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페르트 신부의 권유에 따라 회프너 신부에게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우기 위해 독일로 갔다. 하지만 7년 동안 머물고도 학위는 따지 못 했다. 서정길 주교의 병구완을 하느라 2년간 공부를 뒷전으로 놓은 탓도 있다. 입소문이 나서 당시 독일에 와 있던 광부 ․ 간호사들의 상담이 끊이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했다.
- 「중앙일보」(2009.2.17).
고 김수환 추기경이 1993년 9월 폐가가 된 경북 군위군의 생가를 찾아 상념에 젖은 채 툇마루에 앉아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 「동아일보」(2009.2.17).
온라인에서도 추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중앙일보 뉴스포털 조인스닷컴에 댓글을 단 이상웅 씨는 “마산교구장 시절, 흰 양복에 짐짝만한 검은 가방을 드시고, 삼랑진역에서 완행열차를 타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고 했다.
- 「중앙일보」(2009.2.17).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을 지낸 윤공희 대주교는 2월 18일 “계엄군이 광주 도심 외곽으로 후퇴해 봉쇄작전을 펼치던 1980년 5월 25일 김 추기경의 서신을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김 추기경은 1장 짜리 서신에서 “광주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크다. 군과 대치하는 어려운 상황이 평화롭게 수습되기를 바란다. 기도하고 있다”고 썼다. 짧은 편지에는 당시로써는 큰 액수인 1천 만원이 수료로 동봉돼 있었다고 윤 대주교는 밝혔다. 광주로 진입하는 교통수단이 통제된 상황이어서 김 추기경은 군종신부를 통해 편지를 전달했다. 동봉된 1천 만원은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 맡겨져 부상자 치료 등에 쓰였다.
- 「조선일보」(2009.2.19).
1980년과 1994년 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송월주 스님은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종교의 벽을 넘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왔다. (중략) “종교지도자로 수십 년 나란히 활동하면서 늘 김 추기경이 중심에 있었고 영향력도 가장 컸지요. 나라의 고비 때마다 소신있는 발언으로 방향을 제시했어요. 반독재 ․ 반민주 활동에 앞장섰지만, 나라가 좌편향으로 쏠리자 ‘이건 아니다’라고 중심을 잡아주었습니다.” (중략) “대통령 앞에서도 직언을 많이 하셨어요. 평소 소신을 담아 강직한 뜻을 전하면서도 늘 부드럽게 말씀하시니 울림이 컸어요. 역대 대통령들은 추기경의 말씀을 늘 경청했습니다.” (중략) “2000년 김 추기경이 성균관대에서 심산상을 받았을 때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라고 했다. “심산상은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고 김창숙 선생을 기려 만든 상인데, 수상 후 추기경이 심산 선생의 묘소를 참배한 걸 두고 개신교계와 천주교계에서 비판이 일었어요. 제가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더니, ‘살아있는 종교지도자가 돌아가신 민족지도자를 위해서 예를 갖추는 건 당연한 게 아니냐’고 답하시더군요.”
- 「조선일보」(20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