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전 240년. 해모수 22세. 상달 25일부터
편지를 읽고서 찰라간 해모수는 당혹감에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가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감읍이 솟구쳐 올랐다.
‘아, 폐하께서 나를 충신으로 인정해주시는 건가. 폐하께서 이토록 날 신임해 주시다니.’
해모수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 뻔했다. 대부여평국상장의 지위가 어떤 것인가도 이 서한에 명쾌히 밝히고 있었다. 진조선군의 통수권자인 진국상장도, 대부여평국상장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거였다.
해모수는 임금의 밀지를 가져온 사자에게 물었다.
“그 동안 장당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소인은 잘 모르오나, 소문에 듣기로는 여러 대인들이 폐하께, 해모수 공이 반역사건을 저질러 웅심산성을 접수했다고 말하며 그에 대한 토벌을 주청했다 하옵니다.”
“폐하께서 그 일을 허용하셨는가?”
“그건 모르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어찌 이를 찬성할 수 있겠습니까?”
해모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모수는 임금의 밀지를, 지난번에 받은 두 개의 상반된 밀지와 함께, 밀폐된 비밀 공간에 소중하게 간직했다.
해모수는 즉각 문무 주요관리들을 청사로 소집했다. 해모수는 사자에게 들은 장당경의 어전회의 내용에 관해 설명한 후 말했다.
“폐하께서 내게 이런 어명을 은밀히 전달하셨소. 제공諸公들은 모두 유념해주기 바라오.”
해모수가 임금의 밀지를 좌중에 돌렸다. 하나 같이 놀라마지 않았다.
“이 서한에 의하면, 조만간에 어명을 빙자해, 우리나라 군대가 우리 웅심산성을 공습해올 가능성이 높은 것 같소.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하겠소. 제공들의 좋은 의견을 말해 주시오.”
“진조선진국상장이 누굴까요? 처음 듣는 관직명인데요?”
웅심산성 기마대장이 물었다.
“추측하기로는 진조선 군대를 총괄하는 인물로서, 아마도 해로운 공이 맡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웅심산성 내무총관의 대답에 해모수가 응했다.
“만일 친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타난다면 우리가 참으로 곤란한 형국에 빠질 것이오.”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해모수가 덧붙였다.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 없겠소?”
“나리, 밀지에 나타난 대로 오직 어명에 따를 뿐입니다. 대단히 죄송하오나 혈육의 사사로운 정이 국태민안을 능가할 수 없사옵니다.”
“나도 동감이오.”
해모수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부언했다.
“그나저나 그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책이 있다면 누구든 말해보시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한 장수가 입을 열었다.
“우린 고립무원 지경에 처해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장당경의 군대가 이곳으로 진주할 경우, 아사달, 백악산아사달, 영고탑 등 우리를 둘러싼 큰 성읍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편에 가담하지 않으면 천만 다행입니다.”
“그렇소. 그 성읍들의 욕살들은 모두 임금가문의 종친들이니, 서출인 나보다 적출嫡出인 장형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소.”
“하지만 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면,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작태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분개하는 것과 자기 안위는 다른 문제요. 제아무리 불의를 보고 분개한다 하더라도 일단 그 문제가 자신의 안위와 직결되면, 불의를 책망하며 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안위를 염려해 꼬리를 감추고 도사리는 것이 인간의 본성 아니겠소?”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무기는 의義 밖에 달리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소.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설득할 필요는 있을 거요. 우리가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저들은 아마 우리가 안정과 힘을 갖추기 전에, 속전속결의 방식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해모수는 흑진주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좌중을 돌아본 후 물었다.
“아사달, 백악산아사달, 영고탑, 이 세 성읍의 욕살들을 설득할 사자로 누구를 파견하면 좋겠소?”
“나리, 우리들 가운데 삼칠성주님보다 더 명망있는 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분을 속히 모시고 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 분은 이미 동서남북 네 아리하 전역에서 크게 신망을 얻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리있는 의견이오. 그럼 지금 당장 삼칠성으로 파발마를 보냅시다.”
“보낼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소인의 추측으로는 그분은 벌써 삼칠성을 떠나 이곳으로 오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 일이 벌써 그곳까지 알려졌을까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갑니다. 또한 나리의 소식이 궁금해서라도 이곳에 찾아올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해모수가 머리를 끄덕이고 있을 때, 밖에서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오.”
해모수의 말에 청지기가 들어와 아뢰었다.
“나리, 밖에서 삼칠성 성주님 일행이 나리를 만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하옵니다.”
“오, 이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어서 속히 들라 하시오.”
얼마 있으니, 매우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아름다운 중년부인과 함께, 그녀의 고아함에 걸맞게 순결미와 정숙미를 갖춘 세 명의 꽃다운 여인들이 들어왔다. 삼칠성 성주 묘고미향과 그녀의 양녀 연은소, 해모수의 두 시녀 백선의와 청아련이었다.
“어머니,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어서 이리 와서 앉으십시오.”
해모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자신의 옆자리로 불렀다.
“그렇잖아도 마침 잘 오셨습니다. 지금은 어머니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입니다.”
해모수가 연은소와 두 하녀에게도 눈웃음으로 인사하며 그들을 따스하게 맞이했다.
해모수는 그들에게 그 동안 일어난 상황을 간략히 설명하고 삼칠성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성사와 실패는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해 보겠네.”
삼칠성주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웅심산성의 관리들이 일제히 삼칠성주에게 사의를 표했다.
“소문을 들어, 이곳 상황은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진즉 올라오려 했지만, 남녘에도 할 일이 좀 있어서 처리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동아리하 십대성 성주들을 만나는 일도 매우 시급했고요.”
“아, 그럼 우리 일을 위해 벌써 손을 써 두셨습니까?”
“알다시피 환화궁 시위대장과 막조선 왕세자 맹성은 인척관계입니다. 지난 번 역모에 관한 공판 때는 맹성이 그를 위해 거짓 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맹성이 막조선의 군대를 이끌고 올라온다면, 웅심산성은 버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동아리하 십대성 성주들의 도움을 구하느라 애를 쓰셨군요.”
“그래요. 그들에게 삼칠성과 연합해서 동아리하를 봉쇄해 맹성의 군대가 북으로 건너지 못하도록 막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동쪽의 두만수豆滿水는 방비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게 큰 난제 가운데 하나군요. 누구 좋은 의견 없습니까?”
“그 지역을 관할하는 영고탑 욕살을 만나보는 길 외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을 듯합니다.”
“어머니께서 그 분부터 찾아뵙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 해 보겠지만, 큰 기대는 걸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삼칠성주가 좌중을 둘러보며 덧붙였다.
“그보다는 번조선 왕세자 기비에게 밀사를 파견하는 것이 최급선무입니다.”
“기비는 아마 우리 일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겠죠?”
삼칠성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비 왕세자는, 나이가 젊어도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진조선 땅 도처에 그의 이목이 깔려있다고 보면 됩니다. 어쩌면 벌써 여기 일을 손바닥 보듯 환하게 알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 말을 듣자 해모수는 적이 안도감을 느꼈다. 국난이 생길 경우 서로 돕자고 오열고을성에서 이미 굳게 언약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속히 밀사를 파견해야 하겠습니다.”
문득 해모수는 기비의 누이동생 기진의 짤막한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런 일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남에게 밝힐 수도 없고.’
해모수는 즉석에서 문방사우를 가져오게 해 두 통의 편지를 썼다.
기비에게는, 작금의 상황을 간략히 설명한 후 조정에서 웅심산성으로 군사를 보낼 경우, 번조선의 군대를 출병해서 장당경과 기타 조정에 호응하는 성들을 압박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통은 기진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답장이 늦어져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여기의 상황이 안정되면 만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애매한 내용을 담았다.
편지를 봉인해 사자에게 준 후, 해모수가 말했다.
“외부의 협력에 대한 요청은 일단 이렇게 진행시키기로 하고, 또 한 가지 시급한 것이 우리 군사력을 보강하고 무기를 잘 갖추는 것인데요. 기병대장은 현재의 가용병력과 무기체계가 어떤지 보고해주시오.”
“관병은 이천 명이지만, 스무 살 이상의 전장에 나갈 수 있는 청장년들이 근 이만 명은 될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대를 지금 병가兵加로 임명하니, 바야흐로 농한기라. 그들을 소집해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도록 하시오.”
그를 병가로 임명한다는 것은, 하나의 성읍을 넘어서서 나라의 체제를 갖추겠다는 뜻이었다. 해모수의 말을 듣고 모든 사람의 얼굴이 숙연해졌다.
“나리, 명령대로 준행하겠습니다. 그리고 무기들은 충분히 있지만, 수성守成무기가 좀 부족한 형편입니다.”
“적이 공성퇴攻城槌와 구름사다리, 첨두목려尖頭木驢 등으로 공격해올 경우에 대비해, 포砲를 제작해서 성루에 배치하는 것이 시급한 것 같소. 거기에 필요한 바위덩어리들도 충분히 확보해두어야 하겠소. 그 밖에 철질려鐵蒺藜나 거마창拒馬槍, 야복노夜伏弩 등도 충분한 양을 준비해 두도록 하시오.”
공성퇴는 성문을 들이박아 박살내기 위해 만든 무기이며 구름사다리는 성벽을 타고 넘기 위한 긴사다리, 첨두목려는 성벽에 구멍을 뚫거나 땅굴을 파기 위해 성벽 가까이로 접근하는 일종의 장갑차다.
철질려는, 뾰족한 가시가 네 개 정도 달린 질려 모양의 무기다. 길바닥에 뿌려 인마가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거마창은 오늘날의 검문소나 군부대 앞에 설치된 바리게이트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야복노란, 여러 개의 쇠뇌(활 쏘는 장치)를 하나의 줄에 연결해 인마가 그 줄을 건드릴 경우 화살이 발사되도록 만든 야간전투용 수성무기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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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2. 12. 30.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