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 주인공 김광주의사의 병원을 중심으로 하고 극의 진행에 따라 시위 현장이 곳곳으로 바뀐다. 도청광장과 금남로 등.
등장인물
할머니 (김원장의 노모)
김원장 (외과병원 원장, 50세)
아내
김박사 (딸. 여의사. 30대)
간호사.
정하사 (예비역. 30대)
차교수 (정신과 교수)
대학수위, 노파, 창녀, 웨이터, 신부 및 계엄군과 기타 시민들.
[장] 1장
어두운 무대. 자정을 알리는 큰 괘종시계가 느릿느릿 열두 점을 친다. 침묵--- 이윽고, "쿵쿵--- " 바람벽에 쇠못질하는 소리. 그것은 마치 죽은 시체의 관 뚜껑에 못질하는 소리 같다. 이어, 간헐적으로 서너 차례 더--- 젊은 여간호사가 희미한 불빛 속에 짜증스럽게 등장한다.
[간호사] (선잠을 깬 듯) 아이구, 내가 못살아. 못산다니까. 한밤중에 이 무슨 지랄발광이랑가! 다른 사람들 잠도 못 자게--- (하품을 하며 소리 나는 쪽을 두리번거린다.)
((잠시 침묵. 다시 못질하는 소리. "쿵쿵" 빠르게--- ))
[간호사] 어허? 점점 더? 또 발광이 났구만. 씨발. 미치고 환장하겄네. 아이구- 또 날궂이 헌다니까---
((다시 침묵- 그리고 잠깐 뜸을 들였다가 또 "쿵쿵" 못질하는 소리--- ))
[간호사] (잔뜩 약이 올라서) 아이구, 속상해. 난 몰라. 아저씨 제발 잠이나 좀 자자구요! (소리 나는 쪽으로 쫓아가며 목청을 돋군다) 아저씨. 아저씨이--- 정이도 아저씨! 정씨 아저씨. 지금이 몇시냐구요, 글쎄?
((이 때 할머니가 총총히 등장. 반대쪽에서는 잠옷 차림의 김원장이 조용히 나타난다.))
[할머니] 시끄럽다. 정자야. 조용히 해라. 병원에 환자들 깰라---
[간호사] 아이구 참, 할머니두- 제가 떠드는 소리에 잠 깨는 것이 아니라구요. 저렇게 정씨 아저씨 때문에. 우리 병원 환자들의 불평 불만이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할머니?
[김원장] 조금 아까 열두시를 쳤으니깨, 벌써 자정도 넘었습니다 어머니. 밤이 꽤 깊었구만요. 허허---
[할머니] (혀를 차며) 쯧쯧쯧. 젊으나 젊은 것이 안됐구나. 안됐고 말고. 성한 정신이 못돼서---
[간호사] 살짝 맛이 갔다니까요. 글쎄, 설 미쳤어요 할머니. 제 정신도 아니고 오락가락한다니.
[할머니] 이런 방정맞은 소리! 그렇게 남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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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질정 없이 하는 법이 아니다. 시끄럽다. 이것아. 입살이 보살인 게야.
[간호사] 어이구, 속상해. 난 몰라아.
[김원장] (가볍게) 허허허--- 윤간호사. 그만 됐다. 아마도 입원실 방에 무슨 못이라도 한 개 빠졌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저렇게---
[간호사] 아니, 멀쩡한 방벽에다 무슨 새삼스럽게 못질이냔 말예요. 못을 쾅쾅 뚜드려 박았다가, 어느 때는 또다시 그것을 뺏다가---
[할머니] 그러게 성한 정신이 못되지. (가볍게) 호호- 아무래도 가슴속에 못이라도 박힌 게야. 말못할 무슨 포한 같은 것이 속속들이 쌓였다든지 말이다---
[김원장] 무슨 그런 말씀을--- 해마다 5. 18이 다가오면 가슴앓이를 하는 것은 우리네 광주에 사는 사람들이지. 쳐들어 왔던 계엄군이겠습니까? 허허허.
[할머니] (금새 비감하여) 허기사 그렇다! 모진 인생들이고 말고- 쯧쯧쯧
[김원장] 어머님. 그만 방으로 들어가서 한숨 눈을 붙이시지요? 자 보십쇼, 어머니? 인제는 조용해질 겝니다.
[할머니] 쯧쯧쯧. 나무관세음보살---
[간호사] --- (손을 대고 길게 하품)
(("쿵쿵-" 다시 못질하는 소리가 이번엔 약하고 조용하게 들린다. 세사람, 멍하니 그쪽을 바라본다.)) (암전)
[장] 2장
((병원 구내의 정원. 수목이 울창하고, 새떼들의 싱그러운 울음소리-))
((케쥬얼 잠바 차림의 정이도가 긴 대빗자루를 가지고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청소하고 있다. 그의 일하는 모습은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열심이고 힘이 넘쳐난다. 간밤의 일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까맣게 잊고, 입 속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혼자서 웅얼거리기도 하고, 또는 휘파람을 불어대기도 하며--- 이윽고, 할머니가 등장하여 멀찍이 이를 지켜본다. 할머니의 뒷짐진 손에는 가느다란 회초리 한 개가 들려 있다. 정하사가 먼저 알아보고.
[정하사] 헤헤헤. 할머니 나오셨어요? 간밤에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할머니] 안녕하지 못혔다.
[정하사] 왜요?
[할머니] 정서방 니놈이 시끄럽게 굴어서---
[정하사] (아무렇지 않게) 제가 언제요, 할머니?
[할머니] 저럼 무심한 것! 제가 했던 일을 지놈이 까맣게 모르고 있으니, 원. 쯧쯧쯧. 그리고 아침 식사는 했느냐?
[정하사] 예, 할머니. 조금 전에 아까, 병원 식당에서 먹었습니다.
[할머니] 그리어. 끼니는 놓치지 말고, 제때에 찾아서 양껏 묵도록 혀.
[정하사] 그러믄요, 할머니. 헤헤--- (꾸벅 절한다) 그러고 참, 할머니?
[할머니] 그래 할 말 있으면 혀봐라. 간밤엔 몇 호실 방에서 잤어?
[정하사] 입원실 3호 방에서요.
[할머니] 3호실에서? 어제 그저께 밤에는 쭈욱-11호실에서 안잤드냐?
[정하사] 아이, 할머니두- 11호실 방엔 응급환자가 들이닥쳤습니까? 그래서 감박사님이 3호실 방을 쓰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요.
[할머니] 감박사라니? 우리 원영이가?
[정하사] 예- 할머니의 손주따님께서요. 그 왜, 광주역 구내에 목포행 화물열차에 뛰어들어 가지고, 자살을 기도했던 30대 여자 환자 때문에 말씀입니다.
[할머니] 아니-젊은 것이 왜?
[정하사] 새각시처럼 젊디젊은 여자가 세상살이가 귀찮았던 모양이죠? 가령 자기 서방놈한테 소박을 맞았다든지, 그리고도 말 못할 사연 같은 것이 많았겠죠-머.
[할머니] 저런 고약한 말버릇이라니! 쯧쯧쯧. 아무리 세상살이가 힘들고 고해일망정, 대자대비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느니라.
[정하사] 헤헤헤--- 그리하여 3호실 빈 방으로 옮겼습지요. 3호실엔 입원환자도 없고, 텅텅- 비어 있으니까요.
[할머니] 그리어. 그건 잘됐다.
[정하사] (자랑스럽게) 그런데, 할머니? 3호실 벽을 보니까요 거-긴 옷걸이가 한 개는 더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습지요. 방바닥에 벌렁 누워서 요리 저리 사방을 둘러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광으로 가서 옷걸이 하나를 찾아내 가지고, 쇠못으로 쾅쾅- 박아뒀습지요. 근사하고 보기 좋게 말씀입니다.
[할머니] 그래, 알겠다. 그런데 그런 일이란, 훤하고 밝은 대낮에 하면 안되나?
[정하사] 헤헤, 밤에 안 오고요.
[할머니] 엊그제 사흘 전만 해도, 그 뭣이냐--- 11호실 방에서도 벽에다가 못질을 안 했드냐?
[정하사] 할머니 그때는요? 그 11호실에 옷걸이가 요렇게 삐뚤어져 있어 가지고, 제가 새재비로 다시 고쳤습니다요. 튼튼하게 새로 못질 혀서 아주 근사하게요--- (사이)
[할머니] 그건 그렇고, 어디? 명함은 니놈 몸뚱이에 잘 간직하고 다니느냐? 우리 김원장님이 준 병원의 명함 말이다.
[정하사] (냉큼 속주머니에서 꺼내 보이며) 예- 할머니, 여그 있습니다. (또박또박 읽으며) "광주시 충장로, 김외과 병원 원장 김광주씨-" 이 명함이야말로 나한테는 진짜 신분증 아니겠습니까?
[할머니] 그리어. 니놈의 그 알량한 주민등록증보다는 훨씬 확실허고 말고-
[정하사] 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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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그러니께, 원장님 명함 잊어 묵지 말고, 잘 챙기도록 혀. 쯧쯧. 오락가락 정신도 온전치 못한 주제에---
[정하사] 예, 할머니. 절대로 명심하겠습니다.
[할머니] 그리고 또, 정서방 자네 회초리 맛 좀 봐야겠다! 요리 손바닥을 내밀도록 혀라.
[정하사] 왜요?
[할머니] (엄히) 어소, 앞으로? 냉큼---
[정하사] ---
((정하사, 다소곳이 어린애처럼 두 손바닥을 펴서 내민다. 그때, 흰 가운의 김박사가 무대 안쪽에서 총총히 지나간다. 정하사, 그녀를 발견하고--- ))
[정하사] (띄엄띄엄) 저어기. 김박사님이 저쪽으로 걸어가는데요?
[할머니] 요런, 또 한 눈을 팔기냐?
[김박사] (멀리서) 호호- 정씨 아저씨가 사고쳤군요. 요번엔 또 무슨 잡손질이죠, 할머니?
[할머니] 너는 알 것 없다. (돌아보지 않고)
[김박사] 정아저씨, 그러니까 조심해야죠. 할머니한테 매 맞지 않으려면--- 호호. (퇴장)
[정하사] (그대로 손을 내민 채) 할머니, 제가 뭣을 잘못했습니까?
[할머니] 저쪽 현관에 있는 철쭉꽃 화분에 물은 누가 줬느냐?
[정하사] 내가요.
[할머니] 그런디 곱게 피어 있는 철쭉꽃들을 왜 죄다 없애 버렸어?
[정하사] 그 꽃들 말입니까? 화분 밑에 떨어진 꽃잎들이 너무도 지저분하고 색깔도 빨갛고 붉은 것이 꼭 빨간 핏물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전부 떼내 버리고 깨끗하게 쓸어버렸습니다요. 빨간 꽃들보다는 파란 나뭇잎들이 더 멋있지 않습니까?
[할머니] 요런 망할 것!
((할머니가 회초리로 그의 손바닥을 여러 차례 내려친다.)) (시나브로 암전)
[장] 3장
((무대 다른 쪽에 "원장실." 하얀 가운에 청진기를 목에 건 김원장과, 차교수가 앞 장면의 모습을 멀리 지켜보고 있다.))
[김원장] 저기- 회초리 맞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게나. 저럴 때의 모습이란 마치 유치원에 다니는 철부지 어린애 같아요.
[차교수] 허허. 얌전하고 다소곳하구만.
[김원장] 그러나 그때뿐이야. 자기 자신의 행동과 잘못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니. 때로는 종아리를 걷어올리고 실컷 맞을 때도 있다네. 그러니까 우리 병원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할머니이고 그 다음으로는 나 정도나 될까---
[차교수] 무슨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모양인가?
[김원장] 알 수 없음이야. 그러고 우리 마누라는 저 사람 대하기를 소 닭 보듯이 처음부터 오불관언이야. 우리 집에 와서 살든지 말든지- 아니, 빨리 내 못냈으면 해요.
[차교수] 그야 저 친구 이력이 5. 18때 "계엄군"이었다는 사실 아니겠나? 우리들에겐 사무친 한이니까 말일세.
[김원장] 물론, 충분히 이해하고 말고 그러고 윤간호사는 간호원대로 정씨아저씨의 눈빛에 소름이 끼친다면서 노골적으로 냉대하고 그래요.
[차교수] 그렇다면 원영이의 태도는?
[김원장] 내 딸년. 닥터 김말인가? 그 애는 인간적인 연민에서인지 그런 대로 잘 대해 주고 있어요. (사이) 그나저나 저 친구를 가만히 지켜보면, 사람은 근면하고 진실한 것 같기도 해요. 그냥 한시를 가만히 있지를 않아. 잠은 입원실 빈 방에서 자고, 끼니는 식당에서 하고 그저 눈에 띄는 대로 쓸고 닦고 허드레 잡일도 거들어 주면서 말야.
((잠시 흐른다. 간밤의 못질하는 소리가 김원장의 환청으로 다시 들려온다. "쿵쿵, 딱딱--- "))
[김원장] (혼잣말로) 저놈의 소리가, 꼭 죽은 시체의 관 뚜껑에다 못질을 하고 있는 소리 같단 말씀이야. 쿵쿵, 딱딱---
[차교수] 뭣을 못질을 해?
[김원장] 으음, 아무 것도 아닐세. 이따금씩 문득, 그 같은 요상한 기분이 마음 속에 연상되고는 해요.
[차교수] 흠- 귀하는 알 수 없는 소리만 지껄이고 있구먼
[김원장] 글쎄, 나만 혼자서 생각이라니까?
[차교수] ---
((차교수,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사이.))
[차교수] 그건 그렇고, 아침부터 나를 찾은 이유가 뭔가?
[김원장] 꼭 물어봐야 되나. 이 사람? 허허허. 차철진 박사, 자넨 정신과 전문의가 아닌가? 젊은이를 좀 관찰해 주게나.
[차교수] 최면술이라도 걸어서 자의식을 한 번 테스트해 보자고?
[김원장] 난들 알 수가 없지. 물어보면 그저, 이곳저곳 서울 강원도 경상도 등지에서 지냈다는게야. 아마도 어느 공사판이거나, 건설 노가다판에서 뜨내기로 살아왔겠지, 머.
[차교수] 작년에도 왔었나?
[김원장] 물론. 올해로 벌써 3년째야. 해마다 5. 18 이맘때가 되면. 바람처럼 불쑥 나타나서 찾아오곤 해요. 그러니까 80년 5. 18때부터 치자면 내리 7년 동안을 아무런 기척도 없드니말일세. 그래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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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3년 전에야 뜬금 없이 나타나서는 도청광장에서 거행되는 5. 18기념식에 참가차로 왔노라고 말씀이야.
[차교수] 광주민주화운동 7주년 기념식에?
[김원장] 그렇다니까-
[차교수] (새삼 피가 끓어오르는 듯) 뭐야? 소가 하늘을 보고 웃을 일이구만. 학살자 가해자로서, 감히 "계엄군" 출신인 주제에? 말도 안되는, 허튼 수작! 나쁜 자식들, 무슨 염치로---
[김원장] 아니, 아니야. 그런 얘기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차교수] (목소리를 높여) 접어두기는 이 친구야? 그 시절 일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소스라치게 벌떡 일어나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아 올라요. 숨도 쉴 수조차 없게 억장이 무너지고 중치가 막히는 일. 도저히 같은 민족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짐승들이라니! 인면수심의 인간 사냥꾼들이야. 하늘과 땅, 천인이 공노하고 피눈물을 흘릴 악몽이고 말고. 5. 18이야말로 통한의 역사요, 우리들 모두의 멍에인 게야.
[김원장] (손사래질을 하며) 통한의 역사? 그래, 안다. 나도 충분히 알고 말고---
[차교수] 이 같은 역사의 매듭이란, 그 죄과를 낱낱이 밝혀서 철저히 인식하고, 민족과 역사 앞에 무릎 꿇고 참회하는 데 있어요!--- (사이)
((이때, 김박사가 등장하여 둘의 얘기를 듣고 있다.))
[차교수] (뱉듯이) 김원장 자넨 부처님 가운데 토막인가? 비단 속 같은 속마음이구만 그려. 더구나 귀하로 말하면 5. 18희생자 유가족이야.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대학생 외아들을--- 그 금쪽 같은 자식놈까지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김원장] --- (새삼스럽게 복받치는 울분)
[차교수] 으흠!- (긴 한숨)
[김박사] 그래요, 차교수님! 선생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끼여든다)
[차교수] 아니, 닥터 김은 언제 와 있었나?
[김박사] 그날 도청싸움에서 죽어간 자는 둘도 아닌 저의 하나밖에 없는 핏줄이었으니까요.
[김원장] 원영이 넌 나가 있거라.
[김박사] (냉정하게) 아버지, 제가 대신으로 말씀드릴께요. 그러나 과거 전력은 어찌됐든 간에 아버지와 저로선 깜짝 반갑고 기쁜 마음까지 들었답니다. 그래서 그냥 우리는 꾹 참고, 정씨아저씨를 받아들이기로 맘먹었지요. 교수님, 그 허술하고 어설픈 행색에다 땟국이 흐르는 옷차림 때문에 인생이 가련쿠나 하는 연민과 동정심이 발동해서였는지도 몰라요.
[차교수] 참, 속들도 좋다!
[김원장] (가까스로) 그리하여 우물쭈물 지내다가는, 며칠 후에는 또 배암 기어나가듯이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고 마는게야.
[차교수] 5. 18 기념식에 참가는 하고?
[김원장] 매양 거짓말- 한번도 식장에 나타나거나 묘지에 찾아간 적도 없어요. 도청광장 기념식장에도 저 망월동 묘소에도---
[차교수] 그건 또 무슨 뚱딴지인가?
[김박사] 선생님 한낱 핑계일 뿐이죠. 머. 막상 때가 되면 무슨 이유가 그리도 많은지. 슬그머니 뒷꽁무니를 빼곤 한답니다. 무슨 머리가 아프고 설사병이 났다느니, 아니면 갑자기 다른 곳에 볼 일이 생겼다느니 하면서. 은근슬쩍 뒤돌아서는 거예요. 엊그제 동생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묘소에 갔을 때만 해도 그래요. 할머니랑 우리 온 식구가 참배키로 했었는데 자기도 함께 나서겠다는 겁니다. 우리들이야 두 말 없이 물로 "오우케이"죠. 그래서 다같이 떠났었는데 막상 묘소 입구에까지 가서는 어느새 또다시 사라지고 말았죠, 머!
[차교수] 아니, 왜?
[김박사] 글쎄, 묘소 입구에 있는 그 꽃집에서 자기도 조화를 한 다발 사 오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린 그런 줄만 알았더니 온데간데 없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끝내 장본인이 나타나지를 않는거예요.
[김원장] (가볍게) 허허허. 가령 무슨 깊은 죄의식 같은 것에 짓눌려 있는지도 모른다니-
[차교수] 으음- 자기 자신도 "진압군" 이었다는 사실이 가해자 의식으로 잠재하고 있거나, 아니면 어떤 불안 심리에 강박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일.
[김원장] 그렇다면 처음부터 여그 광주 바닥엔 나타나지 말았어야 될 게 아닌가?
[차교수] 무슨 소리! 살인 강도인이거나 혹은 범행자들이란 그 범죄 현장을 다시 찾고 싶어한다는 범죄심리학의 초보 지식도 김원장은 모르시는가? 허허허
[김박사] 선생님 그건 그래요.
[김원장] 허허허. (머리를 끄덕이며 미소짓는다)
((이때, 정이도가 긴 막대기의 물걸레질을 하며 들어오고, 뒤따라서 윤간호사가 등장. 정이도는 마룻바닥을 빡빡 문지르며 열심이다.))
[간호사] (불평스럽게) 정씨아저씨, 정씨아저씨! 글쎄, 원장님실은 청소가 끝났단 말예요. 깨끗이 다 청소했어요. 그런데 뚱딴지같이 물걸레질은 또 뭐예요.
[정하사] (자못 진지하게) 윤간호사님. 자- 여그 마룻바닥 봐요? 요 더러운 자국들을--- 아직도 얼룩자국이 덜 지워졌잖습니까?
[간호사] 어디, 어디말예요? 내 눈에는 깨끗하기만 하다!---
[정하사] 헤헤, 무슨 말씀을? 자 여그저그 반점들 봐요? (찾는다) 간호사님 눈엔 요렇게 때묻고 얼룩얼룩 핏자국 같은 점들이 안보인단 말입니까?
[간호사] (놀래서) 뭐요, 핏자국? 아이구 내가 그냥 못살아! 싫어요. 아저씨! 글쎄, 왜 사람을 귀찮게 구느냔 말에요. 제발 밖으로 나가요. 정씨아저씨, 어서 빨랑빨랑---
[정하사] 간호사님. 내가 깨끗하게 닦아 놓을 테니까 염려를 놓아요. 간호사 아가씨는 아가씨 일이나 보고요. 사람 사는 주위 환경이라는 것이 청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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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으면 좋은 것이지. 헤헤--- (다시 걸레질)
[간호사] --- (허리에 양손을 얹고 화를 삭이며 바라본다)
[김박사] (얼른 다가가서) 윤간호사, 그만 됐어요. 그냥 내버려 둬. 자- 우린 나가서, 입원 환자들 회진 준비나 하도록 해.
[간호사] 아이, 속상해. 난 몰라요.
((김박사가 그녀를 데리고 총총히 퇴장한다. 두 사람은 정하사의 하는 양을 한동안 묵묵히 건너다보고 있다.))
[김원장] (이윽고) 어흠-여보게. 정서방! 정하사? (부른다)
[정하사] (그제사 돌아보고) 예? 아이고, 원장선생님이 거그 계셨구만요. 난 또 누구시라고--- 원징님. 마룻바닥을 싹싹 문질러 가지고 지금 제가 깨끗하게 청소하는 중이구먼요. 여기저그 보기 싫은 얼룩자국들이 많아서---
[김원장] 그래 알겠네. 그건 그렇고 정하사 가까이 좀 와 봐요? 요리---
[정하사] 지가요? 뭘 잘못했습니까요?
[김원장] 으음. 아니다. 그냥 요리 와 봐요?---
((정이도 하사는 쭈볏쭈볏, 두 사람 쪽으로 다가간다.))
[김원장] 괜찮아. 어서 요리---
[정하사] --- (겁먹은 표정)
[차교수] (귀엣말처럼) 혹, 대인 기피증이라고 있나?
[김원장] 반드시 그렇지도 않아. 사람들을 약간 꺼릴 뿐이에요.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많지.
[정하사] 망월동에 찾아가 본 적이 없으면 제가 안내해서 함께 모시고 가고 싶어서요. 헤헤. 망월동에 가는 길을 저는 잘 알고 있거든요? 망월동에 안가 본 사람은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할 수도 없고, 사람 된 도리가 아니지요. 머---
((두 사람, 눈길을 서로 마주치며 고개를 갸웃한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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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의 대로변 한낮. 질주하는 차량들의 소음과 "빵빵-" 하는 경적소리- 이런 모습들이 슬라이드 필름으로 무대 호리전트에 크게 비춘다.))
((캐쥬얼 잠바차림의 정이도가 무대 앞쪽에서 두리번거리며 이리저리 왔다갔다 한다.))
[정하사] (소리쳐) 아저씨! 운전기사 양반. 망월동이 어딥니까? 망월동 가는 차가 몇 번이오?
[소리] (그냥 지나쳐 가는 차 소리)
[정하사] (다시 발걸음을 옮겨가며) 운전기사 아저씨, 망월동 방향이 이쪽 맞습니까? 망월동에 있는 5. 18묘지 말요.
[소리] 망월동 가려면 반대 방향이요. 저쪽으로 길 건너가서 타시오.
[정하사] 예? 반대쪽이오? 길 건너 저쪽 말입니까? 헤헤헤.
[소리] 그렇소, 저어- 반대쪽에 있는 정류장에 가서 타란말요.
[정하사] 몇 번 버스입니까? 기사양반?
[소리] (퉁명스럽게) 아- 건너가 물어보면 되제. 뭘 가지고 그래! 아무나 붙들고 사람들한테 물어보란 말여. 광주에서 망월동 모르는 사람은 빨갱이라니께. 허허허.
[정하사] 예- 잘 알았습니다요.
(("부르릉-" 버스 떠나고. 정하사가 두리번거리다가 무대 안쪽으로 길을 건넌다. 그러자, "찌익-" 하고 급브레이크 밟는 소리-))
[정하사] 이크-
[소리] (다른 목소리) 요런 개자식! 니놈 뒈질라고 환장 혔냐? 야- 이 미친 새끼야! 저 밑에 횡단보도가 안보인다냐? 아이고, 씨껍했네. 저 새끼 때문에---
[정하사] (굽신거리며) 헤헤, 아저씨 미안합니다. 내가 조금 바빠서 그럽니다요.
[소리] 뭐시어? 요- 간다구 씹새끼를 그냥 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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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정하사] 기사 아저씨. 망월동 묘지에 갈려면 몇 번 버스를 타야 합니까?
[소리] (화가 나서) 왜? 니놈도 죽고 싶어서 그러냐? 몰라 새끼야. 저쪽에 가서 물어봐라. 잉! 아이고 저런 엉터리 오사리잡놈을 그냥---
[정하사] 잘못됐습니다. 아저씨! 헤헤--- (뒷머리를 긁적거린다. 암전)
[장] 5장
((병원 안채. 할머니의 방. 고요한 밤의 정적 속에 할머니 혼자서 죽은 손자 원식의 사진들을 들여다 보고 있다. 그녀는 사진 액자를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한 동안 계속--- 이윽고 아내가 인기척을 하며 다가온다. 할머니는 그 소리에 얼른 사진틀을 뒤로 감춘다.))
[아내] 어머니, 아직도 안 주무셨어요?
[할머니] 으음, 잠이 안 와서---
[아내] 시방 뭣을 하고 계셨어요?
[할머니] (콧물을 훔치며) 아니다. 아무 것도-
[아내] 요리 내놓으세요. 그 사진틀?
[할머니] 글매 아무 것도 아니라니께 그러내. 원영이년은 병원에서 퇴근했냐?
[아내] 예- 어머니. 진작에 시간 맞춰서. 6시 정각에 퇴근했어요. 자기 신랑 황서방하고 무슨 파티랑가 모임 약속이 있다고 그럼서---
[할머니] 그래, 잘혔다.
[아내] 어머니, 내일 절에 올라가시자면 일찍 주무셔야죠.
[할머니] 염려 마라. 내가 할 일은 내가 알아서 헐테니께--- (사이)
[아내] (가늘게 떨며) 어머님?
[할머니] 왜?
[아내] 그 원식이 사진, 우리 같이 함께 봐요. 어머니! 원식이가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랍니다. 나도 원식이는 할머니의 손주 새끼라고 해도, 제가 낳은 자식 아닙니까? 어머니 우리 함께 봐요. 그렇게 혼자서만 보시고 숨기지 말고---
[할머니] ---
((할머니, 가만히 사진틀을 내놓는다. 두 여인은 사진 속의 얼굴을 말없이 들여다본다. 한동안 길게- 할머니, 부시시 일어나서 창 밖의 어둠을 바라보며,))
[할머니] (담담하게) 후유! (한숨) 늙은 내가 박복한 년이다! 사람의 한 세상 팔자라는 것은 참으로 알 수가 없다니께.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아실까--- 지지리 인간 복도 없다. 전생에 지은 죄업이 수미산처럼 쌓이고, 바닷석같이 깊고 깊은 모양이어. 가만히 돌이켜 보면 백년도 안되는 사람의 한평생에서 생떼 같은 목숨을 두 차례나 잃었으니 말이다. 새색시 젊었을 적 시절에는 젊은 서방님 앞에 보내고 겨우 유복자로 아들 하나를 얻어서 설리 설리 살아왔드니만, 늙은 말년에는 또 손주새끼가 액사허게 총을 맞고 죽어갔으니말여. 이 무슨 청천하늘에 날벼락인고 관세음보살---
[아내] 어머니 그만두세요! 이웃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얘기를 가지고 뭘--- 젊어서 세상 떠나신 시아버님 되는 분께서는 옛날 광주 학생사건 때 일본 헌병대의 모진 고문으로 그만 병사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할머니] (머리를 끄덕이며) 그리어. 그 시절 그 양반은 광주고보 학생 신분이었느니라. 그래 가지고 무슨 '성진회(醒進會) '인가 하는 독서모임에 가입하고 있었는디, 결국은 그 단체들이 만세 사건의 주동자가 됐었지. 에미도 배워서 알다시피 옛날에 그 광주학생 독립운동이라는 것도 처음엔 시시하게 시작됐다는 게야. 그러니께 저 나주와 광주 간을 오고가는 통일열차 안에서 일본 놈 학생이 우리네 조선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붙잡고 '히야까시'를 했노라고 말이다. 호호- 에미는 왜놈 말 '히야까시'가 무신 뜻인 줄 알아?
[아내] 예, 어머니. 사람을 무례하게 놀려대고 희롱하는 것 아닙니까? (사진틀을 안고 다가간다.)
[할머니] 그래, 그래- 그래가지고 참다 못한 우리네 조선 학생과 일본 학생들 사이에 집단 패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단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전국적으로 난리가 터지고 말았어요. "조선독립만세, 독립만세!" 하고--- 그런 북새통에 그 양반은 왜놈 헌병대에 끌려가게 되고, 흉악한 고문을 얼마나 당했던지 그 후유증으로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그만---
[아내] --- (할머니의 손을 잡아준다.)
[할머니] 아무 것도 세상 물정 모르는 새색시 나한테는 느그 남편 저 김원장 하나를 뱃속에다 남겨놓고 말이다!--- (사이)
((멀리서, 홰를 치며 새벽닭 우는소리-))
[할머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는 일. 옛날에 왜정 때는 남의 나라 군대 일본놈이었으니께 그렇다치고 오늘날에 와서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똑같은 내 나라 내 동포의 군대가 그렇게도 무지막지하게 행패를 부리고 난리치다니 원. 쯧쯧- 온 세상이 넋을 잃고 미쳐서 돌아가는 게야!
[아내] --- (사진을 다시 들여다 보며 눈물짓는다)
[할머니] 차라리 그날 밤에 늙은이 내가 도청으로 찾아가서 총부리를 잡고 지켜야만 해. 그렇다면 생떼 같은 우리 젊은 새끼들이 죽지 않고, 나 같은 늙은 헛것이 대신으로 총 맞았을 것 아니냐?
((이때, 쿵쿵- 벽에 못질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내는 사진틀을 끌어안고 두 귀를 막으며 그대로 주저앉는다.)) (암전)
[장] 6장
안채의 거실. 낮.
[페이지] 007
둘 다 흰 가운의 김원장과 김박사가 커피 잔을 홀짝거리고 있으며 아내는 팔짱을 끼고 서 있다.
[김박사] (아버지 눈치를 보며) 아버지 엄마의 생각과 기분도 이해해 주셔야 해요.
[김원장] 그걸 누가 몰라. 시방?
[아내] (단호하게) 여보, 정하사를 지금 당장 오늘이라도 떠나 보내세요! 5. 18이 지난 지도 벌써 10일 동안 아닙니까?
[김원장] --- (다시 한 모금)
[아내] 당신님이 불러서 말씀하구료. 아니면, 원영이 네가 직접 대놓고 말해 버리던지---
[김박사] 엄마 난 자신 없어요. (어깨를 으쓱한다.)
[아내] 아니, 뭣이라고? 너도 아버지 할머니 편이냐 시방?
[김원장] 얼마 있으면, 지놈이 알아서 스스로 떠나겠지. 머. 작년에도 슬그머니 그렇게 사라지지 않습디까?
[아내] 도대체 그 작자가 하고 있는 일이 우리 병원에서 뭣이죠? 무슨 도움이고 보탬이 되느냔 말이에요. 씨잘데없이 여기저기 못질이나 하고, 사람들 성가시게 말썽이나 피울 뿐이지--- -
[김박사] 엄마. 그렇다고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고 무정하게 내쫓을 순 없잖아요?
[아내] (발끈하여) 뭐야 손님? 아니, 정하사가 시방 우리한테 우리 집에 무슨 손님이란 말이냐, 엉?
[김원장] 그야 불청객도 손님은 손님이지. 허허. 어머님 말씀대로 가련한 나그네를 문전축객할 수도 없는 일 아니겠소? 그 인생이 하도 딱하고 불쌍해서 말야---
[아내] (뱉듯이) 당신도 참, 소갈머리도 없군요!
[김원장] 여보, 마음을 넓게 펴고 이해하도록 합시다.
[아내] 참말로 어느 누가 불쌍한 것이지 모르겠군요. 진짜로 원통하고 불쌍한 것은 저것들 진압군 쪽이 아닙니다. 정하사놈이 아니란 말예요. 억울하게 생죽음을 당한 내 아들 쪽이지. 펄펄 살아서 뛰고 앞길이 구만리 같은 자식새끼들이 죽어갔단 말예요. 저런 짐승 같은 자들 손에 매를 맞고 피흘리고 울부짖고, 총탄에 맞아서--- (바르르 떤다)
[김원장] 또 그 소리!--- (돌아선다)
[김박사] 아버지, 커피 다 안 드셨잖아요?
[김원장] 으응, 괜찮다. (슬그머니 퇴장. 사이)
((김박사, 안타깝게 엄마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진다.))
[김박사] 엄마 참아요. 아버지 말씀대로 우리 마음을 넓게 쓰도록 해요. 세상에 어느 누구인들 우리들의 이 피맺힌 한을 모르겠어?
[아내] --- (설움에 울먹인다)
[김박사] (위로하며) 지금은 십년이나 지난 옛날 일이라면 옛일이에요. 그 서럽고 가슴 아픈 일을 누가 몰라? 엄마. 세상 사람들이 그릅디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어 주고 그 죽은 자식새끼는 부모의 가슴속에다 묻는 법이라고- 나도 잘 알아요. 인제 와서 그 원통하고 한스러운 일을 다시금 돌이킬 수도 없잖아요? 엄마 나도 죽은 남동생이 눈앞에 선하고 보고 싶어 미치겠어! 지금도 생시인 듯 저쪽밖에 어디선가 살아있는 것만 같고--- (목이 멘다)
((이때 정이도가 긴 널빤지 판자 쪽을 안고 무대를 가로질러 슬금슬금 지나간다. 김박사가 엄마를 안고 처연히 그를 지켜본다. 이윽고 아내가 딸에게서 빠져 나오며.))
[아내] 진짜로 꼴도 보기 싫구나. 내가 마음을 그렇게 쓰면 안되지 하고 혼자서 생각하다가도 저 먼발치에 정서방 그림자를 보기만 하면 씻은듯이 그럴 마음이 사그라져 버린단다. 어느새 왈칵- 설움이 복받쳐 오르고 미운 생각이 절로 솟아나는 걸 어떻게 하겠니!
[김박사] (끄덕이며) 그래요 엄마.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저런 인생도 우리가 이해하도록 노력하자고요. 아빠 말씀처럼---
[아내] 이해는 무슨?
[김원장] 엄마도 한번 생각해 봐. 그래도 정씨 아저씨 같은 사람은 다르잖아요? 비록 계엄군의 신분이었지만 말야. 똑같은 공수부대 출신들이었다고 해도, 정하사는 조금은 선량한 인간 아닙니까?
[아내] 초록은 동색이지, 머?
[김박사]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아요. 엄마도 그때 직접 눈으로 봤잖아? 우리 병원 앞에 저 충장로 거리에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을 때 말예요. 수많은 사람이 피 흘리고 울부짖고 다치고 그야말로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이었어. 그 많은 부상자들이 우리 병원으로 군복을 입은 채 정신없이 몰려드는 속에서 정이도 하사 저 사람이 불쑥 나타났어요. 다 죽어 가는 시민군 한 사람을 어깨에 들쳐업고 말야. 그래서 결국은 그 젊은이를 죽지 않고 살아나게 했어요. 엄마! 물론 자기 자신도 허벅지에 찰과상을 입은 채로---
[아내] (싸늘하게) 그만둬라. 듣기 싫다!
[김박사] 엄마 그러니까 내 생각은 그래요. 한 계엄군 병사의 따뜻한 인간미와 순수함 같은 것이 아버지와 할머니를 신뢰하게 하고 감동시켰던 것 아닙니까? 그리고 나중에 찾아와서는 아빠한테 이런 말까지 했더랍니다. 자기 자신은 부대 안에서 한낱 운전병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시위대에 세 직접 곤봉을 휘둘러대고 대검으로 마구 찌르고 그러고 또 총질 같은 짓은 하지도 않았노라고---
[아내] ---
((아내는 긴 한숨을 쉬고 입술을 깨물며, 먼 하늘을 본다.))
[아내] (혼잣말로) 이렇게 5월달이 오면. 10년 세월이 엊그제 같이만 느껴지는구나. 따뜻한 새봄이 찾아와서 꽃 피고 새도 울고 만물이 소생하건만 우리 자식 원식이는 어디를 가고 돌아올 줄을 모른다니!
[페이지] 008
[김박사] (다가서서) 그래요 엄마! 들녘에는 불타는 아지랑이 하늘가에선 노고지리 우지짖고 저기 저 아카시아 꽃이라도 그날처럼 봄바람 속에 속이고 있어요. 먼 산의 붉은 진달래와 개울가의 버들강아지하며 하얀 찔레꽃들도 무더기로 피어나고 말야. 저렇게 청명한 하늘 아래에선 강남 갔던 봄제비가 돌아와서 지지배배 반갑게 인사도 나누고 그러고 하루하루가 눈에 띄게 달라지는 저 향기로운 풀꽃과 짙어 가는 녹음들- 봄바람 훈훈하고 햇볕도 따사로운 찬란한 5월인데, 죽은 사람들은 돌아오지를 못해요. 그 차갑고 깜깜한 땅속 깊이 저 너머 망월동 묘지에 꽁꽁 묻혀 있어서 말야---
((잠시 흐른다. 김박사는 커피 잔을 마저 들고 기분을 바꾸려는 듯--- ))
[김박사] 엄마, 내가 얘기 한 가지 들려줄까?
[아내] 뭘 말이냐?
[김박사] 저- 대학병원에 계시는 차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했는데 이야기가 재미있어요.
[아내] 그래 말해 봐.
[김박사] 해마다 이렇게 5월달만 되면 광주 전남 사람들은 무슨 정신질환 같은 것을 앓는다고 그릅디다.
[아내] 그건 또 무슨 소리?
[김박사] 응 그러니까 그 뭣이냐. '5월 증후군' 이래요.
[아내] '5월 증후군'?
[김박사] 말하자면 일종의 히스테리 현상으로서 집단 노이로제 같은 증상 말예요, 엄마.
[아내] 누가?
[김박사] 누군 누구겠수? 호호호 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나 우리들 모든 사람이 전부가 그렇다는 것이지 머.
[아내] 에미는 무슨 뜻인지 종잡을 수가 없구나.
[김박사] 엄마 들어봐요. 그러니까 해마다 5월이 오면 우린 모든 사람들이 한 차례씩 가슴앓이를 심하게 앓게 된다는 거예요. 우리들 모두가 '5월의 가슴앓이'를---
[아내] (오히려 담담하게) '5월 가슴앓이'라고? 그것 말된다. 얘기가 되겠구나. 아암- 그렇고 말고. 애간장이 타고 타서 시커멓게 숯껌댕이 돼버렸으니--- 옛날에 명창 임방울 선생의 〈쑥대머리〉한 구절이 생각나는구나. "막왕막래 길이 막혔으니, 손가락을 피를 내어 사정으로 편지헐까, 간장의 썩은 물로 님의 화상을 그려볼끄나--- " 그래요, 옥중에 춘향이로 말하면, 그래도 그 사람은 어사또 이몽룡이를 살아서 만나 볼 수라도 있었는데--- (긴 한숨)
((정원의 새소리- 안에서 할머니의 부르는 소리.))
[할머니] (소리) 에미야! 에미 거그 있냐?
[김박사] 아, 예 예. 할머니
((두 사람. 몸을 추스른다. 할머니 하얀 소복에 손가방을 챙겨들고 나들이 차림으로 등장한다.))
[할머니] (스스럼없이) 너는 왜 집안에 그러고 있느냐? 병원엔 안 나가보고---
[김박사] 할머니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에요.
[아내] 인제사 점심 요기를 끝냈어요. 어머니.
[할머니] 시장했겠구나. 왜 무신 큰 수술이라도 있었어? 때가 늦었구나.
[김박사] 으응--- 할머니 (과장하여) 야- 우리 할머니 참말 멋쟁이시다! 엄마 안 그래요.
[할머니] (두 팔을 벌리고) 자- 날 봐라? 목욕재계하고 부처님께서도 기뻐하실 것 같으냐?
[김박사] 원더풀! 베리 나이스- 우리 할머니 하얀 소복 차림에다가 마치 천상을 훨훨 날고 계시는 보살님 같으신데요? 호호호 (덥석 껴안는다)
[할머니] 아암- 그렇고말고 호호. 그래야만 내 새끼도 극락 왕생할 수가 있을게야.
[아내] 천도재는 언제까지입니까. 어머니?
[할머니] 연년이 똑같지? 머 5. 18 그날부터서 꼭 보름 동안 아니냐? 그러고 에미야? 내가 오늘밤은 절에서 자고 내일 오후에나 돌아올테니까 그리 알아라.
[아내] 어머니 편하실 대로하세요.
[할머니] 그래 그래. 10년 전에 5. 18 때는 양력으로 5월 스무날이 그해 사월 초파일이었느니라. 부처님 오신날!--- 그날 5월 20일 밤에는 택시와 버스 트럭 같은 자동차 부대가 시위행렬을 일으켰어요. 저 무등경기장 앞에서부터 수백 대의 차량들이 화등장만큼 크게 자동차 불을 밝히고 큰 길을 따라서 금남로 대로까지---
((무대 갑자기 어두워지고, 헤드라이트 차량 행렬이 재현된다. 자동차의 경적과 시민의 함성과 마이크 소리--- "군부독재 물러가라!" "민주주의 만세 대한민국 만세! 민족 통일 만세!" "광주는 살아있다. 민주주의 만세!" 등등. 한동안 계속-)) (암전)
[할머니] (담담히) 그야말로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장관이었제. 길가에 사람들은 너나 없이 모두가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이야. 그러지 시민과 학생들은 저마다 손에 손에 닥치는 대로 쇠파이프와 몽둥이와 화염병에다가 곡괭이 식칼, 낫, 삽 같은 물건을 챙겨 들고 벽돌짝과 돌멩이를 던지면서 계엄군을 향해 나아갔어요. 자기네가 다치는 줄도 모르고---
[아내] (볼멘 소리로) 그만두세요. 어머님! 누구나 알고 있는 얘기를 가지고 새삼스럽게 뭘---
[할머니] 허기사 그렇다. 긁어서 부스럼이지. 머 쯧쯧쯧.
[김박사] 할머니 절에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으면 천도재 끝날 때까지 그대로 계셔도 좋지 머. 집안 걱정일랑 마시구요. 그러고 오며 가며 하실 데 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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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불편할 테니까. 택시 잡아서 이용하도록 해요. 그까짓 교통비가 몇 푼이나 더 든다구---
[할머니] 그래 알았다. 손주 딸년이 할미 생각해 주는 것이 고맙고 기특하구나. 호호---
((이때, 또 널빤지에 못박는 소리. 똑딱똑딱--- 그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아내] (쏘아붙여) 저 인간이 또 무슨 짓거리를 하는 모양이죠?
[할머니] 에미야 신경 쓸 것 없다. 시방 저 뒤뜰에서 정서방이 닭장을 하나 만들고 있어요.
[아내] 뜬금없이 닭장은 또 왜요?
[할머니] 닭장을 짓고 거그에다 암탉을 놓아 기르게 되면 달걀을 많이 낳아서 입원환자들에게도 먹이고 말이다. 정서방이 그런 얘기를 꺼내길래 늙은이가 허락했다.
[아내] (뱉듯이) 당장 집어치우라고 그러세요. 그까짓 달걀 몇 개가 문제입니까? 어머니?
[할머니] 지놈이 좋은 일 하겠다고 보채는데 말릴 수야 없고 말고. 안 그러냐?
[아내] (대들듯이) 그래요. 저 인간이 좋은 일 하는 것이란 오늘밤에라도 당장 내 집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어머니. 제발 말예요. 어머님은 왜 그걸 모르고 계세요. 예에? 어머니께선 며느리 생각은 눈곱만치도 안 하시는 모양이죠?
[김박사] (꾸짖어) 엄마! 지금 왜 이래요. 엉? 시방 할머니한테 시비 걸고 히스테리 부리는거유?
[아내] (뱉듯이) 니 어미 죽고 싶어서 환장하고 실성을 하는갑다!
[김박사] 엄마 참아요. 제발! 아니 쓸데없이 왜 그래요? 그것이 바로 노이로제 현상 히스테리라니까?
[할머니] 그래 안다. 내가 알고 말고- 허지만 어떻게 해! 사람이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느니라. 늙은 할미라고 소갈머리 배알조차 없겄냐? 내 집에 찾아온 나그네를 문전축객 하는 법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정서방 저놈도 속앓이를 하고 있음이 분명해. 니네들은 허기 좋은 말로 사람이 맛이 갔다느니, 살짝 쉬었다느니 해 쌌지만 늙은이는 그렇게만 생각지 않는다. 정신이 오락가락 젊은것이 설 미쳐 가지고 내일 모레 40고개를 바라보는 나이에 장가도 하나 못 들고 말씀이야---
[김박사] 할머니 그만 절에 올라가시도록 해요? 잘 알아서 우리가 처리할테니---
[할머니] 알았다. 그래. (퇴장)
((이 장면 어두워지고 무대 다른 쪽이 밝아진다.))
[장] 7장
((정이도가 톱과 망치 등 연장을 늘어놓고 세워놓은 기둥과 널빤지를 톱질하고 못을 박는 등 일에 열심이다. 그곳으로 김원장이 들어선다. 한동안 지켜보다가))
[김원장] 정하사 자넨 역시 손재주가 좋구만.
[정하사] (무심히) 예? 지금 닭장을 한 개 짓고 있습니다. 원장 선생님.
[김원장] 그래 알아.
[정하사] --- (열심히 톱질. 사이)
[김원장] 좀 쉬었다가 하지. 그래
[정하사] 아닙니다. 빨리 일을 끝마치고 나서는 가볼 데가 있어서요---
[김원장] 어디를?
[정하사] --- (그저 씨익 웃는다)
[김원장] 그래, 망월동에는 갔다 왔나?
[정하사] --- (말없이 머리만 가로 저을 뿐)
[김원장] 왜?
[정하사] --- (다시 작게 못질. 딱딱-)
[김원장] 광주에 찾아와서 망월동 참배를 하겠다는 사람이 번번이 안 가보면 쓰나? 빙글빙글 맴돌기만 하고---
[정하사] 사람들이 잘 가르쳐 주지 않아서요. 사실은 어제도 버스 잡아타고 갈려고 했었는데 그만---
[김원장] 또 허탕을 쳐구만.
[정하사] 헤헤. 그렇게 됐습니다요. (불쑥) 원장님. 저는 아무 잘못도 죄과도 없습니다요? 그 사실만은 믿어 주십시오. 원장님. 5. 18때 전 운전병에 지나지 않았거든요. 선생님. 제가 한말을 원장님은 믿으시죠? 안 그렇습니까? 하나에서 열까지 제가 잘못한 일은 절대적으로 없습니다. 원장선생님, 깨끗합니다여, 저는!
[김원장] 물론- (수긍한다)
((김원장 바지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서 그에게 내민다.))
[김원장] 정서방 이걸 받게나.
[정하사]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 돈입니까요? 며칠 전에 주신 용돈도 여그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원장님 괜찮습니다. 싫습니다요.
[김원장] 자- 아무소리 말고 넣어 둬. 찻삯도 있어야 하고, 먹고 싶으면 설렁탕 같은 먹거리도 사서 들고--- 어서?
[정하사] 예에- 원장님. 이 은혜 백골 난망이로소이다! (꾸벅 허리를 굽힌다.)
[김원장] 그러고 대학병원에 차교수한테서도 연락이 왔어요. 자네를 한 번 병원에서 만나보고 싶다고 말야.
[정하사] 아니 그럼. 환자 취급을 하겠다는 뜻입니까 저를? 저는 환자가 아닙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합니다요. 저 같은 건강한 놈에게 의사선생님의 진찰이 무슨 소용입니까? 원장님. 전 진찰 안 받겠습니다. 그런 짓은 절대로 싫습니다. 싫어요. 싫어!
[김원장] --- (물끄러미 바라본다. 암전)
[장] 8장
((정이도와 광주 시내 방황 장면들. 무대에 슬라이드 필름이 영사되고 그에 따라 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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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전남대학교 교문 앞. 정이도가 학교 앞에서 들어가 볼까 말까 망설인다. 금테 모자의 늙은 수위가 나타나서 퉁명스럽게))
[수위] 여보시오! 댁은 누구요? 아까부터 학교 앞에서 왔다갔다 똥 마린 강아지처럼 서성거리는데---
[정하사]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요.
[수위] 우리 대학교 옛날 졸업생이요?
[정하사] --- (머리를 젓는다)
[수위] 캠퍼스를 구경하고 싶으면 안으로 들어가 보시든지---
((대학생 시위대의 함성 소리--- ))
[소리] "비상계엄을 해제하라!"
"공수부대는 물러가라!"
"민주주의 사수하자!""물러가라! 물러가라!" 등
[수위] 그러자 계엄군이란 작자들이 아무 힘도 없는 대학생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고 군화발로 짓밟고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도망가는 대학생들을 쫓아가서는 인정사정 없이 곤봉으로 뒷덜미를 내려치고 머리가 터져서 피를 철철 흘리고 말씀이야. 지금 와서 생각해도 치가 떨리고 중치가 막히는 일이었지. 그런 무지막지한 짐승 같은 놈들! (암전)
[정하사] ---
((정하사. 귀를 막고 쭈그려 앉는다. 그러자 '주남마을'의 평화스런 시골 풍경 슬라이드다. 이어, 매복하고 있던 공수부대 원들이 등장하여 M-16 소총을 난사한다. 무고한 시민들의 울부짖음과 비명 소리-)) (암전)
((다음, 짙푸른 녹음에 둘러싸인 무등산의 아름다운 자태. 여인의 목소리-))
[소리]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서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김준태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에서 (암전)
((다음, 붉은 저녁노을. 전 광주교도소의 외곽 풍경. 정하사가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바라보고 있다. 한복 차림의 늙은 노파가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다. 지나치다가--- ))
[노파] 젊은 사람이 뭣을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소? 중얼중얼 씻나락 까 묵는 소리를 험서?
[정하사] (놀랜듯) 예?
[노파] 여그가 어딘 줄 몰라서 그래?
[정하사] 아 예에- 알고 있습니다. 할머니. (뒷머리를 긁적인다)
[노파] 옛날에 광주형무소 자리라오. 그러니께 그 5. 18때 말여. 여그서 한바탕 총질이 벌어졌었지. 그래가지고는 젊은 놈들이 서로간에 다치고 죽고 생피를 흘리고--- 그 진압군 부대 허고 우리 시민군들 사이에서--- 시민군의 함성과 불꽃 튀는 총소리가 요란하게 일어난다. 한동아---
[노파] 아이고 모질고 더러운 놈의 세상이제. 머. 내가 눈 딱- 감고 어서 죽어야만 요꼴저꼴 안보고 신간이 편할텐디 말이다. 아이고 불쌍허고 어리석은 것들. 쯧쯧쯧 (암전)
((정하사. 노파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본다. 무대 다른 쪽에 전신주 위에 꽂혀 있는 가로등의 둥근 불빛- 정하사 그쪽으로 간다. 환하게 밤을 밝히고 있는 둥글고 커다란 야간등을 뚫어지게 올려다본다. 그는 숨을 죽이고 한동안 응시한다. 그러고는 앞으로 뒤로 몇 발짝 움직이며 가만히 응시하더니만 눈이라도 부신 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땅에서 돌멩이를 한 개 집어든다. 정하사는 겁먹고 뒷걸음질을 치면서 그 가로등을 향해 사정없이 돌팔매질한다. 쨍그렁- 산산조각 깨지는 가로등--- 경찰관의 다급한 호루라기 소리와 쫓아오는 발소리-))
[소리] 어느 놈이냐! 거그 섰거라. 누구냐, 누구?---
[정하사] 히히- 야 깨소금맛이다. 이놈들아! 용용 죽겠지?---
((정하사 잽싸게 몸을 웅크리고 숨듯이 어둠 속으로 줄행랑친다. 이어, 황금동 유흥가의 밤 풍경. 현란한 오색 불빛과 스피커의 노랫소리. 왁자지껄 여인들의 웃음소리- 창녀 하나가 서성거리는 정하사에게 따라붙는다.))
[창녀] 호호--- 아저씨, 아저씨! 아이 어디가? 딴 집 넘볼 것 없다니께로.
[정하사] --- (붙든 팔을 살며시 뺀다)
[창녀] (다시 붙잡으며) 자, 자 우리 한번 놀다 가요. 내가 끝내 줄테니까. 아저씨 쉬었다가 가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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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몸 풀고 가.
[정하사] --- (머뭇거린다)
[창녀] 진짜여. 나 이래 봐도 긴자꾸라구요. 끝내 준다니까. 호호 보아 하니 우리 아저씨 좆심 좋겠다! 튼튼해. 자- 우리 신나게 한번 놀아봅시다! 안 그래? 호호호---
((그러자 웨이터 서넛이 몰려와서 다짜고짜 그를 구타한다. 주먹으로 치고 발길로 차고 몰매질--- ))
[웨이터] 요놈의 새끼. 맛 좀 봐라! 너 잘 만났다. 니 놈도 5. 18때 진압군이어? 계엄군 새끼! 에이 씹새끼야. 너 같은 개새끼는 뜨거운 맛을 좀 보라니께로---
[정하사] ---
((정하사는 아무런 반항도 없이 얼굴을 감싸쥐고 그대로 주저앉는다. 이어 경찰 순찰자의 요란한 싸이렌 소리--- ))
[장] 9장
((대학병원의 차교수 방. 흰 가운의 차교수와 김원장이 마주하고 있다.))
[차교수] 그래, 그래 알았다 김원장 그렇다면 정신과 치료를 시도해 보자구.
[김원장] 젊은 인생이 가련해서 말야. 오히려 훤한 대낮보다는 야간 중에 증상이 심해지는 것 같아.
[차교수] 대개 정신질환자들은 밤중이 더 위험해요. 불면증에 시달려서 밤잠을 이루지도 못하고---
[김원장] 가만히 살펴보자면 정신적인 외상과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음이 분명해요. 그러니까 어떤 지워지지 않는 끔찍하고 아픈 기억 같은 것. 본인은 물론 단순히 부대 운전병으로 병참지원에 참가했을 뿐이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말야. 그러니까 자기 자신은 한 때 계엄군이었을 뿐 아무런 실수도 죄과도 없다는 게야.
[차교수] 그럴 수도 있겠지. 자신의 상처받은 비밀을 철저하게 위장하면서 겉으로는 거짓부리로--- 어쨌거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음은 자네 말대로 확실하니까. 그렇게 되면 어떤 망상이나 환각 속에서 특별하고 기이한 행동을 하게 돼요. 안절부절못하고 횡설수설한다든지 때로는 엉뚱하게도 과격하고 난폭한 행동을 일삼는다든지---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겪었던 끔찍하고 무서운 체험이나 사건에 대한 과거 악몽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해요. 그러므로 그런 현상을 자연히 기피하게 되고 그 죄책감과 불안감 때문에 심하게 시달리고 말씀이야. 지금 우리는 5월 증후군을 심하게 앓고 있어요. '5월의 가슴앓이'말야.
[김원장] 그래에- 자네의 말뜻을 충분히 알아듣고 말고.
[차교수] 연년이, 해마다 5월이 오면, 우리들이 겪지 않을 수 없는 일종의 집단히스테리 같은 것 말일세. 그러니까 광주 전남 사람들은 무엇엔가 쫓기고 있다는 심정으로 늘상 답답하고 불안해해요. 그리고 또한 알 수 없는 어떤 것에 가위 눌려서, 우울한 기분에 사로 잡혀 있어요. 사무친 한을 품고 죽어간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오늘에 살아남은 자 우리들 자신이 말야. 그것은 곧 우리광주 시민이 "폭도"와 "난동분자"로서 매도당하고 역사에 대한 은폐와 조작이 철저하게 자행되고 있는 마당에, 자기네 혼자서만 어찌어찌 살아 남았다는 죄의식과 자괴감인 게야. 그리하여 한없는 무력감과 좌절과, 어떤 허무감에 시달리고 있어요. 참으로 피가 거꾸로 치솟고 숨이 막혀서, 더는 아무런 언설도 생각도 표현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상황 속에서 겨우 살아 남았다고는 해도 말씀이야.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의 광주란 철저하게 고독과 소외감에 둘러싸여 있고, 납덩이처럼 가라앉아서 무거운 침묵 속에 짓눌려 있을 뿐이라네!
[김원장] 으음--- 짐작하겠네. 그래요. 5. 18에 관한 한 모든 사람의 비극이고 고통이야. 차교수 자네 말대로 역사의 멍에지. 가해자도 피해자도 그러고 구경꾼까지도 다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할 영원한 슬픔과 고통과 멍에!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할 우리들의 화두이고 말고. 10년이 가고 백년이 흘러간다 한들 그저 그냥 세월이 약은 아니란 말야. 결단코 지워지지도 않고 잊어버릴 수도 없어요. 잘못되고 비뚤어진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하고 죄악을 저지른 자는 무릎 꿇고 빌어야 하며, 상처받은 자는 용서와 눈물로써 저들을 끌어안아야 하고--- (사이)
[차교수] 우리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한 젊은 학자는 이런 말을 하더군. 지난 80년에 일어났던 광주항쟁의 5. 18정신은 그 연원과 뿌리가 깊다고 말야. 우리 나라 근대사에서 보면 동학농민전쟁과 일제하의 3. 1운동에서부터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노라고---
[김원장] (어깨를 으쓱하며)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
[차교수] 그렇지가 않아. 요 사람아! 반외세·반봉건의 깃발을 치켜들었던 동학농민전쟁에서부터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외친 3. 1 만세 사건에 이어서 1929년의 광주 학생 독립운동 그러고 8. 15광복과 6. 25전쟁, 4. 19혁명을 거치면서 마침내 광주항쟁이라는 사건이 폭발했노라고 말씀이야. 광주민주화운동의 그 정체성이 무엇인가? 왜정 때의 광주학생사건이 나라와 민족의 자주독립에 있었다면 요번에는 민주주의와 분단극복이야. 모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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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인간적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민주주의와 통일운동!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오늘날 인간사회가 권장해야 할 가장 보편적 가치 중의 하나일세. 그리고 조국통일은 우리의 영원한 명제이자 민족의 운명이야. 그렇다면 광주의 5. 18이야말로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분수령이고 말고, 우리들 모두에게 각자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도록 만든 출발점이요 기폭제란 말야.
[김원장] 여보게, 차박사? 그런 어렵고 복잡한 담론일랑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두기로 하세.
[차교수] 김원장, 내 얘기를 더 들어봐요. 어떤 의미에선 김원장네 당신 집안이야말로, 바로 그 표상이지!
[김원장] 뭐--- 뭐, 무신 표상?
[차교수] 바로 그 표본적인 모델 말일세.
[김원장] 뜬금없이, 무신 뚱딴지 같은 소린가? 허허허---
[차교수] 그러니까 옛날에 당신 할아버지께서는 동학전쟁 때 곳간을 헐어서, 쌀가마니를 보태주고,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공채를 몰래몰래 사들이는가 하면, 군자금까지 지원하신 어른이야. 그 같은 사실은 우리한테도 익히 알려진 역사가 아닌가? 그러고 귀하의 아버님으로 말하자면, 광주고보 학생 신분으로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모진 고문 끝에 요절하신 분이고 말야. 해서 그 젊은 청년학도의 유복자로 태어난 것이 바로 당신님 김원장이에요.
[김원장] (오히려 시큰둥하게) 그만둬요. 듣기 싫네! 나같이 청진기 목에 걸고 피고름이나 짜는 의사놈 한 테는 오불관언이야. 별로 관심 없다니---
[차교수] 그뿐인가? 당신님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아들이 지난 5. 18때는 저 세상으로 훌쩍 떠나 버리고 말았어요. 그런 의미에서 김원장이야 말로, 표본적인 샘플이라는 것이지. 그 모델 케이스 말야.
[김원장] 어림도 없고 당치도 않은 소리! 차교수 당신은 시방 요상하고 황감헌 소리만 지껄이고 있네 그려. 허허허. 아니 도대체 당신 같은 저명한 정신과 닥터께서는 언제부터 그렇게 역사학자로 돌변했나?
[차교수] (들은 체 않고) 그 젊은 사학도는 이런 말도 해요. 자기는 "광주정신"이라는 걸. 한번 연구해 보고 싶다고 말야.
[김원장] 뭐, 뭐--- "광주정신"?
[차교수] 그러니까 "광주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그 개념과 의의를 연구하는 것이 앞으로 그의 학문목표이자 숙제라는 게야--- (사이)
[김원장] 차교수, 나 가보겠네. 그만 주말쯤에 대포나 한 모금 기울이도록 하세.
[차교수] 허허, 그야 좋고 말고- 그건 그렇고, 그 정이란 친구는 어떻게 돼서 당신 병원에까지 연락할 수가 있었나?
[김원장] 허허허 우리 병원의 명함을 한 장 지니고 있었다네. 말하자면 진작에 내가 그 치한테 명함을 줬어요. 혹시라도 무슨 뜻밖에 불상사가 발생할지도 모르잖나? 가뜩이나 정신도 성치 않은 주제에. 그래서 그런지 밤중에 어느 경찰관한테 전화 연락이 왔었지. 그 무슨 황금동파출소라고 하면서--- 그 사람한테서 내 명함을 발견했는데 혹시라도 정아무개란자의 신분을 내가 알고 있느냐고 말씀이야.
[차교수] 큰일 날 뻔했구만! 역시 자네다운 사려 깊은 배려일세 그려. 허허허---
[김원장] (가볍게 한숨. 암전)
((무대 아래쪽에 김외과 진료실. 퉁퉁 부은 얼굴의 정하사가 머리에 흰 붕대를 감고 의자에 앉아 있으며, 윤간호원이 그의 터진 얼굴에 약을 발라주고 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는 김박사.))
((윤간호사는 들고 있던 핀셋을 김박사에게 넘겨주고 총총히 나간다. 김박사는 차분한 손놀림으로 핀셋에 새 약솜을 찍어가며 상처 부위를 여러 차례 발라준다. 사이. 어린애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는 정하사-))
[김박사] (이윽고) 다 됐어요. 자-
[정하사] 김박사님 고맙습니다.
[김박사] 정아저씨. 그러니까 매사에 조심하도록 하세요. 괜히 사건 사고 일으키지 말고-
[정하사] (부시시 일어나며) 헤헤. 여러 가지로 미안함다---
[김박사] 아버지께선 지금 대학병원에 가셨어요.
[정하사] 원장선생님 말씀입니까?
[김박사] (창 밖을 보며) 예- 아무래도 정아저씬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까봐요.
[정하사] 왜요? 김박사님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정신은 멀쩡하다니까요?
[김박사] (가볍게) 호호, 예 그래요. 그러니까 전문의사 선생님께 일차 상담해 보는 것이죠. 정씨 아저씨, 너무 걱정 말아요.
[정하사] 원장님은 참으로 나한텐 은인이시죠! 헤헤. 여러 가지로 따뜻하게 대해 주시고, 친절도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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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베풀고요. 저 같은 놈한테 용돈도 자주자주 주고, 그리고 내 신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요렇게 명함까지도 한 장씩 넣어 주시고요 자- 봐요, 김박사님?
(부스럭거리며 속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려 한다.)
[김박사] 알아요, 그만 됐어요. 호호. 그러니까 언제든지 명함을 잘 간직하도록 해요. 앞으로도 혹시 무슨 불상사가 발생하게 될지 누가 알아요? 물론 이런 좋지 않은 사건은 일어나도 안되겠지만- 호호.
[정하사] 그러믄요 박사님. 헤헤. 앞으로 맹세코 절대 조심하겠습니다요.
[김박사] 그건 그렇고. 한가지만 물어봐요? 길가에 서 있는 가로등을 왜 돌팔매질해서 깨뜨려 버리고 도망을 쳤지요? 그 파출소 경찰관한테서 들었어요.
[정하사] (자랑하듯) 아- 그 일 말입니까? 박사님? 헤헤. 저- 옛날 광주 형무소 자리 뒤에 골목길에서였습지요. 머 훤하고 둥그렇게 서 있는 전보대를 가만히, 유심히 쳐다보니까, 아- 요것이 나를 내려다봄서 희죽희죽 비웃고 있었습니다요.
[김박사] 가로등 불빛이 아저씨를 보고 비웃어요?
[정하사] 물론 입죠. 헤헤- 그래서 나도 열심히 뚫어지게 바라보니까는 아 요것이 이번에는 또, 그 자동차 앞쪽의 큰 헤드라이트처럼 비추더란 말씀입니다. 지난 5. 18때에 그 뭣이냐 금남로의 큰 대로에서 발생했던 그 택시와 보스들의 자동차 시위대 아시죠? 그때 시내 운전사들 수백 명이 일제히 차를 끌고 나타나서 일으켰던 자동차 데모대의 시위 행렬같이 말여. 그러니까 전에는 듣도 보지도 못했고, 참말로 무섭고 아찔하고, 굉장히 놀랠 순간이었습지요. 수 백개의 헤드라이트가 마치 귀신의 눈깔처럼 빛이 나고, 빵빵- 크락숀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동시에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전조등이 그들을 감싸듯이 비추고 귀를 찢는 듯한 요란한 경적 소리와 함성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간헐적인 총소리. 탕! 탕! 잠시 흐른다.)) (암전)
[정하사] (불쑥) 죽은 원식이 대학생은 어디서 희생되었습니까?
[김박사] 새삼스럽게, 그건 또 왜요?
[정하사] (풀이 죽은 듯) 아니, 그냥---
[김박사] 그때 내 남동생은 최후까지 남아서 도청사수대에 끼어 있었어요. 5월 27일 새벽까지--- (입술이 파르르 떤다)
[정하사] 우리 계엄군을 피해서 집으로 돌아와 버렸으면 좋았을텐데---
[김박사] (머리를 저으며) 아마도 그렇게 할 순 없었을 거예요. 분노하는 그 젊은 혈기에--- 내 이웃과 친구들이 짐승처럼 짓밟히고 개처럼 죽어 가는데 나 혼자서만 살아보겠다고 그처럼 나약하고 비겁할 수야 없었겠지요!
[정하사] --- (붕대 감은 머리를 매만진다)
[김박사] 지금에 와서 보면 어느 한편으로 후회스럽기도 해요--- 이렇게 5월이 오면, 문득문득 죽은 동생 생각에 미치겠어요! 그 애 얼굴이 눈앞에 삼삼하고, 정말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랍니다. 시방 금새라도 안집 대문을 밀치고 들어오면서 "누가 배고프다. 엄니이! 뭐, 묵을 것 좀 없소? 점심은 학교 식당에서 가락국수로 때웠는디, 아이고 시장혀라! 누나, 누나? 밥은 말고 뜨끈뜨끈한 찐빵이나 떡볶이 같은 것말여. 헤헤--- (울음을 씹는다. 사이)
[정하사] (대역, 떨리는 목소리) 대장님, 자금이--- 여그 있는 시체는 죽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고 살아있습니다요. 가만히 살펴보니까,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을 뿐이고, 맥박도 희미하게 뛰고 있습니다요. 병원 의무대로 빨리 옮기는 것이---
[장교] 썅- 이놈의 새끼! 이런 바보 멍텅구리, 겁쟁이 같으니라구. 정이도 하사! 정하사 니놈이 대신 죽고 싶어? (권총을 빼서 위협) 임마, 빨랑빨랑 관뚜껑 덮고 못질해 버려. 바보새끼야, 군대는 명령이다! 명령--- (암전)
((이어, 쾅쾅 관에 못질하는 소리 크게 울려온다. 김원장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증오심으로 정하사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을 죄고 발광하듯이 울부짖는다.))
[김원장] 오오- 요런 놈의 개자식! 이런 짐승만도 못한 것. 요놈아, 너는 살인자야. 이 살인자 새끼. 죽어라 죽어. 너 같은 인생은 살 가치도 없다. 이것아 이 저주받을 놈! 뒈져라, 개자식아. 당장 죽어라. 내 손으로 니놈을 죽일 것이다. 죽여버려--- (암전)
[장] 11장
((병원의 원장실. 흰 가운의 김원장과 김박사. 그리고 아내와 윤간호사가 둘러서 있다. 수화기를 들고 있는 김원장. 찌르릉, 전화벨 소리-))
[김원장] (담담히) 예, 말씀하세요. 거그가 어디시오? 김외과병원의 원장이올시다. 예? 광주 밑에 나주경찰서? 그런데요? 예, 정이도란 사람의 신분은 내가 잘 알고 말고입니다. 그러믄요, 허허- (놀랜듯) 예에? 아니, 그것이 확실합니까? 아니, 그렇다면? 예, 예에-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곧 찾아가 뵙지요. 감사합니다. 예, 예에-
[간호사] 원장님, 정씨 아저씨가 또 무슨 사고쳤습니까?
[김원장] (꾸짖듯이) 윤간호사는 잠자코 있거라. (사이) 여보, 정서방이 죽었다는구료. 나주시 가까운 철도에서 자살을 했노라고 말야.
[김박사] (얼굴을 감싸고) 아이, 이를 어째!
[김원장] 죽은 시체 몸뚱이에서 명함 한 장이 발견됐대요. "김광주외과병원 원장"하고 말야. (잠시 혼란스러운 듯. 사이) 여보, 내 말소리를 듣고 있소?
[아내] --- (입술을 깨문다)
[김원장] 그놈도 가련하고 불행한 인생인 게야! (아내에게 다가가며) 아무래도 내가 가서 그의 시신을 인수해 와야겠습니다. 그래서 조촐하게나마, 그의 장례를 치러줬으면 해. 망월동이 건너다 보이는 아늑하고 따뜻하며, 평화롭고 양지 바른 쪽에다가--- (사이) 산 사람을 관에다 처넣고 못질한 것이 어찌 정이도하사 혼자뿐이라고 할 수 있겠소?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못질하도록 시킨 것은 애시당초에 그 우두머리들입니다. 그자들이야말로 책임자이고 원흉이며, 바로 괴수들인 게야. 여보, 인제는 반대 안하겠지! 당신님도 괜찮겠소?
[아내] --- (참을 수 없는 설움)
[김박사] 엄마,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갔어. 정씨 아저씬 가해자가 못되고 한낱 희생자일 뿐이야. 모두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고, 명복을 빌어줘야 해요!
((아내,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의자에 주저앉는다. 그들 모두 스톱 모션-))
((무대 위쪽에 신부가 등장하고 다른 쪽에는 법당의 불상 앞에 앉아 있는 할머니의 뒷모습-))
[신부] 그날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비록 신부의 법복을 입고 있었으나, 총이 나한테 있었으면 그들을 쏴 버리고 싶은 심사를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젊은 학생과 시민들은 물론, 임신 8개월의 꽃다운 새색시하며, 10대의 소년소녀에서부터 중년남자와 나이 많은 늙은이들에 이르기까지, 무자비하게 난자당하고 무참히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계엄군의 만행과 그 참상을 보다 못해, 한 외국인이 이렇게 항의를 했었지요. "당신들은 왜 지금 이런 짓을 합니까?" 그러자, 그 군인이 답하기를 "이곳은 한국입니다. 미국이 아니에요!" 하고 매섭게 쏘아붙이더랍니다. 우리의 정이도하사가 죽을 때까지 망월동을 찾아가지 못한 까닭은 아마도 두 눈을 부릅뜨고 다시 살아날까 봐, 그 죄의식과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대저 저들이 그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하나이다!--- (성호를 긋는다)
((신부의 모습 시나브로 사라지고 할머니는 죽은 영가를 위해 두 손 합장하고 큰절을 올린다. 점점 커지는 목탁과 염불소리--- 할머니의 큰절은 열번 백번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된다. 서서히 어두워진다.))