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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의 삶과 뜻>
유진오의 삶과 사상을 특징짓는 단어가 있다면 ‘엘리트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을 무색케하는 탁월한 지성의 보유자였으며, 40세의 나이에 우리 헌법을 기초하는 법률학의 권위자였으며, 일찍이 문학계에 두각을 나타낸 예술적 지성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사상이 우리 역사에 하나의 등불로 걸리지는 못하였으니, 그의 빼어난 지성에 비하여 아쉬운 점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는 두루 섭렵, 통찰하고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종합적 지성으로서는 뛰어났지만, 현실의 초월하는 영원성을 구하거나 혹은 미래 역사에 빛을 밝히는 데에는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현대사의 큰 마디들에 따라 그의 인생의 궤적을 그린다면, 일제의 불의함에 반감을 품으면서도 결국 일제의 현실에 투항하였고, 4.19를 지지하면서도 다시 5.16에 기대를 걸었으며, 군부통치에 비판적이면서도 다시 유신에 토를 달지 않았고, 제5공화국 신군부의 국정자문위원직도 수락하게 됩니다....
일제 식민지의 모순에 예민하였으며, 마르크시즘의 문제의식에도 정통하였지만, 그는 어떤 민족적 의리 혹은 사회적 이상에 대한 혼신의 염을 품지는 못하였던 것입니다. 해방 이후 그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종합이라는 아름답고 두루 갖춘 헌법관을 제시해 주었으나, 그의 정치적 투신과 학문적 실천에서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독행(篤行)을 보여주지는 못하였습니다. 그의 헌법 이론은 명품 정물화와 같이 헌정사의 아름다운 추억임에는 틀림없으나, 우리 헌정사를 약동케 하는 혼맥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유진오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그의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의 가계(家系)는 구한말 가장 개명된 가문에 속하였으며, 특히 법학에 밝았던 것입니다. 그의 친족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아마 <서유견문(西遊見聞)>으로 유명한 유길준이라고 할 것입니다. 먼저 유길준에 대하여 조금 자세히 보겠습니다. 그 까닭은 유길준이 우리 역사와 헌정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비중이려니와 유진오의 사상적 체질은 어쩌면 유길준의 그것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유길준은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생, 그리고 다시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고, 그의 <서유견문>은 최초의 종합적이고 깊이있는 개화 방략의 저서이자 최초의 국한문 혼용의 저술이었으며, 또 최초로 금서로 지목된 서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말년에 저술한 <조선문전>은 최초의 한글 문법서였습니다. 이처럼 유길준은 우리 개화기 역사의 선두에서 민족 계몽과 문명의 창달을 위하여 헌신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그의 <서유견문>은 단순히 세계 유람기가 아닙니다. 이는 세계의 선진적 신문물, 정치 사회적 제도, 헌법적 원리들을 소개하는 일종의 국민계몽 독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개화기의 ‘국민적 교사’ 후쿠자와 유키치가 <서양사정>을 지어서 일본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나침반이 되고자 한 것과 같은 의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유길준에 대한 후쿠자와의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후쿠자와의 <서양사정>의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게이오 의숙(義塾)에서 공부를 하였고(유길준은 당시 나이가 많아서 의숙에 등록할 수는 없었고, 후쿠자와의 개인지도를 받았습니다), 미국 유학 중에 배려와 지도를 받은 모스 박사도 후쿠자와의 소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임오군란 당시 후쿠자와의 주장과 같이 유진오도 일본군의 조선 파병을 얘기한 것이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유길준은 단순한 친일파가 아닙니다. 그에게 일본은 ‘새로운’ 사대(事大)의 대상이 아니라 ‘문명 개화’의 본(本)이었던 것입니다. 유길준의 개화에 대한 소신은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신문물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데에서 잘 나타납니다. 유길준은 과거 공부 대신 박규수(박지원의 손자로서 개화파의 정신적 지도자였음) 문하에 들어가 김옥균 등과 실학과 개혁의 정신을 익혔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고전적인 한학에 게을리 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이는 탁월한 한문 문장가 변영만이 증언하는 바이니 다른 소론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민씨 정부의 핵심이었던 민영익(민영익도 처음에는 개화파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청의 세력이 강해지고 민씨 일족이 소위 ‘사대당(事大黨)’으로 기울면서 나중에는 김옥균 등 개화파의 공적 제1호가 됩니다)과 친하였던 유길준은 1881년 신사유람단에 포함되어 일본에 건너가게 됩니다. 문명 개화의 실제를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유길준은 앞서 본 대로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게이오 의숙에서 유학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면서 친일 세력이 타격을 입고, 청나라의 위세와 위안 스카이의 전횡으로 조선의 개화 정책이 지지부진하게 되면서 유길준은 귀국을 서두릅니다. 유길준의 귀국에 민영익의 영향이 컸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길준은 청나라가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청을 공개적으로 ‘지나’라고 지칭한 것도 유길준이 처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동준, “유길준”, 개화파 열전, 푸른 역사, 2009, 174쪽)
한편 같은 해에 조정은 서양 열강들 가운데에서는 최초로 미국과 우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우리 개화의 필요, 미국의 희망, 청나라가 미국 등을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는 외교 방침 등과 맞물려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유길준은 정사(正使) 민영익을 보좌하면서 미국에 가게 됩니다. 역시 그의 목적은 유학이었습니다. 그런데 유길준은 미국으로 가는 도중 일본을 경유 시에 개화파인 김옥균과 홍영식 등을 만나 후일 ‘거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다고 합니다.
유길준은 미국에서 모스 박사의 후원 하에 일류 사립고등학교에서 자기보다 10살 이상 더 어린 학생들 속에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하버드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였고, 성적도 발군이었습니다. 그러나 1884년 ‘예상보다 일찍’ 김옥균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더 이상 미국에 체류할 수가 없게 됩니다. 김옥균파로 지목되어 있던 유길준에게도 소환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유길준 자신은 갑신정변에 전혀 관계가 없음을 호소하였고, 또 열강들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해야 하는 조선 정부로서도 유길준의 능력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처벌 대신 ‘가택연금’이라는 형식으로 오히려 보호인물이 됩니다. 당시 조선 총독과 같은 지위에 있었던 청의 위안 스카이와 정부 내의 강경 수구세력의 의구심을 해소시키기 위한 조치였다고 합니다.
그러한 가택연금 상태에서 유길준은 1885년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태에 대응하여 <중립론>을 써서 조선 외교의 방책을 고종에게 제출하였고, 1888년에는 청의 종주권을 주장하는 묄렌도르프와 조선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데니의 논쟁에서 <국권>이라는 글을 통해 데니의 편을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 개화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종합적 정보와 방략을 담은 <서유견문>을 저술합니다. <서유견문>은 1889년 탈고되었지만, 국내에서는 차마 출판하지 못하고, 1895년 일본에 가서 그의 스승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발간하게 됩니다.
한편 그에 앞서 1894년 일본은 동학 농민 반란을 계기로 청의 조선 지배권에 실력으로 맞서기로 하였고, 또 조선의 봉건체제를 강제로 변경시키고자 합니다. 결국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그 정책을 관철시킬 수 있었습니다. 새로 수립된 조선 정부(제1차 및 제2차 김홍집 내각)는 “갑오경장”을 단행하여 조선 500년의 역사에 일대 변혁을 꾀하였습니다. 유길준은 ‘내부대신’으로서 이 개혁의 핵심인물이 됩니다. 그러나 일본의 부상에 위기감을 느낀 러시아가 간섭에 나서고, 민비 등 조정의 수구파도 그에 기울게 되면서, 일본은 야만적인 을미사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조선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과 단발령 등 조선의 근대화 정책을 강행해 갑니다(제4차 김홍집 내각). 그러나 이에 대하여 전국적인 의병봉기와 유생들의 극력 반발이 터져나오게 되었고, 그를 기화로 친러파는 기습적으로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습니다. 러시아 공관에서 고종은 유길준 등 김홍집 내각에 대한 처단을 명합니다.
이에 유길준은 내각 총사퇴를 선언하고 각자 도생을 강구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김홍집은 “나는 먼저 주상을 알현해 주상의 마음을 돌리도록 촉구할 생각이오. 만일 여의치 못하면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수밖에 없소. 나는 총리대신이오. 내가 조선인을 위하여 죽는 것은 천명일 것이오. 다른 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 구출되는 것은 오히려 깨끗하지 못하오”라고 하면서 길을 나섰다가 세종로 한 복판에서 폭도들에게 무참하게 타살되고 말았습니다.
(신동준, “김홍집”, 개화파 열전, 앞의 책, 109쪽)
반면 유길준은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아 폭도들을 피하여 일본으로 무사히 망명을 하게 됩니다. 단발령이 누구의 주도로 결행되었는지 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거기서 유길준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유길준은 일찍이 미국 유학 당시에 스스로 상투를 잘랐으며, 단발령 시행 시에도 왕세자의 상투를 직접 자르면서 강력히 추진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유길준은 민비 시해에 대하여도 적극적인 찬성을 표한 바 있습니다.
“우리 왕비는 폴란드 존3세의 왕비인 메리나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트와네트보다 더 나쁩니다. 우리 국민 사이에서는 국왕은 일개 인형이고 왕비는 그 인형을 갖고 노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녀가 개혁가들을 모두 살해하려고 하자 대원군이 일본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대원군이 일본공사와 협의해 약간의 도움을 청한 것은 큰 실수였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신동준, “유길준”, 앞의 책, 185쪽)
유길준은 조선 개화의 길에서 일본의 대세(大勢)를 인정한 것입니다. 나아가 일본의 ‘선의’까지도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유길준은 을사조약, 정미7조약을 모두 우리가 자초한 것이라고 하였고, “일본은 한국을 부강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한국이 부강해지면 일본은 물러나게 될 것이고, 국권도 회복케 될 것이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바로 이토오 히로부미의 통감정치의 명분이자, ‘감언이설’이었던 것입니다. 유길준은 1909년 이토오가 안중근 의사에 의하여 사살되자, 이완용과 함께 대련(大連)에 가서 조문을 하였고, 이어서 동경에서 거행된 이토오의 국장에도 참례하였습니다....
그러나 유길준을 단순히 부역 친일파로 분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길준은 일진회의 한일합병 청원을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진회 해산을 공식적으로 요청하는 ‘건백서’를 제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합방 후에 일제의 작위 수여도 거부합니다. 그리고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을 지키기 위한 근대시민의 육성에 노력합니다. “흥사단”을 발족하고(이후 안창호가 결성한 흥사단의 원조임), 노동자 농민의 각성을 위한 <노동야학독본>도 저술합니다....
유길준, 그는 구한말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개명된 지식인이었습니다. 동서양에 모두 정통한 명석한 개화론자였습니다. 그의 신문명 건설에의 희구와 소신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대세론’에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대세에 대한 민첩한 판단이 오히려 대의에 대한 엄정한 판단을 흐리게 하였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일본의 ‘선의’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오히려 일본의 위력을 ‘상수(常數)’로서 전제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유진오로 돌아와서 볼 때, 위와 같은 유길준의 장점과 단점은 바로 유진오에게서도 비슷하게 발견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유길준이 유진오의 집안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유길준의 생가가 유진오의 집과 근접하여 있었으며, 또 1938년 유진오의 자전적 단편 “창랑정기”는 노환으로 누워 있는 유길준을 만나기 위하여 부친과 함께 찾아갔던 어렸을 적 기억을 토대로 작품화한 것이라고 얘기되고 있습니다.
유진오가 헌법학자의 길을 가게 된 것도 그런 영향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보았듯이, 유길준의 <서유견문>도 단지 세계유람기가 아니라 서구 정치제도 및 헌정체제에 대한 안내서였던 것임은 물론이고,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도 역시 게이오 의숙에서 공부하고 이후 메이지 법률학교(명치대학의 전신)에서 법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였습니다. 유성준이 귀국하여 쓴 <법학통론>은 우리나라 최초의 법학 입문서로 평가됩니다.
그와 같이 유진오의 부친 유치형도 유길준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떠나 역시 게이오 의숙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유치형은 일본 주오 대학에 진학하여 역시 법학을 전공합니다. 귀국하여서는 법부 산하의 법률기초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또 보성전문학교 등 여러 학교에 출강하여 법학을 가르쳤습니다. 저술활동도 활발히 하여 <헌법>, <해상법>, <물권법 1.2부>, <법학통론> 등을 냈습니다. 유치형의 <헌법>은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 교과서로 평가됩니다.
(이영록, 유진오 : 헌법사상의 형성과 전개, 한국학술정보, 2006년, 27-28쪽)
흥미로운 것은 유치형은 한일 합방 후에는 법률가의 길을 단념하였는데, 그렇다고 항일운동에 나선 것도 아니고, 일제 관료의 길을 간 것도 아니고, 단지 한성은행에 취직하여 평생 유복한 소시민의 삶으로 일관하였다는 점입니다... 이와 같은 부친의 행로에서 이미 유진오의 타협적 지성인의 삶의 윤곽이 보이는 듯도 합니다....
유치형의 장남으로 태어난(1906년) 유진오는 어려서부터 부친으로부터 직접 천자문, 소학, 한글, 산술을 배워 깨우쳤고, 1914년에 당시 최초의 초등학교였던 재동보통학교에 입학합니다. 이후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중고의 전신)에 진학하는데, 1924년에 실시된 ‘제1회 대학 예과 고등학교입학 모의시험’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을 통틀어 전체 수석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경성제국대학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합니다.
그러나 유진오는 단지 입시공부만하는 ‘공부기계’는 아니었습니다. 경성고보 시절부터 신문 현상에 시를 출품하여 수차례 입선되기도 하였고, 졸업반 시절에는 동창들과 함께 시 동인지 ‘십자가’를 방행하는 등 이미 문학도의 기질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유진오는 문학 활동을 지속하는 한편 당시 ‘첨단’ 조류라고 할 수 있었던 마르크시즘에 경도됩니다. 그리하여 ‘경제연구회’라는 마르크시즘 독서회를 조직합니다. 다음 해에 들어온 1년 후배들, 이강국, 최용달, 박문규는 바로 소위 ’성대(城大)그룹’이라고 하여 이후 조선 마르크시즘의 대표자들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강국은 박헌영과 함께 남로당의 핵심 멤버가 되고, 최용달은 북한 인민위원회 사법위원장을 맡아 북한 헌법 기초작업에 참여하게 되고, 박문규는 북한 정부 초대 농업상을 역임합니다. 이렇게 대학 내에서 마르크시즘 서클이 활발하게 운영될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경성제국대학교 일본인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러한 학문의 자유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당시 시대가 메이지 유신 이후 번영과 안정기의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를 구가하던 때였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유진오의 초창기 소설들에는 사회의 계급적 모순이 낳는 인간적 비애를 형상화하는 내용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하여 유진오는 임화, 박영희, 최서해 등 이후 소위 신경향파 문학 혹은 카프(KAPF :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문학의 계열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카프 가입의 권유를 뿌리쳤고, 단지 그에 동조하는 ‘동반자 작가(fellow traveller)’로 남게 됩니다.
유진오는 마르크시즘에 몰입하지는 않았습니다. 유진오는 그의 일기에다 마르크스의 논리를 평하면서, “훌륭한 공식이다. 간단명료하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한 것인지 틀린 것인지 지금의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으니 답답하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유진오, “젊은 날의 자화상”, 구름 위의 만상, 197쪽)
또 다른 날 일기에서는 “나는 20세에 개인을 발견하고, 22세에 사회를 발견하였다. 지나간 날 내가 개인 속으로 몰입하였듯이 앞으로는 사회 속으로 몰입해 볼 생각이다”고 써 놓기도 하였습니다. 유진호의 사상에서 마르크시즘의 사회경제적 영향력은 뚜렷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두 축을 견지하였던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그의 세계인식은 교조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유진오의 전공은 ‘법학’이었습니다. 유진오는 미야케 교수로부터 마르크시즘을 전수받았지만, 동시에 오다카 교수로부터 법철학을 전수받습니다. 그리고 헌법학은 일본 동경대 교수 미노베의 교과서로 배웁니다. 그의 평생의 길인 법철학과 헌법학의 토대는 그렇게 형성된 것입니다.
오다카 토오모(尾高朝雄) 교수는 일제 패망 후 동경제대 법철학 교수가 되어 일본 법철학계의 중추가 되는 인물인데, 그의 법철학은 켈젠의 순수법학과의 대면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직접 오스트리아에 유학하여 켈젠에게 사사받기도 하였지만, 그는 켈젠의 순수법학-민주주의적 상대주의(개방성)에 만족을 얻지 못하고, 이어서 후설의 현상학으로 전향하였다고 얘기됩니다. 그리고 동경제대 시절에는 ‘상징천황제’를 옹호하며 국민주권에 맞서 ‘노모스 주권설’을 제창하기도 하였답니다.
하여튼 오다카의 시작이 켈젠 순수법학이었듯이, 그로부터 배운 유진오를 비롯한 우리 법철학계의 원로들인 이항녕, 황산덕의 법철학적 세계관도 켈젠에서 시작하게 되었던 것인데, 또한 오다카가 켈젠의 순수법학/ 민주주의 철학에 신용을 두지 않게 됨에 따라 우리의 법철학에서도 켈젠의 법철학은 옳게 수용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켈젠의 법철학 가운데 민주주의론을 제외한 순수법학만이 켈젠 법철학의 전부인 양 인식되는 경향이 그 하나고, 다른 하나는 켈젠의 법철학을 ‘악법도 법이다’라고 하는 국가주의적 법실증주의의 원흉으로 오해하는 경향입니다.
이는 켈젠의 입장에서도 애석한 일이자, 우리 현대 법철학의 출발을 위하여도 불행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켈젠의 민주주의 철학, 그 공존의 상대주의 철학, 그리고 그에 기초한 순수법학의 법치주의가 단지, 형식적 법논리 만능주의로 둔갑해 버린 셈이니, 그와 같은 켈젠의 순수법학이란 ‘불구의 법철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유진오 자신에서 그와 같은 폐단이 두드러진 것은 아니지만, 유진오가 서구 리버럴 데모크라시의 법철학을 그 온전한 상으로 배우지 못하였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라고 할 것입니다.
반면에 미노베 다츠키치(美濃部達吉)의 헌법학을 접한 것은 다행이라고 할 것입니다. 미노베 역시 일본 헌법학을 주도하던 동경대 교수였는데, 일찍이 ‘천황 주권설’에 대립하는 ‘천황 기관설’을 주창하여 일본 천황제의 민주주의적이고 법치주의적인 해석을 추구한 헌법학의 대부였던 것입니다. 앞서 본 미야케와 미노베 등의 학자들이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언급한 대로 당시 일본이 소위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였기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내에서 군벌 세력에 맞선 시민계급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후 일본의 헤게모니가 군벌에게 넘어가고 일본은 만주 그리고 중국으로 전선을 넓히면서, 미야케 교수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을 비호한 죄로, 그리고 미노베는 천황을 모욕하고 국체를 흐리게 한 죄로, 모두 대학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유진오의 대학시절에 드리운 가장 큰 그림자는 어쩌면 그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불안정하였다는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주목되는 것은 최우수 학생이었던 유진오는 관리되어 출세할 생각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대단히 반일적이고, 또 투사적인 포부를 품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조선 최고의 지식인으로 일제의 관리로 봉직하는 것은 자존심 상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부분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부친의 행로가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당시 경성지방법원장은 유진오의 탁월성을 인정하여 고등문관시험을 거치지 않고도 판사로 임용하겠다는 제의를 하였지만, 유진오는 오히려 불쾌감을 느끼고는 거절합니다. 대신 졸업 후에 형법 교수 그리고 법철학의 오카다 교수의 연구실에서 조수[현재의 조교]로서 지내게 됩니다. 유진오는 그 조수시절, 역시 다른 교수의 조수로 있던 후배 최용달과 함께 일본 유람을 하기도 하는데, 일본의 쟁쟁한 학자들을 만나고 얘기를 나누고 돌아 온 유진오는 적어도 학문적으로는 경성 ‘지점’의 것이 동경 ‘본점’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유진오, “간도 공산당 사건”, 젊음이 깃칠 때, 111면)
유진오는 그렇게 학부를 마친 후에도 학문을 천착하면서 동시에 마르크시즘에 입각한 사회 공부도 심화해 나갑니다. 경제연구회 멤버였던 이강국, 최용달, 박문규 등과 함께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조직하여 일제 식민지 조선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마르크시즘적 관점에서 규명해 나가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경성제대의 우수한 조교로 있지만, 식민지 백성으로서는 결코 교수가 될 수 없는 그 신분 차별의 벽이 그로 하여금 마르크시즘에 더욱 가까워지게 한 배경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진오와 마르크시즘의 직접적 관계는 거기까지입니다. 1932년 유진오는 송진우의 소개로 마침내 보성전문학교의 전임강사로 강단에 서게 됩니다. 27세의 나이로 당시 공법 분야에서는 유일한 한국인 교수였다고 합니다(이영록, 앞의 책, 47쪽). 당시 소위 ‘사상’의 전력을 가진 학자가 제도권 강단에 서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일인지에 대하여는 유진오의 대표 단편 <김강사와 T교수>에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그 즈음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군국주의의 길로 내달릴 참이었습니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에서의 어떤 정치적 사상적 자유의 여지는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조선사회사정연구소는 불온 단체로 지목되어 유진오는 경찰조사와 가택수색을 받게 됩니다. 이어서 1933년 카프가 강제 해체되는 과정에서 유진오는 다시 수사의 대상에 오르고 시달림을 당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유진오는 마르크시즘적 관점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법학도 경제학도 이론을 만지작거릴 수 없는 세상”이라는 깊은 자조 속에 “창작과 당구와 술”의 세계에 침잠하여 지내게 됩니다.
(이영록, 앞의 책, 50쪽)
그렇게 하여 유진오는 결국 시대의 대세를 수용하는 쪽으로 선회합니다. 이영록 교수는 문학방면에서는 1938-1939년 <화상보>의 연재를 계기로 정치성과 결별하였다고 하고, 현실에서도 1939년 보성전문학교 법과 과장직을 맡으면서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이영록, 앞의 책, 51쪽). 그러나 저는 그 시기를 좀더 빠르게 잡고 싶습니다. 그리고 1938년에 봄에 발표한 ‘자전적’ 소설 <창랑정기>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창랑정기>는 유진오가 일제의 탄압으로 몇 년 동안 침잠을 끝내고 처음 발표한 소설이며, 또 자전적 내용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과 인생의 전개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소설은 그 어릴 적 서강대신(유길준으로 추정됨)이 살던 한강변의 창랑정에 대한 회고로 시작되는데, 그 내용은 그 집안의 ‘명랑 소녀’였던 한 하녀와의 즐거웠던 한 때에 대한 추억담도 곁들이면서, 결국은 ‘쇄국’을 고집하고 아들에게 ‘신학문’을 배우게 하는 것도 마다하는 ‘서강대신’의 가문이 이후 어떻게 쇠락하여 갔는지에 대한 금석지감을 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소설을 특히 흥미롭게 보는 까닭은 첫째로는 작중의 ‘서강대신’으로 추정되는 유길준은 결코 쇄국론자가 아니고 최고의 문명개화론자인데, 어떻게 그렇게 반대로 그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소설의 맨 끝 부분에 나오는 특이한 문장들 때문입니다.
“나른한 추억에 잠겼던 내 정신은 차차로 굳센 현실 앞에 잠깨 온다. 문득 강 건너 모래밭에서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가 들린다. 건너다보니 까맣게 먼 저편에 단엽 쌍발동기 최신식 여객기가 지금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여의도 비행장을 활주 중이다. 보고 있는 동안에 여객기는 땅을 떠나 오십 미터 이백 미터 오백 미터 천 미터 처참한 폭음을 내며 떠올라 갔다. 강을 넘고 산을 넘고 국경을 넘어 단숨에 대륙의 하늘을 무찌르려는 전금속제(全金屬製) 최신식 여객이다.”
(유진오, “창랑정기”, 방민호 편, 꽃을 잃고 나는 쓴다 : 한국의 자전적 소설, 북폴리오, 2004, 158-259쪽)
어째서 유길준을 일개 ‘쇄국 정치인’으로 만들었을까? 그리고 어째서 굳이 ‘굳센 현실’을 언급하고, ‘대륙의 하늘을 무찌르려는’이라는 말을 넣었으며, ‘전금속제’를 강조하였을까 하는 것에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이 소설을 유진오의 일제에 대한 자기변호 혹은 전향 선언이라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유길준은 당대 최고의 개화선각자이자 친일적 개화파였음은 조선 반도 및 일본에 이미 주지의 사실이라 그것을 새삼 얘기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오히려 작중의 그를 ‘대원군 수구파’로 묘사함으로써 그가 개화선각자임을 역설적으로 부각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소설은 결국 구한말 일본의 개화권유를 마다하고 수구쇄국을 하던 조선, 그리고 일본과 같은 신학문을 거부하고 과거에 안주하던 조선인들의 쓸쓸한 영락을 보여주며, 자신은 그와 반대로 친일 개화파의 대표자 유길준의 가문의 후손임을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며, 나아가 그에 더하여 끝에서는 ‘대륙의 하늘을 무찌르려는’ 최신식 금속제의 비행기의 우수성과 위력을 찬양하고 그럼으로써, 일제 식민지배의 ‘강고한 현실’을 자신의 존재 현실로 인정하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친일로 전향한 이광수가 이 소설을 칭찬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광수도 소설의 그와 같은 이면을 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군국주의로 기울고 만주와 중국에까지 일제의 지배권이 끝모르게 확장하여 가자, 유진오는 그러한 현실 너머의 다른 가능성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도 20대 초반 ‘질풍과 노도[Sturm und Drang: 유진오를 이를 ’폭풍과 긴박'으로 번역함]의 심정으로 일제의 구속, 즉 ‘철(鐵)의 천정(天井)’을 뚫어 보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정치제도, 사회제도의 근본적 전복”에 대한 갈망을 가지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보성전문학교에 부임하고, 일제가 만주를 정복한 이후, 심경이 변화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유진오, “폭풍과 긴박”, 구름 위의 만상, 일조각, 1966년 250쪽)
결국 유진오는 1940년 결성된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의 문화위원으로 선임되고, 박영희 김동환 등과 전국 주요도시를 다니며 강연을 합니다. 1942년에는 이광수와 함께 동경에서 개최된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여 대동아공영권의 당위성에 대하여 연설하기도 합니다.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의 간사 직도 맡게 되고, ‘병역은 곧 힘이다’라는 학병권유문도 매일신보게 게재하기도 합니다. 소설 작품도 ‘성전의 진행에 따르는 일본 정신의 앙양, 동양의 자각 내지 대동아신문화의 건설이라는 역사적 대사업’의 일환으로 쓰게 됩니다.
(이영록, 앞의 책, 52-53쪽)
식민지 조선의 최고의 영재, 문학적 감수성까지 지닌 지성인이 이렇게 쉽게 일제에 굴복하는 것, 마르크시즘까지 알고 있던 비판적인 학자가 일제의 대동아공영론에 이렇게 쉽게 동화되는 것, 이는 참으로 서글픈 일이며, 또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여기에 유진오의 본질, 유진오 법철학의 본질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철학은 현실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지 그것을 넘어서는 초월성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며, 그의 인간 존엄에 대한 인식도 결국 현실의 사회적 인정(평판)에 머무는 것이지, 그것을 넘어서는 인격의 영원성에는 나아가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다카 토오모와 같이, 켈젠에게 이어지는 칸트의 초월철학이 옳게 음미되지 못하였고, 후설에서 변형된 (하이데거와 같은) 현상주의에 오히려 경도되었다고나 할까요?
이와 같은 유진오의 한계는 두고두고 그의 인생과 사후 평가에서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유진오가 초대 정부의 법제처장이 되었을 때에도 정부내 친일파의 문제가 크게 제기된 적이 있었고, 현재까지도 유진오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주된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유진오는 이렇게 일제에 영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로부터 멀어집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유진오는 경성제대 공산주의 그룹의 일원, 아니 맏형으로서 ‘정치사회제도의 근본적 전복’을 꿈꾸고 동지들과 단체도 만들고 일경에도 끌려가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동지들이었던 최용달, 이강국 등과 달리 끝내 ‘공산주의에 귀의’하지 못합니다. 이는 물론 일제의 압력에 따른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유진오가 끝내 공산주의에서 활로를 찾지 못하였고, 그 결과 더 이상 다른 혁명의 길을 알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일제라는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입니다.
유진오가 공산주의로부터 뚜렷한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는 글로서 저는 <지이드의 소련여행기>를 들고 싶습니다. 이 앙드레 지드(Andre Gide)의 <소련 방문기>는 유진오에게만이 아니라 지드 자신에 있어서도 공산주의에 대한 양심적 전향 선언이기도 한 것이었으며, 서구 지성사에서 소련 공산주의 재인식에 하나의 기폭제가 된 것입니다.
유진오가 동반자 작가였듯이, 지드 역시 동반자 작가였습니다. 이론도 있기는 하지만, 지드는 공식적으로 공산당에 가입한 공산당원으로서, 자본주의의 천박한 이기주의에 좌절한 지드는 공산주의의 이상에 희망을 걸었던 것입니다. 지드는 일찍이 1931년 그의 저작 <일기>에서 “사랑을 통해서 공산주의에 도달한 사람들만을 형제같이 생각”하고, 소련에 대한 깊은 공명을 표하고 소련 공산 혁명의 성공을 충심으로 기원하였던 것입니다.
(진교훈, “역사와 지성인 : 프랑스의 문호 앙드레 지드의 소련기행”, 북한, 제182호, 1987년 2월, 120쪽)
그러나 지드는 1936년 고리키를 조문하기 위하여 소련을 방문하여 그쪽 작가들의 환대와 안내에 따라 소련을 살펴보고는 공산주의의 놀라운 성취에 감격해 마지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근본적 문제에 대하여 냉정한 판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지드가 보기에 소련의 가장 큰 결함은 “인간성의 무시”, “비판적 정신의 결여”, “획일주의, 비개성화”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사람의 러시아인과 이야기를 하면 러시아인 전체와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유진오, “지이드의 소련 여행기”, 구름 위의 만상, 앞의 책, 373쪽)
이러한 지드의 저술에 대하여 소련의 실망과 분노 그리고 프랑스의 다른 공산주의자들은 당혹해 마지 않았으며, 서구 지성사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평생을 종교적 경건성과 인간적 성실성으로 일관한 앙드레 지드였기에 공산주의의 동조자들에게 끼친 충격은 더욱 컸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점에 있어서 유진오에게도 새로운 각성의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해방을 맞은 후 유진오는 다시 보성전문학교로 복귀하고, 또 경성대학의 법문학부 교수 인선에도 참여하고, 실제로 경성대학에서 헌법, 법철학 등의 시간강의도 맡게 됩니다. 이후 경성대학에서의 법철학은 황산덕에게, 보성전문에서의 행정법은 윤세창에게 물려주고 유진오는 헌법학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정치적으로는 한민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또 이승만 지지조직인 독립촉성국민회와 관련을 맺습니다. 그리고 이 해방정국의 분열과 대립의 국면에서 유진오는 그 친우 최용달과 인생의 길을 달리하게 됩니다. 최용달은 여운형이 추진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실무 핵심 멤버로 활동하고 박헌영의 노선에 따라 건준을 공산당 중심의 인민공화국으로 발전시키는 데에 주력하고 있었고, 유진오는 그에 대하여 걱정의 뜻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최용달과의 마지막 대화를 유진오는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
“나는 나날이 악화되는 우리 나라 정치정세에 그저 우울할 뿐이었다. 그 중에도 해방되던 그날까지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것까지는 좋으나,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을 중심으로 정부를 조직한다는 소문이 떠돌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자 궁금해 하다 못해 어느날 나는 명륜동 김해균씨 집[당시 박헌영 중심의 공산주의자들이 모이던 장소임]으로 가서 최용달에게 면회를 청하였다. ...
인사 끝에
자네들이 정부를 조직한다는 소문이 들리는데 사실인가.
물어보았더니 사실이라는 대답이다.
그러나 그러면 말썽이 나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는 우리나라의 혁명세력에는 여러가지 갈래가 있는데 우선 국내에 있는 세력과 중경 임정세력, 거기다가 연안에 있는 세력, 그리고 미국이나 소련에도 또 무엇이 있지 않겠나. 그렇다면 그 모든 세력이 국내로 모이기를 기다려 원만한 협의후에 임시정부라도 조직해야 할 것 같은데, 총선거는 그 후에 한다 하더라도.
그랬더니 그는 다짜고짜
자네는 진리에 둘도 있고 셋도 있다고 생각하나?
하였다.
진리야 하나밖에 없겠지.
그러면 우리가 그 하나밖에 없는 진리의 노선을 따라 정부를 조직하는데 무슨 말썽이 있나. 국외에 있는 사람들이 돌아온다고 진리가 둘도 되고 셋도 되겠나?
객관적인 진리는 하나밖에 없겠지만, 그 진리를 진리라고 모든 사람이 승복하게 되기까지에는 어려운 과정이 있지 않겠나?
진리 아닌 것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자에게는 몰락의 길이 있을 뿐이지!
단호한 최군의 언명에 나는 더 할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이것이 정치라는 것이로구나」, 「이것이 혁명이라는 것이로구나」 나는 평생에 처음으로 그러한 것들을 실감으로 느꼈다. 동시에 최군과는 인제는 영영 의사를 소통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구나 생각하였다.”
(유진오, “혼란 속의 제헌운동”, 헌법기초회고록, 중판, 일조각, 1981, 11-12쪽)
유진오와 최용달의 이 엇갈림, 그들 앞에 놓인 건널 수 없는 심연은 해방공간에서 우리 헌정사가 직면한 비극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유진오는 남한의 헌법을 기초하고, 최용달은 북한 헌법 기초 작업에 참여하게 되니, 그 두 인생의 엇갈림은 곧 한민족의 역사의 갈림길이었습니다!
최용달의 퉁명스런 대답은 유진오의 친일 경력에 대한 우회적 비난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유진오의 우려는 그 자체로 지당한 것이었습니다. 위의 대화에서 우리는 공산주의의 특징적 면모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공산주의란, 정치를 ‘진리’로서 이해하는 것이며, 그렇게 이해된 정치는 결국 'to be or not to be'의 ‘존재론적 투쟁’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항상 ‘진리’의 편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열망을 나무랄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당파성과 완고함은 곧 인간과 세상의 ‘진실들’을 무시하는 독선과 아집으로 발전하게 되니, 인간 해방을 위한 공산주의가 다시 거대한 질곡을 만들어 낸다고 하겠습니다.
해방 후 유진오의 가장 큰 사명이자, 중요한 기여는 바로 우리 제헌 헌법의 기초입니다. 유진오는 이미 1947년 법전기초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고, 헌법기초분과에서 활동하면서 헌법 초안 작업의 책임을 맡게 됩니다. 물론 우리 제헌 헌법은 유진오의 창조적인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미 조소앙에 의하여 기초된 임시정부의 여러 헌법안 내지 건국강령이 있었고, 또 실제로 제헌 헌법 제정 과정에서도 유진오 안만이 아니라 권승렬 안(유진오는 이 안은 자신이 법전기초위원회에서 작성한 것에서 조금 발전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행정연구회(신익희가 주도하여 구성한 단체입니다) 안 등이 같이 참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조문화의 작업은 간단한 일이 아니며, 그 초안을 직접 작성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유진오의 업적은 인정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제헌 헌법에 대한 유진오의 기본 구상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압축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유진오는 전자에서는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로 후자에서는 기업 자유와 통제경제 및 농지개혁을 핵심과제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유진오의 헌법 구상은 세계의 민주적 헌법의 발전과 당시 우리나라의 시대적 과제에 대한 종합적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 그는 대통령제를 피하고자 하였습니다. 민주주의를 경험해 보지 못한 신생 공화국에서 대통령제란 곧 군주제 혹은 전체주의와 같은 경향으로 흐를 것임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의원내각제가 공개적 토론과 심의가 가능하고 다원성을 보다 잘 보장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민주주의의 이상에 보다 근접한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유진오는 더 나아가 단원제 의회는 다시 의회의 독재를 야기하거나 혹은 경솔과 당파성에 의해 좌우될 것을 우려하여 양원제를 취하고, 상원 격에 해당하는 참의원은 지방의회의 의원들에 의한 선거 그리고 각 직능대표자들로 구성할 것을 예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봉건 상태에서 막 벗어난 신생 공화국에서는 대통령제만이 아니라 의원내각제 또한 쉽지 않는 것입니다. 대통령제의 독재를 피한다고 하지만, 양원제의 의원내각제 역시 소수의 기득권층에 의한 과두주의 귀결될 가능성이 농후한 것입니다. 나아가 그들만의 이전투구적 쟁탈전 속에 오히려 국정은 혼란으로 민생은 도탄으로 빠져들어갈 공산도 큰 것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유진오의 초안은 대폭 수정되어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고 단원제로 귀착되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변경은 이승만 대통령의 권위주의 그리고 민의원(지역구에서 선출된 국회의원)들의 이기심의 발로에 따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보면 역시 대통령 중심제 그리고 단원제가 보다 적합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
다음으로 유진오가 더욱 역점을 둔 것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즉 ‘균등사회의 수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유진오의 초안이 거의 그대로 반영되는 개가를 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진오는 자유시장경제를 택하지 않았습니다. 유진오의 인식은 자유시장경제는 세계 대공황과 공산주의의 대두로서 이미 시한이 다 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유진오는 현대 인민들의 기본권의 중심은 자유권으로부터 사회경제적 기본권으로 넘어갔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이영록, 앞의 책, 216쪽).
이러한 유진오의 문제의식은 당시 시대의 지당한 상황인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소위 소유권 절대에 기초한 자유시장경제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사회경제적 공정성의 토대가 형성된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지, 그렇지 않은 경우에 그것은 단지 권력 기득권층의 탐욕스런 축재와 부정과 협잡의 수탈 그리고 이면에서 선량하고 무력한 수많은 민중들의 빈곤과 고통을 호도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 것입니다. 식민지배에서 갓 해방된 그리고 봉건적 차별 부패에 횡행하고 소수의 기득권층이 사회경제를 농단하는 신생공화국에서 소유권 절대란, 자유시장이란 도저히 사회정의에 부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농지개혁에 대한 문제의식도 당시 우리의 시대적인 과제에 대한 명료한 문제의식이었다고 판단됩니다.
이러한 우리 제헌 헌법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인식은 당시 세계사적으로 특유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고, 그만큼 선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조소앙의 삼균주의의 이념의 수용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 당시 대부분의 의원들의 규범인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국회 심의 과정에서 유진오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부분은 거의 수용되었음은물론이고, 오히려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이익균점권이라는 더욱 강력한 조항이 추가되었습니다), 그것을 구체적인 헌법조문으로 형상화한 것은 유진오의 공이라고 할 것입니다.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우리 헌법의 사회적 시장경제질서의 뿌리는 이처럼 유진오의 헌법안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진오의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사상이 우리 제헌 헌법 그리고 이후 우리 헌정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구체적인 질서와 조항보다도 역시 유진오가 기초한 우리 헌법 전문을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 헌법 전문은 지금 현행 헌법에서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우리 헌법 전문을 읽어보면 세계사적으로 손색이 없는 좋은 문장이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로 시작하는 그 문장은 조소앙과 임시정부의 역사인식에 유래를 두고 있다고 하지만, 유진오가 그것을 아낌없이 반영하여 우리 제헌 헌법의 전문에 활자화하였다는 것은 훌륭한 업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로써 유진오의 약점이랄 수 있는 친일의 문제가 우리 헌법 전문에서는 완전히 극복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유진오 자신도 헌법 전문에 대한 해설에서 우리 민족의 자존과 우리 국민의 각성과 분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연합각국의 승리와 후원의 선물이 아니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나라 국민이 3.1 독립 정신과 같은 위대한 정신을 가지고 종시 일본제국주의와 투쟁한 결과이며 금반(今般) 헌법을 제정하여 수립하고자 하는 정부도 기미년에 3천만의 민의에 의하여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하여 재건하는 것이라는 것을 웅장하게 선언한 것이다. 대저 위대한 과거의 역사와 전통을 잊고 정래에 대하야 희망과 용기를 잃은 국민은 반다시 쇠퇴하은 천하의 공리임으로 우리나라 국민은 목전의 곤경에 낙망하지 말고 우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회고하고 불굴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천여(天與)의 시련을 극복할 일대 용맹심을 진작하여야 할 것이다.”
(유진오, 헌법해의, 세명당, 1949, 15-16쪽)
그러나 유진오는 인민들의 사회경제적 기본권은 중시하였는데 반하여 자유권의 핵심에 대한 이해에서는 미흡한 바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인신구속에 대한 여러 법적 제한들은 단지 형사소송법에서 규율하면 족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가혹한 형벌의 폐지 규정의 도입에는 반대하였습니다. 이는 후에 국회의 심의 가운데 중요한 논란이 되는 부분이었고, 조봉암의 반대가 특히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조봉암은 정치적 사법살인의 희생자가 되지요... 유진오는 국가폭력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에 따른 민중들의 희생 혹은 그에 맞서는 지사들의 희생에 대한 공감에서는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승만 정부에서 1년 법제처장으로 일한 후, 유진오는 이승만 정부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소위 ‘사사오입’ 개헌이라고 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3선 연임 제한 폐지의 개헌에 대하여는 그 의사절차가 무효임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사사오입이라는 논법이 참으로 해괴망칙하고 어처구니없는 억지인 탓도 있었지만, 유진오의 공개적인 비판은 당시 대법원장 김병로의 역시 공개적인 논평과 아울러 이승만 정부의 불법과 참람됨에 대한 통렬할 비판으로 널리 인구에 회자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유진오는 이승만 정부에 의한 직위를 수임하였고, 한일회담 같은 경우 회담 대표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4.19 학생 의거 때에는 고려대 총장으로서 학생들을 잘 인도하여 4.19 혁명의 한 주역이 되기도 하는데, 이후에 5.16이 발발하자, 그것을 다시 ‘혁명’이라고 상찬하면서 ‘재건국민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도 합니다. 5.16을 4.19의 계승으로 생각하였던 것인데, 이는 민주주의에 투철한 헌법학자에게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후에는 다시 박정희 정부에 반대하여 야당 대통령 후보로도 추대되기도 하는데, 박정희 정부가 단행한 또 하나의 쿠데타인 유신에 대하여는 일체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유진오가 그에 찬성하였을 리는 없을 것이지만, 현대 헌정사에서 헌법이 가장 초라했던 시절에 그저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역시 우리 헌법의 권위자에게 어울리지는 않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후 다시 1980년 신군부의 야만적인 군사쿠데타에 의하여 구성된 국정자문위원직은 수락을 하고 마니 그의 정체성은 갈수록 흐릿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유진오의 오락가락의 행보가 그의 탁월적 지적 역량과 법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를 오늘날 위대한 법사상가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물론 그의 신중하고 절충적이며 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태도는 우리 현대 민주적 헌정사에서 하나의 의미있는 자취를 남기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의 지성의 특출함은 우리 지성계 그리고 법학계의 큰 자산이었으며, 그의 극단을 배제하는 조심스러움, 장점들을 두루 취하려는 절충주의는 분명 자유민주주의의 한 덕목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쁘게 얘기하자면, 그는 보통 말하는 ‘회색 빛 지식인’ 혹은 ‘창백한 지식인’의 범주에 속하는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제 그리고 해방 공간에서 유진오는 한국의 독보적인 헌법학자, 법철학자였습니다. 그의 정밀하면서도 해박한 논술들은 지금도 그 영롱한 빛이 퇴색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담백하면서도 명료한 문장이란! 그의 헌법안은 충분히 세련된 것이었으며, 그의 소설도 또한 준수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대한 신념도 달리 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사회경제적 공정성에 대한 가치관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헌 헌법을 기초할 때나 이후 우리 헌정사에 직접 참여할 때, 그의 진심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사상을 우리 역사적 미래에 새기지 못하였고, 그 역정을 우리 헌정사에 상재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민족의 정기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안병찬, 우리 법치주의의 올곧은 성장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한 김병로, 우리 헌정체제의 독창적 지평을 연 조소앙, 법을 떠나 새로운 민족적 심성을 위하여 일가를 이룬 변영만 등 다른 선배 법률가와 비교할 때, 유진오의 삶과 성취는 결국 범상한 수준을 넘지 못한 밋밋한 것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이를, 유길준의 경우와 같이, 그의 명민함이 지극함을 따르지 못하였던 탓으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젊은 시절 유진오는 ‘개인의 자유’로부터 세계관에 대한 시야를 얻었지만, 리버럴리즘의 지극한 초월성에는 미치지 못하였고, 이후 마르크시즘과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신봉하였지만, 그에 따른 불굴의 정의감을 체화하지는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동서(東西) 간의 최고 지식인으로 자부하였지만, 어떤 민족적 지성인으로서의 투명한 지조를 보여주지는 못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