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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에 교육부는 특정 계층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은 급훈들을 학교마다 다시 검토하도록 지침을 내렸습니다. 이때 문제가 된 학급 교훈은 주로 고등학교교실에 걸려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네 성적에 잠이 오냐?” “쟤 깨워라” “30분 더 공부하면 남편 직업이(마누라 몸매가) 달라진다” “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 이런 환경 속에 있는 학생들은 친구를 동지나 벗으로 생각하거나 만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 경쟁자요, 입시전투의 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3년 전 덴마크에 갔더니 교실마다 아이들의 밝은 모습의 사진이 한쪽벽을 둘러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의 살아있는 모습이 어우러져 너무나 마음을 편케했습니다. 아이들과 선생님이 만든 모자이크 글씨가 있었는데 “나와 내가 잡은 손에 조국의 꿈이 있다!”라는 글씨가 있었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 있느냐에 따라 그들이 그리는 미래나 현실이 확연히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환경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쓴 신영복 교수는 뼈있는 한마디를 그의 글에서 적고 있는데,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불행은 무엇이겠냐는 물음입니다. 그런데 징역살이를 하며 느끼는 불행중 가장 큰 불행은 바로 이렇게 한 발 걸음이라는 외로운 행보라는 것입니다. 즉 실천과 인식의 다리 중에서 “실천의 다리”를 사용할 수없다는 겁니다. 생각만 하지 그것을 어떻게 할 수없기에 감옥이라는 곳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
본문 속으로
1장 3절부터 23절까지의 본문은 긴 문장들로 쓰여져서 여러 번 끊어 읽도록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은 단 두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3-14절은 송축의 형식으로 길게 늘어진 찬미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락인 15-23절은 형식상 ‘감사의 글’로 되어있다고 하겠습니다.
쉼없이 읽어내려가야 하기에 오늘의 말씀을 읽고 나면 긴숨이 절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한번 길게 숨을 고르고 말씀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 유난히 많이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 서신에 무려 83회 등장합니다. 그 안에서, 주 안에서와 같이 약간은 변형된 형태의 말들까지 포함하면 164회 등장합니다.
대개는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할 때 다음과 같이 사용되고 있음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객관적인 용례로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을 언급하는 것에 많이 등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 말씀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와 같은 말씀입니다.(전체 사용의 3/1)
두 번째는 좀 더 주관적인 용례로 “신자들의 상태”를 언급할 때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말씀처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세 번째는 바울이 자신의 행위를 말할 때 또는 독자들에게 성품이나 행실에 관해 권면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전체 사용의 3/1)
로마서 9장 1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빌립보서 4장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일하시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행위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즐겨썻던 것처럼 자기 자신이 더욱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려는 노력과 애씀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29년 미국에 윌리스 존스라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아주 어린 소년시절부터 제재소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공항으로 당시 일하던 일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가진 재산은 고작 250달러였습니다. 그 돈으로 그는 작은 여관을 열게 되었습니다. 작지만 거기에는 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되는 여관” 즉 술집이 없고 카지노가 없는 호텔을 만드는 꿈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점차 사람들에게 이 여관이 호응을 얻고 세계적인 호텔 체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홀리데이 인 호텔”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에 때론 신앙의 여정을 계속 걸어가기 어려울 만큼 막막한 현실에 서게도 하셨지만 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그 자리는 바로 주님과 함께하는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
3절에서 14절의 말씀까지의 찬양의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향한 계획을 단계적으로 적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인 역사적 구원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죄사함을 얻는데 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3-4절, 5절a) →
아들(자녀) 삼아주시고(5절) →
비밀을 계시하시고(9절)→
상속의 담보로서 성령의 인치심을 받게 하시는 것(13절)입니다.
성령으로 인친다는 것은 법적으로 하나님의 사람 되었음을 확증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어 종결지어 집니다.
하늘로부터 계획되어진 인류구원의 사건이 땅의 사람들에게 전해져 지상에서 영원을 향한 노래로 가득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진다는 것입니다.(10절)
그런 점에서 감사한 것은 하늘의 소망이(우리의 신앙이) 부풀려진 기대나, 희박한 성공을 위해 확률적인 모험이 아니라, 확실한 구원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믿는 신앙은 그저 우리들의 머리와 가슴속에 사무쳐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구현되어지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혹 사람들 중에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자꾸 말하니까 교회 한번 다녀보는데...시원찮으면 그만둘껴.’
‘그래두 안 믿는 것 보단 나은께.. 다니긴 하는데’
‘그래도 예수나 부처나 한 명 정도는 알고 있어야제. 거 죽어서 천당갔는데 둘 중에 한 분은 계실꺼 아니여’
창세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시고, 사랑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기다림은 그저 이도 저도 아닌 것처럼 애매모호 한 것이 아니라, 역사속에서 끊임없이 증거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라 함은 그런 점에서 일종의 “환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공기를 마시며 우리 안에 채우므로 생명을 이어가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현상적으로 느끼고 만질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크리스챤들이 쉼 없이 들이마시는 생명선입니다. 어느 곳에서도 뗄라야 뗄 수 없는 참 생명의 환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기독교인들을 잡아들이며 핍박하고, 죽일 때에도 그리스도는 바울의 주위에 변함없이 지켜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기나긴 선교여행을 떠나며 들판에서도, 시장에서도, 지금 에베소서를 적고 있는 감옥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호흡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여러분! 여러분들에게도 그리고 저 자신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들의 참생명을 살리는 일상의 환경이 되어서 죽는 그날까지 변함없이 호흡하는 우리 삶의 자리를 만들어 갈 수 있길 원합니다.
그리스도인된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환경이 아니면 제 아무리 그럴듯하고 좋아보여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구석구석이-예배, 기도, 찬양, 가족모임, 선교와 교육, 회원들과의 관계- 우리 가정과 일터 구석구석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가야겠습니다.
교제와 친교와 형식과 프로그램 등 우리가 신앙생활 중에 다양하게 만나고 접하게 되것이 많지만, 중요한 것은 종국에는 그리스도로 귀결되어야만 합니다.
바울은 1-2절 인사말에 이어서 바로 그의 내적 고백이 담긴 찬양시를 적고 있습니다. 3절부터 시작되는 찬양의 고백은 앞서 말씀한 것처럼 하나의 동일한 자기고백 안에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이나,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인생의 전환을 만나 후로나 돌이켜 보니 그 어디에서도 주님께서 간섭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언하건대(에베소서를 쓸 때에 바울은 문장을 끊어 쓸 여유가 없을 만큼 그 은혜가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돌아본 인생의 발걸음 발걸음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보니,
3절에 적고 있는 것처럼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 폭포수처럼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9절의 말씀입니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뜻-비밀을 알게 하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비밀’이라 쓰고 있는 것은 헬라어로 ‘뮈스테리온’이란 단어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미스테리(mystery)라는 단어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비밀이란 말은 보통 “무엇인가 신비스러우면서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사실이나 진리”라고 정의를 합니다. 그렇다면 비밀은 말 그대로 절대 알려져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은 들통내는 것이 목적이라는 겁니다. 일급비밀(관계자만이 볼 수 있는)이긴 한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알리기 위해 공표한 비밀인 것이지요.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좋아지고, 행복해지고, 희망적인, 힘이 솟아나는 비밀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일급비밀을 취급하는 복음의 요원들입니다. 이것을 나만 알고 있겠습니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초대에 그들을 초대하십시오. 구원의 비밀을 맛보는 큰 은혜의 사건이 여러분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 시절 운동회 경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운동회 경기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장애물 경주입니다. 늘 두 명의 선수가 뛰게 되는데 한 아이는 반에서 달리기를 가장 잘 하는 아이이고, 또 다른 아이는 키도 작고 운동도 별로 못하는 아이입니다.땅!하는 총소리와 함께 달리기를 시작하면 운동을 잘하는 친구는 당연히 먼저 뛰어나가 사다리를 통과하고 뜀틀을 뛰어넘어 가마니까지 뒤집어쓰고 나와서, 저만치 앞에 놓인 쟁반 위의 밀가루에 얼굴을 파묻고는 접혀진 종이를 입술로 물고, 관중석을 향해 쏜살같이 뛰어 갑니다. 뒤에 오는 친구는 이미 기대를 꺾고 뛰고 있습니다. 접힌 종이를 펼치는 순간 그 아이의 얼굴이 굳어지는게 아니겠습니까!. 아뿔사! 접힌 종이 속엔할머니라고 쓰여 있지 않은가! 그 친구가 아무리 잘 뛰면 뭣하나? 할머니가 뛰질 못하는 걸…. 결국 그 아이는 다 이긴 경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뒤에 오던 아이는 종이를 펼치는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체육 선생님이란 글자가 뚜렷하게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얼씨구나하고 선생님 손을 잡고 뛰는데, 아이의 걸음이 시원찮았던지 체육 선생님은얘, 안되겠다. 내 등에 업혀라 하시곤 그 아이를 들쳐 업고 뛰기 시작했다. 1등으로 들어온 건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
보통 인생을 경주에 비유합니다. 많은 장애물과 고비가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은 이미 수없이 경험하셨을 겁니다. 지나보니 빨리 가고 못 가고는 내 소원과는 별개의 문제 아닙니까!
그렇지만 예수님과 함께 뛰는 경주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든 환경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고 믿기 시작하면 죽음을 눈 앞에 둔 감옥에서도 바울과 같은 찬양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경주를 앞으로도 계속 달려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라면 어디를 가든 걱정할 건 전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사도바울의 말씀이 오늘 이 아침에 우리의 신앙고백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