 영기(생명 에너지)를 의미하는데, {태백일사}에 "하나의 기(一氣)가 능히 움직여 조·교·치(造·敎·治) 삼화(三化)의 신(神)이 된다" 하여 만유의 근본을 일기(一氣)로 본다. 즉 만유의 근본이 "하나 즉 기(氣)"로서 신선도는 만물동근사상이다. 또한 신선도는 천일·지일·인일의 일체사상으로서 만물일체사상이다.
도교의 경전인 {장자}에도 "사람의 생(生)은 기(氣)의 모임이니, 기가 모이면 생(生)이 되고, 흩어지면 사(死)가 된다. 이와 같이 생사는 같은 무리이니 내 또한 괴로워할 것이 무엇이리요, 그러므로 만물은 하나니라"하여 만유의 근본을 기로 보고 만유를 평등하게 보고 있다.
넷째, 신선도와 도교는 모두 순환론이다.
{천부경}에 "만가지가 가고 만가지가 돌아온다(萬往萬來)"하였고, {참전계경} 제91사(조)에 "순환이라 함은 형상있는 한늘의 윤회이니, 형상있는 한늘은 윤회에 일정한 도수가 있어서 조금도 어김이 없느니라"하여 순환론을 말하고 있는가 하면, 제95사에는 "무극이라 함은 돌아서 처음으로 되돌아오는 원기이니 만약에 잠시라도 그침이 있으면 천리가 멸하느니라. 사람이 신의를 기름도 저 무극의 원기와 같으니 털끝만치라도 그침이 용납되면 인도(人道)는 폐하느니라"하여 사람의 도리에도 순환론이 적용됨을 말하고 있다. 즉 신선도는 순환론이다.
{도덕경} 제25장을 보면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그것을 도(道)라 이름지었고, 억지로 그것을 대(大)라 부르기로 하였다. 대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여 간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은 멀리 극도에 이른다. 멀리 극도에 다다르면 제자리로 돌아온다"하였고, 제16장에도 "마음을 극도로 허하게 하고 독실히 고요함을 지키면 만물이 아울러 생겨나고 그것들이 그 근원으로 돌아감을 본다. 만물이란 번성하고 번성하면 제 각기 그 근본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도교 역시 순환론이다.
다섯째, 신선도와 도교는 음양오행사상을 기본사상으로 한다.
본서 제1편에서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일체원리에서 음양오행사상이 발원됨을 밝혔다. 또한 제3편에서 음양오행사상이 우리나라에서 지나로 전승되었음을 밝혔다. 그런데 도교는 불로장수를 목적으로 함으로써 연단술(煉丹術)과 양생술(養生術)을 닦게 되고, 연단술과 양생술에서는 음양오행사상을 기본원리로 한다. 이와 같이 도교 역시 음양오행사상을 기본사상으로 한다. 이 역시 부전자승격(父傳子承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유교도 음양오행사상을 기본사상으로 한다. 이에 대하여 신선도를 모르는 유교학자들은 도교가 유교사상을 수용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고, 도교학자들은 유교가 도교사상을 수용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 신선도와 유교, 신선도와 도교는 부자관계격(父子關係格)이며, 유교와 도교는 동복형제격(同腹兄弟格)으로 서로 같은 사상을 동시에 지니게 마련이다. 그래서 도교와 유교는 신선도의 음양오행사상을 지니게 된다.
여섯째, 신선도와 도교는 모두 조화사상이다.
신선도는 삼극일체(三極一體) 사상으로서 개전일체(個全一體)·선악일체(善惡一體)·유무불이(有無不二)의 양극일체 내지 조화사상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제1편에서 상설하였다.
도교 역시 {도덕경} 제37장을 보면 "도는 언제나 무위하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 말이 도의 양극일체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제41장에서는 "도에 밝은 것은 어두운 듯이 보이고 도에 나아가는 것은 물러나는 듯이 보이며, 평탄한 도는 울퉁불퉁한 듯이 보이고, 훌륭한 덕은 속된 듯이 보인다. 크게 결백한 것은 욕된 듯이 보이고, 광대한 덕은 부족한 듯이 보이며, 튼튼한 덕은 간사한 듯이 보인다. 바탕이 참된 것은 더렵혀진 듯이 보이고, 크게 모난 것은 모퉁이가 없는 듯이 보인다"하고, 제45장에서도 "크게 곧은 것은 굽은 듯이 보이고, 크게 교묘한 것은 졸열한 듯이 보이고, 크게 말 잘하는 것은 말을 더듬는 듯이 보인다"고 하여 도교 역시 양극일체 내지 조화사상이다.
2. 전문용어의 동일성
신선도와 도교는 그 전문용어에 있어서도 서로 유사하다. 신선도에서는 삼수(三數)가 가장 기본수여서 삼수로 된 전문용어가 많다. 예컨대, 삼일신고(三一神誥)·삼화경(三化經)·삼극일체(三極一體)·삼신일체(三神一體)·삼교일체(三敎一體)·삼륜(三倫)·삼진(三眞)·삼방(三房)·삼관(三關)·삼문(三門)·삼도(三途)·삼강(三綱)·삼덕(三德)·천부삼인(天符三印)·삼천도(三千徒) 등이다.
도교에도 삼수로 된 용어가 많다. 이는 부전자승(父傳子承)하는 격이다. 예컨대, 삼존신(三尊神)·삼황(三皇)·삼황내문(三皇內文)·삼원(三元)·삼계(三界)·삼청(三淸)·삼기(三氣)·삼군(三君)·삼통(三洞)·삼태성(三台星)·삼천공(三千功)·삼화(三華)·삼목(三木)·삼요(三要) 등 삼수로 된 전문용어가 많다.
Ⅵ. 결 론
이상에서 논한 바를 요약 정리하면
1) 우리나라에는 한웅천황이 신선도를 창설했다는 기록이 있다.
2) 지나사회에는 지나족이 도교를 창설했다는 기록이 없다.
3) 도교인들의 이상향인 삼신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4) 우리나라의 신선도서인 {주역}과 {삼황내문}이 지나로 전승되었다.
5) 지나 도교의 시조인 광성자는 동이족이라 추정되었고, 황제와 노자는 동이족이었다.
6) 도교와 신선도는 그 기본사상에 있어서 서로 동일하였다.
이상을 종합적으로 생각하면, 지나의 도교는 지나족에 의하여 종교화되었다 하더라도 그 사상적 원류는 우리나라의 신선도이며, 그 유파라고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한국도교는 원래 외래종교가 아니라 역수입된 고유종교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도교 신자는 외래종교 신자가 아니라 고유종교 신자라는 것이다. 곧 한국사람으로서 한국종교를 신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도교신자는 한민족을 위해 봉사해야 하고, 한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강화하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한국도교가 지나에서 발생한 외래종교라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 처음 전래될 때는 우리민족을 위해 전래됐다. 그래서 그 도관이 한국땅에 한국사람의 재력과 노력에 의해 세워졌다. 그 소유권과 운영권이 지나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에 있다. 따라서 한국도교는 한민족을 위해 봉사해야 하고, 한민족의 주체의식을 확립하고 강화하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도교의 도관에 누구를 모시어 누가 누구에게 절을 하고 있는가? 도교가 우리민족을 위해 전래됐다면 우리민족의 국조인 한인·한웅·한검을 모시고 절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한국도교의 도관(道觀)에 자연신인 옥황상제(玉皇上帝)와 문창제군(文昌帝君)과 북두진군(北斗眞君) 외에 태상노군(太上老君)에 도덕경을 저술한 주(周)나라의 노자(老子는 실은 한국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를 믿지 않은 한 지나족인 것이다), 무재신(武財神)에 촉한(蜀漢)의 무장 관우(武將 關羽), 문재신(文財神)에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충신 비간(比干), 오현재신(五顯財神)에도 역시 은나라 주왕의 신하 조현단(趙玄壇)을 중심으로 한 다섯 신하, 당(唐)나라의 선인(仙人) 여조(呂祖), 복건성(福建省) 보전현(?田縣) 임씨(林氏)의 딸 마조(復祖), 곤륜산(崑崙山)의 서왕모(西王母), 지나의 오악(五岳) 중의 하나인 태산(泰山)을 신격화시킨 동악대제(東岳大帝) 등 지나의 민족신들에게 한국사람이 절을 하고 공양한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비유컨대,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면서 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해서는 돌아보지도 않고, 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만을 모시고 섬기는 격이 아닌가? 그러한 종교의식으로 어떻게 민족적 주체의식이 확립되고 강화될 수 있겠는가? 또한 윤리도덕은 건전할 수 있겠는가? 깊이 반성할 문제인 것이다.
또한 한국도교의 도관에 나가면 무엇을 가르치는가? 지나족의 역사와 사상과 아울러 우리민족의 역사와 사상도 가르치는가? 아니면 지나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가르치는가? 곧 한국의 도관에 나가면 한국사람에게 도덕경·남화경·황정경·참동계 등 지나족의 도장경만을 가르치고 배운다.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에게 한민족의 경전을 가르치지 않고, 지나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이다. 곧 교육내용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교육대상과 불일치되고 있다. 비유컨대, 고가(高價)의 양약(良藥)이라 하더라도 그 약이 병의 증상이나 원인과 맞지 않는 격이다. 곧 잘못된 처방과 투약으로 병을 치유하자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도교의 신앙과 교육에 있어서 주객이 전도되고 있다. 곧 주인은 손님이 되고, 손님은 주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지나도교의 신앙과 교육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첫째, 지나를 신앙의 조국 또는 성지로, 지나족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라 우러르고, 제 나라와 제 민족을 그 다음으로 보게 되며, 나아가서 무시하게 된다는 것.
둘째, 그럼으로써 민족적 긍지와 주체의식이 해이되고, 애국심과 애족심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
셋째, 애국심과 애족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윤리도덕을 가르쳐도 그 공효(功效)가 없게 된다는 것.
넷째, 사회는 결국 타락되고 이기주의 사회가 된다는 것.
다섯째, 궁극에 가서는 국가와 민족보다도 나 개인의 신앙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됨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실례를 들면, 고구려는 그 말엽 도교가 극성하게 되었을 때, 도교국가인 당나라 군대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도교신자인 고구려 백성들은 거기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았다. 그래서 고구려는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당나라에게 망하게 되었다. 그와 같이 신앙에 빠지면 이기주의자가 되어 국가와 민족보다도 일신의 영화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한국도교인들은 역사적 경험을 거울삼아 깊이 반성하고 뉘우쳐야 할 것이다.
제5편 동학은 신선도의 재현이다.
홍익인간 광명이세
Ⅰ. 문제의 제기
동학은 근세조선 말엽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서기 1824-1864년) 선생에 의하여 설해졌다. 그때는 외래의 道·佛·儒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천수백년이 지난 이후이며, 기독교(가톨릭)가 전래되어 근 백년이 경과한 이후이다. 그리고 현재도 배달국 시대의 한웅천황에 의하여 설해진 도·불·유 三敎一體의 신선도가 상고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사실을 일반 학계에서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한웅천황이라면 신화적인 존재로 인식한다. 그럼으로써 동학에 내포되고 있는 도·불·유 삼교일체의 사상을 동양의 전통적 외래사상의 수용 또는 종합 내지 재구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의 선진적 요소까지 수용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것이 오늘날 사계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이다.
그러나 동학발생의 시원을 찾아 올라가면 동학은 신화적 허구로 버림받고 있는 배달국 시대의 한웅천황에 의하여 설파된 신선도에 바탕을 두고, 신라(新羅) 말엽의 대문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을 거쳐 그 25세손인 수운 최제우 선생에게 전수된다. 그래서 신선도와 동학은 다 같이 天一·地一·人一의 三神一體인 天道를 발생학적 본원으로 하고, 도·불·유 三敎一體를 기본사상으로 하며, 그밖에도 지기론(至氣論)·순환론·생명평등사상 내지 만물일체사상·민주주의사상 그리고 하나님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나, 포교의 목적을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내지 홍익인간 광명이세에 두는 것 등 모든 사상이 동일하다. 따라서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은 동양의 전통적 외래사상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배달사상인 신선도의 전승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새롭게 밝혀 잃어버린 고유사상을 재발굴하고 재정립하는 데에 일조하고자 하는 것이 본연구의 목적이다. 다시 말하면 동학이 동양의 전통적 외래의 도·불·유 삼교사상을 수용하여 종합 내지 재구성하였다는 일반적 견해에 대한 반론인 것이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첫째, 동학이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임을 밝히고.
둘째, 동학이 신선도를 전승하였다는 전거를 제기할 것이며,
셋째, 신선도와 동학이 그 발생원리에 있어서 서로 동일하고, 그외의 사상도 동일함을 밝힌다. 그밖의 문제는 논외로 한다.
그러나 본고의 내용은 새로운 시도로써 거기에 대한 자료도 희귀할 뿐만 아니라 그밖에 보완하여야 할 점이 많을 것으로 본다. 널리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Ⅱ.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
본고에서 문제삼고 있는 동학사상이다. 동학사상(東學思想)은 수운 최제우 선생이 서기 1860년(단기 4193) 경신 4월 5일 득도(得道)함에서 드러난다. 그 사상은 도·불·유의 삼교일체 사상이다. 송월당(松月堂)이라는 노승(老僧)과의 문답내용을 보면 최제우 선생은 도·불·유를 하지는 않지만 좋아한다 하고, 비유하면 두 팔 가운데 어느 팔을 좋아하고 어느 팔을 싫어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천도는 없는 곳이 없고, 없는 곳이 없으므로 전체를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동학사상은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최제우 선생께서 그 제자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초명은 崔慶翔)을 향하여 말하되 "우리 道는 원래 儒도 아니고 佛도 아니며 仙(道敎의 고전적 표현)도 아니니라. 그러나 우리 道는 유·불·선 합일이니라. 天道는 유·불·선이 아니로되, 유·불·선은 천도의 일부분이니라. 유의 윤리와 불의 각성(覺性)과 선(仙)의 양기(養氣)는 인성(人性)의 자연한 품부(稟賦)이며 천도의 고유한 부분이니, 우리 道는 그 무극대원(無極大源)을 잡은 자니라. 후에 道를 쓰는 자는 이를 오해하지 말도록 지도하라"하시었다. 즉 동학의 도·불·유 삼교사상은 인성의 자연한 품부를 수련하는 사상으로서 천도의 고유한 부분이니 따로 따로 전래되어 종합되거나 재구성될 수 없는 사상이란 것이다. 원래부터 동학은 도·불·유의 삼교일체 사상이란 것이다.
그래서 동학경전에 천령(天靈)·천주(天主)·폁?님(목판본)·하날님(동경대전 원본)·하늘님(수운교 경전)·한울님(천도교 {동경대전}근세판)·천명(天命)·천리(天理)·천도(天道)·천덕(天德)·천성(天性)·천지인 삼재(天地人 三才)·음양오행(陰陽五行)이라는 천도에 관한 용어와 사상이 나오고, 신선(神仙)·선풍도골(仙風道骨)·선약(仙藥)·불사약(不死藥)·불로불사(不老不死)·무위이화(無爲而化)·지상선경(地上仙境)이니 하는 도교적인 용어와 사상, 부처·팔도불전(八道佛前)·산신불공(山神佛供)·윤회(輪廻)·연화(蓮花)·삼십삼천(三十三天)·도솔천(兜率天)이니 하는 불교적인 용어와 사상, 그리고 상제(上帝)·도성덕립(道成德立)·삼강오륜(三綱五倫)·성인군자(聖人君子)·충효열사(忠孝烈士)·효자효부(孝子孝婦)하는 유교적인 용어와 사상이 나온다. 그밖에도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요(堯)임금과 순(舜)임금·공자(孔子)와 맹자(孟子)·제갈량(諸葛亮)·주렴계(周濂溪) 그리고 주역(周易)·대학(大學)·중용(中庸) 등이 거론된다. 그것은 학자들이 하나의 연구물을 발표할 때 기성의 연구물을 원용하는 것과 같은 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동학경전을 보면 거기에 최제우 선생이 도·불·유 삼교일체의 사상을 창설하였다는 말도 없고, 동양의 전통적 도·불·유 사상을 수용하였다는 말도 없다. 오히려 "유교는 명절(名節)에 구애되어 아직 현묘의 역(域)에 이르지 못하였고, 불교는 적멸(寂滅)로 들어가 윤상(倫常)을 절(絶)하였으며, 선교(도교)는 자연에만 유적(悠適)하여 치평(治平)의 술(術)을 결(缺)하였다"하고, 이 세상은 요순(堯舜)의 정치로도 족(足)히 건지지 못할 것이요, 공·맹(孔·孟)의 도덕으로도 또한 다스리지 못하리라 하는가 하면, 유도(儒道)·불도(佛道) 누천년(累千年)에 운(運)이 또한 다하였도다 하여 동양의 전통적 도·불·유 사상을 혹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계의 일부 학자들은 동학의 도·불·유 사상을 동양의 전통적 도·불·유 사상을 수용하였다느니 종합하였다느니 재구성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는 최제우 선생의 가르침을 안믿으려는 것으로서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에 대하여 반발하고 거역하는 것과 같은 격이라 할 수 있고, 어느 종교의 신자가 다른 종교의 교리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격이라 할 수 있으며, 스스로 제부모를 헐뜻는 것과 같은 격이라 할 수 있다. 실로 무례하기 그지없고 선인에 대한 모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학자가 한국사상을 대하는 태도요, 우리사회의 학문하는 풍토이다.
Ⅲ. 동학의 신선도 전승
1. 백두산 정상의 용왕담과 동학의 연원
{동경대전} 절구와 {천도교창건사}를 보면, 최제우 선생이 그 제자 최시형에게 도통(道統)을 전수(傳授)하는 말 가운데 "용담(龍潭)에서 물이 흐르니 사해(四海)의 근원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용담에서 사방으로 강물이 흐르는 것을 의미하고, 이를 동학의 연원에 비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시형 선생께서도 제자들에게 도통을 전수할 때 "산상(山上)에서 물이 흐르니 우리 교의 도통연원(道統淵源)이라. 이 현묘한 기틀과 참다운 이치를 깨달은 연후에야 개벽(開闢)의 운(運)과 무극(無極)의 도(道)를 알게 되리라. 오호라! 뿌리없는 나무가 없고 근원없는 물이 없으니 만사가 오직 그와 같으니라"하여 동학의 연원이 최제우 선생의 창작도 아니고 외래사상의 수용도 재구성도 종합도 아니라, 산상의 용담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백두산 정상의 천지(天池)를 용담(龍潭) 또는 용왕담(龍王潭)이라 하고, 거기에서 압록·송화·소화·두만의 4대강하(四大江河)가 사방으로 흐르며, 한웅천황에 의하여 도·불·유 삼교일체의 신선도가 설파되었다. 따라서 최제우 선생이 말한 용담과 최시형 선생이 말한 산상의 물은 백두산 정상의 용담(천지)이라 할 수 있고, 그곳이 동학의 발원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흔히 최제우 선생의 고향인 경주의 가정리에 용담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동경대전} 수덕문에 의하면 "난간이 못가에 다다르니 주렴계(周濂溪)의 뜻과 다름이 없고, 정자의 이름을 용담이라 하였으니 제갈양(諸葛亮)을 사모하는 마음이 아니겠는가"하여, 용담이 정자의 이름임을 말하고 있는데, {용담유사} 용담가에서도 "구미산하 일정각((龜尾山下 一亭閣)을 용담이라 이름하고"하여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용담은 물이 아니라 정자의 이름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곳이 산의 정상도 아니고 거기에서 4방으로 물이 흐르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동학 발원지로서의 용담은 경주 가정리의 용담(정)이 아니라 백두산 정상의 용담이며, 그 곳이 동학의 발원지로서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은 동양의 전통적 노(老)·석(釋)·공(孔)의 외래사상을 수용하여 종합하거나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상고시대부터 전래된 신선도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을 전승하였다는 증거가 제1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2. 한웅천황과 최고운(崔孤雲)과 동학의 신선도 전승
또한 {동경대전}을 보면 "산하대운(山河大運)이 모두 이 도(道)에 돌아오니 그 근원이 극히 깊고 그 이치가 심히 멀도다" 하여 동학의 근원이 극히 심오함을 말하고 있는데, {천도교창건사}를 보면 최시형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오도(吾道)의 대운(大運)은 천황씨(天皇氏)의 근본원리를 회복한 무극지운(無極之運)이며, 천황씨는 선천개벽(先天開闢)의 시조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선생도 "우리 대선생(최제우 선생)께서 비로소 무극대도(無極大道)와 대덕(大德)의 근본원리와 접령강화(接靈降話)의 이치를 밝혔다고 하나, 개벽초(開闢初)의 천황씨로부터 처음 비롯된 운이라 하니 의심하지 말라"고 하였다. 선천개벽 또는 개벽초라 함은 우리나라 개국초의 개벽을 의미하고 개벽은 개천시교(開天施敎)를 의미하니, 천황씨는 우리나라 개국초에 도·불·유 삼교일체의 신선도를 베푼 한웅천황이라 할 수 밖에 없다. 한웅천황 외에 신선도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베푼 천황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은 동양의 전통적 노·석·공의 외래사상을 수용하여 종합하거나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배달국 시대의 한웅천황에 의해 설해진 신선도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을 전승하였다는 증거가 제2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제1편 제Ⅱ장에서 밝힌 바, 최제우 선생의 제25세 선조이신 고운 최치원 선생의 난랑비서에 "우리나라에 현묘지도로서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을 근본적으로 자체 내에 지닌 신선도(화랑도)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동경대전} 논학문을 보면 최제우 선생께서 "내 또한 동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다"하고, 절구(絶句)를 보면 "평생에 받은 천명은 천년운수요, 성덕(聖德)은 우리 집에 내려오는 백세의 업(業)이라"하였다. 즉 동학사상은 최씨 집안에서 천년 동안이나 전승된 가업이었다는 것이다. 최치원 선생의 호를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 하고, 최제우 선생의 호를 수운(水雲), 최시형 선생의 호를 해월(海月)이라 하여 조손(祖孫) 사이에 그 호가 일맥상통하는 것을 보아도 동학사상이 최씨 집안에서 대대로 전승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다시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은 동양의 전통적 노·석·공의 외래사상을 수용하여 종합하거나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배달국 시대의 한웅천황에 의해 설해진 신선도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을 전승하였다는 증거가 제3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Ⅳ. 신선도와 동학의 동일성
지금까지 동학의 도·불·유 사상이 동양의 전통적 노·석·공의 외래사상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신선도의 사상을 전승한 것임을 밝혔다. 이는 곧 신선도와 동학이 근본적으로 동일함을 뜻한다. 그렇다면 신선도와 동학은 다 같이 그 발생원리와 그밖에 기본사상이 모두 동일하여야 한다. 사람에 비유하면 조손관계(祖孫關係)나 부자관계(父子關係)에 있어서 그 유전인자와 혈액형이 서로 같거나 불가분적 상관관계를 지니는 것과 같은 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문제를 본항에서 규명하여 나가기로 한다.
1. 발생원리의 동일성
우리의 민속을 보면, 삼신상제(三神上帝)·삼신제왕(三神帝王)·삼신제석(三神帝釋)·삼신(三神)할머니 하는 삼신신앙(三神信仰)이 있고. 삼신사상을 발생원리로 도·불·유 삼교일체의 신선도가 한웅천황에 의하여 설파되었다. 삼신은 천일·지일·인일을 의미하고, 삼신이 사람에 있어서는 식(息)·감(感)·촉(觸)과 기(氣)·심(心)·신(身)과 명(命)·성(性)·정(精)이 된다. 여기에서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이 성립된다. 약설하면 숨을 고르게 쉬고(調息) 원기를 길러(養氣) 불로장수(長命)하는 신선을 추구하는 사상이 도교이고, 모든 느낌을 끊어 버리고(止感) 마음을 맑게 하여(明心) 본래의 성품을 깨달아(覺性) 성불을 추구하는 사상이 불교이며, 모든 육체적 감각(관능적인 욕구)을 극복하여(禁觸) 행실을 닦고(修身) 정기(정력)를 성실하게 함으로써(精誠) 성인군자를 추구하는 사상이 유교이다. 즉 인체계의 3원적 품부인 식·기·명에서 도교, 감·심·성에서 불교, 촉·신·정에서 유교가 발원되고 있는 것이다.
동학을 설파한 최제우 선생도 말하기를 "유·불·선(도교의 고전적인 표현)은 천도의 일부분이니 유의 윤리와 불의 각성과 선의 양기는 인성의 자연한 품부이며 천도의 고유한 부분이니 우리도는 그 무극대원(無極大源)을 잡은 자이다"고 하였다. 이를 음미하여 보면 유의 윤리는 몸을 닦는 것(修身)이며, 불의 각성은 마음을 맑게 함(明心)으로써 성취될 수 있고, 도(선)의 양기(養氣)는 원기를 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원기(氣)와 마음(心)과 몸(身)을 닦고 기르는 것이 도·불·유라는 것이다. 신선도의 도·불·유 사상도 원기(氣)와 마음(心)과 몸(身)을 닦는데서 발원된다. 따라서 신선도와 동학은 다 같이 그 발생원리에 있어서 동일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선도와 동학은 다같이 천일·지일·인일의 천도에서 발원되고 있는 것이다. 동학의 일파인 수운교의 경전 {동도전서}에도 "이 세가지를 나누어 말하면 유·불·선 삼가(三家)의 가르침이요, 합하여 말하면 하나의 천도라"하였다. 그러므로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도 신선도와 마찬가지로 천일·지일·인일 삼신일체의 천도에서 발원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사상은 신선도와 동일한 원리에서 발원되고 있다. 따라서 동학의 도·불·유 사상은 외래사상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고유사상인 신선도를 전승하였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2. 기본사상의 동일성
다음은 기본사상의 동일성이다.
첫째, 신선도와 동학은 다같이 지기론(至氣論)이다.
{한단고기} 소도경전본훈에 의하면 "일기(一氣)가 곧 하늘(天)이요 공(空)이다. 그러나 스스로 중일(中一)의 신(神)이 있어 능히 삼(三)이 된다. 삼신(三神)은 곧 천일(天一)·지일(地一)·태일(太一)이다. 일기(一氣)가 스스로 동작하여 조(造)·교(敎)·치(治)의 삼화(三化)의 신(神)이 된다. 신(神)은 곧 기(氣)이다" 하여 지기론(至氣論)이 신선도의 가장 기본사상이다.
동학에서도 "기(氣)는 허령(虛靈)하고 창창하여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고 명령하지 않는 것이 없어 형용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형상하기 어렵고, 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보기 어려우니 이것은 또한 혼원한 일기(一氣)니라"하여 지기론이 동학의 기본사상을 이룬다. 이래서 신선도와 동학은 다같이 지기론을 기본사상으로 한다.
둘째, 신선도와 동학에서는 모두 하나님을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우리의 민속에 하나님 신앙이 있고, 하나님 사상에서 도·불·유 삼교일체의 신선도가 성립됐으며, 하나님이 아니면 만물이 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신선도에서는 하나님을 숭배대상으로 한다.
동학에서도 "그말 저말 다 던지고 하나님(하날님)을 공경하면 아동방(我東方) 삼년괴질(三年怪疾) 죽을 염려 있을소냐"하는가 하면, "성경이자(誠敬二字) 지어내어 하나님을 공경하면 자아시(自兒時)있던 신병(身病) 물약자효(勿藥自效)아닐런가"하였고, 동학의 기본주문인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에도 천주(天主) 즉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고 강조하여 동학의 숭배대상 역시 하나님이다.
셋째, 신선도와 동학은 다같이 순환론이다. 신선도의 경전 {천부경}에 "만왕만래(萬往萬來)"라 하였고, {참전계경} 제91사에 신선도가 순환론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동학에서도 {용담유사} 권학가에 "쇠운(衰運)이 지극하면 성운(盛運)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同歸一體)하였던가"하고, 교훈가에 "부하고 귀한 사람 이전 시절 빈천(貧賤)이요, 빈하고 천한 사람 오는 시절 부귀로세, 천운이 순환하사 가고 아니 돌아옴이 없나니"하여 동학 역시 순환론이다.
넷째, 신선도와 동학은 다같이 생명평등사상 내지 만물동근사상이다.
신선도에서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일체는 만물동근사상 내지 생명평등사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신선도의 경전 {삼일신고}에 "사람과 만물이 다같이 삼진(三眞)을 받았나니 이는 성(性)·명(命)·정(精)이라. 사람은 그것을 온전하게 받았으나 만물은 치우치게 받았나니라"하여 사람과 만물이 근본적으로 성·명·정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불교에서 만물이 다같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皆有佛性)는 말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신선도는 생명평등사상 내지 만물동근사상이다.
동학에서도 "천지(天地)·귀신(鬼神)·조화(造化)라는 것은 유일한 지기(至氣)로 생긴 것이며, 만물이 또한 지기로 생긴 것이니 이렇게 보면 하필 사람만이 천주를 모셨으랴. 천지만물이 하나님을 모시지 아니함이 없나니, 사람이 다른 물건을 먹음은 이는 곧 한늘이 한늘을 먹음이라"하여 모든 생명체가 하나님의 조화이고, 하나님을 모신 존재로서 존귀함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동학 역시 생명평등사상 내지 만물동근사상이다.
다섯째, 신선도와 동학은 모두 민주주의사상이다.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일체는 천일합일(天人合一)사상으로서 한늘이 곧 인간이고 인간이 곧 한늘이라는 최대 최고의 인권존중사상이며, 상·중·하 일체의 인간평등사상이다. 그러므로 신선도는 곧 민주주의사상이다.
동학에 있어서 시천주(侍天主) 사상도 최시형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발전되고, 손병희 시대에 이르러서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발전된다. 인내천사상 역시 한늘이 곧 인간이고 인간이 곧 한늘이라는 뜻으로 최대 최고의 인권존중사상이며 인간평등사상이다. 박종홍(朴鍾鴻) 박사는 "현대사상에서도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만큼 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사상을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이 곧 한늘이라면 전통적인 기독교인은 깜짝 놀랄 일이다. 그보다 더 큰 죄악이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특색이 있다 인내천의 종지는 현대의 그 어느 민주주의보다도 철저하고 깊은 것이 아닐 수 없다"고 하여 인내천사상이 곧 민주주의사상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래서 신선도의 삼신일체사상과 동학의 인내천사상은 다같이 반상(班常)·적서(嫡庶)·노사(勞使)·남녀(男女)·노소(老少)·빈부(貧富)·귀천(貴賤)의 차별이 없는 인간평등사상이며 최대 최고의 인권존중사상으로서 민주주의사상인 것이다.
Ⅴ. 결 론
이상에서 논한 바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민족의 신선도가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인데, 최제우 선생이 설한 동학에도 도·불·유 삼교사상이 일체를 이루고 있다.
둘째. 신선도가 백두산 정상의 용담(천지)에서 한웅천황에 의하여 비로소 설파되었는데, 동학이 산상의 용담과 개벽초의 천황씨에 발생연원을 두고 있다.
셋째. 신선도가 고운 최치원 선생의 난랑비서에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 25세손인 최제우 선생은 동학을 천년 동안이나 집안에서 전하여온 백세의 가업(家業)이라 하였다. 넷째. 동학의 발생원리가 신선도와 동일하였다.
다섯째. 그밖에도 지기론·숭배의 대상·순환론·생명평등사상 내지 만물일체사상·민주주의사상 등이 동일하였다.
그러므로 동학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은 동양의 전통적 노·석·공의 외래사상을 수용하여 종합하거나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배달국 시대부터 전승된 신선도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을 계승하였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여기에서 동학은 배달사상인 신선도의 재현이며 부활이라 할 수 있고, 최제우 선생과 최시형 선생은 사라져가는 민족혼과 민족사상을 일깨우고 부활시킨 대종교가요 대학자요 대사상가요 대혁명가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와 같이 사계의 학자들도 외래사상과 아울러 고유사상에로, 또한 현세사상이나 근세사상과 아울러 고대사상에로 연구의 폭을 넓혀야 할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자료가 많고 편의한 데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문제의 해결에 노력하여야 하고, 연구물의 평가도 자신의 견해와 종전의 통설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학설에도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세계문화는 철석같이 믿던 통설이 무너지면서 발전되어왔다는 사실을 상기하여 주기 바란다. 최시형 선생이 말한 바, "천황씨의 본심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보국안민(輔國安民)하리요"하였듯이 새로운 자세로 동학사상과 신선도를 재조명하여 민족혼을 일깨우는 데에 일조하여야 할 것으로 믿는다. 또한 동학이 곧 신선도요 신선도가 곧 동학으로서 세계주의사상이요, 만물일체사상이다.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세계의 석학이 우리민족을 연구하고 신선도를 연구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부록】
우리민족의 종교교육 비판
1. 종교교육의 기능
어느 종교이든 그 교육을 보면 윤리도덕을 가르치고 인간의 정서를 순화시키며 남을 위해 사회에 봉사하게 하고 사회의 복지와 번영을 추구하며 지상낙원 건설을 목표로 한다. 또한 문화사업과 교육사업 그리고 구호사업을 직접 벌리면서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러므로 종교교육을 통해 가정이 화평케 되고 고매한 인격자가 배출되기도 하며, 어느 면에서 사회발전이 크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종파의 종교인들 끼리는 공동체의식이 투철하여 서로 화합하고 단결하며 상부상조하고 동고동락한다. 그래서 어떤 민족은 종교교육을 통해 총화단결하고 부강하게 되는가 하면, 화합하고 예의바른 민족이라 칭찬을 받는다. 그러한 점에서 종교교육은 이를 나무랄데 없는 가장 이상적인 교육제도같이 보인다.
그러나 다(多)종교사회인 경우 문제는 다르다. 각 종교의 세부적인 측면을 들여다 보면, 역사적 사회적 발생동기·사상적 발생배경·발생민족·발생지·숭배의 대상·교조·경전·계율·의식과 관행이 각각 다르다. 그리고 각 종교마다 제 종교의 신앙대상을 전지전능하고 유일무이한 하나님(하느님)·주님·알라·부처님·옥황상제·천조대신이라 찬양하고, 제 종교의 교조를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 추앙한다. 그리고 그 나라를 신앙의 성지라 하여 동경하고, 그 민족을 가장 거룩한 민족이라 찬양하면서 그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고 배운다. 여기에서 어느 나라를 불구하고 다종교사회인 경우 종교교육에 있어서 크나큰 모순이 들어나게 된다.
첫째, 신자는 신앙이 독실할 수록 제 종교의 신앙대상을 절대적인 존재라 섬기고 거기에 사후의 운명까지 의탁한다. 따라서 어느 종교의 가르침이 객관적으로 볼 때 옳지 않다 하더라도 신자 자신은 그 가르침을 절대적인 진리라 믿고 따르게 된다. 이를 파브로프의 조건반사 원칙이라 한다. 그래서 신앙은 아편같다고도 하며, 신앙에 빠진 사람들은 아편중독자 같기도 하여 이들에게는 객관적인 비판력과 자제력도 없게 되고, 다른 종교를 유사종교·미개종교·미신신앙·우상숭배라 하여 무조건 멸시하거나 부정하게 된다. 즉 다종교사회에 있어서 각 종교는 다른 종교를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배척하여 사회불안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 각 종교마다 제 종교의 교조를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 숭배한다. 그것은 제 종교의 교조보다 다른 종교의 교조와 성인은 하위에 있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웃 어른이나 선배라 하더라도 종교가 다르면 내심으로 하찮은 존재라 업신여기게 된다. 여기에서 다종교사회에 있어서의 종교교육은 윤리도덕을 가르치면서 윤리도덕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셋째, 각 종교마다 그 종교의 발생지를 신앙의 성지라, 그 민족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라 찬양하면서 그 나라를 순방하고 그 발생지를 순례한다. 이를 성지순례라 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를 낳고 키워준 제 나라는 성지가 아니며 제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여기에서 제 나라와 제 민족을 무시하고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을 동경하는 사대주의 의식이 싹트게 되며, 애국심과 애족심은 상처를 입게 된다.
넷째, 각 종교마다 그 민족의 위대성을 찬양하면서 주로 그 민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가르치고 배운다. 곧 외래종교인들은 주로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가르치고 배운다. 이에 따라 자기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업신여기고 소홀리 하거나 가르치지 않게 된다. 그러한 풍조가 오래 계속될 경우, 제 민족의 문화는 낙후되고 외래화되기 마련이며, 민족의식은 사대주의에 빠지게 되고, 국가기강과 사회기강은 해이되기 마련이다.
다섯째, 신앙이 독실할 수록 종파를 중심으로 신도들은 똘똘 뭉치게 된다. 그것은 종파와 종파, 또는 종교와 종교 사이가 가깝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전체민족은 종교 또는 종파의 숫자만큼 분열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다종교사회에서는 단결이 잘 안될 뿐만 아니라 단결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다종교사회에 있어서의 종교교육은 개인적으로 정서를 순화시키고 인격을 도야시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민족정서를 파괴하고 분열시키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욱 강하다. 그래서 종교가 많이 생기고 교회와 교당이 거리마다 늘어설수록 윤리도덕이 건전하기는 커녕 더욱 타락되고 사회는 이기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면 우리사회의 종교교육은 어떻게 되고 있으며, 어떻게 종교교육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가의 문제이다.
2. 민족총화와 종교교육
이상적인 종교교육이라 할 수는 없으나 민족총화를 위한 종교교육으로써 유대민족의 종교교육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유대민족은 수백만의 인구로서 수억의 아랍인구에 대항하리만큼 민족적 화합을 굳건히 하고 애족적 애국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종교 지도자는 유대민족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 또는 세계의 중심민족이라 극찬하면서 유대민족을 본받으라고 한다.
첫째, 유대민족은 어려서부터 자기민족의 전통적 역사교육과 아울러 종교교육을 철저히 받고 문화유적을 탐방하면서 자기민족의 위대성을 배운다. 곧 유대민족의 교육은 어려서부터 인성개발과 아울러 애국자 양성에 중점을 둔다(교육방송, 주한 이스라엘대사 특별초대 강연중에서). 이래서 유대민족은 화합적이고 애국적 애족적이다.
둘째, 유대민족의 교회에서는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절대 가르치지 않고,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바이블 속에 하나로 묶어 전체 민족에게 매주 가르치고 뉘우치게 한다(바이블 구약 참조). 여기에서 유대민족은 더욱 애국적 애족적인 민족이 되기 마련이다.
셋째, 유대민족은 여러 개의 신을 섬기지 않고 하나의 신만을 섬기며, 다른 민족의 신을 섬기지 않고 자기 민족의 신만을 섬긴다. 이를 유일신 신앙(唯一神 信仰)이라 한다. 그래서 유대민족은 자기민족의 여호와신 하나만을 섬기고, 유대교 하나만을 신앙한다.
다시 말하면 몰록신(구약 열왕기하 제23장 10절)·그모스신(구약 사사기 제11장 24절)·네르갈신(구약 에래미야 제39장 3절과 13절)·아드람멜렉신과 아남멜렉신(구약 열왕기하 제17장 31절) 등 많은 신들을 물리치고 교세가 가장 강한 여호와와 엘로힘을 하나로 묶어 여호와신(여호와 엘로힘) 하나만을 섬기고 다른 신을 절대 섬기지 못하도록 계명으로 정하고 있다(구약 출애굽기 20장 5절. 신명기 5장 9절). 심지어 다른 민족의 신을 믿자 할 때, 아내·자녀·형제·친구까지도 돌로 쳐서 죽이라고 가르치고 있다(신명기 13장 6절에서 10절). 이에 따라 유대민족 사회에는 여호와신을 섬기는 유대교 외에 다른 민족의 신을 섬기는 종교는 교리상 절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다만 근래에 이르러 여호와를 섬기고 유대교에 뿌리를 둔 기독교를 믿는 교파가 일부 있을 뿐이고, 다른 신을 믿는 이슬람파가 극소수 있으나 그것은 비밀조직으로써 타도의 대상이다. 곧 유대사회에서는 여호와를 섬기고 유대교(또는 기독교)를 신앙해야만이 유대인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고, 다른 신을 섬기거나 다른 종교를 신앙하면 유대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와 같이 유대민족은 하나의 신만을 섬기고 하나의 종교만을 신앙함으로써 전체민족이 총화단결하여 똘똘 뭉치고 있는 것이다.
요약해 말하면, 유대민족이 동포의식과 공동체의식이 투철하고 전체민족이 총화단결하며 애국하고 애족하게 되는 이유는 제 민족의 역사교육과 사상교육을 철저히 받고 제 민족의 신만을 섬기며 제 민족의 종교만을 신앙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 역시 거의 전체민족이 자기민족의 천조대신(天照大神)만을 섬기고, 자기민족의 신도(神道는 사실 우리민족의 신선도가 일본으로 전래된 종교임)와 이를 접목시킨 불교 곧 일본화된 불교만을 신앙한다. 그리고 신사(神社;法堂)에 나가면 자기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면서 자기 조상들의 위대성을 찬양한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잘 단합하고 예의바른 민족이라 칭찬을 받는다.
이를 생각하면 어느 민족이든 전체민족이 총화단결하고 굳건한 국가기강의 확립을 위해서는 제 민족의 국조와 존현을 잘 섬기고, 제 민족의 종교를 신앙하며, 제 민족의 역사교육과 사상교육을 철저히 받고 회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우리민족의 종교교육과 그 폐단
그러면 오늘날 우리민족의 종교교육은 어떠한가? 우리민족은 유대민족과 정반대의 종교교육을 받고 있다. 즉 유대민족은 제 민족의 종교교육만을 받고 다른 민족의 종교교육을 절대 받지 않는데, 우리민족의 절반정도(외래종교인)는 제 민족의 종교교육을 받지 않고, 다른 민족의 종교교육만을 받는다. 이를 세분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대민족은 오로지 제 민족의 신과 교조에게만 절을 하고 다른 민족의 신과 교조에게는 절대 절을 않는데, 우리민족의 절반정도는 제 민족의 하나님과 국조에게 절을 않고, 다른 민족의 신과 교조에게 절을 한다. 이와 같이 우리민족은 숭배의 대상에 있어서 유대민족과 정반대의 신앙을 하고 있다. 더욱이 그러한 신앙풍토가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컨대, 불교의 예식을 보면, 대웅전의 중앙 연화대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남무아미타불 아니면 석가모니불을 부른다. 남무아미타불은 우주의 진여이법(眞如理法)을 상징하는 假像佛이지만, 석가모니불은 인간으로서 따지고 보면 원래 우리민족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불교측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인도 사람이라 믿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을 섬기지 않고 다른 나라 사람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유교는 어떠한가? 그 교육기관인 성균관이나 향교에서의 예식을 보면, 대성전(大成殿)에 공자를 비롯한 안자·자사·증자·맹자 등 오성(五聖)과 공자의 제자 십철(十哲) 및 칠십이제자(七十二弟子) 그리고 송왕조육현(宋王朝六賢), 마지막에 우리나라의 주자학자 십팔현(十八賢) 등 대체로 지나족(종족 이름에는 支那로, 국명에는 중국으로 표기했다)의 위인들을 모시어 거기에 공양을 하고 절을 한다.
도교는 어떠한가? 도교에서도 자연신인 옥황상제와 미륵불 외에 대체로 지나족의 위인들을 모시어 공양하고 절을 한다. 예컨대 복희·신농·황제·노자·서왕모·마조·여조·유비·관우·장비·공명 등 지나의 위인들을 신격화시켜 거기에 공양하고 절을 한다.
기독교는 어떠한가? 기독교에서도 유대민족의 성인인 예수를 모시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또 그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어 성모라 섬기고, 유대민족의 민족신인 여호와를 할렐루야 하고 찬양한다.
여기에서 생각해보자. 우리나라는 인도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며 이스라엘도 아니라 한국이다. 또한 우리민족은 인도족도 아니고 지나족도 아니며 유태민족도 아니라 한국 사람이다. 곧 우리나라는 한국이며, 우리민족은 한국 사람이다. 그런데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한국의 건물 중앙에 다른 민족의 민족신과 위인을 모시어 거기에 공양을 하고 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곧 내가 내집 안방에 내 조상을 모시지 않고 남의 조상을 모시어 공양을 하고 절을 하고 있는 격이다. 그러한 행동을 자주 반복할 때, 우리민족의 사유체계와 의식구조는 어떻게 되고, 국가관과 민족관은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신앙을 떠나 한국인의 입장에서 또 자연인의 입장에서 냉정히 생각해보자.
불교·유교·도교·기독교 등 외래종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될 때는 우리민족을 위해 전래됐다. 그것은 외래사상을 수입하여 민족사상의 모자란 점을 보완하고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함이었다. 외래종교의 노예가 되고 외국의 사상적 식민지가 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래서 법당과 도관과 교당이 한국 사람의 노력과 재력에 의해 한국땅에 세워졌다. 그 소유권이 한국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외국사람의 소유가 아니며 외국사람을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법당과 도관과 교당의 중앙에 다른 민족 곧 특정민족의 민족신과 성인을 안치하여 거기에 한국 사람이 공양을 하고 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땅에 태어나서 한국의 의식(衣食)으로 살면서 다른 민족의 귀신을 섬기고 다른 민족의 종교를 신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유교·도교·기독교 등의 예식을 보면 거기에 우리민족의 하나님과 국조를 모시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는다. 일부 불교사찰에서 우리민족의 국조인 한인·한웅·한검의 삼성을 모시고 있다 하더라도 대웅전 밖, 어느 한쪽 구석에 형식상 모시고 있을 뿐이다. 근세조선의 유교도들도 우리민족의 국조를 모시었다고 하나 평양의 구월산 한 모퉁이에 형식상 모시었을 뿐이다. 더욱이 기독교측에서는 형식상일망정 제 민족의 국조를 모시기는 커녕 이를 우상숭배라 배격하고 단군성전 건립을 방해한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손님을 모시기 위해 주인을 내쫓는 격이며, 남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셔다가 섬기면서 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박절하는 격이다. 이를 유추해석하면 자기의 이익과 부귀영화를 위해서는 국가사직도 무너뜨릴 수 있고, 부모형제라도 쫓아낼 수 있으며, 절친한 친구라도 용서없이 처단할 수 있다는 신앙인 것이다. 그것이 과연 애국적이고 윤리도덕에 부합되는 신앙인가? 석가·공자·노자·예수의 가르침인가? 신앙의 주객전도가 아니고 무엇이며, 정신나간 신앙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욱이 사람은 돌맹이나 나무를 섬겨도 지성으로만 섬기면 거기에서 신비감을 느끼고 영적 감응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다른 민족의 민족신을 지성으로 섬기고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열성으로 배울 경우, 민족의식은 어떻게 되겠는가? 다른 민족은 훌륭하게 느껴지는 반면, 제 민족은 고유종교와 고유철학도 없는 하찮은 민족이라고 스스로 제 민족을 멸시하게 될 것이 아닌가? 곧 우리민족의 사유체계와 의식구조는 자연히 외국화되어 국가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족의식이 무너지게 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불교·유교·도교·기독교 등 외래종교측은 너무나 큰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둘째, 유대민족은 제 민족의 교조(위인)를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 숭배한다. 그런데 우리민족의 절반정도는 다른 민족의 교조를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 숭배한다. 그것은 제 민족의 국조인 한인·한웅·한검도 석가모니·공자·노자·예수 보다 하위에 있는 존재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다. 곧 우리나라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위대한 성인이 없었고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우리민족은 성인도 하나 배출하지 못하는 미개민족이라 멸시받게 되고, 민족적으로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기민족을 멸시하고 모함하며,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존현과 웃어른을 무시하고 자신만이 잘난체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을 널리 포용하지 못하고 파당을 짓게 된다.
셋째, 유대민족은 신앙의 성지가 곧 자기 나라로서 자기 민족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 교육한다. 즉 유대민족은 종교교육을 통해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준다. 그래서 유대민족은 세계적인 위인과 유명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절반정도인 경우, 신앙의 성지가 다른 나라인 것이다. 곧 기독교인의 성지는 이스라엘(그러나 개신교는 미국에서 전래됐으므로 미국을, 성공회는 영국에서 전래됐으므로 영국을 예루살렘 다음의 성지로 친다)이며, 불교인의 성지는 인도와 네팔이고, 유교인과 도교인의 성지는 중국이다. 그래서 이들 외래종교인들은 이스라엘·미국·영국·인도·중국을 신앙의 성지 또는 신앙의 조국이라 하여 동경하고 선망하면서 그 나라를 순방하고 그 발생지를 순례한다. 그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대적인 불찰 또는 교회당을 건립한다. 여기에서 우리나라는 신앙의 성지가 아니며 우리민족은 위대한 민족이 아니라는 열등의식을 갖게 되며, 사대주의 의식이 싹트게 된다.
넷째, 유대민족의 교회에서는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가르치고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절대 가르치지 않는데, 우리민족의 불교·유교·도교·기독교 등 외래종교측에서는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가르치고 우리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지 않는다.
예컨대, 불교의 법당에 나가면 반야경·금강경·법화경·화엄경 등 팔만대장경(불경은 대승경과 소승경으로 나뉘어지고, 소승경은 석가세존께서 직접 설하신 법이지만 대승경은 용수보살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인도로 전승된 경전이다. 그러나 불교계에서는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만을 가르치고 배우며, 유교의 성균관이나 향교에 나가면 지나족의 삼사(三史; 한서·후한서·사기)와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만을 가르치고 배운다. 도교의 도관에 나가면 지나족의 도덕경·남화경·참동계·황정경 등 도장경만을 가르치고 배우며, 기독교의 예배당에 나가면 유대민족의 역사책인 구약과 신약 등 바이블만을 가르치고 배운다. 그러면서 우리민족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서는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는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우리민족의 역사와 사상과 종교에 대해 마치 남의 것을 대하듯 하면서 우리민족의 상고사를 불합리한 신화같이 취급하고, 우리민족의 사상과 종교를 비과학적인 미신같이 멸시한다. 그러면서 신도들에게 사회에 봉사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충성하라고 가르친다. 곧 외래종교측에서는 그 교육내용이 교육목적과 불일치되고 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상적인 교육이라 생각하는가? 교육의 주객전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혼없는 교육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국의 불자와 유생과 목자와 도인 등 성직자들은 정신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더욱이 기독교의 목자들은 신도들에게 유대민족을 본받으라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유대민족과 정반대의 신앙을 유도하고 교육을 한다. 곧 외래종교측은 한가지 병에 의사마다 다른 처방을 내리고 다른 약을 쓰는 격이며, 고가(高價)의 양약이라 하더라도 그 처방이 병의 증상이나 원인과 맞지 않는 격이다. 그와 같이 우리나라의 불교·유교·도교·기독교 등 외래종교측과 그 성직자들은 조국과 민족 앞에 너무나 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 논한 바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유태민족과 우리민족의 종교교육 비교표
구 분 |
유태민족의 종교교육 |
우리민족의 종교교육 |
숭배대상 |
제 민족의 민족신만을 숭배함. 오로지 하나의 신만을 숭배함. |
다른 민족의 민족신을 숭배하고, 여러개의 신을 숭배함. |
교조찬양 |
제 민족의 교조와 시조 그리고 성인만을 찬양함. |
다른 민족의 교조와 시조 그리고 성인을 찬양함. |
교육방향 |
교당내에서는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교육하면서 뉘우치게 하고,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교육하지 아니함. 그럼으로써 오로지 제 민족의 사상으로 무장함. |
교당내에서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고,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지 아니함. 그럼으로써 다른 민족의 사상을 소지하게 되고 민족분열을 초래케 됨. |
민족찬양 |
제 나라를 신앙의 성지라 찬양하고, 제 민족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 찬양함. |
다른 나라를 신앙의 성지라 찬양하고, 제 민족을 비하하고 멸시함. |
그러나 유교·불교·도교·기독교 등 외래종교인들은 종교인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지 않으냐 하고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것은 종교지상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종교인들도 원래 종교인이기에 앞서 하나의 자연인이었다. 자연인이므로 누구이든 민족적 혈통을 지니고 있다. 민족적 혈통은 이 세상에서 목숨이 다될 때까지 불변적이다. 그러나 신앙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곧 가변적이다. 가변적인 것보다 불변적인 것이 우선한다. 따라서 신앙에 앞서 민족이 우선한다. 민족이 우선하므로 다른 민족의 신앙보다도 제 민족의 민족사와 민족사상교육이 우선하고, 다른 민족의 신을 섬기기에 앞서 제 민족의 하나님과 국조를 먼저 섬겨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인을 예로들면, 유태인으로서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으로서 기독교를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도 기독교 신앙에 앞서 제 민족의 민족사와 민족사상을 먼저 가르치고 배워야 하며, 여호와를 찬양하고 예수와 마리아를 섬기기에 앞서 제 민족의 하나님과 국조를 먼저 섬겨야 한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유태인으로서 기독교를 믿는다면 당연히 유태의 역사와 사상을 배우고 유태민족의 신인 여호와를 할렐루야 하고 찬양해야 하며, 예수와 마리아를 섬기고 그에세 공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인은 유태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떠한 종교를 믿어도 한국인이라는 민족적 혈통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자기의 주체를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눈박이(비정상인) 사회에 가면 두눈박이(정상인)는 병신취급받고 외눈박이가 정상인으로 대우받는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그와 같이 우리사회에서는 외래종교 세력이 막강함으로써 외래종교에 대한 역사교육과 사상교육은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자기민족에 대한 역사교육과 사상교육은 하찮은 것으로 멸시받고 있다. 그래서 현재의 우리사회에는 불교대학과 유교대학이 있고, 특히 기독교 대학은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 백개이지만(약 800개, 그중 인가대학은 226개, 1995년 현재, 종교신문) 당연히 있어야 할 한국학 대학은 하나도 없으며, 서양사상을 가르치는 철학과는 각 대학에 모두 있어도 한국사상을 가르치는 한국철학과는 성균관대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불교와 유교 박사가 있고, 특히 기독교의 신학박사와 서양철학 박사는 수만명이지만 한국철학 박사는 4천 5백만 인구중에 한 두 사람에 불과하다. 또한 대학 때부터 한국철학을 전공한 전문교수도 전혀 없다. 대학 4년 동안 자기민족의 사상이나 철학을 한 강좌도 수강하지 못한채 졸업하게 되는 학생이 전체의 95% 이상이다.
이에 따라 기독교의 바이블, 불교의 대장경, 유교의 사서오경, 도교의 도장경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도 제 민족의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은 있는 줄도 모른다. 지나의 공자·맹자·노자·관우·장비와 기독교의 12사도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도 환국의 7세 한인, 배달국의 18대 한웅, 단군조선의 47대 한검(단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이러한 교육적 풍토밑에서 어떻게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며 국가기강과 사회기강을 바로 잡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상대의 민족사와 사상사를 말하면 국수주의자 아니면 민족지상주의자라 푸대접하니 이러한 사회풍토속에서 어떻게 민족정서가 건전할 수 있겠는가?
다섯째, 유대민족은 학교에서는 세계 여러나라의 역사와 종교와 사상에 대해서 배운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면 하나의 신과 하나의 종교만을 신앙하고, 하나의 역사와 사상 곧 자기민족의 역사와 사상만을 철저히 가르치고 배운다. 그런데 우리민족은 한국계·서구계·인도계·중국계·일본계·아랍계 등 수백개의 신과 종교를 신앙하고, 수십개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치고 배운다. 이는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형과 누나의 가르침이 다른 격이다. 그러면 그 어린이는 어떻게 되겠는가? 무엇을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할 것이 아닌가?
그와 같이 우리민족은 방향을 못잡고 있는 것이다. 곧 정신분열 내지 철학없는 민족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철학이 없어 이해따라 이합집산하게 되고 교육자도 철학이 없어 조변석개하게 된다.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 기준이 없는 것이다. 각자 자기의 주관대로, 편리한 대로, 좋은 대로 하면 그것이 정의이고 진리인 것이며, 서로 충돌이 생길 경우 힘쎄거나 다수 쪽이 이기게 된다. 그래서 각 개인은 유력한 우두머리(boss)와 이익집단을 중심으로, 또는 종파를 중심으로 단합할 수 밖에 없고, 개인주의 또는 집단이기주의로 흐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단결이 잘 안되고 또 단결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사회의 불합리한 점은 모두 민족성 탓으로 돌린다.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단결이 잘 안되는 것도 민족성 탓이며, 시기 질투하고 모함하는 것도 민족성 탓으로 돌린다. 나쁜 것은 모두 민족성 탓으로 돌린다.
4. 우리민족의 종교교육과 식민지 교육
오늘날 우리민족의 교육은 어느 면에서 일제시대 식민지 교육의 연장이라 할 수 있고, 또한 종교교육은 식민지 지배전략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민족의 종교정책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우리민족을 지배하기 위한 식민지 지배전략과 어떠한 유사성을 지닌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 점을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 조선총독부는 우리민족을 일본의 신사(神社)에 나가서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과 천황에게 배례하게 했다. 그와 같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외래종교측에서도 우리민족에게 다른 민족의 신과 교조에게 공양하게 하고 배례하게 한다.
둘째, 조선총독부는 우리민족의 역사교육과 사상교육을 탄압하고 일본의 역사교육과 사상교육만을 시켰다. 그와 같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외래종교측에서도 우리민족에게 우리민족의 역사교육과 사상교육을 시키지 않고 다른 민족의 역사교육과 사상교육만을 시키고 있다.
셋째, 조선총독부는 우리민족의 고유종교를 유사종교니 사이비종교니 멸시하면서 타파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와 같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어느 외래종교측에서도 우리민족의 고유종교를 미신숭배니 미개종교니 멸시하고, 불교사찰을 방화하는가 하면 불상을 파괴하고 훼손한다.
넷째, 조선총독부는 우리민족의 상고사를 신화라 부정하면서 단군왕검을 역사적 실재 인물로 인정하지 않고, 평양 구월산의 삼성사(三聖祠)를 헐어버렸다. 그와 같이 우리나라의 어느 외래종교측에서도 우리민족의 상고사를 신화라 부정하면서 단군왕검을 신화적인 인물로 취급하고 단군성전 건립을 방해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단군성전 건립을 못하고 있다.
다섯째, 조선총독부는 우리민족의 성씨를 가내무라·구니모도·야나가와·요시가와 등 일본식으로 개명하게 했다. 그와 같이 한국의 어느 외래종교측에서도 우리민족의 성명을 교명(敎名)이라 하여 마리아·요셉·안나·요왕·요안·요환·세레나데·베드로 등 서구식으로 개명하게 한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의 외래종교 교육정책이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정책과 유사하다. 특히 어느 종교의 교육정책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정책과 그대로 일치된다. 그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연의 일치라 할 수 있으나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이론이 성립된다.
1) 우리나라의 외래종교 교육정책 특히 어느 종교의 교육정책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정책과 일치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어느 외래종교 당국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와 다름이 없으며, 그 종교지도자들은 일제시대 친일파와 다름이 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2)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이 우리민족의 민족혼을 말살시키고 국가기강을 문란케 하기 위한 교육이었다면, 우리나라의 외래종교 교육도 우리민족의 민족혼을 말살시키고 국가기강을 문란케 할 수 있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그래서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우리나라의 외래종교인들이 일본군에 참가하면서도 독립군에 참가한 애국지사가 몇명이나 되었는가? 거의 없지 않는가? 이와 같이 외래종교 교육은 민족혼을 말살시키고 있는 것이다.
3)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이 우리민족에게 독립의욕을 말살시키고 사대주의 의식과 맹종적 노예근성을 심어주어 일본을 우러러 받들고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교육이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외래종교 교육도 우리민족에게 독립의욕을 말살시키고 사대주의 의식과 맹종적 노예근성을 심어주어 이스라엘·로마·미국·인도·중국 등 다른 나라를 우러러 받들고 다른 나라에 예속시키기 위한 교육이나 다름 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반세기가 흘러도 적극적 통일의욕이 없지 않는가? 이와 같이 외래종교교육은 민족혼을 말살시키고 동포의식을 흐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어느 외래종교측의 과오는 너무나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논리대로 해석하면 어느 외래종교 지도자들은 우리나라가 서구국가 특히 미국의 종교적 식민지로 전락되기를 바라는 격이며, 미국의 하수인과 같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그래서 미국정부나 미국국민이 볼 때, 우리민족은 미국의 심부름꾼 같고 용병(傭兵) 같으며 미개민족 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민족은 외국인들에게 절대 좋게 보이지 않고 무시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민족이 국제적으로 무시를 당하고, 3년전 미국 LA교민들이 흑인들로부터 수난을 당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외래종교 교육은 우리나라를 다른 나라의 식민지로 오해받게 하고 국제적으로 망신시키는 교육인 것이다. 이와 같이 외래종교측은 많은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5. 종교교육의 신토불이(身土不二)
그러면 궁극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공자께서 임금은 임금 닮아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 닮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 닮아야 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 닮지 못하고, 이스라엘·미국·영국·로마(이태리)·인도·중국·일본 사람 닮은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즉 우리민족은 거의가 의식과 신앙에 있어서 외국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한국혼이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유대민족이 유대교만을 믿고 유대의 역사와 사상을 철저히 가르치고 배우듯이 한국 사람은 한국의 종교를 믿고 한국의 역사와 사상을 철저히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역사는 지금부터 약 1만년전 한인의 환국(桓國)시대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가 부족하다 하여 부정하고, 그 이후 한웅의 배달국 시대를 우리나라 역사의 기점으로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역사는 약 6천년전부터 시작된다. 그때는 세계인류가 원시의 미몽에서 깨기 전이다. 그때에 이미 우리민족은 위대한 사상을 성립시켰다. 그 사상은 신선사상이다. 신선사상은 天一·地一·人一 三神一體의 천도를 발생원리로 한다. 그래서 한대민족·열대민족·온대민족 등 온 인류를 발생학적 배경으로 하는 홍익인간 사상이며, 인간의 지닌 기(氣)·심(心)·신(身)를 잘 닦아 모든 사람이 성인군자를 지향하게 하는 이화주의(理化主義) 사상이다. 신선사상은 현대사상의 모체이며 동양사상의 원류였다. 어느 사상에도 뒤지지 않는 가장 위대한 사상으로서 21세기를 지도할 사상이었다. 그러한 신선사상이 외래사상에 의해 지금까지 가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외래종교인들도 이제는 제 나라의 종교와 사상을 배우고 연구해야 할 때에 이른 것이다. 곧 농산물만이 신토불이(身土不二)가 아니라, 신앙이 신토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사상이 신토불이 되고, 사상이 신토불이 될 때 의식이 신토불이 되어 민족의식과 동포의식이 확립되고, 국가기강과 사회기강이 굳건히 되어 세계열강과 대등한 세계화도 이룰 수 있고, 나아가 세계의 지도적 중심국가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소론을 이해한다면 외래종교측은 다음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첫째, 외래종교측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외래종교를 받아들이고 신앙해야 한다.
둘째. 외래종교측은 제 종교가 손님종교임을 자각하여 민족종교에 대해 예의를 지키고 주인행세 말아야 한다.
셋째, 외래종교측은 외래종교가 우리 민족을 위해 전래됐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 인정한다면 외래종교측도 우리 민족을 위해 진정으로 봉사해야 하고, 또 우리 민족을 위해 진정으로 봉사한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이고 연구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외래종교측은 한인·한웅·한검의 역사 곧 환국사(桓國史)·배달국사·고조선사 그리고 그 사상인 신선사상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연구해야 마땅하다. 아울러 대종교(단군교)와 동학(천도교와 수운교)과 증산도(대순진리회와 태극도 등)와 원불교 등 자생종교를 주인종교로 예우해야 하고 연구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제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종교인의 자세라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제 종교(외래종교)의 사상과 교리만을 연구하고 믿으면서 그것을 제일이라 선전한다면 그것은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과 종교를 무시하는 행위이며, 아울러 제 조상과 국조를 멸시하는 행위로서 반인륜적 반민족적 반국가적 행위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논리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사항을 건의한다.
첫째, 신선사상에서는 우주와 삼라만상의 이법을 간략히 天一·地一·人一의 三神一體(삼신일체)라 표현한다. 그것은 만물이 하늘이나 땅과 같이 존엄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만물의 근본은 같다는 뜻이기도 하며, 우주와 만물이 그러한 원리로 구성됐음을 의미한다. 또한 하늘·땅·사람은 모든 종교의 존경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상징물을 제작하여 그것을 최상의 신앙대상으로 함이 마땅하다. 그것은 종교통일의 기초이기도 하다.
둘째, 모든 종교의 교조는 인류를 위해 공헌한 바 크다. 그러므로 각 종교집단은 만성당(萬聖堂)을 지어 모든 종교의 교조들을 모셔야 마땅하다. 그리고 우리민족의 국조인 한인·한웅·한검의 삼성을 제 종교의 교조와 함께 봉안하여 섬겨야 마땅하다. 더욱이 불교측부터 먼저 만성당을 지어 예수를 모시고 대웅전에 자기 민족의 국조를 석가와 더불어 모신다면 아무리 극악한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제 종교의 교조를 모시고 제 민족의 국조를 모신 사찰을 함부로 방화하거나 파괴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기독교와 불교의 불화를 예방하는 길이기도 하다.
셋째, 외래종교측에서도 신도들에게 제 종교의 경전과 함께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 등 우리민족의 경전과 우리나라의 역사와 사상을 가르쳐야 마땅하다. 더욱이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도교·불교·유교는 신선도의 지류로서 원래 우리민족의 고유종교였다. 기독교 역시 신선도의 유파라 추정된다. 즉 모든 종교의 근원은 하나로서 우리민족의 신선사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므로 도교·불교·유교·기독교 등 모든 외래종교가 제 고향으로 돌아온 격이며, 제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배우고 연구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곧 원시반본인 것이다.
넷째, 기독교대학(신학대학)·불교대학·유학대학 등 외래종교의 각 대학에 배달철학과(한국철학과)와 배달사학과를 설치하여 성직 희망생들에게 우리나라의 철학과 종교와 역사를 가르치고, 도교·불교·유교·기독교 등 외래종교와 배달사상과의 역사적 관계를 연구케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모든 종교가 원시반본되고 한국화될 것이며, 참다운 한국화는 곧 세계화와 동일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섯째, 불교·기독교·유교·도교·천리교·이슬람교 등 외래종교측은 진정으로 제 나라와 제 민족을 위한다면 제 종교의 대학과 대학원 설립보다도 제 나라와 제 민족을 위한 한국의 역사·정치·종교·철학·교육·문학·음악·미술·체육 등 한국학 전반을 종합적으로 가르치는 한국학 대학교와 한국학 대학원을 세워야 마땅하다. 지금까지의 과오를 반성하는 뜻에서라도 한국학 대학교와 한국학 대학원을 하루 빨리 세워야 할 것이다. 더욱이 고유종교측에는 그러할만한 재력이 없고, 불교측과 기독교측은 남의 나라에까지 막대한 자본을 던지면서 불찰과 교당을 세울 정도이다. 이를 생각하면 자기 나라에서 제 민족을 위해 한국학 대학교와 한국학 대학원을 세우는 것은 너무나 손쉽고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생기면 골짜기마다 불찰만을 짓고, 골목마다 교회당만을 세우는가 하면 기껏해야 제 종교의 대학과 대학원만을 세우면서 제 민족을 위한 한국학 대학교와 한국학 대학원 설립을 싫어한다거나 꺼려한다면, 그것은 동포를 동포로 보지 않고 조국을 조국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곧 반국가적 반민족적 신앙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워도 내 동포요 싫어도 내 조국이 아닌가? 깊이 깊이 생각해서 불교측과 기독교측부터 솔선하여 한국학 대학교와 한국학 대학원을 설립하시길 간절히 청원한다.
그러면 우선적으로 불교측과 기독교측 사이에 따뜻한 바람이 불고, 각 종교 사이에 이해와 협조의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외래종교측의 이해와 각성과 참여와 협조를 촉구한다.
저자소개
성명 : 안창범(安昶範). 서기 1933년생(호적상 1936년생), 제주도 태생.
학력 : 만학(晩學). 제주대학교 법학과졸(1972). 고려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졸 (1978).
경력 : 자영. 제주교육대학 강사. 제주실업전문대학 강사. 제주시 교원단체 연합회 이사. 제주대학교 교수(현재).
상벌 : 제주대학교 학술상 수상(1989).
저서 : 민족사상의 원류(1988). 한민족의 신선도와 불교(1993).
하나님 사상과 불교의 기원(1994). (역술)배달성전(1995).
잃어버린 배달사상과 동양사상의 기원(1996)
논문 : 花郞道의 外來 道·佛·儒 三敎受容說 批判. 古神仙敎의 宗敎的 體系.
석가불교의 기원과 한국의 신선도. 中國儒學의 淵源과 東夷 등 20여편.
연락처(학교) :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제주도 제주시 아라동 1번지.
학과 전화 (064)54-3260. 연구실 전화 (064)54-3262
(자택) : 제주도 제주시 일도2동 1045의 8 전화 (064)52-4906. 전송 (064)21-7934.
[펌]☞우리민족의 고유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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