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적인걸(狄仁傑)에 나타난 낙양(洛陽)
1.
적인걸(狄仁傑, 630-700)은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세운 무주(武周) 시대의 재상(宰相)으로, 중종(中宗)을 다시 태자로 세우도록 하여 당(唐) 왕조의 부활에 공을 세우고, 인재들을 발탁,천거하여 당(唐)나라의 중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고 하며 출생지는 병주(幷州) 태원(太原)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적인걸이 태어난 지역은 이전글 <서안을 찾아서>에서 명기한 현 난주(蘭州)의 서쪽, 기련산(祁連山)남쪽의 서녕(西寧)지구와 가까운 지역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명경과(明經科)에 급제(及第)하여 하남(河南)의 변주(汴州) 판좌(判佐)로 근무하다가, 그 지방을 시찰하던 공부상서(工部尚書) 염립본(閻立本)의 눈에 띄어 병주도독부(幷州都督府) 법조(法曹)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의봉(儀鳳)연간(唐高宗 676~679)에 조정(朝廷)에 들어가 사법기관의 관리인 대리승(大理丞)이 되었다. 적인걸(狄仁傑)은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1만7천여건의 사건을 판결하면서도 잘못된 판결이나 억울한 자가 생기지 않아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당(唐, 618~907)은 고종(高宗)의 황후(皇后)인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가 690년에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로 고치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어 통치하고 있었다. 역사가들은 이를 고대의 주(周, BC 1046∼BC 771)와 구분하여 ‘무주(武周)’라고 부르며, 측천무후(則天武后)의 통치기는 태종(太宗, 재위 626~649)이 다스리던 ‘정관(貞觀)의 치(治)’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아 ‘무주(武周)의 치(治)’라고 불리며 당(唐)나라 전성기인 현종(玄宗, 재위 712∼756) 의 ‘개원(開元)의 치(治)’의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적인걸은 측천무후 시대에 재상(宰相)을 지내며 정치를 쇄신하여 ‘무주(武周)의 치(治)’를 이끈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2.
영화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 은 2010년 만들어진 현 중국영화다. 무협영화의 대명사라 할 서극(徐克)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유덕화(劉德華), 양가휘(梁家輝) 등 쟁쟁한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포로(捕虜)로 잡혀온 여인에 대해 부여인(夫餘人)이라 칭하고 또 하나는 낙양(洛陽)이 큰 포구에 위치해 배들이 즐비하게 서있는 광경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런 광경은 현재의 낙양(洛陽)의 모습과는 판이한 상황이고, 또 무측천(武則天)의 재위기간은 690-705년으로 이미 고구려(高句麗)도 망한 시절인데, 영화에서는 고구려(高句麗)사람을 왜 부여(夫餘)사람이라고 불렀는지도 궁금한 사항이다.
현재의 낙양(洛陽)이 아닌, 필자가 고증한 현 난주(蘭州)서쪽의 황하 상류에 위치한 낙양을 보면 낙양(洛陽)위쪽에 길이 23km, 폭5-6km의 커다란 호수가 존재하고 있다. 물론 당(唐)나라 당시는 지금보다 더 컷을 것으로 보이고, 현재의 호수 북동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다 남쪽으로 흘러 현 대파산(大巴山) 서쪽 고원의 계곡사이를 가로질러 현재의 사천성(四川省) 가릉강(嘉陵江)으로 이어지는 강줄기가 명확히 보인다.
이사벨라 버드비숍(Isabella Bird Bishop,1831-1904)이 1899년 한족(漢族)의 강역을 답사하고 저술한 <The Yangtze Valley and Beyond>(1899)-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을 보다- 책에서의 기록 즉 <무한(武漢-현 중경)에서 한수(漢水-현 가릉강)를 통해 2,000km떨어진 내륙까지 화물(貨物)을 날라다 준다>는 말과 1921년경의 무한(武漢)이 현 중경(重慶)이었음을 알려준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1883-1984)의 고증(考證)을 통해 아래 지도에 표시한 내륙운하가 바로 2천킬로미터 떨어진 내륙(북경-현 酒泉)까지 화물을 날라다 주는 운하(運河)임을 알아낼 수가 있다.
무측천(武則天)당시의 수도는 장안(長安)이었으나, 904년 낙양(洛陽)천도(遷都)가 이루어질 만큼 이미 낙양은 번성한 도읍으로 보여지는 부분이고 이러한 번영은 바로 현 운남성(雲南省)과 현 사천성(四川省)에서 내륙운하를 통해 들여오는 엄청난 물산의 1차 집결지가 낙양(洛陽)이 되었음은 바로 인근의 커다란 호수와 또 이 호수가 황하(黃河)의 물줄기에 형성되어 있기에 이른바 사통팔달(四通八達)의 요충지로 자리잡고 있어 매우 효율적이고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지(要塞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서극(徐克)감독은 역사상 낙양(洛陽)의 위치를 알고 있기에 커다란 호숫가에 수많은 배들이 정박한 장면을 만들어 냈을까?
필자가 고증(考證)한 역사속의 낙양이 맞다면 서극(徐克)감독의 <낙양이 큰 포구가에 존재했다>는 영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지게 된다. 그 낙양에서 서북으로 수백km, 남쪽으로 2-3천km의 운하(運河)와 내해(內海)를 통해 현 통킹만까지 연결되어 풍부한 물산의 이동이 자유롭게 이루어졌던 것임을 명확히 간파해 낼 수 있다.
3.
이를 지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2022.05.31.松溪
첫댓글
좋은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북망산은 저기 어디에 있겠네요?
<성주풀이>
낙양성 십리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 저 모양이 될터인데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여...
낙양이란 지명이 조선에는 없고 이른바 한당의 역사에만 있었다면 원래의 북망산은 한족의 강역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의문을 가지고 역사를 재해석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북망산이 우리역사에도 있었다면 한족의 낙양이 조선사의 북망산과 합쳐졌을 가능성을 疑考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의 고증은 강역의 고증이 우선되어야 기타 서지적 해석의 정확성을 높일수 있습니다.
@송계 정말 어려운 문제겠네요. 조선과 관련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짬뽕이 된 건지, 왜 저런 내용이 우리 민족 문화속에 자리잡고 있는지... 당나라에도 일정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는지, 조선에도 일정의 한족들이 분포해 살고 있었는지... 아따 타임머신 타고 한 번 가보고 싶네요.
에라 만수 에라 대신에서 나오는 말처럼
에라는 야구에서 에라와 같은 말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황당한 말을 할때 그사람보고 " 에라 이색끼가" 라고 합니다
에라는 이런들 저런들 수명을 길게 하고자함인데 에라가 붙으니 만수도 못누려
에라 대신 으로 큰 신앞에도 에라 부정적으로 됩니다
노래가 부를 본거지인 낙양이 한나라와 당나라에 낙양 이였다는 이야기라고 말할수있겠네요
갠적으로 '에라'는 사자의 죽음에 대한 슬픔, 비통, 절망, 한탄, 애도의 감정이 혼합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비애섞인 감탄사겠지요. 물론 일상에서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는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조금씩 변천해 가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저또한 의문이 들었던 부분입니다.
당나라의 낙양이 현재 위치라면 실제 당나라의 위치가 이상해지거든요.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그리고 질문이 있는데요. 해남의 위치가 어딘지 알수 있을까요?
나중에 한번은 꼭 가보고 싶어서요.
저번에 선생님 글을보니 광주가 베트남 하노이 부근이라 베트남 어느 부분인거 같아서요.
하노이 부근의 광주는 명청의 廣州입니다. 조선의 광주는 현 장사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해남의 위치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에르, 에라는 실담어로 쟁기질 하다의 뜻으로 되어 있네요…쟁기질이 너무 힘든 일이어서 쟁기질하고 나면 욕봤네하고 말하곤 했지요…나중에는 다른 사람에게 욕할때 앞에 에라이를 붙여서 하면 욕이 훨씬 찰지게 느껴지죠…에라이~~~…다른 사람을 오랜만에 만날때 앞에 “아따”를 붙여야 진짜 반갑게 느껴 지는 것 처럼 말이죠.
아, 그렇군요. "에라이~"가 왤케 달콤하게 느껴지는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