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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의 지혜 스크랩 남원 양씨유래
mari 추천 0 조회 269 15.11.28 10: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목 없음

 

남원 량씨 (南原 梁氏) ; 들보 량梁

남원 양씨 (南原 梁氏)     
관향 : 전라북도 남원(南原)   
시조 : 양을나 (良乙那)  
주요 증시조 : 양우량 (梁友諒)

남원 양씨(南原 氏)의 시조 양을나(良乙那)는 제주도에 탐라국(耽羅國)을 세웠다고 전한다.
양(梁)씨는 모두가 제주양씨에서 분관되었는데, 양을나의 후손 양탕(良宕)이 광순사(廣巡使)로 신라에 들어오자 559년 진흥왕이 벼슬을 내리고 ‘良’을 ‘梁’으로 고치게 하였다. 이후 757년(경덕왕 16) 양우량(梁友諒)이 신라 왕실에 공을 세워 남원부백(南原府伯)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남원(南原)으로 분적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양씨는 제주와 남원으로 분관되었다, 후에 충주로도 분관되어 3적(三籍)으로 나뉘게 되었다.

제주 양씨 (양을나) : 제주 양씨(濟州 梁氏)  
관향 : 제주도     
시조 : 양을나양을나 (梁乙那)  
주요집성촌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주요인물 : 양팽손,양응정, 양한묵, 양기탁

제주 양씨(濟州 梁氏)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탐라(제주) 사람인 양을나(良乙那]이다.
제주 양씨(濟州 梁氏)의 시조인 양을나(良乙那)는 나주 양씨(羅州 梁氏), 남원 양씨(南原 梁氏), 남해 양씨(南海 梁氏), 충주 양씨(忠州 梁氏) 등의 시조이기도 하다.제주 고씨와 제주 부씨가 같은 유래를 가지고 있다.삼성혈 전설이라 하는데, 탐라(제주의 옛 이름)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세 신인이 솟아났다.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은 수렵을 하여 살았는데,하루는 바다에 이상한 상자가 떠내려와 건져 보니 세 미녀와 오곡의 종자,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세 신인은 세 미녀와 각각 결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니 그로부터 탐라는 개척되었다.

고려사 고기(高麗史 古記)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탐라는 남해 가운데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삼신인이 땅에서 솟아나니 맏이를 양을나, 버금을 고을나, 셋째를 부을나라 하였다. 三人은 거친 들판을 돌아 다니며 사냥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붉은 진흙으로 봉한 나무 상자가 동쪽 바닷가로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고 나가서 열어 보니 그 안에 또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에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한 사람 따라와 있었다.석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3人 및 망아지 송아지와 오곡 씨앗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이에 사자(使者)가 말하기를 "나는 벽랑국 사신입니다. 우리 왕이 이 3왕녀를 낳고 이르되 서해 한가운데 있는 산에 신자(神子) 3人이 강생(降生)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려는데 배필이 없다 하시고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3왕녀를 모시게 하였습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大業)을 이룩하시옵소서"하고 홀연히 구름을 타고 떠나가 버렸다.3人은 나이 차례로 나누어 배필을 삼고 샘물이 달며 땅이 기름진 곳에 나아가서 활을 쏘아 터를 정하니 良乙那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徒), 高乙那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徒), 夫乙那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徒)라 하고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고 또한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로 부유하고 번영하였다.

東國通鑑(동국통감)은 성종15년(1484) 간행되어 長曰良(장왈양)이라 하고 長爲良說(장위양설)이 굳어졌으며,
이후에도 살펴보면 효종4년(1654)에 李元鎭(이원진)牧使(목사)도 三姓穴條(삼성혈조)에 良高夫(양고부)라고 썼고 숙종29년(1703)에 李衡祥(이형상)牧使(목사) 역시 三姓祠 上樑門(삼성사 상량문)에 良高夫(양고부)로 썼다.
이때 사우(祠宇)를 완성하고 삼신인(三神人)의 위패(位牌) 순위를 정함에 있어서 삼성신인 강생(三姓神人 降生)의 사적문헌과 국사를 널리 상고(詳考)한 끝에 양을나(良乙那)를 제1위에 모시고 고을나(高乙那)를 제2위에, 부을나(夫乙那)를 제3위로 결정한 후 제문(祭文)을 지어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었다.
王朝實錄(왕조실록 42~P.163)에 의하면 영조5년(1771)에 高漢俊(고한준)등이 主上(주상)께 奏請(주청)하는 상소문에도 良高夫(양고부)로 썼다. 또한 李丙燾(이병도)著의 韓國史(한국사)에도 良高夫(양고부)요, 金泰能(김태능)著의 濟州島史論攷(제주도사논고)에도 良高夫(양고부)라 했으며 國史大事典(국사대사전)?한국사대사전 등에도 良高夫(양고부)라고 기록하였으며, 玄容駿(현용준)著 「濟州島神記(제주도신기)」에도 良高夫(양고부)라 수록이 되어 있다.

"제주목(濟州牧)" 본주(本州)는 전라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그 주(州)의 고기(古記)에 이르기를,“태초(太初)에는 사람과 물건이 없었는데, 신선[神人] 세 사람이 땅으로부터 솟아나왔다. 지금도 주산(主山) 북쪽 기슭에 ‘모흥(毛興)’이라 하는 구멍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곳이다. 맏을 ‘양을나(良乙那)’, 둘째를 ‘고을나(高乙那)’ 세째를 ‘부을나(夫乙那)’라고 하였다.

양씨(梁氏) 시조(始祖)는 제주도 삼성혈(三姓穴)에서 나와 탐라국을 개국(開國)한 양을나(良乙那) 이다. 중시조(中始祖) 탐라국주 양탕(梁宕)이 신라 내물왕 때 입조하여 선린외교를 하였고, 그 때부터 양(良)성(性)을 양(梁) 성(性)으로 쓰게 되었다. 제주양씨(濟州梁氏)는 한라군 순(洵)이 신라 신문왕때 한림학사에 봉해졌고, 고려 태조 때 성주왕자를 봉작 받은 구미(具美)가 성주공파(星主公派), 고려 명종 때 유격장군이 된 보숭(保崇)이 유격공파(遊擊公派), 각각 기세조(起世祖)이다. 남원양씨(南原梁氏)는 우량(友諒)이 신라 경덕왕 때 남원부백에 봉해졌고, 고려 성종 때 병부랑중 동궁내 시강학사에 오른 능양(能讓)이 병부공파(兵部公派), 고려 원종 때 찬화공신 용성부원군에 책봉(策封)된 주운(朱雲)이 용성군파(龍城君派), 고려 충선왕 때 대방부원군에 봉해진 수정(水精)이 대방군파(帶方君派), 각각 기세조(起世祖)가 된다 충주양씨(忠州梁氏)는 고려 태조 때 삼한통합대장군이 되고 예성부원군으로 훈봉받은 능길(能吉)이 예성군파(蘂城君派) 기세조(起世祖)이다. 이처럼 제주, 남원, 충주로 본관이 나누어졌으나 근원은 한 뿌리에서 내려온 혈족이다. 고려시대 성주공 호(浩), 조선시대 증 영의정 여공(汝恭), 대제학 문양공 성지(誠之), 청백리 일로당 관(灌), 대사간공 사귀(思貴), 학포 공팽손(彭孫), 소쇄처사 산보(山甫), 임진왜란 때 충장공 대박(大樸)장군, 병인양요 때 충장공 헌수(憲洙)장군,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전백(甸伯), 한묵(漢?), 임시정부 때 독립운동가 기탁(起鐸), 세봉(世奉), 기하(基瑕), 문학박사 주동(柱東), 민주통일당총재 일동(一東)이 양씨문중(梁氏門中)을 빛낸 훌륭한 선조이다.

남원(南原)은 전라북도(全羅北道)의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고룡군(古龍郡)인데 뒤에 대방군(帶方郡)으로 고치었으며 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4년(0684)에 소경(小京)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때에 남원(南原)으로 고치어 소경(小京)을 삼았다. 고려(高麗) 태조(太祖)23년(940)에 남원부(南原府)로 하였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다시 대방군(帶方郡)으로 하였으며 뒤에 남원군(南原郡)으로 고치고 공민왕(恭愍王)9년(1360)에 다시 남원부(南原府)로 승격하였으며 이조(李朝) 태종(太宗)13년(1413)에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세조조(世祖朝)에 처음으로 진(鎭)을 설치하였다.
중종(中宗)경오(庚午1510)에 강등하여 현(縣)으로 삼았다가 기묘(己卯 중종14)에 다시 남원부(南原府)로 승격하고 고종(高宗)을미(乙未 고종32)에 남원부(南原府)를 고치어 남원군(南原郡)으로 삼았다.

남원양씨(南原梁氏)의 시조(始祖)는 양을나(良乙那)이니 태초(太初)에 제주도 한라산(漢羅山)의 북록(北麓) 모흥혈(毛興穴)[세칭 삼성혈(三姓穴)이라 함]에서 종지용출(從地湧出)하여 탐라국(耽羅國)을 창업(創業)하시었으니 단군(檀君)과 같은 시대였다.뒤에 양 탕(良宕)이 광순사(廣巡使)로 신라(新羅)에 입조(入朝)하여 중상의관(重賞衣冠)하고 사작 성주왕자(賜爵星主王子)하고 개 양성위량(改良姓爲梁)하였으며 후예(後裔) 양우량(梁友諒)이 신라(新羅) 경덕왕조(景德王朝)에 왕실(王室)에 공훈(功勳)을 세워 남원부백(南原府伯)에 책봉되어 이로부터 남원(南原)으로 분적(分籍)하였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그 이하의 선계(先系)를 상고 할 수 없고 다만 능양(能讓)으로 부터 계대(系代)하는 병부공파(兵部公派)와 주운(朱雲)으로 부터 계대(系代)하는 용성군파(龍城君派)가 있다.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병부공파(兵部公派)에 고려(高麗)때 견(堅)은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라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거쳐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역임하였으며 동국(東國)의 백이 숙제(伯夷叔齊)라고 불리는 우(祐)는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에 올라 가문(家門)을 빛냈다.조선조(朝鮮朝)에서는 실학자(實學者)요 경륜가(經綸家)로서,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은 성지(誠之)가 유명하였으니 그는 세종(世宗23)조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세조조(世祖朝)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아들 찬(瓚)은 무과(武科)에 올라 사부일목(四府一牧)을 거쳐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올랐으며 손자 연(淵)은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 이조판서(兵吏曺判書) 대제학(大提學) 좌찬성(左贊成)에 올라 복상(卜相)에 올랐으나 미급대배(未及大拜)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그치었고 증손 윤신(允信)은 학행(學行)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올라 명종조(明宗朝)의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걸리어 유배되었다가 방면되어 사천현감(泗川縣監)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아들 사원(思遠)과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우고 부자(父子)가 순절(殉절)하였으며 병인양요(丙寅洋擾)때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어영대장(御營大將)과 형공조판서(刑,工曺判書)를 역임한 헌수(憲洙)등이 가문(家門)을 빛냈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의병장(義兵將) 한규(漢奎)가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원 양씨(南原梁氏)는 남한(南韓)에 총 52,230가구, 219,9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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