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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량씨 (南原 梁氏) ; 들보 량梁남원 양씨 (南原 梁氏) 남원 양씨(南原 梁氏)의 시조 양을나(良乙那)는 제주도에 탐라국(耽羅國)을 세웠다고 전한다. 제주 양씨 (양을나) : 제주 양씨(濟州 梁氏)
고려사 고기(高麗史 古記)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탐라는 남해 가운데 있다. 하루는 붉은 진흙으로 봉한 나무 상자가 동쪽 바닷가로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고 나가서 열어 보니 그 안에 또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에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한 사람 따라와 있었다.석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3人 및 망아지 송아지와 오곡 씨앗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이에 사자(使者)가 말하기를 "나는 벽랑국 사신입니다. 우리 왕이 이 3왕녀를 낳고 이르되 서해 한가운데 있는 산에 신자(神子) 3人이 강생(降生)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려는데 배필이 없다 하시고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3왕녀를 모시게 하였습니다. 東國通鑑(동국통감)은 성종15년(1484) 간행되어 長曰良(장왈양)이라 하고 長爲良說(장위양설)이 굳어졌으며, "제주목(濟州牧)" 본주(本州)는 전라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그 주(州)의 고기(古記)에 이르기를,“태초(太初)에는 사람과 물건이 없었는데, 신선[神人] 세 사람이 땅으로부터 솟아나왔다. 지금도 주산(主山) 북쪽 기슭에 ‘모흥(毛興)’이라 하는 구멍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곳이다. 맏을 ‘양을나(良乙那)’, 둘째를 ‘고을나(高乙那)’ 세째를 ‘부을나(夫乙那)’라고 하였다. 양씨(梁氏) 시조(始祖)는 제주도 삼성혈(三姓穴)에서 나와 탐라국을 개국(開國)한 양을나(良乙那) 이다. 중시조(中始祖) 탐라국주 양탕(梁宕)이 신라 내물왕 때 입조하여 선린외교를 하였고, 그 때부터 양(良)성(性)을 양(梁) 성(性)으로 쓰게 되었다. 제주양씨(濟州梁氏)는 한라군 순(洵)이 신라 신문왕때 한림학사에 봉해졌고, 고려 태조 때 성주왕자를 봉작 받은 구미(具美)가 성주공파(星主公派), 고려 명종 때 유격장군이 된 보숭(保崇)이 유격공파(遊擊公派), 각각 기세조(起世祖)이다. 남원양씨(南原梁氏)는 우량(友諒)이 신라 경덕왕 때 남원부백에 봉해졌고, 고려 성종 때 병부랑중 동궁내 시강학사에 오른 능양(能讓)이 병부공파(兵部公派), 고려 원종 때 찬화공신 용성부원군에 책봉(策封)된 주운(朱雲)이 용성군파(龍城君派), 고려 충선왕 때 대방부원군에 봉해진 수정(水精)이 대방군파(帶方君派), 각각 기세조(起世祖)가 된다 충주양씨(忠州梁氏)는 고려 태조 때 삼한통합대장군이 되고 예성부원군으로 훈봉받은 능길(能吉)이 예성군파(蘂城君派) 기세조(起世祖)이다. 이처럼 제주, 남원, 충주로 본관이 나누어졌으나 근원은 한 뿌리에서 내려온 혈족이다. 고려시대 성주공 호(浩), 조선시대 증 영의정 여공(汝恭), 대제학 문양공 성지(誠之), 청백리 일로당 관(灌), 대사간공 사귀(思貴), 학포 공팽손(彭孫), 소쇄처사 산보(山甫), 임진왜란 때 충장공 대박(大樸)장군, 병인양요 때 충장공 헌수(憲洙)장군,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전백(甸伯), 한묵(漢?), 임시정부 때 독립운동가 기탁(起鐸), 세봉(世奉), 기하(基瑕), 문학박사 주동(柱東), 민주통일당총재 일동(一東)이 양씨문중(梁氏門中)을 빛낸 훌륭한 선조이다. 남원(南原)은 전라북도(全羅北道)의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고룡군(古龍郡)인데 뒤에 대방군(帶方郡)으로 고치었으며 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4년(0684)에
소경(小京)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때에 남원(南原)으로 고치어 소경(小京)을 삼았다. 고려(高麗) 태조(太祖)23년(940)에
남원부(南原府)로 하였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다시 대방군(帶方郡)으로 하였으며 뒤에 남원군(南原郡)으로 고치고
공민왕(恭愍王)9년(1360)에 다시 남원부(南原府)로 승격하였으며 이조(李朝) 태종(太宗)13년(1413)에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세조조(世祖朝)에 처음으로 진(鎭)을 설치하였다.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병부공파(兵部公派)에 고려(高麗)때 견(堅)은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라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거쳐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역임하였으며 동국(東國)의 백이 숙제(伯夷叔齊)라고 불리는 우(祐)는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에 올라 가문(家門)을 빛냈다.조선조(朝鮮朝)에서는 실학자(實學者)요 경륜가(經綸家)로서,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은 성지(誠之)가 유명하였으니 그는 세종(世宗23)조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세조조(世祖朝)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아들 찬(瓚)은 무과(武科)에 올라 사부일목(四府一牧)을 거쳐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올랐으며 손자 연(淵)은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 이조판서(兵吏曺判書) 대제학(大提學) 좌찬성(左贊成)에 올라 복상(卜相)에 올랐으나 미급대배(未及大拜)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그치었고 증손 윤신(允信)은 학행(學行)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올라 명종조(明宗朝)의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걸리어 유배되었다가 방면되어 사천현감(泗川縣監)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아들 사원(思遠)과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우고 부자(父子)가 순절(殉절)하였으며 병인양요(丙寅洋擾)때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어영대장(御營大將)과 형공조판서(刑,工曺判書)를 역임한 헌수(憲洙)등이 가문(家門)을 빛냈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의병장(義兵將) 한규(漢奎)가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원 양씨(南原梁氏)는 남한(南韓)에 총 52,230가구, 219,9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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