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집사는 콧노래를 부르며 집 안 청소를 하였다. 오늘은 구역예배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시간이 갈수록 무질서해진다. 설거지하지 않으면 오물이 쌓이고 청소를 안 하면 먼지가 쌓인다. 청소하면 모든 것이 산뜻해진다. 청소는 이 집안에 사람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녀는 전에는 구역예배를 싫어했다. 교회가 사람을 귀찮게만 안 하면 다닐 만한데 교인들을 꽁꽁 교회에 묶어 놓으려 한다. 성수 주일을 하라고 한다. 새벽기도, 수요기도, 중보기도, 교회 청소, 구역식사 당번, 여전도회 월례모임, 각종 수련회, 부흥회, 심방, 꽃놀이, 단풍놀이, 거기다가 매주 구역예배….
신 집사는 교회가 싫증 날 때가 있었다. 아예 모든 행사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런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데 자기만 빠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다른 것은 빠지면 그만이지만 이 구역예배는 순서를 정해 각 집을 돌아가면서 모이는 것이어서 빠질 수도 없었다. 안 나가면 전화를 하고 데리러 오고, 이건 소령을 모시는 공산당 조직보다 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총회 구역 공과 책을 읽고, 인도자의 시답잖은 성경 말씀을 듣고 있어야 하는데 아예 헌금만 걷어 가고 그것으로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것 때문에 얼마나 하루 계획에 차질이 오며,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가? 그러던 신 집사가 이 구역예배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아가 기다리게 되었다. 몇 년 이렇게 하다 보니 구역예배 인도자까지 되어서 이제는 안 나온 사람에게 독려 전화까지 하게 되었다.
구역예배란 똑같은 삶을 되풀이하고 의미 없이 사는 것에 새바람, 성령을 불어넣어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죄와 사망의 법’이 죽은 것이라면 ‘생명의 성령의 법’은 교회 생활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오늘은 윤 집사가 찬송을 준비해 올 차례였다. 처음 윤 집사는 자기가 찬송 테이프를 준비해 왔으니 휴대용 녹음기로 음악을 들어가며 찬송을 하자고 제안했었다. 이 때문에 반주가 없어 낮은음으로 즐겁지도 않게 부르던 찬양이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반주가 있었고 전문인이 부르는 찬양을 따라 하게 되니 모두가 찬양 대원이 된 것처럼 기뻤다. 이것이 이제는 발전해서 TV가 응접실에 있는 집에서는 노래방에서처럼 영상 음악으로 바뀌었다. 화면에 나타나는 배경을 보면서 찬양하는 것은 은혜스러웠다. 신 집사는 이때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물 흘러가는 대로 두지 말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생명력을 느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자 구역예배에 관한 생각이 바뀌고 수동적인 혐오감에서 능동적인 기쁨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분위기가 바뀌자 구역공부도 듣는 공부에서 각자 말씀을 적용하는 간증으로 바뀌었다. 누구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각자 말씀 가운데 깨달은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기다려지는 것이었다. 기쁨을 나누고 슬픔을 나누며 합심 기도도 하였다.
이날의 공부는 사도행전 9장 후반부 베드로의 선교여행에 관한 것이었다. 룻다에서 애니아라는 8년 된 중풍 병자를 고친 이야기와 욥바에서 죽은 다비다를 살린 이야기인데 이번 구역예배에서는 거기서 무슨 적용이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였다. 신 집사는 이 말씀을 읽고 무슨 깨달음을 말할 수 있을 것인지 기도하면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자기가 한심스러웠다. 고백할 죄는 없는가? 약속의 말씀은 없는가? 피해야 할 행위는 없는가? 명령의 말씀은 없는가? 따라야 할 모범은 없는가? 어떤 하나님이신가? ……. 그러나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신 집사는 공부하는 동안에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하리라고 생각했다.
구역원들이 모였다. 그리고 찬양 후 말씀을 보기 시작했다. 다비다는 어떤 여인인가? 죽은 다비다의 다락에 모인 모든 과부는 어떤 상태에 있던 사람들이었는가? 신 집사는 베드로의 능력만 생각했지 다비다의 다락에 모인 과부들은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곡식 밭에서 이삭을 줍고, 수확하다 남긴 감람나무 열매와 포도 열매로 연명해야 하는 참 과부들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고 매 삼 년에 한 번씩 십일조를 드릴 때 레위인에게 주는 일부를 얻어 사는 인생의 밑바닥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었다. 수입원이 없던 모든 과부가 다비다가 지어준 속옷과 겉옷을 베드로에게 보이며 울고 있던 장면을 상상했다. 다비다가 죽음으로 그들의 소망의 근원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는 위로받고 살던 그들의 일생을 끝났다. 그런데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는 베드로의 음성에 다비다가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생수 같은 기쁨이 과부들에게 넘쳤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깨달음이 왔다. 사람의 눈으로 보아서는 소망이 없는 곳에 하나님께서는 생수 같은 기쁨과 소망을 주신다는 것이었다. 신 집사가 말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몇 년 전부터 우리 생계가 어려워 우리 딸애에게 교회에서 장학금까지 주신 것 아시지요?"
모두 신 집사를 쳐다보았다.
"우리 딸애가 지난주에 대학 졸업도 안 했는데 스카우트 제의가 왔어요. 하나님께서 침체한 우리 가정에 소망을 주신 거예요. 이건 다비다가 일어난 것만큼 충격적인 기적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기적은 일어나고 있어요."
모두 그녀를 축하하였다. 그러자 구역에서 가장 어린 유 집사가 수줍은 듯이 말했다.
"저도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요.”
"뭐 또 좋은 일이 생겼어요?"
"제가 7년이 되기까지 어린애가 없어 언니들이 기도해 주셨잖아요."
"그래 어린애가 생겼구나."
"그래요. 아직 조심스러워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거든요."
"그 좋은 소식을 왜 말하지 않아. 우리의 기도 제목이 응답받은 것이잖아."
구역원들은 할렐루야를 외치며 좋아했다. 그리고 누가 시작한 것도 아닌데 찬양이 시작되었다.
내게 샘솟는 기쁨/ 내게 샘솟는 기쁨 /내게 샘솟는 기쁨/ 넘치네 ….
구역예배는 즐거웠다. 그들에게 구역예배는 생수의 근원이었다.
다음 주일 교회에서 오후 예배가 끝나고 만났으면 좋겠다는 담임목사의 전갈을 받았다. 그러지 않아도 만나서 구역예배가 성령 충만하다는 보고하려 했던 차였다. 신 집사는 목사님 방으로 들어가자 상냥하게 인사를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부터 꺼냈다.
“목사님, 우리 구역에 기쁜 소식이 있어요. 우리 구역에 유xx 집사가 임신했어요.”
“그래? 나헌테도 기도 부탁을 했었지. 내가 부부생활을 잘하라고 했지.”
“목사님, 칠 년만이에요. 우리 구역원들의 기도에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기왕이면 이제는 아들 낳게 해달라고 기도해 달래요.”
“그것이 뜻대로 되간디? 기도할 일이 따로 있지.”
“그래도 기도하기로 했어요. 히스기아 왕은 기도해서 15년이나 수명을 연장해 받았잖아요. 하나님은 딸로 예정하셨어도 아들로 바꾸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기로 했어요.”
“신 집사, 내가 왜 신 집사를 부른 줄 알아?”
목사는 언제나 반말이었다. 그는 신 집사에게 세례를 준 나이가 많은 분이기도 했다.
“우리 구역 소식 물어보려 부른 게 아니었어요?”
“내가 다음 주부터 수요 예배 후 구역장 교육을 하겠다고 광고한 것 들었지?”
신 집사는 분위기가 바뀐 것을 보고 놀라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우리 구역원들이 마음대로 이름 있다는 목사의 구역예배 교안을 사서 쓰기 때문에 내가 일 년 목회계획을 세우고 설교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어. 말씀은 아무렇게나 풀어 가르치는 것이 아니야.”
“그래서 어떻게 하시려구요?”
“말씀은 누구나 함부로 해석할 수 없으며 신학교를 나온 전도사나 교역자의 몫이야. 그래서 나는 강대상에 누구나 세우지 않잖아? 구역예배도 마찬가지야. 이제부터는 구역예배를 내가 설교한 내용을 교안으로 다시 곱씹어 생각할 수 있도록 가르치려고 해.”
“목사님, 그러나 말씀은 어떤 특수계층의 전유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단이 생기는 거야. 달리기를 향방 없이 하면 되겠어? 우리 교인은 모두가 내 목회 방향을 따라 일심동체가 되어야 교회는 바로 서고 마귀를 대적할 수 있단 말이야.”
“목사님도 교회에서 수령 되고 싶으세요?”
“신 집사!” 목사는 엄한 소리를 쳤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구역 인도자들을 독려해서 수요예배에 잘 참석 시키도록 해. 알았어?”
신 집사는 풀이 죽어 말없이 방을 나오면서 혼잣말을 했다. “설교를 재탕하면 감동이 생기고, 샘솟는 기쁨이 생기나? 또 하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소멸되는 구나.”
전에는 대표 기도를 하는 장로들을 불러 ‘기도를 길게 하지 말라. 세계를 위해, 국가를 위해, 가난 한 자와 병자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 그것은 다 목회지가 할 것이다. 다만 목회자가 말씀을 잘 전하도록, 목회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기도는 오직 당회장을 돕는 일에 전념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뒤로 기도에 영력이 없어져버렸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