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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음반사 철옹성을 ‘변방의 음악’이 최초로 깼다
▲ 지난 10월 4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강남스타일’을 열창하는 싸이와 열광하는 팬들. photo AP·뉴시스
‘한국 대중음악 올해의 인물’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올해 싸이를 적확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세계’로 바꿔야 한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트렌드의 최전선에서 한 발짝 밀려나 있던 싸이는 ‘강남스타일’로 한국 음악의 역사를 바꿨다. 팝의 역사 또한 바꿨다. 19세기 후반 토머스 에디슨이 축음기와 레코딩 기술을 발명하며 탄생한 대중음악산업의 패러다임 역시 ‘강남스타일’이 바꿨다.
지난 7월 15일 SBS인기가요를 통해 ‘강남스타일’을 처음 선보였을 때만 해도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본인도 당연히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화가 시작되는 데는 불과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지난 7월 중순 ‘강남스타일’의 뮤직비디오가 유튜브에 올라왔을 때는 싸이가 데뷔하던 2000년대 초반의 저급한 키치(kitsch)적 정서를 전면에 내세운 영상에 힘입어 국내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이 뮤직비디오를 ‘2NE1’ 산다라박의 어느 해외 팬이 자신의 트윗에 링크하면서 해외 네티즌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 흐름이 이어지면서 결국 음악계 거물들의 눈에 들어갔다. 7월 말에 저스틴 비버를 발굴한 스쿠터 브라운을 시작으로, 8월 1일에는 힙합가수 티-페인이 ‘Oppa GANGNAM style!’이라는 언급을 남겼다.(이 트윗은 7300회 이상 리트윗되었다.) 영국 가수 로비 윌리엄스 역시 자신의 블로그에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를 링크했다. 결국 세계 각국에서 ‘강남스타일’을 패러디하기 시작했다. 9월 중순 ‘강남스타일’은 드디어 아이튠즈 월드와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미국, 호주, 아르헨티나, 브라질, 캐나다, 벨기에, 체코, 덴마크, 핀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파라과이, 페루, 필리핀,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홍콩, 말레이시아, 폴란드, 싱가포르, 대만, 태국. ‘강남스타일’이 아이튠즈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던 나라들이다. 말 그대로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노래가 된 셈이다.
유튜브 조회 수 연내 10억건 돌파 예상
물론 그게 끝이 아니었다. 미국에 정식으로 앨범 발매도 안된 상황에서 ‘강남스타일’은 9월 22일자 빌보드 핫100에 64위로 데뷔했다. 다음 주 11위를 거쳐 ‘강남스타일’은 3주 만에 빌보드 2위에 랭크됐다. 그때부터 빌보드 핫100이 발표되는 매주 수요일 밤, 한국의 음악기자들은 밤새 선거방송을 지켜보듯 ‘빌보드닷컴’을 체크해야 했다. 결국 1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10월에는 요즘 인기있는 철학가 슬라보예 지젝이 자신의 강의를 통해 싸이를 비틀스 이래 최대 인기현상이라 치켜세웠다. 12월 4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12년 톱10 벼락스타’ 중 1위로 선정된 데 이어 ‘올해의 인물’ 후보에는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4위에 올라와 있다.
12월 8일에는 ‘크리스마스 인 워싱턴 2012’ 공연에서 클로징 공연을 맡아 오바마 미국 대통령 앞에서 말춤을 췄다. 또한 ‘강남스타일’은 유튜브 역사상 최다 조회 수의 뮤직비디오로 등극했다.
‘강남스타일’은 유튜브 공개 149일 만인 지난 12월 7일 조회수 9억건을 돌파했고 연내 10억건 돌파를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열거한 사실들만으로도 싸이를 ‘올해의 인물’로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강남스타일’의 인기는 어디에 기인한 것이었을까. ‘강남스타일’ 신드롬을 견인한 요인의
첫째는 ‘재미’다. 아이돌의 늘씬한 미모와는 거리가 먼, 제법 덩치 큰 동양남자가 온몸을 흔들며 요란한 춤을 춘다. 여기엔 멋있어 보이려는 가식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조폭과 함께 있는 사우나, 인천 지하철, 황량한 송도국제도시, 지하주차장 등이 이 춤의 배경이다. 음악 역시 단순한 루프(loop·일정한 리듬 패턴)에 인상적인 후크(hook·후렴구)의 반복이다. 트렌드를 선도하는 음악들의 뮤직비디오와는 180도 떨어져 있다. 그렇다고 영미권 아티스트들의 그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상미나 뮤직비디오 아트와도 거리가 멀다.
즉 주류 감성에서 동떨어진 B급 문화 코드를 ‘강남스타일’은 듬뿍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감성은 인터넷에서 종종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2005년 집 뒷마당에서 밴드 멤버들끼리 재미있는 춤을 추는 뮤직비디오로 화제가 됐던 미국 밴드 ‘OK 고(GO)’는 이런 발상이 유튜브 시대에 만만치 않은 무기가 될 것임을 예고했던 첫 사례다. 그 이전에 DC인사이드에서 ‘뚫?송’이라는 이름으로 열풍을 몰고 왔던 인도 가수 달러 멘디(Daler Singh Mehndi)의 노래 ‘투낙투낙툰(tunak tunak tun)’은 재미라는 이름 아래서 음악의 언어장벽이 쉽게 뚫릴 수 있음을 보여준 전조다. 즉 재미를 찾아 웹을 헤매다니고 이러한 요소들을 모아 커뮤니티까지 만드는 네티즌들에게 유머 코드를 갖춘 뮤직비디오의 힘은 국적 따위를 무력화한다는 것을 ‘강남스타일’이 다시 한 번 입증한 셈이다.
‘쓸데없는 고퀄리티’로 통했다
이 유머를 완성하는 것은 ‘쓸데없는 고(高)퀄리티’라 통칭되는 현재 하위 문화의 흐름이다. 미국의 인기 토크쇼 프로그램인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aturday Night Live)’의 고정 출연진들로 구성된 론리 아일랜드(The Lonely Island)의 노래들이 그 시작일 것이다. 저스틴 팀버레이크, 마이클 볼튼, 내털리 포트먼 등 톱스타들이 기꺼이 망가져가며 피처링한 그들의 음악은 멜로디나 편곡 등 음악적 완성도 측면에서 여느 기성음악에 꿀리지 않는다. 다만 가사와 뮤직비디오가 19금 개그로 점철되며 호응도를 높인다. 한국에서도 유세윤과 뮤지가 뭉친 힙합듀오 UV가 이런 ‘쓸데없는 고퀄리티’를 통한 음악과 웃음의 결합을 보여준 바 있다. 싸이 역시 마찬가지다. 요컨대 B급 문화로 시각화한 A급 트렌디 뮤직, 이것이 ‘강남스타일’ 신드롬의 원인이다. 이러한 요소들의 핵심적 키워드는 바로 싸이 본인의 입에서 나왔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함께 출연한 토크쇼에서 싸이는 ‘강남스타일’의 핵심을 이렇게 말했다.
“Dress Classy, Dance Cheesy.” 의역하자면 ‘옷은 멋지게 입되, 춤은 싼티 나게 추라’는 뜻이다. 부조화에서 나오는 아이러니. ‘강남스타일’의 재미는 여기서 나왔다.
또 하나의 인기 요인은 직관성이다. 다른 K팝(K-pop·Korean Pop)의 경우 예능으로 치자면 보는 이들을 방청객에 머물게 한다. 그들의 뮤직비디오를 보며 따라 춤을 추기 위해서는 분석과 훈련이 필요하다.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는 소리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군무를 보며 즐거워하는 것 이상의 행위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강남스타일’의 안무는 그런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똑같이 재현할 수는 없더라도, 뮤직비디오를 보는 중간에라도 그와 유사한 동작을 능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보고 싶은 욕망과 따라하고 싶은 욕망, 숙련과 직관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아이폰 이전의 스마트폰과 아이폰의 차이만큼이나. ‘강남스타일’ 이전 올해의 대세였던 힙합 듀오 LMFAO의 셔플댄스가 그토록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요인 역시 직관성에 있었다. 기존의 K팝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면 ‘강남스타일’은 그 구분을 허물었다. 소비자가 곧 또 다른 생산자가 됐다. 무수한 패러디 영상들이 증명하지 않나.
이러한 요인들은 기존의 한류 아이돌과 싸이를 구분짓는다. 아이돌을 중심으로 하는 K팝의 성공은 아시아에서 출발해 서양으로 확산됐다. 그 확산의 중심에는 일본 시장이 있다. ‘망가’ ‘아니메’라는 일본식 조어가 유럽에서 그대로 쓰일 만큼 유럽에서 일본 대중문화의 수요는 탄탄하다. 인기 만화 ‘나루토’가 몇 년째 프랑스 만화 차트에서 1위를 내놓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걸그룹들이 일본 시장에서 약진하기 시작했다. ‘AKB48’ ‘퍼퓸’ 정도를 제외하고 ‘대세’에 오를 만한 걸그룹을 내놓지 못한 일본의 상황에서 한국 걸그룹들이 수요의 공백을 메웠다. 일본 현지시장을 탐색하는 서구의 일본 대중문화 팬들이 이를 포착했다. 그들은 부지런히 유튜브를 탐색하고 한국 아이돌의 열성팬이 되었다. K팝은 이렇게 세계로 알려졌다.
뉴미디어가 문화 통념을 깨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그들의 수요가 ‘일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일본 대중문화 매니아들을 기초로 한 서브(sub)시장이지,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한국 아이돌의 이름이나 노래가 폭넓게 알려지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들의 팬이 아닌 일반인은 한국 아이돌에 대해 사실상 전혀 모른다는 것, 사용자가 들은 음악 로그가 남는 해외 음악 서비스에서 K팝을 청취한 사용자들이 일본 애니메이션 주제곡이나 다른 일본 가수들의 음악을 함께 듣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게 그 근거다. 물론 미국의 유력 음악 저널인 ‘스핀(SPINN)’에서 지난해 현아의 ‘버블팝’을 올해의 노래 리스트에 올려놓는 등 예외는 있을지언정, 인기의 바로미터인 차트에서의 성과 등 문화적 영향력을 과시한 경우는 없었다. 강력한 변방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주류의 일부는 아니었다. 하지만 ‘강남스타일’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갖추고 바로 미국을 공략했다. 세계 팝시장의 전진기지인 미국에서 인기 몰이를 시작, 전 세계로 퍼진 경우다. 싸이와 다른 한류 아이돌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는 이유다.
한류의 연장선상이 아니라면, 싸이의 올해 활약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답은 음악산업 헤게모니의 변화에 있다. 대중음악산업 100여년의 역사를 거치는 동안 시장은 몇 개 대형 음반사인 메이저 레이블이 팝시장을 지배하는 체제로 굳어졌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디지털음악이 보편화하면서 이 체제가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메이저 레이블이 아닌 인디 레이블(독립 음반사) 유통망을 통해 빌보드 정상을 차지하는 앨범이 종종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자국 시장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메이저 음반사와 계약한 뒤에야 본격적인 성공 가도를 달리는 식이었다. 결국 인터넷 시대의 월드 와이드 스타도 기존 메이저 음반사의 유통망이나 홍보력 없이는 큰 성공을 맛보기 어려웠다는 얘기다.
그런 상황에서 ‘강남스타일’은 그 한계를 돌파한 첫 사례다. 팝시장을 좌지우지하는 메이저 음반사들은 이 파상공세에 어떤 식으로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음악산업의 주도권을 장악해온 서구 메이저 음반사의 배급과 홍보력이 처음으로 인터넷 힘에 밀린 것이다. ‘강남스타일’과 빌보드 차트 1위 자리를 놓고 힘겨루기를 한 마룬 파이브(Maroon5)의 ‘원 모어 나이트(One More Night)’가 에어플레이(라디오 방송횟수)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반면, ‘강남스타일’은 음원 다운로드에서 강세를 보인 사실은 이 변화의 상징이다. ‘원 모어 나이트’는 올드 미디어, ‘강남스타일’은 뉴 미디어를 통해 지지를 얻은 셈이다. 언어 장벽, 인종 구성 같은 사회·문화적 요인 때문에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비영어권 음악의 세계 장악이 더는 무모한 도전이 아님을 ‘강남스타일’은 증명해냈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기술 발전이 문화적 통념을 깨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 지난 11월 28일 싸이가 태국 방콕에서 팬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photo AP·뉴시스
‘강남스타일’은 K팝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강남스타일’은 K팝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대중음악 시스템에서는 큰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서구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최다 앨범 판매량을 기록한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아티스트라는 사실이다. 비틀스, 마이클 잭슨, 이글스, 핑크 플로이드, 메탈리카…. 그들은 트렌드를 좇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음악으로 트렌드를 만들었다. 기획사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아이돌이 아니었다. 하여, 활동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이는 인형에 다름 아닌 아이돌이 보여줄 수 없는 ‘태도’로 이어졌고 캐릭터로 발전했다.
싸이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강남스타일’ 작곡자인 유건형이라는 협력자가 있긴 하지만 싸이는 음악 창작과 이미지 메이킹에 있어서 강력한 주도권을 갖고 있는 가수다. 그가 10년간 국내 가요계에서 활동했던 방식 역시 트렌드와 상관없는 ‘싸이스타일’이었다. 대마초, 병역 문제 등 안 좋은 이슈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장당하지 않을 수 있던 이유도 싸이가 대중들의 요구에 맞춰 움직이는 ‘연예인’이 아닌, 자신의 캐릭터와 능력으로 대중을 끌어모으는 ‘아티스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아이돌로 살아온 이들은 가수 비처럼 토크쇼에서 ‘어버버’하고, 원더걸스처럼 뻔한 말만 하며 미국 대중들에게 아무런 매력도 전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싸이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에게 농담을 던지고, 시상식에서 당당하게 한국어로 수상소감을 말했다. 어떤 한국, 아니 동양 가수도 보여주지 못했던 ‘태도’를 미국 대중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대형 기획사가 시장을 주도하고, 아이돌이 방송을 휩쓰는 한국 대중음악계의 현실에서 ‘제2의 싸이’가 공염불에 가까운 이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열쇠는 결국 다양성이다. 아이돌과 아티스트가 공존하고, 아티스트들이 충분히 대중들과 소통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캐릭터화할 수 있는 건전한 시장이야말로 싸이라는 한 벼락스타가 아닌, 한국 대중음악의 세계화를 논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
1950년대까지 미국 음악계에는 백인 스타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흑인들이, 히스패닉들이 각각 하나씩의 큰 축을 꿰어찼다. 한 명의 스타, 한 곡의 히트에 의존한 게 아니었다. 흑인 아니면, 히스패닉 아니면 들려줄 수 없는 그들만의 음악 신(scene)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다양한 음악들은 그에 걸맞은 분점을 이루고 있는가? ‘제2의 싸이’를 논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다.
12년 전 싸이는
PD가 본 싸이
뚱뚱하고 촌스럽고 음악은 난해하지만 노는 자리에서만큼은 말발과 막춤으로 넋을 쏙 빼놓는 물건
▲ 2001년 3월, 11년 전 싸이의 모습.
예능PD로서 싸이를 처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꽤 자세히 옆에서 지켜봤다. 항상 신기하고 궁금했다.
끝났다 싶었는데 다시, 또 다시 일어서는 그의 질긴 생명력이 신기했고 욕하면서도 동시에 열광하는 대중들의 심리가 궁금했다.
내겐 싸이 하면 떠오르는 세 가지 장면이 있다.
2000년의 일이다. 알고 지내던 매니저를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접했다. 미국에서 음악 공부하고 온 괴짜가 있다고 들었다. 생김새는 뚱뚱하고 촌스럽고(그때에 비하면 지금 그의 외모는 용 됐다) 음악은 난해하지만 노는 자리에서만큼은 말발과 막춤으로 분위기를 휘어잡고 모든 이의 넋을 쏙 빼놓는 물건이라고 들었다.
이름은 싸이(psy)란다. 이름 한번 싸이코(psycho)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 그 매니저가 싸이 음반을 들고 왔다. ‘새’라는 타이틀곡을 처음 들었을 땐 실망스러웠다. 우선 욕인지 랩인지 불량스러워보이는 가사가 거슬렸다.
‘당신 갖긴 싫고 남 주긴 아까운 거야 이 십(10)원짜리야’.
가사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곡 분위기도 퇴폐적이었다. ‘이름대로 엽기가수구나’라고 생각했다. 결국 MBC에서는 출연 잠정보류 결정이 내려졌다.
홍보용으로 뿌린 싸이 CD들이 회의실 구석에 수북이 쌓였다. PD도 작가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
뻔뻔한 건지 겁을 잃어버린 건지
그의 모습을 처음 본 것은 KBS ‘가요톱 10’에서였다. 기억하기론 그 방송이 싸이의 공중파 데뷔 무대였다.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이정현, god 사이에 끼어서 그가 등장하자 스튜디오 분위기가 순간 싸해졌다.
10대 소녀팬들은 ‘저 아저씨 누구야?’ 하는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원래 그렇게 뻔뻔한 건지 아니면 겁을 잃어버린 건지 관객의 냉대에 아랑곳 않고 자기 흥을 스스로 자가발전 시키면서 마구잡이 퍼포먼스를 꿋꿋이 보여주고 있었다. 의상이나 분장, 그리고 안무도 저렴한 완전 강북스타일이었다. 시청하는 나도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그때 방송사고가 터졌다.
생방송 중 갑자기 마이크가 고장났다. 반주 음악은 나오는데 가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음악프로에서 가장 치명적인 음향 사고가 발생한 셈. 하지만 이 겁 없는 신인은 마이크를 몇 번 손바닥으로 툭툭 쳐 보더니 소용이 없자 아예 노래를 포기하고 음악에 맞춰 막춤을 추는 게 아닌가.
올백으로 머리를 넘긴 살찐 가루지기 같은 그가 몸부림치며 막무가내 댄스를 선보이자 냉랭하기만 하던 방청객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시청자들은 방송사고가 나면 신나한다. 덕분에 이 생짜배기 신인은 관객과 하나되는 최고의 무대를 선보였다. 그리고 싸이가 터졌다!
사무실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싸이의 CD가 순식간에 모두 사라진 걸 보고 그의 인기를 실감했다. 이제 예능PD들은 그를 섭외하러 줄을 섰다. 데뷔무대에서 보여준 두둑한 배짱의 그 모습이 싸이 하면 떠오르는 첫 장면이다.
싸이에 대한 두 번째 이미지는 2002년 월드컵 기간 중 광화문 앞에서 벌어진 응원전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무대 위를 휘젓던 그의 모습이다. 대마초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이었다. 아직은 자숙할 때가 아닌가 갸우뚱했지만 그는 원래 그런 거 따위엔 신경쓰지 않는 편한 캐릭터였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이미 잊은 듯했고 대마초 좀 폈으면 어떠냐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국민 응원단장이 되어 수만 명의 붉은악마를 선동하며 신명나는 굿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태극전사들의 맹활약에 힘입어 싸이의 과오도 모두 용서되는 분위기가 잡혔다. 얼마 후 싸이는 이때의 응원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 ‘챔피언’이란 곡을 발표해 재기에 성공했다.
‘맞아도 싸군 죽어도 싸군’
▲ 11월 3일자 미국 ‘빌보드’ 잡지 표지
그리고 10년의 시간이 더 흘렀다. 그동안문제아 싸이는 또 한 번 블록버스터급 사고를 제대로 쳤다. 방위산업체에서 35개월 동안 대체복무를 했는데 이게 부실근무로 밝혀지면서 현역 20개월로 다시 입대를 하게 된 것. 5집 앨범에 실린 ‘싸군’의 가사엔 자신의 파란만장 가수생활이 일목요연하게 연대표처럼 정리돼 있다.
‘대마 1년 자숙 1년/대체복무 3년 재판 1년/현역 2년 합이 8년/
데뷔 10년에 활동 2년/대마 떼다 빵 가도 싸군/훈련소만 두 번 가도 싸군/
맞아도 싸군 죽어도 싸군’.
이젠 그의 시대는 진짜 끝났다 싶었다. 싸이를 기억하는 세 번째 장면은 올해 여름에 있었던 싸이의 ‘THE 흠뻑쇼’이다. 마침 MBC가 이 콘서트의 단독 중계를 맡았기에 그의 공연실황을 볼 수 있었다. 아직 ‘강남스타일’이 세계적 주목을 받기 전이었다. 잠실보조경기장을 가득 메운 3만명과 함께 물을 뿌려가며 광란의 ‘떼창’을 부르는 싸이의 모습에 닭살이 돋으면서 12년 전 ‘가요톱 10’에서의 데뷔무대가 떠올랐다.
세월은 그를 유부남으로 만들고 세상은 그를 순치시키려 했지만 싸이는 여전히 남의 시선엔 신경 끄고 제 멋대로 살아가는 꼴통이었다.
그런데 누가 꿈이라도 꿨을까? 이 꼴통근성이 세계에서 통했다. 그것도 IT 기반이 잘 갖춰진 선진국을 중심으로. 그냥 한국의 아노미적 혼돈상태와 맞아떨어지면서 운 좋게 얻은 인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싸이의 마이너리즘은 이미 세계적 트렌드였다. 변두리 정서가 이제 주류에서 통한다. B급 문화가 A급을 능가한다.
메이저 무대의 뻔한 흥행공식은 이제 식상하다. 대중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경험을 갈구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콘텐츠에 열광한다. 여기에 글로벌 경제위기로 살림살이는 팍팍해졌고 스트레스받는 일은 늘었다. 돌파구가 필요하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고 정신적으로나마 일탈하고 싶다. 또한 SNS라는 신통방통한 놀잇감이 생겼다.
이제 더 이상 일방통행식 정보 전달은 없다. 내가 관심 있는 것만 찾아서 듣고 흥미 끌리는 것만 선택해서 본다. 그리고 같은 취향의 매니아들과 사이버상에서 자기들만의 즐거움을 나눈다. 이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통통하고 우습게 생긴 동양인의 막무가내 말춤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익숙하지 않고 낯설기에, 세련되지 않고 거칠기에, 이해할 수 없지만 재밌기에 ‘강남스타일’이 터졌다. 제대로.
하지만 강남스타일 열풍의 진짜 이유는 싸이 자신에게 있다. ‘가요톱 10’에서 ‘2002월드컵 응원전’에서 그리고 ‘흠뻑쇼’에서 내가 싸이에게 들은 메시지는 이 한마디였다.
‘놀려면 이 정도는 놀아야 쪽팔리지 않지!’
싸이는 제대로 놀 줄 아는 가수이다. 그의 대박 비결이다.
제대로 놀았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노는 것을 죄악시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국어교과서엔 ‘개미와 베짱이’ 우화가 가장 길게 실려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일개미처럼 겨울을 대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배웠다. 새벽종이 울리고 새아침이 밝으면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꿔야 한다고 배웠다. IMF 땐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 자책하며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에선 놀면 불안해지면서 죄짓는 마음이 든다. 그래서 놀 때도 남이 볼 새라 지하에 숨어서 놀고 그후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런데 싸이는 대놓고 놀았다.
문제아로 낙인찍히든 퇴폐적이라고 방송불가 판정을 내리든 하고 싶은 말 다하며 떳떳하게 놀았다. 혼자 시원한 그늘에서 바이올린 켜며 노는 베짱이였다. 그래서 몇 번인가 손봐짐을 당하곤 했다. 그래도 이 눈치 없는 고집불통 아저씨는 계속 제멋대로 놀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2012년 싸이의 놀이가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로 통했다. 마돈나도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어셔도 말춤을 따라 추고 오바마 대통령도 싸이의 음악을 즐긴다. 알고 보니 놀이는 세계 공통어였다. 재미있는 놀이는 어디서든 통한다. 누구나 잘 놀고 싶어한다. 싸이는 잘 놀아서 성공했다.
싸이의 3집 앨범 ‘챔피언’에서도 그는 외친다. ‘진정 즐길 줄 아는 여러분들이 이 나라의 챔피언입니다!’ 이 메시지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미국인에게 뿌리 박힌 가난한 한국을 최첨단 한국으로 단숨에 끌어올렸다
워싱턴에서 본 싸이
▲ 지난 12월 9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자선파티에 참석한 싸이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photo UPI
이웃 일본에서는 2012년의 키워드로 ‘카네(金)’, 즉 돈이 선정됐다. 한국은 당연히 ‘말춤’ ‘강남 스타일’이 올해의 키워드 리스트에 오르지 않을까 생각된다. 말춤, 강남스타일을 지구촌에 유행시킨 가수 싸이는 사실 한국 밖에서 오히려 뜨겁게 주목받은 인물이다. 지난 12월 9일 오바마 대통령이 참가한 워싱턴의 크리스마스 자선공연에 등장해 말춤을 추는 장면은 그가 이제 얼마나 글로벌한 인물인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날 행사장에 1970년대를 풍미한 흑인가수 다이애나 로스가 나왔을 때도 관중들이 기립박수로 맞이했지만 사실상 그날의 주인공은 싸이였고, 오바마 대통령이 말춤을 따라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필자는 싸이가 누구인지, 어떤 음악을 들려주는지,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잘 모른다. 단지 매일 쏟아지는 수많은 ‘한류스타’ 중 하나로만 알고 있었다. 부정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한류스타의 대부분은 과장돼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류(韓流)’라는 글자가 뜻하듯 그냥 흘러갈 뿐이지 어디 하나 정착해서 끈기있게 뭔가를 보여주는 인물을 본 적이 없다. 1년 전 ‘월드스타’라 불렸던 사람들의 현재 흔적을 보면 ‘유(流)’로서의 한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싸이 역시 그런 수준에 머무는 인물로만 알고 있었다.
세계 어디서나 ‘강남스타일’
생각이 바뀐 것은 지난 11월 유럽 4개국을 돌아다닌 이후이다. 한 달 동안 이스탄불, 파리, 베네치아, 빈을 돌아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싸이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빈 중심에 있는 국립오페라극장(Staatsoper) 앞을 걸어갈 때도 반대편 가게에서 울려나오는 싸이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유럽, 아니 세계적인 오페라의 전당 앞에서 듣는 강남스타일이라니.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스탄불의 보스포로스해협을 오가는 배 안, 파리 지하철에서 만난 젊은이의 아이폰 스피커, 베네치아의 산마르코광장 앞 카페 플로리안(Florian) 옆 가방 가게…. 가는 곳마다 싸이의 노래였다. 마치 브레드 피트 주연의 1995년 개봉 영화 ‘12몽키스(Twelve Monkeys)’를 대하는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면 바이러스 감염의 주범처럼 등장하는 원숭이 마크가 온 세상에 깔린다. 세상을 멸망시킨 바이러스가 아니라 ‘싸이 바이러스’가 세상에 넘치고 넘친다.
워싱턴에 돌아와 싸이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주변 미국인들에게 물어봤다. 연령·성별 관계없이 일단 대부분 “싸이 노래를 들어봤다”는 반응이다. 일부는 가사는 뒤로 한 채 멜로디부터 흥얼거린다.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리듬과 멜로디”
“한번 보면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캐릭터”
“아시아인 가운데 저런 스타일의 가수가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인물”
“한번도 보지 못했던 색다른 춤”
“미국에서 본 적이 없는, 에너지 넘치는 분위기”….
대체로 요약한 싸이와 강남스타일에 대한 미국인들의 평가와 소감이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이란 브랜드에 관한 인지도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한국 가수로서의 싸이, 한국을 배경으로 한 말춤, 서울 강남을 얘기하는 가사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의 싸이, 말춤, 강남스타일이 아니라 그냥 어떤 혹성에서 뚝 떨어진 싸이, 말춤, 강남스타일을 얘기하는 느낌이었다. 한국에서 강조하려는 ‘월드 한류스타’는 안중에도 없다. 필자의 오랜 친구로, 일본·중국의 소프트파워에 주목하는 40대 미국인에게 ‘싸이 현상’에 대해 물어봤다.
“1995년 ‘마카레나(Macarena)’라는 춤과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다. 당시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수십 수백 명이 모여 동서남북 사방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노래와 춤을 추는 식이다. 한 6개월 정도 유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한국인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국인 가운데 그 춤과 노래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미국은 더하다. 어느 나라 출신, 어떤 종교를 가진 사람인지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사실 미국 내에 전부 다 있다. 한류라는 식으로 해석하려 하는데 미국에서는 그런 것이 안 통한다. 한국 출신 가수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서?(So What?)’라는 식이다.
그렇지만 강남스타일은 마카레나에 비하면 한층 성공한 듯하다. 스페인 사람들을 제외하면 마카레나를 누가 불렀는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강남스타일은 누가 불렀는지 모두가 안다. 이름과 캐릭터가 너무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싸이는 그냥 싸이다. 거기에다 후추, 마요네즈, 소금을 뿌리지 마라. 그냥 내버려둬라!”
김정일 다음으로 인상적 캐릭터
한반도가 낳은 인물 가운데 전 세계 모두가 알고 있는 가장 유명한 인물은 누구일까. 각자의 시각과 판단에 따라 생각이 다르겠지만 북한 김정일과 김정은 부자(父子)가 최고봉에 서 있을 듯하다. 미사일을 쏘면서 미국을 위협하는 독재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얼굴을 뒤덮은 선글라스, 특유의 촌스러운 외투, 아득한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헤어스타일, 둥근 얼굴…. 한번 보면 결코 잊지 못하게 만드는 고유의 캐릭터가 주 원인이다. 싸이는 김정일 부자를 넘어선, 한국에서 탄생한 글로벌 캐릭터이다. 검은 안경과 꽉 조이는 수트, 스니커형의 구두…. 싸이의 캐릭터는 인형으로 팔아도 글로벌 히트상품이 될 것이라 믿는다.
미국에 전해져 내려오는 한국 이미지의 산실(産室)로, TV 드라마 ‘매시(MASH)’를 빼놓을 수 없다. ‘야전외과병원’을 뜻하는 ‘매시’는 한국전쟁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로 미군의 야전병원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에피소드를 코믹하게 풀어낸다. 1979년부터 4년간 CBS를 통해 방영됐고 시리즈가 끝난 지 한 세대 가까이 지났지만 지금도 미국 어딘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인기 드라마다. 돈이 없는 시골 케이블 업체의 경우 철 지난 프로그램을 값싸게 사들여 계속해서 방영한다. 특히 퇴역군인과 노년층이 많은 시골용 프로그램으로 인기가 높다. 지금의 한국을 1950년대 분위기로 이해하는 미국인이 적지 않은 것도 이 드라마의 영향이 크다.
워싱턴에서 본 필자의 판단이지만 한국 가수로서 싸이가 이뤄낸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매시가 상징하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두 세대 이상 업그레이드시켰다는 데 있을 듯하다.
매시에 등장하는 가난하고 초라한 피란민 수준의 한국인을 21세기를 살아가는 최첨단의 인물로 만든 것이 바로 싸이고 강남스타일이라는 말이다. 최고급 호텔을 통해 비빔밥의 세계화를 꿈꾸는 한국 정부, 한류를 전면에 내세우는 관료형 엔터테이너, 세상을 한국과 나머지로 이분화하는 사람들이 100년이 걸려도 하지 못할 일을 싸이가 해낸 셈이다.
‘싸이 2.0’을 기대한다
주간조선 2011년 11월 28일자에 실린 ‘아큐파이(Occupy)세대’에서도 다뤘지만, 미국 청년 문화, 특히 IT산업을 주도하는 미국인의 가치로 ‘펀(FUN)’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흥미, 재미이다. 머리 쓸 필요없이 그냥 재미있다고 느끼면 된다.
강남스타일은 미국인이 열망하는 재미를 충족시켜준 최고의 상품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노래를 잘해서, 춤을 잘 춰서, 가사가 훌륭해서, 얼굴이 영화배우처럼 잘생기고 몸집이 식스팩으로 다져져서가 아니다. 그냥 보고 들으면 재미있다. ‘21세기 마돈나’인 레이디 가가를 사회적·정치적·문화적으로 분석하는 사람이 많다. 필자 역시 그 같은 범주에 속하지만 사실 미국 젊은이들에게 레이디 가가는 그냥 ‘재미’이다. 동성애를 부추기고 반전 메시지를 담은 노래 가사는 부차적인 것이다. 희한한 의상, 화장, 선글라스, 그리고 흥미로운 발언으로 사람들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 레이디 가가가 성공한 가장 큰 이유이다.
물론 재미를 좇는 심리적 특성 중 하나로, 쉽게 식상해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처음 볼 때 배꼽이 빠질 정도로 우습고 재미있지만 두 번 세 번 보면 채널을 돌리게 된다. 미국에서 레이디 가가 인기가 급추락 중인 이유이다. 세상은 빠르게 돌아간다.
새로운 재미를 창조해내지 못하는 한, 레이디 가가도 싸이도 앞으로 1년을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소춤이 될지 당나귀춤이 될지 모르지만 곧 싸이의 새로운 모습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 워싱턴에 있지만 ‘싸이 2.0’에 큰 기대와 박수를 보낸다.
/ 주간조선
[최정동 칼럼] 터키의 ‘강남스타일’ 사랑
지난달 하순, 터키 이스탄불. 비잔티움 제국과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수도는 춥지도 덥지도 않고 하늘은 푸르렀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 입구는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로마식의 둥근 돔에 이슬람의 초승달이 반짝였다. 성당 내부가 궁금했다. 사진으로야 수도 없이 봤지만 이렇게 큰 건물은 직접 봐야 제 모습을 알 수 있다. 537년, 완공된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이렇게 외쳤다지 않는가.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도다!” 도대체 어떻기에 건축주인 황제가 그토록 감동했을까.
성당 문턱을 넘어섰다. 내부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광대하고 어둑한 공간에 눈이 익어갈 무렵, 갑자기 주변이 떠들썩해졌다.
“강남스타일” “싸이” “코레아” 하는 외침이 동시다발로 터졌다. 그들은 터키 초등학생들이었다.
수십 명이 우리 일행을 둘러싸고 사진을 찍고 악수를 청하고 말춤을 춰댔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잠시 당황했지만 곧 상황을 파악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강남스타일’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 이유만으로 졸지에 스타가 된 것처럼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터키 중부의 파묵칼레. 석회 성분의 온천수가 오랜 세월 흘러내려 비탈진 땅이 하얗게 변한 비경이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고랑을 흐르는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여행의 피로를 푼다. 하지만 나는 그 뒤에 펼쳐진 로마 시대 도시 히에라폴리스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해가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번영했던 고대 도시는 지진과 전쟁으로 평지가 됐고 언덕 위의 원형극장만이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석양에 물든 극장을 촬영하고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한 무리의 중학생이 우르르 달려와 나를 감쌌다. 역시나 ‘강남스타일’ ‘싸이’다.
내가 한국인인줄 이들은 어떻게 알았을까(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터키인은 아웃도어 차림과 여자들의 파마머리로 한국인을 알아본단다).
그들은 다투어 악수를 청하고 서투른 영어로 질문을 퍼부었다. 일일이 대답하기도 힘들어 그들에게 외쳤다. “Can you dance 강남스타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들은 양손을 겹치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큰 소리로 불러도 아이들은 한참 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터키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이스탄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이 이 도시에 있는 줄 미처 몰랐다. 황금과 크리스털로 치장된 돌마 바흐체 궁전은 베르사유 궁전을 닮았다. 이 건물을 짓고 오래지 않아 오스만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궁전 밖은 보스포루스 해협이다.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물살이 제법 거세 하얀 포말이 궁전 마당을 적셨다. 해협을 바라보는 찻집에 앉아 제철을 맞았다는 석류 주스를 주문했다.
그런데 여종업원이 잔을 내려놓고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가씨는 부끄러운 미소를 띤 채 내 카메라를 가리켰다. 그녀는 우리와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싸이의 나라 한국 사람들과.
터키 사람들이 ‘강남스타일’에 열광하는 이유는 노래가 멋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에게 한국은 피를 나눈 형제다. 한국전쟁 때 터키는 미·영 다음으로 많은 1만5000명의 병력을 보내 3000명 넘게 전사하거나 다쳤다. 신생국 터키공화국의 젊은이들은 중공군의 공세로 위기에 빠진 한국군과 유엔군을 ‘군우리 전투’에서 구해냈다. 그 뒤 오랜 세월 참전용사들과 후손들은 연민과 찬탄의 시선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 참으로 각별한 혈맹이다.
터키는 볼 것 많고 맛난 것도 많았지만 사람이 가장 좋았다. 따뜻하고 정직한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형제로 반겨주니 마음 든든했다. 한때 ‘우리만의 짝사랑’이었다며 서운한 마음으로 돌아선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오해를 풀 수 있도록 어디서 만나든 진정으로 대할 일이다. 터키 말은 몰라도 된다. 당분간은 “강남스타일!”로 통할 테니까.
/ 중앙선데이.
..
몇일전 숀필립스(Shawn Phillips) 홈페이지에서 새로 나온 앨범을 보다 재미있는 노래를 봤다.
Shawn Phillips Money Dance #5
Shawn Phillips 2012.12.12
http://www.shawnphillips.com/index.htm
저스틴 비버의 티켓이 필요하냐고 하니
"내 아들이 강남스타일 때문에 자기의 moneydance를 해야만 한답니다"
( moneydance가 아마 ibank나 웹상의 계좌를 말하는 것 같은데 정확히 모름^^)
빌보드에서 계속 1위를 하던 저스틴 비버보다 더 인가가 좋은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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