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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국여행동호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기자여우위에
초패왕릉(왼쪽), 조각상(오른쪽 위), 초패왕 미라(오른쪽 가운데), 표범 조각상(오른쪽 아래)
왕릉은 그 깊이가 11미터나 된다.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니 산을 뚫어 만든 왕릉의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무덤 벽이 매우 높아 보이는데 양쪽 벽은 오랜 세월 속에서도 부서지지 않고 왕릉을 지키기 위해 곧게 서 있는 모습이다.
대리석으로 만든 두 마리의 표범 동상이 보인다. 사자산초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흥미로운 위바오(玉豹)다. 보통 무덤에는 생전에 주인이 애지중지하던 보물이나 좋아하던 동물의 형상 또는 사용하던 그릇 등을 함께 매장하는데 표범 동상은 아주 특이한 경우다. 당시 왕이나 귀족이 아무런 연고와 이유 없이 묘지에 동물 형상을 매장했을 리가 없는데 왜 표범 동상이 있는지 그 이유가 지금껏 알지 못해 미스터리라고 한다.
벽마다 출토된 유물들을 사진으로 전시하고 있다. 한쪽에 공예품을 파는 가게를 지나 무덤을 나왔다.
유방에 패해 초패왕의 이름만 역사에 남기고 사라진 항우를 대신해 유방 후손의 분봉 영토가 돼 이렇게 멋진 왕릉을 남겼다고 생각하니 역사라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다. 초왕의 동상과 휘날리는 진군 깃발을 보고 있으니 초한 쟁패의 전쟁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꾸 떠오른다.
2) 난징 南京 곰보에 절름발이 수재가 문장의 신이 된 까닭은
장쑤 성의 수도 난징에 도착하니 이미 어둠이 내렸다. 난징에서 가장 멋진 야경을 보려면 공자 사당 푸즈먀오(夫子廟)가 있는 거리로 가야 한다. 난징 시내를 흐르는 작은 강 이름을 딴 고진회(古秦淮) 패방이 있다.
조명이 빛나는 거리를 지나 옛날 과거시험장이던 장난궁위엔(江南貢院)을 찾았다. 홍등이 2개 켜진 웅장한 패방을 지나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 조각상이 나란히 서 있다. 명나라 시대 문학가로 자가 백호(伯虎)인 당인(唐寅)과 <서유기>를 쓴 소설가인 오승은(吳承恩)이 나온다. 이어 시(詩), 서(書), 화(畫)에 모두 뛰어났다는 청나라 초기 문학가인 정섭(鄭燮)과 청나리 말기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임칙서(林則徐)도 있다. 이들은 모두 이곳 과거시험장에서 급제를 했던 사람들이다.
조각상 뒤로 멋진 궁위엔의 모습이 드러난다. 조명이 반짝이고 홍등도 걸려 있으며 몸체에는 옅은 녹색 조명이 은은한 밍다러우(明達樓)가 화려한 모습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정원이 나타나고 양 옆으로 펄럭이는 깃발이 보이는 즈공탕(至公堂)이 나타난다. 양 끝으로 용머리가 있고 가운데는 잉어비늘이 조각된 리위탸오룽먼(鯉魚跳龍門)이 있는데 과거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넘어가야 한다.
즈공탕 안에는 물고기 등에 오른발을 딛고 왼발은 뒤로 젖힌 채 오른손에는 붓을 들고 왼손에는 연적을 든 쿠이싱(魁星) 조각상이 서 있다. 우두머리 별이라고 하며 북두칠성의 장방형 모양의 첫 번째 별을 말하는데 중국 신화에서 문장의 신이라 불린다.
옛날에 한 수재가 있었는데 총명하고 재주가 비범해 문장을 짓는데 탁월했다. 하지만 생김새는 아주 못생긴 곰보였고 게다가 한쪽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였다. 그는 성장해 향시를 거쳐 드디어 황제 앞에서 최종 면접 시험을 보게 된다.
그의 용모를 보고 심기가 불편했던 황제는 건성으로 물었다. '그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고 하니 '곰보 같은 얼굴은 하늘 모양을 뜻하니 별을 따 바칠 수 있습니다'고 대답했다. 황제가 흥미를 느껴 절뚝거리는 다리에 대해서 다시 물었다. '다리 하나로도 용문을 넘었으니 장원급제입니다'라고 하자 황제는 기뻐했다.
이후 뛰어난 문장을 쓴 그는 황제로부터 '천하제일이라 하기에 아깝지 않다'는 칭찬을 듣고 장원급제의 칙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 못생긴 수재는 승천해 북두칠성의 별이 돼 녹봉과 작위를 주관하게 됐다고 한다. '괴(魁)'자를 나눠보면 생김이 추하다는 의미를 지닌 '귀(鬼)'자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비유하는 말인 재고팔두(才高八斗)에서 딴 '두(斗)'자의 결합이다.
임칙서와 과거장(왼쪽 위), 급제 행렬(왼쪽 가운데), 과거장(왼쪽 아래), 문장 신 쿠이싱(오른쪽)
건물 안에는 과거와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급제한 사람이 말을 타고 있으며 긴 축하 행렬까지 모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각 시대마다 과거제도에 대한 설명도 있으며 급제자의 옷이나 벨트도 있고 책도 있다. 명나라 시대 이후 청나라 말기까지 과거를 거쳐 간 역사적 인물들의 초상화와 그들이 쓴 서예나 책도 있다. 각 방마다 인물들의 밀랍 인형도 있다.
즈공탕 편액 양 옆으로 잉어 두 마리가 나란히 걸려 있다. 중국에서 잉어는 사업의 성공이나 꿈의 실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베이징올림픽 마스코트인 베이베이(貝貝)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으며 길상의 뜻을 지닌 롄녠여우위(連年有餘)에도 잉어가 등장한다. 매해 설날이 되면 살아있는 잉어에게 예를 올리기도 하고 물고기 머리를 먹기도 한다. 쿠이싱 조각상 뒤로 조명에 비친 붉은 잉어 비늘과 노란 머리가 인상적인 모습이다.
난징은 원래 진시황 이래 진링(金陵)이라 불렸다. 진시황이 난징에 와서 보니 배반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다. 진시황 측근이 산의 형세가 금(金)의 기운이 있어서 그렇다고 하며 산 곳곳에 구멍을 뚫어 그 맥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오나라 손권도 이곳에 도읍을 정했으나 멸망했고 태평천국의 홍수전이나 신해혁명으로 탄생한 공화정을 수립한 쑨원과 장제스 모두 실패한 혁명가가 되고 말았다. 명나라는 주원장이 난징에 도읍을 정했지만 베이징으로 천도한 후 276년을 지속했다.
과거 제도는 황제의 관료를 뽑는 방법이며 사대부들에게는 자신의 꿈을 이루는 도구일 것이다. 수많은 선비들이 장난궁위엔의 잉어와 용이 새겨진 문을 넘어 역사의 인물로 거듭났다. 문장 실력을 겨루고 1등이 되려는 경쟁의 공간이니 희망과 좌절이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의 눈물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3) 난징 南京 연꽃 촛불이 도는 물 항아리에 비친 공자
난징 푸즈먀오(夫子廟)는 송나라 시대인 1034년에 건립된 공자 사당이다. 공자를 가리켜 공부자(孔夫子)라 한데서 유래했다. 밤이 되자 사람들의 발길이 더욱 많다.
사당 앞에는 친화이허(秦淮河)가 흐르는데 강변에는 명나라 시대에 세운 커다란 천하문추(天下文樞) 패방이 있다. 패방에서 정문을 바라보면 흰색 돌로 만들어진 반듯한 링싱먼(欞星門)이 보이고 그 사이로 정문인 다청먼(大成門)이 연이어 보인다.
엄숙한 분위기 속으로 조용히 안으로 들어서니 높이가 4미터 18센티미터, 무게가 2.5톤에 이르고 청동 조각상으로는 중국에서 가장 크다는 공자 상이 있다. 화려한 조명으로 빛나지만 아주 장중한 분위기가 풍기는 다청뎬(大成殿)이 보이고 양쪽으로는 이름난 유학자들의 조각 상들이 배열돼 있다.
조각 상 앞 항아리에는 향을 태우고 있다. 화재를 대비한 물 항아리 안에 연꽃을 띄워 놓았다. 연꽃 모양의 촛불이 타오르면서 빙빙 돌아가니 환상적인 장면이다. 공자 조각상이 물 항아리 속으로 반사돼 있으니 더욱 흥미롭다.
잠시 하늘에 떠오른 보름달을 보고 있는데 사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촛불을 더 가져오더니 항아리를 아예 잔뜩 채운다. 손으로 한번 휘저으니 연꽃들이 원을 그리며 돌아가고 건물에서 비치는 홍등이 수면에도 반사되니 오색찬란함 그 자체다.
다청뎬 안으로 들어가니 공자의 화상(畫像)이 걸려 있다. 이것 역시 높이가 4.18미터이고 폭이 3.15미터로 현재 중국에서 가장 큰 공자 그림이라고 한다. 사방 벽에는 옥으로 만든 공자의 행적이 새겨 있다.
동남제일학(東南第一學) 편액이 걸린 문을 지나면 밍더탕(明德堂)이 나온다. 정원에는 시리팅(習禮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높이가 2.55미터, 무게가 4톤에 이르는 청동 종인 리윈다중(禮運大鐘)이 자리잡고 있다. 2.55미터인 것은 공자 탄신 2,550년을 기념해 만든 것. 역시 숫자에 의미 부여를 잘 하는 중국 사람들이다.
밍더탕의 원래 이름은 밍룬탕(明倫堂)이었는데 원나라가 침공해 왔을 때 남송의 명재상인 문천상(文天祥)이 죽을지언정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개명했다. 대부분 공자의 사원 내 학당이름이 밍룬탕인데 이곳은 유일하게 밍더탕인 이유다. 처마 아래의 풍경과 홍등이 나란히 예쁘게 흔들리고 있다. 홍등을 한참 보고 있으니 연하면서도 붉은 듯 선명한 색감이 너무나 아름답다.
밍더탕 안에는 저녁마다 작은 전통악기 연주회가 열린다. 피파(琵琶), 디즈(笛子)와 다셩(大生), 구정(古箏)과 더불어 편종(編鐘) 소리가 한밤의 분위기를 너무나도 감미롭게 바꿔 주고 있다. 각 악기마다 독특한 소리를 가지고 한데 어우러지는 멋진 합주다.
다시 연주가 시작되는데 편종과 함께 편경(編磬)을 함께 연주한다. 물론 세 종류의 종을 치는 편종소리에 약간 묻히긴 해도 자주 볼 수 없는 편경이다. 맑은 소리가 아주 듣기 좋다. 편종과 편경의 합주를 처음 듣게 됐는데 계속 듣고 있자니 은은한 밤의 황홀경으로 점점 빠져들게 된다.
21줄 현으로 튕기는 구정 독주로 달콤한 소리를 퍼뜨리고 있다. 한 꼬마가 신기한 듯 앞으로 나와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현을 소리로 창조하는 아가씨의 두 손, 그리고 현에 집중하고 있는 시선을 바라보며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연주가 조용히 끝났다.
공자상과 연꽃(왼쪽), 푸즈먀오 공연(오른쪽 위), 덩차이(오른쪽 가운데), 친화이허 야경(오른쪽 아래)
푸즈먀오 안에 재미있는 민간예술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나무로 만든 커다란 목직기(木織機)로 직조해 옷을 만드는 것을 윈진(雲錦)이라 한다. 1,500년 전에 도입된 직조 기술로 꽃무늬가 도드라진 귀족이나 왕족 계층이 입던 옷을 수공으로 만든다.
종이와 금빛 철사를 엮어 만든 초롱인 덩차이(燈彩)가 보인다. 용을 비롯 어린 사자, 수박 먹는 저팔계, 병아리 같은 토끼, 금빛 찬란한 연꽃, 등에 꽃 실은 코끼리, 연못에서 노는 새우, 하늘 나는 비행기 등 제목만 봐도 귀엽기 그지 없다.
푸즈먀오 정문 앞에는 친화이허 강물이 흘러가는 아담한 연못이 있다. 송나라 시대인 1029년 하천에 연못을 만들었는데 공자 사당 앞에 있다고 해서 학교 연못이라는 뜻으로 판츠(泮池)라고 불린다. 전체 길이가 110미터에 이르고 용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홍장조벽(紅牆照壁)이다.
홍등을 단 나룻배들이 하천을 오고 간다. 배를 타고 강을 따라 시내를 한 바퀴 돌아 밤배 놀이를 할 수도 있다. 하천 옆 누각 하나가 밤이 되니 더욱 빛나고 있고 하늘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붉은 벽에서 내뿜은 조명이 연못 위에 번져 검붉은 물결을 출렁이고 있는 모습이다.
배 한 척이 다가오더니 다리 아래를 지나간다. 총천연색 조명이 마치 꿈 속의 동화 속 모습처럼 몽환적이다. 다리 옆에는 난징 요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많은 식당들이 줄줄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밝은 조명이 빛나는 바이루챠오(白鷺橋)까지 한 바퀴 돌았다. 다리 아래는 하늘색 조명으로 다리 아래를 감싸고 있고 주변의 연두색 조명과 어울려 빛을 내고 있다.
푸즈먀오 거리는 난징 최고의 문화거리이자 아름다운 야경으로 유명하다. 중국에서 수도였던 도시들이 대부분 그렇듯 역사적 전통을 지닌 다채로운 문화 도시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4) 난징 南京 392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치열한 혁명가의 일생을 회고하다
난징에 가면 반드시 찾아야 하는 곳이 바로 중산링(中山陵)이다. 2006년 8월 한여름에 왔었지만 쑨원(孫文)의 묘지에 인사라도 하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를 주창한 그는 1925년 베이징에서 병사한 후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에 묻혔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쑨원의 무덤에 오르려면 박애(博愛) 패방을 지나야 한다. 이 글자는 쑨원이 쓴 책에서 따 온 것이다. 마침 무슨 행사가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시끄럽다. 하늘로 높이 솟아있는 3개의 문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는데 문으로 들어서면 멀리 어슴푸레 묘역이 보인다. 날씨가 다소 흐려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천천히 걸어올라 가면서 쑨원을 떠올려 본다.
1866년생인 쑨원은 광둥(廣東)성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하와이에서 보낸 그는 서구식 교육을 받았으며 청나라의 부패를 보면서 반청 사상을 지니게 된다. 서양 열강의 침탈을 보면서 반외세 민족주의와 애국 사상을 체득한다. 1894년 자신의 조직기반이 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면서 본격적으로 혁명 운동에 뛰어든다.
'만주족 축출과 중화의 회복', '민주공화국 지향', '균등한 토지 소유'로 요약되는 삼민주의로 큰 호응을 얻게 된다. 1911년 봉기가 터지자 중국으로 돌아와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 대총통에 취임한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를 퇴위시킨 신해혁명으로 공화정을 이룬 것이다.
푸른 하늘을 상징하듯 청색 류리(琉璃) 기와가 덮인 링먼(靈門) 앞에 울긋불긋한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링먼에는 쑨원이 쓴 필체로 ‘세상은 국민의 것’이라는 천하위공(天下為公) 편액이 걸려 있다.
한편,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반혁명 음모로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해 1914년 6월 국민당의 전신인 중화혁명당(中華革命党)을 조직한다. 1915년 쑹칭링과 결혼하고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이 성공하자 소련과 접촉하기도 한다. 1919년 5·4운동 이후 당 이름을 중국국민당으로 개편하고 광동 성 광저우를 중심으로 혁명 운동을 전개한다.
높이 17미터에 이르는 베이팅(碑亭)이 나타난다. 정자 안에는 높이 9미터의 비석에 1928년 당시 국민당 정부 주석이던 탄옌카이(譚延闓)가 쓴 비문이 있다. 당시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자리를 양보했기에 총리(總理) 직위를 써 놓았다. 베이팅을 지나면 멀리 수많은 계단과 함께 지탕(祭堂)의 모습이 드러난다.
중산링 입구(왼쪽 위), 쑨원 묘역(왼쪽 가운데), 찻집(왼쪽 아래), 중산링 전경(오른쪽)
쑨원은 당시 전국을 장악하고 있던 봉건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소련의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과 연합 전선을 구축한다. 1924년 광저우에서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자회의를 소집해 '러시아와 연합' '공산당과의 연합' '노동자 농민에 대한 원조'라는 3대 정책을 확정하고 공산당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한다. 또한 중국공산당과 함께 군관학교를 창설하고 혁명군대의 설립을 위한 기초를 닦기 시작한다.
민족주의를 강화해 외세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위해 군벌들과 전쟁을 치르기도 하는 한편 군벌들과 협력을 하기도 한다. 당시 베이징은 직계(直系)군벌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동북의 봉계(奉系)군벌이 직계군벌을 전복시킨 후 쑨원에게 국정논의를 위해 상경할 것을 요청한다. 이 요청을 받아들여 베이징에 도착했으나 1925년 3월 12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쑨원의 일생을 생각하며 천천히 계단을 걸어올라 묘가 있는 지탕으로 오른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모두 392개나 되는 화강암 계단을 오르려면 꽤 숨차다. 베이징올림픽을 자랑하는 꽃밭이 강렬하다.
지탕에는 민족, 민주, 민권이 나란히 새겨져 있고 그 위에는 ‘세상의 바른 기풍’을 뜻하는 천지정기(天地正氣) 편액이 있다. 지탕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지탕 안에는 원형의 대리석으로 만든 묘혈이 있다. 입구에는 쑨원의 석상이 반듯하게 서 있다. 안에 들어가면 중앙에도 누워 있는 석상이 있다. 석상 밑에 고이 잠들어 있는 쑨원, 하지만 내부는 촬영이 금지돼 아쉽다.
쑨원은 사망하기 전날 3개의 유서(遺囑)에 서명했다. 국사(國事)와 관련해 자신의 혁명이념이 성공할 수 있기를 희망했으며 가사(家事)와 관련해서는 자신의 유품을 모두 20살 나이 차이가 나는 아내 쑹칭링에게 물려주며 혁명유지를 계승해줄 것을 당부했다. 소련에 보내는 유서도 있는데 양국이 협력하여 승리를 거두자는 염원을 전달했다고 한다.
지탕 앞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계단을 올라오고 또 내려가는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기도 하다. 외국인들은 또 무슨 생각을 하며 아이들은 쑨원에 대해 어떻게 배우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해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해 아래로 내려갔다. 조금씩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한여름에도 가끔씩 세찬 비를 뿌리는 곳이라 비를 피할 곳을 찾았다. 마침 박애의 집(博愛之家)라는 찻집이자 식당이 보여 잠시 비를 피했다.
찻집 조명이 유리창 밖으로 내비치고 나뭇가지가 흩날린다. 차분하게 앉아 차 한잔 하면서 쑨원이 살았던 삶을 되새겨 본다. 비바람에도 꿋꿋하게 자라나는 나뭇가지들만 한없이 바라보면서.
그의 치열했던 혁명정신에 비하면 너무나 편안한 분위기입니다.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공산당과도 흔쾌히 손을 잡은 쑨원이야말로 진정한 민족주의자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최종명(중국문화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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