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時調 散策 옛고시조 산책 )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맘 같아야
울어 밤길 애닯다.』
이 시조는..
의금부도사 왕방연이 세조의 명으로 단종을 강원도 영월까지 유배지에 호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허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유배지 청령포를 굽어보는 서강 강변 언덕에 앉아,
그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戀君(연군)의 斷腸曲(단장곡)이다.
이 시조에서,
그는 참혹한 권력의 희생양이 되신 단종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과 서러움을 절절이 표현하면서,
동시에 부도덕한 정치권력으로부터 어린 임금을 보호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함을
애통하는 회한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단종을 유배지 청령포까지 압송한 자신의 임무가 그에게는 한없이 원망스러운 일이었다.
이렇듯 단종에 대한 애틋함으로 괴로워하는 그 에게 무자비한 임무가 또 한번 주어진다.
금부도사인 왕방연에게, 단종을 賜死(사사)하라는 사형집행관 임무가 그것이었다.
감히 왕명을 거역할 수 없어, 무거운 발걸음으로 청령포에 도착하였지만,
무슨 일로 왔느냐는 端宗의 下問에 차마 사실대로 아뢰지 못하고 마당에 엎드려 머뭇거리기만 하였다.
이에 수행하였던 羅將이,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으니 속히 집행할 것을 재촉하였으나 그는 계속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홀연히 이 일을 자청하는 자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貢生이였다.
그 자는 활시위에 긴 끈을 이어 단종의 목에 걸고 뒷문에서 잡아당겨 단번에 보란 듯이 단종을 교살했다.
1457년 10월 24일, 魯山君(단종)의 나이 17세때의 일이다.
貢生, 그 자는 평소 청령포에서 심부름과 잡다한 일로 항상 단종을 모시던 자였다.
그런 자가 평소 정성껏 모시던 주군을 솔선하여 자기 손으로 絞殺(교살)한 것이다.
세조 왕에게 賜死 임무를 하명 받은 의금부도사도 사태가 너무도 황망해 감히 집행을 못하던 상황에서,
일개 공생 따위가 주군을 배신하여 감히 자신의 상전을 처형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오늘 날 우리는 어떻게 평가하여야 하는가?
영국의 석학 아놀느 토인비 박사는 (Arnold joseph Toynbee) 그의 명저 ‘역사의 연구’에서,
"고대와 현대사이에서 역사는 철학적 동 시대성을 가지고 반복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가 설파한대로, 단종이 처형되었던 오백여년 전의 시대적 상황이..
오늘날 이 대한민국에서 똑같은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
조선조 초기 피나는 권력투쟁에서 계유정란으로 정권을 탈취한 수양대군 일파는..
그들 정권의 정통성과 영구집권을 위해 반드시 단종을 제거하여만 했다.
그들은 사육신 사건을 빌미로, 단종을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창령포로 유배 보내더니,
급기야는 금성대군의 복위운동을 계기로 이 사건과 전혀 무관한 어린 단종을 처형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오늘날 이 대한민국의 주사파들도 계유정란과 다를 바없는 촛불난동과 언론조작으로 대중을
집단 최면시켜 정권을 탈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