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어떤 직무 유기」를 읽고
고미화
사람마다 고유한 체취가 있듯이 글 속에도 작가의 향취가 배어있다. 목성균 작가의 작품에서는 사람 사는 내음이 난다. 각각의 수필마다 짙게 풍기는 사람다움의 향기가 독자의 가슴에 스며들곤 한다. 그윽하고 아련한, 때로는 아득한 시간 속에서 풍겨오는 삶의 향기가 굳어진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한다. 한국 전통 수필의 보고 『누비처네』에 수록된 「어떤 직무 유기」 또한 진한 휴머니즘의 향기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작가가 강릉 영림서 진부 관리소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강원도는 겨울이면 잦은 대설주의보가 내려지는 곳이다. 눈발이 휘몰아치는 섣달그믐날, 작가는 상사로부터 선배 직원 권주사와 함께 도벌꾼을 붙잡아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산림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직무였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설 명절을 맞아 귀향하는 도망자를 체포하는 야박한 직무가 썩 내키지 않았다.
세밑에 기소중지자를 잡아 오라는 소장의 명령에 권주사는 “눈을 피해서 동네로 내려오는 산짐승은 안 잡는 법인데요.”라고 대꾸했다. 그들은 섣달그믐날 먹잇감을 찾아 나선 포식동물처럼 산골 오두막집에 들어섰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핍박한 도망자의 신세로 초라한 안식처에 들어온 한 가정의 가장을 체포할 의지가 애초부터 없었던 것 아닐까 싶다.
순백의 적설이 온 세상을 평정한 산속의 외딴 오두막집에서 도벌꾼을 마주한 그들은 가치 충돌의 상황에 놓인다. 법과 규정에 따라 직무에 충실할 것인지, 인간으로서의 근원적인 직무에 따를 것인지. 그들은 결국 후자를 선택한다. 비정함 대신 타인의 어려운 사정을 외면하지 않는 인정人情을 선택한 대목에서 눈시울이 붉어진다. ‘직무 유기’라는 죄목이 어쩌면 이렇듯 따뜻하게 다가올 수 있을까.
순순히 따라나서던 도벌꾼은 사립문을 벗어나자마자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아내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모습으로 달아나는 도벌꾼에게 아쉬움과 비애를 느끼는 화자, 그때 우는 아이를 달래는 권주사의 한마디가 가슴 뭉클한 감동이다.
“아가야, 아빠 까까 사러 갔다.”
그 순간 그 가족에게 건넬 수 있는 최선의 위로이자 배려였다. 어린아이에게 아버지의 위치는 세상에서 가장 으뜸의 자리일 것이다. 아이의 마음속에 아버지의 존엄을 지켜주려 했던 사려 깊은 선의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절박한 상황에서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사라진 도벌꾼의 가족을 향한 배려는 아이의 미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훗날 그 가족의 해후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아이에게 아버지가 도망자가 아닌, 과자를 사러 간 사람으로 기억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본다.
궁지에 몰린 한 가족의 안타까운 처지를 헤아리는 장면에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 떠오른다. 장발장의 삶을 바꾼 것은 엄격한 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미리엘 주교가 베푼 따뜻한 연민과 용서였다. 눈보라 속에서 상처 입을 아이의 마음을 다독였던 권주사의 인간애가 그와 닮았다. 대하소설과 한 편의 수필을 나란히 놓는 것이 무리일지 모르지만, 막다른 상황에 놓인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차가운 법 규정의 언어가 닿을 수 없는 소외된 이들을 보듬는 귀한 마음이다.
법의 눈으로 보면 영림서의 두 사법경찰관은 직무를 유기했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직무를 수행한 것이 아닐까 싶다. 법규보다 먼저 인륜을 우선했던 슬기로운 아량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법은 인간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존재한다. 목성균 작가의 수필을 읽으면서 법이 궁극적으로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람답게 사는 이야기가 흐르는 작품에서 아스라한 시간 속에 퇴색한 가치를 발견한다. 어디쯤에서 흘려버렸는지도 모른 채 놓쳤던 덕목을 되찾는다.
작품을 읽으며 어린 시절의 겨울 풍경이 떠올랐다. 밤새 쌓인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던 아침, 은빛으로 반짝이던 들판과 마을 뒷산의 설경은 신비스러울 만큼 아름다웠다. 옹기종기 들어앉은 초가집과 기와집들 사이로 발자국을 내며, 온정을 나누던 어른들의 모습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때때로 아스라한 그 정경을 떠올릴 때면 ‘삶’이란 명사에서 풍기는 향기를 느낀다.
목성균 작가의 수필을 읽으며 잃지 않아야 할 가치를 다시 새겨 본다.
첫댓글 감상에 잠겨 직무를 유기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따뜻한 마음에서 '레미제라블'을 떠올리셨군요.
법 규정 밖의 온기를 그린 두 작품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으신 감상문 잘 읽었습니다.
강선생님, 감사합니다.
바쁘신 분이 답글까지 주셨네요.
목성균의 <어떤 직무유기>를 읽고 토론하는 날 저도 직무유기를 했어요.
무심수필문학회 사무국장의 직무를 감당 못하고 결석했지요.
저의 과로로 인한 몸살 기운을 혜량하시고 묵묵히 역할을 수행하는 회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잔잔한 필체로 쓰신 독후 수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