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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약>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壬辰倭亂때 참전하는 다이묘(大名)들에게 조선의 문화재와 도공들을 포로로 붙잡아 헌상하도록 명령하였다. 현재 가고시마현인 사쓰마 번주 시마즈는 현재 한국에 널리 알려진 沈壽官가의 선조 沈當吉과 도고 시게노리의 선조 朴平意를 포함한 수십 명의 陶工들을 생포하여 왔다. 이를 계기로 도요지가 없었던 큐슈(九州)에서는 사쯔마, 아리따, 히라도, 이마리야끼등이 번성하여 일본에서도 유수의 도자기 산지가 되었다. 이들 도요지에서 생산된 도자기들은 일찍부터 품질과 예술성을 인정받아 유럽등지로 수출되어 번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일본이라는 나라를 알리는 주요한 매개물이 되었다. 반면에 우수한 도공들을 빼앗긴 조선은 도자기산업이 황폐해졌다.
한편 시마즈번주는 조선에서 생포하여 온 조선인 도공들을 나에시로가와라는 마을에 집단 거주케 하며 조선말, 조선복장, 조선풍습등을 지키며 살게하고 외부와는 통혼도 금지시키는등 이들의 예술혼을 살려 우수한 도자기를 만들게 하려는 교묘한 통치수법을 행사하였다. 시게노리는 이러한 전통이 270여년간 지속된 나에시로가와마을에 태어나서 중학시절에는 조선출신이라는 이유로 따돌림도 당하는등 차별을 겪었다. 고교시절 은사의 영향으로 문학을 하고자 동경대학독문과에 진학을 하였으나 봉건적유제가 남은 일본에서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없고 문학의 길은 절망적이라고 깨달아 문학을 포기한다.
내무관료로서 핏줄의 장애가 적지 않으리라고 판단하여 외교관이 되겠다고 결심하여 1912년 30세라는 늦은 나이에 세 번째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였다. 국내외에서 외교관으로 활동을 하다가 독일과 소련대사를 역임하고 태평양전쟁 개전시와 패전시의 외무대신을 역임하게 된다. 소련대사 시절에는 스탈린의 오른팔이었던 몰로토프와의 인간적 지우를 얻어 국교단절로 이어질 수 있었던 어업협정과 노몬한 사건을 원만하게 체결하여 일본본국으로부터 극찬을 받는다.
1차 외무대신 재임 (1941.10-1942.9) 시에 시게노리는 미국과 일본의 국력차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개전을 막으려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나 광신도화된 군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어서 개전에 마지못해 동조하였고,2차 외무대신 재임 (1945.4.9-1945.8.15) 시에도 전국민 옥쇄를 부르짖는 군부에 맞서 천황제를 유지하고 더 이상의 일본국민의 희생을 막고자 협상에 노력하여 조기종전을 이끌어 냈으나 미국측에의해 A급전범으로 몰려 스가모형무소에서 복역중 1948년 금고 20년형이 언도되었고, 1950년 7월 23일 병세악화로 68세를 일기로 사망함
平和主義者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의
生涯와 外交活動
2008. 12.
김 진 국
글로벌리더쉽 과정
외 교 안 보 연 구 원
目 次
I. 머 리 말--------------------------------1
II. 生 涯--------------------------------2
III. 外交活動--------------------------------8
IV. 맺 음 말-------------------------------26
I. 머리말
일본은 미국 페리제독의 강요된 개항이후 明治維新(1868)을 거쳐 본격적인 부국강병의 길을 걷게 된다. 조선과 일본은 脣亡齒寒의 관계라는 이유로 조선을 합병하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쳐 본격적인 군국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滿洲事變(1931), 中日戰爭(1937), 太平洋戰爭(1941)을 도발하며 잠시 승승장구의 길을 걷는 듯 하다가 결국은 패전의 길을 걷게 된다.
필자는 일본이 어째서 조선, 중국등 이웃나라와 평화롭게 지내지 못하고 무력침략을 감행하여 이웃나라들에게 질곡의 생활을 강요하였는가를 철이 들 무렵부터 지금까지 생각해왔다. 일본은 자업자득으로 얻은 패전 후 지금까지도 과거를 솔직하게 반성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역사왜곡이나 역사무시를 하고 있는가도 생각해 보았다.
또한 사실상의 不戰의 내용이 담긴 평화헌법 9조를 끊임없이 개정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음미하던 중 태평양전쟁 開戰시와 終戰시에 외상을 역임하였던 平和主義者 도고 시게노리라는 인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세계의 평화에 대한 그의 일관된 자세와 마음가짐에 대하여 일종의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시게노리는 전후 개정된 極東군사재판에서 태평양전쟁 개전시의 외상이라는 이유로 A급 전범의 판정을 받았다. 필자는 그에게 언도된 戰犯판결은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되어 나름대로의 자료분석을 통하여 그는 전범이 아니고 평화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한다. 또한 그는 태평양전쟁 종전시에 혼신의 힘과 노력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한 일본을 구하였는 바, 일본이나 일본국민들로부터는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홀대를 받은 느낌이고 선조들의 모국인 대한민국에서도 그에 대한 간헐적인 소개는 있었지만 너무 알려져 있지 않기에 이 글을 쓴다.
II. 生 涯
東鄕茂德(도고 시게노리, 朴茂德)은 1882년 12월10일 가고시마현(사쯔마번)히가시이찌끼 미야마(나에시로가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박수승(27세) 어머니는 박도메(24세)였고 2남3녀중 장남이었다. 그의 선조 朴平意는 壬辰倭亂때 사쯔마번주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沈壽官가의 沈當吉과 함께 끌려왔다.
도고 시게노리의 生涯를 보기위해서 나에시로가와 마을의 역사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침략을 시작할 때 참전하는 다이묘(大名)들에게 조선의 뛰어난 문화재와 함께 이를 생산하는 기술자를 포로로 붙잡아 헌상하도록 명령하였다. 다이묘들은 앞다투어 약탈과 기술자,수공업자의 생포에 힘써 이를 계기로 도요지가 없었던 큐슈에서는 사쯔마, 아리따. 히라도, 이마리,아가노, 쿠로다야끼등이 번성하여 일본에서도 유수의 도자기산지가 되었다. 이들 陶窯地에서 생산된 도자기들은 일찍부터 품질과 예술성을 인정받아 유럽에 수출되어 번의 (심지어 어느 번은 번 재정의 70%를 도자기의 매출로 충당하는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일본이라는 나라를 알리는 매개물이 되었다.
반면에 우수한 陶工들을 빼앗긴 조선은 도자기산업이 황폐해졌다.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수만의 조선인은 그후 서서히 조선의 씨성과 습관을 버리고 일본에 동화되어 갔으나,단 사쯔마의 나에시로가와에 거주하는 사람들만은 번주 시마즈가의 통제와 배려에 의하여 조선의 씨성과 풍속을 유지하고 한글을 사용하면서 270여년에 걸쳐 집단생활을 계속하면서 메이지에 이르렀다. 사쯔마번으로서도 보호라는 명목하에 나에시로가와의 땅을 주고 조선 도자기의 기술과 풍속의 전승(한글사용,상투머리,한복,조선식제사)을 강제하여 다른 지역과의 자유로운 교류,통혼을 금지하는 특이한 정책을 취한 것은 이 방식이 사쯔마번에 유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도자기의 제조기술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사쯔마번은 이마을 사람들의 피와 문화의 순수배양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도공들은 이 마을의 서북쪽에 조선의 開祖 檀君을 모시는 玉山宮(옥산신사:이전에는 환단신사)을 건립하여 1년에 한번 조선의 전통예법대로 대제를 열어 민족의 조신 단궁을 모셨다. 한민족은 위기에 처하면 (원의 침입,임진왜란,병자호란,일제의 식민지 등)檀君의 영을 제사지내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려한 역사가 있다.
마을사람 대대로 그랬듯, 아버지 박수승은 할아버지 박이구에게서 도예기술을 배워 익혔다.수승의 기예와 사업감각은 뛰어나서 무덕이 태어날 무렵 도자기사업은 꽤나 잘 돌아가고 있었다. 수승은 가고시마에서 멀리 요코하마와 고베까지 나가 외국상인과 접촉하면서 도자기를 팔아 큰 돈을 모았다. 무덕의 인격형성에는 이러한 양친의 기질과 조선 핏줄이 모여 사는 도공마을의 풍토가 배어있다. 활달한 개화파인 아버지, 영리하고 섬세한 노력가인 어머니, 뚜렷한 자립의식과 경쟁에서는 이겨야 산다는 분위기가 살아있는 마을의 전통, 이런 것들이 무덕의 운명을 만들어 놓았다.
무덕의 아버지 박수승이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 사연은 애처롭고, 그 시대적 배경은 살벌하다. 明治維新(1868)의 廢藩置縣(번을 없애고 현을 설치하는 조치)과 더불어 도자기 제조업도 번의 지배에서 현의 지배, 즉 현영으로 제도 자체가 바뀌는 대변혁이었다. 그때까지 지켜주던 사쓰마번의 보호막이 걷히면서 이들은 차가운 세상에 내던져지고 말았다.
일본사회의 차별과 냉대가 엄습해왔다. 일본의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국시로 내걸며 서구열강을 따라붙자고 외치던 때였다. 조선, 청국같은 아시아는 식민지 대상일 뿐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일본우월주의 바람이 불어 대륙이나 반도출신은 일단 열등하게 보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조선 풍속과 복식을 고스란히 유지해온 무덕의 고향 나에시로가와사람들은 제국주의적 광기와 차별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도자기로 번의 재정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주어진 士族(鄕士)대우는 박탈됐다. 사족과 평민의 차이는 천양지차였다. 1872년 호적을 재편성할 때 귀족이었던 다섯집을 제외하고는 마을사람 대부분이 평민으로 전락했다. 치명타였다. 마을사람들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졌다. 사쓰마의 일본인들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가진 도예라는 독자적인 기예와 오랜 세월 쌓아올린 면학풍토를 자랑스럽게 여겨온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오히려 西南戰爭이 발발하면서 촌민 남자들이 대부분 전쟁에 끌려가는 바람에 현영 도자기공장도 도산하고 만다.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마을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군인, 공무원, 교사같은 관직을 노렸다. 사족신분을 획득하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1880년 촌민 남자 364명이 연명해 가고시마현청의 사적에 편입시키라는 탄원서를 내기도 했다. 이 탄원에 서명한 이들의 명단에 수승의 아버지 박이구의 이름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이 탄원은 끝내 무시되었다. 6년뒤인 1886년 사적편입탄원서를 다시 제출했지만 각하당한다. 그리고 그 직후 박이구와 아들 박수승은 성을 갈아버린다. 도자기를 팔아 번 돈으로 사족의 성을 산 것이다.
가고시마성 하급사족 도고씨의 사족 족보를 사들여 그 집에 입적하는 형태였다. 러일전쟁의 명장으로 추앙되는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도 가고시마출신이지만 박씨 일가가 편입해 들어간 도고 성씨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1896년 시게노리는 가고시마 제1중학교에 입학한다. 고향마을을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고 방학 때 돌아오는 식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성적표가 지금도 남아 있다. 총131명 가운데 1등이었다. 중학교는 사족자제들의 세상이었다. 폐쇄적인 시골 가고시마에서는 평민인 농부가 제복을 입은 중학생을 보면 상전의 자제라는 이유로 타고 가던 마차에서 내려 예를 갖추었다. 배를 타더라도 평민은 제복입은 학생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시게노리는 비록 성을 바꾸고 사족에 편입됐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따돌림을 당하는 학생이었다. 賤民部落의 이미지가 남아있는 나에시로가와 출신의 가짜 사족, 조선 핏줄임을 학생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어떤 악동으로부터는 “조선산골의 돼지가 운다”와 같은 노골적인 놀림을 당하기도 하는등 여러 가지 차별을 당하였다. 그는 화도 났지만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했고 그래서 외롭고 쓸쓸했다. 항상 과묵했고 농담 한마디 한 적도 없었다. 필요한 것 외에는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 수승의 신분상승노력을 비웃듯이 사족 출신인 악동만이 아니라 친구들조차 시게노리라는 이름은 일본식이라도 나에시로가와 출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과묵과 근면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울적한 격정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시게노리는 공.사석을 비롯하여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단 한번도 조선 핏줄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가 남긴 기록에도 나에시로가와 이야기는 수없이 나오지만 핏줄에 대한 말은 전혀 없다.
1902년 스무살이 된 시게노리는 명문인 가고시마 제 7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일본은 도쿄에 1고, 센다이에 2고 하는 식으로 학교숫자를 붙였다. 가나자와,교토, 구마모토, 와카야마까지 6고를 만들고 7고를 가고시마에 세웠다. 고교3년간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다. 어두운 기색은 이미 없어졌다. 반을 이끄는 선두주자로 친구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우리 반에서 시게노리는 인격이나 인품면에서 단연 빛나는 존재였다.” 동기생인 기시모토 하지메(해군중장역임)의 회고다.
시게노리는 도쿄대 독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부임한 가다야마선생을 만나게 되어 독일어를 익히고 독일문학을 접하게 된다. 가다야마선생과의 깊은 문학적 토론과 문학작품의 폭 넓은 섭렵을 통하여 문학에의 꿈을 키운다. 그것은 운명적이었다. 나중에 그가 독일대사가 되고, 독일인 아내를 얻는 계기가 된다.
1904년 시게노리는 도쿄대 독문과에 들어간다. 아버지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선택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현의회의원을 꿈꾼 적도 있었기 때문에 수재인 아들이 법대를 나와 내무성관리를 하고 현지사라도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아들과 후손을 출세시키고자 돈으로 성까지 사고 사족으로 끼어 들어갔던 것이다. 시게노리는 그러한 아버지의 꿈을 알고 있었기에 한동안 독문과 진학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은사 가다야마선생이 도쿄의 학습원교수로 임명받아 올라오게 된다. 가다야마는 시게노리에게 자신의 은사인 도바리교수(독문학자,동경고등사범학교 교수)를 소개한다. 독일문학을 통하여 도바리는 아버지,가다야마는 아들, 시게노리는 손자가 되게 된다. 三代會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매주 목요일 저녁 세명만 모여 독일문학 세미나를 개최하고, 그 후에는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며, 시국을 논하는 등 기염을 토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삼대회 모임은 시게노리에게 대학의 어느 강의보다도 풍요롭고 애정이 넘치는 만남이었다.
그런데 좋은 일은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다. 장티푸스로 인한 신경쇠약에 걸린 가다야마는 도쿄가 싫어져 센다이의 2고로 떠나고 도바리는 니체의 超人說에 관한 논문이 천황의 권위를 손상시킨다는 문부성의 판단에 의하여 파직된다. 시게노리는 봉건적 유제가 남은 일본에서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없고 문학의 길은 절망적이라고 통렬히 깨닫게 된다.
학과 수업은 순탄치 않았다. 무엇보다 주임교수와 호흡이 맞지 않았다. 주임교수는 독일 문헌을 중심으로 가르치고 발표형식은 회화체를 강조하였다. 시게노리는 독일어 답변에 능하지도 못했고, 원래의 꿈이 문학이었으므로 교수의 방식이 재미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수업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그럭저럭 독문과를 졸업했으나 성적은 동급생 6명 가운데 꼴찌였다. 폐결핵으로 공부를 제대로 못하기도 했고 그나마 다른 동기들보다 한해 늦게 졸업했는데 그로서는 처음 겪는 굴욕이었다. 게다가 하숙집에 불이 나 책이 모두 불에 타버리는 사건을 겪는다. 그러는 사이 꿈도 희망도 바뀐다. 원래는 도쿄대 독문과 교수, 문예평론, 그리고 독어 소설쓰기가 꿈이었으나, 버리고 만다.
‘문학에는 재능이 필요하다. 영원히 남을 시인은 되지 못할 터이다. 실제 사회에 부딪쳐 도전해 보고 싶다.이제는 딜레땅띠즘의 문학을 떠나자,’(만년의 자필메모에서)
이 무렵 가고시마 출신이며,부인이 시게노리와 같은 나에시로가와 출신인 외교관 세끼쯔까가 외국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세끼쯔까의 집은 시게노리의 집 근처였다. 세끼쯔까는 활달한 성격이었고 다행히도 부인이 동향인 나에시로가와 출신이었다.
문학의 길에 절망하고 동요하는 시게노리에게 세끼쯔까부부는 외교관 시험을 권하였다. 독문학에 대한 애착을 살리고, 관리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희망에도 따르고, 스스로의 출생의 질곡에서 탈출하는 길을 해외에서 활동하는 외교관에서 구한 것이다.
내무관료로서는 ‘핏줄의 장애’가 적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외무고시에 합격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길이었기에 스스로 벌어 수험준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독문과 선배의 도움으로 메이지대 독일어 강사로 생활비를 벌어가며 수험준비를 했다. 그러나 두 번 연거푸 실패. 문과대 졸업생이므로 법대 출신에 비해 어려움이 있으리라 각오는 했지만, 연속해서 낙방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 시간강사 수입으로는 돈이 궁해 문부성의 자료편찬실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다. 더운 여름이면 시원한 고산지대인 가루이자와까지 가서 공부를 했다.
가루이자와의 추억, 쓰루야라는 여관에서 고시공부에 매진하던 추억을 그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다. 만년에도 심신이 지치면 늘 그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세 번째 응시에서 마침내 합격, 1912년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아버지 수승은 아들의 외무고시 합격을 크게 기뻐했다. 비록 내무관료의 길은 아닐지라도 그야말로 신분과 팔자를 바꾸는 큰 일을 해낸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을 불러 일주일간이나 연회를 베풀었다. 잔치가 끝나고 관보에 합격자 발표가 나자 수승은 나에시로가와 마을과 인연을 끊는다. 본적지를 ‘가고시마시 니시센고쿠초 82번지의2’로 옮긴다. 300년 넘게 지켜온 조선마을과 완전하게 결별한 것이다. 철저한 출신지 은폐가 자식을 출세시키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외무성에 들어간 시게노리는 신장염을 앓는 바람에 정무국과 통상국에서 7개월 가량 일을 배웠다. 당시는 공문서를 모두 붓으로 쓰던 시절이었다. 시게노리는 한문구사나 필력에서 뛰어나고 문제를 파악해 대응하는 능력이 예리하다는 평을 들었다. 고위직 상사들이 그를 편하게 생각해 늘 불러다 일을 시켰다. “서구적인 사상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양적인 인격수양, 유교적인 단련도 되어 있는, 거기에 문학적 소양까지 갖춘 친구였다,”고 동기생인 기타다 마사모토는 전했다.
1913년 부임한 첫 해외 근무지는 중국의 봉천 총영사관의 영사관보였다. 스위스 3등 서기관을 거쳐 베를린으로 옮기는 등 해외근무는 무려 8년이나 이어진다. 주독일본대사관은 독일정부에 도고의 비서 겸 통역을 할 여성을 추천 의뢰 했다. 이 때 추천된 여인이 에디타였다. 시게노리와 에디타는 이때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에디타는 일본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본어에 능통했다. 둘의 대화는 자연스러웠다.
그들은 업무중에 연애 감정이 싹터서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1922년 시게노리 40세, 에디타 35세에 결혼식을 거행한다. 이들의 결혼에 시게노리의 부모는 반대하였으나 시게노리가 부모를 설득하여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시게노리는 총각, 에디타는 아이 다섯명의 미망인이었다. 부부사이에 외동딸 ‘이세’가 태어난다. 훗날 이 무남독녀와 결혼한 사위는 외교관이었고 장인의 성을 이어받아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가 된다. 후미히코는 나중에 북미국장을 지내는 동안 1969년 미국과 일본사이의 오키나와 반환교섭 실무책임을 맡았다. 당시 미일 공동성명에 ‘한국의 안전은 일본의 안전을 위해서도 긴요하다’는 구절을 넣어 큰 정치적 반향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1973년 8월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납치사건을 저질러 일본을 경악케 하고 한일관계가 위태롭게 됐을 때 일본측 수습사령탑을 맡은 인물이 바로 ‘조선 핏줄의 사위’ 후미히코 외무차관이다.
에디타의 다섯 자녀는 독일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따로 지낸다. 시게노리는 1923년 구미국 제1과장으로 승진한다. 3년뒤 1926년 미국 워싱턴으로 가서 1등 서기관, 1929년 독일 주재대사관의 참사관으로 승진한다. 아버지 박수승은 1932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1944년에 돌아가셨다. 외무성생활 21년째인 1933년 구미국장이 된다. 이 무렵 조선인 장철수(나중에 한국에서 외무부 국장 역임)가 외교관 시험을 거쳐 외무성에 근무하자 “여러 어려움이 있겠지만 인내하고 열심히 하라”고 등을 두드려준 일화가 있다. 이후 독일대사 (1937), 소련대사(1937)로 승승장구하여 일본 외교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1941년 10월 외무대신으로 발탁된다. 일본의 眞珠灣 폭격(12월8일),즉 대미 선전포고가 있기 두달 전의 일이다. 1942년 9월 도죠(東條英機)수상과의 격렬한 의견 대립으로 사임하여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1945년 4월9일 사실상 일본의 마지막 내각인 스즈키(鈴木貫太郞) 내각에서 두 번째 외무대신에 취임하였고 1945년 8월15일 사임하였다.
시게노리는 일본이 패전하자 A급 전범이 되어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에 갇혔다. 極東군사재판에서 禁錮 20년형을 선고 받았다. 복역중이던 1950년 7월23일 68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감옥에서 외교관 생활을 기록한 ‘시대의 일면’이라는 수기를 남겼다. 에디타부인은 1967년 80세로 죽어 도쿄 아오야마의 도고가 묘지에 묻혔다. 시게노리의 딸 이세와 사위 후미히코 사이에는 쌍둥이 형제가 태어났다. 도고 시게히코(東鄕茂彦)는 아사히신문 기자를 거쳐 워싱턴포스트 도쿄지국장을 지냈고, 형제인 도고 가즈히코(東鄕和彦)는 외교관이 되어 할아버지처럼 구주국장과 네덜란드 대사를 지냈다.
III. 外交活動
1. 외교관 임관-구미국장 (1912.9-1937.12)
시게노리가 1912년 외교관에 임명되어 1945년 두 번째의 외상직을 사임하는 8월까지의 33년간은 세계전체나 일본이나 시게노리 개인에게 있어서 전대미문의 드라마와 같은 시기였다. 드라마라면 대본이라도 있었겠지만, 이 시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여러차례의 국가간 전쟁이 발생한 그야말로 疾風怒濤와 같은 시기였다.
1913년에 첫 임지인 봉천(심양)에 부임했다. 외무성 근무에서 첫 임지이자 그 당시 극동외교사와 긴밀히 관련된 일본의 대륙침공의 중심인 봉천에서 2년여를 근무한 것은 그에게 의미있는 일이었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침략야욕을 좌절시켰는데 그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과 풍부한 자원은 영국과 미국도 호시탐탐 노릴 만한 것이었다.
미국이 만주철도와 평행으로 달리는 철도부설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러. 일간에는 오히려 타협이 가능해졌다. 양국은 두 번에 걸친 협약으로 각기 북만주및 남만주를 자기 세력범위로 하게 되었다. 당시 세계는 중부 유럽에서 발원한 대전으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914년의 사라예보사건이 알려지자 봉천 주재 총영사 오치아이 겐타로는 처음부터 ‘이 사건은 결국 유럽전쟁으로 번질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사람은 유명한 외상 고무라 주타로 문하에서 업무를 배운 사람으로 러시아에서 오랫동안 근무했기 때문에 유럽정세에 정통했다. 1914년 7월 유럽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도 참전하게 되었고 1917년에는 미국까지 참가함으로써 세계대전으로 발전했다.
일본은 사태의 추이를 보다가 8월23일 교주만을 반환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독일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양국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山東半島의 靑島에서 일어났고 규모도 크지 않았으며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1915년 대중국21개조 요구에 대한 중일교섭이 있었다. 위안스카이(袁世凱) 대총통과의 교섭이었는데 한때 난항을 겪어 1915년 5월에 중국측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만일에 대비하여 제5사단 병력을 집결시키고 거류민 철수를 준비하였다. 이 때문에 봉천지역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긴장되었으나 결국 위안스카이가 일본의 요구사항을 대부분 수용함으로써 원만히 타결되었다.
‘21개조 요구’는 중국인들에게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본격적으로 경각심을 깨우게 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고, 여러나라로 부터 요구가 가혹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21개조에 달하는 광범위한 요구라는 것은 대부분 남만주 철도 및 안봉철도, 요동반도의 조차기한을 연장하여 만주에서 일본자위를 확고히 하고 산동성에서 독일이권을 완전히 계승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입장에서 본다면 러일전쟁과 독일과의 전쟁으로 만주와 산동을 중국에 넘겨준 대가이므로 당연히 허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겠지만 피해자인 중국국민이나 아직 일본을 깔보고 있는 구미열강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시게노리는 1917년 7월 스위스공사관에 발령을 받아 영국을 경유하여 임지인 스위스 베른으로 가던 도중 런던에서 장티푸스가 발병되어 한때는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으나 차차 회복이 되어 무사히 임지에 도착하였다. 그 후 도쿄에서 한 번은 자동차 사고로 또 몇 번은 정치적 변동으로 생명의 위협과 마주했다. 이러한 일들이 무척 개인적인 영역이라는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후일 그의 정치적 활동에 도움을 주었던 ‘생과 사는 하나(生死一如)’라는 신념이 바로 이러한 사건들에서 싹튼 것이다.
시게노리가 스위스에 근무하면서 가장 감명을 받은 사항은 이 나라의 영세 중립에 대한 열의이다. 스위스가 독일.프랑스.이탈리아의 한가운데 위치하는 관계로 이들 나라가 전쟁 상태일 경우 중립 관계를 유지하기 곤란한 것은 당연했다. 특히 각종 원료를 교전국들로부터 수입해야 할 상황에 놓였을 때는 참전 유혹을 받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국면이 서부 전선에서 교착되었을 때는 스위스의 뇌샤텔 방면에서 진격하는 것이 독일이나 프랑스에 모두 이로웠기 때문에 중립을 침해당할 우려가 많았다. 그러나 당시 정부나 민간에서 한결같이 독일이든 프랑스든 먼저 침입해오는 나라를 적으로 본다고 밝힘으로써 중립을 확고히 유지한다는 결심을 내보였다. 스위스 연방정부가 여러차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난국에서 중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인 이익에 눈멀지 않고, 먼저 침입해오는 나라를 적으로 한다는 방침 아래서 국민들이 일치 단결했기 때문이다. ‘빌헬름 텔’이야기와 같은 독립자유의 기상이 이처럼 응결된 것은 하루 아침의 일이 아니다.(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중립유지에 한층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상과 같이 영세 중립을 이루고자 하는 스위스 국민들의 일치 단결된 모습과 행동에 감명을 받았다.
1920년초 독일 근무를 명령받았다. 1920년1월10일에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를 사실상 매듭짓는 베르사이유 條約이 성립되었고 國際聯盟이 창설되었다. 독일 국내에서는 베르사이유 조약을 두고 ‘이것은 명령이지 조약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기타 조항에 대해서도 불평불만이 높았다. 하지만 패전국의 주장은 모두 무시된 상황이었다. 그것이 후일 나치의 대두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연합국은 독일국내의 불만이 거세지자 조인을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라인 다리 앞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패전후 독일인은 오히려 원기왕성했고 융화적이었다.
대학에서 괴테와 칸트의 자유주의적 경향에 친숙했던 경험이 있는 시게노리로서는 이 참에 독일에 동정과 이해심을 보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강화를 전후하여 그가 외무성 대표로 베를린에 체재하는 동안에는 일본과 독일사이의 문제는 거의 없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강화조약이 발효되고 일본과 독일의 관계가 재개되어 조약 규정에 따라 우선 대리대사를 교환하기로 했다. 독일에서는 여러 사람의 희망자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외무차관으로부터 전 외무장관 졸프를 대사로 파견하려고 하며 당분간 대리대사로 임명하고자 하니 일본정부가 신임장을 제정해주었으면 한다는 의사를 보내왔다. 시게노리는 적임이라는 말을 덧붙여 도쿄에 전보를 보내 곧바로 수락한다는 회답을 접수했다.
졸프는 그때 일본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을 했다. 시게노리는 일본과 독일 간에 당분간 정치적으로 중대한 문제는 없을 것이고 또 일본을 그런 측면에서 연구하게 되면 진상을 놓칠 우려가 있으므로 精神的.文化的 측면부터 알아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불교와 유교, 신도에서부터 시작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졸프는 산스크리트어 학자이니 불교 중에서도 大乘佛敎부터 연구를 시작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 후 도쿄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지침이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졸프는 패전국의 사신으로서 매우 곤란한 입장에 있었음에도 널리 일본 관민들의 신용을 얻었다.고토 신페이 외무대신은 졸프같은 사람이 독일에 많은가라고 질문을 할 정도였다. 그것은 졸프가 인품이 훌륭하고 지식과 경험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 일본인의 성격이나 사고 방식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원래 다른 나라를 파악할 때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출발하면 그 사람은 시대의 추세에 따라 좋고 싫음이 여러모로 바뀌게 마련이다. 정신적. 문화적 방면에서 충분히 연마되어 있으면 그 판단도 잘못되는 경우가 없다. 이는 외교관이라면 특별히 유념해야 할 점이라고 여겨진다.
시게노리는 1921년 6월 구미국 제1과 근무를 시작으로 1925년 12월 미국주재대사관에 발령을 받을 때까지 본국근무를 하게된다. 구미국 근무 5년동안 시게노리가 각고의 노력과 정열을 다 바친 대소 관계는 정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925년 12월 어느날 시게노리는 히로타(廣田弘毅) 국장의 질문에 답하여 외국 근무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히로타 국장이 미국대사관 주임서기관으로 부임하겠느냐는 뜻을 물어와 수락했다.
당시 (1921년-1925년)의 세계 정세를 크게 보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사건이 있었고 동란을 암시하는 움직임도 보였지만 대체로 제1차 세계대전 정리기라는 소강국면에 가려져 있었다. 일본은 1차대전에 참가 했지만 희생은 적었고 수확은 비교적 컸다. 경제적으로도 일시적으로 미증유의 호경기가 도래했는데 세계시장이 안정되자 오히려 불경기에 빠졌다.
한편 共産主義의 대두도 한 몫을 하여 사회가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점차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면서 세계적인 안정화에 동조하는 추세였다. 그런데 돌연 1923년 9월 關東大地震이 발생하여 그에 수반된 화재로 인해 도쿄 일원에 큰 재해가 발생하였다. 지진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 보내준 인도적인 원조는 일본인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갖게 했다.
1923년 9월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은 도쿄를 포함하여 가나가와현, 사이다마현, 이바라기현에서 발생하여 지진과 화재로 수많은 가옥이 소실되거나 도괴하여 많은 피해를 발생시켰는데 특기할만한 것은 재일교포 피해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일본 군부와 경찰은 조선인이 지진의 혼란을 틈타서 방화, 우물에 독약 살포, 살인, 강간 등을 자행한다는 사실이 아닌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유포시킴으로써 일본민간인들로 구성된 자경단 등이 칼, 몽둥이 등으로 무자비하게 조선인을 학살하여 사망자수가 육천명이상이나 되는 끔찍한 학살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이는 일본 군부와 경찰이 지진으로 발생한 일본국민들의 공포를 무고한 조선인들에게 돌림으로써 위기국면을 벗어나고자 했던 끔찍한 사건이었다.
1924년 미국은 양국간의 신사협정(일본이 특정사업이나 전문직 종사자에게만 미국행 이주민 여권을 발행한다는 미국과 일본간의 협약, 1907년)을 묵살하고 이민법을 개정하여 일본인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를 명확히 천명했다. 이것은 일본에 대한 모욕이었고 일본인 전체가 크게 분개했다. 외무성에서도 태도가 약하다는 책망이 들끓는 형국이었다. 어찌 되었든 일본과 미국의 국교사상 최초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시게노리는 1925년 12월 미국주재 대사관 1등서기관으로 발령이 나서 1929년 5월까지 워싱턴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워싱턴에 도착했더니 마침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건국 150주년 기념박람회가 개최되어 곧장 구경하러 갔다. 필라델피아에는 전에 와 본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 다시 건국에 관한 기록들과 그 후 광대한 발달과정을 돌아보고 나니 새삼 찬탄을 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 건국 2천여년에 비교하여 여러 가지 감상이 떠올랐다. 역사가 없으면 전통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아 자유로우므로 한 나라에 역사가 없는 편이 좋다는 등의 논의가 크게 일어난 적이 있다.이에 대해 시게노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나라나 민족은 세월이 흐르면 5백년, 천년이라는 나이를 먹게 되고 그러한 역사를 가지는 것은 필경 피할 수 없다. 한편으로 역사를 가진 만큼의 묘미와 장점이 있는 것이므로 중요한 것은 역사의 길고 짧음이 아니며, 그 나라가 동맥경화증에 걸리지 않고 항상 수명을 새롭게 하는 태세를 취한다면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 오히려 이로운 일이다.....”1)
시게노리의 직무는 수석서기관으로서 대사관 업무를 처리하고 서무를 총괄하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사무실에 내내 붙어 있어야 했고, 중대한 문제는 없었지만 상당히 바빴다.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는 뉴욕에 몇 번 간 것과 외무성의 명령으로 예일, 하버드, 브라운, 암허스트, 프린스턴등 대학을 시찰한 것 뿐이었다. 따라서 미국 연구는 주로 서적에 의존했다.각 방면의 저서를 섭렵했는데 그 중에서도 유익한 지침이 된 것이 James Bryce의 <미 연방 American Commonwealth>과 Beard박사의 <미국 문명의 발흥(The Rise of American Civilization)>이었다.
시게노리는 1929년 5월 독일 주재 대사관 참사관 발령을 받았다. 그 당시 독일은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한 질곡으로 가는 곳마다 중압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독일 어디에서나 조약에 대한 불평이 있었고, 언젠가는 그러한 불평이 폭발하리라 걱정하는 자도 있었다. 독일 경제는 여전히 취약했다.
1929년 10월24일 뉴욕 월가의 株價가 대폭락을 하여 大恐慌이 발생하였다. 대공황은 당연히 독일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독일 경제계에서는 앞날을 큰 위구심을 갖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다음해 5월의 크레디트 앙슈탈트의 파산으로 독일 금융계가 공황상태에 처하게 되면서 마침내 미국 후버대통령은 배상금 상환 정지(모라토리움)를 허락했다.
로카르노 조약이 체결된 뒤, 독일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소강 국면에 접어드는 듯 했다. 하지만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불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소련의 후원을 받은 공산주의자가 다수파 사회당으로 침투하여 세력을 확장하는 상황이었다.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국민주의 색채의 독일노동당은 강화조약에 대한 불평을 외치고 폐기를 주장하여 국민정책에 호소하려는 방책을 전개했다. 이 때문에 독일 내부는 점차 크게 동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 온건파가 과격파에 의해 압도되는 상황은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다.
베를린 북부에서는 양대 세력의 충돌이 그칠 날이 없었으며 매일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형국이었다. 나치는 점차 우세해져 1932년 7월 총선거에서 의회 안에서 다수당이 되었던 것이다. 그 사이 오바타 대사가 부임해 왔다. 오바타 대사는 중국문제에 조예가 깊어서 동아시아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많았다. 시게노리는 만주에서 보고 들은 것을 설명하고 빠른 시기에 타결을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1931년 9월18일밤, 봉천 북부 유조구에서 남만주철도의 선로가 폭파되었다. 관동군은 스스로 선로를 폭파하고 중국 측의 소행이라고 하여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만주사변의 발단이 된 사건이다.
그 후로는 매일 사건의 추이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 즈음 제네바 군축 예비위원회에서 결정한 일반군축회의가 1932년 2월부터 제네바에서 열리기로 되었다. 일본의 수석대표는 영국주재 사토 나오다케 대사와 협의하여 시게노리를 군축회의 일본 대표부의 사무총장으로 삼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는 지난해에 제네바 국제연맹 총회에 참석했다가 당시 연맹 내부의 공기가 진실한 면모를 많이 잃었음을 목격했다. 이번 군축회담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에 내심 내키지 않았지만 오바타 대사까지 열심히 권하는 바람에 승낙을 하고 1932년 2월초 제네바로 갔다.
회의는 영국외상 헨더슨의 주재로 2월초부터 개최되었다. 때마침 제네바에서의 대일 감정은 갈수록 나빠졌다. 헨더슨도 회의에 앞선 인사말에서 이를 규탄했다. 각국 대표는 이어서 연설을 하면서 자국의 군축에 관한 태도를 밝혔다. 제네바 군축회의는 그 후 실질적인 진전이 없었다. 1932년12월11일 제네바에서는 5대 강국 선언이 있었고, 1933년3월에는 ‘맥도널드 안’이 제출되어 그 해 11월까지 집회를 계속했지만 끝내 아무런 성과도 올릴 수 없었다.
마침내 1933년 10월 독일의 탈퇴 통고에 의해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어쨌든 세계평화에 신기원을 열고자 한 희망이 일순간에 좌절되고 만 것은 진실로 유감스럽다. 이 회의에서 각국이 보인 이기적인 태도는 국제사회에 인도적 평화사업을 성공시킬 만한 도덕적 기초가 없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되었다.
제네바 군축회담의 실패는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독일의 반발이 큰 원인이었다. 나날이 강화되는 히틀러 세력에 때 맞추어 제네바 주재 영국 대표부는 허약한 독일 중도파를 상대하는 것보다 국내기반이 확고한 나치 정권의 출현을 기다려 그들과 거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실로 영국적인 사고방식으로서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부분이었다.
세계가 滿洲事變에 적지않은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 건을 심의하고 최종 결정을 내리기 위해 개최된 제네바 國際聯盟 총회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一般軍縮會議를 압도할 만했다. 미국에서는 스팀슨이 대일본 제재를 주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만주 문제의 국제적 처리 과정에서 시게노리에게 특별히 강한 인상을 심어준 것은 미국의 태도였다. 특히 스팀슨의 대일 경제제재 논리는 후버 대통령의 온건 정책에 의해 일시적으로 억제되기는 했지만 무척 걱정스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영국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일본에 대하여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1933년 2월 시게노리는 구미국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내각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수상, 우치다 고사이가 외상,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대장상의 지위에 있었다. 당시 외무성, 아니 일본을 통틀어 가장 큰 문제는 만주사변을 어떻게 처리하는 가에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국제연맹총회의 결의를 수락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일본정부의 대세는 수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고, 거절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봉착한 문제는 연맹탈퇴 문제였다. 이미 그 문제는 2월 20일 어전회의에서 결정한 것인데, 연맹에서 우리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대표를 퇴장시킬 것이고, 연맹탈퇴도 불사한다는 훈령을 보내겠다는 결정이었다. 결국 1933년 3월27일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게 된다. 국제연맹의 평화보장을 위한 노력에는 상당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가입한 각국의 주권은 여전히 가장 우선적으로 존중되었다. 때문에 실제적으로 평화를 강제하는 수단은 결여되어 있었다.
또한 이 기구의 목적은 현상유지였기 때문에 규칙 제19조에서 규정한 ‘평화적 변경’의 방법은 한 번도 활용된 적이 없었다. 결국 현재의 상황에 불평이 있는 자는 연맹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일본의 탈퇴에 이어 독일도 1933년 10월에 탈퇴통고를 내었다. 그 후 연맹은 점차 무력해 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세계 평화기구의 진보에 있어 진실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일본은 군부와 보수진영이 마음먹고 진출한 만주에서 아직 본격적으로 기대한 이익도 회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제연맹의 권고대로 양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군부와 정부방침에 외무성의 일개 국장에 지나지 않는 시게노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주사변과 관련된 안건은 구미 국가들과의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게노리는 구미국장 취임초기에 만주사변 관련 주무국장이었던 다니 마사유키 아시아 국장에게 이와 관련된 중요 사항을 결정하기 전에 구미국에도 그 서류를 송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승낙을 받았다. 그 후 대체로 실행이 되었지만 송부되지 않은 것도 상당했다.
시게노리는 다시 우치다 대신에게 현재의 일본의 외교에 대한 세계 각국의 불만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불만이 지속될 경우 필연적으로 미국이나 영국과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일부에서 부르짖고 있는 소련과의 전쟁도 상대방의 자세나 미국의 태도 등을 고려하여 충돌을 피해야 하는 이유 등을 설명했다. 우치다 대신은 대체로 수긍하면서 상세한 사실을 열거한 문서를 제출해달라고 요망했다. 즉시 한 편의 의견서를 기초하여 아리타 차관을 거쳐 외상에게 제출했다. 이 문서는 일본과 구미 각국의 국교 상황을 편리하게 볼 수 있도록 작성했다. 시게노리가 작성한 이 문서의 공식 명칭은 “국제연맹 탈퇴후 제국의 대 구미외교방침”이며 1.미국 2. 영국 3.프랑스 4.독일 5.네덜란드 6.소련 에 대하여 정리한 문서이다.
이 문서의 내용은 간결하며 핵심을 꿰뚫고 있으며 미래를 통찰하고 있다. 지금 현재의 시각으로 보아도 시게노리의 뛰어난 통찰력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앞을 꿰뚫어보는 듯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항간에 널리 펴져 있는 日.美 戰爭說과 관련하여 우리나라 일부에서는 런던 해군조약의 결과 1936년 이후에는 일 ,미 해군력의 비율이 우리측에 불리하게 되므로 지금이 미국과 전쟁을 벌일 절호의 기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만약 지금 일 미간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우리의 작전이 성공하여 필리핀을 공략하고 미국 함대를 우리 근해로 유인하여, 격파하고 곧바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굴복시킬 수 없음은 분명하다. 우리 측이 먼저 하와이를 공략하거나 미국 본토에 대하여 공세를 취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곤란하다. 요컨대 그렇게 된다면 극동지역에서는 부분적 승리를 얻겠지만 그로 인해서 극동 이외에서는 이익이 적을 뿐만 아니라 이상의 필연적인 결과로 우리에게는 불리한 지구전이 전개되어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은 실로 크게 걱정스러운 바이다. 더하여 현재의 국제 관계에서는 미국 한 나라만 상대로 전쟁을 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때 가서 영국은 물론이고 프랑스 등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움직여줄 것이라고 예측하기는 어렵다. 동시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 나라의 공동보조를 야기할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입장에서도 일.미전쟁을 피하는 것이 좋다. 한편 미국의 입장에서도 무력으로 우리를 굴복시키기 곤란하다고 생각할 것이므로 그 얻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 미관계의 개선을 꾀할 구체적인 방책이 과연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먼저 미국이 그들의 대중국 정책을 재고하게끔 하는 일이 현재의 급선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주국이 독립국다운 모습으로 그 기초를 확립해야 할 것이고, 동시에 가능한 한 만주국에서 문호개방이나 기회균등 등을 준수해야 할 뿐 아니라 일본이 만주국 이외 지역에서 어떠한 면에서도 아무런 영토적 혹은 정치적 야심이 없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또한 이번 기회에 미국과의 사이에서 예를 들어 일. 미관계의 오점이라 할 수 있는 차별적인 배일 이민법은 미국이 우리쪽에 공평한 할당제를 적용하여 문제 해결을 도모한다는 방침으로 일을 진행시켜야 한다.......” 2)
이상의 미국에 대한 외교방침의 한 구절만을 보아도 시게노리의 미국에 대한 정확한 파악 및 일. 미전쟁에 대한 통찰력있는 예상에 대해 찬탄이 절로 나온다. 물론 그 후의 역사는 시게노리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흘러간 것은 아니었지만 양식있는 일본인이라면 무척 아쉬워했을 것이다. 조선문제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별개로 쳐도 말이다. 시게노리의 국제관계에 대한 견해를 의견서에서 다시 인용해보겠다.
“......재작년 滿洲事變이 발발한 이후 구미 각국은 우리 정부가 모든 조약을 깡그리 무시하고 침략행위를 한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제국이 다시 침략적 행위에 나서지 않을지 우려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리하여 재작년부터 우리 일본군이 무력의 위용을 떨쳐온 데 반하여 제국의 국제신용은 심각하게 실추했다는 느낌이다. 근대 국제사회에서 특히 강대국간에 총칼을 겨루는 일은 국가 최대의 일로 만부득이한 경우에 하는 것이다. 진실로 대의명분에 합치되지 않는 거병을 했다가 실패한 예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반대로 순리를 지킨다면 그런 일이 되풀이될 리가 없다. 국가든 개인이든 信義를 존중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한 나라가 자기 나라의 국제적 신용을 실추시키면 결국 손해를 당한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나의 근본사상은 다음과 같다.
어느나라든지 국력이 쇠약해지지 않으려면 어떤 시대라도 부단한 변화와 발전이 필요하다. 보수나 停滯는 안 될 일이지만 시대의 추이든 한 나라의 興隆이든 너무 급격한 속도로 진행되면 좋지 않다. 일시적으로 대단하게 보이는 성공일지라도, 충분한 기반이 없다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는 많은 역사적인 사례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革命에서 조차 그 실제 사례는 일일이 들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점을 깊이 파고 들어 문명사적으로 고찰해보면, 인류의 과학적,물리적 진보는 최근 현저한데 비해 정신적인 진보가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변혁도 그 속도를 살펴서 사회적인 도덕성과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성공을 거두지 못하거나 일시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다가 역전되고 만다. 그러므로 시대를 경영하는 경우나 한 나라의 勃興을 도모하는 경우나 서서히 견실한 방법으로 진행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임을 추천한 것이다.......“3)
결국 돌이켜 보면 시게노리가 우려했던 대로 대중국이나 대영, 대미관계는 악화되었고 軍縮문제에 의한 악영향도 정확히 그의 예견대로 되었으며, 마침내 太平洋전쟁의 발발을 보게 되었으니 그의 통찰력은 뛰어난 것이었다. 소련과의 東중국 철도 매수교섭을 도쿄에서 하게 되었다. 애초부터 소련측에서는 만주국이 동중국 철도에서 일하는 소련인 종업원에 대한 압박행위를 했다고 지적함으로써 만주국이 악감정을 야기했으며, 또한 철도 매수대가로 10억 루블을 요구함으로써 교섭에 진척이 없었다. 당시 군무국장으로 전임해온 나가타 소장조차 교섭의 앞날에 우려를 나타냈다.
게다가 소련과 국교조정에 힘써온 히로타 고키의 외무대신 취임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시게노리는 소련대표자와 여러차례 만났다. 상호 오해와 분규가 제거되자 교섭을 점차 궤도에 올랐다. 그 후 교섭의 실질적인 내용이 일. 소간으로 옮겨지면서 자연스럽게 시게노리가 그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소련도 10억루블 철회를 요구하고 많은 양보를 해왔다. 또한 대금의 3분의 2를 일본상품으로 결제하겠다는 일본측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래서 종업원의 연금지불 및 일본정부의 지불보증에 관해 소련측의 주장을 수용하기로 하고 모든 문제를 마무리지었다.
이 교섭은 평화적 수단으로 소련의 東進을 막았다고 할 수 있었으므로 극소수의 강경론자를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평가를 받았다. 오카다 내각의 군축조약 폐기 정책조차도 여전히 군부에 만족을 주지 못했고, 일거에 국가 개조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목소리는 청년장교 일부를 움직이게 하여 결국 1936년 2월 26일 폭동으로 나타났다. 그때 시게노리가 확실히 느낀 것은 군부 특히 데라우치 대장을 수반으로 한 육군의 강압과 정치인들의 무력함이었다.
2.26사건을 계기로 가뜩이나 강경세력이었던 군부는 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둘러 1937년 中日戰爭, 1941년의 太平洋戰爭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중국문제는 시게노리의 소관 사무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큰 사건이었다. 7월 9일 일요일의 이른 아침 기시비서관으로부터 전화가 있었다. 그날 임시각료회의가 개최되어 中중국 파병건이 상정될 것이며, 주말동안 요양중인 히로타 외상에게도 시급히 연락하여 상경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급히 외무성으로 갔다.
먼저 출근하는 호리우치 차관 및 이시이 동아국장을 만나 그저께 정례 각의때 이미 육군에서 출병제의를 했으며, 현재 조금씩 성사되고 있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는 중에 히로타 외상이 등청하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을 재촉한 뒤, 대신실에서 중국의 ‘宋哲元이 교섭에 응하려는 기색을 보이고 있는 이때 출병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이른 결정이며, 만약 북중국에 파견하게 되면 中중국에도 출병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엄청난 대 사변으로 비화될 수 있으므로 출병은 극력 보류하는 것이 타당하다.’ 는 뜻을 간곡히 전했다. 히로타대신도 시게노리의 말에 동의한다고 말하고 각료회의에 나갔다.
그러나 육군에서 형세가 절박하므로 곧바로 출병 준비를 해야 거류민의 보호에도 지장이 없으며, 결국 중국 측과의 교섭을 용이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여 마침내 출병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시게노리는 즉시 육군의 불합리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미 결정이 내려진 이상 각의를 움직일 힘도, 권한도 그에게는 없었다. 북중국에서 사건이 종식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中중국에까지 출병하게 되어, 사건은 점점 확대되었고 일본은 겉잡을 수 없는 진흙탕으로 빨려들어가게 되었다.
2.주독일대사(1937.12-1938.10)
1938년 1월 중순에 천황의 신임장을 전하기 위해 히틀러총통을 방문했다. 총통과의 첫 만남이었는데 체격과 풍모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행동이 직선적이면서 천재적이었던 것도 이러한 연상을 갖게 했을 것이다. 신임장 전달식이 끝난 후 약 20분동안 간담회를 가졌다. 시게노리는 히틀러가 일본과 깊은 우호관계를 절실히 바란다고 했던 것을 인용하면서 그렇다면 중국에 대한 독일의 군사적 원조를 금지해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히틀러는 중국에 무기를 판매하는 것은 독일에 외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매우 곤궁했던 독일이 다시 번영하게 된것은 자신의 노력때문이며, 앞으로 더욱 발전하려면 외화가 더욱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시게노리는 히틀러에게 다시 한번 중국에 대한 무기판매를 재고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히틀러는 이 문제는 자기에게 맡겨 달라고 했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독일이 만주국을 승인하고, 중국에 주재하고 있던 장교들을 철수시키고 무기판매를 금지했다. 시게노리의 독일대사시절, 독일은 일관되게 일본,독일, 이탈리아의 3國同盟을 추진했다. 그러나 시게노리는 항상 동맹체결에 반대입장을 고수했다. 시게노리는 항상 열강과의 관계개선에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을 배척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미.영.소와의 관계개선에 주력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그것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독일과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또한 히틀러의 사고방식으로는 조만간 영.프.미.소를 상대로 한 大戰爭이 발생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하지만 세계평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와 같은 선택을 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몇 년동안 독일에 머물면서 독일의 국력을 연구해 온 바로는 도저히 그 전쟁이 독일의 승리로 끝나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때문에 일본이 독일과 동맹을 맺고 운명을 같이하는 일은 있는 힘을 다해 피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그러자 독일은 공식적으로는 대사인 시게노리와 3국동맹 문제를 협의해야 하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시게노리의 반대입장을 알자, 그를 제외하고 주독대사관 무관인 오시마(大島)와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하게 된다.
시게노리는 그동안 여러차례 외무성 및 히로타외상에게 삼국동맹 절대반대 의견을 담은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독일에 대한 시게노리의 소극 정책을 인정해준 히로타 외상도 5월에 사임하고 일본군부의 압력은 갈수록 강화되었다. 8월말에는 독일과 협상이 개시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이에 대해서 시게노리는 반대의견을 갖고 있으며 무관에게 이러한 중요문제를 맡기는 것은 부당하다는 공문을 보냈으나 곧 모스크바로 전임하라는 외상의 전보를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지만 외상이 거듭 뜻을 거두고 승낙하라는 전보를 보내왔기 때문에 1938년10월 소련대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시게노리는 짧은 주독대사 재임기간 동안 세계평화와 일본의 국익을 지키고자 나름대로 3국동맹 체결에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노력하였으나 주독대사라는 일 개인의 힘만 갖고 일본 군부나 정부에 대항하기에는 너무나도 무력하였다. 그 당시의 일본 군부는 내각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자기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 않으면 간단히 쓰러트릴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일본인은 어째서 냉정한 판단력을 상실한 것일까 하고 시게노리는 생각했다.
후진국이라는 점, 황색인종이라는 점 등의 열등의식에 빠져 성급한 자기주장을 하게 되었는가, 서구 및 미국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는 자기인식을 피하려고 초조한 나머지 세계에 대하여 폭력을 행사하려는가? 그렇다면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독선적인 국수주의자들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시게노리는 히틀러와 면담할 기회가 가끔 있었다. 그의 히틀러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히틀러는 아주 공손한 태도였고 의례적이고 사교적인 말은 하지 않고 바로 요점으로 들어갔다. 그의 행동은 매우 과격했지만 동시에 독창적이며 천재적이었다. 그 당시 세계에서 매우 특이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다만 주위에 훌륭한 인재, 특히 국제문제 전문가가 없었던 것은 큰 결함이었다.
시게노리가 미국의 동향에 대해 말했을 때 히틀러는 미국은 물질적이고 타산적이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미국 사람을 그렇게 단언해버리면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와 같은 단순한 지식은 리벤트로프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영향이었을 것이다. 리벤트로프는 외무장관에 임명되었을 무렵 ‘총통께서 50세를 넘기기 전에 나라를 부흥시키는 대사업을 완성해주셨으면 한다는 말씀을 드리려던 참’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와 같은 아부와 아첨이 결국 모든 일을 그릇친 원인이었다고 생각했다. 독일주재 대사는 결국 일본군부와 독일의 합작으로 무관이었던 오시마가 임명되었다. 결국 3국동맹은 1940년 9월 27일 체결되었다. 일본과 독일의 당국자들은 이 조약이 미국을 견제하고 유럽전쟁과 중일전쟁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계산했지만 결국은 오산임이 증명되었다.
3.주소련대사 (1938.10-1940.8)
러시아 외교사무는 구미국 제1과에 근무하던 때부터 맡아온 것이라서 익숙한 일이었다. 부임하자마자 바로 착수한 일은 북양어업에 관한 한시협정체결문제였다. 일.소간 어업협정 개정작업이 성립되지 못하고 매년 한시협정을 체결하여 협약을 실시하고 있었다. 국제적인 지위가 확실해지면서 소련이 북양어업과 북사할린 석유.석탄사업에 관한 일본의 이권을 매수하고자 한다는 염려는 더욱 강해졌다. 특히 1938년 8월에 장고봉사건이 발생하여 일.소간 국교가 악화되고, 소련군이 일본군을 격퇴한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어업문제도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시게노리는 포츠머스조약에 기초한 본 어업협정의 특이성을 지적하면서 협정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소련의 의무임을 설명하고 협상개시를 끈질기게 요구했다. 이에 대해 소련측이 제시한 것이 일본인이 경영하는 어업구역중 상당수를 해소하자는 것이었다. 몇 번 논의를 거듭했지만 의견차이가 심해서 연말까지 성립시키기는 커녕 해결의 서광조차 비치지 않았다.
다음해 2월에 들어 다시 협상을 시작했는데 소련측 대표인 외무인민위원인 리트비노프가 조금씩 양보를 해왔다. 일본쪽에서도 양보를 하여 4월에 이르러 겨우 협정이 성립되어 조업시기에 간신히 맞출 수가 있었다. 한때 자유출어, 국교단절까지 우려했던 일이 해결을 보게 되어 한숨을 돌렸다며 도쿄의 외무대신으로부터 보기 드문 극진한 감사전보까지 왔다. 5월초 리트비노프가 파면을 당하고 몰로토프 인민위원회의장이 외무인민위원을 겸임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몰로토프가 외무인민위원에 취임한 후에도 어업문제. 북사할린 이권 등에 대해 상당한 애로사항이 있었지만 중대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이 조금이라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몰로토프가 직접 협상에 나섰기 때문에 리트비노프 시절과는 달리 많은 의논을 주고 받을 필요없이 의외로 쉽게 해결을 보는 일이 많았다. 몰로토프는 시게노리의 모스크바 이임파티에 초대를 받고 전례가 없던 참석을 하여 각국의 외교관계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시게노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나는 시게노리씨 만큼 성실하고 완강하게 자국의 이익을 주장하는 외교관을 알지 못한다. 또한 시게노리씨 만큼 편견 및 악감정없이 우리를 이해하여 주는 외교관을 알지 못한다. 그가 대사의 직에 있었던 덕분에 소.일 양국 관계는 큰 파탄을 보이지 않고 끝났다. 그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인물이었다. 지금 그를 귀국시키는 것은 일본정부에 결코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유감스러운 결정이다." 외교적 언사라해도 시게노리와 몰로토프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의 인간성을 인정하고 상호 존중하는 사이였다.“4)
1939년 9월1일, 독일과 폴란드 국경에서 폴란드 병사가 독일 정규병을 향해 발포했다는 이유로 히틀러가 폴란드 진격명령을 내렸다. 영국과 프랑스는 9월3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교전에 돌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1939년 5월12일, 만주국과 몽골의 국경인 노몬한에서 소련과 일본간의 대규모 무력충돌 사건이 발생하였다. 관동군 제 23사단이 외몽고 영내에 침입했으나 8월 20일 소련군 기계화부대의 반격을 맞아 참담하게 패했다.
도쿄에서는 시게노리에게 소련과 교섭하여 시국을 수습하라는 훈령을 보내왔다. 시게노리는 양쪽이 모두 대군을 준비하여 대치중이기 때문에, 협상개시 후 협의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전쟁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으므로 협상에 들어간 이상 성공리에 합의를 도출할 결의가 있어야 한다는 전보를 보냈다. 그 결과 모든 것을 그에게 일임한다는 언질을 받았다.
시게노리가 두 나라의 군대가 현재 전선에서 휴전 상태로 들어간 다음에 지체없이 國境劃定 협상에 들어가자고 제안했으나 몰로토프 인민위원은 일본군이 몽골 영토에 침입한 것이므로 노몬한 지역에서 즉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게노리는 일본군이 노몬한 지역을 만주국 영토라고 믿고 행동했기 때문에 국경획정 이전에 물러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아 한때 협상이 깨질 우려까지 있었다. 결국 9월 16일 몰로토프가 시게노리의 주장을 받아들여 현재 전선에서 정전을 하고 지체없이 국경획정위원회를 설치하자는 합의를 이루어 문제가 타결되었다. 도쿄로부터 일.소간의 국교가 단절된 뻔한 위기를 모면했다고 치하하는 전보가 왔다. 일본에서 국교단절까지 우려한 문제를 해결한 것은 어업문제와 더불어 이것이 두 번째였다.
마쓰오카(松岡) 외상으로부터 갑작스러운 귀국명령을 받은 것은 몰로토프와의 중립조약 체결에 관한 협상이 이루어지기 바로 직전인 8월 29일이었다. 그때 시게미쓰와 구루쓰 대사를 제외한 모든 대사와 공사들에게 귀국명령이 떨어졌다. 신문에 실린 차관의 담화에 의하면 이들이 신세대 외교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는데, 마쓰오카의 추축외교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시게노리는 소련대사 재임시절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속에서 몰로토프와의 인간적이고 성실한 교류를 통하여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어 어업협정이나 노몬한 사건같은 단교로도 이어질 수 있는 안건들을 원만하게 처리하였고 몰로토프와의 中立條約協商은 체결직전까지 갔었지만 본국의 귀국명령으로 부득이하게 귀국하였다.
4. 1차 외무대신 (1941.10-1942.9)
시게노리는 도조수상의 제안으로 외무대신에 취임하였다. 취임하기 전날 도조와의 회담에서 자신이 취임한다면 일본육군이 중국에 주둔중인 군대주둔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며, 다른 문제도 재검토하여 상당한 양보를 각오하고 합리적인 기초위에서 미국과의 교섭 성립에 진실로 협력하겠다는 뜻이 없다면 입각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도조는 일미교섭을 성립시키고 싶은 마음은 자신도 마찬가지이며, 교섭안 가운데 중국내 군대주둔 문제말고는 대체로 양해가 이루어졌다고 말하면서 취임을 간청하여 교섭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 때문에 취임을 수락했다. 도조 내각을 두고 곧바로 전쟁에 돌입할 내각이라고 관찰한 사람도 있었다. 시게노리는 그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적어도 시게노리의 입장이 전쟁보다는 전쟁방지를 위해 입각한 것임은 앞서의 대화만 가지고도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다만 시게노리의 실책은 도조의 약속만 신뢰하고 어떻게든 시국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데 있었다. 분규가 극도에 달하여 미국도 이미 전쟁을 결의했을 정도로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물론 일본외교의 일반적인 행태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즉 외교분야에 대한 군부의 위세는 먼저 중국 방면에서 왕성했다. 만주사변 이후에 특히 강대해져서 독일과 이탈리아에도 세력을 미쳐 3국 동맹의 성립까지 이르게 되었다. 만주사변 이래 10년동안 전쟁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외교는 날이 갈수록 군부의 압박 아래 놓이게 되었다. 외무대신의 의견이 국책에 관철되기란 매우 어려웠다. 때문에 시게노리는 입각조건으로 교섭 성립에 협력할 것이라는 확답을 요청하여 도조수상으로부터 동의를 받았던 것이다.
외무대신 취임시 여러분야에서 들은 것을 종합한다면 미국 정부 당국이 지금껏 상당히 비타협적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본의 희망을 전부 거절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이 크게 양보할 경우 교섭성립에 관한 한 가닥 희망이 있다는 것이 취임 당시의 심경이었다.
여러 정황을 살펴보았을 때 자신의 한 몸을 보전하려고 했다면 취임을 거절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게노리는 국가를 위해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그럴 수 없는 일이며 남자로서 성패를 불문하고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가모 형무소에 戰犯으로 갇혀있을 때 시게노리는 여러 면에서의 계산착오를 후회하였으나 취임시의 결의에 잘못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전에는 수상, 육군상,해군상,외무상,대장상의 5상회의에서 국가의 최고방침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제2차 고노에(近衛) 내각시대, 일. 중전쟁의 확대에 따라 정부와 군의 연락을 긴밀하게 할 필요가 생겨 국책검토의 장으로서 정부통수부연락회의가 설치되었다. 5상 외에 육군참모총장, 차장, 해군군령부총장, 차장 등이 새로운 멤버로써 추가되었다. 그 결과 정부와 군의 연락은 확실히 긴밀해졌으나 동시에 군이 공연히 정부시책에 참견하여 자신들의 생각대로 정치를 움직이기 위한 문호가 개방된 것이다.히로다 내각의 군부대신 현역제의 채용에 필적하는 고노에의 실정이었다.
시게노리는 외상취임이래 여러개의 일.미교섭안을 만들어 미국측에 제안하였으나 태평양전쟁 개전시까지 받아들여진 것은 거의 없었다. 미국측의 주장은 미국국무장관 헐의 이름을 딴 헐 4원칙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 4원칙은 마쓰오카외상 시절에 미국측이 제시한 것으로 시게노리 취임 이후에도 근본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4원칙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미 .일양국 및 다른 국가의 영토보전, 주권존중
2. 내정 불간섭
3. 상업상의 기회균등.평등의 유지
4. 평화적수단에 의한 이외에는 태평양의 현상을 변경하지 않는다.
이들 조항에 대한 대응에 일본정부는 곤혹스러워했다. 1.은 일본군의 중국침략이 문제가 된다. 만주국의 승인도 미국으로부터 얻지 못한다. 2.는 蔣介石정권에 대항하는 汪精衛 남경괴뢰정부의 존립이 부정된다. 3.에서는 애써서 점령한 지역에서의 일본 경제활동에 특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4.에서는 독일과 미국이 전쟁을 하는 경우, 일본은 삼국동맹에 근거하여 태평양지역의 미군기지를 공격하지 못한다.
이상의 4원칙을 일본이 수용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일본의 영토확장정책의 전면적인 방기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일본정부로서는 도저히 승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미국과 적대하면 석유,철제품등의 수입을 금지당하여 경제도 군비도 파탄되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결국 미국은 태평양전쟁 개시전까지 4원칙을 고수하였다.
시게노리의 외상취임 전인 7월28일 일본군은 남베트남에 진주를 개시하였다. 일본경제는 석유를 비롯한 천연자원을 모두 미영블록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급자족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이에 미국은 격노하여 지금까지의 미일교섭은 남방침략의 준비가 될 때 까지의 모략이라고 비난하여 7월말 재미 日本資産凍結令을 발포하고 8월 1일에는 석유의 對日輸出許可制를 실시하였다. 사실상의 禁輸였고 영국과 네덜란드도 이에 따랐다. 일본은 완전히 石油를 수입할 수 없게 되었다. 정부도 군도 명백하게 당황하였다. 미국이 이 만큼 강경한 조치를 취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일본요인들은 미국측이 일본을 노하게 하면 전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했으나 커다란 판단착오였다. 내각회의에서 군부는 하루라도 빨리 대미개전을 하자고 촉구하였고 시게노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전쟁만은 회피하려고 노력을 하였고, 주미대사를 통한 미국과의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당시 시게노리가 군부에 제시하였던 자료에는 일.미의 광공업생산력의 차가 1대76 이었다.
결국에는 모든 교섭도 실패로 돌아가고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眞珠灣 습격으로 太平洋戰爭이 발발하게 되었다. 일. 미관계가 전쟁으로 발전할 때까지의 과정은 단기간의 일도 아니며 멀고도 깊은 근원이 있었던 것이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일본의 대륙진출에 따른 마찰이 근본적인 출발점이었다. 러 .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남방침략이 일본으로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피치 못할 전쟁이었다고 주장하였지만, 이 전쟁들은 결국 이 지역에 자신의 이권을 갖고 있는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는 결과가 되었고 또한 이대로 일본을 방치하였다가는 미국도 위험하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미국은 갖고 있었다. 또한 전후에 밝혀진 바이지만 미국은 일본의 통신내용 도청등 일본의 모든 전투행동을 체스판과 같이 들여다보며 전쟁대비를 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은 이미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것임을 알고 있었고 일반적으로 적의 선제공격을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일은 아니지만,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일본이 선제공격을 하도록 함으로써 미국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11월26일의 두 번째 <헐 노트>라는 것이 일본측으로선 도저히 승낙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 아래 발송되었고, 교섭을 결렬시키고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었으며, 아울러 이 공문이 시기적으로 일본이 먼저 싸움을 걸어오도록 연구하여 작성된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고 시게노리는 1942년 9월 외상을 사임하고 귀족원의원이 되었다. 시게노리는 1차 외상재임시절 미국과 일본의 국력차를 냉철하게 인식하고 나름대로의 경험과 식견에 입각하여 무지하고 호전적인 군부를 상대로 하여 끊임없이 전쟁방지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군부의 완강한 자세와 미국의 내부적인 전쟁불가피 정책에 부딪쳐 부득이하게 대미개전에 대하여 찬성표를 던지게 되었다. 거대한 파도를 거스를 개인은 없는 것이었다.
5. 제2차 외무대신 (1945.4.9-1945.8.1)
스즈키 수상이 외상취임을 부탁했을 때, 스즈키는 태평양전쟁이 2-3년은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시게노리는 1년 이상은 힘들다는 견해 차이를 보여 취임을 유보했으나, 주위의 간곡한 취임부탁과 스즈키와의 재차 회동에서 스즈키가 ‘전쟁전망은 당신의 생각이 맞을 것이며, 외교는 모두 당신 생각대로 수행하라’는 사실상의 백지수표를 받아 외상에 재차 취임하게 되어 항복시까지 재임하게 되었다. 시게노리가 취임시 마음에 품었던 목표는 첫째 천황제 유지, 둘째 연합국과의 강화조건 협상시 가능한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의 체결, 셋째 조속한 항복선언 등을 들 수 있겠다.
천황제 유지에 관한 시게노리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패전이 되면 노동자 민중의 세력이 커질 것이 명료한데 일본의 천황제는 어떤 경우라도 옹호해야 한다. 독일과 러시아의 혁명에서는 모두 황실이 몰락했다. 일본도 패배하는 날에는 똑같은 위험이 없지 않다. 소련 뿐만 아니라 미국도 황실이나 왕실을 전 세기의 유물로 보아 경멸하고 그것이 제국주의의 근원이라는 오해에서 터무니없는 요구를 할 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시게노리는 연합국과의 講和協商時 제1차대전 때 독일의 화평수준정도는 확보하고 싶었다. 일본의 산업만은 8천만 국민을 위해 확보하고 싶었고, 배상도 독일과는 다르게 적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군부지도부는 강화협상시 종전 시점의 일본점령지의 유지등 터무니없는 주장을 계속하였다. 한편 조속한 降伏宣言을 이루어 내겠다는 결심이었다. 1945년에 들면서 미국의 공습은 더욱 맹렬해져서 교통과 생산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고, 일본의 전력은 급속히 감소했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은 군부와 정부의 감언이설과 조작된 전황유포로 인하여 아직도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고 믿고 생활의 곤궁을 참고 있었다. 군부는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세뇌공작을 통하여 아직도 승리할 수 있으며 최후의 순간에는 본토결전을 통하여 전 국민이 옥쇄하자는 등 선전선동을 일삼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오키나와 함락, 原爆投下 등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지만 시게노리의 조속한 전쟁종결에 대한 신념과 확실한 투지가 없이 군부의 일방적인 주장대로 종전이 지연되었다면 연합국의 본토상륙으로 피아간에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강화조건협상시 미국은 일본에 천황제를 유지시키는 것이 일본국민을 분열시키지 않아 군정에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앞으로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미국에 유리할 것이라고 보아 연합국들을 설득하여 존속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조기 항복선언을 둘러싸고는 군부 중간간부들의 쿠데타 설등 군부 강경파의 집요한 항전주장이 있었으나, 시게노리의 신념에 가득찬 설득으로 그들을 조기항복 선언에 동참시켜 천황의 항복선언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태평양전쟁 개전시와 종전시의 두 차례에 걸친 외상 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IV. 맺음말
시게노리가 1912년 30세의 나이로 외교관에 임명되어 1945년 사임할 때까지의 33년간은 세계나 일본이나 시게노리 개인에게 있어서는 疾風怒濤와 같은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를 시게노리는 百折不屈의 정신으로 관통하며 살은 것이었다.
부임하는 국가마다 그 나라의 정치.경제.군사.상황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도 연구하여 그 나라의 근본을 파악하였으며 외교 상대방에 대하여는 온유하며 강직한 태도로 일관하여 항상 일본의 국익우선의 입장을 취하였던 것이다. 특히 소련대사 재임시절 스탈린의 실세 부하였던 몰로토프와 깊은 인간적 관계를 맺어 협상이 실패하였다면 국교단절로도 이어질 수 있었던 어업협정이나 노몬한 사건을 해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시게노리의 소련대사이임 송별연에도 이례적으로 몰로토프가 참석하여 시게노리의 짧은 소련대사 시절의 업적을 칭송하고 이임을 아쉬워했던 것이다.
몰로토프는 “당신만큼 자국의 이익을 열심히 옹호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당신은 훌륭한 외교관이며 정치가이다. 인간적으로 존경한다”고 말하였다. 가족들에게는 자애넘치는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시게노리는 공무에 임하여 천하국가의 대사를 논하고 실행할 때는 발군의 두뇌를 구사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교섭능력을 발휘했다. 강한 의지와 왕성한 의욕, 엄격함은 교섭 상대방은 물론이고 자신의 부하조차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시게노리의 대인관계는 아첨이나 파벌조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상대방을 훌륭한 인물로 인정했으며 만나는 과정에서도 근심을 나눌 인사를 발견한 것처럼 대했다. 그래서 官.政.軍.財.言論界등 각계에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발군의 두뇌와 과묵함, 완고함, 인내심, 호기심, 소박함, 책임감 등을 시게노리의 특징으로 들고 있다.
그는 시종일관 3국동맹,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지만 광신도화된 군부에 맞서 그 혼자의 힘으로 반전시킬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속에 떠밀려 들어간 일엽편주와도 같은 신세였다.
태평양전쟁 개전에 임박하여 외무성선배인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그에게 사표를 권유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사표를 내면 내각이 동요하여 개전을 멈출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사표를 내지 않았다. 전쟁은 더 이상 피할 수 없고 마지막 순간까지 전쟁회피노력을 하고 개전이 되면 하루라도 빨리 전쟁종결을 위해 일하는 것이 남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사표를 냈으면 개전시의 외상이었다는 이유로 極東軍事裁判에서 A급 戰犯 판정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신상의 안전을 위하여 좌고우면하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그가 처한 입장에서 평화를 위한 최선책을 찾는데 몰두하였다.
결국에는 전범으로 몰려 스가모형무소에서 복역 중 병으로 인하여 일본의 미육군병원에서 병사를 하게 되었지만 자기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다가 간 것이었다. 결국 朝鮮人 출신이라는 한계가 있어서일까, 사후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미미했고 그의 本家에 1998년 세워진 기념관에 대해서도 일부 정당과 방송매체가 ‘공공기관이 전범을 미화하는 시설을 건립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점등을 보면 일본국민들의 태생적인 섬나라 근성에서 오는 협소한 시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박평의를 비롯한 선조들은 도자기를 만들어 일본에 공헌하였고 시게노리는 평화주의자로서 삶을 관철하였고 외교로써 일본에 공헌하였다.
<주>
1)격동의 세계사를 말한다, 東鄕茂德 저, 김인호 역, p67
2)같은 책, p94-95
3)같은 책, p109-113
4)도고 시게노리, 아베 마키오 저, p217
<참고문헌>
1)東鄕茂德 저, 김인호 역. <격동의 세계사를 말한다> 서울 학고재,2000
2)아베 마키오 저. <도고 시게노리> 동경 학양서방, 2000
3)김충식,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외상 도고 시게노리, 신동아 2005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