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벌에서 들은 말
화엄벌에 갔더니 은빛 억새가 낮게 넓게 엎드렸더라
바람은 산정으로 기어올라 그 긴 머리를 빗기고 있더라
바람이 드나들며 머리 빗는 소리가 고와서
바람과 억새는 산정의 악사(樂士) 같더라
외로움 쓰다듬는 가객(歌客) 같더라
아득한 한때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순 없었지만
바람과 억새는 한 몸이어서
바람이 불어서 억새는 제 몸 뒤척이고
억새가 고요해져 바람도 가끔은 자고 있더라
마음 아픈 사람의 이야기가 세상에 있듯
이름 없는 억새들의 말은
들리지 않아도 슬픈 것이더라
아무도 없는 산정에 웅크린 채로
밥 굶은 자에게, 사랑을 꿈꾸는 자에게
억새가 흔들리며 하는 말, 그들끼리 주는 말
그렁그렁 내게도 들려오고 있더라
어둔하여 나는 어쩔 수가 없더라
집으로 오는 길에 화엄의 그 억새의 말
내 속에 은빛으로 오래 두고 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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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에
장대로 나무에 달린 대추를 털었다
연달아 흔들고 두드렸더니 매달렸던 것들이
놀란 듯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땅 위에 한참을 누워 있다가
허리를 구부리고 또 구부리어
고모할머니와 덕실 아주머니와 스님과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웠담았다
대추는 붉은 가을에 마침내 귀가하였다
집에 든 대추는 살 속의 수분을 말렸다,
일주일을 지나 또 마침내 쭈그러져서
주름 같은 골을 안고 감량한 몸으로
대추는 상자에 쌓이었다
흥정이 되어 어딘가로 떠나가기 전에 잠시
휴식에 깃든 대추 몇 알
달콤한 향이 나는 상자에 깃든 고요
들 일 끝에 귀가하는 아버지에게 저런 고요가 있었다
상자 속에서 아버지의 오래된 땀내가 났다
어쩌면 여태, 내 존재의 온갖 국면에 살아있는 아버지
대추의 휴식처럼 가을 늦은 밤에 찾아오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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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에 관하여
꽃이 피는 일을 생각해 보았어
꽃은 가지 끝에서 얼마나 오래 기다리는 걸까
서두르지 않고 옆을 묻지 않고
때에 이르러 스스로 피어나는 거야
지는 일에도 순명하다 스러져 뒹구는 꽃
몇 마디, 몇 송이 혼자 흔들리는 거야
꽃이 피어나서 주장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어
웃지도 않고, 눈물 흘리지도 않고
바람을 흔들다 고요하게 내리는 비
잎 사이의 드문 햇살
먼저 피어나서 소란하지 않고
꽃이 주장하는 건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거야
어느 날, 사람의 가운데로 걸어 나오는 꽃을 보았어
그러나 소중한 가계 안의 사람들에게
꽃은 꽃이 아니었던 거야
처음부터 사람 속에 아름다운 꽃은 없었던 거야
꽃은 꽃이어서
지친 사람들에게 그들의 꽃은 없었던 거야
꽃의 이야기는 묻혀 가고 마는 거야
사람의 꽃은 없는 거야
꽃은 꽃이어서 그 잎 몇을 바람 위에 부릴 뿐
사람은 그 주장을 다 들을 수는 없는 거야
꽃이라 부르기만 할 뿐인 거야
믿기지 않으면 물어 봐야 해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꽃으로 여기는가를
꽃처럼 사랑하는가를
사람들은 침묵해야 해
몇 마디, 몇 송이 꽃 앞에서는
첫댓글 이 글을 읽는데 왠지... 오늘 읽다만 '채식주의자'라는 소설이 생각이 나네요. 영화샘은 살아있는 것들의 아픔을 대신하게 생겨난 사람중 한사람입니다. 건강하시죠? 가을이 깊어서 시심이 더욱 깊어진 선생님!!!
가을이 깊어가고 있지요. 학교의 좋은 선생님 몇 분과 한때 수경스님이 목숨을 걸었던, 천성산에 갔다 왔습니다. 산정에 억새를 안은 넓은 평원이 있는데 그 평원의 이름이 "화엄벌"이었습니다. 함께 간 선생님이 찍은 억새 사진 한 장 올립니다. 평안하세요.
거기는 거의 해마다 우리학교 아이들이 극기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산행을 했던 곳입니다. 샘, 제가 바로 그 아래에 있는 서창이라는 마을에서 아이들과 더불어 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반가운 이름, 화엄벌... 애들이 몰래 숨어서 담배피울까봐 걱정많이 했었죠^^.
그런 적이 있었군요. 선생님은 발닿지 않는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마당발, 무한질주, 그런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화엄벌을 오르내리면서 자라 난 아이들은 세상을 사는 힘도 다를 것 같습니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