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임(景任 : 衡聖의 字)公이 옥천에 있을 때(沃川郡守 在職時) 나에게 고 달부(高達夫 : 唐나라 시인 高 適의 號)의 봉구(封丘)시에 제(題)하기를 요구하였으므로(그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그가 오두의 관록(五斗官祿: 변변치 않은 벼슬)을 싫어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 거실을 백무(百無)라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노장사상(老壯思想)에 가깝다. 비록 아무것도 없는 속에서도 있는 것이 있다고 이르는 것이 옳겠다.” 하였더니, 드디어 그 창문 위에다 쓰기를 육유(六有)라 하였다. 이는 횡거(橫渠 : 北宋의 儒學者 張 載의 號)의 “낮이나 밤이나 순식간에라도 언동에 마음을 두라 ” 는 말에 의미를 둔 것이다. 이윽고 조정이 한번 빛나게 밝아졌는데 公이 대시로 관직을 사직하고 돌아와(公以臺侍謝歸 : 사헌부 장령 남천한의 탄핵으로 사직) 그 집의 편액(扁額)을 기기(棄棄)라 하였으니 대개 이백(李白)이 읊은 바 군평(君平)의 일을 취한 것이다. 그때 정권을 잡은 자가 “公이 정도를 지켜 자기만 몸을 곧게 한다”는 것으로 배척하여 진주목사로 좌천시켰으니 진주는 송나라 춘둔(春遁)과 같아서 이르는 자가 죽지 아니하면 병이 들었다. 公이 이른지 수 개월 만에 과연 병이 들어 사직하고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아 졸하셨으니 崇禎丙辰年(一六七六年) 七月二十二日이다. 숙부인(淑夫人) 전주이씨가 먼저 오월(五月 : 남원윤씨의 족보에는 同年 二月二十四日로 기록 되어있음)에 돌아가셨는데 금천(衿川) 신림동(新林洞)에 같이 장사지냈다. 公의 본관(本貫)은 남원으로 휘(諱)는 형성(衡聖)이다.
公은 총명(聰明)하고 영발(英發)하여 기상이 빼어났으며 담론(談論)을 이어서 길게 잘하였고 심한 구속이 없는데도 한가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백씨(伯氏 : 맏형 衡正)가 격동시키어 나가게 하고자 해서 말하기를 “모씨(某氏) 아들 아무개는 너와 같은 해에 출생하였는데 지금 바야흐로 아무 책을 읽는다.” 하였더니 공이 즉일에 학업을 청하였다. 이로부터 문리가 빠르게 진척되어 많은 서적을 섭렵(涉獵)하고 문사가 민첩하여 모든 시키는 일을 소매 속에서 취해내는 것 같이 하였다. 효우가 두터워 어버이를 미처 섬기지 못한 것으로 몸을 마치도록 애통하여 말이 거기에 미치면 반드시 울었으며 멀리 있어 기일(忌日)을 만나면 반드시 자리를 마련하고 망곡(望哭)하였으며 백씨(伯氏)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 하면서 고을을 다스릴 적에 맛좋은 음식이 있으면 한결 같이 양사주(楊肆州)의 고사와 같이 하였다.
비록 집에 있을 때에도 시절의복(時節衣服)을 반드시 재봉하여 드렸다. 관에서 고아를 기르고 과부를 먹이되 은혜와 예가 지극하였고, 빈궁한 사람을 두루 구휼(救恤)하는데 유,무를 계산하지 않았으니 그래서 한나라의 소 광(疏 廣 : 벼슬로 받은 재물을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자손을 위한 子孫之計를 도모하지 않음)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권하는
자의 말을 듣게 되면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 내가 성질이 졸렬하고 모계가 소루하여 한때 바람같이 떠 돌아 다니는 것이 뜬마름∧浮苴 : 부저∨같으니 어느 틈에 자손지계(子孫之計)를 하겠는가?” 하였다. 호남지방에 오랫동안 거쳐하면서 고기잡이와 염전에서 소금 굽는 일을 하면서도 일찍이 스스로 특이한 사람이라 여기지 아니하였다. 시남(市南) 유 계(兪 棨)公과는 가장 친한 지기지우로 그도 벼슬을 버리고 강호에 묻혀 살면서 서로 인척간(姻戚間 : 公의 三女가 兪棨公의 큰 며느리가 됨, 兪棨公의 누님은 公의 형수 즉,博士公 衡志의 夫人)이 되었다. 公이 임천(林川)의 칠산(七山)에 이르러 문을 연하여 책상을 대 놓고 국화심고 대나무를 심어 유연(悠然)한 태도로 세상 밖∧物外∨의 정취를 즐기고 있었다.
뒤에 시남(市南)公이 칩거(蟄居)생활에서 벗어나 조정(朝廷)으로 돌아가서는 公에게 음과(陰窠 : 부모의 공덕으로 얻는 벼슬)를 주려하니 ,公이 서찰을 보내 그를 책(責)하고 중지하도록 하였다. 모년(暮年 : 늙은 나이)에 사적(仕籍)을 통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대성(臺省 : 大諫, 諫官)을 두루 거치면서 잘잘못을 자기 주관대로 결정하면서 말씀하시기를 ” 흰머리로 조정반열에 끼어 임금을 가까이 모시니 이미 분수를 넘는 일이나 오직 도를 믿고 곧바로 앞으로 나갈 뿐이니 어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것인가 ? 하였다.
갑인년(甲寅年)에 사화((士禍 : 甲寅禮訟 一六七四年)가 시작되니 公이 장차 대각에 나가 극론(極論)할 내용 수백마디를 초고(草稿)하였는데 시의에 동조하는 무리∧時輩∨들이 염탐하여 미리 알고 먼저 공격하여 제거시켰다. 그래서 진신(縉紳 : 벼슬아치의 총칭)사이에서는 “ 그 귀신같은 모유(謀猷 : 원대한 꾀)를 임금에게 듣게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다.
公이 진주목사로 가는데 오랜 친구들이 위로하니 公이 편안한 기색으로 말하기를 “운명이니 죽고 사는 것을 어찌 장 자후(章子厚 : 송나라 章 惇의 號, 반대파를 많이 숙청했음) 가 할 수 있는 일인가?” 하였다.
公이 전후에 걸처 백성에 임하여 다스리는데 항상 이로운 것을 일으키고 해로운 것을 제거하여 교화를 가다듬고 원통한 것을 풀어주는 것으로 힘썼다.
일찍이 어미가 죽었는데 염습을 하지 않고 몰래 창기(娼妓)의 집에 유숙한 자가 있었는데 공이 이자(者)를 곤장을 쳐서 죽였고 ,과부와 송사하는 자를 엄히 다스렸다. 효행이 있는 자는 예로서 대접하며 학문과 정치가 명확하고 엄숙하였으며 관고에는 저축이 넘쳤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돌보는 데는 매우 박하여 비록 하인이라도 이를 감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고로 사민(士民)이 두려워하면서도 친밀히 하였고. 옥천 사람들이 언덕바위를 갈아 公의 덕을 크게 새겨 영구히 후세에 보이도록 하였다.
아~ 슬프다. 公으로 하여금 성년(盛年)의 운을 만나 평소에 쌓은 바를 마음껏 전파할 수 있었다면 公에 대해서 문자
로 쓸 만한 것이 어찌 여기에서 그칠 뿐이겠는가? 불행하게도 반평생을 영락(零落)하여 구학(丘壑 :흙언덕과 진구렁)에서 한숨과 걱정으로 지내다가 만년(晩年)에 멸정(蔑貞)의 운을 만나 위태하고 박절한 괴로움으로 지내다가 그 세상을 마쳤으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한가?
公은 만력무신년(萬曆戊申年:一六ㅇ八年 宣祖四十一年)에 출생하여 숭정임인년(崇禎壬寅年:一六六二年 顯宗三年)에 과거에 올라 전적(典籍: 正六品)을 경유하여 공조좌랑(工曹佐郞: 正六品)이 되었고, 병조(兵曹)로 옮겨서 정랑 (正郞: 正五品)으로 승진되었다.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 正六品),헌납( 獻納: 正五品), 사간(司諫: 從三品), 사헌부(司憲府)의 지평(지평: 正五品), 장령(掌令:正四品), 집의(執義: 從三品)를 역임하였는데, 양사(兩司에서 체직(遞職)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 三, 四 차례나 되었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문학(文學: 正五品), 필선(弼善: 正四品), 보덕(輔德: 從三品)과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從四品)와 종부시정(宗簿寺正), 예빈시정(禮賓寺정 : 正三品 堂下官)을 지냈고, 외직(外職)으로는 함평현감(咸平縣監), 삼척부사(三陟府使), 옥천군수(沃川郡守)를 지냈다.
甲寅年에 왕명을 받아 새릉[新陵: 顯宗의 陵]의 봉분을 만들었으므로 예에 따라 통정대부(通政大夫:정삼품 당상관)로 승서(陞敍)되었는데, 진주에 부임한지 육 개월 만이다. 高祖 時英은 執義이고, 曾祖 淸은 判官이며, 祖父 民新은 參奉이며, 考 길은 承旨이니, 형제 다섯 사람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예에 따라 참봉공에게 해마다 별도로 녹봉을 주고 이에 추증한 은전이 있어 영광이 비할 데가 없었다.
어머니 全州李氏는 贈參判 李世良의 딸이다. 부인은 온화하고 인자하며 정숙하고 조용하여 공과 더불어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오십년 동안 길쌈을 하여 생활을 꾸려 나아갔고, 公을 따라 임소에 가서는 더욱 겸손하고 검약하여 公의 청덕(淸德)에 누가 될까봐 두려워하였다.
슬하에 五男四女를 두었다. 아들은 耒, 來, 柬, 東과 束이다.
사위는 生員 朴世彙(휘), 修撰 兪命胤, 進士 金盛遇, 舍人 朴泰宇이다. 孫子 以達, 以發, 以迪(적)이다. 손녀는 李燔에게 출가하였으니 장방의 소생이며, 以興은 삼방소생이고, 束에게서 난 孫子는 以顯, 以遠, 以煥인데 ,그 이름을 짓지 않았거나 출가하지 아니한 자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外孫은 朴泰初, 金時傑, 金時保, 朴弼院, 朴弼貞이다.
公은 사귀어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홀로 市南 兪公과 더불어 벗을 하였다. 내가 公을 알지 못하였는데 市南公과의 인연으로 인하여 정말로 나무를 보면 그 산을 안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미 서로 좋게 지내게 된 후에 公과의 사귐이 늦었던 것을 한탄하였다. 서찰의 왕복을 통하여 무슨 일을 하려면 서로 상의를 하였고, 산에 오르고 물가에
임하는 데 뜻과 취향이 서로 같았다. 여러 번 많은 사람들의 노여움을 사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마쳤다.
公은 비록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으나 내가 그 사연을 조용히 생각해보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지금 묘갈명(墓碣銘)을 지으면서도 혐의(嫌疑)가 되는 것이 두렵고 구애됨을 꺼리어 곧이곧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내가 公을 저버림이 또한 많다고 하겠다. 그러나 자인 윤군(子仁 尹君:송시열의 제자, 尹 拯을 말함)의 행장에 모든 사실이 자세히 갖추어져 있으니 필요 없는 나의 말을 기다릴 것이 없으므로 드디어 위와 같이 간략하게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물러가서 겸허한 마음으로 당(堂)의 이름을 백무(百無)라 하였고, 창문의 명(銘)을 육유(六有)라 하였으니 대개 횡거(橫渠 :張 載의 號)에게서 들음이 있었도다.
요는 중심에 스스로 만족하여 그 초심을 변하지 아니하고 마침내 기기재에서 돌아갔으니[終而沒於棄棄之齋], 公을 알고자 하는 자는 대개 여기에서도 남음이 있을 것이로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춘추관사 세자 부 송시열 찬
외손 통훈대부 행양근군수 김시보 서
숭정기원후 팔십일년(1708)무자 오월 일립.
소재지: 전북 순창군 유등면 외이리.(원소재지 서울 신림동에서 이장)
규 모: 총고 200㎝ 비고 150 ㎝ 폭 65㎝ 두께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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