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신찬 목사님과 함께 했던 지난 날을 돌아보면서 - 이용화 형제님의 회고
목사님의 극동 방송국 부임과 인천 모임의 시작
권신찬 목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극동방송국(그 당시 인천에 있던 국제복음방송국)에 근무하던 1965년 여름이었다. 그의 얼굴은 약간 거무스름했고 키는 별로 크지 않았지만 어깨가 딱 벌어진 체구(40대 중반)가 마치 시골 중학교 체육 선생님 같은 인상을 받았다.
목사님이 방송국에 오시기 전, 그의 설교는 녹음 테이프로만 보내져 몇 달 동안 방송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방송 설교자로 초빙되어 정식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의 설교를 방송하기 전에 우리는 그의 간증을 녹음으로 듣게 되었다. 그때 나는 그의 간증을 듣고 매우 좋아했다. 내가 막 구원을 받았을 때라 나와 똑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을 찾았다는 반가움 때문이었다.
권신찬 목사님이 오시자 우리는 목사님이 세낸 집에서 모임을 시작했다. 식구라고 해봐야 목사님 내외분, 나와 내 아내, 그리고 목사님댁에 함께 살게 되었던 김순헌 자매와 그 모친, 그리고 젊은 사람들 두세 명, 종종 방송국의 전도과장이었던 김용범 목사 내외분이 합류하는 등 십여 명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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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동방송국 앞에서 왼쪽 두번째 본인 이용화, 윈첼방송국장(외국인), 권신찬 목사(오른쪽 끝)
주일날 11시쯤 목사님 댁 한옥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집회를 시작하면 더 이상 모일 사람도 없어 기다릴 필요가 없었는데 찬송가만 길게 부르다가 마지못해 설교를 하시곤 했다.
그러나 구원받은 지 얼마 안되는 나에게는 아주 달콤한 말씀들이었다.
목사님의 극동 방송국 부임과 인천 모임의 시작
권신찬 목사님을 가까이 하면서 나는 점점 더 목사님에게 매료되었다. 내가 목사님을 좋아했던 것은 물론 구원받은 형제로서의 교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체 꾸밈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단순한 성격인데다가 그의 신앙 생활 방법도 그의 저서 「종교에서의 해방」 그대로 전혀 형식과 제도에 매이지 않고 자유를 만끽하는 분이었다.
나는 구원받기 전에 현실 교회에 다니면서 그 부패상과 가식적이고 제도적이고 율법적인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나 한국의 함석헌 선생 같은 분들의 독설적인 설교를 좋아한 적이 있었고,
구원받은 이후에는 목사님의 자서전에도 언급한 “형제교회”(Brethren Church)에 잠시 다니면서 구원받았다는 형제들을 만나서 좋아했지만, 그들은 매 주일마다 성찬식을 하면서 긴 기도를 하고,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예배를 드리게 한다든지, 예배당에서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따로 앉힌다든지, 주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원래의 뜻은 잊어 버리고 너무 엄격한 형식에 매어 지내는 것을 보고 의문이 생겼다.
그러나 권신찬 목사님을 만나고 모임을 발견한 후 이 모든 의문들이 완전히 사라졌으며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다른 교회를 찾아 볼 필요가 없는 진짜 주님의 교회를 발견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권신찬 목사님을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희 쉬게 하리라”는 말씀을 그대로 읽는 것 같아 편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차츰 목사님의 방송설교를 들은 청취자들로부터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들과 서신 교환을 하다가 직접 방송국을 방문토록 하여 상담을 하고 결국 구원을 받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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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유병언 형제는 대구에서 안양으로 이사 온 몇몇 식구들을 만나러 오면서 인천에 들르곤 했다. 권목사님은 차츰 방송 설교자로서의 인기가 높아 갔고, 종종 장로교회나 감리교회 등 교파교회로부터 부흥 강사로 초청되기도 했다.
한편 방송국 주최로 방송청취자 수양회를 열어 그동안 서신으로만 연락을 했던 청취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집회를 갖기도 했다.
이 무렵 구원받은 분들이 송창건 형제, 서화남 형제, 윤중석 형제, 그리고 장로교회의 지사교회, 산서교회에서 짐회를 해서 장영수 목사가 구원을 받았고, 이렇게 해서 지방 모임도 생기게 되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생들의 모임인 죠이클럽이라는 기독학생 써클이 있었다. 이들은 주일 오후에 덕수궁 뒤 정동교회 강당을 빌려 모임을 가졌는데, 주로 선교사들을 강사로 초청해서 말씀을 듣고 영어로 집회를 진행하는 영어회화 써클이었다.
그들이 극동방송의 운영주체인 팀 선교부(TEAM, The Evangelical Allience Mission) 선교사들과 연결을 갖다가 권목사님을 알게 되어 자신들의 하기수양회에 권목사님을 초청하게 되었다.
불광동 수양관에서 수양회를 가졌는데 지도급 학생 몇 명과 상당수의 학생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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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그들의 수양회는 권목사님이 주 강사가 되었다. 그들 중에 기성교회에 다니지 않는 학생들을 위하여 서울에서 주일 집회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처음 우리들은 서울역전에 있던 세브란스 병원 강당을 빌려 집회를 하다가 서소문에 있는 어느 중국식당 2층에 집회장소를 마련했다. 이것이 곧 서울교회의 시작이다.
방송국도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지만 권목사님은 인천에 계속 살면서 열차로 통근하셨다 방송전도의 영향력은 점점 더 확대되었다. 극동방송 청취자 수양회라는 간판으로 지방 전도집회도 활발히 펼쳐 나갔다
그때마나 팀 선교부의 선교사들도 합세했다. 우리는 방송국의 경영에 참여하게 되고 유형제는 방송국의 부국장에 취임하여 실질적인 일들을 하게 되었다.
이때 방송국 수양회와 모임의 수양회를 합쳐 대대적인 여름 수양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수양회를 거듭할수록 참석인원과 구원받는 숫자가 배로 늘어났으며 한 번에 천여 명씩 침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곳에는 사단의 방해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청취자 수양회에 참석하여 구원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다른 교단의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평신도가 아닌 장로, 집사 등 교회의 중진들도 있었다. 그들이 구원을 받고 자기들 교회로 돌아가면 절대로 조용하지가 않았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동료 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구원은 “염병처럼” 번져나갔다. 심지어는 자기 교회의 목사에게 “목사님은 구원을 받으셨습니까?”라고 묻기도 해서 교회가 시끄러워지는 등 곳곳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드디어 지방의 몇몇 장로교회에서 자기들 교단 본부로 “극동방송이 어떤 곳이며, 권신찬 목사가 어떤 사람이기에 방송국 수양회에 갔다 오기만 하면 구원받았다고 하여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가, 대책을 세워달라”는 진정을 제출했다.
장로교회의 본부는 정식으로 극동방송 국장에게 권신찬 목사의 신앙노선이 이단이 아닌가 하는 질의를 해왔다. 방송국장은 권목사의 신앙노선은 이단이 아니며 팀 선교부의 신앙신조와 일치한다는 답변을 해주었다. 장로교단은, 그렇다면 앞으로 장로교회에서는 극동방송 청취 거부운동은 물론 팀 선교부가 운영하는 ‘생명의 말씀사’에서 출판한 모든 서적에 대하여 불매운동을 펼치겠다고 위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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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동 수양회에서 열린 청취자 수양회 도중 1970년대 초
팀 선교부라는 것은 한국에서 어떤 교파 교회를 설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기독교 관련 사업체들을 운영하면서 선교활동을 하는 단체이다.
그 당시 팀 선교부가 운영하던 사업체들은 극동방송국을 비롯해서 불광동의 기독교 수양관, 기독교 서적 출판사인 ‘생명의 말씀사’, 강릉에 있던 관동대학, 후에 문을 닫았지만 부산의 축복산 고아원 등 모두 상당히 알려져 있던 사업체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교파 교단들의 지지기반이 없이는 활동이 불가능했다. 한국의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회에서 이러한 위협이 가해오자 선교사들은 무척 당황해 했다. 그들 중 특히 우리의 활동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던 선교사들은 이 기회에 우리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선교사들은 권목사님과 유부국장에게 외부 전도를 중단하고 방송에서도 일체 기성교단의 정서에 반하는 메시지를 삼가 줄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선교사들과의 대립이 첨예화되어 있을 때에 내가 독일에서 일년 동안의 방송언론 연구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나는 독일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한국에서 이처럼 문제가 심각해져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독일에 있는 동안 가끔 체류 보고 편지만 했을 뿐 전화 통화도 별로 하지 않았으며, 한국에서의 어려운 사정을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극동방송국 창립 기념일 (뒤에서 둘째줄 가운데가 권신찬 목사님)
1974년 6월 내가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는 권목사님과 유부국장 그리고 몇몇 형제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또다른 한쪽에는 선교사들이 3,4명이 모여 있어 나에게 손짓했다. 나는 그들에게 가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도 분위기가 좀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들이 왜 저만치 따로 서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 형제들과 선교사들은 이미 대립적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선교사들과는 그날로 작별을 한 셈이 되었다. 당연히 나는 우리 형제들과 한 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 왔다. 한낮인데도 방송국으로 향하지 않고 불광동 권목사님 댁으로 갔다.
극동방송국 시절 불광동 수양회관 앞 차 안에서 유부국장은 여러 가지 선교사들과의 문제를 내게 말해 주었으나 나는 뭐가 뭔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불광동에 도착한 후 그동안의 교계신문 기사내용과 형제들의 설명을 듣고야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그날 선교사들이 공항에 대거 출동(?)하여 나를 맞아 준 것은 내가 혹시나 선교사들 편이 되어 문제 수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도착하자 형제들과 함께 사라졌으니 선교사들은 더 이상 나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이튿날 나는 방송국에 출근을 했다. 묘한 분위기라 선교사들이나 그밖의 직원들과 제대로 귀국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방송국 사무실 게시판에는 종이 쪽지 한 장이 나붙었다. 형제들 11명의 해고 발령장이었다. 권목사님은 물론이고 독일에서 방금 돌아온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부국장은 취직되어 입사한 것이 아니라 경영자로 들어왔던 것이기 때문에 해고발령에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자동적으로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권목사님과 윈첼 국장을 각각 쌍방 대표로 해서 맺었던 방송국 공동운영 계약은 이렇게 일방적으로 파기된 것이다.
그후 몇 달 동안 법정투쟁이 계속되어 해고무효 가처분 결정, 이사진 확보에 있어서 대법원까지의 승소 판결 등 통쾌한 결과들도 있었지만, 사실상 방송을 이용한 복음전도는 그날로 끝난 셈이었다.
하나님은 만 10년간 라디오 방송이라는 매스미디어를 통해 이땅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도록 허락해 주셨고 짧은 기간 안에 이처럼 엄청난 복음의 역사를 일으켜 주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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